경은 라자가하 대나무숲의 다람쥐 먹이 주는 곳을 밝힌 뒤, 유행 수행자 왓차곳따가 세존을 찾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절을 올리는 제자의 방식이 아니라 sammodi, 서로 인사를 나누고 반갑고 기억할 만한 대화를 마친 뒤 한쪽에 앉습니다. 아직 출가하지 않은 다른 전통의 수행자라는 신분과 대화의 예법을 보존했습니다. 이 만남은 오랜 논의를 짧게 정리해 달라는 다음 질문과, 뒤에 이어질 귀의·출가·성취의 출발점이 됩니다.
묵상
왓차곳따가 곧바로 논쟁하지 않고 먼저 인사를 나누고 한쪽에 앉는 순서가 어떻게 느껴지나요? 중요한 질문을 꺼내기 전에 관계와 자리를 가다듬었던 경험이 있나요? 떠오르지 않으면 장면만 읽어도 괜찮아요.
왓차곳따가 오랜 대화를 언급하며 선과 불선을 간략히 가르쳐 달라고 청하고 세존께서 답을 시작하십니다.
“저는 오랫동안 고따마 존자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부디 선한 것과 불선한 것을 간략히 가르쳐 주십시오.”
“왓차여, 나는 그대에게 간략히도 가르칠 수 있고, 왓차여, 자세히도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왓차여, 간략히 말하겠다. 잘 듣고 마음에 새겨라. 내가 말하겠다.”
“그러겠습니다, 존자여.” 왓차곳따가 답하자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dīgharattāhaṁ bhotā gotamena sahakathī. Sādhu me bhavaṁ gotamo saṅkhittena kusalākusalaṁ desetū”ti. “Saṅkhittenapi kho te ahaṁ, vaccha, kusalākusalaṁ deseyyaṁ, vitthārenapi kho te ahaṁ, vaccha, kusalākusalaṁ deseyyaṁ; api ca te ahaṁ, vaccha, saṅkhittena kusalākusalaṁ desessāmi. Taṁ suṇāhi, sādhukaṁ manasi karohi, bhāsissāmī”ti. “Evaṁ, bho”ti kho vacchagotto paribbājako bhagavato paccassosi. Bhagavā etadavoca:
맛지마 니까야MN 73 왓차 긴 경 (Mahāvacchasutta)
배경
왓차곳따는 dīgharatta, 오랫동안 고따마 존자와 함께 논의해 왔다고 말하며 선과 불선을 간략히 설명해 달라고 청합니다. 세존은 간략히도 자세히도 설명할 수 있다고 두 가능성을 밝힌 뒤, 이번에는 간략한 방식을 택합니다. “잘 듣고 마음에 새겨라”라는 청취 조건과 “내가 말하겠다”는 예고가 이어지고, 왓차곳따는 아직 제자 호칭인 bhante가 아니라 bho, “존자여”로 응답합니다. 질문·방식 선택·들을 준비·설법 시작의 순서를 지켰습니다.
묵상
오랫동안 대화한 뒤 핵심을 간략히 듣고 싶다는 왓차곳따의 요청이 이해되나요? 지금 복잡하게 느껴지는 주제 하나를 “무엇이 이롭고 무엇이 해로운가”라는 짧은 질문으로 다시 놓아 볼 수 있을까요?
간략한 답의 첫 목록은 마음의 세 뿌리를 서로 맞대어 놓습니다. lobha·dosa·moha는 탐욕·성냄·어리석음이고, 각각 앞에 a-가 붙은 alobha·adosa·amoha는 탐욕 없음·성냄 없음·어리석음 없음입니다. 세 문장마다 불선과 선을 한 쌍으로 말한 뒤 “세 가지 불선, 세 가지 선”이라고 수량을 다시 닫습니다. 불선한 상태를 사람의 고정된 본성으로 부르지 않고, 무엇을 알아 버리고 어떤 반대 성질을 길러야 하는지 여섯 항목으로 분명히 합니다.
묵상
탐욕·성냄·어리석음과 그 없음의 세 쌍 가운데 지금 가장 알아보기 쉬운 하나가 있나요? 마음 전체를 선하거나 불선하다고 판정하지 않고, 한 반응에 어떤 쪽이 나타나는지만 살펴보아도 괜찮아요.
세 뿌리 뒤에는 열 가지 행위의 첫 다섯 쌍이 이어집니다. 몸의 행위인 살생·주지 않은 것 취함·삿된 음행 세 가지와 말의 행위인 거짓말·이간하는 말 두 가지입니다. 각 항목은 “불선하다” 뒤에 바로 그 행위를 veramaṇī, 삼가는 것이 “선하다”는 대칭으로 놓입니다. 같은 동사를 한 번만 말하고 목록으로 뭉개지 않아 다섯 행위와 다섯 삼감의 대응이 보입니다. 수행의 기준은 막연한 좋은 의도가 아니라 몸과 말에서 멈출 구체적인 경계를 알아차리는 데 있습니다.
묵상
다섯 행위 가운데 오늘 말이나 행동을 멈출 수 있었던 한 순간과 가까운 것이 있나요? 잘했는지 채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행동 자체와 그것을 삼가는 선택이 서로 다른 길로 놓인 점만 살펴볼까요?
“왓차여, 거친 말은 불선하고 거친 말을 삼감은 선하다.
왓차여, 쓸데없는 말은 불선하고 그것을 삼감은 선하다.
왓차여, 탐욕은 불선하고 탐욕 없음은 선하다.
왓차여, 악의는 불선하고 악의 없음은 선하다.
왓차여, 그릇된 견해는 불선하고 바른 견해는 선하다.
왓차여, 이와 같이 열 가지가 불선하고 열 가지가 선하다.”
앞의 다섯 쌍에 말의 나머지 두 가지인 거친 말과 쓸데없는 말, 마음의 세 가지인 탐욕·악의·그릇된 견해가 더해집니다. 말의 두 항목은 삼감과 짝을 이루고, 마음의 세 항목은 탐욕 없음·악의 없음·바른 견해와 맞섭니다. 마지막은 dasa를 두 번 써 “열 가지 불선, 열 가지 선”이라고 전체 수량을 확인합니다. 몸 세 가지·말 네 가지·마음 세 가지의 행위 지도가 완성되며, 세존의 간략한 답이 마음의 뿌리에서 구체적인 선택으로 내려옵니다.
묵상
거친 말·쓸데없는 말·탐욕·악의·그릇된 견해 가운데 지금 알아보기 쉬운 하나가 있나요? 억지로 반대 상태를 만들 필요는 없어요. 그 항목이 나타날 때 잠시 멈출 여지가 있는지 살펴볼 수 있을까요?
갈애가 다시 생기지 않게 뿌리 뽑혔을 때 비구가 아라한이며 해야 할 일을 마쳤다고 밝힙니다.
“왓차여, 수행자의 갈애가 버려져 뿌리 뽑히고 야자나무 밑동처럼 되어,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 생기지 않으면, 그는 아라한입니다.
번뇌를 다하고 청정한 삶을 완성했으며, 할 일을 마치고 짐을 내려놓고 참된 목적에 이르렀으며, 존재의 족쇄를 다하고 바른 완전한 앎으로 해탈했습니다.”
열 가지 선과 불선을 밝힌 뒤 세존은 완결의 기준을 갈애의 소멸로 제시합니다. 갈애는 단순히 잠잠해진 것이 아니라 pahīna·ucchinnamūla·tālāvatthukata, 버려지고 뿌리 뽑혀 다시 자라지 않는 야자나무 밑동처럼 됩니다. 그 결과를 아라한, 번뇌를 다함, 청정한 삶의 완성, 할 일의 마침, 짐을 내려놓음, 참된 목적 도달, 존재 족쇄의 소멸, 바른 완전한 앎에 의한 해탈이라는 여덟 표현으로 잇습니다. 한 표현만 대표로 남기지 않았습니다.
묵상
“짐을 내려놓음”과 “할 일을 마침” 가운데 어느 표현이 지금 더 가까이 들리나요? 자신이 그런 성취에 이르렀는지 묻는 질문은 아니에요. 갈애가 다시 자라지 않는다는 비유의 방향만 살펴보아도 괜찮아요.
왓차곳따가 완전한 해탈을 이룬 비구 제자가 있는지 묻자 세존께서 오백보다 훨씬 많다고 답하십니다.
“고따마 존자는 제쳐 두겠습니다. 번뇌가 다하여 번뇌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바로 이 삶에서 스스로 알고 실현해 머무는 수행자 제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왓차여, 그런 수행자 제자는 백 명만이 아니고 이백·삼백·사백·오백 명만도 아니며, 그보다 훨씬 더 많다.”
“Tiṭṭhatu bhavaṁ gotamo. Atthi pana te bhoto gotamassa ekabhikkhupi sāvako yo āsavānaṁ khayā anāsavaṁ cetovimuttiṁ paññāvimuttiṁ diṭṭheva dhamme sayaṁ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tī”ti? “Na kho, vaccha, ekaṁyeva sataṁ na dve satāni na tīṇi satāni na cattāri satāni na pañca satāni, atha kho bhiyyova ye bhikkhū mama sāvakā āsavānaṁ khayā anāsavaṁ cetovimuttiṁ paññāvimuttiṁ diṭṭheva dhamme sayaṁ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ntī”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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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왓차곳따는 세존 자신의 성취는 제쳐 두고 제자에게도 같은 결과가 있는지 묻기 시작합니다. 첫 대상은 수행자이며, āsava의 소멸로 번뇌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바로 이 삶에서 스스로 직접 알고 실현해 머무는지를 묻습니다. 세존은 단 한 명이라는 질문에 백·이백·삼백·사백·오백이라는 다섯 수를 차례로 부정하고 “그보다 훨씬 더 많다”고 답합니다. 막연히 많다고만 하지 않아 출가 남성 제자에게 실제 완전한 해탈이 반복되었음을 밝힙니다.
묵상
한 명이라도 있는지 묻는 질문에 오백보다 훨씬 많다고 답하는 크기의 차이가 어떻게 느껴지나요? 숫자를 자신의 성취와 비교할 필요는 없어요. 가르침이 한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았다는 점만 살펴볼까요?
“고따마 존자와 남성 수행자들은 제쳐 두겠습니다. 번뇌가 다하여 번뇌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바로 이 삶에서 스스로 알고 실현해 머무는 비구니 제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왓차여, 그런 비구니 제자는 백 명만이 아니고 이백·삼백·사백·오백 명만도 아니며, 그보다 훨씬 더 많다.”
둘째 질문은 고따마 존자와 남성 수행자들을 제쳐 두고 비구니 제자에게로 갑니다. 질문의 성취 기준은 앞과 똑같이 번뇌의 소멸, 번뇌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 바로 이 삶에서 스스로 알고 실현해 머무는 것입니다. 문법의 성만 여성형으로 바뀝니다. 답도 백에서 오백까지 다섯 수를 모두 부정한 뒤 훨씬 더 많다고 합니다. 남성 수행자의 사례를 여성에게 자동 적용한 요약이 아니라, 왓차곳따의 별도 질문과 세존의 별도 확인을 온전히 남겼습니다.
묵상
같은 질문과 답이 비구니 제자에게도 따로 반복되는 점이 어떻게 다가오나요? 앞의 답만으로 대신하지 않고 한 무리를 직접 확인하는 태도가 오늘 놓치기 쉬운 사람을 떠올리게 하나요? 떠오르지 않으면 반복의 구조만 보아도 괜찮아요.
“고따마 존자와 남성 수행자·비구니는 제쳐 두겠습니다. 흰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살며, 다섯 낮은 족쇄를 다해 저절로 태어나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고 그 세계에서 돌아오지 않는 남자 재가 제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왓차여, 그런 남자 재가 제자는 백 명만이 아니고 이백·삼백·사백·오백 명만도 아니며, 훨씬 더 많다.”
“Tiṭṭhatu bhavaṁ gotamo, tiṭṭhantu bhikkhū, tiṭṭhantu bhikkhuniyo. Atthi pana bhoto gotamassa ekupāsakopi sāvako gihī odātavasano brahmacārī yo pañcannaṁ orambhāgiyānaṁ saṁyojanānaṁ parikkhayā opapātiko tattha parinibbāyī anāvattidhammo tasmā lokā”ti? “Na kho, vaccha, ekaṁyeva sataṁ na dve satāni na tīṇi satāni na cattāri satāni na pañca satāni, atha kho bhiyyova ye upāsakā mama sāvakā gihī odātavasanā brahmacārino pañcannaṁ orambhāgiyānaṁ saṁyojanānaṁ parikkhayā opapātikā tattha parinibbāyino anāvattidhammā tasmā lokā”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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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셋째 질문은 출가자 둘을 지나 흰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남자 재가 제자에게 갑니다. 이 무리의 결과는 아라한과 같은 두 해탈이 아니라 다섯 낮은 족쇄의 소멸, 저절로 태어남,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 그 세계에서 돌아오지 않음의 네 관계입니다. 세존은 이들도 백·이백·삼백·사백·오백 명만이 아니라 훨씬 더 많다고 답합니다. “재가자”만 남기지 않고 흰옷·청정한 삶·다섯 족쇄·불환의 조건을 모두 보존했습니다.
묵상
출가 여부와 다른 구체적인 성취 기준이 재가 제자에게 제시되는 점이 어떻게 들리나요? 자신의 위치를 판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다섯 낮은 족쇄와 돌아오지 않음이라는 두 표현만 구별해 볼까요?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면서 가르침을 따르고 의심을 건넌 남자 재가 제자도 오백보다 많습니다.
“고따마 존자·남성 수행자·비구니·흰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남자 재가자는 제쳐 두겠습니다. 흰옷을 입고 감각적 욕망을 누리면서 가르침을 행하고 훈계를 따르며, 의심을 건너 망설임이 사라지고 확신에 이르러 스승의 가르침에서 남에게 기대지 않는 남자 재가 제자가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왓차여, 그런 제자는 백 명만이 아니고 이백·삼백·사백·오백 명만도 아니며, 훨씬 더 많다.”
“Tiṭṭhatu bhavaṁ gotamo, tiṭṭhantu bhikkhū, tiṭṭhantu bhikkhuniyo, tiṭṭhantu upāsakā gihī odātavasanā brahmacārino. Atthi pana bhoto gotamassa ekupāsakopi sāvako gihī odātavasano kāmabhogī sāsanakaro ovādappaṭikaro yo tiṇṇavicikiccho vigatakathaṅkatho vesārajjappatto aparappaccayo satthusāsane viharatī”ti? “Na kho, vaccha, ekaṁyeva sataṁ na dve satāni na tīṇi satāni na cattāri satāni na pañca satāni, atha kho bhiyyova ye upāsakā mama sāvakā gihī odātavasanā kāmabhogino sāsanakarā ovādappaṭikarā tiṇṇavicikicchā vigatakathaṅkathā vesārajjappattā aparappaccayā satthusāsane viharantī”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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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넷째 질문은 고따마 존자·남성 수행자·비구니·청정한 삶의 남자 재가자를 제쳐 두고,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는 남자 재가자로 이동합니다. 이들은 가르침을 행하고 훈계를 따르며, 의심을 건너고 망설임이 사라졌고, 확신에 이르러 스승의 가르침에서 남에게 기대지 않습니다. 청정한 삶의 재가자에게 붙은 불환의 네 결과와 섞지 않았습니다. 답은 다시 백부터 오백까지를 부정하고 훨씬 더 많다고 하여 생활 방식이 다른 재가 제자의 성취도 따로 확인합니다.
묵상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는 삶 안에서도 가르침을 따르고 의심을 건너는 길을 따로 밝힌 점이 어떻게 들리나요? 생활 형태를 비교하기보다 “남에게 기대지 않음”이 여기서 무엇을 뜻하는지 머물러 볼까요?
“고따마 존자·남성 수행자·비구니·흰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남자 재가자·흰옷을 입고 감각적 욕망을 누리는 남자 재가자는 제쳐 두겠습니다. 흰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살며, 다섯 낮은 족쇄를 다해 저절로 태어나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고 그 세계에서 돌아오지 않는 여자 재가 제자가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왓차여, 그런 여자 재가 제자는 백 명만이 아니고 이백·삼백·사백·오백 명만도 아니며, 훨씬 더 많다.”
다섯째 질문은 앞의 네 무리에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는 남자 재가자까지 제쳐 두고, 흰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여자 재가자를 묻습니다. “두 부류의 남자 재가자”는 바로 앞에서 각각 온전히 제시된 청정한 삶의 무리와 감각을 누리는 무리를 가리킵니다. 여자 재가자의 성취 기준은 다섯 낮은 족쇄의 소멸과 불환의 네 관계이며, 답은 여성 복수형으로 백부터 오백까지를 부정합니다. 성별만 바꾸어 추정하지 않고 독립된 질문과 확인으로 남깁니다.
묵상
여자 재가 제자의 성취도 같은 수량으로 직접 확인되는 대목에서 무엇이 보이나요? 여러 무리를 차례로 확인하는 반복이 길게 느껴진다면, 이번에는 “한 명이라도”와 “훨씬 더 많다”만 살펴보아도 괜찮아요.
“고따마 존자·남성 수행자·비구니·흰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남자 재가자·흰옷을 입고 감각적 욕망을 누리는 남자 재가자·흰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여자 재가자는 제쳐 두겠습니다. 흰옷을 입고 감각적 욕망을 누리며 가르침을 행하고 훈계를 따르고 의심을 건너 망설임이 사라지고 확신에 이르러 스승의 가르침에서 남에게 기대지 않는 여자 재가 제자가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왓차여, 그런 제자는 백·이백·삼백·사백·오백 명만이 아니라 훨씬 더 많다.”
여섯째 질문은 고따마 존자와 남성 수행자·비구니·두 부류의 남자 재가자·청정한 여자 재가자를 모두 제쳐 두고,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는 여자 재가자를 묻습니다. 가르침을 행함, 훈계를 따름, 의심을 건넘, 망설임이 사라짐, 확신에 이름, 스승의 가르침에서 남에게 기대지 않음의 여섯 성격을 보존했습니다. 세존은 마지막 무리도 백에서 오백까지만이 아니라 훨씬 더 많다고 답합니다. 이로써 출가 남녀와 재가 남녀의 여섯 제자 무리가 모두 확인됩니다.
묵상
여섯 번째 무리까지 같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왓차곳따의 태도가 어떻게 느껴지나요? 자신과 가까운 무리 하나만 보지 않고 다른 삶의 조건에서도 길이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시선을 가져볼 수 있을까요?
세존만이 아니라 비구와 비구니도 가르침을 성취했기에 청정한 삶이 그 점에서 완전하다고 말합니다.
“고따마 존자여, 그대만 이 가르침을 성취하고 남성 수행자들은 성취하지 못했다면 청정한 삶은 그 점에서 불완전했을 것입니다.
고따마 존자여, 그대와 남성 수행자들이 성취했으므로 그 점에서 완전합니다.
고따마 존자여, 만일 … 비구니들이 성취하지 못했다면 불완전했을 것입니다.
고따마 존자여, … 비구니들도 성취했으므로 완전합니다.”
“Sace hi, bho gotama, imaṁ dhammaṁ bhavaṁyeva gotamo ārādhako abhavissa, no ca kho bhikkhū ārādhakā abhavissaṁsu; evamidaṁ brahmacariyaṁ aparipūraṁ abhavissa tenaṅgena. Yasmā ca kho, bho gotama, imaṁ dhammaṁ bhavañceva gotamo ārādhako bhikkhū ca ārādhakā; evamidaṁ brahmacariyaṁ paripūraṁ tenaṅgena. Sace hi, bho gotama, … no ca kho bhikkhuniyo ārādhikā abhavissaṁsu; evamidaṁ brahmacariyaṁ aparipūraṁ abhavissa tenaṅgena. Yasmā ca kho, bho gotama, … bhikkhuniyo ca ārādhikā; evamidaṁ brahmacariyaṁ paripūraṁ tenaṅgena.
맛지마 니까야MN 73 왓차 긴 경 (Mahāvacchasutta)
배경
여섯 무리의 수를 확인한 왓차곳따는 청정한 삶의 완전성을 조건문으로 평가합니다. 첫 단계는 고따마 존자만 성취하고 남성 수행자가 못했다면 불완전하지만 둘 다 성취했기에 완전하다는 대조를 온전히 적습니다. 뒤의 일반 말줄임표 두 곳은 각각 “고따마 존자와 남성 수행자들이 성취했으나”와 “고따마 존자와 남성 수행자들이 성취했고”라는 정확 반복을 줄이고, 새 항목인 비구니의 부정 조건과 긍정 결과를 남깁니다. 양쪽 인용이 같은 범위를 줄이며, 성취한 무리가 늘 때마다 완전성이 다시 확인됩니다.
묵상
한 사람의 성취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남성 수행자와 비구니에게도 길이 열려야 완전하다는 판단이 어떻게 들리나요? 어떤 가르침이 여러 사람에게 실제로 이어지는지를 볼 때 중요하게 여기는 한 조건이 있나요?
청정한 삶과 감각적 쾌락 속의 남자 재가자 각각이 성취해야 완전하다는 두 조건을 잇습니다.
“고따마 존자여, 만일 … 흰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남자 재가자가 성취하지 못했다면 불완전했을 것입니다.
고따마 존자여, … 그 남자 재가자들도 성취했으므로 완전합니다.
고따마 존자여, 만일 … 흰옷을 입고 감각적 욕망을 누리는 남자 재가자가 성취하지 못했다면 불완전했을 것입니다.
고따마 존자여, … 그 남자 재가자들도 성취했으므로 완전합니다.”
Sace hi, bho gotama, … no ca kho upāsakā gihī odātavasanā brahmacārino ārādhakā abhavissaṁsu; evamidaṁ brahmacariyaṁ aparipūraṁ abhavissa tenaṅgena. Yasmā ca kho, bho gotama, … upāsakā ca gihī odātavasanā brahmacārino ārādhakā; evamidaṁ brahmacariyaṁ paripūraṁ tenaṅgena. Sace hi, bho gotama, … no ca kho upāsakā gihī odātavasanā kāmabhogino ārādhakā abhavissaṁsu; evamidaṁ brahmacariyaṁ aparipūraṁ abhavissa tenaṅgena. Yasmā ca kho, bho gotama, … upāsakā ca gihī odātavasanā kāmabhogino ārādhakā; evamidaṁ brahmacariyaṁ paripūraṁ tenaṅgena.
맛지마 니까야MN 73 왓차 긴 경 (Mahāvacchasutta)
배경
다음 두 단계는 남자 재가자의 서로 다른 삶을 하나씩 더합니다. 네 일반 말줄임표는 모두 이미 성취가 확인된 고따마 존자·남성 수행자·비구니의 누적 목록을 줄입니다. 첫 부정과 긍정에는 흰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남자 재가자가 새로 붙고, 둘째 부정과 긍정에는 앞 무리에 더해 흰옷을 입고 감각적 쾌락을 누리는 남자 재가자가 붙습니다. 각 단계의 “성취하지 못하면 불완전, 성취하므로 완전”이라는 인과는 직접 남겼습니다. 생활 방식이 다른 두 재가 무리를 합치지 않아 완전성의 범위가 차례로 넓어집니다.
묵상
청정한 삶의 재가자와 감각적 쾌락을 누리는 재가자를 따로 포함하는 순서가 어떻게 보이나요? 한 생활 방식만 수행의 기준으로 삼았던 적이 있다면, 다른 조건의 사람에게도 열린 길을 상상해 볼까요?
청정한 삶과 감각적 쾌락 속의 여자 재가자까지 성취해 청정한 삶이 완전하다고 결론짓습니다.
“고따마 존자여, 만일 … 흰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여자 재가자가 성취하지 못했다면 불완전했을 것입니다.
고따마 존자여, … 그 여자 재가자들도 성취했으므로 완전합니다.
고따마 존자여, 만일 … 흰옷을 입고 감각적 욕망을 누리는 여자 재가자가 성취하지 못했다면 불완전했을 것입니다.
고따마 존자여, … 그 여자 재가자들도 성취했으므로 완전합니다.”
Sace hi, bho gotama, … no ca kho upāsikā gihiniyo odātavasanā brahmacāriniyo ārādhikā abhavissaṁsu; evamidaṁ brahmacariyaṁ aparipūraṁ abhavissa tenaṅgena. Yasmā ca kho, bho gotama, … upāsikā ca gihiniyo odātavasanā brahmacāriniyo ārādhikā; evamidaṁ brahmacariyaṁ paripūraṁ tenaṅgena. Sace hi, bho gotama, … no ca kho upāsikā gihiniyo odātavasanā kāmabhoginiyo ārādhikā abhavissaṁsu; evamidaṁ brahmacariyaṁ aparipūraṁ abhavissa tenaṅgena. Yasmā ca kho, bho gotama, … upāsikā ca gihiniyo odātavasanā kāmabhoginiyo ārādhikā; evamidaṁ brahmacariyaṁ paripūraṁ tenaṅgena.
맛지마 니까야MN 73 왓차 긴 경 (Mahāvacchasutta)
배경
마지막 두 단계는 여자 재가자의 두 무리를 더합니다. 첫 두 일반 말줄임표는 고따마 존자·남성 수행자·비구니·청정한 남자 재가자·감각적 쾌락을 누리는 남자 재가자의 누적 목록을 줄입니다. 다음 두 곳은 거기에 청정한 여자 재가자까지 더한 여섯 무리를 줄입니다. 새 항목인 청정한 여자 재가자와 흰옷을 입고 감각적 쾌락을 누리는 여자 재가자는 각각 직접 남고, 성취하지 못하면 불완전하며 성취하므로 완전하다는 두 결과도 보존됩니다. 이로써 스승을 포함한 일곱 무리가 모두 가르침을 성취했다는 논증이 닫힙니다.
묵상
마지막 여자 재가자 무리까지 더해야 비로소 완전하다고 닫는 구조에서 무엇이 보이나요? 어떤 공동체의 완전성을 생각할 때 아직 목소리나 성취가 확인되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조심스럽게 살펴볼 수 있을까요?
완전성의 논증 뒤 왓차곳따는 갠지스강이 바다로 ninna·poṇa·pabbhāra, 기울고 향하고 내리뻗어 마침내 닿는 비유로 재가자와 출가자가 함께한 모임이 열반을 향한다고 평가합니다. 이어 공식 생략표 …pe…는 “훌륭합니다”의 반복과, 뒤집힌 것을 세움·덮인 것을 드러냄·길 잃은 이에게 길을 가리킴·어둠에 등불을 듦이라는 네 찬탄 비유를 줄입니다. 그는 고따마 존자·가르침·수행자 승가에 귀의하고 출가와 구족계를 함께 청합니다.
묵상
강이 바다를 향하듯 모임 전체가 열반을 향한다는 비유에서 어떤 움직임이 느껴지나요? 목적지에 도착했는지를 판정하지 않고, 지금 기울고 향하는 방향만 알아보아도 괜찮아요. 특별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도 괜찮아요.
다른 교단 출신의 네 달 유예 규칙을 듣고 왓차곳따가 네 해도 머물겠다고 한 뒤 출가합니다.
“왓차여, 다른 교단에서 온 이가 이 가르침과 규율에서 출가와 구족계를 원하면 네 달을 머문다. 네 달 뒤 수행자들이 만족하면 수행자가 되도록 출가시키고 구족계를 준다. 다만 나는 이 일에서 개인차를 안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저는 네 해를 머물겠습니다. 네 해 뒤 수행자들이 만족하면 출가시키고 구족계를 주십시오.”
왓차곳따는 세존 곁에서 출가와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세존은 다른 교단 출신이 이 가르침과 규율에서 출가와 구족계를 원할 때 cattāro māse, 네 달의 유예 기간을 보내고, 그 뒤 수행자들이 āraddhacitta, 그를 받아들이는 데 만족하면 출가와 구족계를 주는 절차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곧 사람마다 차이가 있음을 안다고 예외 가능성도 밝힙니다. 왓차곳따는 유예를 피하려 하지 않고 네 달보다 열두 배 긴 cattāri vassāni, 네 해도 머물겠다고 답합니다. 서술자는 실제로 그가 세존 곁에서 출가와 구족계를 모두 받았다고 닫습니다. 규칙·개인차·자원·성립의 네 단계를 보존했습니다.
묵상
네 달이라는 조건에 네 해도 받아들이겠다고 답한 왓차곳따의 준비가 어떻게 들리나요? 자신에게 같은 결심을 요구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중요한 변화를 앞두고 시간을 들일 수 있는 한 부분이 있나요?
출가 보름 뒤 왓차곳따가 배우는 이의 앎에 도달했다고 말하고 세존께서 고요와 통찰을 더 닦게 하십니다.
구족계를 받은 지 보름 된 왓차곳따 존자가 세존께 가서 절하고 한쪽에 앉아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배우는 이의 앎과 밝은 앎으로 도달할 수 있는 데까지 저는 이르렀습니다. 더 가르쳐 주십시오.”
“그렇다면 왓차여, 고요와 통찰 두 가지를 더 닦아라. 왓차여, 이 둘을 더 닦으면 여러 요소를 꿰뚫는 데로 이끌 것이다.”
Acirūpasampanno kho panāyasmā vacchagotto addhamāsūpasampanno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ṁ abhivādetvā ekamantaṁ nisīdi. Ekamantaṁ nisinno kho āyasmā vacchagotto bhagavantaṁ etadavoca: “yāvatakaṁ, bhante, sekhena ñāṇena sekhāya vijjāya pattabbaṁ, anuppattaṁ taṁ mayā; uttari ca me bhagavā dhammaṁ desetū”ti. “Tena hi tvaṁ, vaccha, dve dhamme uttari bhāvehi—samathañca vipassanañca. Ime kho te, vaccha, dve dhammā uttari bhāvitā—samatho ca vipassanā ca—anekadhātupaṭivedhāya saṁvattissanti.
맛지마 니까야MN 73 왓차 긴 경 (Mahāvacchasutta)
배경
출가 뒤 시간은 addhamāsa, 보름이라고 정확히 제시됩니다. 왓차곳따는 sekha, 아직 배우는 이의 앎과 밝은 앎으로 도달할 수 있는 범위에 이르렀다고 보고하면서도 더 가르쳐 달라고 청합니다. 세존은 samatha와 vipassanā, 고요와 통찰 두 가지를 함께 더 닦으라고 답합니다.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하게 하지 않으며, 두 수행이 anekadhātu, 여러 요소를 꿰뚫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빠른 진전을 완결로 과장하지 않고, 다음 여섯 직접 앎의 바탕이 되는 두 닦음을 분명히 합니다.
묵상
어느 정도 배운 뒤에도 “더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태도가 어떻게 느껴지나요? 고요와 통찰 가운데 지금 뜻이 더 선명한 하나와 아직 낯선 하나가 있나요? 둘을 평가하지 않고 잠시 구별해 볼 수 있을까요?
하나와 여럿의 변화부터 범천 세계까지 몸을 자유롭게 쓰는 여러 신통을 첫 직접 앎으로 열거합니다.
“왓차여, 원한다면 여러 신통을 직접 겪을 수 있다. 하나에서 여럿, 여럿에서 하나가 되고, 나타나고 사라지며, 벽·성벽·산을 허공처럼 지나고, 땅을 물처럼 드나들며, 물 위를 땅처럼 걷고, 새처럼 하늘을 가부좌로 가고, 해와 달을 손으로 만지며, 범천 세계까지 몸을 부릴 수 있다.
그 영역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직접 실현할 수 있다.”
고요와 통찰을 더 닦은 결과로 여섯 직접 앎이 차례로 열립니다. 첫째는 여러 신통이며 목록은 하나↔여럿, 나타남·사라짐, 벽·성벽·산 통과, 땅을 드나듦, 물 위를 걸음, 하늘을 가부좌로 감, 해와 달을 만짐, 범천 세계까지 몸을 부림의 여덟 묶음입니다. 각 능력은 yāvadeva ākaṅkhissasi, 원할 때라는 조건과 sati satiāyatane, 그 영역이 있을 때마다라는 제한 안에 놓입니다. 가능성을 말한 것을 현재 모두 행사한다는 선언으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묵상
낯선 능력의 목록보다 “원할 때”와 “그 영역이 있을 때마다”라는 두 제한에 먼저 눈을 둘 수 있을까요? 신통을 경험했는지 묻는 질문은 아니에요. 조건이 붙은 가능성이라는 문법만 살펴보아도 괜찮아요.
깨끗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귀로 멀고 가까운 천상과 인간의 소리를 듣는 둘째 직접 앎입니다.
“왓차여, 원한다면 깨끗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귀의 요소로 두 종류의 소리, 곧 천상의 소리와 인간의 소리를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들을 수 있다.
그 영역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직접 실현할 수 있다.”
So tvaṁ, vaccha, yāvadeva ākaṅkhissasi: ‘dibbāya sotadhātuyā visuddhāya atikkantamānusikāya ubho sadde suṇeyyaṁ—dibbe ca mānuse ca, ye dūre santike cā’ti, tatra tatreva sakkhibhabbataṁ pāpuṇissasi, sati satiāyatane.
맛지마 니까야MN 73 왓차 긴 경 (Mahāvacchasutta)
배경
둘째 직접 앎은 dibbā sotadhātu, 신성한 귀의 요소입니다. 그 귀는 visuddha, 깨끗하고 atikkantamānusika, 인간의 범위를 넘어섰다고 수식됩니다. 듣는 대상은 천상과 인간의 두 종류이며, 거리도 멂과 가까움의 두 범위를 모두 포함합니다. 첫 능력과 마찬가지로 원할 때와 그 영역이 있을 때마다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보통의 주의 깊은 듣기나 타인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현대적 비유로 바꾸지 않고, 경이 특정한 직접 앎으로 열거한 범위를 그대로 둡니다.
묵상
천상과 인간, 멀고 가까움이라는 두 쌍이 같은 문장에 놓인 점이 보이나요? 특별한 경험을 기대하거나 만들어 내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 능력에도 조건과 범위가 붙는다는 점만 살펴볼까요?
“왓차여, 원한다면 마음으로 다른 존재와 사람의 마음을 아울러 알 수 있다.
탐욕 있는 마음은 탐욕 있다고, 탐욕 없는 마음은 없다고 안다. 성냄 있는 마음은 성냄 있다고, 성냄 없는 마음은 없다고 안다. 어리석음 있는 마음은 어리석음 있다고, 어리석음 없는 마음은 없다고 안다. 수축된 마음은 수축되었다고, 산란한 마음은 산란하다고 안다.”
셋째 직접 앎은 자기 추측을 상대에게 덧씌우는 일이 아니라 cetasā ceto paricca, 마음으로 다른 존재의 마음을 아울러 아는 것으로 제시됩니다. 첫 네 쌍은 탐욕 있음/없음, 성냄 있음/없음, 어리석음 있음/없음, 수축됨/산란함입니다. 각 상태를 바로 그 상태라고 아는 설명 동사 pajānāti를 여덟 번의 관계로 보존했습니다. 수축과 산란은 단순한 선악 반대가 아니므로 탐욕 없음 같은 표현으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목록은 다음 네 쌍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여덟 상태를 좋고 나쁜 사람의 표지로 쓰지 않고, 마음 상태의 이름으로만 읽을 수 있을까요? 지금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자신의 마음에서 탐욕·성냄·어리석음·수축·산란 중 하나가 보이는지 살펴볼 수 있을까요?
광대한 마음·더 높은 것이 있는 마음·삼매 든 마음·해탈한 마음과 각 반대 상태를 구별합니다.
“광대한 마음은 광대하다고, 광대하지 않은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안다. 더 높은 것이 있는 마음은 그렇다고, 위없는 마음은 위없다고 안다.
삼매에 든 마음은 들었다고,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고 안다. 해탈한 마음은 해탈했다고, 해탈하지 않은 마음은 하지 않았다고 안다.
그 영역이 있을 때마다 이를 직접 실현할 수 있다.”
다른 마음을 아는 목록의 뒤 네 쌍입니다. mahaggata/amahaggata는 광대함의 유무, sauttara/anuttara는 더 높은 것이 있음과 위없음, samāhita/asamāhita는 삼매에 듦과 들지 않음, vimutta/avimutta는 해탈함과 해탈하지 않음입니다. “더 높은 것이 있는”을 곧 열등하다고 바꾸지 않았고, 삼매와 해탈도 서로 다른 쌍으로 남겼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앞에서 예고한 원함과 알맞은 영역의 두 조건 아래 이 마음 앎을 직접 실현할 수 있다고 닫습니다.
묵상
광대함·위없음·삼매·해탈이라는 말이 서로 비슷하게 들리나요? 정확한 정의를 당장 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네 쌍이 각각 다른 기준으로 마음을 구별한다는 점만 알아볼 수 있을까요? 낯설다면 그대로 두어도 괜찮아요.
한 생부터 십만 생과 세계의 수축·팽창까지, 이름·가문·생활의 세부를 기억하는 넷째 직접 앎입니다.
“왓차여, 원한다면 한·두·세·네·다섯·열·스물·서른·마흔·쉰·백·천·십만 생과, 여러 세계의 수축·팽창·수축과 팽창을 기억할 수 있다.
‘그곳에서 이름·가문·모습·음식·행복과 괴로움·수명은 이러했고, 죽어 다른 곳에서도 그러했으며, 거기서 죽어 여기 태어났다’고, 수많은 전생을 모습과 세부와 함께 기억한다. 그 영역이 있을 때마다 이를 직접 실현할 수 있다.”
넷째 직접 앎은 여러 전생의 기억입니다. 수량은 한·둘·셋·넷·다섯 뒤 열 단위로 스물·서른·마흔·쉰, 다시 백·천·십만 생이며, 여러 세계의 수축·팽창·수축과 팽창까지 이어집니다. 한 장소와 다음 장소에서 각각 이름·가문·모습·음식·행복과 괴로움의 경험·수명의 끝을 기억하고, 죽음과 다시 태어남의 이동을 잇습니다. 마지막 sākāra·sauddesa는 모습과 세부를 갖춘 기억임을 밝힙니다. 긴 목록에서 수량과 여섯 생활 항목을 빼지 않았습니다.
묵상
긴 수량보다 이름·가문·모습·음식·행복과 괴로움·수명이라는 생활의 여섯 세부가 눈에 들어오나요? 전생 경험을 판단하거나 만들어 낼 필요는 없어요. 기억이 구체적인 항목으로 묘사된 점을 살펴볼 수 있을까요?
신성한 눈으로 존재의 죽음과 태어남을 보고 몸·말·마음의 행위와 견해에 따른 두 길을 압니다.
“왓차여, 원한다면 깨끗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존재들이 죽고 태어남을, 낮고 높음·아름답고 추함·좋은 곳과 나쁜 곳·업을 따름을 본다.
몸·말·마음의 악행, 성자 비방, 그릇된 견해와 그에 따른 행위로 죽은 뒤 지옥에 태어나는 이들과, 몸·말·마음의 선행, 성자를 비방하지 않음, 바른 견해와 그에 따른 행위로 천상에 태어나는 이들을 본다. … 그렇게 알 수 있다.
그 영역이 있을 때마다 이를 직접 실현할 수 있다.”
다섯째 직접 앎은 신성한 눈으로 죽음과 태어남을 보는 것입니다. 첫 범위는 낮고 높음·아름답고 추함·좋은 곳과 나쁜 곳·업을 따름의 네 쌍입니다. 악한 길은 몸·말·마음의 악행, 성자 비방, 그릇된 견해와 그에 따른 행위에서 지옥으로 이어지고, 선한 길은 그 다섯 관계를 모두 반대로 두어 천상으로 이어집니다. 마지막 일반 말줄임표는 첫 문장의 신성한 눈과 네 쌍, 업을 따른다는 결론이 그대로 반복되는 부분만 양쪽에서 줄이며 새 결과는 삼키지 않습니다.
묵상
이 대목의 긴 결과 묘사가 부담스럽다면 잠시 건너뛰어도 괜찮아요. 읽는다면 몸·말·마음의 행위와 견해가 따로 열거된 점에서 지금 살필 수 있는 한 선택만 골라볼 수 있을까요? 없다면 없다고 보아도 괜찮아요.
“왓차여, 원한다면 번뇌가 다하여 번뇌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바로 이 삶에서 스스로 알고 실현해 머물 수 있다. 그 영역이 있을 때마다 이를 직접 실현할 수 있다.”
왓차곳따 존자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받아들인 뒤 자리에서 일어나 절하고 오른쪽으로 돌아 떠났습니다.
여섯 직접 앎의 마지막은 번뇌의 소멸로 이루는 두 해탈입니다.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바로 이 삶에서 sayaṁ abhiññā, 스스로 직접 알고 실현해 머무는 것이며, 여기에도 원할 때와 그 영역이 있을 때마다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신통에서 시작한 목록은 이 결과로 닫힙니다. 왓차곳따는 말씀을 기뻐하고 받아들인 뒤 절하고 세존을 오른쪽에 두고 돌아 떠납니다. 떠나는 동작은 수행이 끝났다는 판정이 아니라, 다음 장면의 홀로 닦는 시간으로 이어지는 서술입니다.
묵상
여섯 능력의 마지막이 번뇌 없는 마음과 지혜의 해탈이라는 점이 어떻게 들리나요? 앞의 특별한 능력들과 비교해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어요. 목록의 끝에 놓인 결과만 살펴볼까요?
왓차곳따가 홀로 부지런히 닦아 청정한 삶의 목적을 실현하고 아라한 가운데 한 사람이 됩니다.
왓차곳따 존자는 홀로 떨어져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굳은 뜻으로 머물다가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집 없는 삶으로 나아가는 그 위없는 목적인 청정한 삶의 완성을 바로 이 삶에서 스스로 알고 실현해 머물렀습니다.
그는 “태어남은 다했고 청정한 삶은 완성되었으며 할 일을 마쳤고, 다시 이 존재 상태가 없다”고 알았습니다. 왓차곳따 존자는 아라한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르침을 듣고 떠난 왓차곳따는 혼자 떨어져 appamatta·ātāpī·pahitatta,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굳은 뜻으로 머뭅니다. 그 결과 출가의 위없는 목적인 청정한 삶의 완성을 바로 이 삶에서 스스로 알고 실현합니다. 완결의 앎은 태어남이 다함, 청정한 삶의 완성, 할 일의 마침, 다시 이 존재 상태가 없음의 네 선언입니다. 마지막 서술은 그가 아라한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고 분명히 확인합니다. 보름 뒤의 빠른 배움을 곧 아라한과로 오해하지 않고 실제 완결 장면을 따로 남겼습니다.
묵상
홀로 지낸 시간과 “오래지 않아”라는 결과 사이에서 경은 구체적인 기간을 더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속도와 비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방일하지 않음·열심·굳은 뜻 가운데 지금 뜻이 와닿는 하나가 있나요?
왓차곳따가 세존을 만나러 가는 비구들에게 머리 숙여 문안하고 두 번 잘 섬겼다고 전해 달라 합니다.
여러 수행자가 세존을 뵈러 가고 있었습니다. 왓차곳따 존자는 멀리서 그들을 보고 다가가 물었습니다.
“존자들이여, 어디로 가십니까?”
“벗이여, 세존을 뵈러 갑니다.”
“그렇다면 존자들이여, 나를 대신해 세존의 두 발에 머리 숙여 절하고 전해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왓차곳따 수행자가 두 발에 머리 숙여 절하며 말합니다. 저는 세존을 잘 섬겼고, 잘 가신 분을 잘 섬겼습니다.’”
Tena kho pana samayena sambahulā bhikkhū bhagavantaṁ dassanāya gacchanti. Addasā kho āyasmā vacchagotto te bhikkhū dūratova āgacchante. Disvāna yena te bhikkhū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te bhikkhū etadavoca: “handa kahaṁ pana tumhe āyasmanto gacchathā”ti? “Bhagavantaṁ kho mayaṁ, āvuso, dassanāya gacchāmā”ti. “Tenahāyasmanto mama vacanena bhagavato pāde sirasā vandatha, evañca vadetha: ‘vacchagotto, bhante, bhikkhu bhagavato pāde sirasā vandati, evañca vadeti— pariciṇṇo me bhagavā, pariciṇṇo me sugato’”ti.
맛지마 니까야MN 73 왓차 긴 경 (Mahāvacchasutta)
배경
아라한이 된 뒤 왓차곳따는 세존을 만나러 가는 여러 수행자를 보고 먼저 다가갑니다. 그는 그들을 āyasmanto, “존자들이여”라고 부르고, 수행자들은 왓차곳따를 āvuso, “벗이여”라고 부릅니다. 전갈은 세존의 두 발에 머리 숙이는 문안과 pariciṇṇo의 두 반복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세존을, 둘째는 sugata, 잘 가신 분을 잘 섬겼다는 말입니다. 동일 인물을 가리키지만 두 호칭과 두 동사를 한 번으로 줄이지 않았으며, 전하는 수행자와 원래 화자를 구별했습니다.
묵상
왓차곳따가 자신의 성취를 직접 자랑하기보다 “잘 섬겼다”는 문안을 맡기는 장면이 어떻게 들리나요? 감사나 배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 반복해서라도 남기고 싶은 한 말이 있나요? 없다면 없다고 보아도 괜찮아요.
비구들이 전갈을 전하자 세존께서 이미 마음으로 알았고 신들도 같은 사실을 알렸다고 확인하십니다.
“그러겠습니다, 벗이여.” 수행자들은 세존께 가 절하고 한쪽에 앉아 전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왓차곳따 수행자가 두 발에 머리 숙여 ‘세존을 잘 섬겼고, 잘 가신 분을 잘 섬겼습니다’라고 합니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이미 왓차곳따의 마음을 알아 ‘그는 세 가지 앎과 큰 신통·능력을 지녔다’고 알았느니라. 신들도 ‘세존이시여, 왓차곳따 수행자는 세 가지 앎과 큰 신통·능력을 지녔습니다’라고 알렸느니라.”
세존께서 말씀하시자 수행자들은 기뻐하며 받아들였습니다.
수행자들은 부탁을 받아 세존께 가서 절하고 한쪽에 앉아, 문안과 “세존을 잘 섬겼고 잘 가신 분을 잘 섬겼다”는 두 반복을 그대로 전합니다. 세존은 pubbeva, 이미 마음으로 그의 마음을 아울러 알아 세 가지 앎과 큰 신통·큰 능력을 확인했다고 답합니다. 이어 신들도 같은 세 항목을 세존께 보고했다고 밝힙니다. 자신의 직접 앎과 신들의 보고를 하나의 근거로 합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은 세존의 발화와 수행자들의 기쁜 수용으로 경의 본문을 닫습니다.
묵상
왓차곳따의 전갈, 세존의 직접 앎, 신들의 보고가 서로 다른 세 층으로 이어지는 점이 보이나요? 하나의 결론을 확인하는 여러 경로를 만날 때 무엇이 직접 본 것이고 무엇이 전해진 것인지 구별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