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시하여, 보시하는 이, 보시의 주인은 왕족·바라문·재가자·수행자 가운데 어떤 모임에 가든 자신 있고 주눅 들지 않은 채 들어갑니다. 시하여, 보시하는 이, 보시의 주인은 왕족·바라문·재가자·수행자 가운데 어떤 모임에 가든 자신 있고 주눅 들지 않은 채 들어갑니다. 이것도 현세에서 직접 드러나는 보시의 결실입니다.
Puna caparaṁ, sīha, dāyako dānapati yaṁ yadeva parisaṁ upasaṅkamati—yadi khattiyaparisaṁ yadi brāhmaṇaparisaṁ yadi gahapatiparisaṁ yadi samaṇaparisaṁ—visārado upasaṅkamati amaṅkubhūto. Yampi, sīha, dāyako dānapati yaṁ yadeva parisaṁ upasaṅkamati—yadi khattiyaparisaṁ yadi brāhmaṇaparisaṁ yadi gahapatiparisaṁ yadi samaṇaparisaṁ—visārado upasaṅkamati amaṅkubhūto, idampi sandiṭṭhikaṁ dānaphalaṁ.
앙굿따라 니까야 AN 5.34 시하 장군 경 (Sīhasenāpatisutta)배경
넷째 현세 결실을 하나의 긴 반복으로 제시합니다. 보시하는 이가 들어가는 모임은 왕족·바라문·재가자·수행자라는 네 부류이며, 어느 모임이든 간다는 범위가 먼저 놓입니다. 들어가는 방식도 visārada의 자신 있음과 amaṅkubhūta의 주눅 들지 않음이라는 두 특성을 함께 지닙니다. 경문은 네 모임과 두 특성을 결론 문장에서 모두 다시 말하므로 인용도 줄이지 않았습니다. 수행의 뜻은 보시가 신분이나 집단에 따라 태도를 숨겨야 하는 움츠림을 덜고, 여러 관계 속에 떳떳하게 참여하는 현세의 바탕이 될 수 있음을 살피는 데 있습니다.
묵상
‘어떤 모임에 가든 자신 있고 주눅 들지 않는다’는 말에서 지금 가까운 모임 하나가 떠오르나요? 반드시 당당해야 한다고 자신을 몰아붙일 필요는 없어요. 나눔이나 돌봄의 경험이 그 자리에서 아주 조금 편안함을 준 적이 있는지 살필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