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에서 벗어나는 자애

세존을 잘못 전하지 말라는 교정과 불가능의 판정 뒤, 자애의 마음의 해탈을 악의에서 벗어남으로 확정합니다.

그에게 이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여. 그런 말은 마십시오. 세존을 잘못 전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전함은 좋지 않습니다. 세존은 그러실 리 없습니다. 벗이여, 자애의 마음의 해탈을 닦고 거듭 닦아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아 확립하고 익혀 잘 성취했는데도 악의가 마음을 사로잡아 머문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벗이여, 악의에서 벗어남은 자애의 마음의 해탈입니다.”

So ‘mā hevan’tissa vacanīyo: ‘māyasmā evaṁ avaca; mā bhagavantaṁ abbhācikkhi, na hi sādhu bhagavato abbhakkhānaṁ, na hi bhagavā evaṁ vadeyya. Aṭṭhānametaṁ, āvuso, anavakāso yaṁ mettāya cetovimuttiyā bhāvitāya bahulīkatāya yānīkatāya vatthukatāya anuṭṭhitāya paricitāya susamāraddhāya; atha ca panassa byāpādo cittaṁ pariyādāya ṭhassati, netaṁ ṭhānaṁ vijjati. Nissaraṇañhetaṁ, āvuso, byāpādassa yadidaṁ mettācetovimuttī’ti.

앙굿따라 니까야 AN 6.13 벗어남 경 (Nissāraṇīyasutta)

배경

앞의 주장에 대해 “그렇지 않다”라고 답하고, 그렇게 말하거나 세존을 잘못 전하지 말라는 금지를 거듭 밝힙니다. 세존을 잘못 전하는 것은 좋지 않으며 세존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부정도 빠짐없이 이어집니다. 이어 ‘벗이여’라고 두 번 부르며, 자애의 마음의 해탈이 일곱 방식으로 잘 성취되었는데 악의가 마음을 사로잡는 일은 불가능하고 여지도 없으며 있을 수 없다고 세 겹으로 닫습니다. 결론은 악의에서 벗어남이 바로 자애의 마음의 해탈이라는 대응입니다.

묵상

악의가 누그러졌던 때를 떠올리면 자애로운 바람이나 태도가 함께 있었나요? 원인을 억지로 하나로 정하거나 누구를 당장 용서할 필요는 없어요. 자애와 악의가 마음 안에서 각각 어떤 몸의 느낌과 말의 충동을 만드는지 구별해 볼 수 있나요? 어렵다면 멈추어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