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이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여. 그런 말은 마십시오. 세존을 잘못 전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전함은 좋지 않습니다. 세존은 그러실 리 없습니다. 벗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닦고 거듭 닦아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아 확립하고 익혀 잘 성취했는데도 의식이 표상을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벗이여, 모든 표상에서 벗어남은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입니다.”
So ‘mā hevan’tissa vacanīyo: ‘māyasmā evaṁ avaca; mā bhagavantaṁ abbhācikkhi, na hi sādhu bhagavato abbhakkhānaṁ, na hi bhagavā evaṁ vadeyya. Aṭṭhānametaṁ, āvuso, anavakāso yaṁ animittāya cetovimuttiyā bhāvitāya bahulīkatāya yānīkatāya vatthukatāya anuṭṭhitāya paricitāya susamāraddhāya; atha ca panassa nimittānusāri viññāṇaṁ bhavissati, netaṁ ṭhānaṁ vijjati. Nissaraṇañhetaṁ, āvuso, sabbanimittānaṁ yadidaṁ animittācetovimuttī’ti.
앙굿따라 니까야 AN 6.13 벗어남 경 (Nissāraṇīyasutta)배경
표상 없는 해탈을 닦았지만 의식이 표상을 따른다는 주장에도 같은 완전한 교정이 적용됩니다. 존자에게 그렇지 않다고 하고, 그렇게 말하거나 세존을 잘못 전하지 말라고 합니다. 잘못 전함은 좋지 않고 세존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부정도 이어집니다.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일곱 방식으로 잘 성취했는데 의식이 표상을 따르는 일은 불가능하고 여지가 없으며 있을 수 없다고 밝힙니다. 결론의 범위는 단지 ‘표상을 따르는 의식’ 하나가 아니라 모든 표상이며, 모든 표상에서 벗어남이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이라고 확정합니다.
묵상
익숙한 이름이나 이미지가 잠시 느슨해졌을 때 대상을 새롭게 본 경험이 있나요? ‘모든 표상에서 벗어남’을 당장 만들어 내거나 멍한 상태를 추구할 필요는 없어요. 한 대상을 바라볼 때 이미 붙여 둔 해석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해도 될까요? 원치 않으면 멈추어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