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이로운 근원에서 생긴 업과 좋은 곳

세 이로운 근원에서 생긴 업으로는 나쁜 곳이 나타나지 않고 신들·인간들과 좋은 곳이 나타난다고 전체 대칭을 맺습니다.

“수행자들이여, 탐욕 없음에서 생긴 업·성냄 없음에서 생긴 업·어리석음 없음에서 생긴 업으로는 지옥·축생의 모태·아귀의 영역 또는 그 밖의 어떤 나쁜 곳도 나타나지 않느니라. 오히려 수행자들이여, 탐욕 없음에서 생긴 업·성냄 없음에서 생긴 업·어리석음 없음에서 생긴 업으로는 신들·인간들 또는 그 밖의 어떤 좋은 곳이 나타나느니라. 수행자들이여, 이것이 업이 생겨나는 세 근원이니라.”

Na, bhikkhave, alobhajena kammena adosajena kammena amohajena kammena nirayo paññāyati tiracchānayoni paññāyati pettivisayo paññāyati, yā vā panaññāpi kāci duggatiyo. Atha kho, bhikkhave, alobhajena kammena adosajena kammena amohajena kammena devā paññāyanti, manussā paññāyanti, yā vā panaññāpi kāci sugatiyo. Imāni kho, bhikkhave, tīṇi nidānāni kammānaṁ samudayāyā”ti.

앙굿따라 니까야 AN 6.39 근원경 (Nidānasutta)

배경

마지막 세 문장은 첫 절의 목적지 대칭을 정확히 뒤집습니다. 탐욕 없음·성냄 없음·어리석음 없음에서 생긴 업이라는 세 표현이 두 문장에 모두 반복됩니다. 첫 문장은 지옥·축생의 모태·아귀의 영역·그 밖의 나쁜 곳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부정합니다. ‘오히려’ 뒤에는 신들·인간들·그 밖의 좋은 곳이 나타난다고 밝힙니다. 마지막 ‘수행자들이여’와 세 근원의 결론은 둘째 절뿐 아니라 경 전체를 닫습니다. 수행의 뜻은 좋은 곳을 보상처럼 계산하는 데 있지 않고,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없는 근원에서 생긴 업이 해로운 세 근원의 업과 반대 방향을 이룬다는 구조를 아는 데 있습니다.

묵상

탐욕이나 성냄이 덜한 상태에서 한 선택이 나와 다른 이에게 더 안전한 방향을 열었던 적이 있나요? 먼 결과를 확신하거나 공덕을 계산할 필요는 없어요. 그 선택 직후 관계나 마음에 나타난 작은 변화를 살펴볼 수 있고, 떠오르지 않으면 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