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타까·와마까·와마데와·웻사밋따·야마닷기·앙기라사·바라드와자·와셋타·깟사빠·바구 같은 옛 성현들이 큰 제사를 행했듯이 ‘나도 보시하고 나누리라’고 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 보시를 하면 내 마음이 맑아지고 만족과 기쁨이 생긴다’고 생각하여 보시합니다. …”
Napi ‘yathā tesaṁ pubbakānaṁ isīnaṁ tāni mahāyaññāni ahesuṁ, seyyathidaṁ— aṭṭhakassa vāmakassa vāmadevassa vessāmittassa yamadaggino aṅgīrasassa bhāradvājassa vāseṭṭhassa kassapassa bhaguno, evaṁ me ayaṁ dānasaṁvibhāgo bhavissatī’ti dānaṁ deti; api ca kho ‘imaṁ me dānaṁ dadato cittaṁ pasīdati, attamanatā somanassaṁ upajāyatī’ti dānaṁ deti …pe….
앙굿따라 니까야 AN 7.52 큰 결실이 있는 보시경 (Dānamahapphalasutta)배경
여섯째 동기는 앞의 열 성현과 큰 제사를 그대로 되풀이한 뒤 그것이 자신의 이유는 아니라고 부정합니다. 새 이유는 보시하는 바로 그때 citta가 맑아지고 attamanatā와 somanassa, 곧 만족과 기쁨이 생긴다는 경험입니다. 외부의 보답이나 관습과 본보기를 넘어 주는 행위가 현재 마음에 주는 좋은 느낌을 향하지만, 경은 이 기쁨도 마지막 동기와 구별합니다. 끝의 …pe…는 앞서 온전히 제시된 형식에 따라 보시물·문답과 결과 서술이 이어진다는 표지입니다. 보시의 즐거움은 인정되지만 아직 주는 까닭으로 붙들려 있습니다.
묵상
나눌 때 마음이 맑아지고 기뻐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나요? 그 기쁨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 다시 그 느낌을 얻으려고 주는 것은 어디에서 갈릴까요? 답을 정하지 말고 두 가능성을 나란히 놓아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