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는 지혜

지혜로움이라는 일곱째 사유를 묻고,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는 고귀하고 꿰뚫는 지혜로 괴로움의 바른 소멸에 이르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수행자들이여, ‘이 가르침은 지혜로운 이를 위한 것이지, 지혜가 모자란 이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느니라.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수행자들이여, 여기 수행자는 지혜롭느니라.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는 지혜, 고귀하고 꿰뚫으며 괴로움의 바른 소멸로 이끄는 지혜를 갖추느니라. 수행자들이여, 이를 두고 ‘이 가르침은 지혜로운 이를 위한 것이지, 지혜가 모자란 이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설해졌느니라.”

‘Paññavato ayaṁ, bhikkhave, dhammo, nāyaṁ dhammo duppaññassā’ti, iti kho panetaṁ vuttaṁ. Kiñcetaṁ paṭicca vuttaṁ? Idha, bhikkhave, bhikkhu paññavā hoti udayatthagāminiyā paññāya samannāgato ariyāya nibbedhikāya sammā dukkhakkhayagāminiyā. ‘Paññavato ayaṁ, bhikkhave, dhammo, nāyaṁ dhammo duppaññassā’ti, iti yaṁ taṁ vuttaṁ idametaṁ paṭicca vuttaṁ.

앙굿따라 니까야 AN 8.30 아누룻다의 큰 사유경 (Anuruddhamahāvitakkasutta)

배경

일곱째 사유의 지혜는 단순히 아는 것이 많다는 뜻으로 풀이되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는 지혜를 갖추며, 그 지혜는 고귀하고 꿰뚫고 괴로움의 바른 소멸로 이끕니다. 생겨남만 보거나 사라짐만 보는 것이 아니라 두 방향을 함께 보고, 통찰의 성격과 목적까지 한 문장에 담습니다. 앞과 뒤에는 지혜로운 이와 지혜가 모자란 이의 대조가 반복됩니다. 이렇게 지혜의 기준은 지식이나 말솜씨가 아니라 현상의 발생과 소멸을 꿰뚫어 괴로움이 다하는 방향으로 이끄는가에 놓입니다.

묵상

지혜를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것”이라 한 설명에서 어느 부분이 가장 분명한가요? 깊은 통찰을 당장 이루어야 한다는 과제로 삼을 필요는 없어요. 의미가 어렵다면 일어남과 사라짐이 한 쌍이라는 점만 잠시 살펴봐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