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들이여, 이 다섯 보시는 위대한 보시이며, 태초부터 알려져 오래 이어진 관습과 전통의 옛 보시이니라. 섞이지 않았고 전에도 섞인 적이 없으며, 지금도 섞이지 않고 앞으로도 섞이지 않을 것이니라. 지혜로운 수행자와 바라문들이 비난하지 않느니라. 어떤 다섯인가? 수행자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살생을 버리고 살생을 삼가느니라.”
Pañcimāni, bhikkhave, dānāni mahādānāni aggaññāni rattaññāni vaṁsaññāni porāṇāni asaṅkiṇṇāni asaṅkiṇṇapubbāni, na saṅkiyanti na saṅkiyissanti, appaṭikuṭṭhāni samaṇehi brāhmaṇehi viññūhi. Katamāni pañca? Idha, bhikkhave, ariyasāvako pāṇātipātaṁ pahāya pāṇātipātā paṭivirato hoti.
앙굿따라 니까야 AN 8.39 넘쳐흐르는 공덕경 (Abhisandasutta)배경
세 귀의를 마친 뒤 경은 나머지 다섯 흐름을 ‘다섯 위대한 보시’로 새로 묶고 “어떤 다섯인가?”라고 묻습니다. aggañña·rattañña·vaṁsañña·porāṇa는 태초부터 알려지고 오래 이어져 관습과 전통이 된 옛 보시라는 시간의 층을 만들며, asaṅkiṇṇa 계열은 전에도·지금도·앞으로도 섞이지 않는다는 부정을 거듭합니다. 지혜로운 사문과 바라문이 비난하지 않는다는 평가 뒤 첫 답은 살생을 버리고 삼가는 일입니다. 수행의 뜻은 삼감을 개인의 금지만으로 보지 않고, 뒤에서 다른 존재에게 무엇을 주는지 밝힐 보시의 출발점으로 읽는 데 있습니다.
묵상
살생을 삼가는 일을 ‘위대한 보시’의 첫 항목으로 세우는 방식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자신이 충분히 지키는지 채점하거나 과거를 떠올리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 않음이 누군가에게 건네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관점에 잠시 머물 수 있나요, 아니면 지금은 멈추는 편이 나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