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차림의 없음은 이치에 맞지 않는 주의를 먹다

알아차림·분명한 앎의 없음에서 이치에 맞지 않는 주의와 믿음 없음까지 두 조건을 밝힙니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의 없음에도 자양분이 있고 자양분이 없지 않다고 말하느니라. 그 자양분은 무엇인가? ‘이치에 맞지 않는 주의’라고 답해야 하느니라. 수행자들이여, 나는 이치에 맞지 않는 주의에도 자양분이 있고 자양분이 없지 않다고 말하느니라. 그 자양분은 무엇인가? ‘믿음 없음’이라고 답해야 하느니라.”

Asatāsampajaññampāhaṁ, bhikkhave, sāhāraṁ vadāmi, no anāhāraṁ. Ko cāhāro asatāsampajaññassa? ‘Ayonisomanasikāro’tissa vacanīyaṁ. Ayonisomanasikārampāhaṁ, bhikkhave, sāhāraṁ vadāmi, no anāhāraṁ. Ko cāhāro ayonisomanasikārassa? ‘Assaddhiyan’tissa vacanīyaṁ.

앙굿따라 니까야 AN 10.61 알지 못함에 관한 경 (Avijjāsutta)

배경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이 없는 상태를 먹이는 것은 ayonisomanasikāra, 이치에 맞지 않는 주의입니다. 무엇을 보고 듣느냐만이 아니라 대상의 어느 면을 어떤 관계 속에서 마음에 두느냐가 알아차림의 선명함과 이어집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주의도 끝점이 아닙니다. 다음 질문은 그 자양분을 믿음 없음이라고 답합니다. 여기서 믿음은 검토 없는 동의보다 가르침과 실천이 의미 있다는 신뢰의 자리입니다. 두 단계 모두 “자양분이 없지 않다”는 부정을 보존하여, 마음의 기울임과 믿음 없음도 조건 없이 저절로 굳어진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묵상

한 대상을 볼 때 불리하거나 자극적인 한 면만 되풀이해 마음에 둔 적이 있나요? 그 주의 방식이 알아차림과 신뢰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옳고 그름을 서둘러 판정하지 말고 살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