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착까 숫따(여섯씩 여섯 묶음)

Chachakkasutta

맛지마 니까야 MN 148

여섯 감각을 기관·대상·의식·접촉·느낌·갈애로 분석해 무아와 괴로움의 끝을 밝히는 가르침.

인용된 가르침 44구절

이 경을 6개 대목으로 나누어 읽습니다.

1 여섯 묶음의 조건 지도 12구절

감각기관에서 갈망까지 경험을 이루는 여섯 묶음과 여섯 갈래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 아나타삔디까 동산에 머무셨다. 그곳에서 수행자들을 부르시자 수행자들은 “부처님” 하고 응답했고, 부처님께서 말씀을 시작하셨다.

Evaṁ me sutaṁ—ekaṁ samayaṁ bhagavā sāvatthiyaṁ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Tatr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bhikkhavo”ti. “Bhadante”ti te bhikkhū bhagavato paccassosuṁ. Bhagavā etadavoca:

맛지마 니까야 MN 148 차착까 숫따 (여섯씩 여섯 묶음)

배경

경은 아난다가 전하는 정식 서두와 함께 가르침을 편 장소와 화자를 분명히 밝힙니다. 사왓티의 제따 숲에서 부처님이 먼저 수행자들을 부르시고, 수행자들이 응답한 뒤 가르침이 시작됩니다. 이어지는 여섯 묶음의 분석은 부처님이 그 자리에 모인 수행자들에게 전하신 가르침입니다. 스승의 부름을 알아듣고 응답하는 짧은 문답은 듣는 이들이 몸과 마음을 모아 배움을 받을 준비를 갖추는 장면입니다.

묵상

부처님이 수행자들을 부르고 그들이 응답한 뒤 가르침이 열린 장면처럼, 중요한 말을 듣기 전에 몸과 마음으로 응답하며 들을 준비를 갖추고 있나요? 이미 안다고 넘기지 않고 처음 듣는 마음으로 자리를 내어 주면 이해는 어떻게 달라지나요?

“수행자들이여, 나는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며 끝도 훌륭하고, 뜻과 표현을 갖춘 가르침을 펴겠다. 온전히 완전하고 맑은 수행을 밝히겠으니, 곧 여섯 묶음의 여섯이다. 잘 듣고 마음에 새겨라.” 수행자들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응답했다.

“dhammaṁ vo, bhikkhave, desessāmi ādikalyāṇaṁ majjhekalyāṇaṁ pariyosānakalyāṇaṁ sātthaṁ sabyañjanaṁ, kevalaparipuṇṇaṁ parisuddhaṁ brahmacariyaṁ pakāsessāmi, yadidaṁ—cha chakkāni. Taṁ suṇātha, sādhukaṁ manasi karotha, bhāsissāmī”ti. “Evaṁ, bhante”ti kho te bhikkhū bhagavato paccassosuṁ. Bhagavā etadavoca:

맛지마 니까야 MN 148 차착까 숫따 (여섯씩 여섯 묶음)

배경

부처님은 이 가르침이 무엇을 다루는지, 무슨 뜻으로 펴는지를 먼저 밝힙니다. 가르침은 처음도 중간도 끝도 좋고, 뜻과 말이 모두 갖추어진 맑은 수행 전체를 드러냅니다. 핵심 제목인 “여섯 묶음의 여섯”은 여섯 감각기관에서 출발해 대상·의식·접촉·느낌·갈망(딴하)으로 이어지는 여섯 갈래를 가리킵니다. 수행자들은 잘 듣고 마음에 새기라는 요청을 받아들이고, 부처님은 그 준비된 공동체에 경험이 일어나는 과정을 차례로 밝히십니다.

묵상

하나의 경험을 감각기관·대상·의식·접촉·느낌·갈망으로 차분히 나누어 듣겠다는 준비가 되어 있나요? 좋고 싫다는 결론부터 내리기 전에 경험이 만들어지는 여섯 조건을 살피면 지금의 반응 가운데 무엇이 새롭게 보이나요?

“안의 여섯 감각영역, 밖의 여섯 감각영역, 여섯 의식, 여섯 접촉, 여섯 느낌, 여섯 갈망(딴하)을 알아야 한다. 안의 여섯은 눈·귀·코·혀·몸·마음의 감각영역이니, 이것이 첫째 묶음이다.”

“Cha ajjhattikāni āyatanāni veditabbāni, cha bāhirāni āyatanāni veditabbāni, cha viññāṇakāyā veditabbā, cha phassakāyā veditabbā, cha vedanākāyā veditabbā, cha taṇhākāyā veditabbā. ‘Cha ajjhattikāni āyatanāni veditabbānī’ti—iti kho panetaṁ vuttaṁ. Kiñcetaṁ paṭicca vuttaṁ? Cakkhāyatanaṁ, sotāyatanaṁ, ghānāyatanaṁ, jivhāyatanaṁ, kāyāyatanaṁ, manāyatanaṁ. ‘Cha ajjhattikāni āyatanāni veditabbānī’ti—iti yaṁ taṁ vuttaṁ, idametaṁ paṭicca vuttaṁ. Idaṁ paṭhamaṁ chakkaṁ.

맛지마 니까야 MN 148 차착까 숫따 (여섯씩 여섯 묶음)

배경

먼저 전체 지도가 제시됩니다. 안쪽의 감각기관과 바깥의 대상, 그 둘에 의존해 생기는 의식, 셋의 만남인 접촉, 접촉을 조건으로 한 느낌, 느낌을 조건으로 한 갈망이 각각 여섯 갈래를 이룹니다. 이어 첫 묶음으로 눈·귀·코·혀·몸·마음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짚어 줍니다. 이렇게 묻고 답하면서 첫째 묶음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히 밝힙니다.

묵상

지금 강하게 끌리거나 밀어내는 경험을 곧바로 “나”라고 부르기 전에, 여섯 감각기관 가운데 어디서 시작했는지 알아차릴 수 있나요? 눈·귀·코·혀·몸·마음이라는 입구를 분명히 하면 반응의 흐름은 어떻게 구체적으로 보이나요?

“밖의 여섯 감각영역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형상·소리·냄새·맛·감촉·마음의 대상이다. 바로 이것을 두고 밖의 여섯 감각영역이라 했으니, 이것이 둘째 묶음이다.”

‘Cha bāhirāni āyatanāni veditabbānī’ti—iti kho panetaṁ vuttaṁ. Kiñcetaṁ paṭicca vuttaṁ? Rūpāyatanaṁ, saddāyatanaṁ, gandhāyatanaṁ, rasāyatanaṁ, phoṭṭhabbāyatanaṁ, dhammāyatanaṁ. ‘Cha bāhirāni āyatanāni veditabbānī’ti—iti yaṁ taṁ vuttaṁ, idametaṁ paṭicca vuttaṁ. Idaṁ dutiyaṁ chakkaṁ.

맛지마 니까야 MN 148 차착까 숫따 (여섯씩 여섯 묶음)

배경

둘째 묶음은 감각기관이 마주하는 대상을 밝힙니다. 눈에는 형상, 귀에는 소리, 코에는 냄새, 혀에는 맛, 몸에는 감촉, 마음에는 생각과 기억을 포함한 마음의 대상이 놓입니다. 대상은 홀로 경험을 만들지 않고 알맞은 감각기관과 만날 때 의식의 조건이 됩니다. 이렇게 안의 감각기관과 밖의 대상을 분명히 나눠, 둘을 뒤섞지 않게 합니다.

묵상

마음에 파장이 일어날 때 그것을 막연한 기분으로만 부르지 않고 형상·소리·냄새·맛·감촉·마음의 대상 가운데 무엇과 만났는지 살피나요? 대상과 내 반응을 구별해 보면 대상 자체에 덧붙인 기대나 두려움은 어떻게 드러나나요?

“여섯 의식을 알아야 한다. 왜 그렇게 말했는가?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 눈의 의식이 생기고,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귀의 의식이 생기며, 코와 냄새를 조건으로 코의 의식이 생긴다.”

‘Cha viññāṇakāyā veditabbā’ti—iti kho panetaṁ vuttaṁ. Kiñcetaṁ paṭicca vuttaṁ? 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ṁ, sotañca paṭicca sadde ca uppajjati sotaviññāṇaṁ, ghānañca paṭicca gandhe ca uppajjati ghānaviññāṇaṁ,

맛지마 니까야 MN 148 차착까 숫따 (여섯씩 여섯 묶음)

배경

의식은 두 조건의 만남에서 생기는 사건입니다. 눈의 의식은 눈과 형상에, 귀의 의식은 귀와 소리에, 코의 의식은 코와 냄새에 의존합니다. 감각기관 하나만 있거나 대상 하나만 있어서는 해당 의식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조건성을 보면 보고 듣고 맡는 앎을 고정된 자아의 능력으로 붙잡기보다, 조건이 모일 때 생겨나는 과정으로 관찰할 수 있습니다.

묵상

보고 듣고 냄새 맡는 앎이 감각기관과 대상에 의존해 생긴다는 사실을 경험에서 확인하나요? 조건이 달라지면 의식도 달라진다는 점을 보면 확신하던 인상과 판단을 붙드는 힘은 어떻게 달라지나요?

“혀와 맛을 조건으로 혀의 의식이, 몸과 감촉을 조건으로 몸의 의식이, 마음과 마음의 대상을 조건으로 마음의 의식이 생긴다. 이것을 두고 여섯 의식을 알아야 한다고 했으니, 이것이 셋째 묶음이다.”

jivhañca paṭicca rase ca uppajjati jivhāviññāṇaṁ, kāyañca paṭicca phoṭṭhabbe ca uppajjati kāyaviññāṇaṁ, manañca paṭicca dhamme ca uppajjati manoviññāṇaṁ. ‘Cha viññāṇakāyā veditabbā’ti—iti yaṁ taṁ vuttaṁ, idametaṁ paṭicca vuttaṁ. Idaṁ tatiyaṁ chakkaṁ.

맛지마 니까야 MN 148 차착까 숫따 (여섯씩 여섯 묶음)

배경

나머지 세 갈래도 같은 방식으로 조건에 따라 생깁니다. 맛을 아는 혀의 의식은 혀와 맛에, 감촉을 아는 몸의 의식은 몸과 감촉에, 생각과 기억을 아는 마음의 의식은 마음과 마음의 대상에 의존해 생깁니다. 눈·귀·코의 세 갈래와 합쳐 여섯 의식이 완성됩니다. 마음의 의식도 조건에 따라 생기는 의식의 한 갈래입니다. 여섯 갈래 가운데 조건 없이 홀로 서는 의식은 없습니다.

묵상

맛·감촉·생각을 아는 의식도 각각 혀와 맛, 몸과 감촉, 마음과 마음의 대상에 의존해 생긴다고 볼 수 있나요? 특히 생각을 아는 마음의 의식마저 조건 지어진 과정이라면 “생각하는 내가 곧 고정된 나”라는 믿음은 어떻게 흔들리나요?

“여섯 접촉을 알아야 한다. 왜 그렇게 말했는가?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 눈의 의식이 생기며 그 셋의 만남이 눈의 접촉이다. 귀·소리·귀의식의 만남은 귀의 접촉이고, 코·냄새·코의식의 만남은 코의 접촉이다.”

‘Cha phassakāyā veditabbā’ti—iti kho panetaṁ vuttaṁ. Kiñcetaṁ paṭicca vuttaṁ? 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ṁ, tiṇṇaṁ saṅgati phasso; sotañca paṭicca sadde ca uppajjati sotaviññāṇaṁ, tiṇṇaṁ saṅgati phasso; ghānañca paṭicca gandhe ca uppajjati ghānaviññāṇaṁ, tiṇṇaṁ saṅgati phasso;

맛지마 니까야 MN 148 차착까 숫따 (여섯씩 여섯 묶음)

배경

접촉은 감각기관과 대상과 그에 맞는 의식, 이 세 가지가 함께 만나는 사건입니다. 눈·형상·눈의식이 만나 눈의 접촉이 되고, 귀·소리·귀의식은 귀의 접촉, 코·냄새·코의식은 코의 접촉이 됩니다. 의식이 조건에 의존하듯 접촉도 세 요소의 결합에 의존하므로, 경험은 어느 한 요소가 단독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묵상

눈앞의 형상이나 들리는 소리와 곧바로 하나가 되기 전에 감각기관·대상·의식의 세 조건이 만난 접촉이라고 알아차릴 수 있나요? 경험을 “내게 벌어진 일”이라고만 붙들지 않고 세 조건의 만남으로 보면 반응할 틈은 어떻게 넓어지나요?

“혀·맛·혀의식의 만남은 혀의 접촉이고, 몸·감촉·몸의식의 만남은 몸의 접촉이며, 마음·마음의 대상·마음의식의 만남은 마음의 접촉이다. 이것을 두고 여섯 접촉을 알아야 한다고 했으니, 이것이 넷째 묶음이다.”

jivhañca paṭicca rase ca uppajjati jivhāviññāṇaṁ, tiṇṇaṁ saṅgati phasso; kāyañca paṭicca phoṭṭhabbe ca uppajjati kāyaviññāṇaṁ, tiṇṇaṁ saṅgati phasso; manañca paṭicca dhamme ca uppajjati manoviññāṇaṁ, tiṇṇaṁ saṅgati phasso. ‘Cha phassakāyā veditabbā’ti—iti yaṁ taṁ vuttaṁ, idametaṁ paṭicca vuttaṁ. Idaṁ catutthaṁ chakkaṁ.

맛지마 니까야 MN 148 차착까 숫따 (여섯씩 여섯 묶음)

배경

혀와 맛과 혀의식, 몸과 감촉과 몸의식, 마음과 마음의 대상과 마음의식이 각각 만나 세 접촉을 이룹니다. 이로써 눈·귀·코에서 시작한 여섯 접촉이 모두 나왔습니다. 생각이나 기억이 떠오를 때의 마음 접촉도 감각 경험과 같은 방식으로 조건에 따라 일어납니다. 부처님은 이 여섯 갈래를 넷째 묶음으로 정리하여, 느낌이 생기기 직전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게 합니다.

묵상

맛을 느끼고 몸이 닿고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에 혀·몸·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의식까지 함께 만났음을 보나요? 특히 마음의 접촉을 조건의 만남으로 알아차리면 떠오른 생각을 사실이나 자아로 즉시 받아들이는 습관은 어떻게 달라지나요?

“여섯 느낌을 알아야 한다. 왜 그렇게 말했는가? 눈·형상·눈의식의 만남이 접촉이고, 접촉을 조건으로 눈의 느낌이 생긴다. 귀와 소리에서도, 코와 냄새에서도 의식과 접촉을 거쳐 각각 느낌이 생긴다.”

‘Cha vedanākāyā veditabbā’ti—iti kho panetaṁ vuttaṁ. Kiñcetaṁ paṭicca vuttaṁ? 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ṁ, tiṇṇaṁ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sotañca paṭicca sadde ca uppajjati sotaviññāṇaṁ, tiṇṇaṁ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ghānañca paṭicca gandhe ca uppajjati ghānaviññāṇaṁ, tiṇṇaṁ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맛지마 니까야 MN 148 차착까 숫따 (여섯씩 여섯 묶음)

배경

느낌은 접촉을 조건으로 생깁니다. 눈과 형상에서 눈의식이 생기고 셋이 만나 접촉이 되며, 그 접촉에서 느낌이 생깁니다. 귀와 소리, 코와 냄새도 각각 귀의식·코의식과 만나 접촉을 이루고 느낌으로 이어집니다.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곧 대상의 절대적 가치라고 여기기 전에, 특정 접촉이 낳은 조건적 결과임을 보는 단계입니다. 같은 대상도 조건이 달라지면 느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묵상

보기·듣기·냄새 맡기에서 생긴 느낌을 대상이 본래 지닌 좋고 나쁜 성질로 단정하고 있나요? 눈·귀·코의 기관과 대상과 의식이 만나 접촉이 되고 그 조건에서 느낌이 생긴다고 따라가 보면, 느낌과 대상 사이에 어떤 여백이 생기나요?

“혀와 맛, 몸과 감촉, 마음과 마음의 대상에서도 각각 의식이 생기고 셋의 만남이 접촉이 되며, 그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긴다. 이것을 두고 여섯 느낌을 알아야 한다고 했으니, 이것이 다섯째 묶음이다.”

jivhañca paṭicca rase ca uppajjati jivhāviññāṇaṁ, tiṇṇaṁ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kāyañca paṭicca phoṭṭhabbe ca uppajjati kāyaviññāṇaṁ, tiṇṇaṁ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manañca paṭicca dhamme ca uppajjati manoviññāṇaṁ, tiṇṇaṁ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Cha vedanākāyā veditabbā’ti—iti yaṁ taṁ vuttaṁ, idametaṁ paṭicca vuttaṁ. Idaṁ pañcamaṁ chakkaṁ.

맛지마 니까야 MN 148 차착까 숫따 (여섯씩 여섯 묶음)

배경

혀의 느낌은 혀·맛·혀의식의 접촉에서, 몸의 느낌은 몸·감촉·몸의식의 접촉에서, 마음의 느낌은 마음·마음의 대상·마음의식의 접촉에서 생깁니다. 어느 갈래에서도 느낌은 원인 없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앞선 세 갈래와 합쳐 여섯 느낌이 되고, 부처님은 이를 다섯째 묶음이라 부릅니다. 마음속 생각 때문에 생긴 느낌도 몸의 감각과 마찬가지로 조건을 따라 살필 수 있습니다.

묵상

맛·감촉·마음의 대상에서 일어난 느낌이 어떤 기관과 대상과 의식의 만남을 거쳐 왔는지 거슬러 볼 수 있나요? 마음속 기억에서 생긴 느낌까지 조건 지어진 것으로 보면, 그 느낌이 곧 진실이라고 믿고 따라가는 힘은 어떻게 약해지나요?

“여섯 갈망을 알아야 한다. 왜 그렇게 말했는가? 눈과 형상에서 눈의식과 접촉과 느낌이 차례로 생기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망이 생긴다. 귀와 소리, 코와 냄새에서도 각각 의식·접촉·느낌을 조건으로 갈망이 생긴다.”

‘Cha taṇhākāyā veditabbā’ti—iti kho panetaṁ vuttaṁ. Kiñcetaṁ paṭicca vuttaṁ? 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ṁ, tiṇṇaṁ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ṇhā; sotañca paṭicca sadde ca uppajjati sotaviññāṇaṁ …pe… ghānañca paṭicca gandhe ca uppajjati ghānaviññāṇaṁ …

맛지마 니까야 MN 148 차착까 숫따 (여섯씩 여섯 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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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묶음은 경험의 흐름이 붙잡음으로 기우는 지점을 보여 줍니다. 눈에서는 눈과 형상에 의존한 눈의식, 셋의 접촉, 접촉에서 느낌, 느낌에서 갈망이 이어집니다. 귀에서도 귀·소리·귀의식·귀접촉·귀느낌·귀갈망이 이어지고, 코에서도 코·냄새·코의식·코접촉·코느낌·코갈망이 이어집니다. 감각의 종류는 달라도 느낌을 조건으로 갈망이 생기는 원인과 결과의 방향은 같습니다.

묵상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은 뒤 느낌에서 곧바로 더 원하거나 밀어내는 갈망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알아차리나요? 눈·귀·코 각각의 기관과 대상에서 의식·접촉·느낌·갈망이 차례로 생기는 과정을 보면 어디에서 흐름을 놓을 수 있나요?

“혀와 맛, 몸과 감촉, 마음과 마음의 대상에서도 각각 의식이 생기고 접촉과 느낌이 뒤따르며, 느낌을 조건으로 갈망이 생긴다. 이것을 두고 여섯 갈망을 알아야 한다고 했으니, 이것이 여섯째 묶음이다.”

jivhañca paṭicca rase ca uppajjati jivhāviññāṇaṁ … kāyañca paṭicca phoṭṭhabbe ca uppajjati kāyaviññāṇaṁ … manañca paṭicca dhamme ca uppajjati manoviññāṇaṁ, tiṇṇaṁ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ṇhā. ‘Cha taṇhākāyā veditabbā’ti—iti yaṁ taṁ vuttaṁ, idametaṁ paṭicca vuttaṁ. Idaṁ chaṭṭhaṁ chakkaṁ.

맛지마 니까야 MN 148 차착까 숫따 (여섯씩 여섯 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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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에서는 맛을 조건으로 한 혀의식·혀접촉·혀느낌·혀갈망이, 몸에서는 감촉을 조건으로 한 몸의식·몸접촉·몸느낌·몸갈망이 이어집니다. 마음에서도 마음의 대상에 의존한 마음의식과 마음접촉, 마음의 느낌과 갈망이 생깁니다. 각 감각은 고유한 기관과 대상을 가지지만 의식에서 접촉, 느낌에서 갈망으로 이어지는 관계는 같습니다. 여섯째 묶음까지 오면 감각 경험이 갈망으로 이어지는 전체 지도가 완성됩니다.

묵상

맛과 감촉과 생각에서 생긴 느낌을 붙들어 다시 얻거나 없애려는 갈망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보이나요? 혀·몸·마음 각각의 기관과 대상, 의식과 접촉과 느낌을 차례로 살피면 갈망을 “내 뜻”으로 믿기 전 어떤 조건을 알아차릴 수 있나요?

2 생겼다 사라지는 것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 13구절

눈에서 마음까지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든 요소가 자아일 수 없는 까닭

“눈이 자아라고 말한다면 옳지 않다. 눈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니, 그렇다면 자아도 생겨나고 사라진다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눈은 자아가 아니다.”

‘Cakkhu attā’ti yo vadeyya taṁ na upapajjati. Cakkhuss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ṁ hoti. Tasmā taṁ na upapajjati: ‘cakkhu attā’ti yo vadeyya. Iti cakkhu anatt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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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여섯 묶음을 제시한 뒤 각 요소가 자아일 수 있는지 검토합니다. 첫 대상은 눈입니다. 눈이 생기고 쇠하며 기능을 잃는 변화가 관찰되는데도 눈을 자아라고 하면, 자아 역시 조건 따라 생겼다가 사라진다는 결론이 따릅니다. 이는 변치 않는 주인이라는 자아 관념과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눈은 소중히 돌볼 몸의 기관이지만 “이것이 곧 나”라고 여길 변하지 않는 무엇은 아닙니다.

묵상

시력과 눈의 상태가 달라질 때 “내가 무너진다”고 느끼는 마음에는 눈을 자아로 붙드는 믿음이 숨어 있나요? 눈이 생겨나고 변하고 사라지는 기관임을 분명히 보면 몸을 돌보면서도 그것을 고정된 나라고 여기는 힘은 어떻게 달라지나요?

“형상들이 자아라고 말한다면 옳지 않다. 형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드러나므로, 자아도 생겨나고 사라진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도 형상도 자아가 아니다.”

‘Rūpā attā’ti yo vadeyya taṁ na upapajjati. Rūpānaṁ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ṁ hoti. Tasmā taṁ na upapajjati: ‘rūpā attā’ti yo vadeyya. Iti cakkhu anattā, rūpā anattā.

맛지마 니까야 MN 148 차착까 숫따 (여섯씩 여섯 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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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눈에 보이는 형상을 검토합니다. 색과 모양, 사람의 모습과 장면은 조건에 따라 나타나고 변하며 사라집니다. 그런 형상을 자아라고 붙들면 자아도 장면마다 생겼다가 없어지는 셈이 됩니다. 결론은 눈뿐 아니라 형상도 자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상이 아름답거나 위협적으로 보이는 것과, 그 대상을 나 또는 내 본질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묵상

거울 속 모습이나 타인의 시선에 비친 형상을 “이것이 바로 나”라고 고정하고 있나요? 눈에 보이는 모든 형상이 생겨나고 달라지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 외모와 이미지에 책임 있게 응하면서도 그것을 자아로 삼지 않는 길은 어떻게 열리나요?

“눈의 의식이 자아라고 말한다면 옳지 않다. 눈의 의식도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드러나므로, 자아도 그렇게 생겨나고 사라진다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눈과 형상과 눈의 의식은 자아가 아니다.”

‘Cakkhuviññāṇaṁ attā’ti yo vadeyya taṁ na upapajjati. Cakkhuviññāṇass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ṁ hoti. Tasmā taṁ na upapajjati: ‘cakkhuviññāṇaṁ attā’ti yo vadeyya. Iti cakkhu anattā, rūpā anattā, cakkhuviññāṇaṁ anatt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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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앎인 눈의 의식도 눈과 형상에 의존하여 잠시 생기고 조건이 흩어지면 사라집니다. 이를 자아라고 하면 보는 의식이 없는 순간에는 자아도 사라졌다고 해야 하므로 고정된 주인이라는 관념을 지킬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눈, 형상, 눈의 의식 모두 나라고 할 것이 없다고 밝힙니다. “내가 본 것이니 절대 확실하다”는 믿음도 조건 지어진 의식의 한계를 돌아보게 됩니다.

묵상

무언가를 보았다는 확신을 곧 고정된 내가 소유한 완전한 진실로 여기나요? 눈과 형상이 갖추어질 때 눈의 의식이 생기고 사라진다는 조건성을 보면, 내가 본 것에 책임을 지면서도 그 인상을 절대화하지 않는 태도는 어떻게 가능해지나요?

“눈의 접촉이 자아라고 말한다면 옳지 않다. 눈의 접촉도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드러나므로, 자아도 그렇게 생겨나고 사라진다고 해야 한다. 눈·형상·눈의식·눈의 접촉은 모두 자아가 아니다.”

‘Cakkhusamphasso attā’ti yo vadeyya taṁ na upapajjati. Cakkhusamphassass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ṁ hoti. Tasmā taṁ na upapajjati: ‘cakkhusamphasso attā’ti yo vadeyya. Iti cakkhu anattā, rūpā anattā, cakkhuviññāṇaṁ anattā, cakkhusamphasso anatt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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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접촉은 눈·형상·눈의식이라는 셋의 만남입니다. 세 조건에 의존하므로 접촉 역시 매 순간 생겨나고 사라집니다. 이 변화하는 만남을 자아라고 부르면 자아가 접촉마다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모순이 따릅니다. 부처님은 앞의 세 요소에 눈의 접촉까지 더해 모두 나라고 할 것이 없다고 결론 내립니다. 경험이 생생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만남을 “나의 본질”이라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생생함과 영속성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묵상

강렬한 장면을 마주친 접촉의 순간을 오래 붙들며 그것이 나를 결정한다고 느끼나요? 눈·형상·눈의식이 모일 때만 눈의 접촉이 생겼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보면, 한 번의 경험을 평생의 자아로 만드는 습관은 어떻게 느슨해지나요?

“느낌이 자아라고 말한다면 옳지 않다. 느낌도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드러나므로, 자아도 그렇게 생겨나고 사라진다고 해야 한다. 눈·형상·눈의식·눈의 접촉·느낌은 모두 자아가 아니다.”

‘Vedanā attā’ti yo vadeyya taṁ na upapajjati. Vedanāy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ṁ hoti. Tasmā taṁ na upapajjati: ‘vedanā attā’ti yo vadeyya. Iti cakkhu anattā, rūpā anattā, cakkhuviññāṇaṁ anattā, cakkhusamphasso anattā, vedanā anatt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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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접촉을 조건으로 생긴 느낌은 즐거움·괴로움·중성 가운데 하나로 나타나지만 머물지 않습니다. 느낌을 자아와 같은 것으로 여기면 기분이 바뀔 때마다 자아가 태어나고 사라진다고 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그 모순을 지적하고 눈에서 느낌까지 다섯 요소가 모두 나라고 할 것이 없다고 밝힙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판단이 사실은 잠시 일어난 느낌을 자아로 굳힌 것인지 살펴보게 합니다.

묵상

즐겁거나 괴롭거나 무덤덤한 느낌이 일어날 때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곧바로 자신을 단정 짓나요? 접촉에서 생긴 느낌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면, 느낌을 억누르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자아로 굳히지 않는 여유는 어떻게 생기나요?

“갈망이 자아라고 말한다면 옳지 않다. 갈망도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드러나므로, 자아도 그렇게 생겨나고 사라진다고 해야 한다. 눈·형상·눈의식·눈의 접촉·느낌·갈망은 모두 자아가 아니다.”

‘Taṇhā attā’ti yo vadeyya taṁ na upapajjati. Taṇhāy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ṁ hoti. Tasmā taṁ na upapajjati: ‘taṇhā attā’ti yo vadeyya. Iti cakkhu anattā, rūpā anattā, cakkhuviññāṇaṁ anattā, cakkhusamphasso anattā, vedanā anattā, taṇhā anatt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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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느낌을 붙잡아 더 얻거나 밀어내려는 갈망도 조건에 따라 생겼다가 사라집니다. 욕구가 강하다는 이유로 “이것이 진짜 내 마음”이라고 여기면, 갈망이 바뀔 때마다 자아도 함께 바뀌어야 합니다. 부처님은 눈의 감각기관에서 갈망까지 여섯 요소를 모두 나라고 할 것이 없다고 결론 내립니다. 욕구를 내 정체성으로 미화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원인과 사라짐을 지닌 과정으로 볼 근거가 마련됩니다.

묵상

강한 욕구가 생겼을 때 그것을 “본래의 나” 또는 “반드시 따라야 할 진심”이라고 여기나요? 눈·형상·의식·접촉·느낌을 조건으로 갈망이 생겼다가 사라진다고 보면, 욕구를 알아차리되 복종하지 않는 선택은 어떻게 가능해지나요?

“귀·소리·귀의식·귀접촉·느낌·갈망은 생겨나고 사라지므로 모두 자아가 아니다. 코와 냄새의 여섯도, 혀와 맛의 여섯도, 몸과 감촉의 여섯도 각각 생겨나고 사라지므로 모두 자아가 아니다.”

‘Sotaṁ attā’ti yo vadeyya …pe… ‘ghānaṁ attā’ti yo vadeyya …pe… ‘jivhā attā’ti yo vadeyya …pe… ‘kāyo attā’ti yo vadeyya …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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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이치가 귀·코·혀·몸에도 똑같이 이어집니다. 귀·소리·귀의식·귀접촉·느낌·갈망, 코·냄새·코의식·코접촉·느낌·갈망, 혀·맛·혀의식·혀접촉·느낌·갈망, 몸·감촉·몸의식·몸접촉·느낌·갈망이 각각 생기고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어느 감각기관이나 대상, 의식·접촉·느낌·갈망도 고정된 자아가 될 수 없습니다. 네 갈래 모두 눈과 같은 이유로 예외 없이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묵상

소리·냄새·맛·감촉에서 일어나는 의식과 접촉과 느낌과 갈망 가운데 특히 “나다운 것”이라고 붙드는 갈래는 무엇인가요? 네 감각의 여섯 요소가 모두 조건 따라 생기고 사라짐을 보면 익숙한 취향과 반응을 자아로 삼는 힘은 어떻게 달라지나요?

“마음이 자아라고 말한다면 옳지 않다. 마음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드러나므로, 자아도 생겨나고 사라진다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자아가 아니다.”

‘mano attā’ti yo vadeyya taṁ na upapajjati. Manass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ṁ hoti. Tasmā taṁ na upapajjati: ‘mano attā’ti yo vadeyya. Iti mano anatt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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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 분석은 마음도 예외로 두지 않습니다. 생각하고 기억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마음 역시 상태와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습이 분명합니다. 마음을 자아라고 하면 자아도 매 순간 함께 생멸한다는 결론이 따르므로 변하지 않는 무엇이라는 주장과 맞지 않습니다. 마음을 나라고 할 것이 없다고 본다는 것은, 마음의 변화를 “나의 전부”라고 같은 것으로 여기지 않고 정확히 아는 일입니다.

묵상

생각이 빠르거나 흐리고 마음이 안정되거나 흔들릴 때 그 상태를 곧 나의 본질이라고 판단하나요? 마음 자체도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 지금의 정신 상태를 정직하게 돌보면서도 “이것이 영원한 나”라고 붙들지 않는 길은 어떻게 보이나요?

“마음의 대상이 자아라고 말한다면 옳지 않다. 마음의 대상도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드러나므로 자아가 될 수 없다. 마음도 마음의 대상도 자아가 아니다.”

‘Dhammā attā’ti yo vadeyya taṁ na upapajjati. Dhammānaṁ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ṁ hoti. Tasmā taṁ na upapajjati: ‘dhammā attā’ti yo vadeyya. Iti mano anattā, dhammā anatt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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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생각·기억·계획처럼 마음이 아는 대상도 조건에 따라 나타나고 머물다 사라집니다. 그것을 자아라고 하면 자아 역시 마음의 대상과 함께 생겨나고 사라진다고 해야 하므로 주장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마음과 마음의 대상 모두 나라고 할 것이 없다고 차례로 결론 내립니다. 생각이 중요하고 강렬할 수는 있어도, 변화하는 생각의 내용을 곧 자신의 변치 않는 무엇으로 삼을 근거는 없습니다.

묵상

떠오른 기억이나 계획이나 관념을 “이것이 곧 나”라고 붙들고 있나요? 마음의 대상이 조건 따라 나타나고 머물다 사라지는 것을 보면, 생각의 내용을 진지하게 살피면서도 그 내용으로 자신의 존재 전체로 못박지 않을 수 있나요?

“마음의 의식이 자아라고 말한다면 옳지 않다. 마음의 의식도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드러나므로 자아가 될 수 없다. 마음·마음의 대상·마음의 의식은 모두 자아가 아니다.”

‘Manoviññāṇaṁ attā’ti yo vadeyya taṁ na upapajjati. Manoviññāṇass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ṁ hoti. Tasmā taṁ na upapajjati: ‘manoviññāṇaṁ attā’ti yo vadeyya. Iti mano anattā, dhammā anattā, manoviññāṇaṁ anatt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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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의식은 마음과 마음의 대상을 조건으로 생기는 앎입니다. 집중할 때와 산만할 때, 기억이 떠오를 때와 사라질 때 그 의식도 변합니다. 이렇게 생멸하는 의식을 자아라고 하면 자아도 매번 생멸한다고 해야 하므로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마음과 대상에 이어 마음의 의식까지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결론은 “알고 있는 주체만큼은 변치 않는 나”라는 마지막 피난처조차 남겨 두지 않습니다.

묵상

생각의 내용은 변해도 그것을 아는 의식만큼은 고정된 나라고 느끼나요? 마음과 마음의 대상에 의존해 마음의 의식도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면, 앎의 순간을 소유하는 영원한 주체라는 믿음은 어떻게 달라지나요?

“마음의 접촉이 자아라고 말한다면 옳지 않다. 마음의 접촉도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드러나므로 자아가 될 수 없다. 마음·대상·마음의식·마음의 접촉은 모두 자아가 아니다.”

‘Manosamphasso attā’ti yo vadeyya taṁ na upapajjati. Manosamphassass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ṁ hoti. Tasmā taṁ na upapajjati: ‘manosamphasso attā’ti yo vadeyya. Iti mano anattā, dhammā anattā, manoviññāṇaṁ anattā, manosamphasso anatt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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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마음의 대상·마음의식이 만날 때 마음의 접촉이 생깁니다. 어떤 생각이 마음을 강하게 건드리는 순간도 조건이 모인 접촉이며, 조건이 바뀌면 사라집니다. 이 접촉을 자아라고 하면 자아도 접촉의 생겨남과 사라짐에 따라야 하므로 옳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마음·대상·마음의식·접촉 네 가지를 하나씩 짚어 모두 나라고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며, 강렬한 내적 경험도 조건이 모여 생긴 만남임을 보여 줍니다.

묵상

기억이나 생각이 마음을 세게 건드린 한순간을 나의 본질이나 운명으로 굳히고 있나요? 마음·대상·마음의식이 만나 생긴 접촉도 사라진다고 보면, 내적 경험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그 경험에 갇히지 않는 길은 어떻게 열리나요?

“느낌이 자아라고 말한다면 옳지 않다. 느낌도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드러나므로 자아가 될 수 없다. 마음·대상·마음의식·마음의 접촉·느낌은 모두 자아가 아니다.”

‘Vedanā attā’ti yo vadeyya taṁ na upapajjati. Vedanāy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ṁ hoti. Tasmā taṁ na upapajjati: ‘vedanā attā’ti yo vadeyya. Iti mano anattā, dhammā anattā, manoviññāṇaṁ anattā, manosamphasso anattā, vedanā anatt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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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접촉에서 생긴 느낌 역시 머물지 않습니다. 생각 하나가 즐겁게도 괴롭게도 무덤덤하게도 느껴지지만, 대상과 주의가 달라지면 느낌도 변합니다. 느낌을 자아라고 고정하면 자아도 느낌마다 생겨나고 사라져야 하므로 주장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의 갈래에서도 다섯 요소가 모두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결론은 감정의 변화를 자아의 실패나 완성으로 오해하지 않게 합니다. 느낌의 변화는 곧 존재 전체의 변화가 아닙니다.

묵상

생각에서 비롯된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곧 나 자신이라고 여기며 그 느낌에 따라 정체성을 바꾸나요? 마음의 접촉을 조건으로 일어난 느낌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면, 감정을 충분히 느끼면서도 자아로 굳히지 않을 수 있나요?

“갈망이 자아라고 말한다면 옳지 않다. 갈망도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드러나므로 자아가 될 수 없다. 마음·대상·마음의식·마음의 접촉·느낌·갈망은 모두 자아가 아니다.”

‘Taṇhā attā’ti yo vadeyya taṁ na upapajjati. Taṇhāy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ṁ hoti. Tasmā taṁ na upapajjati: ‘taṇhā attā’ti yo vadeyya. Iti mano anattā, dhammā anattā, manoviññāṇaṁ anattā, manosamphasso anattā, vedanā anattā, taṇhā anatt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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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느낌을 붙잡아 어떤 생각을 계속 원하거나 없애려는 갈망도 생멸합니다. 갈망을 자아로 삼으면 욕구가 바뀔 때마다 자아가 생겼다 사라져야 하므로 옳지 않습니다. 이로써 마음·마음의 대상·마음의식·마음접촉·느낌·갈망의 여섯 요소가 모두 나라고 할 것이 없다고 밝혀집니다. 눈에서 시작한 논증은 귀·코·혀·몸을 거쳐 마음까지 빠짐없이 적용되어 예외적인 자아의 자리를 남기지 않습니다.

묵상

마음속 계획이나 기억을 계속 붙잡고 싶은 갈망을 “이것이 내 진짜 뜻”이라고 여기는 순간이 있나요? 마음에서 갈망까지 여섯 요소가 모두 조건 따라 생멸한다고 보면, 욕구를 존중하되 자아의 명령으로 절대화하지 않는 태도는 어떻게 생기나요?

3 붙잡음의 발생과 소멸 7구절

내 것·나·자아라는 세 가지 동일시와 그것을 놓는 반대 방향

“수행자들이여, 이것이 몸과 마음을 실체로 여기는 생각이 생겨나는 길이다. 눈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 나이며,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고, 형상도 그와 같이 여긴다.”

Ayaṁ kho pana, bhikkhave, sakkāyasamudayagāminī paṭipadā—cakkhuṁ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rūpe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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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여섯 요소가 자아일 수 없다는 분석에 이어, 괴로운 정체성이 어떻게 생기는지가 드러납니다. 첫걸음은 눈과 형상을 “내 것·나·나의 자아”라는 세 방식으로 붙잡는 것입니다. 소유한다는 생각, 그것과 내가 같다는 생각, 그 안에 변치 않는 자아가 있다는 생각이 겹쳐 조건 지어진 경험을 단단한 실체로 만듭니다. 여기서 생겨나는 것은 몸과 마음을 실체로 취하는 관점입니다.

묵상

보는 능력이나 외모와 장면을 “내 것”, “나”, “나의 자아”라고 붙드는 세 생각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은 무엇인가요? 눈과 형상을 돌보고 분별하는 일과 그것을 내 것으로 삼고, 나와 같은 것으로 여기고, 나라고 붙잡는 일의 경계를 어떻게 경험에서 알아볼 수 있나요?

“눈의 의식·눈의 접촉·느낌·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을 ‘내 것, 나, 나의 자아’라고 여긴다. 귀와 소리, 귀의식·귀접촉·느낌·갈망도 각각 ‘내 것, 나, 나의 자아’라고 여긴다.”

cakkhuviññāṇaṁ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cakkhusamphassaṁ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vedanaṁ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taṇhaṁ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sotaṁ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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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갈래에서는 의식과 접촉, 느낌과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까지 소유함·같은 것으로 여김·자아로 삼음이 이어집니다. 귀에서도 귀·소리·귀의식·귀접촉·느낌·갈망 여섯 모두를 똑같이 “내 것·나·나의 자아”로 여깁니다. 감각기관만이 아니라 그것이 낳은 앎과 만남, 정서와 욕구까지 자아의 재료로 삼을 때 변하지 않는 무엇으로 여기는 몸과 마음이 계속 생겨납니다. 움켜쥠은 한 요소에만 머물지 않고 경험의 조건 사슬 전체로 번집니다.

묵상

들었던 말과 그때의 느낌과 다시 듣고 싶은 갈망까지 한데 묶어 “내 경험이므로 곧 나”라고 만들고 있나요? 귀의 여섯 요소 각각에서 소유한다는 생각, 같은 것으로 여기는 생각, 자아라는 생각을 구별해 보면 어느 고리에서 붙잡음이 가장 선명한가요?

“코와 냄새의 여섯, 혀와 맛의 여섯, 몸과 감촉의 여섯을 각각 ‘내 것, 나, 나의 자아’라고 여긴다. 마음·마음의 대상·마음의식·마음접촉·느낌·목마름 같은 갈망(딴하)도 모두 그와 같이 여긴다.”

ghānaṁ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pe… jivhaṁ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pe… kāyaṁ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pe… manaṁ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dhamme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manoviññāṇaṁ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manosamphassaṁ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vedanaṁ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taṇhaṁ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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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혀·몸에서도 각각 기관과 대상, 그 의식과 접촉, 느낌과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의 여섯 요소를 “내 것·나·나의 자아”로 여길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도 마음·마음의 대상·마음의식·마음접촉·느낌·갈망을 하나씩 같은 세 방식으로 붙잡습니다. 여섯 감각의 서른여섯 요소 어디에서든 이러한 움켜쥠이 일어나면, 조건에 따라 흐르는 과정을 변하지 않는 무엇으로 여기는 관점이 생겨나고 괴로움의 토대가 됩니다.

묵상

냄새·맛·감촉·생각 가운데 소유함과 같은 것으로 여김이 특히 빠르게 일어나는 경험은 무엇인가요? 각 감각의 기관·대상·의식·접촉·느낌·갈망을 따로 살피면서 “내 것, 나, 나의 자아”라는 세 겹의 해석을 덜어 내면 무엇이 남나요?

“수행자들이여, 이것이 ‘나’로 여겨지는 몸과 마음(삭까야)이 사라지는 데로 이끄는 길이다. 눈을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보고, 형상도 그와 같이 본다.”

Ayaṁ kho pana, bhikkhave, sakkāyanirodhagāminī paṭipadā—cakkhuṁ ‘netaṁ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Rūpe ‘netaṁ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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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길은 잘못된 움켜쥠을 바로 보는 일입니다. 눈과 형상에 대해 “내 것이 아님·내가 아님·나의 자아가 아님”이라는 세 부정을 적용합니다. 이것은 조건 지어진 것을 소유하거나 같은 것으로 여기거나 자아로 삼지 않는 관찰입니다. 발생의 길에서 붙인 세 겹의 해석을 정확히 거두므로 변하지 않는 무엇으로 여기는 생각이 사라지는 쪽으로 향합니다.

묵상

눈과 형상을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보는 일이 몸을 소홀히 하거나 현실을 부정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요? 돌봄과 책임은 유지하면서 소유함·같은 것으로 여김·자아로 삼음만 놓는다면 보는 경험은 어떻게 가벼워지나요?

“눈의 의식·눈의 접촉·느낌·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을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본다. 귀와 소리, 귀의식·귀접촉·느낌·갈망도 각각 그와 같이 본다.”

Cakkhuviññāṇaṁ ‘netaṁ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Cakkhusamphassaṁ ‘netaṁ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Vedanaṁ ‘netaṁ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Taṇhaṁ ‘netaṁ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Sotaṁ ‘netaṁ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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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의식에서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까지 네 요소에 세 가지 부정을 적용한 뒤, 귀·소리·귀의식·귀접촉·느낌·갈망도 각각 “내 것이 아님·내가 아님·나의 자아가 아님”으로 봅니다. 듣는 경험과 그 반응은 여전히 조건에 따라 일어나지만, 그것을 소유물이나 정체성이나 영원한 자아로 굳히지 않습니다. 이렇게 귀의 여섯 요소에서 세 겹의 움켜쥠을 거두면 변하지 않는 무엇으로 여기는 관점은 더 이상 먹이를 얻지 못합니다.

묵상

누군가의 말을 듣고 생긴 의식·접촉·느낌·갈망을 오랫동안 “내 상처”나 “내 욕망”으로 소유하고 있나요? 귀의 여섯 요소에 세 가지 부정을 차례로 적용하면 경험을 인정하면서도 그 경험이 나를 지배하지 않게 되는 지점은 어디인가요?

“코와 냄새의 여섯, 혀와 맛의 여섯, 몸과 감촉의 여섯을 각각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본다. 마음과 마음의 대상도 그와 같이 본다.”

ghānaṁ ‘netaṁ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pe… jivhaṁ ‘netaṁ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pe… kāyaṁ ‘netaṁ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pe… manaṁ ‘netaṁ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Dhamme ‘netaṁ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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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혀·몸에서도 각 감각기관과 대상, 의식과 접촉, 느낌과 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을 하나씩 세 가지 부정으로 봅니다. 이어 마음과 마음의 대상도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봅니다. 냄새와 맛과 감촉, 생각의 대상이 일으키는 경험을 없애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 지어진 경험은 그대로 알면서 그것을 소유하거나 같은 것으로 여겨 단단한 정체성으로 만드는 해석을 멈추는 수행입니다.

묵상

냄새·맛·감촉의 취향과 마음속 관념을 내 고유한 정체성이라 지키려 할 때가 있나요? 코·혀·몸의 여섯 요소와 마음·마음의 대상을 세 가지 부정으로 살피면, 취향과 생각을 존중하면서도 거기에 갇히지 않는 여지는 어떻게 생기나요?

“마음의 의식·마음의 접촉·느낌·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을 각각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본다. 이와 같이 마음의 여섯 요소를 바로 보면, ‘나’로 여겨지는 몸과 마음이 사라지는 쪽으로 향한다.”

Manoviññāṇaṁ ‘netaṁ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Manosamphassaṁ ‘netaṁ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Vedanaṁ ‘netaṁ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Taṇhaṁ ‘netaṁ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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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짐을 살피는 일은 마음과 마음의 대상에 이어 마음의식·마음접촉·느낌·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에까지 이어져 마음 갈래의 여섯 요소를 모두 아우릅니다. 각각을 소유하지 않고 같은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자아로 보지 않는다고 해서 의식과 느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조건 지어진 경험을 변하지 않는 무엇으로 만드는 움켜쥠이 멎는 것입니다. 여섯 감각 모두에 이 관찰을 적용하면, 집착이 생겨나는 길과는 반대로 사라지는 방향이 분명해집니다.

묵상

떠오른 생각을 아는 의식, 그 접촉에서 생긴 느낌과 갈망을 “내 것이 아니다”라고 볼 때 무관심이나 회피로 흐르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내 것도 나도 자아도 아니다’라고 보는 것이 움켜쥠을 푸는 앎이라는 점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나요?

4 느낌에 끌려가는 길 5구절

즐거움·괴로움·중성 느낌에서 욕심·반감·모름이 자라는 과정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 눈의식이 생기고, 셋의 만남인 접촉에서 즐겁거나 괴롭거나 중성인 느낌이 생긴다. 즐거운 느낌을 반기고 붙들면 탐냄의 잠재 성향이 따르고, 괴로운 느낌에 슬퍼하고 절규하며 혼란에 빠진다.”

Cakkhuñca, bhikkhave,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ṁ, tiṇṇaṁ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ṁ sukhaṁ vā dukkhaṁ vā adukkhamasukhaṁ vā. So 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abhinandati abhivadati ajjhosāya tiṭṭhati. Tassa rāgānusayo anuseti.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socati kilamati paridevati urattāḷiṁ kandati sammohaṁ āpajj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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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경험에서 세 느낌에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드러납니다. 눈·형상·눈의식이 만나 접촉이 되고, 그 조건에서 즐거움·괴로움·중성의 느낌 가운데 하나가 생깁니다. 즐거움을 승인하고 환영하며 달라붙어 머물면 탐냄의 잠재 성향이 자랍니다. 괴로움에 닿아 슬퍼하고 지치고 통곡하며 가슴을 치고 혼란에 빠지면 다음에 설명될 반감의 잠재 성향이 자리 잡습니다. 느낌보다 반응이 습관을 키웁니다.

묵상

눈으로 본 장면에서 즐거운 느낌이 생길 때 반기고 환영하며 붙드는 움직임을 알아차리나요? 괴로운 느낌이 생길 때 슬픔과 절규와 혼란으로 번지는 과정도 보면서, 느낌 자체와 그 느낌에 덧붙이는 반응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나요?

“그 괴로움에는 반감의 잠재 성향이 따른다. 중성 느낌의 생김과 사라짐,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모르면 모름의 성향이 따른다. 탐냄·반감·모름을 버리지 않고 이 생에서 괴로움을 끝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Tassa paṭighānusayo anuseti. Adukkhama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tassā vedanāya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ṁ nappajānāti. Tassa avijjānusayo anuseti. So vata, bhikkhave, sukhāya vedanāya rāgānusayaṁ appahāya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aṁ appaṭivinodetvā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aṁ asamūhanitvā avijjaṁ appahāya vijjaṁ anuppādetvā diṭṭheva dhamme dukkhassantakaro bhavissatīti—netaṁ ṭhānaṁ vijj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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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 느낌에 무너지면 반감의 잠재 성향이 남습니다. 중성 느낌은 눈에 띄지 않기 쉬운데, 그 생김과 사라짐, 매력과 위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면 모름이 자리 잡습니다. 즐거운 느낌의 탐냄을 버리지 않고 괴로운 느낌의 반감을 몰아내지 않으며 중성 느낌의 모름을 뿌리 뽑지 않고, 무지도 버리지 않으며 앎도 일으키지 않는다면 지금 여기서 괴로움을 끝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부처님은 분명히 부정합니다.

묵상

즐거운 느낌의 탐냄과 괴로운 느낌의 반감은 잘 보면서도 중성 느낌에서 생기는 모름은 놓치고 있나요? 중성 느낌의 생김·사라짐·달콤함·위험·벗어남을 살피면, 무덤덤함 속에서 자동으로 이어지던 습관은 어떻게 드러나나요?

“귀·소리에서 귀의식·귀접촉과 세 느낌이, 코·냄새에서 코의식·코접촉과 세 느낌이 생긴다. 혀·맛과 몸·감촉에서도 각각 의식·접촉과 세 느낌이 생기며, 즐거움을 붙들면 탐냄, 괴로움에 무너지면 반감, 중성 느낌을 바로 알지 못하면 모름이 따른다. 그 성향들을 없애지 않고 무지도 버리지 않으며 앎도 일으키지 않으면 이 생에서 괴로움을 끝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Sotañca, bhikkhave, paṭicca sadde ca uppajjati sotaviññāṇaṁ …pe… ghānañca, bhikkhave, paṭicca gandhe ca uppajjati ghānaviññāṇaṁ …pe… jivhañca, bhikkhave, paṭicca rase ca uppajjati jivhāviññāṇaṁ …pe… kāyañca, bhikkhave, paṭicca phoṭṭhabbe ca uppajjati kāyaviññāṇaṁ …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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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코·혀·몸에도 눈에서 확인한 조건과 반응이 각각 이어집니다. 각 기관과 대상에서 해당 의식이 생기고, 셋의 접촉에서 즐겁거나 괴롭거나 중성인 느낌이 생깁니다. 즐거운 느낌을 승인하고 붙들면 탐냄, 괴로운 느낌에 슬퍼하고 혼란에 빠지면 반감, 중성 느낌의 생김·사라짐·달콤함·위험·벗어남을 모르면 모름이 따릅니다. 세 잠재 성향을 버리지 않고 무지도 버리지 않으며 앎도 일으키지 않으면 어느 감각 갈래에서도 괴로움의 끝은 불가능합니다.

묵상

소리·냄새·맛·감촉 가운데 즐거움에는 탐냄, 괴로움에는 반감, 중성 느낌에는 모름이 가장 자주 따르는 갈래는 무엇인가요? 네 감각마다 기관·대상·의식·접촉·세 느낌의 조건과 그 느낌에 대한 반응을 따로 살피면 자동 반응을 멈출 자리는 어디인가요?

“마음과 마음의 대상을 조건으로 마음의식이 생기고, 셋의 만남인 마음접촉에서 세 종류의 느낌이 생긴다. 즐거움을 반기고 붙들면 탐냄이 따르며, 괴로움에 슬퍼하고 지치고 통곡하고 가슴 치며 혼란에 빠진다.”

manañca, bhikkhave, paṭicca dhamme ca uppajjati manoviññāṇaṁ, tiṇṇaṁ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ṁ sukhaṁ vā dukkhaṁ vā adukkhamasukhaṁ vā. So 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abhinandati abhivadati ajjhosāya tiṭṭhati. Tassa rāgānusayo anuseti.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socati kilamati paridevati urattāḷiṁ kandati sammohaṁ āpajj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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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갈래에서도 감각의 조건과 반응은 같습니다. 마음과 마음의 대상에 의존해 마음의식이 생기고, 셋의 만남인 마음접촉에서 즐겁거나 괴롭거나 중성인 느낌이 생깁니다. 즐거운 생각의 느낌을 승인하고 환영하며 달라붙으면 탐냄의 잠재 성향이 따릅니다. 괴로운 기억이나 관념의 느낌에 슬퍼하고 지치고 통곡하며 가슴을 치고 혼란에 빠질 때는 반감이 자랄 조건이 마련됩니다. 생각도 조건 사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묵상

즐거운 생각을 되풀이하며 붙들 때 탐냄의 성향이 자라는 것을 보나요? 괴로운 기억에 닿아 슬픔과 혼란이 커질 때에도 마음·대상·의식·접촉·느낌의 조건 사슬을 따라가면, 생각의 내용과 반응 사이에서 무엇을 새롭게 알아차리나요?

“그 괴로움에는 반감이 따른다. 중성 느낌의 생김과 사라짐,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을 모르면 모름이 따른다. 탐냄·반감·모름을 버리지 않고 무지도 버리지 않으며 앎도 일으키지 않은 채 이 생에서 괴로움을 끝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Tassa paṭighānusayo anuseti. Adukkhama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tassā vedanāya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ṁ nappajānāti. Tassa avijjānusayo anuseti. So vata, bhikkhave, sukhāya vedanāya rāgānusayaṁ appahāya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aṁ appaṭivinodetvā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aṁ asamūhanitvā avijjaṁ appahāya vijjaṁ anuppādetvā diṭṭheva dhamme dukkhassantakaro bhavissatīti—netaṁ ṭhānaṁ vijj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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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서 생긴 괴로운 느낌에 반감의 성향이 따르고, 중성 느낌의 생김과 사라짐, 매력과 위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면 모름의 성향이 남습니다. 즐거움에 대한 탐냄을 버리지 않고, 괴로움에 대한 반감을 물리치지 않으며, 중성 느낌의 모름을 뿌리 뽑지 않고, 무지도 버리지 않으며 앎도 일으키지 않는다면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낼 수 없습니다.

묵상

마음속 중성 느낌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그 생김과 사라짐,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을 놓치고 있나요? 탐냄·반감·모름을 그대로 둔 채 괴로움만 끝나기를 바라는 모순은 지금 반복하는 생각과 반응에서 어떻게 나타나나요?

5 느낌에서 자유로워지는 길 5구절

세 느낌을 바로 알아 잠재 성향을 끊고 지금 괴로움을 끝내는 길

“눈과 형상에서 눈의식과 접촉이 생기고, 접촉에서 즐겁거나 괴롭거나 중성인 느낌이 생긴다. 즐거운 느낌을 반기거나 붙들지 않으면 탐냄이 따르지 않고, 괴로운 느낌에도 슬퍼하거나 지치거나 통곡하거나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Cakkhuñca, bhikkhave,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ṁ, tiṇṇaṁ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ṁ sukhaṁ vā dukkhaṁ vā adukkhamasukhaṁ vā. So 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nābhinandati nābhivadati nājjhosāya tiṭṭhati. Tassa rāgānusayo nānuseti.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na socati na kilamati na paridevati na urattāḷiṁ kandati na sammohaṁ āpajj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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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눈의 경험에서도 반응이 달라지면 잠재 성향은 자라지 않습니다. 눈·형상·눈의식의 만남인 접촉에서 세 느낌이 생기는 조건 구조는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즐거움을 승인하고 환영하며 달라붙지 않으면 탐냄이 따르지 않습니다. 괴로운 느낌에 닿아도 슬퍼하고 지치고 통곡하며 가슴을 치고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느낌을 습관의 먹이로 삼지 않는 길입니다.

묵상

즐거운 장면을 보았을 때 느낌은 분명히 알면서도 승인하고 환영하며 달라붙지 않을 수 있나요? 괴로운 장면 앞에서도 슬픔을 억누르지 않되 통곡과 혼란으로 증폭시키지 않는다면, 느낌과 반응 사이에 어떤 자유가 드러나나요?

“괴로운 느낌에는 반감이 따르지 않는다. 중성 느낌의 생김과 사라짐,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면 모름이 따르지 않는다. 탐냄·반감·모름을 버리고 무지를 버려 앎을 일으키면 이 생에서 괴로움을 끝낼 수 있다.”

Tassa paṭighānusayo nānuseti. Adukkhama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tassā vedanāya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ṁ pajānāti. Tassa avijjānusayo nānuseti. So vata, bhikkhave, sukhāya vedanāya rāgānusayaṁ pahāya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aṁ paṭivinodetvā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aṁ samūhanitvā avijjaṁ pahāya vijjaṁ uppādetvā diṭṭheva dhamme dukkhassantakaro bhavissatīti—ṭhānametaṁ vijj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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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 느낌을 증폭하지 않으면 반감의 잠재 성향이 따르지 않습니다. 중성 느낌에 대해서도 생김과 사라짐, 매력과 위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면 모름이 자리 잡지 않습니다. 즐거움의 탐냄을 버리고 괴로움의 반감을 몰아내며 중성 느낌의 모름을 뿌리 뽑고, 무지를 버려 앎을 일으킨 사람은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낼 수 있습니다.

묵상

괴로운 느낌에서 반감을 키우지 않고 중성 느낌의 생김·사라짐·달콤함·위험·벗어남을 바로 아는 순간이 있나요? 탐냄·반감·모름을 하나씩 버리는 일이 지금 이 느낌에 대한 반응에서 시작된다는 점은 무엇을 바꾸나요?

“귀·소리에서 귀의식·귀접촉과 세 느낌이, 코·냄새에서 코의식·코접촉과 세 느낌이 생긴다. 혀·맛과 몸·감촉에서도 각각 의식·접촉과 세 느낌이 생기며, 즐거움을 붙들지 않으면 탐냄이 없고 괴로움에 무너지지 않으면 반감이 없으며 중성 느낌의 생멸·달콤함·위험·벗어남을 알면 모름이 없다. 그 성향들을 버리고 무지를 버려 앎을 일으키면 이 생에서 괴로움을 끝낼 수 있다.”

Sotañca, bhikkhave, paṭicca sadde ca uppajjati sotaviññāṇaṁ …pe…. Ghānañca, bhikkhave, paṭicca gandhe ca uppajjati ghānaviññāṇaṁ …pe…. Jivhañca, bhikkhave, paṭicca rase ca uppajjati jivhāviññāṇaṁ …pe…. Kāyañca, bhikkhave, paṭicca phoṭṭhabbe ca uppajjati kāyaviññāṇaṁ …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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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코·혀·몸에도 눈에서 밝힌 해방의 길이 각각 이어집니다. 각 기관과 대상에서 해당 의식이 생기고, 셋의 접촉에서 즐겁거나 괴롭거나 중성인 느낌이 생깁니다. 즐거운 느낌을 반기고 붙들지 않아 탐냄이 따르지 않고, 괴로운 느낌에 슬퍼하고 혼란에 빠지지 않아 반감이 따르지 않으며, 중성 느낌의 생김·사라짐·달콤함·위험·벗어남을 알아 모름이 따르지 않습니다. 세 잠재 성향을 버리고 무지를 버려 앎을 일으키면 바로 이 삶의 괴로움을 끝낼 수 있습니다.

묵상

귀·코·혀·몸 가운데 즐거움을 붙들지 않고 괴로움에 무너지지 않으며 중성 느낌을 바로 아는 연습이 가장 필요한 갈래는 무엇인가요? 네 감각마다 기관·대상·의식·접촉·세 느낌의 조건과 탐냄·반감·모름이 사라짐을 따로 확인하면 해방은 얼마나 구체적으로 다가오나요?

“마음과 마음의 대상에서 마음의식과 마음접촉이 생기고, 접촉에서 세 느낌이 생긴다. 즐거운 느낌을 반기거나 붙들지 않으면 탐냄이 따르지 않고, 괴로운 느낌에도 슬퍼하거나 지치거나 통곡하거나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Manañca, bhikkhave, paṭicca dhamme ca uppajjati manoviññāṇaṁ tiṇṇaṁ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ṁ sukhaṁ vā dukkhaṁ vā adukkhamasukhaṁ vā. So 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nābhinandati nābhivadati nājjhosāya tiṭṭhati. Tassa rāgānusayo nānuseti.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na socati na kilamati na paridevati na urattāḷiṁ kandati na sammohaṁ āpajj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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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갈래에서도 해방의 길은 같습니다. 마음과 마음의 대상을 조건으로 마음의식이 생기고, 셋의 만남인 마음접촉에서 즐거움·괴로움·중성의 느낌이 생깁니다. 즐거운 생각을 승인하고 환영하며 붙들지 않으면 탐냄의 잠재 성향이 따르지 않습니다. 괴로운 생각에 닿더라도 슬퍼하고 지치고 통곡하며 가슴을 치고 혼란에 빠지지 않을 때, 반감이 자랄 조건도 함께 끊어집니다.

묵상

즐거운 기억이나 상상을 붙들지 않아 탐냄이 자라지 않는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괴로운 생각이 떠올라도 슬픔과 혼란을 더하지 않으면서 마음·대상·의식·접촉·느낌의 조건을 분명히 보면 반응의 방향은 어떻게 달라지나요?

“괴로운 마음의 느낌에는 반감이 따르지 않는다. 중성 느낌의 생김과 사라짐,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을 바로 알면 모름이 따르지 않는다. 탐냄·반감·모름을 버리고 앎을 일으키면 바로 이 생에서 괴로움을 끝낼 수 있다.”

Tassa paṭighānusayo nānuseti. Adukkhama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tassā vedanāya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ṁ pajānāti. Tassa avijjānusayo nānuseti. So vata, bhikkhave, sukhāya vedanāya rāgānusayaṁ pahāya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aṁ paṭivinodetvā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aṁ samūhanitvā avijjaṁ pahāya vijjaṁ uppādetvā diṭṭheva dhamme dukkhassantakaro bhavissatīti—ṭhānametaṁ vijj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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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 마음의 느낌을 증폭하지 않으면 반감의 성향이 따르지 않습니다. 중성인 마음의 느낌도 생김과 사라짐, 매력과 위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면 모름의 성향이 남지 않습니다. 이렇게 즐거움의 탐냄을 버리고 괴로움의 반감을 물리치며 중성 느낌의 모름을 뿌리 뽑고, 무지를 버려 앎을 일으키면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내는 일이 가능합니다.

묵상

마음속 중성 느낌을 흐릿하게 지나치지 않고 그 생김과 사라짐,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까지 알고 있나요? 즐거움의 탐냄과 괴로움의 반감과 중성의 모름이 따르지 않는 순간, 괴로움의 끝은 지금의 마음에서 어떻게 확인되나요?

6 싫증에서 해방으로 2구절

여섯 감각의 모든 요소에 대한 싫증과 욕심 소멸과 풀려남

“이와 같이 보는 배운 거룩한 제자는 눈·형상·눈의식·눈접촉·느낌·목마름 같은 갈망(딴하)에 싫증 낸다. 귀와 소리의 여섯, 코와 냄새의 여섯, 혀와 맛의 여섯, 몸과 감촉의 여섯에도 싫증 내며, 마음·대상·마음의식·마음접촉·느낌·갈망에도 싫증 낸다.”

Evaṁ passaṁ,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cakkhusmiṁ nibbindati, rūpesu nibbindati, cakkhuviññāṇe nibbindati, cakkhusamphasse nibbindati, vedanāya nibbindati, taṇhāya nibbindati. Sotasmiṁ nibbindati, saddesu nibbindati …pe… ghānasmiṁ nibbindati, gandhesu nibbindati … jivhāya nibbindati, rasesu nibbindati … kāyasmiṁ nibbindati, phoṭṭhabbesu nibbindati … manasmiṁ nibbindati, dhammesu nibbindati, manoviññāṇe nibbindati, manosamphasse nibbindati, vedanāya nibbindati, taṇhāya nibbind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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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적 생김과 나라고 할 것이 없음, 느낌에 대한 두 반응을 이와 같이 본 거룩한 제자에게 싫증이 일어납니다. 제자는 더 이상 감각에서 영원한 만족과 자아의 근거를 찾지 않습니다. 귀·코·혀·몸의 각 갈래에서도 기관·대상·의식·접촉·느낌·목마름 같은 갈망(딴하) 모두에 같은 싫증이 일어납니다. 눈에서 마음까지 서른여섯 요소 어느 것도 붙잡을 피난처가 아니라는 통찰이 완전해집니다.

묵상

여섯 감각의 경험을 미워하는 것과 그것에서 영원한 만족과 자아를 찾는 일에 싫증 내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요? 눈·귀·코·혀·몸·마음의 각 여섯 요소를 빠짐없이 살필 때, 감각의 즐거움을 계속 얻어야 한다는 압박이 약해지는 지점은 어디인가요?

“싫증 내어 탐냄에서 벗어나고, 탐냄에서 벗어나 풀려나며, 풀려났을 때 ‘풀려났다’는 앎이 생긴다. ‘태어남은 다했고, 거룩한 삶은 완성되었으며, 할 일을 마쳤고, 다시 이런 존재가 되지 않는다’고 안다.” 이 가르침을 듣는 동안 수행자 예순 명의 마음이 붙잡음 없이 흘러드는 것에서 풀려났다.

Nibbindaṁ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ṁ vimuttamiti ñāṇaṁ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ṁ brahmacariyaṁ, kataṁ karaṇīyaṁ, nāparaṁ itthattāyā’ti pajānātī”ti. Idamavoca bhagavā. Attamanā te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ṁ abhinandunti. Imasmiṁ kho pana veyyākaraṇasmiṁ bhaññamāne saṭṭhimattānaṁ bhikkhūnaṁ anupādāya āsavehi cittāni vimucciṁsū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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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증은 탐냄에서 벗어남으로, 탐냄이 사라짐은 풀려남으로 이어집니다. 풀려남은 풀려났다는 분명한 앎과 함께합니다. 제자는 태어남이 다했고 거룩한 삶을 완성했으며 할 일을 마쳐 다시 같은 존재 과정으로 돌아오지 않음을 압니다. 부처님이 말씀을 마치자 수행자들은 기뻐하며 받아들였고, 가르침이 이어지는 동안 예순 명의 수행자가 붙잡지 않음으로 흘러드는 것에서 마음이 풀려났습니다.

묵상

감각의 즐거움을 얻으려는 일에 싫증이 나 탐냄이 엷어지고, 그 사라짐을 스스로 분명히 아는 흐름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수행자 예순 명이 가르침을 듣는 동안 붙잡음 없이 풀려난 결말처럼, 지금 놓을 수 있는 한 가지 움켜쥠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