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좋아함과 싫어함에 빠진 그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어떤 느낌을 느끼든, 그 느낌을 기뻐하고 환영하며 붙들고 머문다. 그 느낌을 기뻐하고 환영하며 붙들고 머무는 그에게 즐김이 일어난다. 느낌에 대한 즐김이 곧 집착이요,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과 근심·슬픔·괴로움·낙담·절망이 생겨난다.
So evaṁ anurodhavirodhaṁ samāpanno yaṁ kiñci vedanaṁ vedeti sukhaṁ vā dukkhaṁ vā adukkhamasukhaṁ vā, so taṁ vedanaṁ abhinandati abhivadati ajjhosāya tiṭṭhati. Tassa taṁ vedanaṁ abhinandato abhivadato ajjhosāya tiṭṭhato uppajjati nandī. Yā vedanāsu nandī tadupādānaṁ, tassupādānapaccayā bhavo, bhavapaccayā jāti, jātipaccayā jarāmaraṇaṁ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배경
느낌에서 괴로움까지의 전 과정을 부처님이 한 문장에 압축하신 대목입니다. 가운데 놓인 짧은 낱말은 ‘즐김’이며 빠알리로는 난디입니다. 그 느낌을 ‘기뻐하고 환영하며 붙들고 머무는’ 세 단계 동작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못을 박듯 정의하십니다. “느낌에 대한 즐김이 곧 집착이다.” 즐김과 집착 사이에 시간차가 없습니다. 같은 것의 두 이름입니다. 우리가 하루 종일 하고 있는 일, 즉 좋은 느낌은 더 오래 붙들고 싫은 느낌은 밀어내는 그 사소한 작업이 존재 전체를 굴리는 바퀴의 첫 톱니입니다.
묵상
좋은 느낌이 지나갈 때 “조금만 더” 하고 붙드는 순간이 있나요? 그 붙듦은 아주 짧고 가벼워서 집착처럼 느껴지지도 않아요. 그런데 부처님은 바로 그것을 집착이라 부르셨어요. 왜 그러셨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