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모든 것에 앞서고,
마음이 으뜸이며,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내느니라.
더러운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르나니,
수레를 끄는 소의 발자국을
수레바퀴가 따르듯 하느니라.
Manopubbaṅgamā dhammā, manoseṭṭhā manomayā; Manasā ce paduṭṭhena, bhāsati vā karoti vā; Tato naṁ dukkhamanveti, cakkaṁva vahato padaṁ.
법구경 Dhammapada 1 배경
법구경 423게송이 이 한 줄로 시작합니다. 첫 낱말 마노뿝방가마(manopubbaṅgamā)는 '마음이 앞서 간다'는 뜻입니다. 뒤따르는 담마(dhammā)는 여기서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가 겪는 온갖 일과 상태를 가리킵니다. 말과 행동이 먼저 있고 마음이 나중에 붙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방향을 잡고 말과 행동이 그 뒤를 따른다는 순서를 못박은 것입니다. 비유가 정확합니다. 수레바퀴는 소를 따라갈지 말지 고르지 않습니다. 소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바퀴자국이 남습니다.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느냐가 정해지면 그 결과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따라오는 것입니다. 다만 시차가 있어서 우리는 둘을 잘 잇지 못합니다.
묵상
오늘 누군가에게 건넨 말 하나를 떠올려 보세요. 그 말이 나오기 직전에 마음은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었나요? 말을 고치는 것보다 그 앞의 기울기를 알아차리는 편이 빠를지도 모릅니다.
마음이 모든 것에 앞서고,
마음이 으뜸이며,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내느니라.
맑은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르나니,
결코 떠나지 않는 그림자처럼
따르느니라.
Manopubbaṅgamā dhammā, manoseṭṭhā manomayā; Manasā ce pasannena, bhāsati vā karoti vā; Tato naṁ sukhamanveti, chāyāva anapāyinī.
법구경 Dhammapada 2 배경
앞 게송과 한 글자만 다릅니다. 빠둣테나(paduṭṭhena, 더럽혀진)가 빠산네나(pasannena, 맑은)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같은 틀을 뒤집어 두 번 말하는 것이 이 품의 이름이 '쌍을 이루는 것'인 까닭입니다. 비유도 짝을 이룹니다. 앞에서는 무겁게 굴러오는 수레바퀴였고 여기서는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소리도 없고 무게도 없지만 빛이 있는 한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아나빠이니(anapāyinī)는 '떠나가지 않는'이라는 뜻입니다. 맑은 마음에서 나온 행위의 결과는 요란하게 오지 않고, 대신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묵상
누군가에게 조건 없이 잘해 준 기억이 있나요? 그때 돌아온 것은 요란한 보답이었나요, 아니면 오래 지나도 옅어지지 않는 어떤 감각이었나요?
‘그가 나를 욕했다, 그가 나를 때렸다.
그가 나를 이겼다, 그가 내 것을 빼앗았다.’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 이에게는
원한이 가라앉지 않느니라.
Akkocchi maṁ avadhi maṁ, ajini maṁ ahāsi me; Ye ca taṁ upanayhanti, veraṁ tesaṁ na sammati.
법구경 Dhammapada 3 배경
네 가지 호소가 나란히 놓입니다. 욕설, 폭력, 패배, 빼앗김. 크기는 다르지만 형태는 같습니다. 모두 '그가 나에게'라는 구조입니다. 핵심 낱말은 우빠나이한띠(upanayhanti)로, '가까이 두고 묶어 둔다'는 뜻입니다. 일이 일어난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을 붙들어 매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부처님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어떻게 다루느냐를 말씀하십니다. 되새길수록 사건은 처음보다 커지고, 커진 만큼 다시 되새기게 됩니다. 원한이 가라앉지 않는 것은 상대가 계속 해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되새김이 계속되기 때문이라는 관찰입니다.
묵상
머릿속에서 여러 번 재생한 장면이 있나요? 그 장면은 몇 년 전에 한 번 일어났는데, 나는 그 뒤로 몇 번이나 다시 겪었을까요?
‘그가 나를 욕했다, 그가 나를 때렸다.
그가 나를 이겼다, 그가 내 것을 빼앗았다.’
이런 생각을 품지 않는 이에게는
원한이 가라앉느니라.
Akkocchi maṁ avadhi maṁ, ajini maṁ ahāsi me; Ye ca taṁ nupanayhanti, veraṁ tesūpasammati.
법구경 Dhammapada 4 배경
앞 게송에서 부정어 하나만 더해진 짝입니다. 여기서 오해하기 쉬운 대목이 있습니다. 품지 않는다는 것은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여기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게송은 네 가지 호소를 지우지 않고 그대로 다시 읊습니다. 욕을 먹었고 맞았고 졌고 빼앗겼습니다. 달라진 것은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붙들고 있느냐입니다. 우빠사맏띠(upasammati)는 '가라앉는다'는 뜻으로, 억지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흔들린 물이 저절로 맑아지듯 잦아드는 것을 말합니다. 놓는다고 곧바로 가라앉지는 않지만, 붙들고 있는 한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묵상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다만 지금 그것을 붙들고 있어서 치르는 값이 무엇인지 한 가지만 적어 볼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 원한은
원한으로는 결코 풀리지 않나니,
원한을 내려놓음으로써 풀리느니라.
이것은 예로부터 변함없는 이치이니라.
Na hi verena verāni, sammantīdha kudācanaṁ; Averena ca sammanti, esa dhammo sanantano.
법구경 Dhammapada 5 배경
법구경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게송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여러 생에 걸쳐 서로를 해쳐 온 두 존재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갚아 주면 끝날 것 같지만 갚음은 상대에게 새로운 이유가 되고, 그 이유가 다시 돌아옵니다. 사난따노(sanantano)는 '아주 오래된, 예로부터 그러한'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이 새로 만든 규칙이 아니라 원래 그러한 이치임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아웨레나(averena)는 '원한 없음으로써'입니다. 상대를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되갚을 마음을 거두는 것만으로 연쇄가 끊긴다는 뜻입니다. 한쪽이 멈추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구조이므로, 누가 먼저 멈추느냐가 남습니다.
묵상
'내가 왜 먼저 멈춰야 하는가' 하는 마음이 드나요? 당연합니다. 다만 그 연쇄를 끊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지금 그것을 겪고 있는 나뿐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죽어 간다는 것을
저들은 알지 못하느니라.
이것을 아는 이들은
다툼을 그치느니라.
Pare ca na vijānanti, mayamettha yamāmase; Ye ca tattha vijānanti, tato sammanti medhagā.
법구경 Dhammapada 6 배경
다툼이 그치는 근거를 부처님은 도덕이 아니라 죽음에 두십니다. 야마마세(yamāmase)는 '우리는 죽어 간다'는 뜻입니다. 다투는 두 편이 모두 같은 시간 안에서 사라져 가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면 싸울 거리가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한역 법구경과 갈리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한역은 이 자리에 '남을 탓하지 말고 자신을 살피라'는 권고를 넣었습니다. 결론은 같지만 근거가 다릅니다. 빠알리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대신, 다투는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보게 합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사소한 일로 갈라져 오래 다툰 승가의 일을 전합니다.
묵상
지금 껄끄러운 사람을 떠올려 보세요. 그 사람도 나도 언젠가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을 알 때, 지금 다투는 그 일의 크기가 조금 달라 보이나요?
대상의 아름다운 면만 보며 살고
감각의 문을 지키지 않고,
먹는 데 절도가 없으며
게으르고 애씀이 약한 이는,
바람이 여린 나무를 쓰러뜨리듯
마라가 그를 넘어뜨리느니라.
Subhānupassiṁ viharantaṁ, indriyesu asaṁvutaṁ; Bhojanamhi cāmattaññuṁ, kusītaṁ hīnavīriyaṁ; Taṁ ve pasahati māro, vāto rukkhaṁva dubbalaṁ.
법구경 Dhammapada 7 배경
마라(māra)는 뿔 달린 악마라기보다 사람을 제자리에 붙들어 두는 힘을 인격처럼 부른 이름입니다. 게송은 그 힘에 넘어가는 조건 네 가지를 셉니다. 즐거운 것만 보는 것, 감각을 단속하지 않는 것, 먹는 데 절도가 없는 것, 애씀이 약한 것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먹는 일이 수행 이야기와 나란히 놓였다는 점입니다. 인드리예수 아상우땅(indriyesu asaṁvutaṁ)은 '감각의 문이 닫히지 않은'이라는 뜻으로, 들어오는 대로 다 받아들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린 나무가 뽑히는 것은 바람이 유난히 세서가 아니라 뿌리가 얕아서입니다. 문제를 바깥의 세기가 아니라 안의 밑동에 두는 시선입니다.
묵상
요즘 넘어가기 쉬운 순간은 언제인가요? 늦은 밤인가요, 지쳤을 때인가요, 배고플 때인가요? 그 조건 하나만 바꿔 두어도 버티는 힘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즐거움에 기울지 않고
감각의 문을 잘 지키며,
먹는 데 절도를 알고
믿음이 있으며 꾸준히 애쓰는 이는,
바람이 바위산을 흔들지 못하듯
마라가 그를 넘어뜨리지 못하느니라.
Asubhānupassiṁ viharantaṁ, Indriyesu susaṁvutaṁ; Bhojanamhi ca mattaññuṁ, Saddhaṁ āraddhavīriyaṁ; Taṁ ve nappasahati māro, Vāto selaṁva pabbataṁ.
법구경 Dhammapada 8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아수바누빳시(asubhānupassiṁ)를 글자대로 옮기면 '아름답지 않은 것을 살펴보는'이 됩니다. 세상을 추하게 보라는 말이 아니라, 겉의 좋아 보이는 면만 보지 말고 변해 가는 면까지 함께 보라는 뜻으로 읽습니다. 앞 게송이 즐거운 쪽만 보는 눈을 문제 삼았으니, 그 짝은 양쪽을 다 보는 눈입니다. 비유도 여린 나무에서 바위산으로 바뀝니다. 바위산은 바람과 싸우지 않습니다. 버티려고 힘을 쓰지도 않습니다. 다만 밑동이 깊어서 흔들릴 일이 없을 뿐입니다. 애씀이란 매번 이겨 내는 것이 아니라 흔들릴 일이 줄어든 상태에 가깝다는 그림입니다.
묵상
무너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어 본 적이 있나요? 그 방식이 오래가던가요? 버티는 힘보다 흔들릴 일을 줄이는 쪽이 더 편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의 때를 벗지 못한 이가
수행자의 옷을 입으려 한다면,
절제도 진실도 없는 그는
그 옷을 입을 자격이 없느니라.
Anikkasāvo kāsāvaṁ, yo vatthaṁ paridahissati; Apeto damasaccena, na so kāsāvamarahati.
법구경 Dhammapada 9 배경
빠알리 원문은 말놀이로 되어 있습니다. 아닉까사와(anikkasāva, 때를 벗지 못한)와 까사와(kāsāva, 수행자의 물들인 옷)가 소리로 겹칩니다. 겉에 걸친 물색과 안에 남은 얼룩을 나란히 놓아 대비시킨 것입니다. 다마삿쩨나(damasaccena)는 '다스림과 진실'로, 스스로를 다잡는 힘과 거짓 없음을 함께 가리킵니다. 이 게송을 수행자에게만 해당하는 말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이름이나 자리를 얻는 일과, 그 이름에 값하는 사람이 되는 일은 별개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옷은 하루면 입을 수 있지만 얼룩은 그렇지 않습니다.
묵상
지금 내가 가진 이름표 하나를 떠올려 보세요. 그 이름에 값하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부분일수록 정직하게 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마음의 때를 벗고
행실이 잘 갖추어졌으며,
절제와 진실을 지닌 이는
그 옷을 입을 자격이 있느니라.
Yo ca vantakasāvassa, sīlesu susamāhito; Upeto damasaccena, sa ve kāsāvamarahati.
법구경 Dhammapada 10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완따까사왓사(vantakasāvassa)에서 완따(vanta)는 '토해 낸'이라는 뜻입니다. 때를 씻어 냈다기보다 몸 밖으로 완전히 밀어냈다는, 꽤 강한 그림입니다. 실라(sīla)는 흔히 계율로 옮기지만 본래 몸에 밴 됨됨이에 가깝습니다. 규칙을 외워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익어서 자연스러워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게송의 순서가 중요합니다. 자격이 먼저 주어지고 사람이 그에 맞춰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갖추어진 뒤에 자격이 뒤따릅니다. 앞뒤를 바꾸면 9게송의 사람이 됩니다.
묵상
억지로 지키는 일과 그냥 하게 되는 일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요? 지금 억지로 지키는 것 하나가 몸에 배려면 얼마나 더 반복해야 할까요?
알맹이가 아닌 것을 알맹이로 여기고
알맹이인 것을 알맹이 아니라 보는 이들은,
그릇된 생각을 자리로 삼기에
알맹이에 이르지 못하느니라.
Asāre sāramatino, sāre cāsāradassino; Te sāraṁ nādhigacchanti, micchāsaṅkappagocarā.
법구경 Dhammapada 11 배경
사라(sāra)는 나무 한가운데의 단단한 속고갱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겉껍질과 무른 부분을 다 걷어 내고 남는, 실제로 쓸모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니 이 게송은 참과 거짓을 가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무엇이 알맹이인지 알아보는 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대목을 참과 거짓으로 옮겼고, 그 결과 인식의 문제가 진위 판별의 문제로 좁아졌습니다. 고짜라(gocara)는 '소가 풀을 뜯는 자리'에서 온 말로, 마음이 늘 머무는 곳을 뜻합니다. 잘못 보는 것이 한 번의 실수가 아니라 마음이 늘 머무는 자리에서 비롯된다는 지적입니다.
묵상
지난 한 해 가장 많은 시간을 쏟은 일은 무엇이었나요? 그것은 알맹이였나요, 아니면 알맹이처럼 보이던 껍질이었나요?
알맹이를 알맹이로 알고
알맹이 아닌 것을 아닌 줄 아는 이들은,
바른 생각을 자리로 삼기에
알맹이에 이르느니라.
Sārañca sārato ñatvā, asārañca asārato; Te sāraṁ adhigacchanti, sammāsaṅkappagocarā.
법구경 Dhammapada 12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여기서 요구하는 일이 두 가지라는 점입니다. 알맹이를 알아보는 것만이 아니라 알맹이가 아닌 것을 아닌 줄 아는 것까지 함께 갑니다. 좋은 것을 고르는 눈과 아닌 것을 접는 눈은 다른 능력이고, 대개 뒤엣것이 더 어렵습니다. 이미 쏟은 시간이 아까워서 아닌 줄 알면서도 붙들기 때문입니다. 삼마상깝빠(sammāsaṅkappa)는 여덟 가지 바른 길 가운데 두 번째로, 바르게 마음먹는 것을 가리킵니다. 앞 게송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한 번의 판단이 아니라 마음이 늘 머무는 자리로 놓여 있습니다.
묵상
아닌 줄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것이 있나요? 놓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 좋아서인가요, 아니면 지금까지 들인 것이 아까워서인가요?
성글게 이은 지붕에
비가 새어들듯,
닦이지 않은 마음에는
탐욕이 새어드느니라.
Yathā agāraṁ ducchannaṁ, vuṭṭhī samativijjhati; Evaṁ abhāvitaṁ cittaṁ, rāgo samativijjhati.
법구경 Dhammapada 13 배경
라가(rāga)는 욕망 전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점을 짚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한역 법구경이 이 자리를 음란함으로 옮겼고, 한국에서 널리 읽히는 번역들이 이 대목을 성적인 욕망으로 새기는 것은 빠알리가 아니라 그 한역을 따른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원문이 말하는 것은 더 넓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더 갖고 싶은 마음, 뒤처지기 싫은 마음이 모두 여기 들어갑니다. 사마띠윗자띠(samativijjhati)는 '꿰뚫고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비는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틈으로 들어옵니다. 큰 구멍이 아니라 성글게 이은 자리로 스며듭니다.
묵상
요즘 마음이 자주 새는 자리가 있나요? 큰 사건이 아니라 사소하게 반복되는 틈일수록 오래 젖어 있게 됩니다.
촘촘히 이은 지붕에
비가 새어들지 못하듯,
잘 닦인 마음에는
탐욕이 새어들지 못하느니라.
Yathā agāraṁ suchannaṁ, vuṭṭhī na samativijjhati; Evaṁ subhāvitaṁ cittaṁ, rāgo na samativijjhati.
법구경 Dhammapada 14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아바위땅(abhāvitaṁ)과 수바위땅(subhāvitaṁ)의 뿌리인 바웨띠(bhāveti)는 '있게 한다, 길러 낸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이 무언가를 지워 없애는 일이 아니라 없던 것을 길러 내는 일에 가깝다는 말입니다. 비유도 그렇습니다. 지붕을 촘촘히 잇는 일은 비를 막으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미리 해 두는 일입니다. 비가 올 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붕은 한 번에 다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 두 게송이 나란히 놓인 자리에 부처님의 이복동생이 출가 초기에 겪은 흔들림에 관한 이야기가 주석서로 전합니다.
묵상
비가 오기 전에 미리 해 둘 수 있는 일 한 가지는 무엇일까요? 지금 마음이 평온하다면, 오히려 지금이 지붕을 손볼 때인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도 슬퍼하고
저 세상에서도 슬퍼하나니,
나쁜 일을 한 이는 두 곳에서 슬퍼하느니라.
제 손으로 더럽힌 행위를 보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느니라.
Idha socati pecca socati, Pāpakārī ubhayattha socati; So socati so vihaññati, Disvā kammakiliṭṭhamattano.
법구경 Dhammapada 15 배경
여기서 15게송부터 18게송까지 네 편이 하나의 묶음으로 이어집니다. 같은 틀에 낱말만 바꿔 가며 네 번 반복하는 구조입니다. 이 게송의 초점은 벌이 아니라 봄에 있습니다. 디스와(disvā)는 '보고서'라는 뜻으로, 괴로움이 바깥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한 일을 자기가 보는 데서 온다고 말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어도 한 사람은 압니다. 원문은 행위가 얼룩졌다는 표현(kammakiliṭṭha)을 씁니다. 행위 자체가 얼룩으로 남아 그것을 볼 때마다 다시 겪게 된다는 그림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짐승을 잡아 살던 이가 죽음에 이르러 겪은 일을 전합니다.
묵상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혼자 계속 떠오르는 것이 있나요? 그것을 잊으려 애쓰기보다,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갚음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는 편이 나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기뻐하고
저 세상에서도 기뻐하나니,
좋은 일을 한 이는 두 곳에서 기뻐하느니라.
제 손으로 깨끗이 한 행위를 보고
기뻐하고 크게 기뻐하느니라.
Idha modati pecca modati, Katapuñño ubhayattha modati; So modati so pamodati, Disvā kammavisuddhimattano.
법구경 Dhammapada 16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슬퍼함이 소짜띠(socati)였다면 여기서는 모다띠(modati)로 바뀌고, 뒤에 빠모다띠(pamodati)가 더해집니다. 앞에 붙은 빠(pa-)는 정도를 키우는 접두어라 '한층 더 기뻐한다'가 됩니다. 슬픔 쪽에서는 봄이 괴로움으로 이어졌는데, 기쁨 쪽에서는 봄이 기쁨을 한 겹 더 얹습니다. 같은 구조인데 방향만 다릅니다. 여기서 좋은 일이란 큰일을 뜻하지 않습니다. 뿐냐(puñña)는 쌓이는 것에 가까운 말이라,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일들이 모여 나중에 돌아볼 무언가가 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묵상
오늘 한 일 가운데 나중에 떠올려도 부끄럽지 않을 일이 하나 있나요? 아주 작은 것이어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적어 두면 어떨까요?
이 세상에서도 시달리고
저 세상에서도 시달리나니,
나쁜 일을 한 이는 두 곳에서 시달리느니라.
‘내가 나쁜 일을 저질렀구나’ 하며 시달리고,
나쁜 곳에 이르러 더욱 시달리느니라.
Idha tappati pecca tappati, Pāpakārī ubhayattha tappati; “Pāpaṁ me katan”ti tappati, Bhiyyo tappati duggatiṁ gato.
법구경 Dhammapada 17 배경
15게송이 슬픔이었다면 여기서는 땁빠띠(tappati)로 바뀝니다. 이 낱말은 본래 불에 그슬리거나 달구어진다는 뜻이라, 슬픔보다 훨씬 뜨겁고 오래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15게송에서는 행위를 보는 것이었는데 여기서는 그것이 말이 됩니다. '내가 나쁜 일을 저질렀구나' 하는 문장이 안에서 반복되는 상태입니다. 뉘우침과 자책은 이 지점에서 갈립니다. 뉘우침은 다음 행동을 바꾸지만 자책은 문장만 되풀이합니다. 게송이 뒤에 비요(bhiyyo, 더욱)를 붙인 것은 그 되풀이가 저절로 잦아들지 않는다는 관찰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묵상
'내가 왜 그랬을까'를 몇 번이나 되뇌었나요? 그 되뇜이 다음 행동을 바꾸고 있나요, 아니면 같은 자리를 계속 태우고만 있나요?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워하나니,
좋은 일을 한 이는 두 곳에서 즐거워하느니라.
‘내가 좋은 일을 했구나’ 하며 즐거워하고,
좋은 곳에 이르러 더욱 즐거워하느니라.
Idha nandati pecca nandati, Katapuñño ubhayattha nandati; “Puññaṁ me katan”ti nandati, Bhiyyo nandati suggatiṁ gato.
법구경 Dhammapada 18 배경
네 편으로 이어진 묶음의 마지막입니다. 15게송과 17게송이 나쁜 일 쪽을, 16게송과 18게송이 좋은 일 쪽을 맡아 두 번씩 짝을 이룹니다. 난다띠(nandati)는 즐거워한다는 뜻이고, 여기서도 그 즐거움은 자기가 한 일을 떠올리는 데서 옵니다. 주목할 것은 이 네 편 어디에도 상을 주거나 벌을 내리는 존재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심판자가 없습니다. 행위를 한 사람과 그것을 보는 사람이 같은 사람일 뿐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도 두려움 없이 갔던 한 소녀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묵상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떠올릴 때 마음이 놓이는 장면이 있나요? 그런 장면이 몇 개나 되는지가, 나중에 어떤 마음으로 지내게 될지를 정할지도 모릅니다.
경을 많이 외워 말할지라도
마음을 놓아 그대로 살지 않으면,
남의 소를 세는 목동과 같아서
수행하는 이의 몫을 얻지 못하느니라.
Bahumpi ce saṁhita bhāsamāno, Na takkaro hoti naro pamatto; Gopova gāvo gaṇayaṁ paresaṁ, Na bhāgavā sāmaññassa hoti.
법구경 Dhammapada 19 배경
비유가 날카롭습니다. 목동은 소를 셉니다. 매일 세고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는 한 마리도 그의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과 가진 것을 가르는 그림입니다. 딱까로(takkaro)는 '그것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들은 대로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도 문제는 아는 것이 적은 데 있지 않습니다. 게송은 오히려 많이 외운 경우를 들었습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비유를 '소떼처럼 모여 있다'로 옮겨 셈과 소유를 가르는 논리가 사라졌습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함께 출가한 두 벗의 서로 다른 길을 전합니다.
묵상
읽어서 아는 것과 살아서 아는 것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요? 최근에 읽고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가운데 실제로 해 본 것은 몇 개인가요?
경을 적게 외워 말할지라도
가르침을 따라 살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버리고
바르게 알아 마음이 풀려나,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붙들리지 않으면,
수행하는 이의 몫을 얻느니라.
Appampi ce saṁhita bhāsamāno, Dhammassa hoti anudhammacārī; Rāgañca dosañca pahāya mohaṁ, Sammappajāno suvimuttacitto; Anupādiyāno idha vā huraṁ vā, Sa bhāgavā sāmaññassa hoti.
법구경 Dhammapada 20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이자 19게송의 짝입니다. 아누담마짜리(anudhammacārī)는 '가르침을 따라 걷는 이'라는 뜻으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결을 따라 산다는 말입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셋은 뒤에 세 가지 독으로 불리며 여러 경에서 함께 나옵니다. 마지막 줄의 아누빠디야노(anupādiyāno)는 '붙들지 않는'입니다. 이 게송이 지식을 낮추어 보는 것은 아닙니다. 앞 게송과 나란히 놓고 보면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것으로 무엇이 달라졌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스무 편의 게송을 여기까지 읽어 온 사람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묵상
많이 읽는 것과 하나를 오래 붙잡는 것 가운데 지금 나에게 필요한 쪽은 어느 쪽인가요? 이 품에서 한 편만 골라 일주일을 지내 본다면 어느 것을 고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