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

Dhammapada / 담마빠다

법구경 법구경

423개의 짧은 게송을 모은 책. 불교 경전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힌다.

인용된 가르침 400구절

이 경을 31개 대목으로 나누어 읽습니다.

1 쌍을 이루는 것 13구절

같은 말을 뒤집어 두 번 들려주는 스무 게송 - 법구경은 여기서 시작한다

마음이 모든 것에 앞서고, 마음이 으뜸이며,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내느니라. 더러운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르나니, 수레를 끄는 소의 발자국을 수레바퀴가 따르듯 하느니라.

Manopubbaṅgamā dhammā, manoseṭṭhā manomayā; Manasā ce paduṭṭhena, bhāsati vā karoti vā; Tato naṁ dukkhamanveti, cakkaṁva vahato padaṁ.

법구경 Dhammapada 1

배경

법구경 423게송이 이 한 줄로 시작합니다. 첫 낱말 마노뿝방가마(manopubbaṅgamā)는 '마음이 앞서 간다'는 뜻입니다. 뒤따르는 담마(dhammā)는 여기서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가 겪는 온갖 일과 상태를 가리킵니다. 말과 행동이 먼저 있고 마음이 나중에 붙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방향을 잡고 말과 행동이 그 뒤를 따른다는 순서를 못박은 것입니다. 비유가 정확합니다. 수레바퀴는 소를 따라갈지 말지 고르지 않습니다. 소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바퀴자국이 남습니다.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느냐가 정해지면 그 결과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따라오는 것입니다. 다만 시차가 있어서 우리는 둘을 잘 잇지 못합니다.

묵상

오늘 누군가에게 건넨 말 하나를 떠올려 보세요. 그 말이 나오기 직전에 마음은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었나요? 말을 고치는 것보다 그 앞의 기울기를 알아차리는 편이 빠를지도 모릅니다.

마음이 모든 것에 앞서고, 마음이 으뜸이며,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내느니라. 맑은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르나니, 결코 떠나지 않는 그림자처럼 따르느니라.

Manopubbaṅgamā dhammā, manoseṭṭhā manomayā; Manasā ce pasannena, bhāsati vā karoti vā; Tato naṁ sukhamanveti, chāyāva anapāyinī.

법구경 Dhammapada 2

배경

앞 게송과 한 글자만 다릅니다. 빠둣테나(paduṭṭhena, 더럽혀진)가 빠산네나(pasannena, 맑은)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같은 틀을 뒤집어 두 번 말하는 것이 이 품의 이름이 '쌍을 이루는 것'인 까닭입니다. 비유도 짝을 이룹니다. 앞에서는 무겁게 굴러오는 수레바퀴였고 여기서는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소리도 없고 무게도 없지만 빛이 있는 한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아나빠이니(anapāyinī)는 '떠나가지 않는'이라는 뜻입니다. 맑은 마음에서 나온 행위의 결과는 요란하게 오지 않고, 대신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묵상

누군가에게 조건 없이 잘해 준 기억이 있나요? 그때 돌아온 것은 요란한 보답이었나요, 아니면 오래 지나도 옅어지지 않는 어떤 감각이었나요?

‘그가 나를 욕했다, 그가 나를 때렸다. 그가 나를 이겼다, 그가 내 것을 빼앗았다.’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 이에게는 원한이 가라앉지 않느니라.

Akkocchi maṁ avadhi maṁ, ajini maṁ ahāsi me; Ye ca taṁ upanayhanti, veraṁ tesaṁ na sammati.

법구경 Dhammapada 3

배경

네 가지 호소가 나란히 놓입니다. 욕설, 폭력, 패배, 빼앗김. 크기는 다르지만 형태는 같습니다. 모두 '그가 나에게'라는 구조입니다. 핵심 낱말은 우빠나이한띠(upanayhanti)로, '가까이 두고 묶어 둔다'는 뜻입니다. 일이 일어난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을 붙들어 매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부처님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어떻게 다루느냐를 말씀하십니다. 되새길수록 사건은 처음보다 커지고, 커진 만큼 다시 되새기게 됩니다. 원한이 가라앉지 않는 것은 상대가 계속 해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되새김이 계속되기 때문이라는 관찰입니다.

묵상

머릿속에서 여러 번 재생한 장면이 있나요? 그 장면은 몇 년 전에 한 번 일어났는데, 나는 그 뒤로 몇 번이나 다시 겪었을까요?

‘그가 나를 욕했다, 그가 나를 때렸다. 그가 나를 이겼다, 그가 내 것을 빼앗았다.’ 이런 생각을 품지 않는 이에게는 원한이 가라앉느니라.

Akkocchi maṁ avadhi maṁ, ajini maṁ ahāsi me; Ye ca taṁ nupanayhanti, veraṁ tesūpasammati.

법구경 Dhammapada 4

배경

앞 게송에서 부정어 하나만 더해진 짝입니다. 여기서 오해하기 쉬운 대목이 있습니다. 품지 않는다는 것은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여기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게송은 네 가지 호소를 지우지 않고 그대로 다시 읊습니다. 욕을 먹었고 맞았고 졌고 빼앗겼습니다. 달라진 것은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붙들고 있느냐입니다. 우빠사맏띠(upasammati)는 '가라앉는다'는 뜻으로, 억지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흔들린 물이 저절로 맑아지듯 잦아드는 것을 말합니다. 놓는다고 곧바로 가라앉지는 않지만, 붙들고 있는 한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묵상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다만 지금 그것을 붙들고 있어서 치르는 값이 무엇인지 한 가지만 적어 볼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 원한은 원한으로는 결코 풀리지 않나니, 원한을 내려놓음으로써 풀리느니라. 이것은 예로부터 변함없는 이치이니라.

Na hi verena verāni, sammantīdha kudācanaṁ; Averena ca sammanti, esa dhammo sanantano.

법구경 Dhammapada 5

배경

법구경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게송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여러 생에 걸쳐 서로를 해쳐 온 두 존재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갚아 주면 끝날 것 같지만 갚음은 상대에게 새로운 이유가 되고, 그 이유가 다시 돌아옵니다. 사난따노(sanantano)는 '아주 오래된, 예로부터 그러한'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이 새로 만든 규칙이 아니라 원래 그러한 이치임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아웨레나(averena)는 '원한 없음으로써'입니다. 상대를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되갚을 마음을 거두는 것만으로 연쇄가 끊긴다는 뜻입니다. 한쪽이 멈추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구조이므로, 누가 먼저 멈추느냐가 남습니다.

묵상

'내가 왜 먼저 멈춰야 하는가' 하는 마음이 드나요? 당연합니다. 다만 그 연쇄를 끊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지금 그것을 겪고 있는 나뿐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죽어 간다는 것을 저들은 알지 못하느니라. 이것을 아는 이들은 다툼을 그치느니라.

Pare ca na vijānanti, mayamettha yamāmase; Ye ca tattha vijānanti, tato sammanti medhagā.

법구경 Dhammapada 6

배경

다툼이 그치는 근거를 부처님은 도덕이 아니라 죽음에 두십니다. 야마마세(yamāmase)는 '우리는 죽어 간다'는 뜻입니다. 다투는 두 편이 모두 같은 시간 안에서 사라져 가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면 싸울 거리가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한역 법구경과 갈리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한역은 이 자리에 '남을 탓하지 말고 자신을 살피라'는 권고를 넣었습니다. 결론은 같지만 근거가 다릅니다. 빠알리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대신, 다투는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보게 합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사소한 일로 갈라져 오래 다툰 승가의 일을 전합니다.

묵상

지금 껄끄러운 사람을 떠올려 보세요. 그 사람도 나도 언젠가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을 알 때, 지금 다투는 그 일의 크기가 조금 달라 보이나요?

대상의 아름다운 면만 보며 살고 감각의 문을 지키지 않고, 먹는 데 절도가 없으며 게으르고 애씀이 약한 이는, 바람이 여린 나무를 쓰러뜨리듯 마라가 그를 넘어뜨리느니라.

Subhānupassiṁ viharantaṁ, indriyesu asaṁvutaṁ; Bhojanamhi cāmattaññuṁ, kusītaṁ hīnavīriyaṁ; Taṁ ve pasahati māro, vāto rukkhaṁva dubbalaṁ.

법구경 Dhammapada 7

배경

마라(māra)는 뿔 달린 악마라기보다 사람을 제자리에 붙들어 두는 힘을 인격처럼 부른 이름입니다. 게송은 그 힘에 넘어가는 조건 네 가지를 셉니다. 즐거운 것만 보는 것, 감각을 단속하지 않는 것, 먹는 데 절도가 없는 것, 애씀이 약한 것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먹는 일이 수행 이야기와 나란히 놓였다는 점입니다. 인드리예수 아상우땅(indriyesu asaṁvutaṁ)은 '감각의 문이 닫히지 않은'이라는 뜻으로, 들어오는 대로 다 받아들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린 나무가 뽑히는 것은 바람이 유난히 세서가 아니라 뿌리가 얕아서입니다. 문제를 바깥의 세기가 아니라 안의 밑동에 두는 시선입니다.

묵상

요즘 넘어가기 쉬운 순간은 언제인가요? 늦은 밤인가요, 지쳤을 때인가요, 배고플 때인가요? 그 조건 하나만 바꿔 두어도 버티는 힘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즐거움에 기울지 않고 감각의 문을 잘 지키며, 먹는 데 절도를 알고 믿음이 있으며 꾸준히 애쓰는 이는, 바람이 바위산을 흔들지 못하듯 마라가 그를 넘어뜨리지 못하느니라.

Asubhānupassiṁ viharantaṁ, Indriyesu susaṁvutaṁ; Bhojanamhi ca mattaññuṁ, Saddhaṁ āraddhavīriyaṁ; Taṁ ve nappasahati māro, Vāto selaṁva pabbataṁ.

법구경 Dhammapada 8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아수바누빳시(asubhānupassiṁ)를 글자대로 옮기면 '아름답지 않은 것을 살펴보는'이 됩니다. 세상을 추하게 보라는 말이 아니라, 겉의 좋아 보이는 면만 보지 말고 변해 가는 면까지 함께 보라는 뜻으로 읽습니다. 앞 게송이 즐거운 쪽만 보는 눈을 문제 삼았으니, 그 짝은 양쪽을 다 보는 눈입니다. 비유도 여린 나무에서 바위산으로 바뀝니다. 바위산은 바람과 싸우지 않습니다. 버티려고 힘을 쓰지도 않습니다. 다만 밑동이 깊어서 흔들릴 일이 없을 뿐입니다. 애씀이란 매번 이겨 내는 것이 아니라 흔들릴 일이 줄어든 상태에 가깝다는 그림입니다.

묵상

무너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어 본 적이 있나요? 그 방식이 오래가던가요? 버티는 힘보다 흔들릴 일을 줄이는 쪽이 더 편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의 때를 벗지 못한 이가 수행자의 옷을 입으려 한다면, 절제도 진실도 없는 그는 그 옷을 입을 자격이 없느니라.

Anikkasāvo kāsāvaṁ, yo vatthaṁ paridahissati; Apeto damasaccena, na so kāsāvamarahati.

법구경 Dhammapada 9

배경

빠알리 원문은 말놀이로 되어 있습니다. 아닉까사와(anikkasāva, 때를 벗지 못한)와 까사와(kāsāva, 수행자의 물들인 옷)가 소리로 겹칩니다. 겉에 걸친 물색과 안에 남은 얼룩을 나란히 놓아 대비시킨 것입니다. 다마삿쩨나(damasaccena)는 '다스림과 진실'로, 스스로를 다잡는 힘과 거짓 없음을 함께 가리킵니다. 이 게송을 수행자에게만 해당하는 말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이름이나 자리를 얻는 일과, 그 이름에 값하는 사람이 되는 일은 별개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옷은 하루면 입을 수 있지만 얼룩은 그렇지 않습니다.

묵상

지금 내가 가진 이름표 하나를 떠올려 보세요. 그 이름에 값하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부분일수록 정직하게 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마음의 때를 벗고 행실이 잘 갖추어졌으며, 절제와 진실을 지닌 이는 그 옷을 입을 자격이 있느니라.

Yo ca vantakasāvassa, sīlesu susamāhito; Upeto damasaccena, sa ve kāsāvamarahati.

법구경 Dhammapada 10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완따까사왓사(vantakasāvassa)에서 완따(vanta)는 '토해 낸'이라는 뜻입니다. 때를 씻어 냈다기보다 몸 밖으로 완전히 밀어냈다는, 꽤 강한 그림입니다. 실라(sīla)는 흔히 계율로 옮기지만 본래 몸에 밴 됨됨이에 가깝습니다. 규칙을 외워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익어서 자연스러워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게송의 순서가 중요합니다. 자격이 먼저 주어지고 사람이 그에 맞춰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갖추어진 뒤에 자격이 뒤따릅니다. 앞뒤를 바꾸면 9게송의 사람이 됩니다.

묵상

억지로 지키는 일과 그냥 하게 되는 일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요? 지금 억지로 지키는 것 하나가 몸에 배려면 얼마나 더 반복해야 할까요?

알맹이가 아닌 것을 알맹이로 여기고 알맹이인 것을 알맹이 아니라 보는 이들은, 그릇된 생각을 자리로 삼기에 알맹이에 이르지 못하느니라.

Asāre sāramatino, sāre cāsāradassino; Te sāraṁ nādhigacchanti, micchāsaṅkappagocarā.

법구경 Dhammapada 11

배경

사라(sāra)는 나무 한가운데의 단단한 속고갱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겉껍질과 무른 부분을 다 걷어 내고 남는, 실제로 쓸모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니 이 게송은 참과 거짓을 가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무엇이 알맹이인지 알아보는 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대목을 참과 거짓으로 옮겼고, 그 결과 인식의 문제가 진위 판별의 문제로 좁아졌습니다. 고짜라(gocara)는 '소가 풀을 뜯는 자리'에서 온 말로, 마음이 늘 머무는 곳을 뜻합니다. 잘못 보는 것이 한 번의 실수가 아니라 마음이 늘 머무는 자리에서 비롯된다는 지적입니다.

묵상

지난 한 해 가장 많은 시간을 쏟은 일은 무엇이었나요? 그것은 알맹이였나요, 아니면 알맹이처럼 보이던 껍질이었나요?

알맹이를 알맹이로 알고 알맹이 아닌 것을 아닌 줄 아는 이들은, 바른 생각을 자리로 삼기에 알맹이에 이르느니라.

Sārañca sārato ñatvā, asārañca asārato; Te sāraṁ adhigacchanti, sammāsaṅkappagocarā.

법구경 Dhammapada 12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여기서 요구하는 일이 두 가지라는 점입니다. 알맹이를 알아보는 것만이 아니라 알맹이가 아닌 것을 아닌 줄 아는 것까지 함께 갑니다. 좋은 것을 고르는 눈과 아닌 것을 접는 눈은 다른 능력이고, 대개 뒤엣것이 더 어렵습니다. 이미 쏟은 시간이 아까워서 아닌 줄 알면서도 붙들기 때문입니다. 삼마상깝빠(sammāsaṅkappa)는 여덟 가지 바른 길 가운데 두 번째로, 바르게 마음먹는 것을 가리킵니다. 앞 게송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한 번의 판단이 아니라 마음이 늘 머무는 자리로 놓여 있습니다.

묵상

아닌 줄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것이 있나요? 놓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 좋아서인가요, 아니면 지금까지 들인 것이 아까워서인가요?

성글게 이은 지붕에 비가 새어들듯, 닦이지 않은 마음에는 탐욕이 새어드느니라.

Yathā agāraṁ ducchannaṁ, vuṭṭhī samativijjhati; Evaṁ abhāvitaṁ cittaṁ, rāgo samativijjhati.

법구경 Dhammapada 13

배경

라가(rāga)는 욕망 전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점을 짚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한역 법구경이 이 자리를 음란함으로 옮겼고, 한국에서 널리 읽히는 번역들이 이 대목을 성적인 욕망으로 새기는 것은 빠알리가 아니라 그 한역을 따른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원문이 말하는 것은 더 넓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더 갖고 싶은 마음, 뒤처지기 싫은 마음이 모두 여기 들어갑니다. 사마띠윗자띠(samativijjhati)는 '꿰뚫고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비는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틈으로 들어옵니다. 큰 구멍이 아니라 성글게 이은 자리로 스며듭니다.

묵상

요즘 마음이 자주 새는 자리가 있나요? 큰 사건이 아니라 사소하게 반복되는 틈일수록 오래 젖어 있게 됩니다.

2 욕망 없이도 살 수 있는가? 1구절

욕망을 버리면 의욕도 사라지는가 - 갈애와 열의의 결정적 차이

마치 비가 잘 지어진 집에 스며들지 않듯, 잘 닦인 마음에는 탐욕이 스며들지 않느니라.

Yathā agāraṃ ducchannaṃ vuṭṭhī samativijjhati; evaṃ abhāvitaṃ cittaṃ rāgo samativijjhati. Yathā agāraṃ suchannaṃ vuṭṭhī na samativijjhati; evaṃ subhāvitaṃ cittaṃ rāgo na samativijjhati.

법구경 Dhammapada 13-14

배경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이 비유로 귀결됩니다. 지붕이 새면 비가 스며들고, 지붕이 튼튼하면 비가 스며들지 않습니다. 마음이 훈련되지 않으면 갈애가 스며들고, 마음이 잘 닦이면 갈애가 스며들지 않습니다. 핵심은 "비를 막는 것"이 아니라 "지붕을 고치는 것"입니다. 유혹을 피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 마음을 수행으로 튼튼하게 하는 것이 답입니다. 잘 닦인 마음에는 갈애가 와도 스며들지 않고, 대신 열의라는 맑은 에너지가 흐릅니다.

묵상

당신의 마음이라는 지붕은 얼마나 튼튼한가요? 광고, SNS, 주변의 유혹이 비처럼 내릴 때, 스며드나요 흘러내리나요? 지붕을 고치는 방법은 하나 - 수행입니다. 하루 5분의 명상이 지붕의 첫 번째 기와입니다.

3 쌍을 이루는 것 7구절

같은 말을 뒤집어 두 번 들려주는 스무 게송 - 법구경은 여기서 시작한다

촘촘히 이은 지붕에 비가 새어들지 못하듯, 잘 닦인 마음에는 탐욕이 새어들지 못하느니라.

Yathā agāraṁ suchannaṁ, vuṭṭhī na samativijjhati; Evaṁ subhāvitaṁ cittaṁ, rāgo na samativijjhati.

법구경 Dhammapada 14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아바위땅(abhāvitaṁ)과 수바위땅(subhāvitaṁ)의 뿌리인 바웨띠(bhāveti)는 '있게 한다, 길러 낸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이 무언가를 지워 없애는 일이 아니라 없던 것을 길러 내는 일에 가깝다는 말입니다. 비유도 그렇습니다. 지붕을 촘촘히 잇는 일은 비를 막으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미리 해 두는 일입니다. 비가 올 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붕은 한 번에 다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 두 게송이 나란히 놓인 자리에 부처님의 이복동생이 출가 초기에 겪은 흔들림에 관한 이야기가 주석서로 전합니다.

묵상

비가 오기 전에 미리 해 둘 수 있는 일 한 가지는 무엇일까요? 지금 마음이 평온하다면, 오히려 지금이 지붕을 손볼 때인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도 슬퍼하고 저 세상에서도 슬퍼하나니, 나쁜 일을 한 이는 두 곳에서 슬퍼하느니라. 제 손으로 더럽힌 행위를 보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느니라.

Idha socati pecca socati, Pāpakārī ubhayattha socati; So socati so vihaññati, Disvā kammakiliṭṭhamattano.

법구경 Dhammapada 15

배경

여기서 15게송부터 18게송까지 네 편이 하나의 묶음으로 이어집니다. 같은 틀에 낱말만 바꿔 가며 네 번 반복하는 구조입니다. 이 게송의 초점은 벌이 아니라 봄에 있습니다. 디스와(disvā)는 '보고서'라는 뜻으로, 괴로움이 바깥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한 일을 자기가 보는 데서 온다고 말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어도 한 사람은 압니다. 원문은 행위가 얼룩졌다는 표현(kammakiliṭṭha)을 씁니다. 행위 자체가 얼룩으로 남아 그것을 볼 때마다 다시 겪게 된다는 그림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짐승을 잡아 살던 이가 죽음에 이르러 겪은 일을 전합니다.

묵상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혼자 계속 떠오르는 것이 있나요? 그것을 잊으려 애쓰기보다,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갚음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는 편이 나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기뻐하고 저 세상에서도 기뻐하나니, 좋은 일을 한 이는 두 곳에서 기뻐하느니라. 제 손으로 깨끗이 한 행위를 보고 기뻐하고 크게 기뻐하느니라.

Idha modati pecca modati, Katapuñño ubhayattha modati; So modati so pamodati, Disvā kammavisuddhimattano.

법구경 Dhammapada 16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슬퍼함이 소짜띠(socati)였다면 여기서는 모다띠(modati)로 바뀌고, 뒤에 빠모다띠(pamodati)가 더해집니다. 앞에 붙은 빠(pa-)는 정도를 키우는 접두어라 '한층 더 기뻐한다'가 됩니다. 슬픔 쪽에서는 봄이 괴로움으로 이어졌는데, 기쁨 쪽에서는 봄이 기쁨을 한 겹 더 얹습니다. 같은 구조인데 방향만 다릅니다. 여기서 좋은 일이란 큰일을 뜻하지 않습니다. 뿐냐(puñña)는 쌓이는 것에 가까운 말이라,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일들이 모여 나중에 돌아볼 무언가가 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묵상

오늘 한 일 가운데 나중에 떠올려도 부끄럽지 않을 일이 하나 있나요? 아주 작은 것이어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적어 두면 어떨까요?

이 세상에서도 시달리고 저 세상에서도 시달리나니, 나쁜 일을 한 이는 두 곳에서 시달리느니라. ‘내가 나쁜 일을 저질렀구나’ 하며 시달리고, 나쁜 곳에 이르러 더욱 시달리느니라.

Idha tappati pecca tappati, Pāpakārī ubhayattha tappati; “Pāpaṁ me katan”ti tappati, Bhiyyo tappati duggatiṁ gato.

법구경 Dhammapada 17

배경

15게송이 슬픔이었다면 여기서는 땁빠띠(tappati)로 바뀝니다. 이 낱말은 본래 불에 그슬리거나 달구어진다는 뜻이라, 슬픔보다 훨씬 뜨겁고 오래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15게송에서는 행위를 보는 것이었는데 여기서는 그것이 말이 됩니다. '내가 나쁜 일을 저질렀구나' 하는 문장이 안에서 반복되는 상태입니다. 뉘우침과 자책은 이 지점에서 갈립니다. 뉘우침은 다음 행동을 바꾸지만 자책은 문장만 되풀이합니다. 게송이 뒤에 비요(bhiyyo, 더욱)를 붙인 것은 그 되풀이가 저절로 잦아들지 않는다는 관찰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묵상

'내가 왜 그랬을까'를 몇 번이나 되뇌었나요? 그 되뇜이 다음 행동을 바꾸고 있나요, 아니면 같은 자리를 계속 태우고만 있나요?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워하나니, 좋은 일을 한 이는 두 곳에서 즐거워하느니라. ‘내가 좋은 일을 했구나’ 하며 즐거워하고, 좋은 곳에 이르러 더욱 즐거워하느니라.

Idha nandati pecca nandati, Katapuñño ubhayattha nandati; “Puññaṁ me katan”ti nandati, Bhiyyo nandati suggatiṁ gato.

법구경 Dhammapada 18

배경

네 편으로 이어진 묶음의 마지막입니다. 15게송과 17게송이 나쁜 일 쪽을, 16게송과 18게송이 좋은 일 쪽을 맡아 두 번씩 짝을 이룹니다. 난다띠(nandati)는 즐거워한다는 뜻이고, 여기서도 그 즐거움은 자기가 한 일을 떠올리는 데서 옵니다. 주목할 것은 이 네 편 어디에도 상을 주거나 벌을 내리는 존재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심판자가 없습니다. 행위를 한 사람과 그것을 보는 사람이 같은 사람일 뿐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도 두려움 없이 갔던 한 소녀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묵상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떠올릴 때 마음이 놓이는 장면이 있나요? 그런 장면이 몇 개나 되는지가, 나중에 어떤 마음으로 지내게 될지를 정할지도 모릅니다.

경을 많이 외워 말할지라도 마음을 놓아 그대로 살지 않으면, 남의 소를 세는 목동과 같아서 수행하는 이의 몫을 얻지 못하느니라.

Bahumpi ce saṁhita bhāsamāno, Na takkaro hoti naro pamatto; Gopova gāvo gaṇayaṁ paresaṁ, Na bhāgavā sāmaññassa hoti.

법구경 Dhammapada 19

배경

비유가 날카롭습니다. 목동은 소를 셉니다. 매일 세고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는 한 마리도 그의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과 가진 것을 가르는 그림입니다. 딱까로(takkaro)는 '그것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들은 대로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도 문제는 아는 것이 적은 데 있지 않습니다. 게송은 오히려 많이 외운 경우를 들었습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비유를 '소떼처럼 모여 있다'로 옮겨 셈과 소유를 가르는 논리가 사라졌습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함께 출가한 두 벗의 서로 다른 길을 전합니다.

묵상

읽어서 아는 것과 살아서 아는 것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요? 최근에 읽고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가운데 실제로 해 본 것은 몇 개인가요?

경을 적게 외워 말할지라도 가르침을 따라 살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버리고 바르게 알아 마음이 풀려나,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붙들리지 않으면, 수행하는 이의 몫을 얻느니라.

Appampi ce saṁhita bhāsamāno, Dhammassa hoti anudhammacārī; Rāgañca dosañca pahāya mohaṁ, Sammappajāno suvimuttacitto; Anupādiyāno idha vā huraṁ vā, Sa bhāgavā sāmaññassa hoti.

법구경 Dhammapada 20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이자 19게송의 짝입니다. 아누담마짜리(anudhammacārī)는 '가르침을 따라 걷는 이'라는 뜻으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결을 따라 산다는 말입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셋은 뒤에 세 가지 독으로 불리며 여러 경에서 함께 나옵니다. 마지막 줄의 아누빠디야노(anupādiyāno)는 '붙들지 않는'입니다. 이 게송이 지식을 낮추어 보는 것은 아닙니다. 앞 게송과 나란히 놓고 보면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것으로 무엇이 달라졌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스무 편의 게송을 여기까지 읽어 온 사람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묵상

많이 읽는 것과 하나를 오래 붙잡는 것 가운데 지금 나에게 필요한 쪽은 어느 쪽인가요? 이 품에서 한 편만 골라 일주일을 지내 본다면 어느 것을 고르시겠어요?

4 깨어 있음 12구절

붓다가 가장 자주 되풀이한 한 낱말 - 마음을 놓지 않는다는 것

마음을 놓지 않음은 죽지 않는 길이요, 마음을 놓음은 죽음의 길이니라. 마음을 놓지 않는 이는 죽지 않고, 마음을 놓은 이는 이미 죽은 것과 같느니라.

Appamādo amatapadaṁ, pamādo maccuno padaṁ; Appamattā na mīyanti, ye pamattā yathā matā.

법구경 Dhammapada 21

배경

이 품 전체를 이끄는 낱말이 압빠마다(appamāda)입니다. 흔히 '방일하지 않음'으로 옮기지만, 본래 술에 취하거나 넋을 놓는다는 뜻의 빠마다(pamāda)에 부정어를 붙인 말이라 '마음을 놓지 않음'에 가깝습니다. 아마따(amata)는 '죽지 않음'이지만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나고 죽음이 되풀이되는 자리에서 벗어난 상태, 곧 열반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입니다. 게송의 힘은 마지막 줄에 있습니다. 마음을 놓고 사는 것을 게으름이 아니라 죽음에 견주었습니다. 숨은 쉬고 있으나 깨어 있지 않은 시간을 이미 죽은 시간으로 셈한 것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계율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마음의 상태를 말하던 것이 지켜야 할 규범의 말이 된 셈입니다.

묵상

오늘 하루 가운데 '깨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 몇 분이나 되나요? 자동으로 흘려보낸 시간 말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면서 보낸 시간 말입니다.

이 다름을 분명히 알아 지혜로운 이들은 부지런함에 머무나니, 부지런함 속에서 기뻐하며 성인들이 거니는 자리에서 즐거워하느니라.

Evaṁ visesato ñatvā, appamādamhi paṇḍitā; Appamāde pamodanti, ariyānaṁ gocare ratā.

법구경 Dhammapada 22

배경

앞 게송에서 두 길을 갈라 보인 뒤, 그 다름을 안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를 잇습니다. 위세사또(visesato)는 '차이를 가려서'라는 뜻입니다.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두 길이 어디로 가는지 갈라 본다는 말입니다. 눈여겨볼 낱말은 빠모단띠(pamodanti), 곧 '기뻐한다'입니다. 깨어 있음이 이를 악물고 버티는 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는 상태로 놓여 있습니다. 고짜라(gocara)는 소가 풀을 뜯는 자리를 뜻하는 말에서 왔습니다. 성인들이 머무는 자리란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마음이 늘 가서 노는 곳을 가리킵니다.

묵상

깨어 있으려는 노력이 즐거운 적이 있었나요, 아니면 늘 버티는 일이었나요? 즐겁지 않다면 방식이 나에게 맞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꾸준히 마음을 모으며 늘 굳세게 나아가는 이들, 그 지혜로운 이들은 얽매임에서 벗어난 더없는 평안, 열반에 이르느니라.

Te jhāyino sātatikā, niccaṁ daḷhaparakkamā; Phusanti dhīrā nibbānaṁ, yogakkhemaṁ anuttaraṁ.

법구경 Dhammapada 23

배경

요각케마(yogakkhema)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안전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요가(yoga)는 소를 수레에 붙들어 매는 멍에를 가리키고, 케마(khema)는 위험이 없는 상태입니다. 열반을 신비한 경지가 아니라 멍에를 벗은 자리로 그린 것입니다. 사따띠까(sātatika)는 '끊이지 않는'입니다. 세게 하는 것이 아니라 끊기지 않는 쪽에 방점이 있습니다. 뿌산띠(phusanti)는 '닿는다, 만진다'는 뜻이라 이르는 과정을 머리로 아는 일이 아니라 손끝에 닿는 일처럼 그립니다. 앞 게송의 즐거움과 이 게송의 굳셈이 나란히 놓인 것이 이 품의 균형입니다.

묵상

무언가를 꾸준히 해 본 경험이 있나요? 그때 힘이 된 것은 강한 의지였나요, 아니면 끊기지 않게 만든 어떤 장치였나요?

부지런하고 알아차리며 행실이 깨끗하고 살펴서 행하며, 스스로를 다잡고 올바르게 살며 마음을 놓지 않는 이에게는 좋은 이름이 자라느니라.

Uṭṭhānavato satīmato, Sucikammassa nisammakārino; Saññatassa dhammajīvino, Appamattassa yasobhivaḍḍhati.

법구경 Dhammapada 24

배경

여섯 가지가 나란히 놓입니다. 부지런함, 알아차림, 깨끗한 행실, 살펴서 함, 스스로 다잡음, 이치에 맞는 삶입니다. 그 결과로 야소(yaso)가 자란다고 합니다. 이 낱말은 명성이나 평판을 뜻하는데, 여기서 오해하기 쉽습니다. 유명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으라는 말이 아니라, 위 여섯 가지를 갖춘 사람에게는 그것이 따라온다는 순서입니다. 애써 얻는 것이 아니라 자라는 것입니다. 니삼마까리(nisammakārī)는 '살펴보고 나서 행하는 이'를 뜻합니다. 하기 전에 한 번 보는 것, 그 짧은 사이가 여섯 가지 가운데 실제로 가장 자주 쓰이는 대목일지 모릅니다.

묵상

결정하기 전에 한 번 멈추는 습관이 있나요? 그 한 번의 멈춤이 지난달에 나를 구해 준 적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세요.

근면과 부지런함으로, 다잡음과 절제로, 지혜로운 이는 섬을 쌓나니, 큰물도 그 섬을 덮지 못하느니라.

Uṭṭhānenappamādena, saṁyamena damena ca; Dīpaṁ kayirātha medhāvī, yaṁ ogho nābhikīrati.

법구경 Dhammapada 25

배경

디빠(dīpa)에는 '섬'과 '등불' 두 뜻이 있어 번역이 갈리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이 게송은 뒤에 '큰물이 덮지 못하는'이라는 말이 붙으므로 섬으로 읽는 것이 맞습니다. 한역 법구경은 등불로 읽어 어두운 못과 짝지었고, 그 결과 큰물의 그림이 사라졌습니다. 섬은 물을 막지 않습니다. 물이 차올라도 잠기지 않을 만큼 높을 뿐입니다. 그리고 섬은 하루에 쌓이지 않습니다. 까이라타(kayirātha)는 '만들어 두어야 한다'는 뜻으로, 물이 밀려오기 전에 해 두는 일임을 가리킵니다.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미리 쌓아 두라는 말입니다.

묵상

지금 마음이 비교적 평온하다면, 오히려 지금이 섬을 쌓을 때인지도 모릅니다. 큰물이 왔을 때 나를 버티게 해 줄 것 하나를 지금 시작한다면 무엇일까요?

어리석고 지혜가 모자란 이들은 마음을 놓은 채 살아가지만, 지혜로운 이는 부지런함을 가장 귀한 재물처럼 지키느니라.

Pamādamanuyuñjanti, bālā dummedhino janā; Appamādañca medhāvī, dhanaṁ seṭṭhaṁva rakkhati.

법구경 Dhammapada 26

배경

아누윤잔띠(anuyuñjanti)는 '거기에 몰두한다, 매달린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놓는 일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열심히 매달리는 상태로 그려졌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시간을 놓치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가만히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것에 열심이어서 놓칩니다. 뒷줄의 비유는 재물입니다. 재물은 벌기도 어렵지만 지키는 데 더 마음이 갑니다. 락카띠(rakkhati)가 '지킨다'인 것은 그래서입니다. 깨어 있음은 한 번 얻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지켜 내야 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묵상

무엇을 지키는 데 가장 마음을 쓰고 있나요? 통장이나 물건을 지키는 만큼 하루의 정신을 지키고 있는지 견주어 보면 어떨까요?

마음 놓는 일에 매달리지 말고 쾌락에 빠져 가까이하지 말지니라. 깨어서 마음을 모으는 이는 크나큰 즐거움을 얻느니라.

Mā pamādamanuyuñjetha, mā kāmaratisanthavaṁ; Appamatto hi jhāyanto, pappoti vipulaṁ sukhaṁ.

법구경 Dhammapada 27

배경

산타와(santhava)는 '가까이 사귐, 친해짐'을 뜻합니다. 쾌락을 한 번 맛보는 일이 아니라 그것과 친해지는 일을 문제 삼았습니다. 낯설던 것이 익숙해지고 익숙한 것이 당연해지는 과정이 여기서 걸립니다. 그런데 이 게송이 즐거움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뒷줄에서 위뿔랑 수캉(vipulaṁ sukhaṁ), 곧 '크나큰 즐거움'을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즐거움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것과 바꾸라는 셈법입니다. 무엇을 참으라는 말보다 무엇을 얻는지를 함께 말하는 것이 이 품의 방식입니다.

묵상

지금 익숙해진 즐거움 가운데, 처음에는 낯설었던 것이 있나요? 그것과 얼마나 친해졌는지 한번 헤아려 보면 어떨까요?

지혜로운 이가 부지런함으로 마음 놓음을 떨쳐 낼 때, 지혜의 높은 자리에 올라 슬픔 없는 이가 되어 슬픔에 잠긴 이들을 바라보나니, 산 위에 선 사람이 땅 위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듯 하느니라.

Pamādaṁ appamādena, yadā nudati paṇḍito; Paññāpāsādamāruyha, asoko sokiniṁ pajaṁ; Pabbataṭṭhova bhūmaṭṭhe, dhīro bāle avekkhati.

법구경 Dhammapada 28

배경

산 위에서 내려다본다는 비유가 자칫 내려다보는 마음으로 읽힐 수 있어 짚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아웩카띠(avekkhati)는 업신여긴다는 뜻이 아니라 '내려다본다, 살펴본다'는 뜻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높이가 아니라 보이는 범위입니다. 땅에 있으면 눈앞의 길만 보이지만 산에 오르면 길 전체가 보입니다. 슬픔 한가운데 있을 때는 그것이 전부로 보이는데, 한 걸음 물러나면 그 슬픔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가 보인다는 말입니다. 빤냐빠사다(paññāpāsāda)는 '지혜라는 높은 누각'입니다. 남보다 높은 자리가 아니라 시야가 트인 자리로 읽는 편이 맞습니다.

묵상

지난날 크게 흔들렸던 일이 지금은 어떻게 보이나요? 그때는 전부처럼 보이던 것이 지금은 한 부분으로 보인다면, 지금 겪는 일도 언젠가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마음 놓은 이들 가운데 깨어 있고 잠든 이들 가운데 홀로 눈 뜬 이는, 느린 말을 뒤로하고 달리는 빠른 말처럼 나아가느니라.

Appamatto pamattesu, suttesu bahujāgaro; Abalassaṁva sīghasso, hitvā yāti sumedhaso.

법구경 Dhammapada 29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함께 출가한 두 벗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한 사람은 마음을 놓았고 한 사람은 놓지 않았습니다. 게송이 그리는 그림은 경주가 아닙니다. 빠른 말은 느린 말을 이기려고 달리지 않습니다. 그저 제 걸음으로 갈 뿐인데 사이가 벌어집니다. 히뜨와 야띠(hitvā yāti)는 '두고 간다'입니다. 여기서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 게송을 남들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읽으면 비교가 되고, 비교는 다시 마음을 놓게 만듭니다. 잠든 이들을 깨우라는 말도 아니고 그들보다 낫다는 말도 아닙니다. 남들이 어떻든 제 걸음을 잃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읽는 편이 이 품의 흐름에 맞습니다.

묵상

주위가 모두 느슨할 때 혼자 다잡기가 어렵나요? 그럴 때 나를 붙잡아 주는 것은 남의 눈일까요, 아니면 내가 정해 둔 무엇일까요?

부지런함으로 마가와는 신들 가운데 으뜸이 되었나니, 부지런함은 늘 칭찬받고 마음 놓음은 늘 나무람을 받느니라.

Appamādena maghavā, devānaṁ seṭṭhataṁ gato; Appamādaṁ pasaṁsanti, pamādo garahito sadā.

법구경 Dhammapada 30

배경

마가와(maghavā)는 인도 신화에서 신들의 우두머리를 부르는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경전은 그가 본래 사람이었고, 마을에서 길을 닦고 쉼터를 짓는 일을 꾸준히 해서 그 자리에 이르렀다고 전합니다. 이 게송이 신화를 끌어온 뜻은 분명합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 까닭을 특별한 능력이나 태생이 아니라 깨어 있음 하나로 돌린 것입니다. 앞의 여러 게송이 수행하는 이를 그렸다면 여기서는 마을에서 궂은일을 하던 사람이 나옵니다. 깨어 있음이 어떤 자리에서든 통하는 일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묵상

대단한 일이 아니라 사소한 일을 꾸준히 해 본 적이 있나요? 그 꾸준함이 나중에 어디로 이어졌는지 돌아보면 어떨까요?

부지런함을 기뻐하는 수행자, 마음 놓음에서 두려움을 보는 이는, 크고 작은 얽매임을 불이 번지듯 태우며 나아가느니라.

Appamādarato bhikkhu, pamāde bhayadassi vā; Saṁyojanaṁ aṇuṁ thūlaṁ, ḍahaṁ aggīva gacchati.

법구경 Dhammapada 31

배경

바야닷시(bhayadassī)는 '두려움을 보는 이'입니다. 마음 놓는 일을 편안함이 아니라 위험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살얼음 위를 걸을 때 우리는 저절로 깨어 있게 됩니다. 억지로 다잡는 것이 아니라 어디가 위험한지 보이기 때문입니다. 상요자나(saṁyojana)는 사람을 붙들어 매는 끈을 뜻합니다. 여기서 크고 작은 것을 함께 든 점이 중요합니다. 큰 것만 끊으려 하면 작은 것이 남고, 작은 것이 남으면 다시 큰 것으로 자랍니다. 불이 번지는 비유는 하나씩 끄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자리마다 함께 타는 그림입니다.

묵상

끊어야 할 큰 것 하나만 붙잡고 있지는 않나요? 오히려 사소해서 눈감아 온 작은 습관이 더 오래 붙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부지런함을 기뻐하는 수행자, 마음 놓음에서 두려움을 보는 이는, 물러설 수 없나니 이미 열반에 가까이 있느니라.

Appamādarato bhikkhu, pamāde bhayadassi vā; Abhabbo parihānāya, nibbānasseva santike.

법구경 Dhammapada 32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입니다. 앞 게송과 첫 두 줄이 똑같고 뒤만 바뀝니다. 아밥보 빠리하나야(abhabbo parihānāya)는 '물러설 수 없다'는 뜻입니다. 뒷걸음질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럴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산띠께(santike)는 '가까이'입니다. 이르렀다고 하지 않고 가까이 있다고 한 것이 이 품의 마무리로 적절합니다. 열반이 저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다다른 것도 아니며, 깨어 있는 그 자리가 곧 가까운 자리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열두 편에 걸쳐 되풀이된 한 낱말이 여기서 끝을 맺습니다.

묵상

돌아가고 싶지 않은 자리가 있나요? 다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 때, 그 마음이 다짐보다 힘이 셀 때가 있습니다.

5 마음 11구절

붙잡기 어렵고 제멋대로 내려앉는 것 - 그 마음을 어떻게 다루는가

흔들리고 들뜬 마음은 지키기도 어렵고 다잡기도 어려우니, 지혜로운 이는 그 마음을 곧게 하나니 화살 만드는 이가 화살대를 곧게 펴듯 하느니라.

Phandanaṁ capalaṁ cittaṁ, dūrakkhaṁ dunnivārayaṁ; Ujuṁ karoti medhāvī, usukārova tejanaṁ.

법구경 Dhammapada 33

배경

화살대는 처음부터 곧지 않습니다. 갈대나 대나무는 굽어 있고, 화살 만드는 이는 그것을 불에 쬐고 손으로 눌러 조금씩 폅니다. 한 번에 펴지지 않고 힘으로 꺾으면 부러집니다. 마음을 다루는 일을 이 그림에 견준 것입니다. 굽었다고 버리지 않고, 곧게 만들 수 있다고 보되, 그 일에 시간과 손길이 든다는 뜻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한역 법구경에는 이 비유가 없고 대신 통발이 나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가 흐려진 셈입니다. 판다낭 짜빨랑(phandanaṁ capalaṁ)은 물고기가 파닥이듯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음 게송이 그 물고기를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묵상

마음이 산만한 것을 스스로의 결함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나요? 굽은 화살대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아직 펴지지 않은 것입니다.

물에서 건져 올려 마른 땅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이 마음은 파닥거리나니 사람을 붙드는 힘에서 벗어나려 함이니라.

Vārijova thale khitto, okamokataubbhato; Pariphandatidaṁ cittaṁ, māradheyyaṁ pahātave.

법구경 Dhammapada 34

배경

명상을 처음 해 본 사람이 거의 예외 없이 겪는 일을 그린 게송입니다. 앉자마자 마음이 사방으로 뛰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흔한 오해가 생깁니다. 나는 소질이 없구나 하는 결론입니다. 그런데 게송의 마지막 줄이 다른 해석을 줍니다. 파닥거림은 실패의 표시가 아니라 물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까모까따(okamokata)는 '제 살던 물에서'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늘 헤엄치던 곳은 감각의 대상들 사이입니다. 처음 그 밖에 놓이면 요동칠 수밖에 없습니다. 마라데이야(māradheyya)는 '사람을 붙들어 두는 힘이 미치는 자리'를 뜻합니다.

묵상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어 그만둔 적이 있나요? 그 힘듦이 못하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라 이미 밖으로 나왔다는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붙잡기 어렵고 가벼우며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나 내려앉는 마음, 그 마음을 길들이는 것이 좋으니 길들인 마음은 편안함을 가져오느니라.

Dunniggahassa lahuno, yatthakāmanipātino; Cittassa damatho sādhu, cittaṁ dantaṁ sukhāvahaṁ.

법구경 Dhammapada 35

배경

얏타까마니빠띠노(yatthakāmanipātino)는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에나 내려앉는'이라는 뜻입니다. 새가 아무 가지에나 앉는 그림에 가깝습니다. 다마타(damatha)는 길들인다는 뜻인데, 이 낱말은 본래 야생의 말이나 소를 다루는 데 쓰였습니다. 없애거나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갈 수 있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길들인 말은 힘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방향이 생길 뿐입니다. 그리고 게송은 그 결과를 수캇와항(sukhāvahaṁ), 곧 '편안함을 가져온다'로 맺습니다. 다스리는 일이 고행이 아니라 결국 자기가 편해지는 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둔 것입니다.

묵상

마음을 다잡는 일이 나를 억누르는 일처럼 느껴지나요? 억누르는 쪽이 아니라 편해지는 쪽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알아보기 어렵고 미묘하며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나 내려앉는 마음, 지혜로운 이는 그 마음을 지키나니 지킨 마음은 편안함을 가져오느니라.

Sududdasaṁ sunipuṇaṁ, yatthakāmanipātinaṁ; Cittaṁ rakkhetha medhāvī, cittaṁ guttaṁ sukhāvahaṁ.

법구경 Dhammapada 36

배경

앞 게송과 짝을 이루면서 낱말 하나가 바뀝니다. 다마타(길들임)가 락케타(rakkhetha, 지킴)로 옮겨 갔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그리는 말도 달라집니다. 수둣다상(sududdasaṁ)은 '지극히 보기 어려운'이고 수니뿌낭(sunipuṇaṁ)은 '아주 미세한'입니다. 앞에서는 마음이 붙잡기 어려운 것이었는데 여기서는 보기 어려운 것이 되었습니다. 다루기 전에 알아보는 일이 먼저 온다는 순서입니다. 실제로 마음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차리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이미 한참 딴 데 가 있다가 문득 알게 됩니다. 그 알아차리는 힘이 자라야 지키는 일도 가능해집니다.

묵상

지금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 알아차리기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그 사이가 짧아지는 것만으로도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멀리 가고 홀로 다니며 몸도 없이 굴속에 깃드는 것이 마음이니, 그 마음을 잡도리하는 이들은 사람을 붙드는 힘의 묶임에서 풀려나느니라.

Dūraṅgamaṁ ekacaraṁ, asarīraṁ guhāsayaṁ; Ye cittaṁ saṁyamissanti, mokkhanti mārabandhanā.

법구경 Dhammapada 37

배경

마음의 성질 네 가지가 한 줄에 담겼습니다. 멀리 가고, 홀로 다니고, 몸이 없고, 굴속에 깃듭니다. 두랑가마(dūraṅgama)는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수천 리 밖에 가 있는 일을 가리킵니다. 에까짜라(ekacara)는 한 번에 하나씩만 간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구하사야(guhāsaya)의 '굴'을 옛 주석은 심장이나 몸으로 풀지만, 스스로도 잘 들여다보지 못하는 깊은 곳이라는 그림은 그대로 남습니다. 앞 게송이 알아보기 어렵다고 한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마음은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런 자리에 있습니다.

묵상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어디에 가 있었나요? 오늘 하루 마음이 가장 멀리 갔던 곳은 어디였는지 떠올려 보세요.

마음이 자리 잡히지 않고 바른 가르침을 알지 못하며, 믿음이 흔들리는 이에게는 지혜가 차오르지 않느니라.

Anavaṭṭhitacittassa, saddhammaṁ avijānato; Pariplavapasādassa, paññā na paripūrati.

법구경 Dhammapada 38

배경

빠리쁠라와(pariplava)는 물 위에 떠서 이리저리 흘러다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못 잡고 떠다닌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이것이 맞아 보이고 내일은 저것이 맞아 보이는 상태입니다. 빠리뿌라띠(paripūrati)는 '가득 찬다'입니다. 지혜를 채워지는 그릇으로 그린 셈인데, 그릇이 흔들리면 물이 고이지 않습니다. 이 게송이 나무라는 것은 의심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다른 곳에서 직접 확인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떠다니는 상태입니다.

묵상

무언가를 오래 붙잡아 본 적이 있나요? 자꾸 새로운 것을 찾아 옮겨 다니는 동안 고이지 못한 것이 있는지 돌아보면 어떨까요?

마음이 젖어 들지 않고 생각이 흔들리지 않으며, 좋음과 나쁨을 모두 넘어선 깨어 있는 이에게는 두려움이 없느니라.

Anavassutacittassa, ananvāhatacetaso; Puññapāpapahīnassa, natthi jāgarato bhayaṁ.

법구경 Dhammapada 39

배경

이 게송에는 놀라운 대목이 있습니다. 뿐냐빠빠빠히나(puññapāpapahīna), 곧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둘 다 버린 이'입니다. 나쁜 것만이 아니라 좋은 것까지 넘어선 자리를 말합니다. 선을 쌓아 악을 누르는 셈법이 아니라, 저울질 자체를 내려놓은 자리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복이 악을 막는다'로 옮겼는데, 그러면 정반대의 셈이 됩니다. 아나왓수따(anavassuta)는 '스며들어 젖지 않은'이라는 뜻으로, 앞 품의 지붕 비유와 이어집니다. 젖지 않은 마음, 얻어맞아 흔들리지 않은 생각, 그리고 저울을 내려놓음. 이 셋이 갖추어진 자리에 두려움이 없다고 합니다.

묵상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마음이 때로 무겁게 느껴지나요? 잘하고 있는지 늘 저울질하는 그 일이 두려움의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몸이 질그릇 같은 줄 알고 이 마음을 성처럼 굳게 세워, 지혜를 무기 삼아 맞서 싸우고 이긴 자리를 지키되 어디에도 머무르지 말지니라.

Kumbhūpamaṁ kāyamimaṁ viditvā, Nagarūpamaṁ cittamidaṁ ṭhapetvā; Yodhetha māraṁ paññāvudhena, Jitañca rakkhe anivesano siyā.

법구경 Dhammapada 40

배경

두 비유가 나란히 놓입니다. 몸은 질그릇이고 마음은 성입니다. 꿈부빠마(kumbhūpama)의 질그릇은 쓸모없다는 뜻이 아니라 쉽게 깨진다는 뜻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여섯을 감추는 거북으로 바꾸었는데, 그것은 감각을 거두라는 다른 경전의 비유라 몸의 덧없음을 말하던 자리가 달라졌습니다. 마지막 줄이 이 게송의 급소입니다. 아니웨사노(anivesano)는 '자리 잡지 않는, 눌러앉지 않는'입니다. 이겼으면 그 자리를 지키되 거기 눌러앉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한 번의 승리에 안심하는 순간 다시 무너진다는 경고로 읽힙니다.

묵상

한 번 이겨 낸 일이 다시 돌아온 적이 있나요? 그때 방심하게 만든 것은 실패가 아니라 이겼다는 안심이 아니었을까요?

머지않아 이 몸은 땅 위에 눕게 되리니, 의식이 떠나 버려지면 쓸모없는 나무토막과 다르지 않느니라.

Aciraṁ vatayaṁ kāyo, pathaviṁ adhisessati; Chuddho apetaviññāṇo, niratthaṁva kaliṅgaraṁ.

법구경 Dhammapada 41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몸에 병이 깊어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게 된 한 수행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부처님이 직접 그를 씻기고 돌본 뒤에 이 게송을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 배경을 알고 읽으면 이 게송의 결이 달라집니다. 몸을 하찮게 여기라는 말이 아니라, 몸을 돌본 바로 그 자리에서 몸의 끝을 함께 본 것입니다. 깔링가라(kaliṅgara)는 쓰고 남은 나무토막을 뜻합니다. 아무도 주워 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 게송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 불편함이 이미 이 게송이 하려는 일의 절반입니다.

묵상

몸이 언젠가 멈춘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어떤 마음이 드나요? 두려움일까요, 아니면 지금 이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조급함일까요?

적이 적에게 하는 일, 원수가 원수에게 하는 일, 그보다 더한 해를 잘못 향한 마음이 그 사람에게 입히느니라.

Diso disaṁ yaṁ taṁ kayirā, verī vā pana verinaṁ; Micchāpaṇihitaṁ cittaṁ, pāpiyo naṁ tato kare.

법구경 Dhammapada 42

배경

밋차빠니히따(micchāpaṇihita)는 '잘못 겨누어진'이라는 뜻입니다. 화살이 엉뚱한 데를 향한 그림입니다. 게송의 셈은 단순하고 무섭습니다. 나를 가장 크게 해치는 것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 겨누어진 내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이 게송을 읽을 때 조심할 대목이 있습니다. 괴로움이 전부 자기 탓이라는 말로 읽히기 쉬운데, 원문은 원인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크기를 견주고 있습니다. 남이 입히는 해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보다 더 오래가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음 게송이 그 짝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나를 가장 자주 몰아세우는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요? 그 말을 남이 나에게 했다면 그대로 듣고만 있었을까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다른 어떤 친척도 해 주지 못하는 일을, 바르게 향한 마음이 그 사람에게 해 주나니 그보다 더 좋게 해 주느니라.

Na taṁ mātā pitā kayirā, aññe vāpi ca ñātakā; Sammāpaṇihitaṁ cittaṁ, seyyaso naṁ tato kare.

법구경 Dhammapada 43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이자 앞 게송의 짝입니다. 앞에서 잘못 겨누어진 마음을 적보다 더한 것으로 놓았으니, 여기서는 바르게 겨누어진 마음을 부모보다 더한 것으로 놓습니다. 두 게송을 함께 읽어야 뜻이 살아납니다. 마음이 어느 쪽으로 겨누어지느냐에 따라 가장 큰 해가 되기도 하고 가장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 품이 마음을 붙잡기 어렵고 보기 어려운 것으로 그려 왔지만, 끝에 와서는 그 마음이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을 해 준다고 말합니다. 다루기 어려운 이유와 다룰 값어치가 있는 이유가 같습니다.

묵상

누군가 대신해 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나요? 정말로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그 일을, 내 마음이 어느 쪽으로 겨누어져 있느냐가 정할지도 모릅니다.

6 15구절

꽃을 고르고 따고 엮는 일에 견준 열여섯 편 - 가려내는 눈에 관하여

누가 이 땅을 꿰뚫어 볼 것인가, 저승과 신들의 세계까지 함께. 누가 잘 설해진 가르침을 꽃을 고르는 이처럼 가려낼 것인가.

Ko imaṁ pathaviṁ vicessati, Yamalokañca imaṁ sadevakaṁ; Ko dhammapadaṁ sudesitaṁ, Kusalo pupphamiva pacessati.

법구경 Dhammapada 44

배경

이 품의 이름이 꽃인 까닭이 첫 게송에 나옵니다. 꽃을 따는 사람은 아무 꽃이나 뽑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좋은지 알고, 어디를 잘라야 하는지 알며, 상하지 않게 다룹니다. 가르침을 대하는 태도를 그 일에 견준 것입니다. 위쩻사띠(vicessati)는 '살펴 꿰뚫어 안다'는 뜻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대목을 '지옥을 버리고 천상을 취한다'로 옮겼는데, 그러면 아는 일이 고르는 일로 바뀝니다. 빠알리는 이 땅과 저승과 하늘을 모두 하나의 앎의 대상으로 놓았습니다. 좋은 데를 고르는 이야기가 아니라 전체를 꿰뚫어 보는 이야기입니다.

묵상

좋은 말을 많이 듣지만 정작 내게 필요한 것을 골라내기는 어렵지 않나요? 오늘 들은 것 가운데 하나만 남긴다면 무엇을 고르시겠어요?

배우는 이가 이 땅을 꿰뚫어 보나니, 저승과 신들의 세계까지 함께. 배우는 이가 잘 설해진 가르침을 꽃을 고르는 이처럼 가려내느니라.

Sekho pathaviṁ vicessati, Yamalokañca imaṁ sadevakaṁ; Sekho dhammapadaṁ sudesitaṁ, Kusalo pupphamiva pacessati.

법구경 Dhammapada 45

배경

앞 게송이 물음이고 이 게송이 답입니다. 답으로 나온 낱말이 세코(sekha), 곧 '아직 배우는 중인 사람'입니다. 다 배운 이가 아니라 배우는 중인 이가 답으로 놓인 점이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이 낱말은 경전에서 깨달음의 길에 들어섰으나 아직 끝에 이르지 않은 이를 가리킵니다. 다 알아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자리에 선 사람이 이미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두 게송을 나란히 놓으면 이 품의 방식이 드러납니다. 크게 묻고 작게 답합니다. 답이 대단하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이 답의 핵심입니다.

묵상

아직 잘 모른다는 생각에 시작을 미루고 있는 것이 있나요? 배우는 중인 사람이 이미 볼 수 있다면,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을지 모릅니다.

이 몸이 물거품 같은 줄 알고 아지랑이 같은 것임을 깨달아, 사람을 붙드는 힘이 피워 낸 헛된 꽃을 잘라 내면, 죽음의 왕이 보지 못하는 곳으로 가느니라.

Pheṇūpamaṁ kāyamimaṁ viditvā, Marīcidhammaṁ abhisambudhāno; Chetvāna mārassa papupphakāni, Adassanaṁ maccurājassa gacche.

법구경 Dhammapada 46

배경

꽃이라는 이 품의 주제가 여기서 뒤집힙니다. 빠뿝파까(papupphaka)는 마라가 피워 놓은 꽃입니다. 곱게 보이지만 사람을 그 자리에 붙들어 두려고 피운 것입니다. 앞 게송에서 꽃은 골라야 할 좋은 것이었는데 여기서는 잘라 내야 할 것으로 나옵니다. 같은 그림을 뒤집어 쓰는 것이 법구경의 방식입니다. 페누빠마(pheṇūpama)는 물거품에 견준 말이고 마리찌(marīci)는 아지랑이입니다. 둘 다 멀리서는 있어 보이는데 다가가면 잡히지 않습니다. 몸을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 애쓰지 말라는 말로 읽힙니다.

묵상

손에 잡힐 듯해서 오래 얻으려 애썼는데 막상 닿으니 아무것도 없던 경험이 있나요? 그때 얻으려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꽃을 따 모으는 데만 마음을 빼앗긴 사람을, 큰물이 잠든 마을을 쓸어 가듯 죽음이 데려가느니라.

Pupphāni heva pacinantaṁ, byāsattamanasaṁ naraṁ; Suttaṁ gāmaṁ mahoghova, maccu ādāya gacchati.

법구경 Dhammapada 47

배경

그림 두 개가 겹칩니다. 꽃을 따느라 고개를 숙인 사람과, 잠든 마을입니다. 둘 다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 같습니다. 위험한 일을 하다가 당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그러모으다가 당한다는 데 이 게송의 서늘함이 있습니다. 브야삿따마나상(byāsattamanasaṁ)은 '마음이 거기 딱 붙어 버린'이라는 뜻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몸이 병들어 꽃처럼 시든다'로 바꾸었는데, 그러면 사람의 몰두를 짚던 말이 몸의 덧없음을 말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빠알리가 겨눈 것은 몸이 아니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자세입니다.

묵상

요즘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모으는 것이 있나요? 그것을 모으는 동안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은 무엇일까요?

꽃을 따 모으는 데만 마음을 빼앗기고, 감각적 욕망에 물리지 못한 이를 죽음이 제 뜻대로 하느니라.

Pupphāni heva pacinantaṁ, byāsattamanasaṁ naraṁ; Atittaññeva kāmesu, antako kurute vasaṁ.

법구경 Dhammapada 48

배경

앞 게송과 첫 두 줄이 같고 뒤가 바뀝니다. 여기 더해진 낱말이 아띳땅(atittaṁ), 곧 '아직 물리지 않은'입니다. 채우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중에 끝난다는 말입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즐거움을 다 누리고 나면 그만두겠다는 계획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물리는 지점이 오지 않으니 계획한 끝도 오지 않습니다. 안따까(antaka)는 '끝을 내는 자'로 죽음을 부르는 말입니다. 한역 법구경에는 이 죽음이 없고 대신 그릇되게 얻은 재물이 들어와 다른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묵상

이것만 채우면 됐다고 여긴 것이 있었나요? 그것을 채운 뒤에 마음은 정말 멈췄나요, 아니면 다음 것이 생겼나요?

벌이 꽃의 빛깔과 향기를 다치지 않고 꿀만 거두어 떠나가듯, 성자는 마을에서 그렇게 다니느니라.

Yathāpi bhamaro pupphaṁ, vaṇṇagandhamaheṭhayaṁ; Paleti rasamādāya, evaṁ gāme munī care.

법구경 Dhammapada 49

배경

탁발하는 수행자의 모습을 그린 게송이지만, 남에게 무언가를 받아 사는 모든 관계에 읽힙니다. 아헤타양(aheṭhayaṁ)은 '해치지 않고'입니다. 벌은 꽃에서 꿀을 가져가지만 꽃은 그대로 남습니다. 오히려 벌이 다녀간 덕에 열매가 맺힙니다. 받되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앞의 두 게송이 그러모으다 휩쓸리는 사람을 그렸으니, 여기서는 가져가되 남기는 방식을 보여 주는 셈입니다. 얼마나 가져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가져가느냐를 말하고 있습니다.

묵상

내가 무언가를 얻고 지나간 자리에 상함이 남은 적은 없었나요? 같은 것을 얻으면서 상하게 하지 않는 방법이 있었을까요?

남의 잘못을 들추지 말고 남이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을 캐지 말지니라. 다만 자기가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을 살필지니라.

Na paresaṁ vilomāni, na paresaṁ katākataṁ; Attanova avekkheyya, katāni akatāni ca.

법구경 Dhammapada 50

배경

빌로마(viloma)는 결이 거슬린 자리, 곧 남의 흠을 뜻합니다. 이 게송이 남의 잘못을 못 본 척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눈여겨볼 것은 뒷줄에서 자기를 살필 때도 '한 일과 하지 않은 일' 두 가지를 다 든다는 점입니다. 한 잘못만이 아니라 하지 않은 것까지 봅니다. 남에게 들이대던 잣대를 거두라는 것이 아니라 그 잣대를 자기 쪽으로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쪽으로 돌리면 남에게 쓸 때보다 볼 것이 훨씬 많아집니다. 남의 흠을 세는 일에 시간이 남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묵상

오늘 누군가의 잘못을 몇 번 떠올렸나요? 같은 시간에 내가 하지 않은 일은 몇 가지나 떠올렸는지 견주어 보면 어떨까요?

빛깔은 곱지만 향기가 없는 꽃처럼, 잘 말해진 말도 행하지 않는 이에게는 열매가 없느니라.

Yathāpi ruciraṁ pupphaṁ, vaṇṇavantaṁ agandhakaṁ; Evaṁ subhāsitā vācā, aphalā hoti akubbato.

법구경 Dhammapada 51

배경

수바시따(subhāsita)는 '잘 말해진 것'으로, 훌륭한 말이나 좋은 글귀를 가리킵니다. 그것이 나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빛깔이 곱다고 인정하고 시작합니다. 다만 향기가 없다고 합니다. 향기는 멀리 퍼지고 남습니다. 빛깔은 보는 동안만 있습니다. 아꿉바또(akubbato)는 '행하지 않는 이에게는'이라는 뜻으로, 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받는 사람 쪽에 문제를 둡니다. 같은 문장이 어떤 사람에게는 열매를 맺고 어떤 사람에게는 맺지 않습니다. 이 품의 다음 게송이 그 짝을 보여 줍니다.

묵상

마음에 새기겠다고 저장해 둔 글귀가 몇 개나 있나요? 그 가운데 실제로 몸을 움직이게 한 것은 몇 개였는지 세어 보면 어떨까요?

빛깔도 곱고 향기도 지닌 꽃처럼, 잘 말해진 말은 행하는 이에게 열매를 맺느니라.

Yathāpi ruciraṁ pupphaṁ, Vaṇṇavantaṁ sagandhakaṁ; Evaṁ subhāsitā vācā, Saphalā hoti kubbato.

법구경 Dhammapada 52

배경

앞 게송의 짝으로, 아간다까(agandhaka, 향기 없는)가 사간다까(sagandhaka, 향기 있는)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이 짝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말과 행동의 관계입니다. 좋은 말이 향기를 갖는 것은 말 자체가 달라져서가 아니라 그 말대로 사는 사람이 있어서입니다. 그러니 향기는 말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납니다. 이 품의 뒤쪽에서 향기 이야기가 다시 나오는데, 거기서는 됨됨이의 향기가 바람을 거슬러 간다고 합니다. 여기서 씨앗이 뿌려진 셈입니다. 한 사람이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을 볼 때 말이 비로소 힘을 얻습니다.

묵상

말보다 사는 모습으로 나를 움직인 사람이 있나요? 그 사람의 어떤 점이 말보다 오래 남았는지 떠올려 보세요.

꽃 더미에서 많은 꽃다발을 엮어 내듯, 태어나 죽어 갈 사람은 좋은 일을 많이 지어야 하느니라.

Yathāpi puppharāsimhā, kayirā mālāguṇe bahū; Evaṁ jātena maccena, kattabbaṁ kusalaṁ bahuṁ.

법구경 Dhammapada 53

배경

자떼나 맛쩨나(jātena maccena)는 '태어난 자, 곧 죽을 자로서'라는 뜻입니다. 좋은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놓입니다. 나중에 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덕을 쌓으면 태어나는 곳이 좋아진다'로 바꾸었는데, 그러면 덧없음이 이유이던 자리에 다음 생의 셈이 들어섭니다. 빠알리의 셈은 다릅니다. 꽃은 두면 시듭니다. 그러니 있을 때 엮습니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미루지 않을 이유가 됩니다.

묵상

언젠가 하려고 미뤄 둔 좋은 일이 있나요? 그 언젠가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면, 오늘 그중 가장 작은 것 하나를 해 볼 수 있을까요?

꽃의 향기는 바람을 거스르지 못하나니, 백단향도 따가라도 재스민도 그러하니라. 그러나 참된 사람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나니, 사방으로 퍼지느니라.

Na pupphagandho paṭivātameti, Na candanaṁ tagaramallikā vā; Satañca gandho paṭivātameti, Sabbā disā sappuriso pavāyati.

법구경 Dhammapada 54

배경

주석서는 이 게송이 아난다 존자의 물음에서 나왔다고 전합니다. 바람을 거슬러 가는 향기가 있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빠띠와따(paṭivāta)는 '바람을 거슬러'입니다. 아무리 귀한 향도 물리 법칙을 거스르지 못하는데, 사람의 됨됨이에서 나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대비입니다. 여기서 향기가 뜻하는 것은 평판과 조금 다릅니다. 평판은 누군가 전해야 퍼지지만, 이 게송이 말하는 것은 전하지 않아도 퍼지는 무엇입니다. 자기가 알리려 애쓰지 않는데도 알려지는 것, 그것을 향기라 부른 것입니다.

묵상

누군가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게 된 계기가 그 사람이 알리려 한 것이었나요, 아니면 저절로 알게 된 것이었나요?

백단향과 따가라, 연꽃과 재스민의 향기 가운데, 몸에 밴 됨됨이의 향기가 가장 뛰어나니라.

Candanaṁ tagaraṁ vāpi, uppalaṁ atha vassikī; Etesaṁ gandhajātānaṁ, sīlagandho anuttaro.

법구경 Dhammapada 55

배경

실라간다(sīlagandha)는 '실라의 향기'입니다. 실라(sīla)는 흔히 계율로 옮기지만 본래 몸에 밴 됨됨이에 가깝습니다. 규칙을 지키는 것과 그렇게 하는 것이 익어 자연스러워진 것은 다릅니다. 지키는 사람에게서는 애쓰는 기색이 나고 익은 사람에게서는 향기가 납니다. 이 게송이 네 가지 이름난 향을 일부러 나열한 뒤에 그것과 견준 것은, 됨됨이가 그 자리에 놓일 만한 실체라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값진 물건과 나란히 놓는 방식으로 그 값을 말한 셈입니다.

묵상

애써 지키는 일과 저절로 하게 되는 일 가운데 나에게는 어느 쪽이 더 많나요? 하나가 저절로 되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떠올려 보세요.

따가라와 백단향의 향기는 오히려 옅으니라. 됨됨이를 지닌 이의 향기는 신들의 세계에까지 불어 가느니라.

Appamatto ayaṁ gandho, yāyaṁ tagaracandanī; Yo ca sīlavataṁ gandho, vāti devesu uttamo.

법구경 Dhammapada 56

배경

앞 게송이 견주었다면 여기서는 격차를 말합니다. 압빠맛또(appamatto)는 여기서 '적은, 옅은'이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이 품에서 향기 이야기가 세 편이나 이어지는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향기는 본인이 맡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에서 나는 냄새를 자기는 잘 모릅니다. 됨됨이도 그렇습니다. 스스로 어떤 향을 내고 있는지는 자기가 가장 늦게 압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검소하게 살던 한 장로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가 애써 알리지 않았는데도 널리 알려졌다는 대목이 이 게송과 이어집니다.

묵상

다른 사람이 나에게서 느끼는 것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스스로 모르는 그 향기를 짐작할 방법이 하나쯤 있을까요?

됨됨이를 온전히 갖추고 부지런함 속에 살며, 바르게 알아 풀려난 이들에게는 사람을 붙드는 힘이 그 길을 찾지 못하느니라.

Tesaṁ sampannasīlānaṁ, appamādavihārinaṁ; Sammadaññāvimuttānaṁ, māro maggaṁ na vindati.

법구경 Dhammapada 57

배경

마로 막강 나 윈다띠(māro maggaṁ na vindati)는 '마라가 그 길을 찾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싸워서 이긴다고 하지 않고 아예 찾지 못한다고 한 점이 눈에 띕니다. 앞 품에서 지혜를 무기로 싸우라고 했던 것과 견주면 결이 다릅니다. 싸울 일 자체가 없어진 상태입니다. 세 가지가 나란히 놓입니다. 됨됨이가 갖추어졌고, 깨어 있음 속에 살며, 바르게 알아 풀려났습니다. 이 셋이 갖추어지면 붙들 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문을 잠그는 것이 아니라 들어올 틈이 없어지는 쪽에 가깝습니다.

묵상

유혹을 이겨 내려고 애쓰는 것과 애초에 흔들리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지금 나에게는 어느 쪽이 더 필요할까요?

큰길가에 버려진 쓰레기 더미에서도 맑은 향기를 지닌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듯, 쓰레기처럼 여겨지는 이들, 눈먼 채 살아가는 이들 가운데서도 깨달은 이의 제자는 지혜로 환히 빛나느니라.

Yathā saṅkāradhānasmiṁ, ujjhitasmiṁ mahāpathe; Padumaṁ tattha jāyetha, sucigandhaṁ manoramaṁ. Evaṁ saṅkārabhūtesu, andhabhūte puthujjane; Atirocati paññāya, sammāsambuddhasāvako.

법구경 Dhammapada 58-59

배경

두 게송이 한 문장으로 이어져 있어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앞이 비유이고 뒤가 그 뜻입니다. 상까라다나(saṅkāradhāna)는 마을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자리입니다. 연꽃이 맑은 물에서 피는 것이 아니라 그런 데서 핀다는 점이 이 비유의 전부입니다. 이 게송을 읽을 때 조심할 대목이 있습니다. 남을 쓰레기로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원문은 '쓰레기처럼 여겨지는'이라고 하여 그렇게 보이는 상태를 말할 뿐입니다. 그리고 연꽃도 원래 그 자리에서 났습니다. 다른 데서 옮겨 온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있는 자리가 어떻든 거기서 피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묵상

지금 있는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나요? 옮겨야만 달라진다고 여겼던 것 가운데, 실은 여기서도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7 어리석은 사람 15구절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못 보는 것 - 어리석음의 정체

잠 못 드는 이에게 밤은 길고 지친 이에게 길은 머니라. 바른 가르침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에게는 떠도는 길이 기니라.

Dīghā jāgarato ratti, dīghaṁ santassa yojanaṁ; Dīgho bālāna saṁsāro, saddhammaṁ avijānataṁ.

법구경 Dhammapada 60

배경

'길다'는 말이 세 번 되풀이됩니다. 밤이 길고, 길이 멀고, 떠도는 삶이 깁니다. 앞의 둘은 누구나 겪어 본 일입니다. 잠 못 드는 밤은 실제보다 훨씬 길게 느껴지고, 지쳐서 걷는 길은 같은 거리인데도 끝이 없습니다. 시간과 거리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겪는 사람의 상태가 다른 것입니다. 세 번째 줄이 앞의 둘을 딛고 옵니다. 상사라(saṁsāra)는 '되풀이하며 흘러감'을 뜻하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상태에 따라 길이가 달라집니다. 이 게송이 어리석음을 다루는 품의 첫머리에 놓인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어리석음은 아는 것이 적은 상태가 아니라 같은 길을 길게 겪는 상태입니다.

묵상

유난히 길게 느껴진 밤이 있었나요? 그날 실제로 흐른 시간과 내가 겪은 시간의 차이는 어디서 왔을까요?

길을 가다가 자기보다 낫거나 같은 이를 만나지 못하거든, 홀로 가는 길을 굳세게 갈지니라. 어리석은 이와는 벗함이 없느니라.

Carañce nādhigaccheyya, Seyyaṁ sadisamattano; Ekacariyaṁ daḷhaṁ kayirā, Natthi bāle sahāyatā.

법구경 Dhammapada 61

배경

사하야따(sahāyatā)는 '함께 감'을 뜻합니다. 벗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같이 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방향이 다른 사람과는 나란히 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게송이 자칫 남을 가려 사귀라는 오만한 말로 읽힐 수 있어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원문의 기준은 사람됨의 등급이 아니라 같은 방향인지 여부입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은 이'까지 포함한 점이 중요합니다. 더 나은 사람만 찾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게송의 무게는 뒤가 아니라 앞에 있습니다. 만나지 못하거든, 이라는 조건입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간다는 것이지 일부러 혼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묵상

혼자 가는 것이 외로워 방향이 다른 사람과 함께 걷고 있지는 않나요? 그 동행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지 한번 보면 어떨까요?

‘아들도 내 것이요 재물도 내 것이라’ 하며 어리석은 이는 애를 태우느니라. 제 몸조차 제 것이 아니거늘 어찌 아들이며 어찌 재물이겠느냐.

Puttā matthi dhanaṁ matthi, iti bālo vihaññati; Attā hi attano natthi, kuto puttā kuto dhanaṁ.

법구경 Dhammapada 62

배경

위한냐띠(vihaññati)는 '애를 태운다, 시달린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가진 것이 없어서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가졌다고 여기기 때문에 시달린다는 순서입니다. 내 것이라고 여기는 순간 잃을 것이 생깁니다. 뒷줄은 논리가 단단합니다. 자기 몸도 뜻대로 되지 않아 늙고 병드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인 자식과 바깥의 재물이 어떻게 내 것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게송이 자식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과 내 것으로 여기는 것은 다릅니다. 후자에서 애태움이 나옵니다.

묵상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 가운데 정말로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라도 있나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어리석은 이가 제 어리석음을 안다면 그만큼은 지혜로운 이니라. 어리석으면서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이라 불리느니라.

Yo bālo maññati bālyaṁ, paṇḍito vāpi tena so; Bālo ca paṇḍitamānī, sa ve “bālo”ti vuccati.

법구경 Dhammapada 63

배경

이 품에서 어리석음이 무엇인지 가장 또렷하게 밝힌 게송입니다. 어리석음은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입니다. 빤디따마니(paṇḍitamānī)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이'를 뜻합니다. 마나(māna)는 재는 것, 곧 자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앞줄의 셈이 재미있습니다. 제 어리석음을 아는 것만으로 그만큼은 지혜롭다고 인정합니다. 전부가 아니라 그만큼입니다. 인정에 인색하지 않으면서 부풀리지도 않습니다. 이 게송의 무서운 점은 읽는 사람이 스스로를 어느 쪽에 놓든 위험하다는 데 있습니다.

묵상

최근에 '내가 틀렸구나' 하고 인정한 일이 있나요? 그런 일이 좀처럼 없다면, 정말 틀리지 않은 것일까요?

어리석은 이가 평생을 두고 지혜로운 이를 가까이 모신다 해도, 국자가 국 맛을 모르듯 가르침을 알지 못하느니라.

Yāvajīvampi ce bālo, paṇḍitaṁ payirupāsati; Na so dhammaṁ vijānāti, dabbī sūparasaṁ yathā.

법구경 Dhammapada 64

배경

국자는 국 속에 온종일 잠겨 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 국과 오래 닿아 있는데도 맛을 모릅니다. 닿아 있는 시간이 아는 것과 상관없다는 그림입니다. 빠이루빠사띠(payirupāsati)는 '가까이 앉아 섬긴다'는 뜻으로, 스승 곁에 머무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이 게송이 겨눈 것은 게으름이 아닙니다. 평생을 곁에 있었다고 했으니 성실하기까지 합니다. 다만 받아들이는 자리가 없으면 아무리 오래 닿아 있어도 스며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음 게송이 그 짝으로 혀를 내놓습니다.

묵상

좋은 강의나 책 곁에 오래 머물렀는데 남은 것이 적었던 적이 있나요? 그때 나는 국자였을까요, 혀였을까요?

슬기로운 이가 잠깐이라도 지혜로운 이를 가까이 모시면, 혀가 국 맛을 알아채듯 가르침을 곧바로 아느니라.

Muhuttamapi ce viññū, paṇḍitaṁ payirupāsati; Khippaṁ dhammaṁ vijānāti, jivhā sūparasaṁ yathā.

법구경 Dhammapada 65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국자와 혀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국자는 단단하고 혀는 부드럽습니다. 국자는 국을 옮기고 혀는 국을 받아들입니다. 무훗땅(muhutta)은 아주 짧은 동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평생과 잠깐을 맞세워 놓고, 시간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성질이 갈랐다고 말합니다. 윈뉴(viññū)는 '알아듣는 이'라는 뜻입니다. 이미 다 아는 사람이 아니라 알아들을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두 게송을 함께 읽으면 배움에서 중요한 것이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느냐가 아니라 어떤 상태로 앉아 있었느냐임이 드러납니다.

묵상

짧은 한마디가 오래 남은 적이 있나요? 그때 나는 어떤 상태였는지, 그 상태를 다시 만들 수 있을지 떠올려 보세요.

어리석고 지혜가 모자란 이들은 스스로를 적으로 삼아 살아가나니, 나쁜 일을 저지르고 그 열매를 쓰디쓰게 받느니라.

Caranti bālā dummedhā, amitteneva attanā; Karontā pāpakaṁ kammaṁ, yaṁ hoti kaṭukapphalaṁ.

법구경 Dhammapada 66

배경

아밋떼네와 앗따나(amitteneva attanā)는 '자기 자신을 적으로 삼아'라는 뜻입니다. 이 한마디가 이 게송의 전부입니다. 밖에 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의 적이라는 것입니다. 한역 법구경에는 이 구절이 없고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무지의 이야기가 되면서 자기가 자기를 해친다는 그림이 사라진 셈입니다. 앞의 3품에서 잘못 겨누어진 마음이 적보다 더한 해를 입힌다고 했던 것과 이어집니다.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이 남을 해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게송의 셈으로는 가장 먼저 해를 입는 쪽이 자신입니다.

묵상

지금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일 가운데,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낸 몫은 얼마나 될까요?

하고 나서 뉘우치게 되는 일, 그 일은 잘한 일이 아니니라. 눈물 젖은 얼굴로 울면서 그 갚음을 받게 되느니라.

Na taṁ kammaṁ kataṁ sādhu, yaṁ katvā anutappati; Yassa assumukho rodaṁ, vipākaṁ paṭisevati.

법구경 Dhammapada 67

배경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가르는 기준이 여기서는 규칙이 아니라 뒷맛입니다. 아누땁빠띠(anutappati)는 '뒤에 가서 타들어 간다'는 뜻으로, 앞 품에서 본 낱말과 같은 뿌리입니다. 이 기준이 실용적인 까닭은 미리 써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기 전에 이 일을 하고 나서 뉘우칠지 물어보면 대개 답이 나옵니다. 그리고 답을 알면서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까지가 이 게송이 겨눈 자리입니다. 몰라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한다는 것, 그것이 이 품이 말하는 어리석음의 모습입니다.

묵상

하기 전에 '이걸 하고 나면 후회할까' 하고 물어본 적이 있나요? 그 물음에 답이 나왔는데도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하고 나서 뉘우치지 않는 일, 그 일은 잘한 일이니라.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갚음을 받게 되느니라.

Tañca kammaṁ kataṁ sādhu, yaṁ katvā nānutappati; Yassa patīto sumano, vipākaṁ paṭisevati.

법구경 Dhammapada 68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꽃을 팔던 사람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왕에게 바칠 꽃을 부처님께 올리기로 마음먹고 손해를 각오했는데, 뒤에 기뻐했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갚음을 받는 시점이 아니라 받는 마음입니다. 같은 결과라도 뉘우치며 받는 것과 기뻐하며 받는 것은 다릅니다. 빠띠또 수마노(patīto sumano)는 '흡족하고 기쁜'입니다. 좋은 일을 하라는 권고가 아니라, 잘한 일은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다시 좋다는 관찰에 가깝습니다.

묵상

떠올릴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 하나 있나요? 그런 일을 하나 더 만든다면 무엇을 하시겠어요?

나쁜 일이 익기 전까지 어리석은 이는 그것을 꿀처럼 여기나니, 나쁜 일이 익으면 그때 괴로움을 겪느니라.

Madhuṁvā maññati bālo, yāva pāpaṁ na paccati; Yadā ca paccati pāpaṁ, atha dukkhaṁ nigacchati.

법구경 Dhammapada 69

배경

빳짜띠(paccati)는 '익는다, 삶아진다'는 뜻입니다. 열매가 익는 데 시간이 걸리듯 결과가 나타나는 데도 시간이 걸립니다. 그 시차 때문에 원인과 결과가 이어져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달다는 사실과 나중에 쓰다는 사실이 동시에 보이지 않으니, 달 때는 달기만 합니다. 이 게송이 그리는 어리석음은 판단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맛만 보는 것입니다. 앞 게송에서 뉘우칠 일인지 미리 물어보라고 한 것이 바로 이 시차를 건너뛰는 방법입니다. 익은 뒤의 맛을 지금 맛보는 셈입니다.

묵상

지금 달게 느껴지는 것이 나중에 어떤 맛이 될지 상상해 본 적 있나요? 그 상상이 실제로 손을 멈추게 한 적이 있었나요?

어리석은 이가 달마다 풀잎 끝에 얹힐 만큼만 먹는다 해도, 가르침을 헤아려 아는 이들의 열여섯 몫 가운데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Māse māse kusaggena, bālo bhuñjeyya bhojanaṁ; Na so saṅkhātadhammānaṁ, kalaṁ agghati soḷasiṁ.

법구경 Dhammapada 70

배경

꾸삭게나(kusaggena)는 '쿠사풀 끝만큼'이라는 뜻으로, 극단적인 굶주림 수행을 가리킵니다. 부처님 자신이 깨닫기 전 여섯 해 동안 그런 고행을 했고 그것으로는 얻은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게송은 그 경험 위에 서 있습니다. 몸을 괴롭히는 일이 아무리 지독해도 알아보는 일 하나를 대신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상카따담마(saṅkhātadhamma)는 '가르침을 헤아려 안 이'를 뜻합니다. 열여섯 분의 일이라는 표현은 당시 흔히 쓰던 비교 방식으로, 견줄 수 없다는 말의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묵상

힘들게 하는 것이 곧 잘하는 것이라고 여긴 적이 있나요? 애쓴 만큼이 아니라 방향이 결과를 정할 때가 있습니다.

나쁘게 지은 일은 갓 짠 우유가 엉기듯 곧바로 굳어지지 않나니, 재에 덮인 불씨처럼 어리석은 이를 따라다니며 속으로 태우느니라.

Na hi pāpaṁ kataṁ kammaṁ, Sajjukhīraṁva muccati; Ḍahantaṁ bālamanveti, Bhasmacchannova pāvako.

법구경 Dhammapada 71

배경

비유가 둘 겹칩니다. 하나는 우유입니다. 갓 짠 우유는 바로 엉기지 않고 시간이 지나야 굳습니다. 다른 하나는 재에 덮인 불씨입니다. 겉으로는 꺼진 것처럼 보이지만 속에서 계속 타고 있습니다. 두 비유 모두 시간차를 말합니다. 다핫땅(ḍahantaṁ)은 '태우면서'라는 뜻으로, 결과가 나타나기 전에도 이미 안에서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앞 게송이 나중에 익는다고 했다면 여기서는 그 사이에도 조용히 타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무 일 없어 보이는 기간이 아무 일 없는 기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묵상

지나갔다고 여긴 일이 어느 날 문득 되살아난 적이 있나요? 그동안 그것은 사라진 것이었을까요, 재 밑에 있었던 것일까요?

어리석은 이에게 생기는 앎과 이름은 오직 해로움이 될 뿐이니, 그의 밝은 몫을 부수고 머리를 쪼개느니라.

Yāvadeva anatthāya, ñattaṁ bālassa jāyati; Hanti bālassa sukkaṁsaṁ, muddhamassa vipātayaṁ.

법구경 Dhammapada 72

배경

냐따(ñatta)는 아는 것과 알려지는 것을 함께 뜻하는 말입니다. 지식과 명성이 한 낱말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 게송의 서늘함은 배움 자체를 해로운 것으로 놓았다는 데 있습니다. 다만 조건이 붙습니다. 어리석은 이에게 생길 때입니다. 앞 게송에서 어리석음이 자기를 못 보는 상태라고 했으니, 자기를 못 보는 사람이 아는 것이 많아지면 그것이 자기를 재는 자로 쓰인다는 말이 됩니다. 숙깡사(sukkaṁsa)는 '흰 몫', 곧 그 사람에게 있던 좋은 부분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에 탐욕을 넣어 흔한 경계의 말로 바꾸었습니다.

묵상

아는 것이 늘면서 남을 재는 일도 함께 늘지는 않았나요? 배움이 나를 부드럽게 했는지 딱딱하게 했는지 돌아보면 어떨까요?

있지도 않은 것을 갖춘 양 여겨지기를 바라고 수행자들 사이에서 앞자리를 바라며, 머무는 곳에서는 권세를, 남의 집에서는 대접을 바라느니라. ‘이 일은 내가 했다고 여겨 다오, 무슨 일이든 내 뜻을 따라 다오’ 하나니, 이렇게 어리석은 이의 생각 속에서 욕심과 자만이 자라느니라.

Asantaṁ bhāvanamiccheyya, Purekkhārañca bhikkhusu; Āvāsesu ca issariyaṁ, Pūjaṁ parakulesu ca. Mameva kata maññantu, gihī pabbajitā ubho; Mamevātivasā assu, kiccākiccesu kismici; Iti bālassa saṅkappo, icchā māno ca vaḍḍhati.

법구경 Dhammapada 73-74

배경

두 게송이 한 문장으로 이어져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앞에서 바라는 것 네 가지를 늘어놓고, 뒤에서 그 속마음을 그대로 옮겨 적었습니다. 아산땅(asantaṁ)은 '있지도 않은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양 여겨 주기를 바라는 데서 시작합니다. 뒤로 갈수록 요구가 커집니다. 앞자리에서 권세로, 권세에서 무슨 일이든 내 뜻대로로 옮겨 갑니다. 마지막 줄이 이 흐름을 한마디로 맺습니다. 이렇게 욕심과 자만이 자란다는 것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것이 수행하는 이들 사이의 일로 그려졌다는 점입니다. 세상을 떠난 자리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묵상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어디까지 커져 있나요? 처음에는 알아봐 주기를 바랐는데 지금은 따라 주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면 어떨까요?

이익으로 가는 길과 열반으로 가는 길은 서로 다르니라. 깨달은 이의 제자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 떠받들어지기를 기뻐하지 말고 홀로 있음을 길러야 하느니라.

Aññā hi lābhūpanisā, aññā nibbānagāminī; Evametaṁ abhiññāya, bhikkhu buddhassa sāvako; Sakkāraṁ nābhinandeyya, vivekamanubrūhaye.

법구경 Dhammapada 75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입니다. 안냐 히 안냐(aññā hi aññā), 곧 '다르다 다르다'를 두 번 되풀이해 두 길이 겹치지 않음을 못박습니다. 좋은 일을 하면 이익도 따라오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는데, 게송은 그것을 부정하는 대신 방향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이익을 얻는 데 매달리다 보면 열반 쪽으로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위웨까(viveka)는 '홀로 있음, 떨어져 있음'입니다. 사람을 피하라는 말이라기보다 떠받들어지는 자리에서 물러나 있는 것에 가깝습니다. 앞의 73게송과 74게송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어떻게 자라는지 보여 주었으니, 그 반대편을 마지막에 놓은 셈입니다.

묵상

잘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나요? 그 좋아짐이 나를 어느 쪽으로 이끄는지 한 번쯤 지켜볼 만합니다.

8 지혜로운 사람 13구절

쓴소리를 보물처럼 여기는 사람 - 흔들리지 않는 이의 조건

숨은 보물을 알려 주는 이처럼 허물을 짚어 주는 이를 만나거든, 꾸짖어 주는 그 지혜로운 이를 가까이할지니라. 그런 이를 가까이하면 나아질 뿐 나빠지지 않느니라.

Nidhīnaṁva pavattāraṁ, yaṁ passe vajjadassinaṁ; Niggayhavādiṁ medhāviṁ, tādisaṁ paṇḍitaṁ bhaje; Tādisaṁ bhajamānassa, seyyo hoti na pāpiyo.

법구경 Dhammapada 76

배경

니디낭와(nidhīnaṁva)는 '숨겨진 보물처럼'입니다. 땅에 묻힌 보물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는 사람을 우리는 고마워합니다. 허물을 짚어 주는 사람을 그와 같이 여기라는 것입니다. 닉가이하와딘(niggayhavādin)은 '눌러 말하는 이', 곧 꾸짖는 이를 뜻합니다.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게송이 실용적인 까닭은 마지막 줄에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라는 권고가 아니라 손익을 말합니다. 그런 이를 가까이하면 나아진다는 것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에서 사람이 사라지고 '두려워하여 범하지 말라'는 자기 단속의 말만 남았습니다. 쓴소리하는 벗을 얻는 법을 말하던 게송이 혼자 조심하라는 말이 된 셈입니다.

묵상

나에게 쓴소리를 해 주는 사람이 몇이나 있나요? 그 사람을 멀리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는지 돌아보면 어떨까요?

가르치고 타이르며 옳지 않은 일을 막아 주는 이는, 좋은 사람에게는 사랑받고 그렇지 않은 이에게는 미움을 받느니라.

Ovadeyyānusāseyya, asabbhā ca nivāraye; Satañhi so piyo hoti, asataṁ hoti appiyo.

법구경 Dhammapada 77

배경

앞 게송이 쓴소리를 듣는 쪽이었다면 여기서는 하는 쪽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숨기지 않습니다. 미움을 받는다고 못박습니다. 니와라예(nivāraye)는 '막는다'는 뜻으로, 말리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이 게송의 정직함은 결과를 두 갈래로 나눈 데 있습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에게는 사랑받고 그렇지 않은 이에게는 미움을 받습니다. 그러니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는 잘못했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다만 누가 미워하는지를 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묵상

옳은 말을 하고 미움을 산 적이 있나요? 그때 나를 미워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떠올려 보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질지도 모릅니다.

나쁜 벗을 사귀지 말고 못난 사람과 어울리지 말지니라. 좋은 벗을 사귀고 훌륭한 사람과 어울릴지니라.

Na bhaje pāpake mitte, na bhaje purisādhame; Bhajetha mitte kalyāṇe, bhajetha purisuttame.

법구경 Dhammapada 78

배경

깔랴나밋따(kalyāṇamitta)는 경전 전체에서 매우 무겁게 쓰이는 말입니다. 다른 경에서 아난다 존자가 좋은 벗을 갖는 것이 수행의 절반쯤 된다고 하자, 부처님이 절반이 아니라 전부라고 고쳐 주신 대목이 있습니다. 이 게송이 사람을 등급으로 나누는 말처럼 읽힐 수 있어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바제(bhaje)는 '가까이 지낸다, 곁에 둔다'는 뜻으로, 누구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누구 곁에 오래 머무느냐를 말합니다. 우리는 곁에 있는 사람을 닮아 갑니다. 그것이 이 게송의 근거입니다.

묵상

요즘 가장 오래 함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내가 그 사람을 닮아 가고 있다면 어느 쪽으로 닮아 가고 있을까요?

가르침을 기뻐하는 이는 맑고 개운한 마음으로 편안히 잠들고, 성인이 설한 가르침 안에서 지혜로운 이는 늘 즐거워하느니라.

Dhammapīti sukhaṁ seti, vippasannena cetasā; Ariyappavedite dhamme, sadā ramati paṇḍito.

법구경 Dhammapada 79

배경

담마삐띠(dhammapīti)는 '가르침을 마시는 이' 또는 '가르침에서 오는 기쁨'으로 읽힙니다. 삐띠(pīti)에 마신다는 뜻과 기쁨이라는 뜻이 겹쳐 있어 생긴 겹말입니다. 이 게송이 말하는 결과가 흥미롭습니다. 깨달음이나 신통이 아니라 잠입니다. 위빠산네나 쩨따사(vippasannena cetasā)는 '맑게 가라앉은 마음으로'라는 뜻으로, 흙탕물이 가라앉아 맑아진 상태를 가리키는 말에서 왔습니다. 낮에 무엇을 했는지가 밤에 드러납니다. 잠자리가 편한지 아닌지는 스스로에게 거짓말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묵상

요즘 잠자리에 누웠을 때 마음이 어떤가요? 가라앉나요, 아니면 그때부터 떠오르기 시작하나요?

물길 내는 이는 물을 이끌고 화살 만드는 이는 화살대를 곧게 하며, 목수는 나무를 다듬나니, 지혜로운 이는 자기를 다스리느니라.

Udakañhi nayanti nettikā, Usukārā namayanti tejanaṁ; Dāruṁ namayanti tacchakā, Attānaṁ damayanti paṇḍitā.

법구경 Dhammapada 80

배경

세 가지 일이 나란히 놓이고 네 번째에 자기를 다스리는 일이 옵니다. 앞의 셋은 모두 손기술입니다. 배워야 하고, 도구가 있고, 시간이 들고, 하다 보면 늡니다. 자기를 다스리는 일을 그 줄에 세운 것입니다. 타고난 성품의 문제가 아니라 익히는 기술로 본 셈입니다. 나마얀띠(namayanti)는 '휘어 바로잡는다'는 뜻입니다. 물길을 내는 사람도 물을 없애지 않고 방향만 바꿉니다. 화살대도 부러뜨리지 않고 폅니다. 다마얀띠(damayanti)의 다스림도 그와 같아서, 없애는 일이 아니라 방향을 주는 일입니다.

묵상

손에 익은 기술이 하나 있나요? 그것이 익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떠올려 보면, 자기를 다루는 일에 걸릴 시간도 짐작이 될까요?

단단한 바위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 지혜로운 이는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느니라.

Selo yathā ekaghano, vātena na samīrati; Evaṁ nindāpasaṁsāsu, na samiñjanti paṇḍitā.

법구경 Dhammapada 81

배경

에까가나(ekaghana)는 '한 덩어리로 된, 틈이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여러 조각을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통으로 된 바위입니다. 쌓아 올린 것은 바람에 무너지지만 통으로 된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비난과 칭찬을 한 짝으로 묶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대개 비난에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고 칭찬은 마음껏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게송은 둘을 함께 놓습니다. 칭찬에 들뜨는 사람은 비난에도 무너집니다. 같은 자리에서 오는 흔들림이기 때문입니다.

묵상

칭찬을 들으면 마음이 부풀어 오르나요? 그 부풀어 오름의 크기만큼 비난에도 꺼질 수 있다면, 어느 쪽을 먼저 다루어야 할까요?

깊고 맑아 흐려지지 않은 호수와 같이, 지혜로운 이는 가르침을 듣고 고요해지느니라.

Yathāpi rahado gambhīro, vippasanno anāvilo; Evaṁ dhammāni sutvāna, vippasīdanti paṇḍitā.

법구경 Dhammapada 82

배경

앞 게송이 바위였다면 여기서는 호수입니다. 바위는 흔들리지 않는 굳셈이고 호수는 흐려지지 않는 맑음입니다. 두 비유가 짝을 이룹니다. 감비라(gambhīra)는 '깊은'입니다. 얕은 물은 조금만 휘저어도 바닥이 일어나 흐려지지만 깊은 물은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일을 겪어도 어떤 사람은 오래 흐려 있고 어떤 사람은 금세 가라앉는데, 그 차이를 깊이로 본 것입니다. 위빠시단띠(vippasīdanti)는 '맑아진다'는 뜻으로, 79게송의 잠자리 이야기에 나온 낱말과 같은 뿌리입니다.

묵상

한 번 흐려진 마음이 가라앉기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그 시간이 짧아지는 것이 깊어지는 표시일지도 모릅니다.

참된 이는 어디서나 내려놓고 바라는 것을 얻으려 말을 꾸미지 않느니라. 즐거움이 닿든 괴로움이 닿든 지혜로운 이는 들뜨거나 가라앉음을 드러내지 않느니라.

Sabbattha ve sappurisā cajanti, Na kāmakāmā lapayanti santo; Sukhena phuṭṭhā atha vā dukhena, Na uccāvacaṁ paṇḍitā dassayanti.

법구경 Dhammapada 83

배경

라빠얀띠(lapayanti)는 '늘어놓아 말한다'는 뜻으로,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말을 꾸미는 일을 가리킵니다. 웃짜와짱(uccāvacaṁ)은 '높고 낮음'입니다. 기쁠 때 확 올라가고 힘들 때 확 내려가는 그 진폭을 말합니다. 이 게송이 감정을 숨기라고 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어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원문은 느끼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이 닿는다고 인정하고 시작합니다. 다만 그 진폭이 밖으로 튀어 다른 사람과 자기 판단을 흔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는 것과 진폭이 줄어드는 것은 다릅니다.

묵상

기쁠 때와 힘들 때 나의 진폭은 얼마나 큰가요? 그 폭이 큰 만큼 회복에도 시간이 걸리지는 않던가요?

자기를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자식이나 재물이나 나라를 바라지 않고, 옳지 못한 길로 제 잘됨을 바라지 않는 이, 그가 됨됨이를 갖추고 지혜로우며 올바르게 사는 이니라.

Na attahetu na parassa hetu, Na puttamicche na dhanaṁ na raṭṭhaṁ; Na iccheyya adhammena samiddhimattano, Sa sīlavā paññavā dhammiko siyā.

법구경 Dhammapada 84

배경

이 게송의 급소는 '남을 위해서도'라는 대목입니다. 자기 욕심을 위해 옳지 못한 길을 가는 것은 누구나 잘못이라 압니다. 그런데 가족을 위해서라면, 조직을 위해서라면 하는 순간 기준이 흔들립니다. 이 게송은 그 예외를 미리 막아 둡니다. 아담메나(adhammena)는 '이치에 맞지 않은 방식으로'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바라느냐가 아니라 어떤 길로 가느냐를 봅니다. 자식과 재물과 나라를 나란히 든 것은 당시 사람이 바랄 만한 것을 크기 순으로 늘어놓은 것으로, 어느 크기에서도 같다는 뜻입니다.

묵상

가족을 위해서라면 조금 어긋나도 된다고 여긴 적이 있나요? 그 선을 넘을 때 누구를 위해서라고 말했는지 떠올려 보세요.

사람들 가운데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이는 드무니라. 나머지 사람들은 이쪽 물가만 오르내리느니라.

Appakā te manussesu, ye janā pāragāmino; Athāyaṁ itarā pajā, tīramevānudhāvati.

법구경 Dhammapada 85

배경

띠라메와누다와띠(tīramevānudhāvati)는 '물가를 따라 달리기만 한다'는 뜻입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달립니다. 다만 물가를 따라 달릴 뿐 건너지 않습니다. 이 대목이 이 비유의 급소입니다. 게으름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방향 없는 분주함을 짚은 것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건너려는 사람은 반드시 달린다'로 옮겼는데, 그러면 달린다는 말이 나무람에서 격려로 뒤집힙니다. 빠알리에서 달리는 것은 건너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묵상

요즘 바쁘게 지내고 있나요? 그 바쁨이 어딘가로 건너가는 중인가요, 아니면 같은 물가를 오르내리는 중인가요?

바르게 설해진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 사는 이들은, 건너기 어려운 죽음의 자리를 넘어 저 언덕에 이르느니라.

Ye ca kho sammadakkhāte, dhamme dhammānuvattino; Te janā pāramessanti, maccudheyyaṁ suduttaraṁ.

법구경 Dhammapada 86

배경

앞 게송의 짝으로, 드문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밝힙니다. 담마누왓띤(dhammānuvattin)은 '가르침을 따라 도는 이'라는 뜻입니다. 아는 이가 아니라 따라 사는 이입니다. 1품 마지막에서 많이 외우는 것과 따라 사는 것을 갈랐던 대목이 여기서 다시 나옵니다. 마쭈데이야(maccudheyya)는 '죽음이 다스리는 자리'입니다. 수둣따라(suduttara)는 '건너기 지극히 어려운'입니다. 어렵다는 것을 숨기지 않으면서 건널 수 있다고 말합니다. 드물다는 앞 게송과 건널 수 있다는 이 게송이 함께 놓여야 이 짝의 뜻이 온전해집니다.

묵상

어렵다는 말과 할 수 있다는 말 가운데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어느 쪽인가요? 둘 다 사실일 때 우리는 대개 앞엣것만 듣습니다.

지혜로운 이는 어두운 것을 버리고 밝은 것을 길러야 하나니, 집을 떠나 머물 데 없는 곳으로 나아가 홀로 있음을 누리기 어려운 그 자리에서, 오히려 즐거움을 찾고 쾌락을 버려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마음의 더러움에서 자기를 씻어야 하느니라.

Kaṇhaṁ dhammaṁ vippahāya, Sukkaṁ bhāvetha paṇḍito; Okā anokamāgamma, Viveke yattha dūramaṁ. Tatrābhiratimiccheyya, hitvā kāme akiñcano; Pariyodapeyya attānaṁ, cittaklesehi paṇḍito.

법구경 Dhammapada 87-88

배경

두 게송이 한 문장으로 이어져 함께 읽어야 합니다. 오까 아노깡(okā anokaṁ)은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라는 뜻으로, 출가를 가리키는 오래된 표현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그 자리를 즐거움이 있는 곳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두라망(dūramaṁ)은 '즐기기 어려운'이라는 뜻입니다. 홀로 있는 자리가 원래 견디기 어렵다고 먼저 인정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 그 어려운 자리에서 즐거움을 찾으라고 합니다. 빠리요다뻬이야(pariyodapeyya)는 옷을 빨듯 씻어 낸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더러움이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빨아야 하는 것으로 놓여 있습니다.

묵상

혼자 있는 시간이 견디기 어렵나요? 그 어려움을 없애려 하기보다 그 안에서 지낼 만한 것을 하나 찾는다면 무엇일까요?

깨달음의 갈래마다 마음을 바르게 길러, 붙잡음을 놓아 버리고 움켜쥐지 않음을 기뻐하는 이들은, 번뇌가 다하여 빛나나니 이 세상에서 이미 불이 꺼진 이들이니라.

Yesaṁ sambodhiyaṅgesu, sammā cittaṁ subhāvitaṁ; Ādānapaṭinissagge, anupādāya ye ratā; Khīṇāsavā jutimanto, te loke parinibbutā.

법구경 Dhammapada 89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입니다. 마지막 줄의 로께 빠리닙부따(loke parinibbutā)가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완전히 꺼졌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불이 꺼졌다는 말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세상을 건넜다'로 옮겼는데, 그러면 안에서 꺼지는 그림이 밖으로 벗어나는 그림이 됩니다. 열반이 죽은 뒤에 가는 어딘가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 빠알리의 그림입니다. 아사와(āsava)는 '흘러드는 것'으로, 안으로 스며들어 사람을 물들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다한 상태를 빛난다고 표현했습니다.

묵상

무언가를 놓았을 때 오히려 가벼워진 경험이 있나요? 그 가벼움이 잠깐이 아니라 계속된다면 어떤 삶이 될지 그려 보세요.

9 온전히 놓아버린 사람 10구절

다 내려놓은 이는 어떤 모습인가 - 자취를 남기지 않는 사람들

길을 다 간 이, 슬픔이 없는 이,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모든 얽매임을 놓아 버린 이에게는 타는 열기가 없느니라.

Gataddhino visokassa, vippamuttassa sabbadhi; Sabbaganthappahīnassa, pariḷāho na vijjati.

법구경 Dhammapada 90 아라한의 품 (Arahantavagga)

배경

가땃디노(gataddhino)는 '길을 다 간 이'입니다. 먼 길을 걸어 마침내 도착한 사람의 그림입니다. 빠릴라호(pariḷāha)는 '타오르는 열'을 뜻하는데, 몸의 열과 마음의 애탐을 함께 가리킵니다. 오래 걸은 사람의 몸에 남는 열기를 떠올리면 이 비유가 살아납니다. 다 도착했는데도 몸이 계속 달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게송은 그런 열기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간타(gantha)는 '묶어 놓은 매듭'입니다. 이 품이 그리는 사람은 무언가를 이룬 사람이라기보다 풀어 버린 사람에 가깝습니다. 더한 것이 아니라 덜어 낸 자리에 이 고요가 있습니다.

묵상

다 끝났는데도 마음이 계속 달아 있던 적이 있나요? 그 열기는 무엇 때문에 남아 있었을까요?

깨어 있는 이들은 힘써 나아가며 머무는 자리에 마음을 두지 않나니, 백조가 연못을 버리고 떠나듯 집이란 집을 모두 두고 가느니라.

Uyyuñjanti satīmanto, na nikete ramanti te; Haṁsāva pallalaṁ hitvā, okamokaṁ jahanti te.

법구경 Dhammapada 91

배경

백조는 연못을 미워해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저 때가 되면 날아갑니다. 미련도 원망도 없이 떠나는 그 방식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니께따(niketa)는 '거처, 자리'입니다. 실제 집만이 아니라 마음이 눌러앉은 자리를 함께 가리킵니다. 오까모깡(okamokaṁ)은 '집이란 집을'로, 같은 낱말을 겹쳐 어느 하나가 아니라 모두를 뜻합니다. 이 게송이 집을 버리라는 말로만 읽히면 좁아집니다. 우리가 눌러앉는 자리는 건물만이 아니라 역할, 관계, 익숙한 방식까지입니다. 떠날 때가 되었는데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게송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묵상

떠날 때가 지났는데 아직 머물러 있는 자리가 있나요? 그것을 붙드는 것은 애정일까요, 익숙함일까요?

쌓아 둔 것이 없고 먹는 일을 있는 그대로 아는 이, 비어 있음과 모습 없음으로 풀려난 곳이 그가 노니는 자리이니, 그 자취는 하늘을 나는 새의 길처럼 찾아내기 어려우니라.

Yesaṁ sannicayo natthi, ye pariññātabhojanā; Suññato animitto ca, vimokkho yesaṁ gocaro; Ākāseva sakuntānaṁ, gati tesaṁ durannayā.

법구경 Dhammapada 92

배경

산니짜야(sannicaya)는 '쌓아 둠'으로, 물건만이 아니라 공덕을 쌓아 두는 것까지 포함해 읽습니다. 빠린냐따보자나(pariññātabhojana)는 '먹는 일을 두루 안 이'입니다. 왜 먹는지, 얼마나 먹어야 하는지를 안다는 뜻으로, 매일 하는 가장 흔한 일에서 앎이 드러난다는 그림입니다. 마지막 비유가 이 품의 결을 잘 보여 줍니다. 새가 지나간 하늘에는 길이 남지 않습니다. 발자국이 없으니 뒤쫓을 수 없습니다. 남기려 하지 않는 삶을 그렇게 그린 것입니다. 두란나야(durannaya)는 '뒤따라가기 어려운'이라는 뜻입니다.

묵상

나는 무엇을 쌓아 두고 있나요? 물건 말고, 언젠가 쓰려고 모아 둔 마음의 것들까지 헤아려 보면 어떨까요?

번뇌가 다하여 먹는 일에도 기대지 않는 이, 비어 있음과 모습 없음으로 풀려난 곳이 그가 노니는 자리이니, 그 발자취는 하늘을 나는 새의 길처럼 찾아내기 어려우니라.

Yassāsavā parikkhīṇā, āhāre ca anissito; Suññato animitto ca, vimokkho yassa gocaro; Ākāseva sakuntānaṁ, padaṁ tassa durannayaṁ.

법구경 Dhammapada 93

배경

앞 게송과 거의 같고 앞머리만 바뀝니다. 아사와(āsava)는 '흘러드는 것'으로, 안으로 스며들어 사람을 물들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아닛시또(anissito)는 '기대지 않는'입니다. 먹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먹는 일에 마음을 걸어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두 게송이 나란히 놓여 같은 말을 두 번 하는 것이 이 품의 방식입니다. 1품에서 본 짝 구조가 여기서도 쓰였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뒤집는 짝이 아니라 겹쳐 놓는 짝입니다. 같은 자리를 두 각도에서 보여 주어 그 자리가 어떤 곳인지 더 또렷해집니다.

묵상

무언가에 기대지 않고도 지낼 수 있을까요? 기대는 것 하나를 잠시 내려놓아 본다면 무엇부터 해 볼 수 있을까요?

마부에게 잘 길든 말처럼 감각이 고요해진 이, 자만을 버리고 번뇌가 없는 이, 그런 이를 신들도 부러워하느니라.

Yassindriyāni samathaṅgatāni, Assā yathā sārathinā sudantā; Pahīnamānassa anāsavassa, Devāpi tassa pihayanti tādino.

법구경 Dhammapada 94

배경

길든 말의 비유가 다시 나옵니다. 3품에서 마음을 길들이는 이야기를 했는데 여기서는 감각입니다. 길든 말은 힘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힘이 제대로 쓰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마지막 줄입니다. 신들도 부러워한다고 했습니다. 인도 사람들이 우러르던 신들을 부러워하는 쪽에 놓은 것입니다. 신들은 오래 살고 즐거움을 누리지만 자만을 버리지도 흘러드는 것을 끊지도 못했다는 뜻이 됩니다.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놓았느냐로 값을 매기는 셈법이 여기서 뚜렷합니다.

묵상

부러운 사람이 있나요? 그 사람이 가진 것이 부러운가요, 아니면 그 사람이 놓아 버린 것이 부러운가요?

그런 이는 땅처럼 거스르지 않고 성문 기둥처럼 굳건하며, 진흙 없는 맑은 못과 같으니 다시 떠돌 일이 없느니라.

Pathavisamo no virujjhati, Indakhilupamo tādi subbato; Rahadova apetakaddamo, Saṁsārā na bhavanti tādino.

법구경 Dhammapada 95

배경

빠타위사모(pathavisamo)는 '땅과 같은'입니다. 땅은 무엇을 쏟아부어도 거스르지 않습니다. 깨끗한 것을 부으면 받고 더러운 것을 부어도 받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무기력과 다릅니다. 다음 비유가 그것을 못박습니다. 인다킬라(indakhīla)는 성문 앞에 깊이 박아 둔 돌기둥으로, 밀어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받아들이되 흔들리지 않는다는 두 성질이 나란히 놓인 것입니다. 세 번째 비유인 진흙 없는 못은 6품의 호수와 이어집니다. 흐려질 진흙 자체가 바닥에 없으니 휘저어도 흐려지지 않습니다.

묵상

받아 주는 것과 휘둘리는 것은 다릅니다. 나는 받아 주고 있나요, 아니면 휘둘리고 있나요?

마음이 고요하고 말과 행동도 고요하나니, 바르게 알아 풀려난 이는 그렇게 가라앉아 고요하니라.

Santaṁ tassa manaṁ hoti, santā vācā ca kamma ca; Sammadaññāvimuttassa, upasantassa tādino.

법구경 Dhammapada 96

배경

산따(santa)라는 낱말이 세 번 되풀이됩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말이 고요하고, 행동이 고요합니다. 셋의 순서가 중요합니다. 마음이 먼저 나옵니다. 1품 첫 게송에서 마음이 앞선다고 한 것과 이어집니다. 말과 행동만 조용한 사람은 참고 있는 것이고, 마음이 고요한 사람에게서는 말과 행동이 저절로 고요해집니다. 우빠산따(upasanta)는 '가라앉아 고요한'입니다. 억눌러 조용한 것이 아니라 저절로 가라앉은 상태입니다. 이 품에서 되풀이되는 따디(tādin)는 '그런 이, 한결같은 이'로, 어떤 일을 겪어도 달라지지 않는 사람을 부르는 말입니다.

묵상

조용히 있는 것과 고요한 것은 다릅니다. 지금 나의 조용함은 참는 쪽인가요, 가라앉은 쪽인가요?

남의 말에 기대지 않고 지어지지 않은 것을 아는 이, 이어진 것을 끊고 다시 날 자리를 부수며 바라는 마음을 게워 낸 이, 그가 참으로 가장 높은 사람이니라.

Assaddho akataññū ca, sandhicchedo ca yo naro; Hatāvakāso vantāso, sa ve uttamaporiso.

법구경 Dhammapada 97

배경

법구경에서 가장 짓궂은 게송입니다. 낱말을 그대로 읽으면 욕이 됩니다. 믿음이 없고, 은혜를 모르고, 인연을 끊고, 기회를 잃고, 바랄 것이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를 가장 높은 사람이라 합니다. 낱말마다 두 뜻이 겹쳐 있기 때문입니다. 아까딴뉴(akataññū)는 '은혜를 모르는'이면서 동시에 '지어지지 않은 것을 아는' 이라는 뜻이 됩니다. 지어지지 않은 것이란 열반을 가리킵니다. 앗삿도(assaddha)도 '믿음 없는'이면서 '남에게 들어서 믿을 필요가 없는', 곧 스스로 확인한 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 비틀림 자체가 이 게송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를 평이하게 풀어 옮겨 역설이 사라졌습니다.

묵상

겉보기와 속뜻이 정반대인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요? 남들이 붙인 이름과 그 사람의 실제가 어긋났던 경우 말입니다.

마을이든 숲이든, 낮은 땅이든 높은 땅이든, 온전히 놓아버린 이가 머무는 곳, 그곳이 곧 아름다운 땅이니라.

Gāme vā yadi vāraññe, Ninne vā yadi vā thale; Yattha arahanto viharanti, Taṁ bhūmirāmaṇeyyakaṁ.

법구경 Dhammapada 98 아라한의 품 (Arahantavagga)

배경

장소를 네 가지로 나열한 뒤 모두 상관없다고 합니다. 마을과 숲은 사람이 많은 곳과 없는 곳이고, 낮은 땅과 높은 땅은 지형입니다. 어디든 상관없다는 말이 이 게송의 앞머리입니다. 그리고 뒤에서 장소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입니다. 라마네이야까(rāmaṇeyyaka)는 '기쁨을 주는, 마음이 놓이는'이라는 뜻입니다. 이 게송이 앞의 여러 게송과 이어지는 대목이 있습니다. 90게송에서 열기가 없다 했고 96게송에서 고요하다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자리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묵상

누군가 있으면 그 자리가 편안해지는 사람을 알고 있나요? 그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아니면 무엇을 하지 않고 있었나요?

사람들이 즐거워하지 않는 숲도 아름다우니라. 물듦을 벗은 이들은 그곳에서 즐거워하나니, 감각의 즐거움을 찾지 않는 까닭이니라.

Ramaṇīyāni araññāni, yattha na ramatī jano; Vītarāgā ramissanti, na te kāmagavesino.

법구경 Dhammapada 99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이자 앞 게송의 짝입니다. 앞에서 사람이 곳을 아름답게 한다고 했으니, 여기서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곳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두 게송을 합치면 아름다움이 장소에 있지 않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위따라가(vītarāga)는 '물듦을 벗은'이라는 뜻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들이 숲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즐거워한다고 한 점입니다. 라밋산띠(ramissanti)는 즐거워한다는 말입니다. 참는 것이 아닙니다. 더 얻으려 애쓸 것이 없어지면 심심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길 수 있게 된다는, 뒤집힌 셈법입니다.

묵상

아무 자극도 없는 곳에서 편안했던 적이 있나요? 심심함과 고요함을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요?

10 천 마디 말 15구절

천 마디보다 한 마디, 백 년보다 하루 - 양과 질을 맞세운 열여섯 편

천 마디 말을 늘어놓아도 뜻이 없다면, 듣고 마음이 가라앉는 뜻 있는 한 마디만 못하니라.

Sahassamapi ce vācā, anatthapadasaṁhitā; Ekaṁ atthapadaṁ seyyo, yaṁ sutvā upasammati.

법구경 Dhammapada 100

배경

이 품은 천이라는 숫자로 시작해 백 년으로 끝납니다. 많음과 적음을 계속 맞세우는 것이 방식입니다. 여기서 기준으로 놓인 것은 우빠삼마띠(upasammati), 곧 '듣고 나서 가라앉는다'입니다. 좋은 말인지 아닌지를 화려함이나 옳음이 아니라 들은 사람의 상태로 판정합니다. 듣고 마음이 가라앉았다면 뜻 있는 말이고, 아무리 많이 들어도 가라앉지 않으면 뜻이 없는 말입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사형 집행인으로 오래 일하다 만년에 가르침을 들은 사람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평생 들은 말보다 한마디가 그를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묵상

듣고 나서 마음이 가라앉았던 말이 있나요? 그 말은 길었나요, 짧았나요?

천 구절의 시를 읊어도 뜻이 없다면, 듣고 마음이 가라앉는 뜻 있는 한 구절만 못하니라.

Sahassamapi ce gāthā, anatthapadasaṁhitā; Ekaṁ gāthāpadaṁ seyyo, yaṁ sutvā upasammati.

법구경 Dhammapada 101

배경

앞 게송에서 말이 시로 바뀌었을 뿐 틀은 같습니다. 이렇게 같은 문장을 낱말만 바꿔 세 번 되풀이하는 것이 이 품의 앞머리입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바히야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부처님을 만나 가르침을 청했는데, 부처님은 탁발 중이라 때가 아니라며 두 번 물리치셨습니다. 세 번째 청에 하신 말씀은 아주 짧았습니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는 것만 있게 하라는 정도의 몇 마디였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깨달았고 곧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게송이 왜 길이를 문제 삼지 않는지가 그 이야기에 들어 있습니다.

묵상

많이 읽고 많이 들었는데 남은 것이 없다고 느낀 적 있나요? 그 가운데 딱 한 구절만 남긴다면 무엇을 고르시겠어요?

뜻 없는 시를 백 구절 읊는 것보다, 듣고 마음이 가라앉는 진리의 한 구절이 나으니라.

Yo ca gāthā sataṁ bhāse, anatthapadasaṁhitā; Ekaṁ dhammapadaṁ seyyo, yaṁ sutvā upasammati.

법구경 Dhammapada 102

배경

여기 나오는 담마빠다(dhammapada)가 이 책의 이름입니다. 빠다(pada)는 '발자국, 구절, 길'을 함께 뜻하는 말이라, 담마빠다는 '진리의 구절'이자 '진리로 가는 발자국'으로 읽힙니다. 책 이름이 본문 안에 이렇게 들어 있는 셈입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꾼달라께시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여러 학파를 돌며 논쟁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사리뿟따 존자와의 만남에서 한 구절에 무너졌다고 합니다. 많이 아는 사람이 한 구절에 바뀌었다는 점이 앞의 두 게송과 이어집니다.

묵상

지식으로 무장한 채 살다가 한마디에 흔들려 본 적이 있나요? 그 흔들림이 나쁜 일이었나요, 아니면 시작이었나요?

싸움터에서 천 명을 천 번 이긴다 해도, 자기 하나를 이기는 이가 참으로 싸움에서 으뜸이니라.

Yo sahassaṁ sahassena, saṅgāme mānuse jine; Ekañca jeyyamattānaṁ, sa ve saṅgāmajuttamo.

법구경 Dhammapada 103

배경

이 품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게송입니다. 셈이 극단적입니다. 천 명을 천 번 이기면 백만 번의 승리인데, 그것보다 자기 하나가 낫다고 합니다. 여기서 자기를 이긴다는 말이 자기를 미워하거나 억누르는 뜻으로 읽히기 쉬워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다음 게송에 나오는 앗따단따(attadanta)는 '자기를 길들인'이라는 뜻으로, 6품에서 본 말 길들이기와 같은 낱말입니다. 꺾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갈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밖의 싸움은 이겨도 다음 싸움이 오지만 이 싸움은 다릅니다. 다음 게송이 그 다름을 말합니다.

묵상

이기고 싶은 상대가 있나요? 그 사람을 이긴 뒤에도 남을 것이 무엇인지 미리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자기를 이기는 것이 다른 모든 사람을 이기는 것보다 나으니, 늘 스스로를 다스리고 삼가며 사는 사람, 그런 이가 얻은 승리는 신도 하늘의 악사도, 사람을 붙드는 힘도 창조의 신마저도 되돌리지 못하느니라.

Attā have jitaṁ seyyo, yā cāyaṁ itarā pajā; Attadantassa posassa, niccaṁ saññatacārino. Neva devo na gandhabbo, na māro saha brahmunā; Jitaṁ apajitaṁ kayirā, tathārūpassa jantuno.

법구경 Dhammapada 104-105

배경

두 게송이 한 문장으로 이어져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앞 게송의 셈을 이어받아 그 승리가 왜 다른지 말합니다. 밖에서 얻은 승리는 되돌려질 수 있습니다. 이긴 상대가 다시 일어서고, 얻은 것을 빼앗기며, 명예는 뒤집힙니다. 그런데 자기를 이긴 것은 누구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아빠지땅 까이라(apajitaṁ kayirā)는 '이긴 것을 지지 않은 것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럴 수 있는 존재를 넷이나 늘어놓고 모두 못한다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가장 힘세다고 여긴 것들을 다 부른 셈입니다.

묵상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을 하나 가지고 있나요? 지금 애쓰고 있는 것 가운데 되돌려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갈라 보면 어떨까요?

다달이 천금을 들여 백 년 동안 제사를 지낸다 해도, 스스로를 닦은 이를 잠깐이라도 공경하는 것, 그 공경이 백 년의 제사보다 나으니라.

Māse māse sahassena, yo yajetha sataṁ samaṁ; Ekañca bhāvitattānaṁ, muhuttamapi pūjaye; Sāyeva pūjanā seyyo, yañce vassasataṁ hutaṁ.

법구경 Dhammapada 106

배경

바위땃따(bhāvitatta)는 '자기를 길러 낸 이'입니다. 제사와 견주어 놓은 것이 사람입니다. 이 대비가 당시로서는 파격이었습니다. 제사는 정해진 절차를 지키면 되지만 사람을 알아보는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스스로를 닦은 이인지 알아보려면 보는 쪽에도 눈이 있어야 합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가르침을 생각함'으로 바꾸었고 다음 게송에서는 교단에 대한 공양으로 옮겼습니다. 공경의 대상이 사람에서 가르침과 조직으로 옮겨 간 셈입니다. 빠알리가 가리킨 것은 눈앞의 한 사람입니다.

묵상

주위에 스스로를 잘 닦아 온 사람이 있나요? 그 사람을 알아보고 있나요, 아니면 지나치고 있나요?

백 년 동안 숲에서 불을 섬긴다 해도, 스스로를 닦은 이를 잠깐이라도 공경하는 것, 그 공경이 백 년의 제사보다 나으니라.

Yo ca vassasataṁ jantu, aggiṁ paricare vane; Ekañca bhāvitattānaṁ, muhuttamapi pūjaye; Sāyeva pūjanā seyyo, yañce vassasataṁ hutaṁ.

법구경 Dhammapada 107

배경

앞 게송의 짝으로, 이번에는 불을 섬기는 일과 견줍니다. 당시 인도에서 불을 모시는 일은 가장 오래되고 존중받던 종교 행위였습니다. 백 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생을 통째로 바치는 일입니다. 그것을 잠깐의 공경과 견주었습니다. 이 게송이 제사 자체를 헐뜯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무엇에 마음을 쓰느냐를 묻습니다. 오래 하는 일과 바르게 향한 일 가운데 어느 쪽이 값진가를 묻는 이 품의 물음이 여기서도 되풀이됩니다.

묵상

오래 해 왔다는 이유로 계속하고 있는 일이 있나요? 그 일이 지금도 처음의 뜻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면 어떨까요?

이 세상에서 바치는 제물이 무엇이든, 복을 바라며 한 해 내내 제사를 지내도, 그 모두가 네 몫 가운데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나니, 올곧은 이에게 절하는 것이 그보다 나으니라.

Yaṁ kiñci yiṭṭhaṁ va hutaṁ va loke, Saṁvaccharaṁ yajetha puññapekkho; Sabbampi taṁ na catubhāgameti, Abhivādanā ujjugatesu seyyo.

법구경 Dhammapada 108

배경

뿐냐뻭코(puññapekkha)는 '복을 바라보며'라는 뜻입니다. 이 낱말이 이 게송의 급소입니다. 무엇을 바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바라고 바치느냐를 짚은 것입니다. 복을 얻으려고 하는 행위는 거래에 가깝습니다. 웃주가따(ujjugata)는 '곧게 간 이', 곧 삶이 굽지 않은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 이에게 절하는 일에는 거래가 없습니다. 받을 것을 계산하지 않고 그저 알아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네 몫 가운데 하나라는 표현은 당시 흔히 쓰던 비교 방식으로, 견줄 것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묵상

무언가 좋은 일을 할 때 돌아올 것을 헤아리고 있지는 않나요?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아도 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늘 웃어른을 공경하며 절하기를 몸에 익힌 이에게는, 네 가지가 자라나니 목숨과 얼굴빛과 즐거움과 힘이니라.

Abhivādanasīlissa, niccaṁ vuḍḍhāpacāyino; Cattāro dhammā vaḍḍhanti, āyu vaṇṇo sukhaṁ balaṁ.

법구경 Dhammapada 109

배경

네 가지가 아주 구체적입니다. 목숨과 얼굴빛과 즐거움과 힘입니다. 깨달음이나 공덕 같은 말이 아니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 게송을 미신처럼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남을 낮춰 보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과 공경할 줄 아는 사람의 몸 상태가 다르다는 관찰로 읽으면 자연스럽습니다. 늘 겨루고 재는 사람은 몸이 긴장합니다. 아비와다나실리(abhivādanasīlin)는 '절하는 것이 몸에 밴 이'입니다. 한 번의 행동이 아니라 성질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묵상

누군가를 진심으로 높이 여겨 본 적이 언제인가요? 그럴 때와 늘 겨룰 때, 몸의 느낌이 다르지 않던가요?

됨됨이 없이 마음이 흩어진 채 백 년을 사는 것보다, 됨됨이를 갖추고 마음을 모으는 이의 하루가 나으니라.

Yo ca vassasataṁ jīve, dussīlo asamāhito; Ekāhaṁ jīvitaṁ seyyo, sīlavantassa jhāyino.

법구경 Dhammapada 110

배경

여기서부터 여섯 편이 같은 틀로 이어집니다. 백 년과 하루를 맞세우고, 무엇이 있고 없느냐로 갈라놓습니다. 자나(jhāna)는 마음이 한곳에 깊이 잠긴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흔히 선정으로 옮깁니다. 아사마히또(asamāhito)는 그 반대로 '모이지 않은, 흩어진'입니다. 이 연작이 무서운 것은 시간을 값으로 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래 살았다는 사실 자체는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만 남습니다. 그리고 이 셈이 뒤집어 보면 희망이기도 합니다. 늦게 시작해도 하루가 백 년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묵상

지금 시작하기에 늦었다고 여기는 것이 있나요? 하루가 백 년을 이길 수 있다면 그 하루를 언제로 잡으시겠어요?

지혜 없이 마음이 흩어진 채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지혜를 갖추고 마음을 모으는 이의 하루가 나으니라.

Yo ca vassasataṁ jīve, duppañño asamāhito; Ekāhaṁ jīvitaṁ seyyo, paññavantassa jhāyino.

법구경 Dhammapada 111

배경

앞 게송에서 됨됨이가 지혜로 바뀌었습니다. 이 연작이 낱말을 하나씩 갈아 끼우며 나아가는 방식은 1품의 짝 구조와 닮았습니다. 여기서 빤냐(paññā)는 지식과 다릅니다.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아 아는 힘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게송에서 지혜는 늘 마음 모음과 짝을 이룹니다. 흩어진 마음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는 힘과 모으는 힘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 이 연작 전체에 깔린 생각입니다.

묵상

많이 아는 것과 제대로 보는 것 가운데, 요즘 나에게 부족한 쪽은 어느 쪽일까요?

게으르고 정진이 약한 채 백 년을 사는 것보다, 굳세게 정진하는 이의 하루가 나으니라.

Yo ca vassasataṁ jīve, kusīto hīnavīriyo; Ekāhaṁ jīvitaṁ seyyo, vīriyamārabhato daḷhaṁ.

법구경 Dhammapada 112

배경

위리야(vīriya)는 '힘, 애씀'을 뜻하는데 본래 영웅을 가리키는 말과 뿌리가 같습니다. 애쓰는 일을 용기의 일로 본 셈입니다. 아랍바또(ārabhato)는 '시작한'이라는 뜻이라, 굳세게 시작한 이라고도 읽힙니다. 하루가 백 년을 이긴다는 이 연작의 셈에서 이 게송이 특히 실용적인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시작하는 데는 하루면 됩니다. 오래 미뤄 온 사람에게도 오늘 하루는 있습니다. 게으름을 나무라는 말로만 읽으면 무겁지만, 오늘 하루로 충분하다는 말로 읽으면 가벼워집니다.

묵상

오래 미뤄 온 일이 있나요? 오늘 그것의 가장 작은 첫 걸음 하나만 한다면 무엇일까요?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지 못한 채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는 이의 하루가 나으니라.

Yo ca vassasataṁ jīve, apassaṁ udayabbayaṁ; Ekāhaṁ jīvitaṁ seyyo, passato udayabbayaṁ.

법구경 Dhammapada 113

배경

우다얍바야(udayabbaya)는 '일어남과 사라짐'입니다. 모든 것이 생겨났다가 없어지는 그 움직임을 가리킵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빠따짜라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남편과 두 아이와 부모를 한꺼번에 잃고 정신을 놓았다가, 부처님을 만나 이 가르침을 듣고 회복했다고 합니다. 그 배경을 알고 읽으면 이 게송이 냉정한 관찰이 아니라 무너진 사람에게 건넨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느냐는 물음에 답하는 대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원래 그렇다는 자리를 보여 준 것입니다.

묵상

잃어버린 것을 떠올릴 때 마음이 어떤가요? 그것이 왔던 것이기에 갔다는 사실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나요, 아니면 아직 아닌가요?

죽음 없는 자리를 보지 못한 채 백 년을 사는 것보다, 그 자리를 보는 이의 하루가 나으니라.

Yo ca vassasataṁ jīve, apassaṁ amataṁ padaṁ; Ekāhaṁ jīvitaṁ seyyo, passato amataṁ padaṁ.

법구경 Dhammapada 114

배경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끼사고따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아이를 잃고 미쳐 아이를 안은 채 약을 구하러 다니던 여인에게, 부처님은 사람이 죽은 적 없는 집에서 겨자씨를 얻어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집은 없었습니다. 집집마다 죽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얻은 것은 약이 아니라 자기 슬픔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앎이었습니다. 아마따빠다(amataṁ padaṁ)는 '죽음 없는 자리'로 열반을 가리킵니다. 죽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더 이상 그 자리를 흔들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묵상

내 슬픔이 나만의 것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나요?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지 헤아려 본 적 있나요?

가장 높은 가르침을 보지 못한 채 백 년을 사는 것보다, 그 가르침을 보는 이의 하루가 나으니라.

Yo ca vassasataṁ jīve, apassaṁ dhammamuttamaṁ; Ekāhaṁ jīvitaṁ seyyo, passato dhammamuttamaṁ.

법구경 Dhammapada 115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입니다. 여섯 편으로 이어진 연작이 여기서 끝납니다. 됨됨이, 지혜, 힘씀, 일어나고 사라짐을 봄, 죽음 없는 자리를 봄, 그리고 가장 높은 가르침을 봄으로 이어졌습니다. 뒤로 갈수록 보는 일 쪽으로 옮겨 갑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자식이 많았던 한 나이 든 여성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식들에게 재산을 다 나눠 주고 버림받은 뒤 늦게 출가했다고 합니다. 늦게 시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연작의 배경에 거듭 나오는 것이 우연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백 년보다 하루라는 셈은 늦은 사람을 위한 셈입니다.

묵상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나요? 앞으로 남은 하루하루가 지나온 백 년보다 나을 수 있다면, 오늘부터 무엇을 다르게 하시겠어요?

11 나쁜 일 13구절

물방울이 독을 채우듯 쌓이는 것 - 작은 일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좋은 일에는 서두르고 나쁜 일에서 마음을 막을지니라. 좋은 일을 더디게 하면 마음은 나쁜 일을 즐기게 되느니라.

Abhittharetha kalyāṇe, pāpā cittaṁ nivāraye; Dandhañhi karoto puññaṁ, pāpasmiṁ ramatī mano.

법구경 Dhammapada 116

배경

아빗타레타(abhittharetha)는 '서둘러라'는 명령입니다. 대개 서두르지 말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여기서는 반대입니다. 서두름과 더딤을 맞세운 것이 이 게송의 뼈대입니다. 뒷줄의 셈이 날카롭습니다. 좋은 일을 미루면 그냥 안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마음이 나쁜 쪽을 즐기게 된다고 합니다. 자리가 비면 다른 것이 들어차기 때문입니다. 단다(dandha)는 '느린, 굼뜬'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선을 보고도 따르지 않는다'는 비난으로 바꾸고 팔리에 없는 말을 결말에 붙였습니다. 빠알리는 나무라는 대신 순서를 알려 줍니다.

묵상

좋은 일이라 여기면서 미뤄 둔 것이 있나요? 미루는 동안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와 있었는지 살펴보면 어떨까요?

나쁜 일을 저질렀거든 거듭하지 말지니라.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니, 나쁜 일이 쌓이면 괴로우니라.

Pāpañce puriso kayirā, Na naṁ kayirā punappunaṁ; Na tamhi chandaṁ kayirātha, Dukkho pāpassa uccayo.

법구경 Dhammapada 117

배경

이 게송이 시작하는 자리가 중요합니다. 저질렀다고 가정하고 시작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한 뒤를 다룹니다. 그러니 이 게송은 자책하는 사람이 아니라 되풀이하는 사람을 겨눕니다. 짠다(chanda)는 '마음이 기울어짐, 하고 싶음'입니다. 여기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것은 그 일을 곱씹지 말라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곱씹으면 다시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웃짜야(uccaya)는 '쌓임'입니다. 한 번의 잘못이 아니라 쌓이는 것을 문제로 놓았습니다. 다음 게송이 그 짝으로 좋은 일 쪽을 말합니다.

묵상

한 번 실수한 뒤 그것을 곱씹다가 오히려 되풀이한 적이 있나요? 곱씹는 일과 고치는 일은 어떻게 다를까요?

좋은 일을 하였거든 거듭할지니라. 거기에 마음을 둘지니, 좋은 일이 쌓이면 즐거우니라.

Puññañce puriso kayirā, kayirā naṁ punappunaṁ; Tamhi chandaṁ kayirātha, sukho puññassa uccayo.

법구경 Dhammapada 118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좋은 일 쪽에서는 마음을 두라고 한 점입니다. 나쁜 일은 곱씹지 말고 좋은 일은 곱씹으라는 셈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대개 반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권고가 실용적입니다. 우리는 잘못한 일을 밤새 떠올리고 잘한 일은 금세 잊습니다. 짠다를 좋은 쪽에 두라는 것은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에 가깝습니다. 마음이 기울어질 곳을 정해 주면 그쪽으로 자주 가게 되고, 자주 가면 다시 하게 됩니다.

묵상

오늘 잘한 일 하나를 떠올려 마음에 오래 두어 보면 어떨까요? 잘못한 일에 쓴 시간만큼만 써 보아도 됩니다.

나쁜 일이 익기 전까지는 나쁜 이도 좋은 것을 보나니, 나쁜 일이 익으면 그때 나쁜 것을 보느니라.

Pāpopi passati bhadraṁ, Yāva pāpaṁ na paccati; Yadā ca paccati pāpaṁ, Atha pāpo pāpāni passati.

법구경 Dhammapada 119

배경

이 게송이 답하는 것은 오래된 물음입니다. 왜 나쁜 사람이 잘 사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답은 아직 익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빳짜띠(paccati)는 열매가 익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5품에서도 나왔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게송이 위로가 아니라 관찰이라는 점입니다. 나쁜 사람도 언젠가 벌받는다는 약속이 아니라, 지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큰 부자였다가 가난해진 사람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다음 게송이 짝으로 좋은 쪽을 말하는데, 그쪽 셈도 똑같습니다.

묵상

정직하게 사는데 손해만 본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지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 위로가 되나요, 아니면 답답한가요?

좋은 일이 익기 전까지는 좋은 이도 나쁜 것을 보나니, 좋은 일이 익으면 그때 좋은 것을 보느니라.

Bhadropi passati pāpaṁ, Yāva bhadraṁ na paccati; Yadā ca paccati bhadraṁ, Atha bhadro bhadrāni passati.

법구경 Dhammapada 120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두 게송을 함께 읽어야 이 셈이 공평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쁜 사람이 잘 사는 기간이 있듯 좋은 사람이 힘든 기간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익는 데 걸리는 시간이 있고, 그 시간 동안은 눈에 보이는 것과 실제가 어긋납니다. 이 어긋남을 견디지 못할 때 사람은 방향을 바꿉니다. 정직하게 살아도 손해만 보니 그만두자는 결론에 이릅니다. 두 게송이 나란히 놓인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것을 근거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묵상

좋은 쪽을 택했는데 결과가 나쁘게 나온 적이 있나요? 그때 방향을 바꾸었나요, 아니면 견뎠나요?

나쁜 일을 가벼이 여겨 ‘나에게는 오지 않으리라’ 하지 말지니라. 물방울이 하나씩 떨어져 물독을 채우듯, 어리석은 이는 나쁜 일을 조금씩 쌓아 채우느니라.

Māvamaññetha pāpassa, na mantaṁ āgamissati; Udabindunipātena, udakumbhopi pūrati; Bālo pūrati pāpassa, thokaṁ thokampi ācinaṁ.

법구경 Dhammapada 121

배경

마와만녜타(māvamaññetha)는 '얕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게송이 겨눈 것은 큰 잘못이 아니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물독은 한 번에 차지 않습니다. 한 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그 한 방울은 티도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채워지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토깡 토깡(thokaṁ thokaṁ)은 '조금씩 조금씩'입니다. 아찌나(ācina)는 '쌓아 모으는'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하는 일임을 가리킵니다. 물방울이 저절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한 방울씩 붓고 있다는 그림입니다.

묵상

'이 정도는 괜찮다'고 여기며 하는 일이 있나요? 그것을 한 해 동안 몇 번이나 했는지 세어 본다면 어떨까요?

좋은 일을 가벼이 여겨 ‘나에게는 오지 않으리라’ 하지 말지니라. 물방울이 하나씩 떨어져 물독을 채우듯, 지혜로운 이는 좋은 일을 조금씩 쌓아 채우느니라.

Māvamaññetha puññassa, na mandaṁ āgamissati; Udabindunipātena, udakumbhopi pūrati; Dhīro pūrati puññassa, thokaṁ thokampi ācinaṁ.

법구경 Dhammapada 122

배경

앞 게송의 짝으로, 같은 물독 비유가 좋은 쪽에 쓰입니다. 이 짝이 주는 위로가 있습니다. 큰일을 해야 한다고 여기면 시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물독은 한 방울로도 차오릅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아주 작아도 그것이 채워진다는 말입니다. 티가 나지 않는다는 점은 나쁜 쪽과 같습니다. 좋은 일도 한 번 해서는 아무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만두기 쉽습니다. 이 짝을 나란히 읽으면 결론이 하나로 모입니다. 티가 나지 않는 동안에도 차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묵상

너무 작아서 의미 없어 보이는 좋은 일이 있나요? 그것을 백 번 하면 어떤 물독이 찰지 그려 보면 어떨까요?

재물을 많이 지닌 상인이 일행 없이 위험한 길을 피하듯, 살고자 하는 이가 독을 피하듯, 나쁜 일들을 피할지니라.

Vāṇijova bhayaṁ maggaṁ, appasattho mahaddhano; Visaṁ jīvitukāmova, pāpāni parivajjaye.

법구경 Dhammapada 123

배경

비유 둘이 겹칩니다. 하나는 상인입니다. 압빠삿토(appasattho)는 '함께 가는 이가 적은'이라는 뜻으로, 호위 없이 값진 짐을 지고 가는 상황입니다. 잃을 것이 많고 지킬 힘은 적을 때 사람은 위험한 길을 피합니다. 다른 하나는 독입니다. 살고 싶은 사람은 독을 마실까 말까 고민하지 않습니다. 두 비유의 공통점은 망설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쁜 일을 피하라는 권고를 도덕이 아니라 이해관계로 말한 셈입니다. 값진 것을 지닌 사람이 위험을 피하듯 하라는 것이니, 자기에게 값진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만 이 비유를 쓸 수 있습니다.

묵상

나에게 잃으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것을 또렷이 알고 있다면 피해야 할 길도 또렷해질까요?

손에 상처가 없으면 손으로 독을 쥐어도 되나니, 상처 없는 곳에는 독이 스미지 않느니라. 나쁜 일을 짓지 않는 이에게는 나쁜 일이 따르지 않느니라.

Pāṇimhi ce vaṇo nāssa, hareyya pāṇinā visaṁ; Nābbaṇaṁ visamanveti, natthi pāpaṁ akubbato.

법구경 Dhammapada 124

배경

이 게송은 조건문입니다. 상처가 없으면 독을 쥐어도 된다는 것이 앞머리입니다. 위험한 것 곁에 있어도 안전한 경우를 말하는 셈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조건을 지우고 '악은 반드시 해친다'는 경고로 뒤집었습니다. 그러면 뜻이 정반대가 됩니다. 빠알리는 안전한 쪽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독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상처가 없으면 스미지 않습니다. 여기서 상처는 마음에 난 틈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힙니다. 같은 상황에 놓여도 어떤 사람은 물들고 어떤 사람은 물들지 않는 까닭입니다.

묵상

같은 자리에 있었는데 누구는 휩쓸리고 누구는 그러지 않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그 차이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을 해치고 맑고 흠 없는 이를 해치면, 그 나쁜 일은 어리석은 그에게 돌아오나니, 바람을 거슬러 뿌린 고운 먼지가 도로 날아오듯 하느니라.

Yo appaduṭṭhassa narassa dussati, Suddhassa posassa anaṅgaṇassa; Tameva bālaṁ pacceti pāpaṁ, Sukhumo rajo paṭivātaṁva khitto.

법구경 Dhammapada 125

배경

비유가 정확합니다. 바람을 마주하고 먼지를 뿌리면 그 먼지는 뿌린 사람에게 돌아옵니다. 상대에게 닿지도 않습니다. 수쿠모 라조(sukhumo rajo)는 '아주 고운 먼지'입니다. 굵은 것이라면 떨어지겠지만 고운 것이라 얼굴에 그대로 붙습니다. 4품에서 됨됨이의 향기가 바람을 거슬러 간다고 했던 대목과 짝을 이룹니다. 좋은 것은 바람을 거슬러 퍼지고 나쁜 것은 바람을 거슬러 되돌아옵니다. 압빠둣타(appaduṭṭha)는 '해를 끼치지 않은'이라는 뜻으로, 아무 잘못이 없는 상대를 가리킵니다.

묵상

화가 나서 누군가에게 던진 말이 나에게 돌아온 적이 있나요? 그 말은 상대에게 닿기는 했을까요?

어떤 이는 다시 태어나고 나쁜 일을 지은 이는 괴로운 곳에 나며, 바르게 산 이는 좋은 곳에 나고 번뇌가 다한 이는 불이 꺼지느니라.

Gabbhameke uppajjanti, nirayaṁ pāpakammino; Saggaṁ sugatino yanti, parinibbanti anāsavā.

법구경 Dhammapada 126

배경

네 갈래를 한 줄에 늘어놓았습니다. 다시 사람으로 나는 이, 괴로운 곳에 나는 이, 좋은 곳에 나는 이, 그리고 불이 꺼지는 이입니다. 앞의 셋은 다시 어딘가에 나는 일이고 마지막 하나만 다릅니다. 빠리닙반띠(parinibbanti)는 '완전히 꺼진다'는 뜻입니다. 좋은 곳에 나는 것조차 끝이 아니라는 점이 이 배열의 핵심입니다. 좋은 데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셈법과 그것마저 넘어서는 셈법을 나란히 보여 준 셈입니다. 6품에서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둘 다 넘어선 자리를 말한 것과 이어집니다.

묵상

좋은 결과를 바라며 애쓰고 있나요? 그 결과마저 지나가는 것이라면, 무엇이 남을지 생각해 본 적 있나요?

하늘에도 바다 한가운데도, 산틈에 들어간다 해도, 지은 나쁜 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느니라.

Na antalikkhe na samuddamajjhe, Na pabbatānaṁ vivaraṁ pavissa; Na vijjatī so jagatippadeso, Yatthaṭṭhito mucceyya pāpakammā.

법구경 Dhammapada 127

배경

숨을 곳 세 군데를 든 뒤 모두 없다고 합니다. 하늘과 바다와 산속은 사람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들입니다. 이 게송이 말하는 것은 감시하는 존재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도망칠 곳이 없는 까닭은 지은 일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1품에서 자기가 한 일을 자기가 보는 데서 괴로움이 온다고 했던 것과 이어집니다. 어디로 가든 자기를 데리고 가니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음 게송이 같은 틀로 죽음을 말하는데, 두 게송을 함께 읽으면 도망칠 수 없는 것이 둘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묵상

장소를 바꾸면 달라질 것이라 여긴 적이 있나요? 옮겨 간 자리에서도 그대로였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하늘에도 바다 한가운데도, 산틈에 들어간다 해도, 죽음이 덮치지 못하는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느니라.

Na antalikkhe na samuddamajjhe, Na pabbatānaṁ vivaraṁ pavissa; Na vijjatī so jagatippadeso, Yatthaṭṭhitaṁ nappasaheyya maccu.

법구경 Dhammapada 128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이자 앞 게송의 짝입니다. 마지막 낱말만 바뀌었습니다. 나쁜 일이 죽음으로 바뀌었을 뿐 나머지는 똑같습니다. 두 게송을 나란히 놓은 뜻은 분명합니다. 도망칠 수 없는 것이 둘 있는데, 하나는 자기가 지은 일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이 배치에는 다른 결이 있습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이미 아는 사실입니다. 그것과 같은 자리에 지은 일을 놓음으로써, 지은 일도 그만큼 확실하다고 말한 셈입니다. 이 품이 여기서 끝나는 것은 무겁지만 정직합니다.

묵상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시간에 무엇을 쌓아 두고 싶은가요?

12 폭력 14구절

누구나 매를 두려워한다 - 나를 자로 삼아 남을 재는 법

모두가 매를 두려워하고 모두가 죽음을 두려워하나니, 자기를 자로 삼아 죽이지도 말고 죽이게 하지도 말지니라.

Sabbe tasanti daṇḍassa, sabbe bhāyanti maccuno; Attānaṁ upamaṁ katvā, na haneyya na ghātaye.

법구경 Dhammapada 129

배경

앗따낭 우빠망 까뜨와(attānaṁ upamaṁ katvā)는 '자기를 견줌으로 삼아'라는 뜻입니다. 남을 재는 자를 밖에서 가져오지 않고 자기에게서 꺼냅니다. 나는 매를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니 남도 그러하리라는 것입니다. 이 방식이 실용적인 까닭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아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규칙을 외울 필요도, 상대를 조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자기가 무엇을 싫어하는지만 알면 됩니다. 뒷줄에 죽이는 것과 죽이게 하는 것을 나란히 든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시키는 것도 같은 일로 셈합니다.

묵상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을 오늘 누군가에게 하지는 않았나요? 그 판단에 필요한 것은 나 자신뿐입니다.

모두가 매를 두려워하고 모두에게 목숨은 사랑스러우니, 자기를 자로 삼아 죽이지도 말고 죽이게 하지도 말지니라.

Sabbe tasanti daṇḍassa, sabbesaṁ jīvitaṁ piyaṁ; Attānaṁ upamaṁ katvā, na haneyya na ghātaye.

법구경 Dhammapada 130

배경

앞 게송의 짝인데 한 낱말이 바뀌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한다'가 '목숨이 사랑스럽다'로 옮겨 갔습니다.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앞 게송이 피하고 싶은 것을 근거로 삼았다면 여기서는 아끼는 것을 근거로 삼습니다. 지위야(jīvitaṁ piyaṁ)는 '목숨이 사랑스럽다'는 뜻입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에게 해당합니다. 두 게송을 나란히 놓으면 같은 결론에 이르는 두 갈래 길이 보입니다. 무서운 것을 떠올려도 되고 아끼는 것을 떠올려도 됩니다.

묵상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을 떠올려 보세요. 다른 이에게도 그만큼 아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나요?

즐거움을 바라는 존재들을 매로 해치면서 제 즐거움을 구하는 이는, 죽은 뒤에 즐거움을 얻지 못하느니라.

Sukhakāmāni bhūtāni, yo daṇḍena vihiṁsati; Attano sukhamesāno, pecca so na labhate sukhaṁ.

법구경 Dhammapada 131

배경

이 게송의 짜임이 정교합니다. 해침을 당하는 쪽도 즐거움을 바라고, 해치는 쪽도 즐거움을 구합니다. 같은 것을 바라면서 한쪽이 다른 쪽을 밟는 구도입니다. 수카까마니(sukhakāmāni)는 '즐거움을 바라는'이라는 뜻으로, 존재들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벌레든 사람이든 즐거움을 바란다는 점에서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의 즐거움을 밟고 얻는 즐거움은 셈이 맞지 않습니다. 앞의 두 게송이 방법을 알려 주었다면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를 말합니다.

묵상

내 편의를 위해 누군가가 불편해지는 구조 안에 있지는 않나요? 그 사람도 나와 같은 것을 바라고 있다면 어떨까요?

즐거움을 바라는 존재들을 매로 해치지 않으면서 제 즐거움을 구하는 이는, 죽은 뒤에 즐거움을 얻느니라.

Sukhakāmāni bhūtāni, yo daṇḍena na hiṁsati; Attano sukhamesāno, pecca so labhate sukhaṁ.

법구경 Dhammapada 132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 게송이 제 즐거움을 구하는 일 자체를 나무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앗따노 수카메사노(attano sukhamesāno), 곧 '제 즐거움을 구하면서'가 두 게송에 똑같이 들어 있습니다. 문제는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길에 남을 두느냐입니다. 자기 행복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남을 밟지 않고도 구할 수 있다는 말로 읽힙니다. 두 게송을 나란히 놓으면 선택지가 둘로 좁혀집니다. 남을 밟고 구하거나 밟지 않고 구하거나입니다.

묵상

내가 잘되는 길이 누군가를 밟지 않는 길이기도 할까요? 둘 다 되는 길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누구에게도 거친 말을 하지 말지니, 들은 이가 되받아 말하리라. 다투는 말은 괴로우니 되돌아온 매가 너에게 닿으리라.

Māvoca pharusaṁ kañci, vuttā paṭivadeyyu taṁ; Dukkhā hi sārambhakathā, paṭidaṇḍā phuseyyu taṁ.

법구경 Dhammapada 133

배경

이 품의 이름인 단다(daṇḍa)는 몽둥이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말이 그 자리에 놓입니다. 빠띠단다(paṭidaṇḍa)는 '되돌아오는 매'입니다. 말이 몽둥이처럼 오간다는 그림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폭력을 몸의 일로만 여기는데 이 게송은 말을 그 안에 넣습니다. 사람바까타(sārambhakathā)는 '다투는 말, 되받아치는 말'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근거가 도덕이 아니라 예측이라는 점입니다. 하지 말라는 이유가 나쁜 일이라서가 아니라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묵상

거친 말을 던진 뒤에 무엇이 돌아왔나요? 그 대화가 어떻게 끝났는지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깨진 징처럼 스스로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그대는 이미 열반에 이른 것이니 그대에게 다툼이 없느니라.

Sace neresi attānaṁ, kaṁso upahato yathā; Esa pattosi nibbānaṁ, sārambho te na vijjati.

법구경 Dhammapada 134

배경

비유가 뜻밖입니다. 깨진 징은 두들겨도 울리지 않습니다. 온전한 징은 치는 대로 소리를 내지만 금이 간 징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개 깨진 것은 못 쓰는 것인데 여기서는 그것을 좋은 자리에 놓았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그에 맞춰 울리지 않는 상태를 그린 것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같은 악기로 정반대를 말합니다. 종과 경쇠를 두드리듯 좋은 소리를 내라고 합니다. 소리를 내지 말라는 말이 소리를 잘 내라는 말로 뒤집힌 셈입니다. 빠알리가 말하는 것은 반응하지 않는 자유입니다.

묵상

누가 건드리면 곧바로 소리가 나나요? 울리지 않고 지나가 본 적이 있다면, 그때 무엇이 달랐나요?

목동이 막대기로 소를 몰아 풀밭으로 가듯, 늙음과 죽음이 살아 있는 것들의 목숨을 몰아가느니라.

Yathā daṇḍena gopālo, gāvo pājeti gocaraṁ; Evaṁ jarā ca maccu ca, āyuṁ pājenti pāṇinaṁ.

법구경 Dhammapada 135

배경

이 품의 몽둥이가 여기서 다른 손에 들립니다. 사람이 남을 때리는 몽둥이가 아니라 늙음과 죽음이 우리를 모는 몽둥이입니다. 빠제띠(pājeti)는 '몰아간다'는 뜻입니다. 소는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뒤에서 미는 힘에 따라 갈 뿐입니다. 그 그림이 서늘합니다. 앞 게송들에서 우리가 남을 몰아붙이는 이야기를 했는데, 정작 우리 자신도 몰리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남을 때릴 겨를이 있느냐는 물음으로도 읽힙니다. 이 품에서 이 게송이 놓인 자리가 그런 뜻을 만듭니다.

묵상

시간에 쫓기고 있다는 느낌이 드나요? 그 뒤에서 미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쯤 돌아본 적이 있나요?

어리석은 이는 나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나니, 제가 지은 일로 말미암아 불에 데인 듯 괴로워하느니라.

Atha pāpāni kammāni, karaṁ bālo na bujjhati; Sehi kammehi dummedho, aggidaḍḍhova tappati.

법구경 Dhammapada 136

배경

나 붓자띠(na bujjhati)는 '깨닫지 못한다,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나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나쁜 일인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5품에서 어리석음을 자기를 못 보는 상태라고 했던 것이 여기서도 이어집니다. 뒷줄이 이 게송의 무게를 만듭니다. 모르면서 했지만 결과는 옵니다. 몰랐다는 것이 면제가 되지 않습니다. 앗기닷도와(aggidaḍḍhova)는 '불에 덴 것처럼'입니다. 불에 손을 대면 몰랐어도 뎁니다. 그리고 그때에야 알게 됩니다.

묵상

몰라서 누군가를 힘들게 한 적이 있나요?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나요?

매를 들 까닭 없는 이들, 해를 끼치지 않은 이들을 해치는 사람은 열 가지 가운데 하나에 곧 이르게 되느니라. 모진 아픔이나 잃음, 몸이 부서짐, 무거운 병이나 마음이 어지러워짐, 권력에서 오는 재앙이나 끔찍한 헐뜯음, 가까운 이를 잃음, 재물이 무너짐, 또는 집이 불길에 타는 일이니, 몸이 무너진 뒤에는 어리석은 그가 괴로운 곳에 나느니라.

Yo daṇḍena adaṇḍesu, appaduṭṭhesu dussati; Dasannamaññataraṁ ṭhānaṁ, khippameva nigacchati. Vedanaṁ pharusaṁ jāniṁ, sarīrassa va bhedanaṁ; Garukaṁ vāpi ābādhaṁ, cittakkhepaṁ va pāpuṇe. Rājato vā upasaggaṁ, Abbhakkhānaṁ va dāruṇaṁ; Parikkhayaṁ va ñātīnaṁ, Bhogānaṁ va pabhaṅguraṁ. Atha vāssa agārāni, aggi ḍahati pāvako; Kāyassa bhedā duppañño, nirayaṁ sopapajjati.

법구경 Dhammapada 137-140

배경

네 게송이 하나의 목록으로 이어져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앞에서 열 가지가 있다고 하고 뒤에서 그것을 하나씩 셉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목갈라나 존자가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일을 전합니다. 눈여겨볼 것은 목록의 성격입니다. 벌을 내리는 존재가 나오지 않고 그저 일어나는 일들이 나열됩니다. 아픔, 잃음, 병, 마음이 어지러워짐, 재앙, 헐뜯음, 이별, 재산 잃음, 불. 모두 살면서 실제로 겪는 일들입니다. 아단데수(adaṇḍesu)는 '매를 들 까닭이 없는 이들'로, 아무 잘못 없는 상대를 가리킵니다.

묵상

아무 잘못 없는 사람에게 화를 낸 적이 있나요? 그 화가 원래 향해야 했던 곳은 어디였을까요?

벌거벗고 지내는 것도, 머리를 엉클어뜨리는 것도, 진흙을 바르는 것도, 굶는 것도, 맨바닥에 눕는 것도, 먼지와 때를 뒤집어쓰는 것도, 쭈그려 앉아 애쓰는 것도, 의심을 건너지 못한 사람을 깨끗하게 하지는 못하느니라.

Na naggacariyā na jaṭā na paṅkā, Nānāsakā thaṇḍilasāyikā vā; Rajojallaṁ ukkuṭikappadhānaṁ, Sodhenti maccaṁ avitiṇṇakaṅkhaṁ.

법구경 Dhammapada 141

배경

일곱 가지 고행이 줄줄이 나옵니다. 당시 인도에서 실제로 행해지던 것들입니다. 부처님 자신이 깨닫기 전 여섯 해 동안 그 길을 걸었고 얻은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게송은 밖에서 하는 비판이 아니라 겪어 본 사람의 말입니다. 아위띤나깡캉(avitiṇṇakaṅkha)은 '의심을 건너지 못한'이라는 뜻입니다. 몸을 아무리 괴롭혀도 마음의 의심은 그대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고행을 조롱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것들이 어렵지 않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어려움이 깨끗함을 만들지는 않는다고 말할 뿐입니다.

묵상

힘든 일을 해내면 나아질 것이라 여긴 적이 있나요? 힘듦과 나아짐이 늘 붙어 다니지는 않는다는 것을 겪어 본 적 있나요?

치장을 했더라도 고르게 살아가는 이라면, 고요하고 스스로를 다스리며 한결같이 맑게 사는 이라면, 모든 존재에게 매를 내려놓은 이라면, 그가 바라문이요 애쓰는 이요 수행자이니라.

Alaṅkato cepi samaṁ careyya, Santo danto niyato brahmacārī; Sabbesu bhūtesu nidhāya daṇḍaṁ, So brāhmaṇo so samaṇo sa bhikkhu.

법구경 Dhammapada 142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앞에서 헐벗은 고행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지 못한다고 했으니, 여기서는 반대로 치장한 사람도 그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알랑까또(alaṅkata)는 '꾸민, 장식한'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화려한 차림의 대신이 왕 앞에서 가르침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겉모습으로 판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두 게송의 주제입니다. 마지막 줄에서 바라문과 애쓰는 이와 수행자를 나란히 부른 것도 그렇습니다. 태생이나 차림이 아니라 매를 내려놓았느냐로 가릅니다.

묵상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한 적이 있나요? 반대로 나 자신을 겉모습으로 증명하려 한 적은 없었나요?

부끄러움으로 스스로를 다스리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느냐. 좋은 말이 채찍을 보고 스스로 깨어나듯 하는 이가.

Hirīnisedho puriso, koci lokasmi vijjati; Yo niddaṁ apabodheti, asso bhadro kasāmiva.

법구경 Dhammapada 143

배경

히리(hirī)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남이 볼까 두려운 것과 다릅니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스스로 낯이 뜨거운 마음입니다. 게송은 그런 사람이 얼마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드물다는 말입니다. 좋은 말은 채찍이 몸에 닿기 전에 그림자만 보고도 달립니다. 맞아야 움직이는 말과 다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크게 당하고 나서야 바뀌는 사람이 있고, 낌새만으로 스스로 고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게송이 그리는 것은 뒤엣사람입니다. 다음 게송이 그 채찍의 비유를 이어받습니다.

묵상

크게 아파야만 바뀌었던 적이 있나요? 그전에 있었던 작은 신호들을 지금 돌아보면 무엇이 보이나요?

채찍을 본 좋은 말처럼 부지런하고 다급한 이가 될지니라. 믿음과 됨됨이와 정진으로, 마음을 모음과 가르침을 가려냄으로, 앎과 행함을 갖추고 깨어 있어 이 작지 않은 괴로움을 벗어나게 되리라.

Asso yathā bhadro kasāniviṭṭho, Ātāpino saṁvegino bhavātha; Saddhāya sīlena ca vīriyena ca, Samādhinā dhammavinicchayena ca; Sampannavijjācaraṇā patissatā, Jahissatha dukkhamidaṁ anappakaṁ.

법구경 Dhammapada 144

배경

앞 게송의 채찍 비유를 이어받아 여섯 가지를 나열합니다. 믿음, 됨됨이, 힘씀, 마음 모음, 가려냄, 그리고 앎과 행함입니다. 상웨기노(saṁvegino)는 '다급함을 느끼는'이라는 뜻으로, 이 낱말이 중요합니다. 상웨가(saṁvega)는 무언가를 보고 가슴이 철렁하는 것, 그래서 더는 미룰 수 없다고 느끼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두려움과는 다릅니다. 두려움은 얼어붙게 하지만 이것은 움직이게 합니다. 마지막 줄의 아납빠깡(anappakaṁ)은 '적지 않은'입니다. 괴로움의 크기를 축소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한 뒤에 벗어난다고 말합니다.

묵상

미루던 일을 갑자기 시작하게 만든 순간이 있었나요? 그때 가슴이 철렁했던 그 느낌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려 보세요.

물길 내는 이는 물을 이끌고 화살 만드는 이는 화살대를 곧게 하며, 목수는 나무를 다듬나니, 스스로를 닦는 이는 자기를 다스리느니라.

Udakañhi nayanti nettikā, Usukārā namayanti tejanaṁ; Dāruṁ namayanti tacchakā, Attānaṁ damayanti subbatā.

법구경 Dhammapada 145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입니다. 6품 80게송과 거의 같은데 마지막 낱말만 다릅니다. 거기서는 '지혜로운 이들'이었고 여기서는 숩바따(subbatā), 곧 '잘 다잡고 사는 이들'입니다. 같은 비유를 두 품에서 되풀이하며 주어를 바꾼 셈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마지막을 '몸을 다룬다'로 옮겼는데, 그러면 다스릴 대상이 자기에서 몸으로 좁아집니다. 폭력을 다룬 이 품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뜻깊습니다. 남을 때리지 않는 데서 시작해 자기를 다루는 데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손댈 곳은 결국 자기라는 것입니다.

묵상

다루기 어려운 것을 다루어 본 경험이 있나요? 물이나 나무처럼 자기 자신도 부러뜨리지 않고 방향만 바꿀 수 있을까요?

13 늙음 10구절

낡아 가는 몸을 마주 보는 열한 편 - 그리고 낡지 않는 것 하나

무엇이 웃음이며 무슨 기쁨이냐, 늘 불타고 있는데. 어둠에 덮인 그대들은 어찌 등불을 찾지 않느냐.

Ko nu hāso kimānando, niccaṁ pajjalite sati; Andhakārena onaddhā, padīpaṁ na gavesatha.

법구경 Dhammapada 146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즐거운 놀이에 빠져 있던 여인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 자리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점이 이 게송의 결을 정합니다. 웃지 말라는 꾸짖음이 아니라, 웃고 있는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보여 준 것입니다. 빳잘리떼(pajjalite)는 '불타고 있는'입니다. 무엇이 타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는데, 다른 경에서 부처님은 눈과 귀와 마음이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줄이 중요합니다. 불을 끄라고 하지 않고 등불을 찾으라고 합니다. 어둠에 덮여 있다는 것이 먼저 문제라는 뜻입니다.

묵상

웃고 있는데도 마음 한구석이 개운하지 않을 때가 있나요? 그 개운치 않음이 무엇을 알려 주려는 신호일까요?

곱게 꾸며진 이 모습을 보라, 상처투성이로 얽어 세운 몸을. 병들고 온갖 생각으로 가득하나 오래가는 것은 하나도 없느니라.

Passa cittakataṁ bimbaṁ, arukāyaṁ samussitaṁ; Āturaṁ bahusaṅkappaṁ, yassa natthi dhuvaṁ ṭhiti.

법구경 Dhammapada 147

배경

이 품에는 몸을 낱낱이 뜯어보는 게송이 이어집니다. 몸을 미워하라는 말로 읽히기 쉬워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수행자들이 하던 관찰법으로, 몸을 향한 지나친 집착을 덜어내려고 일부러 반대편을 보는 훈련입니다. 늘 이렇게만 보라는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쏠린 눈을 되돌리려는 방편입니다. 짓따까땅 빔방(cittakataṁ bimbaṁ)은 '꾸며진 형상'으로, 꾸미기 전과 후를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마지막 줄이 이 게송의 무게입니다. 오래가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몸이 더럽다는 말과 다릅니다. 머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묵상

거울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루에 얼마나 되나요? 그 시간에 보고 있는 것은 지금의 나인가요, 아니면 지켜 내고 싶은 어떤 모습인가요?

이 몸은 다 낡았고 병의 둥지이며 부서지기 쉬우니, 썩어 가는 이 덩어리는 허물어지고 목숨은 죽음으로 끝나느니라.

Parijiṇṇamidaṁ rūpaṁ, roganīḷaṁ pabhaṅguraṁ; Bhijjati pūtisandeho, maraṇantañhi jīvitaṁ.

법구경 Dhammapada 148 늙음의 품 (Jarāvagga)

배경

로가닐라(roganīḷa)에서 닐라(nīḷa)는 새의 둥지를 뜻합니다. 병이 깃들어 사는 자리라는 그림입니다. 병이 밖에서 침입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여기 산다는 뜻이 됩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나이 든 여성 수행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남의 몸을 가리켜 한 말이 아니라 자기 몸을 보는 훈련입니다. 마지막 줄은 담담합니다. 목숨은 죽음으로 끝난다고만 합니다. 슬퍼하라거나 두려워하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저 그렇다고 말합니다.

묵상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나요? 그때 그 사실을 밀어냈나요, 아니면 인정했나요?

가을에 버려진 조롱박처럼 여기저기 뒹구는 잿빛 뼈들을 보고서 무슨 즐거움이 있겠느냐.

Yānimāni apatthāni, alābūneva sārade; Kāpotakāni aṭṭhīni, tāni disvāna kā rati.

법구경 Dhammapada 149

배경

알라부(alābu)는 조롱박입니다. 가을에 속을 파내고 버려진 조롱박이 밭에 뒹구는 모습을 본 사람이면 이 비유가 바로 와닿습니다. 까뽀따까(kāpotaka)는 '비둘기 빛깔의'로, 오래된 뼈의 잿빛을 가리킵니다. 이 게송이 놓인 자리를 보면 뜻이 분명해집니다. 앞 게송에서 몸이 낡는다고 했고 여기서는 그 끝을 보여 줍니다. 무슨 즐거움이 있겠느냐는 물음은 인생이 허무하다는 탄식이 아닙니다. 무엇을 붙들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붙들고 있는 것이 저렇게 되는 것이라면 붙드는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물음입니다.

묵상

지금 가장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요? 그것이 언젠가 형태를 잃는다면, 지금 지키는 방식이 달라질까요?

뼈로 성을 쌓고 살과 피를 발라 놓았나니, 그 안에 늙음과 죽음이, 교만과 속임이 들어 있느니라.

Aṭṭhīnaṁ nagaraṁ kataṁ, maṁsalohitalepanaṁ; Yattha jarā ca maccu ca, māno makkho ca ohito.

법구경 Dhammapada 150

배경

나가라(nagara)는 성곽 도시입니다. 뼈로 뼈대를 세우고 살과 피로 벽을 발랐다는 그림입니다. 여기까지는 앞 게송들과 같은 결인데, 뒷줄이 다릅니다. 그 성 안에 든 것을 넷 꼽는데 늙음과 죽음만이 아니라 교만과 속임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몸의 이야기에서 마음의 이야기로 건너간 것입니다. 마나(māna)는 스스로를 재는 마음이고 막카(makkha)는 남의 좋은 점을 지우는 마음입니다. 이 둘을 늙음과 죽음 옆에 놓은 것이 흥미롭습니다. 몸이 낡아 가는 동안 그 안에서 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보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묵상

나이가 들면서 늘어난 것이 무엇인가요? 지혜가 늘었나요, 아니면 재고 지우는 마음이 늘었나요?

곱게 꾸민 왕의 수레도 낡아 가고 이 몸도 늙음에 이르나, 참된 이들의 가르침은 늙지 않나니 고요한 이들이 서로에게 그렇게 전하느니라.

Jīranti ve rājarathā sucittā, Atho sarīrampi jaraṁ upeti; Satañca dhammo na jaraṁ upeti, Santo have sabbhi pavedayanti.

법구경 Dhammapada 151

배경

이 품에서 방향이 바뀌는 자리입니다. 앞의 다섯 게송이 낡아 가는 것들을 보여 주었다면 여기서 처음으로 낡지 않는 것이 나옵니다. 왕의 수레는 그 시대에 가장 잘 만든 물건이었습니다. 그것도 낡습니다. 몸도 낡습니다. 그런데 참된 이들의 가르침은 늙지 않는다고 합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왕비 말리까의 죽음을 전합니다. 눈여겨볼 것은 마지막 줄입니다. 그 늙지 않는 것을 고요한 이들이 서로에게 전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낡아 가지만 전해지는 것은 낡지 않는다는 그림입니다.

묵상

누군가에게서 받아 지금도 나에게 남아 있는 말이 있나요? 그 사람은 떠났어도 그 말은 낡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배움이 적은 사람은 부림 소처럼 늙어 가나니, 살은 자라도 지혜는 자라지 않느니라.

Appassutāyaṁ puriso, balībaddhova jīrati; Maṁsāni tassa vaḍḍhanti, paññā tassa na vaḍḍhati.

법구경 Dhammapada 152

배경

발리밧다(balībaddha)는 짐을 지는 소입니다. 소는 해마다 몸집이 커지지만 아는 것은 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저절로 지혜로워지는 일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압빳수따(appassuta)는 '적게 들은'이라는 뜻으로, 배움이 적음을 가리킵니다. 다만 1품 마지막에서 많이 외우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했으니, 여기서 말하는 배움도 지식의 양만은 아닙니다. 앞 게송에서 늙지 않는 것이 가르침이라 했으니,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몸만 늙어 가는 상태를 짚은 셈입니다.

묵상

올해 나에게서 자란 것은 무엇인가요? 몸무게나 나이 말고, 보는 눈이 넓어진 대목이 있었나요?

수많은 생을 떠돌며 집 짓는 이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였나니, 거듭 태어남은 괴로웠느니라. 집 짓는 이여, 이제 너를 보았노라. 너는 다시 집을 짓지 못하리라. 서까래는 모두 부서졌고 마룻대는 무너졌나니, 지어냄을 벗어난 이 마음은 갈애가 다한 곳에 이르렀느니라.

Anekajātisaṁsāraṁ, sandhāvissaṁ anibbisaṁ; Gahakāraṁ gavesanto, dukkhā jāti punappunaṁ. Gahakāraka diṭṭhosi, puna gehaṁ na kāhasi; Sabbā te phāsukā bhaggā, gahakūṭaṁ visaṅkhataṁ; Visaṅkhāragataṁ cittaṁ, taṇhānaṁ khayamajjhagā.

법구경 Dhammapada 153-154

배경

전승에 따르면 부처님이 깨달으신 바로 그 순간에 읊으신 게송입니다. 법구경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두 게송이 한 이야기라 함께 읽어야 합니다. 가하까라까(gahakāraka)는 '집 짓는 이'로, 이 몸이라는 집을 거듭 짓게 하는 힘, 곧 목마름을 가리킵니다. 오래 찾던 범인을 마침내 마주 본 순간의 말입니다. 서까래가 부서지고 마룻대가 무너졌다는 것은 다시 지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한역 법구경에는 집도 서까래도 마룻대도 없습니다. 비유가 통째로 사라지고 일반적인 수행 서술만 남았습니다.

묵상

내 삶을 거듭 같은 모양으로 짓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을 마주 본 적이 있나요?

젊어서 맑은 삶을 살지도 않고 재물도 얻지 못한 이들은, 물고기 없는 못가에 선 늙은 왜가리처럼 시들어 가느니라.

Acaritvā brahmacariyaṁ, aladdhā yobbane dhanaṁ; Jiṇṇakoñcāva jhāyanti, khīṇamaccheva pallale.

법구경 Dhammapada 155

배경

이 게송이 나이 든 사람을 탓하는 말로 읽히기 쉬워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원문이 겨눈 것은 결과가 아니라 그 앞의 시간입니다. 젊은 시절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말하려고 노년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품 앞에서 이미 말했듯 늙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가르침은 늦게 만나도 늙지 않습니다. 8품에서 백 년보다 하루가 낫다고 한 대목과 함께 읽으면 이 게송이 문을 닫는 말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왜가리 비유는 서글프지만, 못이 마르기 전에 무엇을 할지를 묻는 그림입니다.

묵상

지나온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나요? 아직 마르지 않은 못이 남아 있다면, 오늘 그 못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젊어서 맑은 삶을 살지도 않고 재물도 얻지 못한 이들은, 다 쏘아 버린 화살처럼 누워 지난 일을 탄식하느니라.

Acaritvā brahmacariyaṁ, aladdhā yobbane dhanaṁ; Senti cāpātikhīṇāva, purāṇāni anutthunaṁ.

법구경 Dhammapada 156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이자 앞 게송의 짝입니다. 앞머리가 똑같고 비유만 바뀝니다. 짜빠띠키나(cāpātikhīṇā)는 '활에서 다 쏘아진'이라는 뜻입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눗투낭(anutthunaṁ)은 '탄식하며'입니다. 지난 일을 되뇌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품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뜻깊습니다. 늙음을 다룬 열한 편이 결국 시간에 관한 이야기였음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몸이 낡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무엇을 하며 낡느냐는 남습니다. 그리고 탄식은 지난 일을 바꾸지 못합니다.

묵상

지난 일을 되뇌는 데 하루 몇 분을 쓰고 있나요? 그 시간을 오늘 할 수 있는 일 하나에 쓴다면 무엇을 하시겠어요?

14 나 자신 10구절

기댈 곳은 결국 자기 자신 - 다스리기 가장 어려운 것에 관하여

자기를 아낄 줄 안다면 자기를 잘 지킬지니라. 지혜로운 이는 밤의 세 때 가운데 한 때만이라도 깨어 있어야 하느니라.

Attānañce piyaṁ jaññā, rakkheyya naṁ surakkhitaṁ; Tiṇṇaṁ aññataraṁ yāmaṁ, paṭijaggeyya paṇḍito.

법구경 Dhammapada 157

배경

이 품은 자기를 아낀다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아끼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낀다면 그에 걸맞게 대하라고 합니다. 야마(yāma)는 밤을 셋으로 나눈 시간 단위입니다. 저녁, 한밤, 새벽입니다. 셋 다 깨어 있으라고 하지 않고 하나만이라도 하라고 한 점이 눈에 띕니다. 요구를 낮춰 잡은 것입니다. 빠띳작게이야(paṭijaggeyya)는 '깨어 지킨다, 돌본다'는 뜻으로, 병자를 간호할 때도 쓰는 말입니다. 자기를 지키는 일을 돌보는 일로 그린 셈입니다.

묵상

자신을 아낀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가장 함부로 대하고 있지는 않나요? 오늘 나를 돌보는 일 하나를 한다면 무엇일까요?

먼저 자기를 마땅한 자리에 세우고, 그런 뒤에 남을 가르칠지니라. 지혜로운 이는 그리하여 더럽혀지지 않느니라.

Attānameva paṭhamaṁ, patirūpe nivesaye; Athaññamanusāseyya, na kilisseyya paṇḍito.

법구경 Dhammapada 158

배경

빠타망(paṭhamaṁ)은 '먼저'입니다. 순서를 못박은 게송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남을 가르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순서만 정해 줍니다. 뒷줄의 나 낄릿세이야(na kilisseyya)는 '더럽혀지지 않는다'는 뜻인데, 무엇에 더럽혀진다는 것일까요. 자기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남에게 말하는 자리에 서면 그 자리 자체가 사람을 물들입니다. 말과 삶이 어긋난 채 오래 말하다 보면 어긋남에 무뎌집니다. 그 무뎌짐을 더럽혀짐이라 부른 것으로 읽힙니다.

묵상

남에게 해 준 조언 가운데 나 스스로는 지키지 않는 것이 있나요? 그것을 먼저 해 보면 조언이 달라질까요?

남을 가르치는 그대로 자기에게도 행할지니라. 스스로 잘 다스려진 이라야 남을 다스릴 수 있나니, 자기야말로 다스리기 가장 어려우니라.

Attānañce tathā kayirā, yathāññamanusāsati; Sudanto vata dametha, attā hi kira duddamo.

법구경 Dhammapada 159

배경

앞 게송을 한 걸음 더 밀고 갑니다. 순서만이 아니라 같은 기준을 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두 개의 자를 씁니다. 남에게는 엄한 자를, 자기에게는 느슨한 자를 댑니다. 둡다모(duddama)는 '길들이기 어려운'이라는 뜻으로, 6품과 10품에서 나온 말 길들이기와 같은 뿌리입니다. 마지막 줄에 끼라(kira)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렇다고들 한다'는 뜻의 가벼운 말입니다. 단정하지 않고 슬쩍 흘리듯 말한 이 어조가 오히려 실감납니다. 해 본 사람은 다 안다는 투입니다.

묵상

남에게 대는 자와 나에게 대는 자가 같은가요? 어느 쪽이 더 엄한지 솔직하게 재 보면 어떨까요?

자기야말로 자기의 의지처이니 다른 누가 의지처가 되겠느냐. 잘 다스려진 자기로써만 얻기 어려운 그 의지처를 얻느니라.

Attā hi attano nātho, ko hi nātho paro siyā; Attanā hi sudantena, nāthaṁ labhati dullabhaṁ.

법구경 Dhammapada 160

배경

이 책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나토(nātho)는 '지켜 주는 이, 기댈 곳'입니다. 밖에서 기댈 곳을 찾지 말라는 말인데, 여기서 오해하기 쉬운 대목이 있습니다. 혼자 다 해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뒷줄이 조건을 답니다. 잘 다스려진 자기라야 의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스려지지 않은 자기는 오히려 가장 위험한 것이라고 3품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명제를 지우고 남을 이롭게 함과 소원 성취로 바꾸었습니다. 밖에서 찾지 말라는 말이 밖으로 향하는 말이 된 셈입니다.

묵상

누군가 나를 구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나요? 그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무엇을 놓치게 될까요?

자기가 지은 나쁜 일은 자기에게서 나고 자기에게서 생겨나, 금강석이 무른 돌을 부수듯 어리석은 이를 짓이기느니라.

Attanā hi kataṁ pāpaṁ, Attajaṁ attasambhavaṁ; Abhimatthati dummedhaṁ, Vajiraṁvasmamayaṁ maṇiṁ.

법구경 Dhammapada 161

배경

앗따장 앗따삼바왕(attajaṁ attasambhavaṁ)은 '자기에게서 나고 자기에게서 생긴'이라는 뜻입니다. 같은 말을 두 번 겹쳐 출처를 못박습니다. 비유가 매섭습니다. 금강석은 가장 단단한 돌이라 다른 보석을 갈고 부수는 데 씁니다. 그런데 그 금강석도 원래 땅에서 나온 것입니다. 나쁜 일이 나를 부수는 도구가 되는데 그 도구를 내가 만들었다는 그림입니다. 이 품에서 자기를 다루는 이야기가 계속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기댈 곳도 나이고 나를 부수는 것도 나입니다.

묵상

지금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 가운데 내가 만든 몫이 있나요? 그 몫만이라도 내가 손댈 수 있지 않을까요?

덩굴이 살라 나무를 뒤덮듯 무너진 행실이 사람을 뒤덮으면, 원수가 그에게 바라는 바로 그 일을 스스로 자기에게 하느니라.

Yassa accantadussilyaṁ, māluvā sālamivotthataṁ; Karoti so tathattānaṁ, yathā naṁ icchatī diso.

법구경 Dhammapada 162

배경

말루와(māluvā) 덩굴은 큰 나무를 타고 올라가 결국 그 나무를 죽입니다. 처음에는 가느다란 줄기 하나입니다. 나무는 그것을 막을 수 있었을 때 막지 않았고,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뒤덮여 있습니다. 이 게송의 매듭은 마지막 줄입니다. 원수가 바라는 바로 그것을 스스로 자기에게 한다는 것입니다. 남이 해칠 필요가 없다는 뒤틀린 그림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덩굴 비유만 남기고 이 대목을 평범한 서술로 눌러 버렸습니다. 이 게송의 힘이 사라진 셈입니다.

묵상

누군가 나를 무너뜨리려 한다면 무엇을 하게 만들까요? 지금 내가 그 일을 스스로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면 어떨까요?

좋지 않은 일, 자기에게 해로운 일은 하기 쉬우나, 이롭고 좋은 일은 하기가 가장 어려우니라.

Sukarāni asādhūni, attano ahitāni ca; Yaṁ ve hitañca sādhuñca, taṁ ve paramadukkaraṁ.

법구경 Dhammapada 163

배경

짧고 정직한 게송입니다. 수까라(sukara)는 '하기 쉬운'이고 둑까라(dukkara)는 '하기 어려운'입니다. 이 게송이 위로가 되는 까닭은 어렵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이 잘 안 되는 것이 내 의지가 약해서만은 아닙니다. 원래 어렵습니다. 빠라마둑까라(paramadukkara)는 '가장 어려운'으로, 강조를 더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시작하는 것과 모르고 시작하는 것은 다릅니다. 모르고 시작하면 몇 번 실패한 뒤 자기를 탓하며 그만둡니다.

묵상

좋은 습관을 들이려다 실패한 적이 있나요? 그것이 원래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면 몇 번 더 시도했을까요?

온전히 놓아버린 이들과 성인들, 올바르게 사는 이들의 가르침을 그릇된 생각에 기대어 헐뜯는 어리석은 이는, 제 죽음을 부르려 열매 맺는 대나무처럼 되느니라.

Yo sāsanaṁ arahataṁ, ariyānaṁ dhammajīvinaṁ; Paṭikkosati dummedho, diṭṭhiṁ nissāya pāpikaṁ; Phalāni kaṭṭhakasseva, attaghātāya phallati.

법구경 Dhammapada 164

배경

대나무는 평생 꽃을 피우지 않다가 딱 한 번 열매를 맺고 죽습니다. 열매를 맺는 일이 곧 제 끝입니다. 이 비유가 겨눈 것은 자멸의 구조입니다. 남이 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맺은 것 때문에 끝난다는 것입니다. 앞 게송의 덩굴과 이어지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딧팅 닛사야(diṭṭhiṁ nissāya)는 '견해에 기대어'라는 뜻입니다. 이 게송이 겨눈 것은 감정적인 반발이 아니라 그럴듯한 논리에 기대어 하는 헐뜯음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를 흔한 인과응보로 바꾸어 자멸의 구조가 사라졌습니다.

묵상

확신을 가지고 누군가를 깎아내린 적이 있나요? 그 확신이 어디에 기대고 있었는지 지금 보면 어떤가요?

자기가 지은 나쁜 일로 자기가 더러워지고, 자기가 짓지 않음으로써 자기가 깨끗해지느니라. 깨끗함과 더러움은 저마다의 것이니 누구도 남을 대신해 깨끗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Attanā hi kataṁ pāpaṁ, attanā saṅkilissati; Attanā akataṁ pāpaṁ, attanāva visujjhati; Suddhī asuddhi paccattaṁ, nāñño aññaṁ visodhaye.

법구경 Dhammapada 165

배경

빳짯땅(paccattaṁ)은 '각자에게 속한, 저마다의'라는 뜻입니다. 이 게송이 부정하는 것은 대신 씻어 주는 일입니다. 당시 인도에는 강물에 몸을 담그면 죄가 씻긴다는 믿음이 널리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다른 경에서 그렇다면 물고기가 가장 먼저 깨끗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게송이 무겁게 느껴진다면 그 무거움이 정확합니다. 아무도 대신해 주지 않는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같은 말이 뒤집으면 힘이 되기도 합니다. 아무도 나를 더럽힐 수 없다는 뜻도 되기 때문입니다.

묵상

누가 대신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일이 있나요? 그 일이 정말 대신 될 수 있는 종류인지 한번 가려 보면 어떨까요?

남의 이로움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 때문에 자기의 참된 이로움을 저버리지 말지니라. 자기에게 참으로 이로운 것을 알아 그 이로움에 힘쓸지니라.

Attadatthaṁ paratthena, bahunāpi na hāpaye; Attadatthamabhiññāya, sadatthapasuto siyā.

법구경 Dhammapada 166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이자 오해받기 가장 쉬운 게송입니다. 남을 돕지 말라는 말처럼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앗따닷타(attadattha)는 '자기의 참된 이로움'으로, 경전에서 이 말은 거의 언제나 깨달음을 가리킵니다. 이익을 챙기라는 말이 아니라 자기가 가야 할 길을 남을 돕는다는 이유로 미루지 말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남을 돌보느라 자기 것을 놓치는 일은 흔합니다. 그러다 지치면 결국 남도 돕지 못합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로 바꾸어 정반대에 가깝게 만들었습니다. 단호해서 오해받은 말이 부드럽게 다듬어진 셈입니다.

묵상

남을 챙기느라 미뤄 둔 나의 일이 있나요? 그것을 계속 미루면 결국 남도 챙기지 못하게 되지는 않을까요?

15 세상 12구절

물거품처럼 보는 눈 - 세상 한가운데서 세상에 빠지지 않는 법

낮은 행실을 따르지 말고 마음을 놓은 채 살지 말지니라. 그릇된 생각을 따르지 말고 세상을 늘리는 이가 되지 말지니라.

Hīnaṁ dhammaṁ na seveyya, pamādena na saṁvase; Micchādiṭṭhiṁ na seveyya, na siyā lokavaḍḍhano.

법구경 Dhammapada 167

배경

마지막 줄의 로까왓다노(lokavaḍḍhano)가 이 게송의 열쇠입니다. '세상을 늘리는 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늘린다는 말이 낯선데, 옛 주석은 이것을 나고 죽음을 되풀이하게 만드는 일로 풉니다. 붙들 것을 늘리면 매일 것이 늘고, 매일 것이 늘면 되풀이가 길어진다는 셈입니다. 앞의 세 줄이 하지 말 것을 늘어놓고 마지막 줄이 그것들을 한마디로 묶습니다. 낮은 행실도, 마음 놓음도, 그릇된 생각도 결국 세상을 늘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품의 이름이 세상인 까닭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묵상

요즘 늘어난 것이 무엇인가요? 물건이든 관계든 걱정이든, 늘어난 만큼 매인 것도 늘지 않았나요?

일어나라, 마음을 놓지 말지니라. 가르침을 바르게 행할지니라. 가르침대로 사는 이는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편안히 잠드느니라.

Uttiṭṭhe nappamajjeyya, dhammaṁ sucaritaṁ care; Dhammacārī sukhaṁ seti, asmiṁ loke paramhi ca.

법구경 Dhammapada 168

배경

웃띳테(uttiṭṭhe)는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부처님이 고향에 돌아가 탁발하시던 일을 전합니다. 왕이 된 아버지가 왕자 출신이 밥을 빌러 다닌다며 부끄러워하자, 부처님이 이것이 우리 집안의 길이라 하시며 이 게송을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어나라는 말은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던 일을 하라는 뜻이 됩니다. 결과로 놓인 것이 다시 잠자리입니다. 6품에서도 그랬듯 낮에 무엇을 했는지가 밤에 드러납니다.

묵상

남의 눈이 신경 쓰여 미루고 있는 일이 있나요? 그 일이 부끄러운 일인지 아니면 남이 보기에 그럴 뿐인지 가려 보면 어떨까요?

가르침을 바르게 행하고 그릇되게 행하지 말지니라. 가르침대로 사는 이는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편안히 잠드느니라.

Dhammaṁ care sucaritaṁ, na naṁ duccaritaṁ care; Dhammacārī sukhaṁ seti, asmiṁ loke paramhi ca.

법구경 Dhammapada 169

배경

앞 게송의 짝으로 뒷줄이 똑같습니다. 앞머리만 바뀌어 일어나라는 말이 바르게 행하라는 말로 옮겨 갔습니다. 담마짜리(dhammacārī)는 '이치에 맞게 사는 이'입니다. 이 낱말이 두 게송에 되풀이되면서 무게가 실립니다. 눈여겨볼 것은 결과로 내건 것이 소박하다는 점입니다. 편안한 잠입니다. 큰 상이나 신통이 아닙니다. 이 소박함이 오히려 실감납니다.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는 밤에 누웠을 때 몸이 먼저 압니다.

묵상

오늘 하루를 마치고 누웠을 때 마음이 편안할 만한 일을 하나 했나요? 아직이라면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물거품을 보듯, 아지랑이를 보듯 세상을 바라보라. 그렇게 보는 이를 죽음의 왕도 보지 못하느니라.

Yathā pubbuḷakaṁ passe, yathā passe marīcikaṁ; Evaṁ lokaṁ avekkhantaṁ, maccurājā na passati.

법구경 Dhammapada 170

배경

이 게송의 무게는 마지막 줄에 있습니다. 세상을 물거품처럼 보는 것이 허무하다는 결론으로 가지 않고, 죽음의 왕이 그를 보지 못한다는 결과로 갑니다. 죽음이 붙잡을 자리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결론을 지우고 어찌 이를 즐기랴는 반문으로 끝맺었습니다. 그러면 결과를 말하던 게송이 한탄이 됩니다. 뿝불라까(pubbuḷaka)는 물 위에 잠깐 뜨는 거품이고 마리찌까(marīcika)는 아지랑이입니다. 둘 다 없는 것이 아니라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없다고 보라는 것과 잡히지 않는 줄 알고 보라는 것은 다릅니다.

묵상

잡으려 애쓰다 놓친 것이 있나요? 애초에 잡히지 않는 것이었다면, 그 애씀은 어디로 향할 수 있었을까요?

오라, 이 세상을 보라. 곱게 꾸민 왕의 수레와 같으니, 어리석은 이들은 거기에 빠져 허우적대나 아는 이들에게는 걸림이 없느니라.

Etha passathimaṁ lokaṁ, cittaṁ rājarathūpamaṁ; Yattha bālā visīdanti, natthi saṅgo vijānataṁ.

법구경 Dhammapada 171

배경

11품에서 왕의 수레는 낡아 가는 것의 본보기였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을 홀리는 것의 본보기로 나옵니다. 같은 물건을 두 각도에서 쓴 셈입니다. 위시단띠(visīdanti)는 '가라앉는다, 빠진다'는 뜻으로, 진창에 발이 빠지는 그림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아는 이들도 그 수레를 본다는 점입니다. 보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라, 보라고 먼저 말합니다. 보되 빠지지 않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세상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걸리지 않는 쪽을 이 품은 말하고 있습니다.

묵상

화려한 것을 볼 때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나요? 보는 것과 빠지는 것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요?

예전에 마음을 놓았더라도 뒤에 마음을 놓지 않는 이는,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이 세상을 밝히느니라.

Yo ca pubbe pamajjitvā, pacchā so nappamajjati; Somaṁ lokaṁ pabhāseti, abbhā muttova candimā.

법구경 Dhammapada 172

배경

이 게송과 다음 게송은 이 품에서 가장 따뜻한 자리입니다. 지난날이 어땠든 지금부터가 중요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구름을 벗어난 달이라는 비유가 정확합니다. 달은 구름에 가려 있는 동안에도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밝기가 줄어든 것도 아닙니다. 다만 가려져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구름이 걷히면 곧바로 밝습니다. 새로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밝던 것이 드러납니다. 사람도 그렇다는 말로 읽힙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가려져 있던 것이 드러납니다.

묵상

지난날 때문에 이미 늦었다고 여기고 있지는 않나요? 구름이 걷히는 데 필요한 시간은 생각보다 짧을지도 모릅니다.

지은 나쁜 일을 선함으로 덮는 이는,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이 세상을 밝히느니라.

Yassa pāpaṁ kataṁ kammaṁ, kusalena pidhīyati; Somaṁ lokaṁ pabhāseti, abbhā muttova candimā.

법구경 Dhammapada 173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앙굴리말라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그 손가락을 꿰어 목에 걸고 다녔습니다. 부처님을 만나 뒤바뀌었고 뒤에 온전히 놓아버린 이가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배경에 두고 읽으면 이 게송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지은 일이 없어졌다고 하지 않습니다. 삐디야띠(pidhīyati)는 '덮는다'는 뜻입니다. 지운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죽인 사람들이 살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뒤에 무엇을 하느냐가 남아 있었을 뿐입니다.

묵상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한 적이 있나요? 그것을 지울 수는 없어도 그 위에 무엇을 놓을지는 아직 정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은 눈이 멀어 밝히 보는 이가 드무니라. 그물을 벗어난 새처럼 좋은 곳으로 가는 이는 적으니라.

Andhabhūto ayaṁ loko, tanukettha vipassati; Sakuṇo jālamuttova, appo saggāya gacchati.

법구경 Dhammapada 174

배경

안다부또(andhabhūta)는 '눈먼 상태가 된'이라는 뜻입니다. 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보면서도 못 보는 상태입니다. 위빳사띠(vipassati)는 '꿰뚫어 본다'는 뜻으로, 이 낱말에서 위빠사나라는 수행 이름이 나왔습니다. 그물에 걸린 새의 비유가 이 품의 다른 게송들과 이어집니다. 새는 그물을 보지 못해서 걸립니다. 걸리고 나서야 그물이 있었음을 압니다. 6품에서 이쪽 기슭만 오가는 사람들을 말했던 것과 같은 셈입니다. 드물다고 하지만 없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묵상

보면서도 못 보고 지나친 것이 있을까요?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것 하나를 다시 들여다본다면 무엇을 고르시겠어요?

기러기는 해의 길을 따라 날고 신통을 지닌 이는 하늘을 가나니, 지혜로운 이들은 사람을 붙드는 힘과 그 무리를 이기고 이 세상을 벗어나느니라.

Haṁsādiccapathe yanti, ākāse yanti iddhiyā; Nīyanti dhīrā lokamhā, jetvā māraṁ savāhiniṁ.

법구경 Dhammapada 175

배경

세 가지 나아감이 나란히 놓입니다. 기러기는 하늘길을 따라가고, 신통을 지닌 이는 허공을 날고, 지혜로운 이는 세상을 벗어납니다. 앞의 둘은 눈에 보이는 이동이고 셋째만 다릅니다. 사와히닝(savāhiniṁ)은 '군대와 함께'라는 뜻으로, 마라가 거느린 무리를 가리킵니다. 다른 경에서 그 무리의 이름이 나오는데 욕망, 싫증, 배고픔, 목마름, 나른함, 두려움, 의심 같은 것들입니다. 밖에서 쳐들어오는 군대가 아니라 안에서 올라오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이 싸움터도 안에 있습니다.

묵상

요즘 자주 올라오는 것이 무엇인가요? 나른함인가요, 의심인가요, 아니면 두려움인가요?

진실 하나를 저버리고 거짓을 말하며, 다음 생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 저지르지 못할 나쁜 일은 없느니라.

Ekaṁ dhammaṁ atītassa, musāvādissa jantuno; Vitiṇṇaparalokassa, natthi pāpaṁ akāriyaṁ.

법구경 Dhammapada 176

배경

에깡 담망(ekaṁ dhammaṁ)은 '한 가지'입니다. 그 한 가지가 무엇인지 뒤에서 밝히는데 거짓말입니다. 왜 거짓말 하나를 그렇게 크게 놓았을까요. 거짓말은 다른 모든 잘못을 덮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하고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면 걸릴 것이 없어집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부처님을 무고한 여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위띤나빠랄로깟사(vitiṇṇaparalokassa)는 '다음 생을 던져 버린'이라는 뜻입니다. 나중을 셈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금 못 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묵상

작은 거짓말 하나가 다른 것들을 덮어 준 적이 있나요? 그 덮개가 사라지면 무엇이 드러날까요?

인색한 이들은 하늘에 이르지 못하고 어리석은 이들은 베풂을 기리지 않으나, 지혜로운 이는 베풂을 기뻐하나니 그로 말미암아 저 세상에서 즐거우니라.

Na ve kadariyā devalokaṁ vajanti, Bālā have nappasaṁsanti dānaṁ; Dhīro ca dānaṁ anumodamāno, Teneva so hoti sukhī parattha.

법구경 Dhammapada 177

배경

아누모다마노(anumodamāno)는 '함께 기뻐하는'이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베푸는 것만이 아니라 남이 베푸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가진 것이 적어 베풀 것이 없는 사람도 이것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까다리야(kadariya)는 '인색한'인데, 재물이 없는 것과 다릅니다. 있어도 내놓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그 반대편에 놓인 것이 남의 베풂에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니, 이 게송이 겨눈 것은 물건의 양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입니다.

묵상

남이 잘하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한 적이 언제인가요? 그때 마음이 무거웠나요, 가벼웠나요?

온 땅을 홀로 다스리는 것보다, 하늘에 나는 것보다, 온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보다, 수다원의 자리가 더 나으니라.

Pathabyā ekarajjena, saggassa gamanena vā; Sabbalokādhipaccena, sotāpattiphalaṁ varaṁ.

법구경 Dhammapada 178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입니다. 소따빳띠(sotāpatti)는 '흐름에 들어감'으로, 깨달음의 첫 단계인 수다원을 가리킵니다. 흐름이란 열반으로 흘러가는 물줄기를 뜻합니다. 한번 그 흐름에 들면 되돌아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게송이 견주는 것들이 대단합니다. 온 땅의 왕이 되는 것, 하늘에 나는 것, 온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바랄 수 있는 최대치를 늘어놓고 그보다 낫다고 합니다. 눈여겨볼 것은 깨달음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첫 단계와 견주었다는 점입니다. 첫걸음이 그 모든 것보다 낫다는 말입니다.

묵상

이루고 싶은 가장 큰 것이 무엇인가요? 그것을 다 이룬 뒤에도 남을 물음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16 깨달은 이 14구절

자취를 남기지 않는 이 - 무엇에 기댈 것인가를 묻는 열여덟 편

한번 이긴 것이 되돌려지지 않고 이 세상 누구도 그 승리에 닿지 못하나니, 끝없는 자리에 노닐며 자취조차 남기지 않는 그 깨달은 이를, 그대는 어떤 길로 이끌려 하느냐.

Yassa jitaṁ nāvajīyati, Jitaṁ yassa noyāti koci loke; Taṁ buddhamanantagocaraṁ, Apadaṁ kena padena nessatha.

법구경 Dhammapada 179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마라의 딸들이 부처님을 유혹하려 했던 일을 전합니다. 그러니 이 게송은 유혹하려는 쪽을 향한 반문입니다. 아빠당(apadaṁ)은 '발자국이 없는'이라는 뜻이고 빠데나(padena)는 '발자국으로, 길로'입니다. 자취가 없는 이를 어떤 자취로 뒤쫓겠느냐는 말놀이입니다. 7품에서 하늘을 나는 새의 길을 말했던 것과 같은 그림입니다. 유혹이 통하려면 붙들 데가 있어야 하는데 붙들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반문을 남을 이끈다는 긍정 서술로 바꾸어, 이끌 수 없다는 말이 이끈다는 말이 되었습니다.

묵상

누군가 나를 흔들려 할 때 붙잡히는 손잡이가 무엇인가요? 그 손잡이를 하나 줄인다면 무엇을 놓아야 할까요?

그물처럼 얽고 들러붙는 목마름이 없어 어디로도 끌려가지 않는 이, 끝없는 자리에 노닐며 자취조차 남기지 않는 그 깨달은 이를, 그대는 어떤 길로 이끌려 하느냐.

Yassa jālinī visattikā, Taṇhā natthi kuhiñci netave; Taṁ buddhamanantagocaraṁ, Apadaṁ kena padena nessatha.

법구경 Dhammapada 180

배경

앞 게송의 짝으로 뒤 두 줄이 똑같습니다. 앞머리가 승리에서 목마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잘리니(jālinī)는 '그물을 가진'이고 위삿띠까(visattikā)는 '들러붙는'입니다. 목마름을 그물과 끈끈이로 그린 것입니다. 그물은 걸리게 하고 끈끈이는 놓지 못하게 합니다. 네따웨(netave)는 '이끌려 가게'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디론가 끌려가는 것은 누가 끌어서가 아니라 안에 잡아당기는 것이 있어서라는 셈입니다. 목마름이 없으면 끌 손잡이가 없습니다.

묵상

요즘 나를 자꾸 어딘가로 끌고 가는 것이 있나요? 그 힘은 밖에서 오나요, 안에서 오나요?

깊이 잠겨 보기에 힘쓰는 지혜로운 이들은 벗어남과 고요함을 기뻐하나니, 바르게 깨달아 늘 깨어 있는 그들을 신들조차 부러워하느니라.

Ye jhānapasutā dhīrā, nekkhammūpasame ratā; Devāpi tesaṁ pihayanti, sambuddhānaṁ satīmataṁ.

법구경 Dhammapada 181

배경

넥캄마(nekkhamma)는 '벗어남, 내려놓음'입니다. 흔히 출가로 옮기지만 본래는 감각의 즐거움에서 벗어난 상태를 가리킵니다. 눈여겨볼 것은 벗어남과 고요함을 즐긴다고 한 점입니다. 참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7품에서도 신들이 부러워한다는 표현이 나왔는데, 그 셈법이 여기서도 같습니다. 신들은 즐거움을 가졌지만 벗어남은 갖지 못했습니다. 가진 것으로 값을 매기면 신들이 위인데, 놓은 것으로 값을 매기면 순서가 뒤집힙니다.

묵상

무언가를 내려놓고 나서 오히려 편해진 적이 있나요? 그때 그 편안함은 참는 데서 온 것이었나요, 놓은 데서 온 것이었나요?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죽어야 할 몸으로 살아가기 힘겨우며, 참된 가르침을 듣기 어렵고 깨달은 이가 세상에 나기도 어려우니라.

Kiccho manussapaṭilābho, kicchaṁ maccāna jīvitaṁ; Kicchaṁ saddhammassavanaṁ, kiccho buddhānamuppādo.

법구경 Dhammapada 182

배경

낏초(kiccho)라는 낱말이 네 번 되풀이됩니다. '어렵다, 힘겹다'는 뜻입니다. 네 가지가 다 어렵다고 하는데, 이 게송의 뜻은 절망이 아니라 값입니다. 어려운 일이 지금 다 갖추어져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고, 살아 있고, 가르침을 들을 수 있고, 그 가르침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네 가지가 동시에 맞아떨어지는 일이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게송은 지금이 드문 때라는 말이 됩니다. 무엇을 미루기에는 어렵게 얻은 조건이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묵상

지금 내가 가진 조건 가운데 당연하게 여겨 온 것이 있나요? 그것이 드문 일이라면 오늘 무엇을 하시겠어요?

나쁜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좋은 것을 갖추며, 제 마음을 맑히는 것, 이것이 깨달은 이들의 가르침이니라.

Sabbapāpassa akaraṇaṁ, kusalassa upasampadā; Sacittapariyodapanaṁ, etaṁ buddhāna sāsanaṁ.

법구경 Dhammapada 183 부처 품 (Buddhavagga)

배경

옛부터 깨달은 이들이 공통으로 전한 가르침으로 꼽혀 온 게송입니다. 세 마디가 전부입니다.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좋은 것을 갖추고, 마음을 맑힙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마음을 맑히는 일이 맨 뒤에 옵니다. 앞의 두 가지가 되지 않은 채로 마음만 다스리려 하면 잘 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빠리요다빠나(pariyodapana)는 옷을 빨아 희게 하듯 씻어 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6품에서 나온 낱말과 같습니다. 이 짧은 세 줄에 불교 전체가 들어 있다고들 말합니다.

묵상

이 세 가지 가운데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어느 것인가요? 순서를 건너뛰고 마지막부터 하려 하고 있지는 않나요?

참고 견딤이 가장 높은 닦음이요 열반이 가장 높다고 깨달은 이들은 말하느니라. 남을 해치는 이는 출가한 이가 아니며 남을 괴롭히면서 애쓰는 이가 되지는 못하느니라.

Khantī paramaṁ tapo titikkhā, Nibbānaṁ paramaṁ vadanti buddhā; Na hi pabbajito parūpaghātī, Na samaṇo hoti paraṁ viheṭhayanto.

법구경 Dhammapada 184

배경

따뽀(tapo)는 몸을 태우듯 하는 고행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 수행자들이 가장 높이 치던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이 게송은 그 자리에 칸띠(khantī), 곧 참고 견딤을 놓습니다. 굶고 태우는 것보다 견디는 것이 높다는 것입니다. 뒷줄이 그 뜻을 못박습니다. 아무리 고행을 해도 남을 해치면 수행자가 아닙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 게송이 수행의 척도를 자기 몸이 아니라 남을 대하는 태도에 둔 점입니다. 얼마나 힘들게 하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힘들게 하지 않느냐입니다.

묵상

무언가를 열심히 하느라 주위 사람을 힘들게 한 적이 있나요? 그 열심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돌아보면 어떨까요?

헐뜯지 않고 해치지 않으며 지켜야 할 조목 안에서 스스로를 다잡고, 먹는 데 알맞음을 알고 한적한 자리에 머물며, 마음을 가다듬는 데 힘쓰는 것, 이것이 깨달은 이들의 가르침이니라.

Anūpavādo anūpaghāto, Pātimokkhe ca saṁvaro; Mattaññutā ca bhattasmiṁ, Pantañca sayanāsanaṁ; Adhicitte ca āyogo, Etaṁ buddhāna sāsanaṁ.

법구경 Dhammapada 185

배경

183게송과 같은 맺음말로 끝납니다. 앞에서 세 마디로 요약했던 것을 여기서 다섯 가지로 풀어 놓은 셈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첫머리에 놓인 두 가지입니다. 헐뜯지 않는 것과 해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을 가다듬는 일보다 앞에 놓았습니다. 맛딴뉴따(mattaññutā)는 '알맞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 낱말이 먹는 일에 쓰인 것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1품에서도 먹는 일이 수행 이야기에 나란히 놓였습니다. 매일 하는 일에서 절제가 드러난다는 시선이 되풀이됩니다.

묵상

다섯 가지 가운데 가장 지키기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이 어려운 까닭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돈이 비처럼 쏟아진다 해도 욕망에는 물릴 때가 없느니라. 욕망이란 단맛은 적고 괴로움은 크다는 것을 지혜로운 이는 그렇게 아느니라.

Na kahāpaṇavassena, titti kāmesu vijjati; Appassādā dukhā kāmā, iti viññāya paṇḍito.

법구경 Dhammapada 186

배경

까하빠나(kahāpaṇa)는 당시 쓰던 돈의 이름입니다. 돈이 비처럼 쏟아지는 그림은 바랄 수 있는 최대치를 그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띳띠(titti), 곧 물림은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압빳사다(appassāda)는 '단맛이 적은'입니다. 없다고 하지 않고 적다고 한 점이 정확합니다. 즐거움이 아예 없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실제로 달기는 답니다. 다만 그 단맛에 견주어 뒤따르는 괴로움이 크다는 셈입니다. 부정이 아니라 저울질입니다.

묵상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을 때 그 기쁨은 얼마나 갔나요? 그리고 그다음에 무엇이 왔나요?

그러기에 바르게 깨달은 이의 제자는 하늘의 즐거움에서도 기쁨을 찾지 않나니, 목마름이 다함을 기뻐하는 이가 되느니라.

Api dibbesu kāmesu, ratiṁ so nādhigacchati; Taṇhakkhayarato hoti, sammāsambuddhasāvako.

법구경 Dhammapada 187

배경

앞 게송의 결론입니다. 땅의 즐거움만이 아니라 하늘의 즐거움까지 든 것은 정도의 문제가 아님을 못박기 위해서입니다. 더 좋은 즐거움을 찾으면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딴학카야라또(taṇhakkhayarato)는 '목마름이 다함을 기뻐하는'이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이 중요합니다. 즐거움을 포기하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 즐거움을 찾은 상태입니다. 목마름이 줄어드는 그 자체가 기쁨이 된다는 말입니다. 갈증이 심할수록 물 한 모금이 달지만, 갈증이 가시는 것은 다른 종류의 편안함입니다.

묵상

무언가를 갖고 싶은 마음이 옅어졌을 때 아쉬웠나요, 아니면 홀가분했나요?

두려움에 쫓긴 사람들은 산으로 숲으로 의지할 곳을 찾아가고, 동산으로 나무로 탑으로 찾아가느니라. 그러나 그것은 평안한 의지처가 아니요 가장 나은 의지처도 아니니, 그런 것에 의지해서는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느니라.

Bahuṁ ve saraṇaṁ yanti, pabbatāni vanāni ca; Ārāmarukkhacetyāni, manussā bhayatajjitā. Netaṁ kho saraṇaṁ khemaṁ, netaṁ saraṇamuttamaṁ; Netaṁ saraṇamāgamma, sabbadukkhā pamuccati.

법구경 Dhammapada 188-189

배경

두 게송이 한 문장으로 이어져 함께 읽어야 합니다. 바야땃지따(bhayatajjita)는 '두려움에 쫓긴'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무언가에 의지하려 드는 까닭을 두려움으로 짚었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그 마음을 나무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두려운 것이 잘못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렇게 찾아간 곳이 안전한 곳이 아니라고 말할 뿐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나무 신과 사당과 제사로 바꾸었는데, 그러면 장소를 말하던 것이 우상 숭배를 나무라는 말이 됩니다. 빠알리가 든 것은 산과 숲과 나무 같은 장소들입니다.

묵상

두려울 때 어디로 가나요? 그곳이 정말 나를 안전하게 해 주는지 한 번쯤 물어본 적 있나요?

깨달은 이와 그 가르침과 그 무리를 의지처로 삼는다면, 바른 지혜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보게 되나니, 괴로움과 괴로움이 일어나는 까닭과 괴로움을 넘어섬과, 괴로움을 가라앉히는 여덟 갈래 길이니라. 이것이 평안한 의지처요 가장 나은 의지처이니, 이것에 의지하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느니라.

Yo ca buddhañca dhammañca, saṅghañca saraṇaṁ gato; Cattāri ariyasaccāni, sammappaññāya passati. Dukkhaṁ dukkhasamuppādaṁ, dukkhassa ca atikkamaṁ; Ariyaṁ caṭṭhaṅgikaṁ maggaṁ, dukkhūpasamagāminaṁ. Etaṁ kho saraṇaṁ khemaṁ, etaṁ saraṇamuttamaṁ; Etaṁ saraṇamāgamma, sabbadukkhā pamuccati.

법구경 Dhammapada 190-192

배경

세 게송이 한 흐름이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앞의 두 게송에서 안전하지 않은 의지처를 말했으니 여기서 안전한 의지처를 내놓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뜻밖입니다. 깨달은 이와 가르침과 그 무리에 의지한다고 해 놓고, 곧바로 네 가지 진리를 본다고 잇습니다. 기대는 일이 아니라 보는 일로 이어진 것입니다. 사라낭 가또(saraṇaṁ gato)는 '의지처로 삼아 간다'는 뜻인데, 여기서 의지는 숨는 것이 아니라 그 길로 들어서는 것에 가깝습니다. 두려워서 찾아가 숨는 곳이 아니라 두려움의 뿌리를 보게 하는 곳입니다.

묵상

기대는 것과 배우는 것은 다릅니다. 지금 내가 기대고 있는 것은 나를 숨겨 주나요, 아니면 보게 해 주나요?

뛰어난 사람은 드물어 아무 데서나 나지 않나니, 그런 지혜로운 이가 나는 곳은 즐거움 속에 번성하느니라.

Dullabho purisājañño, na so sabbattha jāyati; Yattha so jāyati dhīro, taṁ kulaṁ sukhamedhati.

법구경 Dhammapada 193

배경

뿌리사잔뇨(purisājañña)는 좋은 혈통의 말을 가리키는 말에서 왔습니다. 뛰어난 사람을 명마에 견준 셈입니다. 이 게송이 태생을 말하는 것으로 읽히기 쉬운데, 26품 전체가 태생이 아니라 행이 사람을 만든다고 말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읽기 어렵습니다. 꿀라(kula)는 집안이자 터전입니다. 한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가 그 자리 전체를 바꾼다는 말로 읽는 편이 이 품의 흐름에 맞습니다. 7품에서 온전히 놓아버린 이가 머무는 곳이 아름다운 땅이라 했던 것과 이어집니다.

묵상

한 사람이 있어서 분위기가 달라진 자리를 겪어 본 적 있나요? 그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깨달은 이가 세상에 나는 것도 즐거움이요 참된 가르침을 펴는 것도 즐거움이며, 무리가 화합하는 것도 즐거움이요 화합한 이들이 함께 힘씀도 즐거움이니라.

Sukho buddhānamuppādo, sukhā saddhammadesanā; Sukhā saṅghassa sāmaggī, samaggānaṁ tapo sukho.

법구경 Dhammapada 194

배경

수코(sukho)라는 낱말이 네 번 되풀이됩니다.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이 품에서 앞서 즐거움을 조심하라고 여러 번 말했는데, 여기서는 즐거움을 네 번이나 부릅니다. 어떤 즐거움이냐가 다릅니다. 앞에서 경계한 것은 감각의 즐거움이고 여기 나오는 것은 함께 있음에서 오는 즐거움입니다. 사맛기(sāmaggī)는 '화합'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화합 자체를 즐거움으로 놓고, 그다음에 화합한 이들이 함께 힘쓰는 것을 또 하나의 즐거움으로 놓은 점입니다. 사이좋게 지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함께 나아가는 것까지 갑니다.

묵상

함께 무언가를 해 본 경험이 있나요? 그때의 즐거움이 혼자 이룬 것과 어떻게 달랐나요?

공경받아 마땅한 이를 공경하는 이가 있나니, 깨달은 이든 그 제자든 부풀린 생각을 넘어서고 슬픔과 탄식을 건너간 이, 고요에 이르러 어디에도 두려움이 없는 그런 이를 공경하는 사람이 쌓는 좋음은, 누구도 이만큼이라고 헤아리지 못하느니라.

Pūjārahe pūjayato, buddhe yadi va sāvake; Papañcasamatikkante, tiṇṇasokapariddave. Te tādise pūjayato, nibbute akutobhaye; Na sakkā puññaṁ saṅkhātuṁ, imettamapi kenaci.

법구경 Dhammapada 195-196

배경

품의 마지막이자 두 게송이 한 문장입니다. 빠빤짜(papañca)는 '부풀림'으로, 하나의 일에서 생각이 가지를 쳐 끝없이 뻗어 나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넘어섰다고 했습니다. 아꾸또바야(akutobhaya)는 '어느 쪽에서도 두려움이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앞의 188게송에서 사람들이 두려움에 쫓겨 의지처를 찾는다고 했는데, 여기서 두려움이 없는 이가 나옵니다. 품이 두려움에서 시작해 두려움 없음으로 끝나는 셈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깨달은 이만이 아니라 그 제자도 함께 든 점입니다.

묵상

두려움이 없어 보이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요? 그 사람에게서 무엇을 배우고 싶었나요?

17 행복 12구절

미워하는 이들 사이에서 미움 없이 - 행복을 다르게 세는 열두 편

우리는 참으로 즐겁게 사노라, 미워하는 이들 사이에서 미움 없이. 미워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미움 없이 지내노라.

Susukhaṁ vata jīvāma, verinesu averino; Verinesu manussesu, viharāma averino.

법구경 Dhammapada 197

배경

여기서부터 네 편이 같은 틀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참으로 즐겁게 사노라'로 시작해 무엇이 없이 사는지를 밝힙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물을 두고 다투던 두 집안 사이에 부처님이 들어가신 일을 전합니다. 눈여겨볼 것은 미워하는 이들이 사라졌다고 하지 않는 점입니다. 그들은 그대로 있습니다. 다만 그 사이에서 미움 없이 지낸다고 합니다.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 안에서 다르게 지내는 방식입니다. 아웨리노(averino)는 '원한 없는'으로, 5품의 원한 이야기와 이어집니다.

묵상

껄끄러운 사람이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나요? 그 사람이 그대로 있는 채로 내가 편해질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우리는 참으로 즐겁게 사노라, 앓는 이들 사이에서 앓지 않고. 앓는 사람들 가운데서 앓지 않고 지내노라.

Susukhaṁ vata jīvāma, āturesu anāturā; Āturesu manussesu, viharāma anāturā.

법구경 Dhammapada 198

배경

아뚜라(ātura)는 '앓는, 시달리는'이라는 뜻입니다. 몸의 병만이 아니라 마음이 시달리는 상태까지 가리킵니다. 이 게송이 몸이 건강하다는 자랑으로 읽히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앞 게송이 미움을 다루었고 뒤 게송이 불안을 다루니, 여기서도 마음 쪽으로 읽는 편이 맞습니다. 모두가 시달리는 자리에서 함께 시달리지 않는 것입니다. 주위가 온통 들끓을 때 같이 들끓지 않기가 어렵습니다. 이 연작이 되풀이해 말하는 것은 주위와 나를 떼어 놓는 일입니다.

묵상

주위가 모두 힘들어할 때 나도 함께 무너진 적이 있나요? 함께 아파하는 것과 같이 무너지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우리는 참으로 즐겁게 사노라, 안달하는 이들 사이에서 안달하지 않고. 안달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안달하지 않고 지내노라.

Susukhaṁ vata jīvāma, ussukesu anussukā; Ussukesu manussesu, viharāma anussukā.

법구경 Dhammapada 199

배경

웃수까(ussuka)는 '들떠서 서두르는, 안달하는'이라는 뜻입니다. 무언가를 얻으려고 마음이 앞서 달리는 상태입니다. 남들이 다 서두를 때 혼자 서두르지 않기가 어렵습니다. 뒤처지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 연작의 세 편이 미움과 시달림과 안달을 차례로 들었는데, 셋 다 옮는 것들입니다. 곁에 있으면 저절로 물듭니다. 그러니 이 게송들이 말하는 것은 남들과 다르게 살라는 말이라기보다, 물들지 않는 자리를 지키라는 말에 가깝습니다.

묵상

남들이 다 서두르는 것을 보면 마음이 급해지나요? 그 급함이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이었나요?

우리는 참으로 즐겁게 사노라, 가진 것 하나 없이. 빛나는 신들처럼 희열을 먹고 살리라.

Susukhaṁ vata jīvāma, yesaṁ no natthi kiñcanaṁ; Pītibhakkhā bhavissāma, devā ābhassarā yathā.

법구경 Dhammapada 200

배경

연작의 마지막입니다. 앞의 셋이 남들과 다른 자리를 말했다면 여기서는 가진 것을 말합니다. 낀짜낭(kiñcanaṁ)은 '어떤 것, 소유'입니다. 삐띠박카(pītibhakkhā)는 '기쁨을 먹는 이들'이라는 뜻으로, 실제로 먹을 것이 없는 자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아밧사라(ābhassara)는 빛으로 이루어졌다는 하늘의 이름입니다. 그들은 먹지 않고 기쁨만으로 지낸다고 합니다. 가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결핍이 아니라 가벼움으로 뒤집은 게송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마라가 탁발을 방해해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날의 일을 전합니다.

묵상

가진 것이 적어 오히려 홀가분했던 때가 있었나요? 지금 가진 것 가운데 나를 무겁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김은 원한을 낳고 진 이는 괴로워 누우나, 고요한 이는 편안히 잠드나니 이김과 짐을 모두 놓은 까닭이니라.

Jayaṁ veraṁ pasavati, dukkhaṁ seti parājito; Upasanto sukhaṁ seti, hitvā jayaparājayaṁ.

법구경 Dhammapada 201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전쟁에서 진 왕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 게송의 셈이 뜻밖입니다. 이긴 쪽도 편하지 않다고 합니다. 이기면 원한을 얻기 때문입니다. 진 쪽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싸움에는 편안한 자리가 없습니다. 히뜨와(hitvā)는 '버리고'라는 뜻인데, 진 것을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김과 짐이라는 셈 자체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결과로 나온 것이 잠자리입니다. 이 책에서 편안한 잠은 거듭 좋은 삶의 표시로 나옵니다.

묵상

이기고 나서 개운하지 않았던 적이 있나요? 그때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나란히 적어 보면 어떨까요?

물듦과 같은 불이 없고 성냄과 같은 재앙이 없으며, 이 몸과 마음의 무더기 같은 괴로움이 없고 고요를 넘어서는 즐거움이 없느니라.

Natthi rāgasamo aggi, Natthi dosasamo kali; Natthi khandhasamā dukkhā, Natthi santiparaṁ sukhaṁ.

법구경 Dhammapada 202

배경

칸다(khandha)는 '무더기'로, 사람을 이루는 다섯 가지를 가리킵니다. 몸과 느낌과 인식과 지어냄과 알아차림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 전체입니다. 그것보다 큰 괴로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삶의 어떤 사건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구조 자체를 가리킨 것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를 몸으로 줄였고, 첫 구의 라가(rāga)도 성적 욕망으로 좁혔습니다. 넷을 나란히 놓은 짜임이 정교합니다. 앞의 셋은 없었으면 하는 것이고 마지막 하나만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묵상

가장 뜨겁게 타오르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 불을 끄는 것과 다른 데로 옮기는 것 가운데 지금 하고 있는 쪽은 어느 쪽인가요?

배고픔이 가장 큰 병이요 지어진 것들이 가장 큰 괴로움이니, 이것을 있는 그대로 알면 열반이 가장 큰 즐거움이니라.

Jighacchāparamā rogā, saṅkhāraparamā dukhā; Etaṁ ñatvā yathābhūtaṁ, 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법구경 Dhammapada 203

배경

지갓차(jighacchā)는 배고픔입니다. 병 가운데 가장 크다고 한 것이 뜻밖인데, 배고픔은 낫는 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먹어도 내일 또 옵니다. 평생 되풀이되는 이 결핍을 병의 본보기로 놓은 것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배고픈 사람에게 먼저 밥을 먹인 뒤에 가르침을 펴신 일을 전합니다. 배가 고프면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다는 대목입니다. 상카라(saṅkhāra)는 '지어진 것들'로, 조건에 기대어 생겨난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묵상

채워도 다시 비는 것이 있나요? 그것을 계속 채우는 일과 그 비는 성질을 아는 일 가운데 무엇을 해 보고 싶나요?

건강이 가장 큰 얻음이요 만족이 가장 큰 재물이며, 믿음이 가장 가까운 사이요 열반이 가장 큰 즐거움이니라.

Ārogyaparamā lābhā, Santuṭṭhiparamaṁ dhanaṁ; Vissāsaparamā ñāti, 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법구경 Dhammapada 204

배경

네 가지를 뒤집어 놓은 게송입니다. 사람들이 값지다고 여기는 것마다 다른 것을 그 자리에 놓았습니다. 얻음의 자리에 건강을, 재물의 자리에 만족을, 친족의 자리에 믿음을, 즐거움의 자리에 열반을 놓았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위사사(vissāsa)입니다. '서로 믿고 마음을 놓음'이라는 뜻으로, 핏줄보다 믿음이 더 가깝다고 한 것입니다. 산뚜띠(santuṭṭhi)는 '있는 것으로 넉넉함'입니다. 재물의 크기가 아니라 넉넉하다고 느끼는 자리를 재물이라 부른 셈입니다.

묵상

지금 가진 것으로 넉넉하다고 느낀 적이 언제인가요? 그 느낌은 무엇이 늘어서 왔나요, 무엇을 그만두어서 왔나요?

홀로 있음의 맛을 보고 가라앉음의 맛을 본 이는, 두려움 없고 허물 없어 가르침의 기쁨을 맛보느니라.

Pavivekarasaṁ pitvā, rasaṁ upasamassa ca; Niddaro hoti nippāpo, dhammapītirasaṁ pivaṁ.

법구경 Dhammapada 205

배경

라사(rasa)는 '맛'입니다. 이 게송에서 세 번 나옵니다. 홀로 있음의 맛, 가라앉음의 맛, 가르침의 기쁨이라는 맛입니다. 마신다는 표현을 쓴 것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머리로 아는 일이 아니라 혀로 아는 일처럼 그린 것입니다. 5품에서 국자와 혀를 견주었던 대목과 이어집니다. 빠위웨까(paviveka)는 '홀로 떨어져 있음'입니다. 외로움과 다릅니다. 외로움은 누군가 없어서 괴로운 것이고 이것은 혼자 있는 것 자체가 맛이 되는 상태입니다.

묵상

혼자 있는 시간이 맛있게 느껴진 적이 있나요? 그런 시간이 하루에 얼마나 있는지 헤아려 보면 어떨까요?

성인을 뵙는 것은 좋은 일이요 함께 지냄은 늘 즐거우니라. 어리석은 이를 보지 않으면 언제나 즐거우니라.

Sāhu dassanamariyānaṁ, sannivāso sadā sukho; Adassanena bālānaṁ, niccameva sukhī siyā.

법구경 Dhammapada 206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부처님이 편찮으실 때 신들의 왕이 찾아와 시중을 든 일을 전합니다. 뒷줄이 다소 매정하게 들릴 수 있어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이를 미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책에서 어리석음은 태생이나 머리가 아니라 자기를 보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옮습니다. 앞의 연작에서 미움과 안달이 옮는다고 했던 것과 같은 셈입니다. 다음 게송이 그 까닭을 자세히 풉니다.

묵상

만나고 나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사람이 있나요? 그 무거움이 어디서 오는지 살펴본 적 있나요?

어리석은 이와 어울려 다니면 오래도록 괴로우니, 어리석은 이와 함께 지냄은 늘 원수와 함께 있는 것과 같고, 지혜로운 이와 함께 지냄은 가족을 만나는 것처럼 즐거우니라.

Bālasaṅgatacārī hi, dīghamaddhāna socati; Dukkho bālehi saṁvāso, amitteneva sabbadā; Dhīro ca sukhasaṁvāso, ñātīnaṁva samāgamo.

법구경 Dhammapada 207

배경

디감앗다나(dīghamaddhāna)는 '오랜 세월 동안'입니다. 잠깐이 아니라 오래간다고 한 점이 이 게송의 무게입니다. 함께 지내는 사람은 하루의 기분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꿉니다. 비유가 둘 나옵니다. 하나는 원수와 함께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족을 만나는 것입니다. 나띠(ñāti)는 친족을 뜻하는데, 앞의 204게송에서 믿음이 가장 가까운 사이라 했던 것과 함께 읽으면 핏줄이 아니라 마음이 통하는 사이로 읽힙니다.

묵상

함께 있으면 편안해지는 사람이 있나요? 그 사람과 보내는 시간을 늘릴 방법이 있을까요?

그러므로 지혜롭고 많이 배운 이, 됨됨이를 몸에 지니고 다짐을 지키는 성인, 그런 참되고 슬기로운 이를 가까이할지니라. 달이 별들의 길을 따라가듯 하라.

Tasmā hi— Dhīrañca paññañca bahussutañca, Dhorayhasīlaṁ vatavantamariyaṁ; Taṁ tādisaṁ sappurisaṁ sumedhaṁ, Bhajetha nakkhattapathaṁva candimā.

법구경 Dhammapada 208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이자 앞 게송들의 결론입니다. 도라이하실라(dhorayhasīla)에서 도라이하(dhorayha)는 짐수레를 끄는 소를 뜻합니다. 됨됨이를 짐수레 끄는 소처럼 묵묵히 지고 간다는 그림입니다. 마지막 비유가 아름답습니다. 달이 별들의 길을 따라간다고 했습니다. 달은 별보다 크고 밝지만 그 길을 따라 움직입니다. 앞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을 가까이한다는 것이 그를 우러르는 일이 아니라 같은 길을 가는 일이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묵상

닮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그 사람을 우러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같은 길로 한 걸음 옮기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18 사랑하는 것 11구절

사랑하는 만큼 두려워지는 까닭 - 슬픔이 어디서 오는지를 짚은 열두 편

해야 할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고 하지 않아도 될 일에 마음을 쏟으며, 뜻을 버리고 좋아하는 것만 붙잡으면, 뒷날 스스로 애쓴 이를 부러워하게 되느니라.

Ayoge yuñjamattānaṁ, yogasmiñca ayojayaṁ; Atthaṁ hitvā piyaggāhī, pihetattānuyoginaṁ.

법구경 Dhammapada 209

배경

이 게송의 매듭은 마지막 낱말 삐헤따(piheta), 곧 '부러워한다'입니다. 지금 편한 쪽을 고른 대가가 뒷날의 부러움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벌을 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중에 부러워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 셈이 실감납니다. 우리는 대개 벌을 받아서가 아니라 남을 보며 뒤늦게 아쉬워합니다. 삐약가히(piyaggāhī)는 '좋아하는 것만 붙잡는 이'입니다. 이 품의 이름인 삐야(piya)가 여기서 처음 나옵니다.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는 삶의 결말을 먼저 보여 준 뒤에 품이 시작되는 셈입니다.

묵상

지금 마음이 가는 일과 해야 할 일이 다르지 않나요? 다르다면 몇 년 뒤에 무엇을 부러워하게 될지 상상해 보세요.

사랑하는 것과도 미워하는 것과도 너무 가까이 얽히지 말지니, 사랑하는 것을 보지 못함도 괴로움이요 미워하는 것을 보는 것도 괴로움이니라.

Mā piyehi samāgañchi, appiyehi kudācanaṁ; Piyānaṁ adassanaṁ dukkhaṁ, appiyānañca dassanaṁ.

법구경 Dhammapada 210

배경

이 게송이 사랑하지 말라는 말로 읽히기 쉬워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사마간치(samāgañchi)는 '너무 얽혀 붙는다'는 뜻으로, 만남 자체가 아니라 떨어질 수 없게 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게송은 미워하는 것도 같은 자리에 놓습니다. 미워하는 데 마음을 쏟는 것도 얽히는 일입니다. 두 줄이 나란히 놓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랑과 미움은 반대말처럼 보이지만, 마음이 거기 붙들린다는 점에서는 같은 일입니다. 사랑을 끊으라는 말이 아니라 마음이 매이는 구조를 보라는 말로 읽는 편이 이 품의 흐름에 맞습니다.

묵상

요즘 가장 많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나요? 그것이 좋아서든 미워서든, 그 사람이 내 하루의 얼마를 차지하고 있나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것을 따로 만들지 말지니,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은 괴로우니라. 좋아함도 싫어함도 없는 이에게는 얽어매는 것이 없느니라.

Tasmā piyaṁ na kayirātha, piyāpāyo hi pāpako; Ganthā tesaṁ na vijjanti, yesaṁ natthi piyāppiyaṁ.

법구경 Dhammapada 211

배경

앞 게송의 결론입니다. 이 게송은 법구경에서 가장 오해받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으면 부처님이 다른 곳에서 하신 말씀과 어긋납니다. 부처님은 모든 존재를 향한 자애를 거듭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부정하는 것은 삐야압삐야(piyāppiya), 곧 좋아함과 싫어함으로 갈라 세우는 마음입니다. 어떤 것은 내 것이라 붙들고 어떤 것은 밀어내는 그 나눔입니다. 자애는 모두에게 고르게 향하지만 애착은 하나를 골라 붙듭니다. 간타(gantha)는 매듭입니다. 매듭은 고르게 향하는 마음에는 생기지 않습니다.

묵상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과 붙들려는 마음을 나눌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이 나에게서 멀어질 때 무엇이 남을지 그려 보면 어떨까요?

사랑하는 것에서 슬픔이 생기고 사랑하는 것에서 두려움이 생기나니, 사랑하는 것에서 벗어난 이에게는 슬픔이 없거늘 어찌 두려움이 있겠느냐.

Piyato jāyatī soko, piyato jāyatī bhayaṁ; Piyato vippamuttassa, natthi soko kuto bhayaṁ.

법구경 Dhammapada 212

배경

여기서부터 다섯 편이 같은 틀로 이어지며 낱말만 바뀝니다. 사랑, 애정, 즐김, 욕망, 목마름 순입니다. 뒤로 갈수록 붙드는 힘이 강해집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아들을 잃고 미쳐 다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슬픔에 빠진 사람 앞에서 하신 것입니다. 슬퍼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슬픔이 어디서 오는지 알려 주신 것입니다. 슬픔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있어서 옵니다. 그것을 아는 것과 슬픔을 참는 것은 다릅니다.

묵상

누군가를 잃고 슬펐던 적이 있나요? 그 슬픔의 크기가 곧 그 사랑의 크기였다는 것을 지금은 알 수 있을까요?

애정에서 슬픔이 생기고 애정에서 두려움이 생기나니, 애정에서 벗어난 이에게는 슬픔이 없거늘 어찌 두려움이 있겠느냐.

Pemato jāyatī soko, pemato jāyatī bhayaṁ; Pemato vippamuttassa, natthi soko kuto bhayaṁ.

법구경 Dhammapada 213

배경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위사카라는 여성이 손녀를 잃고 울며 찾아온 일을 전합니다. 부처님이 사왓티에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물으시고, 그만큼의 손자를 갖고 싶으냐 물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하자, 그만큼 사람이 죽으니 그만큼 울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뻬마(pema)는 따뜻한 정을 뜻하는 말로, 앞 게송의 삐야보다 부드러운 낱말입니다. 이 이야기의 결이 중요합니다. 부처님은 위사카에게 울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우는지를 스스로 보게 하셨습니다.

묵상

슬픔을 그만두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마음이 드나요? 그만두라는 말보다 왜 슬픈지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즐김에서 슬픔이 생기고 즐김에서 두려움이 생기나니, 즐김에서 벗어난 이에게는 슬픔이 없거늘 어찌 두려움이 있겠느냐.

Ratiyā jāyatī soko, ratiyā jāyatī bhayaṁ; Ratiyā vippamuttassa, natthi soko kuto bhayaṁ.

법구경 Dhammapada 214

배경

라띠(rati)는 '즐김, 재미'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일이나 상태에서 오는 즐거움을 가리킵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나들이하던 귀족 청년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날 그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고 합니다. 즐거운 자리에서 다툼이 나는 일이 흔한데, 그 까닭이 이 게송에 있습니다. 즐거움이 커질수록 그것을 지키려는 마음이 생기고, 지키려는 마음에서 다툼이 납니다. 즐기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즐김이 어떻게 두려움으로 바뀌는지를 보라는 말입니다.

묵상

좋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이것이 끝날까 봐 불안했던 적이 있나요? 그 불안은 즐거움의 어느 자리에서 왔을까요?

욕망에서 슬픔이 생기고 욕망에서 두려움이 생기나니, 욕망에서 벗어난 이에게는 슬픔이 없거늘 어찌 두려움이 있겠느냐.

Kāmato jāyatī soko, kāmato jāyatī bhayaṁ; Kāmato vippamuttassa, natthi soko kuto bhayaṁ.

법구경 Dhammapada 215

배경

까마(kāma)는 감각의 즐거움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앞의 셋보다 붙드는 힘이 셉니다. 이 연작이 낱말을 바꿔 가며 되풀이하는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슬픔과 두려움의 뿌리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이름은 달라도 구조는 같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붙들면 잃을까 두렵고, 잃으면 슬픕니다. 위빠뭇따(vippamutta)는 '온전히 풀려난'이라는 뜻입니다. 억지로 끊는 것이 아니라 매듭이 풀린 상태입니다. 매듭은 잘라도 되고 풀어도 되는데, 이 낱말은 풀리는 쪽을 가리킵니다.

묵상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나요? 그것을 못 얻을까 두려운 마음이 함께 있다면, 둘은 같은 뿌리일지도 모릅니다.

목마름에서 슬픔이 생기고 목마름에서 두려움이 생기나니, 목마름에서 벗어난 이에게는 슬픔이 없거늘 어찌 두려움이 있겠느냐.

Taṇhāya jāyatī soko, taṇhāya jāyatī bhayaṁ; Taṇhāya vippamuttassa, natthi soko kuto bhayaṁ.

법구경 Dhammapada 216

배경

연작의 마지막입니다. 딴하(taṇhā)는 '목마름'으로, 이 책에서 괴로움의 뿌리로 거듭 지목되는 낱말입니다. 24품 전체가 이 낱말에 바쳐져 있습니다. 다섯 편을 차례로 읽으면 사랑에서 시작해 목마름으로 끝나는 흐름이 보입니다. 가장 부드러운 정에서 가장 마르지 않는 갈증까지 이어진 셈입니다. 그리고 다섯 편 모두 뒷줄이 똑같습니다. 벗어난 이에게는 슬픔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되풀이가 이 품의 방식입니다. 뿌리가 여럿이어도 벗어나는 자리는 하나입니다.

묵상

다섯 가지 가운데 지금 나를 가장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름을 붙여 보는 것만으로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됨됨이와 바른 봄을 갖추고 이치에 서서 진실을 아는 이, 제 할 일을 하는 그 사람을 사람들이 사랑하느니라.

Sīladassanasampannaṁ, dhammaṭṭhaṁ saccavedinaṁ; Attano kamma kubbānaṁ, taṁ jano kurute piyaṁ.

법구경 Dhammapada 217

배경

이 품에서 방향이 바뀌는 자리입니다. 앞에서 사랑이 슬픔의 뿌리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사랑받는 사람이 나옵니다. 삐양 꾸루떼(piyaṁ kurute)는 '사랑스럽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그가 사랑받으려고 한 일이 하나도 없다는 점입니다. 됨됨이를 갖추고, 바르게 보고, 원칙에 서고,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원문의 마지막 구절은 '제가 할 일을 하는'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얻으려 할 때가 아니라 제 할 일을 할 때 따라온다는 순서입니다.

묵상

사랑받으려고 애쓰고 있지는 않나요? 그 애씀 대신 제 할 일을 하는 데 시간을 쓴다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형언할 수 없는 것을 향한 열망이 마음에 사무치고, 감각의 즐거움에 매이지 않은 이를 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이라 부르느니라.

Chandajāto anakkhāte, Manasā ca phuṭo siyā; Kāmesu ca appaṭibaddhacitto, Uddhaṁsototi vuccati.

법구경 Dhammapada 218

배경

아낙카떼(anakkhāte)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것'으로, 열반을 가리킵니다. 웃당소또(uddhaṁsoto)는 '위로 흐르는 이'입니다. 물은 아래로 흐르는데 이 사람은 위로 흐른다고 했습니다. 자연스러운 방향의 반대로 간다는 그림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첫 낱말 찬다(chanda)입니다. 이 낱말은 욕망이라는 뜻도 되지만 여기서는 좋은 쪽으로 쓰였습니다. 바라는 마음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바라느냐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이 품이 사랑과 애착을 다루다가 여기서 다른 종류의 끌림을 내놓은 셈입니다.

묵상

설명하기 어렵지만 끌리는 무언가가 있나요? 그 끌림이 나를 어느 방향으로 데려가고 있나요?

오래 떠나 있던 사람이 멀리서 무사히 돌아오면, 친족과 벗들이 그의 돌아옴을 반기듯, 좋은 일을 한 이가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에 이르면, 그가 지은 좋은 일들이 반가운 이를 맞이하는 가족처럼 그를 맞이하느니라.

Cirappavāsiṁ purisaṁ, dūrato sotthimāgataṁ; Ñātimittā suhajjā ca, abhinandanti āgataṁ. Tatheva katapuññampi, asmā lokā paraṁ gataṁ; Puññāni paṭigaṇhanti, piyaṁ ñātīva āgataṁ.

법구경 Dhammapada 219-220

배경

두 게송이 한 문장으로 이어져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앞이 비유이고 뒤가 그 뜻입니다. 이 품이 사랑에서 오는 슬픔을 길게 다룬 뒤 마지막에 이 그림을 놓은 것이 뜻깊습니다. 앞에서는 헤어짐이 괴로움이라 했는데, 여기서는 마중 나오는 이들이 나옵니다. 빠띠간한띠(paṭigaṇhanti)는 '맞이한다, 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언젠가 헤어지지만 지은 일은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 슬픔을 다룬 품의 끝에 놓기에 알맞은 위로입니다.

묵상

먼 길을 돌아왔을 때 누군가 기다려 준 적이 있나요? 그 마음을 떠올리며, 오늘 내가 남길 수 있는 좋은 일 하나는 무엇일까요?

19 성냄 13구절

치솟는 것을 멈추는 마부 - 비난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까지

성냄을 버리고 교만을 놓으며 모든 얽매임을 넘어설지니라. 이름과 모양에 매이지 않고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이에게는 괴로움이 따라붙지 않느니라.

Kodhaṁ jahe vippajaheyya mānaṁ, Saṁyojanaṁ sabbamatikkameyya; Taṁ nāmarūpasmimasajjamānaṁ, Akiñcanaṁ nānupatanti dukkhā.

법구경 Dhammapada 221

배경

성냄과 교만이 나란히 놓였습니다. 둘은 짝을 이룹니다. 화가 나는 자리를 들여다보면 대개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나(māna)는 재는 마음이고, 재는 마음이 있어야 억울함이 생깁니다. 나마루빠(nāmarūpa)는 '이름과 모양'으로,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것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름에 매인다는 것은 남이 나를 어떻게 부르느냐에 매인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그 매임이 없으면 화낼 자리도 줄어듭니다. 이 품의 첫머리에 이 게송이 놓인 까닭입니다.

묵상

화가 났던 순간을 떠올려 보세요. 그 밑에 '내가 이런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닌데'라는 마음이 있지 않았나요?

치솟는 성냄을 달아나는 수레 멈추듯 막는 이, 나는 그를 참된 마부라 부르나니, 남들은 고삐만 쥐고 있을 뿐이니라.

Yo ve uppatitaṁ kodhaṁ, rathaṁ bhantaṁva vāraye; Tamahaṁ sārathiṁ brūmi, rasmiggāho itaro jano.

법구경 Dhammapada 222

배경

비유가 정확합니다. 잘 가는 수레를 모는 것은 누구나 합니다. 마부의 실력은 수레가 달아날 때 드러납니다. 반땅(bhanta)은 '날뛰는, 통제를 잃은'이라는 뜻입니다. 라스믹가호(rasmiggāha)는 '고삐를 쥔 자'로, 마부처럼 보이지만 실은 잡고만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겉모습은 같은데 위기에서 갈립니다. 웁빠띠땅(uppatita)은 '치솟은'입니다. 화가 나지 않게 하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치솟은 것을 어떻게 하느냐를 말합니다. 화는 납니다. 그다음이 문제입니다.

묵상

화가 치솟았을 때 그것을 멈춰 본 적이 있나요? 그때 무엇이 도움이 되었는지 떠올려 두면 다음에 쓸 수 있습니다.

성내지 않음으로 성냄을 이기고 선함으로 악함을 이기며, 베풂으로 인색함을 이기고 진실로 거짓을 이길지니라.

Akkodhena jine kodhaṁ, asādhuṁ sādhunā jine; Jine kadariyaṁ dānena, saccenālikavādinaṁ.

법구경 Dhammapada 223

배경

네 쌍이 나란히 놓입니다. 짜임을 보면 모두 같은 방식입니다. 상대와 같은 것으로 맞서지 않습니다. 성냄에 성냄으로 맞서면 커지고, 거짓에 거짓으로 맞서면 둘 다 거짓이 됩니다. 이긴다는 말을 썼지만 이기는 방법이 상대를 꺾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내놓는 것입니다. 5품에서 원한은 원한으로 풀리지 않는다고 했던 셈법이 여기서 넷으로 늘어난 셈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지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기라고 합니다. 다만 다른 것으로 이기라고 합니다.

묵상

누군가 나에게 거칠게 굴 때 같은 방식으로 되갚고 싶어지나요? 다른 것을 내놓는다면 무엇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진실을 말하고 성내지 말며, 청하거든 적더라도 줄지니라. 이 세 가지로 신들의 곁에 이르느니라.

Saccaṁ bhaṇe na kujjheyya, dajjā appampi yācito; Etehi tīhi ṭhānehi, gacche devāna santike.

법구경 Dhammapada 224

배경

세 가지가 소박합니다. 거짓말하지 않기, 화내지 않기, 청하면 조금이라도 주기입니다. 대단한 수행이 아니라 하루에도 여러 번 마주치는 일들입니다. 압빰삐(appampi)는 '적더라도'라는 뜻입니다. 많이 주라고 하지 않고 적어도 주라고 한 점이 이 게송을 실천 가능하게 만듭니다. 내놓을 것이 적다는 이유로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셋으로 신들의 곁에 이른다고 했으니, 값진 것을 얻는 데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묵상

이 셋 가운데 오늘 지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셋 다 어렵다면 하나만 골라도 됩니다.

해치지 않는 지혜로운 이들, 늘 몸을 다스리는 이들은, 흔들리지 않는 자리로 나아가나니 그곳에 이르면 다시 슬퍼하지 않느니라.

Ahiṁsakā ye munayo, niccaṁ kāyena saṁvutā; Te yanti accutaṁ ṭhānaṁ, yattha gantvā na socare.

법구경 Dhammapada 225

배경

앗쭈땅 타낭(accutaṁ ṭhānaṁ)은 '무너지지 않는 자리'로, 열반을 가리킵니다. 한역 법구경의 한 판본은 이를 살렸지만 다른 판본은 하늘에 난다고 옮겼습니다. 다시 태어남을 끝내는 자리가 다시 태어나는 좋은 곳으로 바뀐 셈입니다. 아힘사까(ahiṁsaka)는 '해치지 않는 이'입니다. 이 낱말은 뒷날 인도에서 큰 뜻을 갖게 되는데, 부처님 당시에도 이미 수행의 근본으로 놓였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해치지 않음과 몸을 다스림이 나란히 놓인 점입니다. 마음만이 아니라 몸의 습관까지 함께 갑니다.

묵상

누구를 해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할까요? 말일까요, 손일까요, 아니면 무심함일까요?

늘 깨어 있어 밤낮으로 익히며, 열반을 향해 마음을 둔 이들은 번뇌가 사라지느니라.

Sadā jāgaramānānaṁ, ahorattānusikkhinaṁ; Nibbānaṁ adhimuttānaṁ, atthaṁ gacchanti āsavā.

법구경 Dhammapada 226

배경

아호랏따누식키(ahorattānusikkhin)는 '밤낮으로 익히는 이'입니다. 아누식카(anusikkhā)는 배워 익힌다는 뜻으로, 한 번의 결심이 아니라 되풀이해 몸에 붙이는 일을 가리킵니다. 아디뭇따(adhimutta)는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어진'이라는 뜻입니다. 억지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기우는 상태입니다. 앗탕 갓찬띠(atthaṁ gacchanti)는 '사라진다'는 뜻인데, 본래 해가 지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흘러드는 것들이 싸워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가 지듯 저문다는 그림입니다.

묵상

마음이 저절로 기우는 쪽이 어디인가요? 그 방향을 억지로 바꾸는 대신 조금씩 옮길 수 있다면 어디로 옮기시겠어요?

아뚤라여, 이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고 오늘만의 일이 아니니라. 잠자코 있는 이도 헐뜯고 말이 많은 이도 헐뜯으며 알맞게 말하는 이마저 헐뜯나니, 이 세상에 헐뜯기지 않는 사람은 없느니라.

Porāṇametaṁ atula, netaṁ ajjatanāmiva; Nindanti tuṇhimāsīnaṁ, nindanti bahubhāṇinaṁ; Mitabhāṇimpi nindanti, natthi loke anindito.

법구경 Dhammapada 227

배경

아뚤라는 사람 이름입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그는 여러 스승을 찾아다녔는데 어디서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말이 없다고 불평하고, 말이 많다고 불평하고, 알맞게 말해도 불평했습니다. 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게송의 위로는 뜻밖의 자리에서 옵니다. 헐뜯기지 않는 방법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런 방법이 없다고 말해 줍니다. 무엇을 해도 누군가는 흠을 잡습니다. 그러니 흠잡히지 않으려는 노력 자체가 헛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오히려 편해집니다.

묵상

남에게 흠잡히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나요? 어떻게 해도 누군가는 말한다면, 그 애씀을 어디에 쓰시겠어요?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며 지금도 없느니라. 오로지 헐뜯기기만 하는 사람도, 오로지 칭찬만 받는 사람도.

Na cāhu na ca bhavissati, na cetarahi vijjati; Ekantaṁ nindito poso, ekantaṁ vā pasaṁsito.

법구경 Dhammapada 228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앞에서 헐뜯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했으니, 여기서는 그 반대편도 없다고 합니다. 오로지 칭찬만 받는 사람도 없습니다. 에깐땅(ekantaṁ)은 '전적으로, 오로지'입니다. 이 게송이 주는 위로가 양쪽입니다. 헐뜯김에 무너질 것도 없고 칭찬에 들뜰 것도 없습니다. 두 게송을 함께 읽으면 남의 평가라는 것이 원래 갈리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를 헐뜯고 기리는 동기 분석으로 바꾸었는데, 그러면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이야기가 되어 결이 달라집니다.

묵상

나를 좋게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동시에 있나요? 둘 다 있다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요?

지혜로운 이들이 날마다 살펴보고 칭찬하는 사람이 있나니, 흠 없이 사는 슬기로운 이, 됨됨이와 지혜를 함께 갖춘 이니라. 잠부 강의 금으로 만든 장신구 같은 그를 누가 헐뜯을 수 있겠느냐. 신들도 그를 기리고 하늘의 신마저 그를 기리느니라.

Yañce viññū pasaṁsanti, anuvicca suve suve; Acchiddavuttiṁ medhāviṁ, paññāsīlasamāhitaṁ. Nikkhaṁ jambonadasseva, ko taṁ ninditumarahati; Devāpi naṁ pasaṁsanti, brahmunāpi pasaṁsito.

법구경 Dhammapada 229-230

배경

두 게송이 한 문장으로 이어져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앞의 두 게송에서 남의 평가가 갈린다고 했는데, 여기서 하나의 예외를 놓습니다. 다만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아누윗짜 수웨 수웨(anuvicca suve suve)는 '날마다 살펴보고서'입니다. 한 번 보고 하는 칭찬이 아니라 오래 지켜본 뒤의 평가입니다. 그리고 칭찬하는 쪽도 윈뉴(viññū), 곧 알아볼 줄 아는 이여야 합니다. 잠부 강의 금은 당시 가장 좋은 금을 가리키던 말입니다. 두들겨 보아도 흠이 없는 물건이라는 그림입니다.

묵상

오래 지켜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요? 잠깐 본 사람의 평가와 그 평가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무겁게 느껴지나요?

몸이 들끓는 것을 지키고 몸을 잘 다스릴지니라. 몸으로 짓는 나쁜 행실을 버리고 몸으로 바르게 행할지니라.

Kāyappakopaṁ rakkheyya, kāyena saṁvuto siyā; Kāyaduccaritaṁ hitvā, kāyena sucaritaṁ care.

법구경 Dhammapada 231

배경

여기서부터 셋이 몸과 말과 마음을 차례로 다룹니다. 빠꼬빠(pakopa)는 '들끓어 튀어 오름'이라는 뜻입니다. 성냄만이 아니라 안에서 솟구치는 것 일반을 가리킵니다. 한역 법구경은 세 게송 모두에 성냄을 막기 위해서라는 말을 붙여 성냄 하나로 묶었는데, 빠알리는 더 넓습니다. 몸이 먼저 나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어려울 때 몸부터 손대는 것이 실용적이기 때문입니다. 주먹을 쥐지 않는 것, 자리를 뜨는 것 같은 일입니다.

묵상

화가 났을 때 몸이 먼저 반응하나요? 그 반응 하나만 바꿔도 다음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말이 들끓는 것을 지키고 말을 잘 다스릴지니라. 말로 짓는 나쁜 행실을 버리고 말로 바르게 행할지니라.

Vacīpakopaṁ rakkheyya, vācāya saṁvuto siyā; Vacīduccaritaṁ hitvā, vācāya sucaritaṁ care.

법구경 Dhammapada 232

배경

몸 다음이 말입니다. 세 가지 가운데 말이 가운데 놓인 것이 짜임새 있습니다. 몸의 폭력은 눈에 띄지만 말의 폭력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자주 일어납니다. 10품에서 거친 말이 되돌아온다고 했던 대목과 이어집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 세 게송이 모두 두 단계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나쁜 것을 버리고, 그다음에 바른 것을 행합니다. 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무엇을 하라고 이어 갑니다. 침묵이 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묵상

말을 참는 것과 좋은 말을 하는 것은 다릅니다. 오늘 참기만 하고 건네지 않은 말이 있나요?

마음이 들끓는 것을 지키고 마음을 잘 다스릴지니라. 마음으로 짓는 나쁜 행실을 버리고 마음으로 바르게 행할지니라.

Manopakopaṁ rakkheyya, manasā saṁvuto siyā; Manoduccaritaṁ hitvā, manasā sucaritaṁ care.

법구경 Dhammapada 233

배경

셋 가운데 마지막이자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몸과 말은 남이 보지만 마음은 자기만 압니다. 그래서 놓치기 쉽습니다. 그런데 1품 첫 게송에서 마음이 앞선다고 했으니, 순서로 보면 여기가 시작점입니다. 세 게송을 몸에서 마음 쪽으로 배열한 것은 실천의 순서이고, 실제로 일이 일어나는 순서는 그 반대입니다. 마음에서 시작해 말과 몸으로 나옵니다. 손대기 쉬운 데서 시작해 근원으로 들어가는 배열입니다.

묵상

겉으로는 아무 일 없었는데 마음속에서 여러 번 되뇐 말이 있나요? 그것도 이미 한 번은 한 셈일까요?

지혜로운 이들은 몸으로 다스려지고 말로도 다스려지며, 마음으로도 다스려지나니 그들이야말로 온전히 다스려진 이들이니라.

Kāyena saṁvutā dhīrā, atho vācāya saṁvutā; Manasā saṁvutā dhīrā, te ve suparisaṁvutā.

법구경 Dhammapada 234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이자 앞 세 게송의 매듭입니다. 수빠리상우따(suparisaṁvutā)는 '두루 잘 다스려진'이라는 뜻입니다. 셋 가운데 하나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몸은 얌전한데 말이 험한 사람, 말은 부드러운데 속으로 미워하는 사람이 여기서 걸립니다. 이 품이 성냄에서 시작해 여기서 끝나는 흐름이 자연스럽습니다. 화를 다루는 일이 결국 몸과 말과 마음 전체를 다루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화만 참는 것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묵상

몸과 말과 마음 가운데 나에게 가장 자주 새는 곳은 어디인가요? 그곳 하나부터 손대 본다면 무엇을 하시겠어요?

20 마음의 때 15구절

쇠에서 난 녹이 그 쇠를 먹듯 - 무엇이 사람을 갉아먹는가

그대는 이제 시든 잎과 같고 죽음의 사자들이 곁에 와 있느니라. 떠나는 길목에 서 있으나 지닐 노자조차 없구나. 그러니 스스로 섬을 만들지니라. 서둘러 힘써 지혜로운 이가 될지니라. 때를 씻어 흠이 없으면 성인들의 자리에 이르리라.

Paṇḍupalāsova dānisi, Yamapurisāpi ca te upaṭṭhitā; Uyyogamukhe ca tiṭṭhasi, Pātheyyampi ca te na vijjati. So karohi dīpamattano, Khippaṁ vāyama paṇḍito bhava; Niddhantamalo anaṅgaṇo, Dibbaṁ ariyabhūmiṁ upehisi.

법구경 Dhammapada 235-236

배경

두 게송이 한 흐름이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앞이 지금 자리를 보여 주고 뒤가 할 일을 말합니다. 빤두빨라사(paṇḍupalāsa)는 누렇게 시들어 곧 떨어질 잎입니다. 빠테이야(pātheyya)는 길 떠날 때 지니는 양식으로, 여기서는 죽음 뒤에 지니고 갈 것을 가리킵니다. 그림이 매섭습니다. 이미 문턱에 섰는데 챙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 게송만 읽으면 절망으로 끝납니다. 뒤 게송이 곧바로 붙습니다. 그러니 지금 만들라고 합니다. 디빠(dīpa)는 2품에서 본 것처럼 섬입니다. 늦었다고 하지 않고 서두르라고 합니다.

묵상

지금 챙겨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가져갈 수 없는 것 말고, 정말 남을 것은 무엇일까요?

그대는 이미 나이 들어 죽음의 곁으로 가고 있느니라. 가는 길에 머물 데도 없고 지닐 노자조차 없구나. 그러니 스스로 섬을 만들지니라. 서둘러 힘써 지혜로운 이가 될지니라. 때를 씻어 흠이 없으면 다시 태어나 늙는 일이 없으리라.

Upanītavayo ca dānisi, Sampayātosi yamassa santikaṁ; Vāso te natthi antarā, Pātheyyampi ca te na vijjati. So karohi dīpamattano, Khippaṁ vāyama paṇḍito bhava; Niddhantamalo anaṅgaṇo, Na punaṁ jātijaraṁ upehisi.

법구경 Dhammapada 237-238

배경

앞의 두 게송과 같은 틀이 되풀이됩니다. 다른 것은 마지막 줄입니다. 앞에서는 성인들의 자리에 이른다고 했고 여기서는 다시 태어나 늙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여행 비유가 이어집니다. 와소(vāso)는 '머물 곳'으로, 나그네가 밤에 묵을 자리입니다. 가는 길에 쉴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는 그림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앞에 악한 길에 떨어진다는 인과를 세워 놓아, 채비 없는 여행이 벌에 대한 경고가 되었습니다. 빠알리에는 벌이 없습니다. 준비 없이 떠나는 사람의 처지만 있습니다.

묵상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무엇을 챙기시나요? 인생이라는 길에서 챙겨야 할 것을 하나만 꼽는다면 무엇일까요?

지혜로운 이는 차츰차츰 조금씩 그때그때, 대장장이가 은에서 티를 걷어 내듯 제 때를 씻어 내느니라.

Anupubbena medhāvī, thokaṁ thokaṁ khaṇe khaṇe; Kammāro rajatasseva, niddhame malamattano.

법구경 Dhammapada 239

배경

카네 카네(khaṇe khaṇe)는 '순간순간'입니다. 아누뿝베나(anupubbena)는 '차례차례, 점차로'입니다. 한 번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 세 번 거듭됩니다. 대장장이가 은을 다루는 일이 실제로 그렇습니다. 불에 달구고 두들기고 식히기를 되풀이하면 티가 조금씩 떠오릅니다. 한 번에 다 빼낼 수 없습니다. 이 게송이 위로가 되는 까닭은 완벽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 씻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9품에서 물방울이 물독을 채운다고 했던 셈과 같은데, 여기서는 쌓는 쪽이 아니라 걷어 내는 쪽입니다.

묵상

한 번에 고치려다 지쳐 그만둔 일이 있나요? 오늘 조금만 걷어 낸다면 무엇을 고르시겠어요?

쇠에서 난 녹이 바로 그 쇠를 먹어 치우듯, 제가 지은 일들이 제 삶을 함부로 쓴 이를 나쁜 곳으로 이끄느니라.

Ayasāva malaṁ samuṭṭhitaṁ, Tatuṭṭhāya tameva khādati; Evaṁ atidhonacārinaṁ, Sāni kammāni nayanti duggatiṁ.

법구경 Dhammapada 240

배경

이 품의 이름인 말라(mala)가 여기서 녹으로 나타납니다. 녹은 밖에서 붙는 것이 아니라 쇠 자신에게서 납니다. 그리고 그 쇠를 먹습니다. 카다띠(khādati)는 '먹어 치운다'는 뜻입니다. 12품에서 금강석이 어리석은 이를 짓이긴다고 했던 것과 같은 셈법인데, 여기서는 더 조용합니다. 금강석은 한 번에 부수지만 녹은 천천히 갉습니다. 앗티도나짜리(atidhonacārī)는 삶에 필요한 것들을 함부로 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옷과 밥과 잠자리와 약을 헤아림 없이 쓰는 태도입니다.

묵상

천천히 나를 갉아 온 것이 있나요? 큰 사건이 아니라 오래된 습관 쪽에서 찾아보면 어떨까요?

외운 것의 때는 익히지 않음이요 집안의 때는 돌보지 않음이며, 몸매의 때는 게으름이요 지키는 이의 때는 마음 놓음이니라.

Asajjhāyamalā mantā, anuṭṭhānamalā gharā; Malaṁ vaṇṇassa kosajjaṁ, pamādo rakkhato malaṁ.

법구경 Dhammapada 241

배경

네 가지가 나란히 놓입니다. 짜임이 재미있습니다. 각각의 때가 그것을 망치는 방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외운 것은 되풀이하지 않으면 사라지고, 집은 돌보지 않으면 무너지고, 몸은 움직이지 않으면 흐트러지고, 지키는 사람은 방심하면 뚫립니다. 아산자야(asajjhāya)는 '소리 내어 되풀이하지 않음'입니다. 당시에는 경전을 외워 전했으므로 되풀이하지 않으면 정말로 사라졌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여기 나오는 때가 모두 하지 않음이라는 점입니다. 나쁜 일을 해서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서 생깁니다.

묵상

돌보지 않아 녹슬고 있는 것이 있나요? 관계일 수도, 몸일 수도, 오래 배운 무언가일 수도 있습니다.

여인의 때는 그릇된 행실이요 베푸는 이의 때는 인색함이니, 나쁜 일들은 이 세상에서도 다음 세상에서도 때가 되느니라.

Malitthiyā duccaritaṁ, maccheraṁ dadato malaṁ; Malā ve pāpakā dhammā, asmiṁ loke paramhi ca.

법구경 Dhammapada 242

배경

첫 구절은 오늘의 눈으로 읽으면 불편합니다. 왜 여인만 따로 들었는지 묻게 됩니다. 앞 게송에서 외운 것, 집안, 몸매, 지키는 이를 든 목록이 여기 이어지는 것이라 여러 대상을 늘어놓는 흐름 안에 있기는 하나, 그것으로 다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이천오백 년 전 사회에서 쓰인 말이라는 사실을 함께 놓고 읽는 편이 정직합니다. 한역 법구경에는 이 구절이 없고 다른 말로 바뀌어 있어, 한국에서 읽히는 번역에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뒷줄은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나쁜 일은 누구에게나 때라고 합니다.

묵상

오래된 글을 읽을 때 불편한 대목을 만나면 어떻게 하시나요? 덮어 두는 것과 그대로 보고 판단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나을까요?

그러나 그 모든 때보다 더한 때가 있으니 무명이야말로 가장 큰 때이니라. 이 때를 버리고 때 없는 이가 될지니라.

Tato malā malataraṁ, avijjā paramaṁ malaṁ; Etaṁ malaṁ pahantvāna, nimmalā hotha bhikkhavo.

법구경 Dhammapada 243

배경

앞의 여러 게송이 이런저런 때를 늘어놓은 뒤 여기서 뿌리를 짚습니다. 아윗자(avijjā)는 '무명'으로, 모른다는 뜻입니다. 다만 지식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때들은 이것에서 나옵니다. 무엇이 나를 해치는지 모르니 하고, 무엇이 도움이 되는지 모르니 하지 않습니다. 앞의 목록이 증상이라면 여기가 원인인 셈입니다. 그러니 하나하나 고치는 것보다 보는 눈을 여는 쪽이 근본입니다. 이 게송이 이 품의 한가운데 놓인 것이 그 때문입니다.

묵상

고쳐야 할 것을 하나씩 붙잡고 있나요? 그것들이 다 한 곳에서 나온다면, 그 한 곳은 어디일까요?

부끄러움을 모르고 까마귀처럼 뻔뻔하며, 들이대고 우쭐하며 더러움에 물든 이는 살아가기가 쉬우니라. 부끄러움을 알고 늘 맑음을 찾으며, 달라붙지 않고 우쭐하지 않으며 깨끗하게 살아가는 보는 눈을 지닌 이는 살아가기가 어려우니라.

Sujīvaṁ ahirikena, kākasūrena dhaṁsinā; Pakkhandinā pagabbhena, saṅkiliṭṭhena jīvitaṁ. Hirīmatā ca dujjīvaṁ, niccaṁ sucigavesinā; Alīnenāppagabbhena, suddhājīvena passatā.

법구경 Dhammapada 244-245

배경

두 게송이 짝을 이루어 함께 읽어야 합니다. 이 짝의 정직함이 놀랍습니다. 뻔뻔하게 사는 쪽이 쉽다고 인정합니다. 수지왕(sujīvaṁ)은 '살기 쉬운'이고 둣지왕(dujjīvaṁ)은 '살기 어려운'입니다. 좋은 길이 쉽다고 하지 않습니다. 까까수라(kākasūra)는 '까마귀처럼 용감한'이라는 뜻으로, 남의 것을 아무렇지 않게 채 가는 뻔뻔함을 가리킵니다. 이 짝을 읽으면 왜 바르게 사는 일이 힘든지 알게 됩니다. 원래 힘든 쪽입니다. 힘들다고 해서 잘못 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묵상

바르게 하려니 손해 보는 것 같은 순간이 있었나요? 그 길이 원래 어려운 쪽이라는 걸 알면 조금 견딜 만할까요?

목숨을 죽이고 거짓을 말하며,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남의 배우자를 범하며, 술과 독한 것에 빠지는 사람은, 바로 이 세상에서 제 뿌리를 스스로 파내느니라. 사람이여, 이렇게 알지니라. 나쁜 일들은 다잡지 못한 데서 오나니, 탐냄과 그릇됨이 그대를 오래도록 괴로움에 몰아넣게 하지 말지니라.

Yo pāṇamatipāteti, musāvādañca bhāsati; Loke adinnamādiyati, paradārañca gacchati. Surāmerayapānañca, yo naro anuyuñjati; Idheva meso lokasmiṁ, mūlaṁ khaṇati attano. Evaṁ bho purisa jānāhi, pāpadhammā asaññatā; Mā taṁ lobho adhammo ca, ciraṁ dukkhāya randhayuṁ.

법구경 Dhammapada 246-248

배경

세 게송이 한 문장으로 이어져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앞의 둘이 다섯 가지를 늘어놓고 셋째가 맺습니다. 여기 나오는 다섯은 재가자가 지키는 다섯 계율의 반대입니다. 죽이지 않기, 주지 않은 것을 갖지 않기, 그릇된 관계를 맺지 않기, 거짓말하지 않기, 취하게 하는 것을 삼가기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그 결과를 그린 방식입니다. 물라(mūla)는 뿌리입니다. 벌을 받는다고 하지 않고 제 뿌리를 스스로 판다고 합니다. 나무가 제 뿌리를 파면 서 있을 수 없습니다. 남이 베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너지는 그림입니다.

묵상

다섯 가지 가운데 지금 나에게 가장 흔들리는 것이 있나요? 그것이 무엇을 파내고 있는지 보이나요?

사람은 믿는 만큼, 마음이 가는 만큼 베푸느니라. 그런데 남이 받는 밥과 마실 것에 언짢아하는 이는, 낮에도 밤에도 마음이 한곳에 모이지 않느니라. 그 마음이 끊어져 뿌리째 뽑힌 이는, 낮에도 밤에도 마음이 한곳에 모이느니라.

Dadāti ve yathāsaddhaṁ, yathāpasādanaṁ jano; Tattha yo ca maṅku bhavati, paresaṁ pānabhojane; Na so divā vā rattiṁ vā, samādhimadhigacchati. Yassa cetaṁ samucchinnaṁ, mūlaghaccaṁ samūhataṁ; Sa ve divā vā rattiṁ vā, samādhimadhigacchati.

법구경 Dhammapada 249-250

배경

두 게송이 짝을 이룹니다. 망꾸(maṅku)는 '언짢아하는, 뾰로통한'이라는 뜻입니다. 남이 더 좋은 것을 받는 것을 보고 속이 틀리는 마음입니다. 이 게송이 날카로운 까닭은 그 마음이 얼마나 작은지 짚으면서도 결과를 크게 놓기 때문입니다. 그 작은 시샘 하나로 밤낮 마음이 모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를 명예를 바라는 보시로 바꾸었는데, 그러면 시샘하는 사람이 아니라 뽐내는 사람의 이야기가 됩니다. 빠알리가 겨눈 것은 남이 받는 것을 못 견디는 마음입니다.

묵상

남이 더 좋은 것을 받을 때 속이 틀린 적이 있나요? 그 작은 마음이 하루를 얼마나 갉아먹었는지 헤아려 보면 어떨까요?

물듦과 같은 불이 없고 성냄과 같은 움켜쥠이 없으며, 어리석음과 같은 그물이 없고 목마름과 같은 강이 없느니라.

Natthi rāgasamo aggi, natthi dosasamo gaho; Natthi mohasamaṁ jālaṁ, natthi taṇhāsamā nadī.

법구경 Dhammapada 251

배경

네 가지에 각각 다른 비유가 붙었습니다. 물듦은 불이고, 성냄은 움켜쥠이며, 어리석음은 그물이고, 목마름은 강입니다. 비유가 정확합니다. 불은 태우고, 움켜쥔 손은 펴지지 않으며, 그물은 걸리고 나서야 알게 되고, 강은 끝없이 흐릅니다. 15품의 202게송과 앞 두 구가 같은데 뒤가 다릅니다. 거기서는 다섯 무더기와 고요를 들었고 여기서는 어리석음과 목마름을 들었습니다. 같은 틀을 다르게 채우는 것이 이 책의 방식입니다.

묵상

불, 움켜쥠, 그물, 강 가운데 지금 나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 무엇인가요?

남의 허물은 보기 쉬우나 제 허물은 보기 어려우니, 남의 허물은 겨를 까부르듯 흩날리면서 제 허물은 감추나니, 노름꾼이 나쁜 패를 숨기는 것과 같으니라.

Sudassaṁ vajjamaññesaṁ, attano pana duddasaṁ; Paresaṁ hi so vajjāni, opunāti yathā bhusaṁ; Attano pana chādeti, kaliṁva kitavā saṭho.

법구경 Dhammapada 252

배경

비유 두 개가 대비를 이룹니다. 겨를 까부르는 일은 바람에 날려 훤히 드러내는 일입니다. 노름꾼이 나쁜 패를 감추는 일은 그 반대입니다. 같은 사람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한다는 것이 이 게송의 그림입니다. 남의 것은 드러내고 내 것은 감춥니다. 눈여겨볼 것은 감추는 쪽에 노름꾼을 쓴 점입니다. 노름꾼이 패를 감추는 것은 이기려고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허물을 감추는 일도 이기려는 마음에서 나온다는 뜻이 됩니다. 4품 50게송에서 남의 잘못을 들추지 말라고 했던 대목과 이어집니다.

묵상

오늘 남의 허물을 몇 번 이야기했나요? 같은 시간에 내 허물은 몇 번 들여다보았나요?

늘 남의 허물을 살피고 흠잡을 생각을 지닌 이는, 번뇌만 늘어나 그것이 다하는 자리에서 멀어지느니라.

Paravajjānupassissa, niccaṁ ujjhānasaññino; Āsavā tassa vaḍḍhanti, ārā so āsavakkhayā.

법구경 Dhammapada 253

배경

앞 게송에서 남의 허물을 잘 본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 결과를 말합니다. 웃자나산닌(ujjhānasaññin)은 '흠잡을 생각을 품은'이라는 뜻입니다. 아사와(āsava)는 안으로 흘러들어 사람을 물들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남의 허물을 볼수록 내 안의 것이 늘어난다는 셈이 뜻밖입니다. 남을 판정하는 동안 스스로는 손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판정하는 눈이 익숙해지면 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아라(ārā)는 '멀리'입니다.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멀어진다고 못박습니다.

묵상

누군가를 자주 판정하고 있지는 않나요? 그 판정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을까요?

허공에는 발자국이 없고 이 길 밖에는 참된 수행자가 없느니라. 사람들은 부풀린 생각을 즐기나 여래에게는 부풀림이 없느니라.

Ākāseva padaṁ natthi, samaṇo natthi bāhire; Papañcābhiratā pajā, nippapañcā tathāgatā.

법구경 Dhammapada 254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부처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받은 이의 물음을 전합니다. 여러 스승 가운데 누가 참되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이 게송의 둘째 줄은 단호합니다. 다른 경에서 부처님은 여덟 갈래 길이 있는 곳에 참된 수행자가 있다고 풀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길을 가리킨 것입니다. 빠빤짜(papañca)는 '부풀림'으로, 하나의 일에서 생각이 끝없이 가지 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한역 법구경은 주어를 뒤집어 옮겨 이 단언이 흐려졌습니다.

묵상

작은 일 하나에서 생각이 끝없이 뻗어 나간 적이 있나요? 그 생각들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요, 만들어 낸 것인가요?

허공에는 발자국이 없고 이 길 밖에는 참된 수행자가 없느니라. 지어진 것은 영원하지 않으며 깨달은 이들에게는 흔들림이 없느니라.

Ākāseva padaṁ natthi, samaṇo natthi bāhire; Saṅkhārā sassatā natthi, natthi buddhānamiñjitaṁ.

법구경 Dhammapada 255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이자 앞 게송의 짝입니다. 앞 두 줄이 똑같고 뒤가 바뀝니다. 상카라 삿사따 낫티(saṅkhārā sassatā natthi)는 '지어진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뜻으로, 이 책 전체에 흐르는 생각을 한 줄로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흔들림이 없다고 합니다. 두 줄이 나란히 놓인 것이 뜻깊습니다. 모든 것이 변하는데 흔들리지 않는 이가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을 붙잡아서가 아니라 변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때를 다룬 이 품이 여기서 끝나는 것도 어울립니다. 흔들림이 없으면 일어날 먼지도 없습니다.

묵상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 불안한가요, 아니면 마음이 놓이나요? 지금 힘든 것도 변할 것이라면 어떨까요?

21 진리 위에 선 사람 15구절

무엇이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하는가 - 이름과 실제를 갈라 세운 열일곱 편

일을 성급하게 몰아 처리한다고 이치에 선 사람이 되지 않느니라. 이로움과 해로움 둘 다를 가려낼 줄 알아야 지혜로운 이니라.

Na tena hoti dhammaṭṭho, yenatthaṁ sāhasā naye; Yo ca atthaṁ anatthañca, ubho niccheyya paṇḍito.

법구경 Dhammapada 256

배경

담맛토(dhammaṭṭha)는 '법 위에 서 있는 이'라는 뜻으로, 이 품의 이름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재판을 맡은 관리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판정하는 자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사하사(sāhasa)는 '성급함, 우격다짐'입니다. 재판에서 성급함이 왜 문제일까요. 한쪽 말만 듣고 결론이 서기 때문입니다. 뒷줄이 그 짝을 이룹니다. 둘 다 가려내라고 합니다. 우보(ubho)는 '양쪽'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를 이익을 다투지 않는다로 바꾸어, 성급함을 짚던 말이 무욕을 권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묵상

누군가를 판단할 때 한쪽 이야기만 듣고 결론을 낸 적이 있나요? 다른 쪽을 마저 들었다면 달라졌을까요?

성급하지 않게 이치에 따라 고르게 남을 이끄는 이, 이치를 지키는 그 지혜로운 이를 이치에 선 사람이라 부르느니라.

Asāhasena dhammena, samena nayatī pare; Dhammassa gutto medhāvī, “dhammaṭṭho”ti pavuccati.

법구경 Dhammapada 257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앞에서 아닌 것을 말했으니 여기서 맞는 것을 말합니다. 이 품 전체가 이 방식으로 짜여 있습니다. 사메나(samena)는 '고르게, 치우침 없이'라는 뜻입니다. 담맛사 굿또(dhammassa gutto)는 '법의 지킴이'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법을 쓰는 이가 아니라 지키는 이라고 한 점입니다. 법을 도구로 쓰는 사람과 법을 지키는 사람은 다릅니다. 앞의 사람은 법을 자기 뜻대로 구부리고 뒤의 사람은 자기를 법에 맞춥니다.

묵상

규칙을 지키는 쪽과 규칙을 이용하는 쪽 가운데, 나는 어느 쪽에 가까울까요?

말을 많이 한다고 지혜로운 이가 되지 않느니라. 평온하고 원한 없으며 두려움 없는 이를 지혜로운 이라 부르느니라.

Na tena paṇḍito hoti, yāvatā bahu bhāsati; Khemī averī abhayo, “paṇḍito”ti pavuccati.

법구경 Dhammapada 258

배경

지혜의 표시로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평온함, 원한 없음, 두려움 없음입니다. 셋 다 아는 것과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입니다. 지식을 재는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케미(khemī)는 '안전한, 위험이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아는 것이 많아지면 대개 말이 늘고 논쟁이 늘고 지킬 것이 늘어납니다. 그런데 이 게송이 재는 것은 그 반대편입니다. 아는 것이 그 사람을 얼마나 편안하게 만들었느냐입니다. 배움의 결과를 마음의 상태로 재는 셈입니다.

묵상

많이 알게 되면서 마음이 편해졌나요, 아니면 지킬 것이 늘었나요?

말을 많이 한다고 가르침을 지닌 이가 되지 않느니라. 적게 듣더라도 가르침을 몸으로 보고, 가르침을 소홀히 하지 않는 이가 가르침을 지닌 이니라.

Na tāvatā dhammadharo, yāvatā bahu bhāsati; Yo ca appampi sutvāna, dhammaṁ kāyena passati; Sa ve dhammadharo hoti, yo dhammaṁ nappamajjati.

법구경 Dhammapada 259

배경

담마다라(dhammadhara)는 '가르침을 지닌 이'로, 당시에는 경전을 외워 전하는 사람을 가리켰습니다. 글이 없던 시절이라 사람이 곧 책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많이 외우는 것으로는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까예나 빳사띠(kāyena passati)는 '몸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눈으로도 머리로도 아니고 몸입니다. 겪어서 안다는 말입니다. 1품 마지막에서 남의 소를 세는 목동을 말했던 대목이 여기서 다시 나옵니다. 그때는 실천을 말했고 여기서는 몸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묵상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겪어 아는 것이 갈렸던 일이 있나요?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이었나요?

머리가 세었다고 어른이 되지 않느니라. 나이만 익은 이는 헛되이 늙었다 불리느니라.

Na tena thero so hoti, yenassa palitaṁ siro; Paripakko vayo tassa, “moghajiṇṇo”ti vuccati.

법구경 Dhammapada 260

배경

테라(thera)는 '나이 든 이, 어른'을 뜻하며 승가에서는 오래 수행한 이를 부르는 말입니다. 모가진노(moghajiṇṇa)는 '헛되이 늙은'이라는 뜻으로, 꽤 매서운 말입니다. 11품에서 배움이 적은 사람이 부림 소처럼 늙는다고 했던 것과 이어집니다. 시간은 저절로 흐르지만 그 시간이 무엇을 남기는지는 저절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빠리빡꼬 와요(paripakko vayo)는 '나이가 익었다'는 뜻인데, 익었다는 말이 열매에 쓰이는 말이라 더 아프게 들립니다. 익은 것은 나이뿐이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묵상

나이가 든다는 것이 저절로 무언가를 준다고 여겼나요? 지난 십 년 동안 나이 말고 무엇이 익었을까요?

진실과 이치가 있고 해치지 않음과 다스림과 삼감이 있는 이, 때를 벗은 그 지혜로운 이를 어른이라 부르느니라.

Yamhi saccañca dhammo ca, ahiṁsā saṁyamo damo; Sa ve vantamalo dhīro, “thero” iti pavuccati.

법구경 Dhammapada 261

배경

앞 게송의 짝으로, 어른의 조건 다섯 가지를 듭니다. 진실, 정의, 해치지 않음, 삼감, 다스림입니다. 나이가 없습니다. 젊어도 이것들을 갖추면 어른이라는 뜻이 됩니다. 다른 경에서 부처님은 나이 어린 이가 나이 많은 이에게 가르침을 편 일을 여러 번 인정하셨습니다. 완따말로(vantamalo)는 '때를 게워 낸'이라는 뜻으로, 앞 품의 이름과 이어집니다. 어른됨을 자리나 시간이 아니라 무엇을 덜어 냈느냐로 잰 셈입니다.

묵상

내가 어른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무엇을 갖추고 있나요? 나이 말고 다른 이유가 떠오르나요?

말솜씨만으로, 고운 얼굴만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나니, 시샘하고 인색하고 속임이 있는 이라면 더욱 그러하니라.

Na vākkaraṇamattena, vaṇṇapokkharatāya vā; Sādhurūpo naro hoti, issukī maccharī saṭho.

법구경 Dhammapada 262

배경

왁까라나(vākkaraṇa)는 '말을 다루는 솜씨'이고 완나뽁카라따(vaṇṇapokkharatā)는 '연꽃 같은 살빛', 곧 아름다운 겉모습입니다. 사두루빠(sādhurūpa)는 '훌륭해 보이는 모습'이라는 뜻이라, 이 게송은 보이는 것과 실제를 맞세우고 있습니다. 뒤에 든 셋이 구체적입니다. 시샘, 인색, 속임입니다. 모두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것들입니다. 말이 매끄럽고 인상이 좋으면 이 셋이 오래 가려집니다. 그래서 이 게송이 필요합니다.

묵상

겉으로 보기 좋은 사람에게 속은 적이 있나요? 반대로 나도 그렇게 보이려 애쓰고 있지는 않나요?

그것이 끊어지고 뿌리째 뽑힌 이, 허물을 벗은 그 지혜로운 이를 훌륭한 사람이라 부르느니라.

Yassa cetaṁ samucchinnaṁ, mūlaghaccaṁ samūhataṁ; Sa vantadoso medhāvī, “sādhurūpo”ti vuccati.

법구경 Dhammapada 263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물라갓짜(mūlaghacca)는 '뿌리째 끊긴'이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이 이 책에서 여러 번 나오는데, 늘 같은 것을 말합니다. 잎을 따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샘이나 인색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과 그 마음이 없는 것은 다릅니다. 앞의 것은 참는 것이고 뒤의 것은 뽑힌 것입니다. 참는 것은 힘이 빠지면 드러나고 뽑힌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완따도소(vantadosa)는 '허물을 게워 낸'입니다.

묵상

참고 있는 것과 없어진 것을 구별할 수 있나요? 힘들 때 다시 올라오는 것이 있다면 아직 참는 쪽일지도 모릅니다.

머리를 깎았다고 애쓰는 이가 되지 않나니, 지킬 것을 지키지 않고 거짓을 말하며 바람과 탐냄에 빠진 이가 어찌 애쓰는 이가 되겠느냐.

Na muṇḍakena samaṇo, abbato alikaṁ bhaṇaṁ; Icchālobhasamāpanno, samaṇo kiṁ bhavissati.

법구경 Dhammapada 264

배경

문다까(muṇḍaka)는 '까까머리'입니다. 출가의 표시로 머리를 깎는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겉모습이 그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는 이 품의 주제가 여기서 가장 직접적으로 나옵니다. 10품 141게송에서 벌거벗음과 진흙과 굶주림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지 못한다고 했던 것과 이어집니다. 그때는 고행이었고 여기서는 차림입니다. 압바또(abbata)는 '지킬 것을 지키지 않는'이라는 뜻입니다. 겉모습을 갖추기는 하루면 되지만 지키는 일은 매일입니다.

묵상

어떤 자리에 어울리는 겉모습을 갖추는 데 애쓴 적이 있나요? 그 안을 채우는 데는 얼마나 썼나요?

크고 작은 나쁜 일을 남김없이 가라앉힌 이, 나쁜 일을 가라앉혔기에 애쓰는 이라 부르느니라.

Yo ca sameti pāpāni, aṇuṁthūlāni sabbaso; Samitattā hi pāpānaṁ, “samaṇo”ti pavuccati.

법구경 Dhammapada 265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이 게송은 말놀이로 되어 있습니다. 사메띠(sameti, 가라앉히다)와 사마나(samaṇa, 애쓰는 이)의 소리가 겹칩니다. 가라앉혔기에 사마나라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름의 뿌리를 그 사람이 하는 일에서 찾은 셈입니다. 아눙 툴라니(aṇuṁ thūlāni)는 '작은 것과 큰 것'입니다. 2품 31게송에서도 크고 작은 얽매임을 함께 들었습니다. 큰 것만 다루면 작은 것이 남고, 작은 것이 남으면 다시 자랍니다.

묵상

큰 잘못은 조심하면서 작은 것은 넘어가고 있지는 않나요? 그 작은 것이 어디까지 자랄 수 있을까요?

남에게 빌어먹는다고 수행자가 되지 않느니라.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 지녀야 수행자이지 빌어먹는 것만으로는 아니니라.

Na tena bhikkhu so hoti, yāvatā bhikkhate pare; Vissaṁ dhammaṁ samādāya, bhikkhu hoti na tāvatā.

법구경 Dhammapada 266

배경

빅쿠(bhikkhu)는 본래 '빌어먹는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게송도 말놀이입니다. 빌어먹는다고 빌어먹는 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 셈입니다. 이름이 가리키는 겉모습과 그 이름에 값하는 실제를 갈라 놓았습니다. 이 품에 이런 말놀이가 거듭 나오는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이름은 붙이기 쉽습니다. 어른, 훌륭한 사람, 애쓰는 이, 수행자 같은 이름들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에 값하는 일은 붙이는 일과 전혀 다릅니다.

묵상

내가 가진 이름표 가운데 그 이름에 값하고 있는 것이 있나요? 값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모두 떨쳐 버리고 맑게 살아가며, 잘 헤아려 세상을 살아가는 이를 수행자라 부르느니라.

Yodha puññañca pāpañca, bāhetvā brahmacariyavā; Saṅkhāya loke carati, sa ve “bhikkhū”ti vuccati.

법구경 Dhammapada 267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여기서도 좋은 일과 나쁜 일을 함께 떨친다고 합니다. 3품 39게송과 6품에서도 나온 셈법입니다. 좋은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쌓아 자기 것으로 삼지 말라는 뜻입니다. 상카야(saṅkhāya)는 '헤아려서, 잘 재어 보고'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등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헤아리며 그 안을 걸어간다는 그림입니다. 이 품에서 반복해 온 물음이 여기서도 이어집니다.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묵상

좋은 일을 하고 나서 그것을 마음에 쌓아 둔 적이 있나요? 쌓아 두는 것과 그냥 하고 지나가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어리석고 모르는 이가 입을 다물었다고 성자가 되지 않느니라. 저울을 들어 재듯 가늠하여 좋은 것을 골라 쥐는 지혜로운 이, 나쁜 일을 피하기에 그가 성자이니 그래서 그를 성자라 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두루 헤아리기에 성자라 불리느니라.

Na monena munī hoti, mūḷharūpo aviddasu; Yo ca tulaṁva paggayha, varamādāya paṇḍito. Pāpāni parivajjeti, sa munī tena so muni; Yo munāti ubho loke, “muni” tena pavuccati.

법구경 Dhammapada 268-269

배경

두 게송이 한 문장으로 이어져 함께 읽어야 합니다. 모나(mona)는 침묵이고 무니(muni)는 성자인데, 두 낱말의 뿌리가 같습니다. 그래서 침묵한다고 성자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말놀이가 됩니다. 뒤에 나오는 무나띠(munāti)는 '헤아려 안다'는 뜻으로, 성자라는 이름의 다른 뿌리를 짚은 것입니다. 침묵이 아니라 헤아림이 성자를 만든다는 셈입니다. 저울 비유가 정확합니다. 저울은 무겁다 가볍다 말하지 않고 그저 잽니다. 말없이 하는 일이지만 침묵과는 다릅니다.

묵상

말을 아끼는 것과 헤아리는 것은 다릅니다. 나의 침묵은 재고 있는 침묵인가요, 그냥 비어 있는 침묵인가요?

산 것을 해친다면 고귀한 이가 되지 않느니라. 모든 산 것을 해치지 않아야 고귀한 이라 부르느니라.

Na tena ariyo hoti, yena pāṇāni hiṁsati; Ahiṁsā sabbapāṇānaṁ, “ariyo”ti pavuccati.

법구경 Dhammapada 270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어부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의 이름이 고귀하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름과 실제가 어긋난 예로 든 것입니다. 아리야(ariya)는 본래 혈통을 가리키던 말인데, 부처님은 그것을 행실을 가리키는 말로 바꾸어 쓰셨습니다. 26품이 그 뒤집기에 온전히 바쳐져 있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조건이 하지 않음이라는 점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천하를 두루 건진다는 적극적인 구제를 조건으로 삼았는데, 빠알리는 해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합니다.

묵상

좋은 일을 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드나요? 해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하나를 하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지켜야 할 것과 의례만으로도, 많이 배운 것만으로도, 마음을 모으는 힘을 얻은 것만으로도, 홀로 떨어져 지내는 것만으로도 ‘나는 보통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벗어남의 즐거움을 얻었다’ 하며 번뇌가 다하지 않았는데 안심에 머물러서는 안 되느니라.

Na sīlabbatamattena, bāhusaccena vā pana; Atha vā samādhilābhena, vivittasayanena vā. Phusāmi nekkhammasukhaṁ, aputhujjanasevitaṁ; Bhikkhu vissāsamāpādi, appatto āsavakkhayaṁ.

법구경 Dhammapada 271-272

배경

품의 마지막이자 두 게송이 한 문장입니다. 앞에서 네 가지를 들었는데 모두 좋은 것들입니다. 계율을 지키고, 많이 배우고, 마음을 모으고, 홀로 지내는 일입니다. 이 품에서 지금까지 아니라고 한 것들은 겉모습이었는데, 여기서는 진짜 수행을 들고도 아니라고 합니다. 위사사(vissāsa)는 '마음 놓음, 안심'입니다. 이만하면 되었다고 여기는 그 자리를 짚은 것입니다. 3품 40게송에서 이긴 자리에 눌러앉지 말라고 했던 대목과 이어집니다. 잘하고 있을 때가 가장 위험한 자리라는 것입니다.

묵상

이만하면 되었다고 여긴 순간이 있었나요?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시나요?

22 3구절

여래는 길을 가리킬 뿐 - 걷는 일은 그대의 몫이라는 열일곱 편

길 가운데 여덟 갈래 길이 으뜸이요 진리 가운데 네 마디가 으뜸이며, 가르침 가운데 물듦이 스러짐이 으뜸이요 두 발 가진 것 가운데 눈 밝은 이가 으뜸이니라.

Maggānaṭṭhaṅgiko seṭṭho, saccānaṁ caturo padā; Virāgo seṭṭho dhammānaṁ, dvipadānañca cakkhumā.

법구경 Dhammapada 273

배경

네 가지 으뜸을 늘어놓았습니다. 여덟 갈래 길은 바른 봄에서 바른 마음 모음까지 이어지는 길이고, 네 마디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위라가(virāga)는 '물듦이 스러짐'으로, 색이 바래듯 애착이 옅어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마지막 짝꾸마(cakkhumā)는 '눈을 가진 이'로, 깨달은 이를 부르는 말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뒤 두 구를 크게 바꾸었습니다. 물듦이 스러짐을 성적 절제로 좁혔고, 눈 밝은 이를 등불을 보시하면 눈을 얻는다는 이야기로 옮겼습니다. 이 품의 첫머리에 놓인 게송이라 무엇이 길인지를 먼저 못박은 셈입니다.

묵상

여러 길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고르시겠어요? 빠른 길일까요, 끝까지 가는 길일까요?

이것이 길이니 보는 눈이 맑아지는 데는 다른 길이 없느니라. 그대들은 이 길을 걸을지니, 사람을 붙드는 힘의 속임에서 벗어나게 되리라. 이 길을 걸으면 괴로움의 끝에 이르리니, 화살 뽑는 길을 알고서 내가 이 길을 일러 주었노라. 애쓰는 일은 그대들의 몫이요 여래는 길을 가리킬 뿐이니, 이 길을 걸어 마음을 모으는 이는 그 묶임에서 풀려나느니라.

Eseva maggo natthañño, Dassanassa visuddhiyā; Etañhi tumhe paṭipajjatha, Mārassetaṁ pamohanaṁ. Etañhi tumhe paṭipannā, dukkhassantaṁ karissatha; Akkhāto vo mayā maggo, aññāya sallakantanaṁ. Tumhehi kiccamātappaṁ, akkhātāro tathāgatā; Paṭipannā pamokkhanti, jhāyino mārabandhanā.

법구경 Dhammapada 274-276

배경

세 게송이 한 흐름이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이 품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 마지막 줄에 있습니다. 악카따로 따타가따(akkhātāro tathāgatā), 곧 '여래는 길을 가리키는 이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구해 주는 이가 아니라 가리키는 이라고 스스로를 한정한 것입니다. 애쓰는 몫은 듣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살라깐따나(sallakantana)는 '화살을 뽑아냄'입니다. 다른 경에서 부처님은 독화살에 맞은 사람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누가 쏘았는지 따지기 전에 화살을 뽑아야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한역 법구경은 내가 바른 길을 열었다는 선언을 앞세워 무게가 옮겨 갔습니다.

묵상

누가 나를 대신해 걸어 줄 수 없다는 말이 부담스럽나요, 아니면 힘이 되나요? 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일 수 있습니다.

‘지어진 모든 것은 덧없다’고 지혜로 볼 때, 괴로움에서 싫어져 떠나나니 이것이 맑아지는 길이니라.

“Sabbe saṅkhārā aniccā”ti, yadā paññāya passati; Atha nibbindati dukkhe, esa maggo visuddhiyā.

법구경 Dhammapada 277

배경

여기서부터 세 편이 세 가지 도장이라 불리는 것을 하나씩 다룹니다. 덧없음, 괴로움, 나라 할 것 없음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빤냐야 빳사띠(paññāya passati), 곧 '지혜로 본다'는 표현입니다. 듣거나 믿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일입니다. 꽃이 진다는 것을 아는 것은 지식이고, 지금 피어 있는 꽃에서 이미 짐을 보는 것이 이 봄입니다. 닙빈다띠(nibbindati)는 '싫어져 돌아선다'는 뜻인데, 미워한다는 말이 아니라 환상에서 깨어난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붙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손을 펴는 일입니다.

묵상

지금 곁에 있는 것이 언젠가 없어진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그것이 더 소중해지나요, 아니면 덜 소중해지나요?

23 변화와 괴로움, 나라는 생각은 어떻게 이어질까 1구절

세 가지 진리가 하나로 합쳐질 때 보이는 것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 모든 형성된 것은 괴로움이다. 모든 것은 나가 아니다.

Sabbe saṅkhārā aniccā … Sabbe saṅkhārā dukkhā … Sabbe dhammā anattā.

법구경 Dhammapada 277-279

배경

삼법인(三法印) - 불교를 불교이게 하는 세 가지 인장입니다. 무상·고·무아. 이 세 게송이 나란히 놓이면 하나의 논리가 드러납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무상), 변하는 것에 매달리니 괴롭고(고), 매달릴 고정된 주체도 없습니다(무아). 세 번째 게송에서 미묘한 차이에 주목하십시오 - 앞의 둘은 "형성된 것(saṅkhārā)"이라 하고, 세 번째만 "모든 것(sabbe dhammā)"이라 합니다. 무아는 조건 지어진 것뿐 아니라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열반)까지 포함합니다. 열반조차 "나의 것"이 아닙니다.

묵상

세 문장을 천천히 읽어보세요. 하나씩이 아니라 연결된 하나로. 변하니까 괴롭고, 괴로운 것에는 고정된 주인이 없습니다. 이 세 줄이 부처님 가르침의 DNA입니다.

24 조건 지어진 것과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 1구절

상카타(조건적)와 아상카타(비조건적) - 존재의 두 차원

모든 형성된 것는 무상하다. 모든 의지적 형성은 괴로움이다. 모든 것은 나가 아니다.

Sabbe saṅkhārā aniccā … Sabbe saṅkhārā dukkhā … Sabbe dhammā anattā.

법구경 Dhammapada 277-279

배경

이 여정의 마무리입니다. 앞 두 게송은 "상카라(saṅkhārā, 형성된 것)"라고 하고, 세 번째만 "담마(dhammā, 모든 것)"라고 합니다. 이 차이가 핵심입니다. 아닛짜와 두카는 조건 지어진 것에만 적용됩니다 - 열반은 무상하지도, 괴롭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무아(아나따)는 모든 담마 - 조건 지어진 것과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 모두 - 에 적용됩니다. 열반조차 "나의 것"이 아닙니다. 열반에 도달해도 "내가 열반을 얻었다"는 집착이 생기면 그것은 열반이 아닙니다. 마지막 집착까지 놓아야 합니다.

묵상

세 문장을 하나로 읽어보세요. 형성된 모든 것은 변하고, 괴롭고,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형성되지 않은 것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놓아줄 때,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수행의 끝입니다.

25 10구절

여래는 길을 가리킬 뿐 - 걷는 일은 그대의 몫이라는 열일곱 편

‘지어진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지혜로 볼 때, 괴로움에서 싫어져 떠나나니 이것이 맑아지는 길이니라.

“Sabbe saṅkhārā dukkhā”ti, yadā paññāya passati; Atha nibbindati dukkhe, esa maggo visuddhiyā.

법구경 Dhammapada 278

배경

앞 게송에서 덧없음이 괴로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둑카(dukkha)는 아픔이 아닙니다. 수레바퀴 축이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상태를 가리키던 말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만족스러움, 어긋남에 가깝습니다. 가장 즐거운 순간조차 그것이 지나간다는 점에서 이미 어긋나 있습니다. 앞 게송과 이 게송을 나란히 놓으면 순서가 보입니다. 덧없기 때문에 어긋납니다. 붙들 수 없는 것을 붙들려 하니 삐걱거립니다.

묵상

가장 좋았던 순간에도 어딘가 아쉬움이 있었나요? 그 아쉬움은 무엇이 부족해서였을까요?

‘모든 것에 나라 할 것이 없다’고 지혜로 볼 때, 괴로움에서 싫어져 떠나나니 이것이 맑아지는 길이니라.

“Sabbe dhammā anattā”ti, yadā paññāya passati; Atha nibbindati dukkhe, esa maggo visuddhiyā.

법구경 Dhammapada 279

배경

세 편의 마지막입니다. 앞의 둘에서는 상카라(지어진 것)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담마(모든 것)로 낱말이 바뀝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지어진 것에는 조건에 기대어 생긴 것만 들어가지만, 담마에는 열반까지 들어갑니다. 그러니 나라 할 것 없음은 예외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아낫따(anattā)는 '나라 할 것이 없음'입니다. 내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변하지 않고 홀로 서 있는 알맹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세 편을 차례로 읽으면 하나의 흐름이 됩니다. 덧없고, 그래서 어긋나며, 붙잡을 알맹이가 없습니다.

묵상

십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가운데 그대로인 것이 있나요? 그대로가 아니라면 무엇을 나라고 부르고 있는 걸까요?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나지 않고 젊고 힘이 있으면서 게으름에 빠지며, 마음먹은 것이 주저앉아 굼뜬 이는, 지혜로 길을 찾지 못하느니라.

Uṭṭhānakālamhi anuṭṭhahāno, Yuvā balī ālasiyaṁ upeto; Saṁsannasaṅkappamano kusīto, Paññāya maggaṁ alaso na vindati.

법구경 Dhammapada 280

배경

웃타나깔람히(uṭṭhānakālamhi)는 '일어날 때에'라는 뜻입니다.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젊고 힘이 있다고 못박은 점입니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산나상깝빠(saṁsannasaṅkappa)는 '가라앉아 버린 결심'을 뜻합니다. 결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었는데 주저앉은 상태입니다. 이 그림이 실감납니다. 우리는 대개 마음먹지 못해서가 아니라 마음먹은 것이 가라앉아서 못 합니다. 이 품이 길을 말하는 품이라 여기서 걷지 않는 사람을 짚은 셈입니다.

묵상

마음먹었다가 가라앉은 일이 있나요? 그것을 다시 세우는 데 필요한 것은 새로운 결심일까요, 아니면 아주 작은 첫걸음일까요?

말을 지키고 마음을 잘 다스리며, 몸으로도 나쁜 짓을 하지 않아 이 세 갈래 행위의 길을 맑게 하여, 성인들이 일러 준 길을 이룰지니라.

Vācānurakkhī manasā susaṁvuto, Kāyena ca nākusalaṁ kayirā; Ete tayo kammapathe visodhaye, Ārādhaye maggamisippaveditaṁ.

법구경 Dhammapada 281

배경

원문의 '행위의 길'이라는 말은 말과 마음과 몸 세 갈래를 가리킵니다. 17품에서 몸과 말과 마음을 차례로 다룬 대목과 같은 짜임인데, 여기서는 순서가 다릅니다. 말이 먼저 나옵니다. 말을 지키는 일이 가장 자주 마주치는 자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게송이 이 품에 있는 까닭은 길을 걷는 방법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앞 게송이 걷지 않는 사람을 그렸으니 여기서는 걷는 방법을 놓았습니다. 특별한 수행이 아니라 말과 마음과 몸을 맑게 하는 일입니다.

묵상

말과 마음과 몸 가운데 오늘 가장 흐려진 것은 무엇인가요? 하나만 맑게 한다면 어디부터 손대시겠어요?

힘써 닦으면 너른 지혜가 생기고 닦지 않으면 지혜가 스러지나니, 자라남과 스러짐 이 두 갈래를 알고서, 지혜가 자라는 쪽으로 자기를 세울지니라.

Yogā ve jāyatī bhūri, ayogā bhūrisaṅkhayo; Etaṁ dvedhāpathaṁ ñatvā, bhavāya vibhavāya ca; Tathāttānaṁ niveseyya, yathā bhūri pavaḍḍhati.

법구경 Dhammapada 282

배경

부리(bhūri)는 '너른 땅'을 뜻하는 말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지혜를 가리킬 때도 넓게 트인 앎이라는 결이 있습니다. 요가(yoga)는 여기서 '매어 붙임, 힘써 닦음'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지혜가 가만두면 스러진다고 한 점입니다. 한 번 얻으면 남는 것이 아니라 물처럼 마릅니다. 18품 241게송에서 외운 것의 때가 되풀이하지 않음이라고 했던 것과 이어집니다. 마지막 줄은 실용적입니다. 두 길을 알았으면 자라는 쪽에 자기를 놓으라고 합니다. 애쓰라는 말보다 자리를 옮기라는 말에 가깝습니다.

묵상

나를 자라게 하는 자리와 스러지게 하는 자리가 각각 어디인가요? 오늘은 어느 쪽에 더 오래 있었나요?

숲을 베어 내라, 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 숲에서 두려움이 생기느니라. 숲과 덤불을 함께 베어 숲 없는 이가 될지니라. 남자가 여인에게 두는 덤불이 털끝만큼이라도 베이지 않는 한, 젖 먹는 송아지가 어미에게 매여 있듯 그만큼 마음이 매여 있느니라.

Vanaṁ chindatha mā rukkhaṁ, vanato jāyate bhayaṁ; Chetvā vanañca vanathañca, nibbanā hotha bhikkhavo. Yāva hi vanatho na chijjati, Aṇumattopi narassa nārisu; Paṭibaddhamanova tāva so, Vaccho khīrapakova mātari.

법구경 Dhammapada 283-284

배경

두 게송이 이어져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앞 게송은 말놀이입니다. 와나(vana)는 숲이면서 욕망을 뜻하는 말과 소리가 겹칩니다. 그래서 숲을 베라는 말이 곧 욕망을 베라는 말이 됩니다. 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 숲이라고 한 것은 하나씩 손대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뒤 게송이 그 숲이 무엇인지 밝힙니다. 다만 여기서 대상을 남자와 여인으로 좁혀 놓았는데, 이는 출가한 남성 수행자를 앞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자리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오늘 읽을 때는 누구든 놓지 못하는 것으로 넓혀 읽는 편이 뜻에 맞습니다.

묵상

털끝만큼 남겨 둔 것이 있나요? 다 정리한 줄 알았는데 아주 조금 남겨 둔 그것이 무엇인지 떠올려 보세요.

가을 연꽃을 손으로 뽑아내듯 제 애착을 잘라 낼지니라. 고요로 가는 길만을 닦을지니, 깨달은 이가 일러 주신 열반의 길이니라.

Ucchinda sinehamattano, Kumudaṁ sāradikaṁva pāṇinā; Santimaggameva brūhaya, Nibbānaṁ sugatena desitaṁ.

법구경 Dhammapada 285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금세공을 하던 이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다루던 사람에게 아름다운 것을 뽑는 비유를 쓰신 셈입니다. 시네하(sineha)는 '기름기, 끈끈함'을 뜻하는 말에서 왔습니다. 애착이 어디에 들러붙는 성질을 지녔음을 그 낱말이 보여 줍니다. 눈여겨볼 것은 잘라 내라고만 하지 않고 곧바로 닦으라고 한 점입니다. 브루하야(brūhaya)는 '길러 내라'입니다. 비우는 일과 채우는 일이 나란히 놓였습니다. 무언가를 놓기만 하면 그 자리가 비어 다른 것이 들어옵니다.

묵상

무언가를 끊기만 하고 그 자리를 비워 둔 적이 있나요? 그 빈자리에 무엇이 들어왔나요?

‘여기서 우기를 나고 여기서 겨울과 여름을 나리라’ 하며 어리석은 이는 그렇게 헤아리면서도 닥쳐올 일은 알지 못하느니라.

Idha vassaṁ vasissāmi, idha hemantagimhisu; Iti bālo vicinteti, antarāyaṁ na bujjhati.

법구경 Dhammapada 286

배경

인도의 한 해는 우기와 겨울과 여름 셋으로 나뉩니다. 그러니 이 게송은 한 해 계획을 세우는 사람을 그린 것입니다.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안따라야(antarāya)는 '사이에 끼어드는 것, 가로막는 일'이라는 뜻으로, 계획 사이에 무엇이 끼어들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장사 준비를 마치고 떠나려던 상인이 그 전에 세상을 떠난 일을 전합니다. 이 게송이 겨눈 것은 계획이 아니라 계획이 그대로 되리라는 믿음입니다.

묵상

내년 계획을 세우고 있나요? 그 계획이 어긋날 수 있다는 것을 셈에 넣어 두었나요?

자식과 재물에 빠져 마음을 빼앗긴 사람을, 잠든 마을을 큰물이 쓸어 가듯 죽음이 데려가느니라.

Taṁ puttapasusammattaṁ, byāsattamanasaṁ naraṁ; Suttaṁ gāmaṁ mahoghova, maccu ādāya gacchati.

법구경 Dhammapada 287

배경

4품 47게송과 같은 비유가 다시 나옵니다. 거기서는 꽃을 따 모으는 사람이었고 여기서는 자식과 가축에 빠진 사람입니다. 빠수(pasu)는 가축으로, 당시에는 재산을 뜻했습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끼사고따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아이를 잃고 약을 구하러 다니던 그 여인입니다. 그 배경을 알고 읽으면 이 게송이 나무람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영원하리라 여기는 그 잠듦을 짚은 것입니다.

묵상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사랑하는 일과, 잃지 않으리라 여기며 사랑하는 일은 어떻게 다를까요?

자식도 아버지도 친척도 막아 주지 못하나니, 죽음에 붙들린 이에게는 피붙이 가운데도 기댈 데가 없느니라. 이 이치를 알고서 지혜로운 이는 됨됨이를 지키며, 열반으로 가는 길을 서둘러 닦을지니라.

Na santi puttā tāṇāya, na pitā nāpi bandhavā; Antakenādhipannassa, natthi ñātīsu tāṇatā. Etamatthavasaṁ ñatvā, paṇḍito sīlasaṁvuto; Nibbānagamanaṁ maggaṁ, khippameva visodhaye.

법구경 Dhammapada 288-289

배경

품의 마지막이자 두 게송이 한 흐름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빠따짜라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남편과 두 아이와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여인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가족이 소용없다는 냉정한 선언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은 사람 앞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따나(tāṇa)는 '막아 주는 것, 피난처'입니다. 가족이 사랑스럽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는 막아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무엇을 하라고 잇습니다. 이 품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어울립니다. 막아 줄 것이 없으니 길을 걸으라는 말입니다.

묵상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언제 알게 되었나요? 그 앎이 나를 외롭게 했나요, 아니면 일어서게 했나요?

26 여러 가지 16구절

작은 것을 버려야 큰 것이 보인다는 첫 게송에서 홀로 지내는 기쁨까지 - 한 갈래로 묶이지 않는 열여섯 편

작은 행복을 버려서 큰 행복을 볼 수 있다면, 지혜로운 이는 그 큰 행복을 똑똑히 보며 작은 행복을 버리느니라.

Mattāsukhapariccāgā, passe ce vipulaṁ sukhaṁ; Caje mattāsukhaṁ dhīro, sampassaṁ vipulaṁ sukhaṁ.

법구경 Dhammapada 290

배경

맛따수카(mattāsukha)는 '작은 만큼의 행복'이라는 뜻이고, 위뿔라수카(vipulasukha)는 그와 맞선 '넉넉한 행복'입니다. 이 게송은 15품에서 다룬 행복의 문제를 다시 엽니다. 다만 거기서는 행복의 종류를 갈랐고 여기서는 행복의 크기를 견줍니다. 지금 손에 쥔 작은 행복을 놓아야 큰 행복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두 행복을 나란히 놓고 저울질하라는 말이 아니라, 작은 쪽을 붙든 손을 먼저 펴야 큰 쪽이 눈에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21품은 이렇게 하나의 흐름으로 묶이지 않는 낱개의 가르침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이 품의 이름 '여러 가지'가 뜻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묵상

지금 붙들고 있는 작은 행복이, 어쩌면 더 큰 무언가를 보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잠깐 손을 펴 보면 무엇이 보일까요?

남의 괴로움을 딛고서 제 행복을 바라는 이는 원한과 얽히고 얽혀 그 원한에서 벗어나지 못하느니라.

Paradukkhūpadhānena, attano sukhamicchati; Verasaṁsaggasaṁsaṭṭho, verā so na parimuccati.

법구경 Dhammapada 291

배경

웨라(vera)는 '원한'입니다. 웨라상가상삿토(verasaṁsaggasaṁsaṭṭho)는 그 원한과 '얽히고 얽혀 있음'을 가리킵니다. 원한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서로 주고받으며 이어진다는 그림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닭의 알을 먹던 한 여인이 여러 생에 걸쳐 상대를 바꾸어 가며 원한을 주고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내 행복을 위해 남에게 고통을 지우면 그 자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상대도 되갚을 마음을 품게 되고, 그 마음이 다시 나에게 돌아옵니다. 그래서 이 게송은 원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벗어나는 길을 따로 말하지 않은 것은, 애초에 그 얽힘을 만들지 않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묵상

누군가를 딛고 서야 내가 편해지는 자리가 있다면, 그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다른 방식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요?

해야 할 일을 내던지고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오히려 한다면, 거만하고 흐트러진 그런 이는 번뇌가 늘어나느니라.

Yañhi kiccaṁ apaviddhaṁ, akiccaṁ pana karīyati; Unnaḷānaṁ pamattānaṁ, tesaṁ vaḍḍhanti āsavā.

법구경 Dhammapada 292

배경

이 게송과 다음 게송은 짝을 이룹니다. 여기서는 그르친 경우를, 다음에서는 바로 선 경우를 말합니다. 운날라(unnaḷa)는 '거만한'이라는 뜻으로, 속이 빈 줄기처럼 허세만 찬 상태를 가리킵니다. 해야 할 일을 내던지고 하지 않아도 될 일에 매달리는 사람의 속을 짚은 낱말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아사와(āsava, 흘러드는 것)가 늘어난다고 합니다. 아사와는 겉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새어 나오는 오염을 가리키는 말로, 이 책 여러 자리에서 되풀이해 나옵니다. 무엇을 하느냐 못지않게 무엇을 미루고 있느냐가 그 사람 안에서 무엇이 자라는지를 정한다는 것입니다.

묵상

해야 할 일을 미뤄 두고 다른 일에 매달린 요즘이 있나요? 그 미룸이 마음 안에서 무엇을 자라게 하고 있을지 궁금해지네요.

몸을 향한 알아차림이 늘 잘 세워진 이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가까이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꾸준히 행하나니, 알아차리고 또렷이 아는 이에게는 번뇌가 사라지느니라.

Yesañca susamāraddhā, niccaṁ kāyagatā sati; Akiccaṁ te na sevanti, kicce sātaccakārino; Satānaṁ sampajānānaṁ, atthaṁ gacchanti āsavā.

법구경 Dhammapada 293

배경

앞 게송의 짝으로, 여기서는 반대의 경우를 말합니다. 카야가따 사띠(kāyagatā sati)는 '몸을 향한 마음챙김'으로, 뒤에 나오는 299게송에서도 그대로 다시 나옵니다. 몸에 마음을 붙들어 두는 것이 흐트러짐을 막는 첫 자리라는 뜻입니다. 사따낭 삼빠자나낭(satānaṁ sampajānānaṁ)은 '마음챙기고 또렷이 아는 이들에게는'이라는 뜻인데, 앞 게송의 흐트러진 이들과 정확히 맞섭니다. 앞에서는 아사와가 늘어난다고 했고 여기서는 아사와가 사라진다고 합니다. 늘고 주는 것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무엇에 마음을 붙들어 두었느냐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묵상

무엇을 아느냐보다 무엇에 마음을 붙들어 두었느냐를 물어본 적 있나요? 오늘 하루, 내 마음은 주로 어디에 가 있었나요?

어머니를 죽이고 아버지를 죽이고 두 무사 계급의 왕을 죽이고, 나라를 그 신하와 함께 멸하고도 바라문은 근심 없이 나아가느니라.

Mātaraṁ pitaraṁ hantvā, rājāno dve ca khattiye; Raṭṭhaṁ sānucaraṁ hantvā, anīgho yāti brāhmaṇo.

법구경 Dhammapada 294

배경

이 게송은 법구경에서 가장 거친 말로 되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살인과 정복을 두둔하는 말이 되는데, 그렇게 읽는 전통은 없습니다. 다음 게송이 그 까닭을 보여 줍니다. 거기서는 '호랑이 같은 다섯째'를 죽인다고 하는데, 이것은 문자 그대로 읽을 수가 없습니다. 두 게송이 같은 틀의 짝이므로 앞의 것도 같은 층위에서 읽어야 합니다. 옛 주석은 하나씩 짚어 놓았습니다. 어머니는 다시 태어나게 하는 목마름이고, 아버지는 '나'라고 여기는 자만이며, 두 왕은 한쪽으로 치우친 두 가지 견해이고, 나라와 그 신하는 감각이 닿는 자리와 거기 들러붙은 즐김입니다. 그러니 이 게송이 말하는 것은 안에서 끊어야 할 것들의 목록입니다. 한역 법구경이 이 자리를 한 겹 눅여 옮기고 아버지를 아예 지운 것도 이 표현이 그만큼 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라문은 신분이 아니라 안이 온전히 씻긴 사람을 가리킵니다.

묵상

가장 끊기 어려운 것에 이름을 붙인다면 무엇이 될까요? 목마름일까요, 나라는 자만일까요, 아니면 오래 붙들어 온 어떤 생각일까요?

어머니를 죽이고 아버지를 죽이고 학식 있는 왕 둘을 죽이고, 호랑이 같은 다섯째를 죽이고도 바라문은 근심 없이 나아가느니라.

Mātaraṁ pitaraṁ hantvā, rājāno dve ca sotthiye; Veyagghapañcamaṁ hantvā, anīgho yāti brāhmaṇo.

법구경 Dhammapada 295

배경

앞 게송과 같은 틀에 다른 낱말을 넣은 짝입니다. 이번에는 두 왕 대신 '학식 있는 이 둘'을 죽이고, 다섯째로 호랑이를 죽인다고 합니다. 웨약가빤짜망(veyagghapañcamaṁ)은 '호랑이 같은 다섯째'라는 뜻으로, 앞 게송의 신하 딸린 나라 대신 들어온 자리입니다. 주석 전통에서는 이 다섯째 자리를 다섯 장애에 빗대어 읽어 왔습니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다섯 가지가 호랑이처럼 사나운 것으로 그려진 셈입니다. 같은 형식을 두 번 거듭 쓰는 것은 이 품 곳곳에서 보이는 방식으로, 하나의 충격이 우연이 아니라 자리 잡은 가르침임을 확인시킵니다.

묵상

다섯 번째로 든 것이 나에게는 무엇에 가까울까요? 가장 사납게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부터 하나씩 짚어 볼 수 있을까요?

고타마의 제자들은 늘 온전히 깨어 있나니, 그들에게는 낮에도 밤에도 늘 부처님을 향한 알아차림이 있느니라.

Suppabuddhaṁ pabujjhanti, sadā gotamasāvakā; Yesaṁ divā ca ratto ca, niccaṁ buddhagatā sati.

법구경 Dhammapada 296

배경

수빠붓당(suppabuddhaṁ)은 '온전히 깨어난'이라는 뜻으로, 앞서 여러 자리에서 쓰인 '깨어 있음'과 같은 자리를 다른 낱말로 짚은 것입니다. 이 게송부터 301게송까지 여섯 편은 같은 틀에 마지막 한 낱말만 바꾸어 거듭됩니다. 고타마사와까(gotamasāvakā, 고타마의 제자들)라는 표현도 눈에 띕니다. 법구경은 대개 부처님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데, 여기서는 직접 이름을 불러 그 제자 됨을 또렷이 합니다. 첫 자리에 놓인 것은 부처님을 향한 마음챙김입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정해진 시간에만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바탕에 늘 놓아 둔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묵상

낮에도 밤에도 마음 한구석에 늘 놓아 두는 것이 있나요? 그것이 지금 나를 어디로 이끌고 있을까요?

고타마의 제자들은 늘 온전히 깨어 있나니, 그들에게는 낮에도 밤에도 늘 가르침을 향한 알아차림이 있느니라.

Suppabuddhaṁ pabujjhanti, sadā gotamasāvakā; Yesaṁ divā ca ratto ca, niccaṁ dhammagatā sati.

법구경 Dhammapada 297

배경

앞 게송과 같은 틀에서 마지막 낱말만 담마가따 사띠(dhammagatā sati, 가르침을 향한 마음챙김)로 바뀌었습니다. 14품에서 깨달은 이와 가르침과 무리를 의지처로 삼는다고 했던 자리와 이어지는 대목입니다. 다만 거기서는 의지처로 삼아 네 가지 진리를 본다는 데까지 나아갔고, 여기서는 그 대상을 낮이나 밤이나 놓지 않는 마음가짐 자체를 말합니다. 의지하는 것과 마음에 늘 두는 것은 다른 결의 일입니다. 가르침을 배우는 것과 가르침을 늘 마음에 놓아 두는 것 사이에도 그런 결의 차이가 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묵상

배운 가르침을 마음에 늘 놓아 두는 것과, 필요할 때만 꺼내 쓰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나는 어느 쪽에 가까운가요?

고타마의 제자들은 늘 온전히 깨어 있나니, 그들에게는 낮에도 밤에도 늘 승가를 향한 알아차림이 있느니라.

Suppabuddhaṁ pabujjhanti, sadā gotamasāvakā; Yesaṁ divā ca ratto ca, niccaṁ saṅghagatā sati.

법구경 Dhammapada 298

배경

세 번째로는 상가가따 사띠(saṅghagatā sati, 승가를 향한 마음챙김)가 놓였습니다. 승가는 낱낱의 수행자가 아니라 그들이 이룬 무리 전체를 가리킵니다. 앞의 두 게송이 깨달은 이와 그 가르침이라는, 한 사람과 한 가르침을 향했다면 여기서는 그것을 함께 살아가는 여럿을 향합니다. 홀로 애쓰는 일과 무리 안에서 애쓰는 일이 함께 마음에 놓여 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305게송이 이 품의 끝에서 홀로 지내는 즐거움을 노래하는 것과 견주어 보면, 이 품이 혼자 있음과 함께 있음을 어느 한쪽으로 몰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묵상

혼자 애쓰는 시간과 함께 애쓰는 이들을 마음에 두는 시간, 요즘 어느 쪽이 더 많은가요? 둘 사이에 균형이 있나요?

고타마의 제자들은 늘 온전히 깨어 있나니, 그들에게는 낮에도 밤에도 늘 몸을 향한 알아차림이 있느니라.

Suppabuddhaṁ pabujjhanti, sadā gotamasāvakā; Yesaṁ divā ca ratto ca, niccaṁ kāyagatā sati.

법구경 Dhammapada 299

배경

네 번째는 293게송에서 이미 나온 카야가따 사띠(kāyagatā sati, 몸을 향한 마음챙김)입니다. 그때는 그것이 잘 세워진 이에게 아사와가 사라진다고 했고, 여기서는 그것을 낮과 밤 가리지 않고 지니는 고타마의 제자들을 말합니다. 몸은 이 여섯 게송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 밖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대상입니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무리를 향하던 마음챙김이 여기서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옵니다. 밖을 향한 마음과 안을 향한 마음이 번갈아 놓이며, 어느 하나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묵상

밖으로 향하던 마음이 다시 몸으로 돌아오는 순간을 느껴 본 적 있나요? 지금 이 순간, 내 몸은 어떤 상태인가요?

고타마의 제자들은 늘 온전히 깨어 있나니, 그들에게는 낮에도 밤에도 남을 해치지 않음을 즐기는 마음이 있느니라.

Suppabuddhaṁ pabujjhanti, sadā gotamasāvakā; Yesaṁ divā ca ratto ca, ahiṁsāya rato mano.

법구경 Dhammapada 300

배경

다섯 번째는 앞의 넷과 결이 다릅니다. 앞의 넷이 무엇을 마음에 두느냐를 말했다면 여기서는 무엇을 즐기느냐를 말합니다. 아힝사(ahiṁsā)는 '해치지 않음'으로, 10품 전체가 이 낱말 하나를 두고 펼쳐졌던 것을 기억한다면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그 품에서는 막대기를 든 손과 매 맞는 목숨을 자리에 놓고 물었고, 여기서는 그 결론만 짧게 되짚습니다. 라또 마노(rato mano)는 '즐기는 마음'이라는 뜻인데, 참는 마음이 아니라 즐기는 마음이라 한 것이 눈에 띕니다. 해치지 않는 일이 억누름이 아니라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묵상

해치지 않는 일이 참는 일이 아니라 즐기는 일이 될 수 있을까요? 그 차이를 나는 실제로 느껴 본 적이 있나요?

고타마의 제자들은 늘 온전히 깨어 있나니, 그들에게는 낮에도 밤에도 닦음을 즐기는 마음이 있느니라.

Suppabuddhaṁ pabujjhanti, sadā gotamasāvakā; Yesaṁ divā ca ratto ca, bhāvanāya rato mano.

법구경 Dhammapada 301

배경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은 바와나야 라또 마노(bhāvanāya rato mano), '닦음을 즐기는 마음'입니다. 앞의 다섯이 저마다 다른 대상을 향한 마음챙김이었다면 이것은 그 마음챙김을 닦아 나가는 일 자체를 즐긴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게송은 앞의 다섯을 마무리 짓는 자리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향하든 마음챙김은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거듭 닦아야 하는 일이라는 뜻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여섯 게송을 나란히 놓고 보면, 밖으로는 부처님과 가르침과 무리를, 안으로는 몸과 해치지 않음과 닦음 자체를 고르게 마음에 두라는 그림이 완성됩니다.

묵상

닦아 나가는 과정 자체를 즐긴 적이 있나요, 아니면 늘 결과만 바라보았나요? 오늘 그 과정에서 무엇을 즐길 수 있을까요?

출가하기도 어렵고 그 삶을 즐기기도 어려우며, 살림살이도 살아가기 괴로우니라. 맞지 않는 이와 함께 사는 것도 괴롭고 괴로움에 쫓기며 길 떠도는 것도 괴로우니, 그러므로 길 떠도는 자가 되지 말고 괴로움에 쫓기는 자가 되지 말지니라.

Duppabbajjaṁ durabhiramaṁ, Durāvāsā gharā dukhā; Dukkhosamānasaṁvāso, Dukkhānupatitaddhagū; Tasmā na caddhagū siyā, Na ca dukkhānupatito siyā.

법구경 Dhammapada 302

배경

두빱바장(duppabbajjaṁ)은 '출가하기 어려움'이고 두라와사(durāvāsā)는 '살아가기 어려운 살림살이'입니다. 두 낱말을 나란히 놓아 어느 쪽에도 쉬운 길이 없다고 말합니다. 팔리의 끝은 '그러니 길 떠도는 자가 되지 말고 괴로움에 쫓기는 자가 되지 말라'는 권고로 맺습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어려움 가운데 존재보다 더한 것이 없다'는 교리적 단정으로 바꾸었습니다. 무엇을 하라던 말이 무엇이 어떻다는 말로 바뀐 셈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숲에서 홀로 지내기를 힘겨워하던 왓지 출신 수행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어느 쪽에도 쉬운 자리가 없다면, 남은 것은 그 어려움을 마주하는 태도뿐일지 모릅니다.

묵상

이쪽도 저쪽도 쉽지 않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나요? 그럴 때 나는 무엇을 붙들고 그 어려움을 마주해 왔나요?

믿음이 있고 됨됨이를 갖춘 이는 명예와 재물을 두루 갖추나니, 어느 곳을 가더라도 바로 그곳에서 존경받느니라.

Saddho sīlena sampanno, yasobhogasamappito; Yaṁ yaṁ padesaṁ bhajati, tattha tattheva pūjito.

법구경 Dhammapada 303

배경

삿도(saddho)는 '믿음이 있는'이고 실라(sīla)는 몸에 밴 됨됨이입니다. 두 가지에 명예와 재물까지 더해 네 가지를 나란히 놓았습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주인공으로 재가 신자 찟따 장자를 전합니다. 그는 여러 경에서 가르침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뛰어난 재가자로 이름났던 인물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를 가든 존경받는다는 것은 그저 좋은 평판을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야소보가사맙비또(yasobhogasamappito)는 '명예와 재물을 두루 갖춘'이라는 뜻인데, 이 게송은 그것을 목표로 내걸지 않습니다. 믿음과 됨됨이가 먼저 놓이고 명예와 재물은 그 뒤에 따라오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묵상

명예와 재물을 얻는 데 먼저 힘썼을 때와, 믿음과 됨됨이를 먼저 갖추었을 때는 어떻게 달랐나요? 그 차이를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참된 이는 멀리서도 히말라야 산처럼 환히 드러나고, 참되지 못한 이는 밤에 쏘아진 화살처럼 보이지 않느니라.

Dūre santo pakāsenti, himavantova pabbato; Asantettha na dissanti, rattiṁ khittā yathā sarā.

법구경 Dhammapada 304

배경

산또(santo)는 '참된 이들'이고 아산따(asanta)는 그 반대입니다. 히말라야 산과 밤에 쏘아진 화살이라는 두 비유가 정확히 맞섭니다. 산은 멀리서도 드러나고 화살은 가까이 있어도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아나타삔디까 장자의 딸 쭐라수받다가 시집간 집안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됨됨이를 드러내 보인 이야기를 전합니다. 참됨은 스스로 나서서 알리지 않아도 드러난다는 것이 이 게송의 요지입니다. 19품에서 다룬 겉모습과 실제의 문제가 여기서는 시간과 거리의 문제로 다시 놓입니다. 가까이 오래 두고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참됨이라는 것입니다.

묵상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것이 있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나에게도 그런 것이 있을까요?

홀로 앉고 홀로 누우며 게으르지 않게 살아가고, 홀로 자신을 다스리며 숲속에서 즐거이 지낼지니라.

Ekāsanaṁ ekaseyyaṁ, eko caramatandito; Eko damayamattānaṁ, vanante ramito siyā.

법구경 Dhammapada 305

배경

에까사낭 에까세이양(ekāsanaṁ ekaseyyaṁ)은 '홀로 앉고 홀로 누움'이라는 뜻으로, 에까(eka, 홀로)가 네 줄에 걸쳐 거듭 나옵니다. 이 되풀이 자체가 게송의 뜻을 이미 보여 줍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홀로 지내기를 즐겨 하던 한 장로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다마야맛따낭(damayamattānaṁ)은 '자신을 다스리며'라는 뜻인데, 12품에서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라고 했던 것과 이어집니다. 이 품의 마지막 자리에 홀로 있음이 놓인 것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298게송에서는 승가, 곧 함께 있음을 향한 마음챙김을 말했는데, 품의 끝에서는 홀로 있음의 즐거움으로 맺습니다. 둘 사이에 우열을 매기지 않고 나란히 놓아 둔 셈입니다.

묵상

함께 있음과 홀로 있음, 지금 나에게 더 필요한 쪽은 어느 쪽일까요? 둘 중 하나를 억지로 고를 필요가 있을까요?

27 괴로운 곳 14구절

괴로운 곳은 누가 내리는 벌이 아니라 스스로 지은 일과 삐뚤어진 견해가 만들어 내는 자리다

거짓을 말하는 이는 괴로운 곳에 떨어지고 해 놓고도 하지 않았다 말하는 이도 다르지 않게 떨어지느니라. 천한 행위를 지은 이 사람들은 죽은 뒤 저 세상에서 똑같아지느니라.

Abhūtavādī nirayaṁ upeti, Yo vāpi katvā na karomi cāha; Ubhopi te pecca samā bhavanti, Nihīnakammā manujā parattha.

법구경 Dhammapada 306

배경

이 품의 이름이기도 한 니라야(niraya)는 흔히 지옥으로 옮기지만, 본디 '즐거움이 없는 곳'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이 게송은 거짓말의 두 얼굴을 나란히 놓습니다.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꾸미는 것과, 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잡아떼는 것입니다. 방향은 반대이지만 사실을 뒤집는다는 점에서 같다고 말합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경쟁하던 무리가 한 여성 유행자를 내세워 부처님을 헛소문으로 모함하려다 그 속임수가 끝내 드러난 일을 전합니다. 여기서 괴로운 곳은 누군가 내리는 벌이 아니라, 거짓을 쌓아 온 자리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결과로 그려집니다.

묵상

들킬 일 없다고 여기며 슬쩍 넘긴 거짓말이 있나요? 작게 시작한 거짓이 시간이 지나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워진 적은 없었는지, 오늘 한 번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가사를 두른 이가 많다 해도 그 가운데 나쁜 성품으로 스스로를 다잡지 못하는 이들이 있느니라. 그 악한 이들은 악한 행위로 말미암아 괴로운 곳에 태어나느니라.

Kāsāvakaṇṭhā bahavo, pāpadhammā asaññatā; Pāpā pāpehi kammehi, nirayaṁ te upapajjare.

법구경 Dhammapada 307

배경

가사(kāsāva)는 물들인 천으로, 이 무렵 수행자임을 나타내는 겉옷이었습니다. 이 게송은 그 옷을 걸쳤다는 사실과 그 옷에 걸맞게 사는 일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옷은 누구나 두를 수 있지만 스스로를 다잡는 일은 옷이 대신해 주지 않습니다. 다음 게송도 같은 자리를 다른 각도에서 짚습니다. 겉모습을 지녔다고 해서 그 자리에 맞는 삶까지 저절로 따라오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게송이 겨눈 것은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라, 자리와 삶이 어긋날 때 생기는 결과입니다. 괴로운 곳에 태어난다는 말도 옷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다잡지 못한 채 쌓인 행위가 낳는 결과를 가리킵니다.

묵상

겉모습은 갖췄는데 마음은 따라가지 못한다고 느낀 순간이 있나요? 그 틈을 억지로 메우기보다, 오늘 하나만 정직하게 손봐 본다면 무엇을 고르시겠어요?

몸에 밴 것이 무너져 절제를 잃은 이가 나라가 주는 밥을 받아먹는 것보다, 불꽃처럼 뜨겁게 달군 쇠구슬을 삼키는 것이 차라리 나으니라.

Seyyo ayoguḷo bhutto, tatto aggisikhūpamo; Yañce bhuñjeyya dussīlo, raṭṭhapiṇḍamasaññato.

법구경 Dhammapada 308

배경

실라(sīla)는 흔히 계율로 옮기지만 본래 몸에 밴 됨됨이에 가깝습니다. 이 게송은 그것이 무너진 채 시주 받은 밥을 먹는 일을, 뜨거운 쇠구슬을 삼키는 일에 견줍니다. 몸에 상처 하나로 끝나는 일과, 절제 없이 받은 밥이 남기는 결과를 나란히 놓은 것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흉년에 굶주리던 한 무리의 수행자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서로를 높여 주며 실제보다 나은 경지에 이른 것처럼 보여 밥을 얻어낸 일을 전합니다. 받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받을 자격을 스스로 꾸며 낸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 일은 훗날 계율의 한 조항으로 남았습니다.

묵상

받을 자격이 없는 걸 알면서 받아 본 적이 있나요? 그 순간 편했던 마음이 나중에 어떤 무게로 돌아왔는지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방심하여 남의 배우자를 범하는 이는 네 가지 처지에 빠지느니라. 좋은 일을 잃음이 첫째요 편히 잠들지 못함이 둘째며, 비난받음이 셋째요 괴로운 곳에 떨어짐이 넷째이니라.

Cattāri ṭhānāni naro pamatto, Āpajjati paradārūpasevī; Apuññalābhaṁ na nikāmaseyyaṁ, Nindaṁ tatīyaṁ nirayaṁ catutthaṁ.

법구경 Dhammapada 309

배경

이 게송은 남의 배우자를 범하는 일이 낳는 결과를 넷으로 나누어 짚습니다. 아뿐냐라바(apuññalābha)는 '좋은 일을 잃음'으로, 다른 세 가지보다 앞에 놓인 것이 눈에 띕니다. 잠 못 이룸과 비난과 괴로운 곳보다 먼저, 이미 쌓아 온 좋은 것이 새어 나간다는 뜻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케마카라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 여러 차례 남의 아내를 범하고도 집안의 힘으로 오래 벌을 피했던 일을 전합니다. 이 게송이 겨눈 것은 처벌을 받는지 아닌지가 아니라, 그 행위가 그 사람 안에서 무엇을 갉아 가는지입니다. 다음 게송이 그 대가를 이어서 그립니다.

묵상

눈에 보이는 벌보다 먼저 새어 나가는 것이 있다는 말이 낯설게 들리나요? 지금 내 안에서 조용히 줄어들고 있는 것은 무엇일지 헤아려 보면 어떨까요?

좋은 일을 잃고 갈 곳도 나쁘며 두려워하는 남자와 여자가 나누는 즐거움도 잠깐일 뿐이니라. 왕은 또한 무거운 벌을 내리나니 그러므로 사람은 남의 배우자를 가까이하지 말지니라.

Apuññalābho ca gatī ca pāpikā, Bhītassa bhītāya ratī ca thokikā; Rājā ca daṇḍaṁ garukaṁ paṇeti, Tasmā naro paradāraṁ na seve.

법구경 Dhammapada 310

배경

앞 게송이 넷으로 나눈 결과를 이 게송이 다시 훑으며 하나를 더 보탭니다. 토키까(thokikā)는 '잠깐뿐인'이라는 뜻으로, 두려움 속에서 훔친 즐거움이 얼마나 짧은지를 짚습니다. 오래 두려워하며 얻은 것이 잠깐이라면 셈이 맞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뒷줄에는 왕이 내리는 무거운 벌이 나오는데, 이는 그 사회가 실제로 두었던 형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앞 게송의 괴로운 곳이 스스로 지어 가는 결과를 그렸다면, 여기서는 사람 사이의 법과 셈까지 함께 놓입니다. 안으로도 밖으로도 감당할 것이 크다는 말입니다.

묵상

짧은 즐거움과 오래가는 대가를 저울질해 본 적이 있나요? 그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었는지, 지금은 어떻게 보이나요?

쿠사 풀을 잘못 움켜쥐면 바로 손을 베이듯이, 애쓰는 이의 삶을 잘못 다루면 괴로운 곳으로 끌려가느니라.

Kuso yathā duggahito, hatthamevānukantati; Sāmaññaṁ dupparāmaṭṭhaṁ, nirayāyupakaḍḍhati.

법구경 Dhammapada 311

배경

쿠사 풀은 잎 가장자리가 날카로워 잡는 방향을 잘못 잡으면 바로 손을 베는 풀입니다. 이 게송은 그 풀을 사마나(samaṇa, 애쓰는 이)의 삶에 견줍니다. 사마냐(sāmañña)는 그 삶의 방식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 비유가 벌을 그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쿠사 풀은 누가 벌하지 않아도 잘못 쥐면 손을 벱니다. 마찬가지로 애써 나선 삶도 잘못 다루면 그 자체로 힘든 자리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 두 게송이 '잘못 다룸'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이어서 풀어냅니다.

묵상

방향을 잘못 잡아 오히려 나를 다치게 한 노력이 있었나요? 애쓰는 마음 자체보다 그 쥐는 방식을 살펴보면 어떨까요?

무엇이든 느슨한 행위이거나 더럽혀진 다짐이 있다면, 그 미심쩍은 청정한 삶은 큰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

Yaṁ kiñci sithilaṁ kammaṁ, saṅkiliṭṭhañca yaṁ vataṁ; Saṅkassaraṁ brahmacariyaṁ, na taṁ hoti mahapphalaṁ.

법구경 Dhammapada 312

배경

앞 게송이 잘못 다루면 괴로운 곳으로 끌려간다고 했는데, 이 게송은 그 '잘못 다룸'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짚습니다. 시틸라(sithila)는 '느슨한, 헐거운'이라는 뜻입니다. 크게 어긋난 행위가 아니라 그저 헐거워진 행위와 더럽혀진 다짐을 말합니다. 상깟사라(saṅkassara)는 '미심쩍은, 의심스러운'이라는 뜻으로 청정한 삶을 꾸미는데, 아예 그른 삶이 아니라 스스로도 미덥지 않은 삶을 가리킵니다. 큰 잘못을 저질러야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다짐이 조금씩 헐거워지는 것만으로도 열매가 부실해진다는 말입니다. 다음 게송은 이와 반대로 굳게 힘쓰는 쪽을 그립니다.

묵상

굳게 다짐했다가 어느새 느슨해진 일이 있나요? 그 헐거워짐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돌아보면 무엇이 보이나요?

할 일이라면 굳게 힘써 나아갈지니라. 느슨한 떠돌이 수행자는 오히려 먼지를 더 흩뿌릴 뿐이니라.

Kayirā ce kayirāthenaṁ, daḷhamenaṁ parakkame; Sithilo hi paribbājo, bhiyyo ākirate rajaṁ.

법구경 Dhammapada 313

배경

앞 게송이 헐거워진 다짐을 말했다면, 이 게송은 그 반대편에서 답을 내놓습니다. 할 일이면 굳게 힘써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뒷줄의 그림입니다. 라자(rajaṃ, 먼지)를 느슨한 떠돌이 수행자가 오히려 더 흩뿌린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 그 자리에 머무를 것 같지만, 어중간하게 나선 걸음은 오히려 먼지를 더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가만히 있는 것과 굳게 나아가는 것 사이에서, 이도 저도 아닌 걸음이 가장 어수선하다는 말입니다. 이 품 앞머리의 무거운 그림들과 달리, 여기서는 벌이 아니라 헛수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묵상

어중간하게 걸치고 있어 오히려 더 헤매는 일이 있나요? 아예 놓거나 제대로 붙잡거나, 둘 중 어느 쪽이 더 홀가분할까요?

나쁜 짓은 하지 않는 것이 나으니, 저지르고 나면 뒤에 애태우게 되느니라. 좋은 일을 한 뒤에는 뉘우치지 않으니 한 일 가운데는 좋은 일을 함이 나으니라.

Akataṁ dukkaṭaṁ seyyo, pacchā tappati dukkaṭaṁ; Katañca sukataṁ seyyo, yaṁ katvā nānutappati.

법구경 Dhammapada 314

배경

이 게송은 좋고 나쁨을 뒤에서부터 재는 방법을 보여 줍니다. 땁빠띠(tappati)는 '애태우다, 속을 태우다'라는 뜻이고, 난누땁빠띠(nānutappati)는 그 반대로 '뉘우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저지르는 순간의 기준이 아니라 나중에 돌아볼 때의 마음을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 게송이 다정한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지금 무엇이 옳은지 헷갈릴 때도, 그 일을 한 뒤 마음이 어떨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자신을 괴롭힐 일이라면 하지 않는 편이 낫고, 해도 뉘우치지 않을 일이라면 그것이 좋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책을 부추기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를 살피는 실마리 하나를 건네는 말씀입니다.

묵상

돌아봤을 때 마음이 무거워질 일과 가벼워질 일을 구별해 본 적 있나요? 지금 망설이는 일이 있다면, 나중의 내 마음에 슬쩍 물어보면 어떨까요?

변경의 성이 안팎으로 지켜지듯이 이와 같이 자신을 지킬지니라. 그대들의 기회를 놓치지 말지니라. 기회를 놓친 이들은 괴로운 곳에 떨어져 슬퍼하느니라.

Nagaraṁ yathā paccantaṁ, guttaṁ santarabāhiraṁ; Evaṁ gopetha attānaṁ, khaṇo vo mā upaccagā; Khaṇātītā hi socanti, nirayamhi samappitā.

법구경 Dhammapada 315

배경

변경의 성은 나라의 끝, 적이 넘볼 수 있는 자리에 세운 성을 가리킵니다. 그런 성은 안쪽 문단속과 바깥쪽 경계를 함께 갖춥니다. 이 게송은 그 이중의 지킴을 자기 자신에게 그대로 옮겨 놓습니다. 카노(khaṇo)는 '기회, 그 순간'이라는 뜻으로, 이 책에서 몇 차례 되풀이해 쓰는 말입니다. 지금 마음을 챙길 수 있는 그 순간이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을 여러 수행자에게 함께 내리신 가르침으로 전합니다. 마지막 줄의 슬픔은 심판받아서가 아니라, 지나간 기회를 스스로 돌아볼 때 이는 슬픔에 더 가깝습니다.

묵상

마음을 챙길 수 있었는데 흘려보낸 순간이 떠오르나요? 다음에 비슷한 순간이 오면 어떻게 다르게 잡아 보고 싶나요?

부끄러워할 것이 아닌 일에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워할 일에는 부끄러워하지 않느니라. 삐뚤어진 견해를 지닌 살아 있는 것들은 나쁜 길로 가느니라.

Alajjitāye lajjanti, lajjitāye na lajjare; Micchādiṭṭhisamādānā, sattā gacchanti duggatiṁ.

법구경 Dhammapada 316

배경

알라지따예(alajjitāye)와 라지따예(lajjitāye)는 한 글자 차이지만 뜻은 정반대입니다. 부끄러워할 것이 아닌 것과 부끄러워할 것, 이 둘의 자리를 헷갈리는 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이 게송의 인연담 제목은 니간타(nigaṇṭha)를 가리키는데, 이는 자이나 고행자들을 이르던 말입니다. 무엇을 부끄럽게 여기고 무엇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지는 사람마다, 전통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게송이 짚는 것은 그 기준 자체가 삐뚤어져 있을 때 생기는 문제입니다. 자잘한 일에는 낯을 붉히면서 정작 중요한 일에는 태연한 경우, 부끄러움이라는 감정 자체보다 그 감정이 향하는 자리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묵상

작은 실수엔 낯이 뜨거워지면서 정작 중요한 일엔 태연했던 적이 있나요? 부끄러움이 향하는 자리를 한번 점검해 보면 어떨까요?

두려울 것 없는 데서 두려움을 보고 두려운 데서는 두려움 없다고 보느니라. 삐뚤어진 견해를 지닌 살아 있는 것들은 나쁜 길로 가느니라.

Abhaye bhayadassino, bhaye cābhayadassino; Micchādiṭṭhisamādānā, sattā gacchanti duggatiṁ.

법구경 Dhammapada 317

배경

앞 게송과 뒷줄이 똑같습니다. 세 게송이 한 틀을 되풀이하며 부끄러움, 두려움, 허물이라는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같은 문제를 비춥니다. 이 게송이 다루는 것은 두려움의 자리입니다. 두려울 것 없는 곳에서 지레 겁을 먹고, 정작 두려워해야 할 곳에서는 태연한 경우입니다. 아바야(abhaya)는 '두려움 없음'을, 바야(bhaya)는 '두려움'을 뜻합니다. 이 둘이 뒤바뀌면 정작 힘을 쏟아야 할 자리와 애먼 자리를 헷갈리게 됩니다. 사소한 것에 마음을 다 쓰고 정말 중요한 자리에서는 무심해지는 셈입니다. 삐뚤어진 견해라는 말은 여기서 대단한 사상이 아니라, 이렇게 자리를 잘못 재는 것을 가리킵니다.

묵상

별일 아닌 것에 지레 겁먹고, 정작 중요한 일 앞에서는 태연했던 적이 있나요? 그 두려움이 정말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는지 돌아보면 어떨까요?

허물없는 데서 허물이라 여기고 허물 있는 데서는 허물없다고 보느니라. 삐뚤어진 견해를 지닌 살아 있는 것들은 나쁜 길로 가느니라.

Avajje vajjamatino, vajje cāvajjadassino; Micchādiṭṭhisamādānā, sattā gacchanti duggatiṁ.

법구경 Dhammapada 318

배경

세 게송의 마지막 자리로, 이번에는 왓자(vajja, 허물)를 다룹니다. 허물없는 일을 허물로 여기고, 정작 허물 있는 일은 허물없다고 보는 경우입니다. 이 게송의 인연담 제목은 다른 스승을 따르던 한 재가자를 가리킵니다. 무엇을 허물이라 배웠는지에 따라 판단의 잣대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허물, 이 세 게송이 짚은 세 자리는 모두 마음이 무언가를 놓고 판을 잘못 읽는 자리입니다. 벌을 그리는 말이 아니라, 판단의 눈금 자체가 어긋나 있으면 아무리 애써도 엉뚱한 곳에 힘을 쓰게 된다는 말입니다.

묵상

내가 배운 대로 허물이라 여긴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적 있나요? 그 잣대를 어디서 물려받았는지 한번 짚어 보면 어떨까요?

허물을 허물로 알고 허물없음을 허물없음으로 아느니라. 바른 견해를 지닌 살아 있는 것들은 좋은 길로 가느니라.

Vajjañca vajjato ñatvā, avajjañca avajjato; Sammādiṭṭhisamādānā, sattā gacchanti suggatiṁ.

법구경 Dhammapada 319

배경

앞의 세 게송이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허물의 자리를 잘못 짚는 경우를 늘어놓았다면, 이 게송이 그 답을 내놓습니다. 삼마딧티(sammādiṭṭhi, 바른 견해)는 미차딧티(micchādiṭṭhi, 삐뚤어진 견해)와 짝을 이루는 말로,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뜻합니다. 특별히 대단한 지혜가 아니라, 허물을 허물로, 허물없음을 허물없음으로 그저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이 품은 내내 괴로운 곳과 나쁜 길을 이야기해 왔지만, 마지막 게송은 좋은 길로 끝을 맺습니다. 앞선 게송들이 그린 결과는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보는 눈을 바로잡으면 방향이 바뀔 수 있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묵상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이 생각보다 단순하게 느껴지나요, 아니면 여전히 어렵게 느껴지나요? 오늘 하나만 제대로 보고 넘어간다면 무엇이었으면 하나요?

28 코끼리 14구절

싸움터의 코끼리가 화살을 견디듯 - 참음과 스스로 다스림을 코끼리에 빗댄 열넷의 게송

나는 싸움터의 코끼리가 활에서 날아온 화살을 견디듯, 거친 말을 견디리라, 몸에 밴 것을 어긴 이가 세상에 많은 까닭이니라.

Ahaṁ nāgova saṅgāme, cāpato patitaṁ saraṁ; Ativākyaṁ titikkhissaṁ, dussīlo hi bahujjano.

법구경 Dhammapada 320

배경

23품은 부처님이 자신을 '나'라고 부르며 시작합니다. 거친 말을 듣는 자리에서 하신 말씀으로 전해집니다. 띠띡키상(titikkhissaṁ)은 '견디리라'는 뜻으로, 이 게송의 중심에 놓인 낱말입니다. 싸움터의 코끼리가 활에서 날아온 화살을 견디듯 견디겠다는 것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되받지 않겠다고도, 용서하겠다고도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저 견디겠다고만 합니다. 한역 법구경은 마지막 구를 '계 없는 사람을 건진다'로 바꾸어 견디는 이를 구제하는 이로 세웠습니다. 원문은 구제로 나아가지 않고 견딤 그 자체에 머뭅니다. 이 자리에서 23품 전체가 시작합니다. 이 품의 이름인 코끼리는 힘이 세면서도 그 힘을 쓰지 않는 것의 본보기로 놓여 있습니다.

묵상

거친 말을 들었을 때 곧바로 맞서고 싶어지나요? 맞서지 않고 견디는 것이 지는 것과 어떻게 다를지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길든 코끼리를 무리로 이끌어 가고 길든 코끼리에 왕이 올라타나니, 거친 말을 견디는 이가 사람들 가운데 으뜸이니라.

Dantaṁ nayanti samitiṁ, dantaṁ rājābhirūhati; Danto seṭṭho manussesu, yotivākyaṁ titikkhati.

법구경 Dhammapada 321

배경

앞 게송이 부처님 자신의 이야기였다면 이 게송은 그 이야기를 일반화합니다. 단따(danto)는 '길든 자'로, 이 품 전체를 관통하는 낱말입니다. 코끼리를 길들이면 무리를 이끄는 자리에 서고 왕이 올라탑니다. 쓸모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구는 코끼리 이야기를 사람에게로 옮깁니다. 거친 말을 견디는 이가 사람들 가운데 으뜸이라고 합니다. 길들여짐의 쓸모가 짐을 나르거나 태우는 데 있지 않고, 참아 내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아띠와꺄(ativākya)는 '지나친 말, 거친 말'로 앞 게송과 같은 낱말입니다. 두 게송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묵상

참아 내는 사람이 오히려 강해 보였던 적이 있나요? 그런 사람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길들인 노새도 훌륭하고 혈통 좋은 신두의 준마도 훌륭하다. 코끼리도 큰 코끼리도 훌륭하나 스스로를 다스린 이가 그보다 나으니라.

Varamassatarā dantā, ājānīyā ca sindhavā; Kuñjarā ca mahānāgā, attadanto tato varaṁ.

법구경 Dhammapada 322

배경

이 게송은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하나씩 늘어놓은 뒤, 그보다 나은 것을 마지막에 놓는 짜임입니다. 앗사따라(assatarā)는 노새, 아자니야(ājānīya)는 혈통 좋은 말, 꾼자라(kuñjara)는 코끼리, 마하나가(mahānāga)는 큰 코끼리를 가리킵니다. 모두 값지다고 여겨 길들여 부리는 짐승들입니다. 그런데 앗따단또(attadanto), 곧 스스로를 다스린 이가 그 전부보다 낫다고 합니다. 좋은 혈통이나 큰 몸집은 타고나는 것이지만 스스로를 다스리는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품은 코끼리를 빌려 말하다가 이렇게 슬쩍 사람 쪽으로 저울을 기울입니다.

묵상

타고난 조건과 스스로 다스려 얻은 것 가운데 무엇이 더 오래 남던가요? 지금 다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런 탈것들로는 가 보지 못한 곳에 이를 수 없나니, 스스로를 잘 다스려 다스려진 마음으로 그곳에 이르느니라.

Na hi etehi yānehi, gaccheyya agataṁ disaṁ; Yathāttanā sudantena, danto dantena gacchati.

법구경 Dhammapada 323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을 이렇게 전합니다. 한 수행자가 예전에 코끼리 조련사였습니다. 아찌라와띠 강가에서 조련사가 코끼리를 다루지 못해 애먹는 것을 보고 그가 나서서 방법을 일러주어 코끼리를 쉽게 다스리게 했습니다. 이 일을 전해 들은 부처님은 그를 칭찬하지 않고 오히려 나무라셨다고 합니다. 세속의 재주를 자랑스러워한 것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게송을 말씀하셨습니다. 노새도 준마도 코끼리도 가 보지 못한 곳이 있습니다. 아가땅 디상(agataṃ disaṃ), 곧 아직 가 보지 못한 곳은 여기서 열반을 가리킵니다. 어떤 탈것도 그곳에 데려다주지 못합니다. 스스로 다스려진 마음만이 그 길을 갑니다.

묵상

자신 있는 재주와 정말 필요한 것을 헷갈린 적이 있나요? 지금 자랑스러운 것이 나를 어디까지 데려다줄 수 있을까요?

다나팔라카라는 이름의 코끼리는 사나워 다스리기 어려우나, 묶인 채 먹이를 먹지 않고 코끼리 숲을 그리워하느니라.

Dhanapālo nāma kuñjaro, Kaṭukabhedano dunnivārayo; Baddho kabaḷaṁ na bhuñjati, Sumarati nāgavanassa kuñjaro.

법구경 Dhammapada 324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한 늙은 브라만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재산 여덟 냥을 아들 넷에게 두 냥씩 나누어 주었는데, 아들들은 남은 것마저 구슬려 받아 가고는 아버지를 돌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맏아들이 부처님을 공양에 청한 자리에서, 부처님은 부모를 섬기는 일의 가치를 말씀하시며 다나팔라카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다나팔라카는 힘세고 사나워 다스리기 어려운 코끼리인데, 묶인 채로도 먹이를 먹지 않고 코끼리 숲을 그리워합니다. 주석서는 이 그리움을 숲에 남겨 두고 온 부모를 향한 것으로 풀이합니다. 짐승도 부모를 잊지 않는데 사람인 아들들이 아버지를 저버렸다는 대조입니다. 이 자리에서 브라만과 네 아들 내외가 모두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묵상

묶어 두어도 그리움만은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있나요? 그 그리움이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요?

나태하고 많이 먹으며 잠에 빠져 뒤척이며 눕는 이는 어리석나니, 먹이를 탐하는 큰 멧돼지처럼 거듭거듭 태에 드느니라.

Middhī yadā hoti mahagghaso ca, Niddāyitā samparivattasāyī; Mahāvarāhova nivāpapuṭṭho, Punappunaṁ gabbhamupeti mando.

법구경 Dhammapada 325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꼬살라의 빠세나디 왕 이야기를 전합니다. 왕은 밥과 반찬을 큰 그릇 가득 먹은 뒤 부처님을 뵈러 왔다가, 앉은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았다고 합니다. 왕이 식사 뒤로 몸이 괴롭다고 아뢰자 부처님은 많이 먹는 이는 늘 이렇게 괴롭다고 답하셨습니다. 미디(middhī)는 나태해 늘어진 상태, 마학가소(mahagghaso)는 많이 먹는 자를 뜻합니다. 마지막 구가 뜻밖입니다. 이런 삶이 거듭거듭 태에 든다고, 곧 되풀이해 태어난다고 합니다. 하루의 노곤함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뒤 왕은 차츰 식사량을 줄였고, 몸이 가벼워지고 활기를 되찾았다고 전해집니다.

묵상

몸이 무겁고 나른한 상태가 하루만이 아니라 오래된 습관은 아닌가요? 조금 덜어 내면 무엇이 가벼워질까요?

이 마음은 예전에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원하는 대로, 좋아하는 곳으로, 마음 내키는 대로. 이제 나는 이 마음을 올바른 이치로 다스리리니, 갈고리를 든 이가 발정 난 코끼리를 다루듯 하리라.

Idaṁ pure cittamacāri cārikaṁ, Yenicchakaṁ yatthakāmaṁ yathāsukhaṁ; Tadajjahaṁ niggahessāmi yoniso, Hatthippabhinnaṁ viya aṅkusaggaho.

법구경 Dhammapada 326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사미 사누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사누는 경전을 외운 뒤 그 공덕을 어머니와 아버지께 돌리겠다고 소리 내어 말했습니다. 그 자리에 신들과, 전생에 그의 어머니였던 한 존재가 함께 듣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일을 전해 들은 부처님은 사누에게 흔들리는 마음을 다스리라고 이르시며 이 게송을 말씀하셨습니다. 짜리깡(cārikaṃ)은 '돌아다님'입니다. 마음이 예전에는 원하는 대로 헤매고 다녔다고 합니다. 앙꾸사가하(aṅkusaggaha)는 갈고리를 쥔 조련사입니다. 갈고리는 코끼리를 해치는 도구가 아니라 방향을 잡아 주는 도구입니다. 사누는 이 말씀 끝에 아라한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묵상

마음이 원하는 대로 헤매던 때와 방향을 잡고 다스리는 때, 지금은 어느 쪽에 가까운가요?

부지런함을 좋아하는 이가 되어 자신의 마음을 잘 지켜라. 진흙에 빠진 코끼리가 스스로를 끌어내듯, 고난에서 자신을 끌어내어라.

Appamādaratā hotha, sacittamanurakkhatha; Duggā uddharathattānaṁ, paṅke sannova kuñjaro.

법구경 Dhammapada 327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빠웨이야까라는 늙은 코끼리 이야기를 전합니다. 젊어서는 힘이 셌으나 늙고 쇠약해진 이 코끼리가 못에 들어갔다가 진창에 빠져 나오지 못했습니다. 빠세나디 왕이 조련사를 보냈는데, 조련사는 힘으로 끌어내는 대신 싸움터의 군악을 연주하게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코끼리는 마치 전쟁터에 선 듯 기운을 내어 스스로 온 힘을 다해 진창에서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밖에서 끌어당긴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낸 힘으로 나온 것입니다. 압빠마다(appamāda)는 이 경전 전체에서 되풀이되는 낱말로, '마음을 놓지 않음'을 뜻합니다. 둑가(duggā)는 고난, 궁지를 가리킵니다. 진흙에 빠진 코끼리가 스스로 힘을 낸 것처럼, 궁지에서 자신을 끌어내는 힘도 결국 스스로에게서 나옵니다.

묵상

궁지에 빠졌을 때 밖에서 끌어 주기를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나요? 지금 낼 수 있는 스스로의 힘은 무엇일까요?

지혜로운 동료를 얻어 함께 다니며 훌륭하게 살아가는 슬기로운 이를 얻는다면, 모든 위험을 이겨 내며 마음을 챙기고 그와 함께함을 기뻐하며 다니라.

Sace labhetha nipakaṁ sahāyaṁ, Saddhiṁ caraṁ sādhuvihāridhīraṁ; Abhibhuyya sabbāni parissayāni, Careyya tenattamano satīmā.

법구경 Dhammapada 328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여러 수행자에게 있었던 일을 전합니다. 니빠까(nipaka)는 '사려 깊은, 헤아릴 줄 아는'을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동료는 그저 곁에 있는 이가 아닙니다. 함께 훌륭하게 살아가며 위험을 같이 이겨 낼 수 있는 이입니다. 그래서 조건이 붙습니다. 그런 이를 얻었다면 함께 가라는 것이 이 게송이고, 얻지 못했다면 어떻게 하라는 것이 다음 게송입니다. 5품 61게송에서 자기보다 낫거나 같은 이를 만나지 못하면 홀로 가라고 했던 셈이 여기서 다시 나옵니다. 함께 갈 이를 고르는 기준을 낮추지 말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묵상

함께 위험을 이겨 낼 수 있다고 믿는 동료가 있나요? 그 믿음은 무엇으로 쌓였나요?

지혜로운 동료를 얻지 못하고 함께 다니며 훌륭하게 살아가는 슬기로운 이를 얻지 못했다면, 왕이 정복한 나라를 버리듯 마탕가 숲의 코끼리처럼 홀로 다니라.

No ce labhetha nipakaṁ sahāyaṁ, Saddhiṁ caraṁ sādhuvihāridhīraṁ; Rājāva raṭṭhaṁ vijitaṁ pahāya, Eko care mātaṅgaraññeva nāgo.

법구경 Dhammapada 329

배경

앞 게송과 짝을 이룹니다. 동료를 얻었을 때와 얻지 못했을 때를 나란히 놓았습니다. '왕이 정복한 나라를 버리듯'이라는 비유가 눈에 띕니다. 애써 얻은 것을 스스로 버리는 그림입니다. 나쁜 동료 곁에 머무는 일이 그만큼 무언가를 계속 잃는 일이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마탕가란녜(mātaṅgaraññe)는 마탕가라는 코끼리 무리가 사는 숲으로, 앞서 부처님을 시중든 빠릴레이야까 숲의 코끼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홀로 다니는 것이 외로움이 아니라 나쁜 동료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라는 점을 이 비유가 보여 줍니다.

묵상

곁에 있는 것만으로 힘이 빠지는 관계가 있나요? 거기서 한 걸음 물러나면 무엇이 남을까요?

혼자 지내는 것이 더 나으니 어리석은 이에게는 동료가 될 이가 없느니라. 홀로 다니며 나쁜 일을 하지 말지니 마탕가 숲의 코끼리처럼 근심 없이 가라.

Ekassa caritaṁ seyyo, Natthi bāle sahāyatā; Eko care na ca pāpāni kayirā, Appossukko mātaṅgaraññeva nāgo.

법구경 Dhammapada 330

배경

코끼리 연작의 결론에 해당하는 게송입니다. 압뽀숙꼬(appossukko)는 '애쓰지 않는, 근심 없는'을 뜻합니다. 앞 게송이 나쁜 동료를 버리고 떠나라고 했다면 이 게송은 그 떠난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말합니다. 쫓기듯 도망치는 자리가 아니라 근심 없는 자리입니다. 마탕가 숲의 코끼리, 곧 빠릴레이야까가 부처님을 시중들며 지낸 숲이 그 자리의 본보기입니다. '나쁜 일을 하지 말라'는 구절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홀로 다니는 자유가 무엇을 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이 구절이 못박습니다.

묵상

혼자 있는 시간이 쫓기는 시간인가요, 근심 없는 시간인가요? 둘을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요?

필요할 때 생기는 동료는 행복이요 있는 것으로 만족함이 행복이니, 생이 다할 때 지닌 좋은 일이 행복이요 모든 괴로움을 버림이 행복이니라.

Atthamhi jātamhi sukhā sahāyā, Tuṭṭhī sukhā yā itarītarena; Puññaṁ sukhaṁ jīvitasaṅkhayamhi, Sabbassa dukkhassa sukhaṁ pahānaṁ.

법구경 Dhammapada 331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마라가 부처님께 왕이 되기를 권한 일을 전합니다. 히말라야 기슭에 계실 때 부처님은 못된 왕들에게 시달리는 백성들을 보시고, 그들을 억누르는 이 없이 다스릴 길이 있을지 헤아리셨습니다. 그 생각을 알아챈 마라가 다가와 왕위에 오르시라 권했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이를 물리치셨습니다. 이 게송은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참된 행복 네 가지를 늘어놓습니다. '필요할 때 생기는' 동료가 첫째입니다. 왕위나 권력이 아니라 정말 필요한 순간에 곁에 있는 동료가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마지막 구 '모든 괴로움을 버림이 행복'을 '뭇 악을 범하지 않음이 편안하다'로 바꾸었습니다. 원문은 앞의 세 행복을 넘어서는 것을 마지막에 놓았는데, 한역은 그것을 하나 더 늘어놓은 항목으로 바꾸었습니다.

묵상

정말 필요한 순간에 곁에 있어 준 이가 있었나요?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 무엇이 보이나요?

이 세상에서 어머니를 섬김이 행복이요 아버지를 섬김도 행복이니, 이 세상에서 애쓰는 이의 삶이 행복이요 거룩한 삶도 행복이니라.

Sukhā matteyyatā loke, atho petteyyatā sukhā; Sukhā sāmaññatā loke, atho brahmaññatā sukhā.

법구경 Dhammapada 332

배경

앞 게송이 행복을 큰 테두리에서 말했다면 이 게송은 구체적인 자리를 짚습니다. 맛떼이야따(matteyyatā)는 어머니를 섬기는 도리, 뻬떼이야따(petteyyatā)는 아버지를 섬기는 도리입니다. 324게송에서 부모를 돌보지 않던 아들들과 다나팔라카 이야기가 이미 이 자리를 예비했습니다. 사마냐따(sāmaññatā)는 사마나, 곧 애쓰는 이의 삶을 뜻하고 브라흐마냐따(brahmaññatā)는 거룩한 삶을 뜻합니다. 집에 매인 삶과 집을 나선 삶을 나란히 놓아, 둘 다 행복의 자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어느 한쪽만 옳다고 하지 않는 짜임입니다.

묵상

곁을 지키는 삶과 홀로 애쓰는 삶, 둘 다 나름의 행복이 있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늙음에 이르도록 지닌 됨됨이가 행복이요 굳게 선 믿음이 행복이니, 지혜를 얻음이 행복이요 악행을 짓지 않음이 행복이니라.

Sukhaṁ yāva jarā sīlaṁ, sukhā saddhā patiṭṭhitā; Sukho paññāya paṭilābho, pāpānaṁ akaraṇaṁ sukhaṁ.

법구경 Dhammapada 333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입니다. '늙음에 이르도록'이라는 말이 앞세워집니다. 하루 이틀 지킨 됨됨이가 아니라 오래도록 지녀 온 됨됨이를 말합니다. 삿다(saddhā)는 믿음인데, 여기서는 굳게 선(patiṭṭhitā) 믿음이라 하여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강조합니다. 지혜를 얻음과 악행을 짓지 않음이 뒤를 잇습니다. 됨됨이, 믿음, 지혜, 그침이라는 네 가지가 나란히 놓였습니다. 이 품은 싸움터의 코끼리로 시작해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여러 장면을 지나, 오래도록 몸에 지녀 온 것들로 마무리됩니다. 다스림이 한순간의 결심이 아니라 늙음에 이르도록 지속되는 일임을 마지막 게송이 보여 줍니다.

묵상

오래도록 지켜 온 것이 있나요? 그것이 지금의 나를 어떻게 지탱하고 있나요?

29 목마름 26구절

그칠 줄 모르는 목마름이 어떻게 자라나고 어떻게 뿌리 뽑히는지를 다룬, 법구경에서 두 번째로 긴 스물여섯 편

마음을 놓고 사는 사람에게는 목마름이 덩굴처럼 자라나나니, 숲에서 열매를 찾아 헤매는 원숭이처럼 이리저리 내닫느니라.

Manujassa pamattacārino, Taṇhā vaḍḍhati māluvā viya; So plavatī hurā huraṁ, Phalamicchaṁva vanasmi vānaro.

법구경 Dhammapada 334

배경

이 품의 첫 게송입니다. 빠맛따짜리노(pamattacārino)는 '마음을 놓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특정한 행동이 아니라 깨어 있지 않은 상태 자체를 가리킵니다. 목마름이 자라나는 자리가 방일함이라는 것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마음을 음행에 놓아둔다'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면 문제의 원인이 방일함 전체에서 한 가지 행위로 좁아집니다. 21게에서 압빠마다(appamāda), 곧 '깨어 있음'을 계율이라는 낱말로 좁혀 옮긴 것과 같은 방식의 축소가 여기서도 일어난 셈입니다. 원숭이가 열매를 찾아 이 나무 저 나무로 내닫는 그림은, 목마름이 사람을 한자리에 머물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24품은 이 그림에서 시작해 뿌리를 파내는 자리까지 나아갑니다.

묵상

지금 마음이 놓여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요? 열매를 찾아 이리저리 내닫는 원숭이처럼, 무언가를 얻으려고 바쁘게 옮겨 다니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세요.

사람을 사로잡는 이 사악한 목마름, 세상을 옭아매는 이 얽어맴에 붙들리면, 비 맞아 자란 비라나 풀처럼 슬픔이 그에게서 자라나느니라.

Yaṁ esā sahate jammī, taṇhā loke visattikā; Sokā tassa pavaḍḍhanti, abhivaṭṭhaṁva bīr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335

배경

335게와 336게는 한 짝입니다. 이 게송은 목마름에 사로잡힌 경우를, 다음 게송은 그것을 이겨낸 경우를 말합니다. 얌미(jammī)는 '사악한, 천박한'이라는 뜻이며, 위삿띠까(visattikā)는 '얽어매는 것'입니다. 비 맞아 자란 비라나(bīraṇa) 풀은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로, 목마름에 붙들린 이에게서 슬픔이 걷잡을 수 없이 자란다는 그림입니다. 다음 게송에서는 같은 비라나 풀의 뿌리를 파내는 장면이 다시 나옵니다. 이 게송이 슬픔이 자라나는 쪽을 보여 준다면, 337게는 그 뿌리를 파내라고 말합니다. 짧은 두 줄 안에 붙들림의 무게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묵상

요즘 나를 사로잡고 있는 목마름이 있나요? 비 맞은 풀처럼 슬픔이 자라나고 있다면, 그 뿌리가 무엇인지부터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떨까요?

세상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 사악한 목마름, 그것을 이겨낸 이에게는, 연잎에서 구르는 물방울처럼 슬픔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느니라.

Yo cetaṁ sahate jammiṁ, taṇhaṁ loke duraccayaṁ; Sokā tamhā papatanti, udabinduva pokkharā.

법구경 Dhammapada 336

배경

이 게송은 335게와 짝을 이루며 뒤집습니다. 앞 게송이 목마름에 사로잡힌 경우였다면, 이 게송은 그것을 이겨낸 경우입니다. 사하떼(sahate)는 두 게송에서 같은 동사이지만, 335게에서는 목마름이 사람을 사로잡는 쪽이고 이 게송에서는 사람이 목마름을 이겨내는 쪽입니다. 이겨낸 이에게서는 슬픔이 연잎의 물방울처럼 굴러 떨어집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구도를 다르게 옮겼습니다. 못 이긴 경우로 바꾸고 물의 그림도 뒤집어, 굴러떨어지는 물방울이 못에 차오르는 물이 되었습니다. 335게와 짝을 이루던 반전이 한역에서는 사라진 셈입니다. 팔리는 분명히 이겨낸 이의 자유를 말합니다.

묵상

무언가를 완전히 이겨낸다는 것이 가능할까 싶을 때가 있나요? 슬픔이 연잎의 물방울처럼 굴러떨어지는 순간이 잠깐이라도 있었다면, 그때를 떠올려 보세요.

여기 모인 그대들 모두에게 복이 있기를 바라며 이르노니, 비라나 풀에서 뿌리를 찾듯 목마름의 뿌리를 파내라. 급류가 갈대를 꺾듯 마라가 그대들을 거듭거듭 꺾지 못하게 하라.

Taṁ vo vadāmi bhaddaṁ vo, yāvantettha samāgatā; Taṇhāya mūlaṁ khaṇatha, usīratthova bīraṇaṁ; Mā vo naḷaṁva sotova, māro bhañji punappunaṁ.

법구경 Dhammapada 337

배경

이 게송에는 이 품에서 드물게 청중을 향한 말이 나옵니다. '여기 모인 그대들'이라는 부름과 '복이 있기를'이라는 축원입니다. 우시랏토(usīrattho)는 '뿌리를 찾는 사람'으로, 비라나 풀에서 향기 나는 뿌리를 캐내듯 목마름의 뿌리를 파내라고 합니다. 앞 두 게송에서 비라나 풀이 슬픔이 자라나는 자리로 쓰였다면, 여기서는 같은 풀에서 뿌리를 찾는 손길로 쓰입니다. 마지막 두 줄은 급류가 갈대를 꺾듯 마라가 거듭거듭 사람을 꺾지 못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마라는 이 책에서 사람을 붙들어 두려는 힘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뿌리를 파내는 일과 마라에게 꺾이지 않는 일이 한 게송 안에서 이어집니다.

묵상

파내야 할 뿌리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루고 있는 일이 있나요? 급류에 꺾이는 갈대 대신 뿌리째 뽑는 쪽을 오늘 하루만이라도 골라 보면 어떨까요?

뿌리가 다치지 않고 굳건하면 나무는 베어져도 다시 움트나니, 이처럼 목마름의 뿌리 깊은 성향이 뽑히지 않으면, 이 괴로움은 거듭거듭 생겨나느니라.

Yathāpi mūle anupaddave daḷhe, Chinnopi rukkho punareva rūhati; Evampi taṇhānusaye anūhate, Nibbattatī dukkhamidaṁ punappunaṁ.

법구경 Dhammapada 338

배경

타하아누사예(taṇhānusaye)는 '목마름의 뿌리 깊은 성향'입니다. 아누사야(anusaya)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 아니라 마음 깊이 잠재해 있다가 조건이 갖추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성향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나무는 베어 내도 뿌리가 상하지 않으면 다시 움틉니다. 이 게송은 그 그림을 그대로 목마름에 옮겨 씁니다. 겉으로 드러난 갈망을 억누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뿌리 깊은 성향 자체가 뽑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선 337게가 뿌리를 파내라고 명령했다면, 이 게송은 왜 그래야 하는지를 나무의 비유로 보여 줍니다. 뿌리가 남으면 괴로움은 거듭거듭 돌아옵니다.

묵상

겉으로는 정리한 듯 보이지만 마음 깊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있나요? 나무처럼 다시 움트기 전에,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한번 찾아보면 어떨까요?

즐거움으로 흘러가는 서른여섯 흐름이 거세게 있는 그릇된 견해를 지닌 이는, 물듦에 기댄 생각의 물결에 휩쓸려 가느니라.

Yassa chattiṁsati sotā, manāpasavanā bhusā; Mahāvahanti duddiṭṭhiṁ, saṅkappā rāganissitā.

법구경 Dhammapada 339

배경

찻띠사띠 소따(chattiṃsati sotā), 곧 '서른여섯 흐름'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구체적인 헤아림은 다른 경전과 주석에 따로 있지만, 이 숫자가 말하려는 것은 분명합니다. 목마름이 한 갈래가 아니라 감각의 문마다 여러 갈래로 뻗어 있다는 것입니다. 두딧티(duddiṭṭhiṃ)는 '그릇된 견해를 지닌 이'이고, 상깝빠(saṅkappā)는 '생각'입니다. 즐거움으로 흘러가는 흐름이 거세면 그 사람은 물듦에 기운 생각의 물결에 휩쓸려 갑니다. 목마름이 견해까지 흔든다는 것이 이 게송의 무게입니다. 단순한 갈망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보는 눈까지 바꾸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묵상

지금 나를 어느 쪽으로 실어 가는 생각의 흐름이 있나요? 그 흐름이 향하는 곳이 정말 옳다고 믿는 방향인지 잠시 멈춰서 살펴보면 어떨까요?

모든 곳에서 흐름이 흐르고 덩굴은 돋아나 서 있나니, 그 돋아난 덩굴을 보거든 지혜로 그 뿌리를 잘라내라.

Savanti sabbadhi sotā, latā uppajja tiṭṭhati; Tañca disvā lataṁ jātaṁ, mūlaṁ paññāya chindatha.

법구경 Dhammapada 340

배경

파냐야 친다타(paññāya chindatha), '지혜로 잘라내라'는 이 게송의 마지막 두 낱말이 앞의 게송들과 다른 지점을 짚습니다. 337게는 손으로 뿌리를 파내라 했고, 338게는 뿌리가 남으면 다시 움튼다고 했습니다. 이 게송은 무엇으로 잘라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힘이나 의지가 아니라 지혜입니다. 라따(latā)는 '덩굴'로, 334게에서 목마름이 자라나는 모습으로 이미 나온 그림입니다. 흐름이 모든 곳에서 흐르고 덩굴이 계속 돋아난다는 첫 두 줄은, 목마름이 한 번의 손질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뒤에 오는 도구가 지혜여야 하는 것입니다.

묵상

억지로 참거나 누르는 대신, 가만히 보고 이해해서 풀린 경험을 해 본 적 있나요? 힘이 아니라 알아차림으로 풀리는 매듭도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보세요.

애착으로 젖은 흐름과 기쁨이 사람에게 생겨나나니, 즐거움에 붙어 행복을 찾는 그들도 결국 태어남과 늙음에 이르고 마느니라.

Saritāni sinehitāni ca, Somanassāni bhavanti jantuno; Te sātasitā sukhesino, Te ve jātijarūpagā narā.

법구경 Dhammapada 341

배경

사리따니(saritāni)는 '흐름들'이고 시네히따니(sinehitāni)는 '애착으로 젖은'이라는 뜻입니다. 앞 게송들의 물의 그림이 여기서는 기쁨과 애착으로 이어집니다. 사따시따 수케시노(sātasitā sukhesino)는 '즐거움에 붙어 행복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이 게송의 마지막 구절인 자띠자루빠가 나라(jātijarūpagā narā), 곧 '태어남과 늙음에 이르는 사람들'이 무겁습니다. 행복을 찾는 일 자체가 나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즐거움에 매달려 행복을 찾는 한 태어남과 늙음을 거듭 겪는다고 말합니다. 즐거움과 그 대가가 한 게송 안에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묵상

행복을 찾는 일과 그 대가를 함께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즐거움 자체를 탓하지 않으면서도, 그 뒤에 무엇이 따라오는지 살펴보면 어떨까요?

목마름에 이끌린 존재들은 덫에 걸려 궁지에 몰린 토끼처럼 허둥대나니, 묶임에 붙들린 이들은 오래도록 거듭거듭 괴로움을 겪느니라.

Tasiṇāya purakkhatā pajā, Parisappanti sasova bandhito; Saṁyojanasaṅgasattakā, Dukkhamupenti punappunaṁ cirāya.

법구경 Dhammapada 342

배경

342게와 343게는 첫 두 줄이 그대로 되풀이되는 짝입니다. 사소 반디또(saso bandhito), 곧 '덫에 걸려 궁지에 몰린 토끼'라는 비유가 두 게송에서 똑같이 쓰입니다. 목마름에 이끌린 존재들이 자유로이 움직이는 듯 보여도 실은 궁지에 몰려 허둥댄다는 그림입니다. 상요자나상가삿따까(saṃyojanasaṅgasattā)는 '묶임에 붙들린 이들'입니다. 이 게송은 그렇게 붙들린 이들이 오래도록 거듭거듭 괴로움을 겪는다는 결론으로 끝납니다. 같은 비유로 시작한 다음 게송은 다른 결론, 곧 목마름을 몰아내라는 권유로 끝납니다.

묵상

덫에 걸린 줄도 모르고 허둥대고 있는 자리가 내게도 있을까요? 오래도록 되풀이해 온 괴로움이 있다면, 그 덫이 무엇인지부터 이름 붙여 보세요.

목마름에 이끌린 존재들은 덫에 걸려 궁지에 몰린 토끼처럼 허둥대나니, 그러므로 수행자여, 스스로 벗어나기를 바란다면 목마름을 몰아내라.

Tasiṇāya purakkhatā pajā, Parisappanti sasova bandhito; Tasmā tasiṇaṁ vinodaye, Ākaṅkhanta virāgamattano.

법구경 Dhammapada 343

배경

앞 게송과 첫 두 줄이 같지만 이 게송은 직접 부르는 말로 끝납니다. 빅쿠(bhikkhu)라는 낱말이 그대로 나오는, 이 품에서 드문 자리입니다. 법구경은 게송집이라 호격이 많지 않은데, 여기서는 원문에 실제로 '수행자여'라는 부름이 있습니다. 위노다야(vinodaya)는 '몰아내라'는 명령형입니다. 앞 게송이 붙들린 이들의 처지를 그렸다면, 이 게송은 같은 그림을 보여 준 뒤 곧바로 해야 할 일을 말합니다. 해탈을 바란다면, 곧 아깡키 위라가맛따노(ākaṅkhī virāgamattano)한다면 목마름을 몰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림에서 권유로 넘어가는 자리입니다.

묵상

벗어나고 싶다고 진심으로 바란 적이 있나요? 그 바람이 있다면, 오늘 하루 몰아낼 수 있는 아주 작은 목마름 하나만 골라 보면 어떨까요?

얽매임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마음이 쏠려 도로 그리로 달려가는 이가 있나니, 풀려났다가 다시 묶임으로 달려가는 그 사람을 와서 보라.

Yo nibbanatho vanādhimutto, Vanamutto vanameva dhāvati; Taṁ puggalametha passatha, Mutto bandhanameva dhāvati.

법구경 Dhammapada 344

배경

인연담 제목은 방황하던 수행자 이야기입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수행자의 옷을 벗었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되풀이하던 이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원문은 와나(vana, 숲)와 와나타(vanatha, 덤불)를 겹쳐 쓰는 말놀이입니다. 숲에서 벗어난 자가 다시 숲으로 달려간다는 것인데, 숲이 곧 욕망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해서 한 낱말이 두 겹으로 읽힙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에 원숭이와 감옥이라는 새로운 비유를 넣었습니다. 원숭이가 나무를 떠났다가 돌아오듯, 사람도 옥을 나왔다가 다시 든다는 것입니다. 알아듣기는 쉬워졌지만 팔리의 겹말은 한역에 남지 않았습니다.

묵상

풀려났다가도 자꾸 같은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것이 있나요? 그것을 탓하기보다, 왜 그리로 다시 발이 향하는지 물어보면 어떨까요?

지혜로운 이들은 그것을 굳센 묶임이라 하지 않느니라, 쇠로 되었든 나무로 되었든 밥바자 풀로 되었든. 보석과 귀걸이에 깊이 물들어 집착하는 마음과 자식과 아내를 향해 애틋해하는 마음이 있느니라.

Na taṁ daḷhaṁ bandhanamāhu dhīrā, Yadāyasaṁ dārujapabbajañca; Sārattarattā maṇikuṇḍalesu, Puttesu dāresu ca yā apekkhā.

법구경 Dhammapada 345

배경

인연담 제목은 감옥 이야기입니다. 수행자들이 마을의 감옥을 보고 저것이야말로 굳센 묶임이라고 말하자, 부처님이 이 게송으로 답하셨다고 전해집니다. 아야삼(āyasaṃ)은 '쇠로 된', 다루자(dārujaṃ)는 '나무로 된'이라는 뜻으로, 감옥을 이루는 재료들입니다. 지혜로운 이들은 이런 것들을 진짜 굳센 묶임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대신 보석과 귀걸이에 물든 집착, 자식과 아내를 향한 애틋함을 가리킵니다. 눈에 보이는 쇠사슬보다 마음이 만든 애착이 더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다음 게송이 이 대비를 이어받아 결론을 냅니다.

묵상

눈에 보이는 사슬보다 마음이 만든 애착이 더 단단하게 느껴진 적 있나요? 무엇이 나를 정말로 붙들고 있는지 한번 짚어 보면 어떨까요?

지혜로운 이들은 이것을 굳센 묶임이라 말하나니, 끌어내리면서도 느슨해 보여 풀어내기 어려운 것이니라. 지혜로운 이들은 이것마저 끊어내고 유행을 떠나나니, 감각적 즐거움을 미련 없이 버리고서 그리하느니라.

Etaṁ daḷhaṁ bandhanamāhu dhīrā, Ohārinaṁ sithilaṁ duppamuñcaṁ; Etampi chetvāna paribbajanti, Anapekkhino kāmasukhaṁ pahāya.

법구경 Dhammapada 346

배경

앞 게송에서 열거한 애착, 곧 보석과 귀걸이와 자식과 아내를 향한 마음을 이 게송이 '이것'으로 받아 결론짓습니다. 오하리남(ohārinaṃ)은 '끌어내리는'이고 시틸람(sithilaṃ)은 '느슨해 보이는'입니다. 쇠사슬은 눈에 보이고 단단해 보이지만, 이 묶임은 느슨해 보여서 오히려 풀어내기 어렵다는 것이 이 게송의 요점입니다. 지혜로운 이들은 이것마저 끊어내고 감각적 즐거움을 미련 없이 버린 뒤 집을 떠난다고 말합니다. 파립바잔띠(paribbajanti)는 '유행을 떠난다'는 뜻으로, 정처 없이 떠도는 수행자의 삶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묵상

느슨해 보여서 오히려 알아차리기 어려운 묶임이 내게도 있을까요? 겉으로 자유로워 보이는 자리를 한번 더 들여다보면 무엇이 보일까요?

끌림에 물든 이들은 그 흐름을 따라가나니, 거미가 스스로 지은 그물에 걸리듯 하니라. 지혜로운 이들은 이것마저 끊어내고 떠나가나니, 미련 없이 모든 괴로움을 버리고서 그리하느니라.

Ye rāgarattānupatanti sotaṁ, Sayaṅkataṁ makkaṭakova jālaṁ; Etampi chetvāna vajanti dhīrā, Anapekkhino sabbadukkhaṁ pahāya.

법구경 Dhammapada 347

배경

인연담 제목은 케마 장로니 이야기입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아름다움에 자신 있던 왕비가 부처님을 만나기 꺼리다가 늙어 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무상함을 깨달아 수행자가 된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 게송의 비유는 거미입니다. 마까따꼬 자람(makkaṭako jālaṃ), 곧 '거미가 스스로 지은 그물'에 걸리듯, 끌림에 물든 이들은 자신이 만든 흐름에 스스로 빠져든다는 것입니다. 남이 친 그물이 아니라 스스로 지은 그물이라는 점이 매섭습니다. 지혜로운 이들은 이것마저 끊어내고 모든 괴로움을 버린 채 떠나갑니다.

묵상

스스로 지은 그물에 걸려 본 적 있나요? 남 탓을 하기 전에, 그 그물을 누가 지었는지 가만히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조금 달라질 수 있어요.

과거를 놓아라, 미래를 놓아라, 현재를 놓아라, 존재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이여. 모든 것에서 풀려난 마음은 다시는 태어남과 늙음을 겪지 않으리라.

Muñca pure muñca pacchato, Majjhe muñca bhavassa pāragū; Sabbattha vimuttamānaso, Na punaṁ jātijaraṁ upehisi.

법구경 Dhammapada 348

배경

인연담 제목은 웃가세나 이야기입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곡예를 하던 이가 높은 장대 꼭대기에서 이 게송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문짜(muñca)는 '놓아라'는 명령형으로 세 번 되풀이됩니다. 과거, 미래, 현재를 차례로 놓으라는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 균형을 잡던 그 순간처럼, 어느 한쪽에도 무게를 싣지 않아야 한다는 그림이 겹쳐집니다. 빠라구(pāragū)는 '저 언덕으로 건너간 이'입니다. 모든 것에서 풀려난 마음은 다시는 태어남과 늙음을 겪지 않는다는 말로 게송이 끝납니다.

묵상

과거나 미래, 혹은 지금 이 순간에 너무 무게를 싣고 있지는 않나요? 균형을 잡듯 잠시 세 가지를 고르게 놓아 보는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요?

생각에 시달리고 물듦이 짙어 대상을 아름답게만 보는 사람에게는, 목마름이 더욱더 자라나나니 그것이 굳센 묶임을 만드느니라.

Vitakkamathitassa jantuno, Tibbarāgassa subhānupassino; Bhiyyo taṇhā pavaḍḍhati, Esa kho daḷhaṁ karoti bandhanaṁ.

법구경 Dhammapada 349

배경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활 솜씨가 뛰어났던 이가 아내에게 마음을 온통 빼앗겨 결국 화를 입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위딱까마티땃사(vitakkamathitassa)는 '생각에 시달리는'이라는 뜻이고, 수바누빳시노(subhānupassino)는 '대상을 아름답게만 보는'이라는 뜻입니다. 생각이 온통 한 가지에 쏠려 있을수록 목마름은 더욱더 자라난다는 것이 이 게송의 요점입니다. 마지막 줄은 그렇게 자란 목마름이 굳센 묶임을 만든다고 말합니다. 다음 게송은 정반대의 사람, 곧 생각을 가라앉히는 이를 보여 주며 이 게송과 짝을 이룹니다.

묵상

한 가지 생각에 마음이 온통 쏠려 있던 적이 있나요? 그 쏠림이 어디로 자라날 수 있는지 미리 헤아려 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때가 있어요.

생각을 가라앉히기를 즐거워하며 늘 깨어서 부정한 것을 살피는 이가 있나니, 그는 목마름을 끝내고 마라의 묶임을 끊으리라.

Vitakkūpasame ca yo rato, Asubhaṁ bhāvayate sadā sato; Esa kho byanti kāhiti, Esa checchati mārabandhanaṁ.

법구경 Dhammapada 350

배경

앞 게송과 짝을 이룹니다. 위딱꾸빠세(vitakkūpasame)는 '생각을 가라앉힘'으로, 앞 게송의 생각에 시달리는 사람과 정반대의 자리에 있습니다. 이 게송의 사람은 늘 사또(sato), 곧 '깨어서' 아수밤(asubhaṃ), '부정한 것'을 살핍니다. 몸의 아름다움에 붙들리는 대신 그 몸이 실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보는 수행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는 목마름을 끝내고 마라의 묶임을 끊는다고 게송은 말합니다. 앞 게송이 묶임이 만들어지는 자리를 보여 주었다면, 이 게송은 그것이 풀리는 자리를 보여 줍니다.

묵상

생각을 가라앉히는 나만의 방법이 있나요? 없다면, 오늘 잠깐이라도 겉모습 너머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요?

완성에 이른 이는 두려움이 없고 목마름을 벗어나 흠이 없나니, 존재의 화살을 뽑아냈으니 이 몸이 마지막이니라.

Niṭṭhaṅgato asantāsī, vītataṇho anaṅgaṇo; Acchindi bhavasallāni, antimoyaṁ samussayo.

법구경 Dhammapada 351

배경

닛탕가또(niṭṭhaṅgato)는 '완성에 이른 이'라는 뜻입니다. 이 게송은 앞선 여러 게송이 그려 온 과정, 곧 목마름의 뿌리를 파내고 묶임을 끊는 일이 끝난 자리를 보여 줍니다. 아산따시(asantāsī)는 '두려움이 없는', 아낭가노(anaṅgaṇo)는 '흠이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바와살라니(bhavasallāni), 곧 '존재의 화살'이라는 표현이 눈에 띕니다.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힘을 몸에 박힌 화살로 그린 것입니다. 그 화살을 뽑아냈으므로 이 몸이 마지막이라고 게송은 말합니다. 앞선 게송들의 여정이 이 한 줄로 마무리되는 셈입니다.

묵상

화살이 뽑혀 나간 것처럼 홀가분했던 순간이 있었나요? 그 감각을 기억해 두면, 다시 흔들릴 때 돌아갈 자리가 되어 줄 수 있어요.

목마름을 벗어나고 집착이 없으며 말과 그 뜻에 통달한 이, 글자들의 짜임과 앞뒤를 아는 이, 그는 마지막 몸을 지닌 큰 지혜의 위대한 사람이라 불리느니라.

Vītataṇho anādāno, Niruttipadakovido; Akkharānaṁ sannipātaṁ, Jaññā pubbāparāni ca; Sa ve “antimasārīro, Mahāpañño mahāpuriso”ti vuccati.

법구경 Dhammapada 352

배경

이 게송에는 뜻밖의 조건이 들어 있습니다. 니룻띠빠다꼬위도(niruttipadakovido), 곧 '말과 그 쓰임에 밝아 글자들의 짜임과 앞뒤를 아는 이'라는 구절입니다. 언어를 다루는 능력을 '큰 지혜의 사람'이 갖출 조건으로 꼽은 드문 대목입니다. 한역 법구경에는 이 구절이 통째로 없습니다. 한역은 '도를 다해 옥의 얽매임을 없애고 가장자리 행을 건넜다'는 쪽으로 옮겨, 언어에 밝다는 조건 대신 수행의 성취만을 남겼습니다. 팔리가 말과 뜻을 아는 능력을 나란히 세운 것은, 깨달음이 침묵 속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듯합니다.

묵상

말과 마음이 함께 밝아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 본 적 있나요? 침묵만이 아니라 말로도 지혜가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보세요.

나는 모든 것을 이기고 모든 것을 아는 이, 모든 현상에 물들지 않았느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목마름이 다함에 풀려났나니, 스스로 깨달았으니 누구를 스승이라 이르랴.

Sabbābhibhū sabbavidūhamasmi, Sabbesu dhammesu anūpalitto; Sabbañjaho taṇhakkhaye vimutto, Sayaṁ abhiññāya kamuddiseyyaṁ.

법구경 Dhammapada 353

배경

인연담 제목은 우빠까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처음 길에서 만난 사람이 우빠까라는 아지비까 수행자였습니다. 그가 스승이 누구냐고 묻자 부처님이 이 게송으로 답하셨다고 전해집니다. 삽바비부 삽바위두하마스미(sabbābhibhū sabbavidūhamasmi), 곧 '나는 모든 것을 이기고 모든 것을 아는 이'로 시작하는 1인칭 선언입니다. 마지막 구절, '스스로 깨달았으니 누구를 스승이라 이르랴'는 반문이 이 게송의 무게입니다. 한역은 이를 '만약 ~하면 ~이다'라는 일반 명제로 바꾸어, 말하는 이도 반문도 사라졌습니다. 팔리는 분명히 누군가 자신에 대해 직접 한 말입니다.

묵상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 답을 찾아야 했던 순간이 있었나요? 그때 느낀 것이 무엇이었는지 잠시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모든 보시 가운데 가르침을 베푸는 보시가 으뜸이요, 모든 맛 가운데 가르침의 맛이 으뜸이며, 모든 즐거움 가운데 가르침의 즐거움이 으뜸이니, 목마름이 다함이 모든 괴로움을 이기느니라.

Sabbadānaṁ dhammadānaṁ jināti, Sabbarasaṁ dhammaraso jināti; Sabbaratiṁ dhammarati jināti, Taṇhakkhayo sabbadukkhaṁ jināti.

법구경 Dhammapada 354

배경

인연담 제목은 삭까의 물음 이야기입니다. 신들의 왕 삭까가 무엇이 가장 훌륭한 보시인지 물었고, 이 게송이 그 답으로 전해집니다. 법구경에서 따로도 널리 인용되는 유명한 게송입니다. 담마다낭(dhammadānaṃ), 곧 '가르침을 베푸는 보시'가 모든 보시 가운데 으뜸이라 하고, 이어 맛과 즐거움에서도 가르침이 으뜸이라 합니다. 지나띠(jināti), '이긴다, 으뜸이다'는 동사가 네 줄 모두에서 되풀이됩니다. 마지막 줄은 목마름이 다함이 모든 괴로움을 이긴다고 하여, 이 품 전체의 결론과도 같은 자리에 놓입니다.

묵상

지금까지 받은 것 가운데 가장 오래 남은 것은 무엇이었나요? 물건이 아니라 한마디 말이었다면, 그 이유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재물은 어리석은 이를 해치나 피안을 구하는 이는 그렇지 않느니라. 재물에 대한 목마름으로 어리석은 이는 남을 해치듯 자기를 해치느니라.

Hananti bhogā dummedhaṁ, no ca pāragavesino; Bhogataṇhāya dummedho, hanti aññeva attanaṁ.

법구경 Dhammapada 355

배경

인연담 제목은 자식 없는 장자 이야기입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큰 재산을 남기고 자식 없이 죽은 장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재물을 쌓아 두기만 하고 자신도 남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항아띠(hananti)는 '해친다'는 동사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마지막 줄입니다. 어리석은 이는 '남을 해치듯' 자기를 해친다고 합니다. 남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남을 해치는 것에 견줄 만큼 자기 자신을 해친다는 것입니다. 재물에 대한 목마름이 향하는 곳은 결국 그것을 붙든 사람 자신입니다.

묵상

재물이나 무언가를 붙들다가 정작 나 자신을 힘들게 한 적이 있나요? 남이 아니라 나를 향한 그 상처를 알아차리는 것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잡초가 밭의 병폐이듯 물듦은 이 존재들의 병폐이니, 그러므로 물듦을 벗어난 이에게 베푸는 것은 큰 결실을 맺느니라.

Tiṇadosāni khettāni, rāgadosā ayaṁ pajā; Tasmā hi vītarāgesu, dinnaṁ hoti mahapphalaṁ.

법구경 Dhammapada 356

배경

인연담 제목은 앙꾸라 이야기입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오랫동안 크게 베풀었던 이가 뒷날 작은 보시 하나가 자신의 큰 보시보다 더 큰 결실을 맺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팔리의 비유는 '잡초가 밭을 망치듯 물듦이 사람을 망친다'는 것입니다. 밭은 사람이고 잡초는 물듦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를 뒤집어 '애욕이 밭이고 음·노·치가 씨'라고 옮겼습니다. 망가지는 쪽과 망가뜨리는 쪽이 뒤바뀐 것입니다. 356게부터 359게까지 같은 틀이 물듦, 성냄, 어리석음, 욕심으로 낱말만 바뀌며 네 번 되풀이됩니다.

묵상

누구에게 무엇을 베푸는지가 정말 다르게 다가온 적이 있나요? 많이 주는 것과 잘 주는 것의 차이를 한번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잡초가 밭의 병폐이듯 성냄은 이 존재들의 병폐이니, 그러므로 성냄을 벗어난 이에게 베푸는 것은 큰 결실을 맺느니라.

Tiṇadosāni khettāni, dosadosā ayaṁ pajā; Tasmā hi vītadosesu, dinnaṁ hoti mahapphalaṁ.

법구경 Dhammapada 357

배경

356게의 틀을 그대로 이어받아 낱말만 바뀝니다. 도사(dosa)는 '성냄'입니다. 잡초가 밭의 병폐이듯 성냄은 존재들의 병폐라고 합니다. 앞 게송이 물듦을 벗어난 이에게 베푸는 것을 말했다면, 이 게송은 성냄을 벗어난 이에게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위따도세수(vītadosesu)는 '성냄을 벗어난 이들에게'라는 뜻입니다. 네 게송이 이렇게 같은 틀로 되풀이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받는 이가 어떤 물듦에서도 벗어나 있을수록 베푸는 일의 결실이 커진다는 것을 하나씩 짚어 확인시키는 방식입니다.

묵상

화가 난 상태에서 받은 것과 편안한 마음에서 받은 것이 다르게 느껴진 적이 있나요? 주는 사람의 마음이 무엇을 함께 건네는지 생각해 보세요.

잡초가 밭의 병폐이듯 어리석음은 이 존재들의 병폐이니, 그러므로 어리석음을 벗어난 이에게 베푸는 것은 큰 결실을 맺느니라.

Tiṇadosāni khettāni, mohadosā ayaṁ pajā; Tasmā hi vītamohesu, dinnaṁ hoti mahapphalaṁ.

법구경 Dhammapada 358

배경

같은 틀이 세 번째로 되풀이됩니다. 모하(moha)는 '어리석음'입니다. 잡초가 밭의 병폐이듯 어리석음은 존재들의 병폐라고 합니다. 물듦, 성냄에 이어 어리석음이 다루어지면서, 이 책에서 괴로움의 세 뿌리로 자주 꼽히는 세 가지가 차례로 다 나온 셈입니다. 위따모헤수(vītamohesu)는 '어리석음을 벗어난 이들에게'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게송인 359게는 이 셋에 하나를 더 보태며 이 짧은 연작을 마무리합니다.

묵상

잘 모르는 채로 무언가를 주고받은 적이 있나요? 알고 하는 일과 모르고 하는 일의 결실이 어떻게 다를지 가만히 헤아려 보면 어떨까요?

잡초가 밭의 병폐이듯 욕심은 이 존재들의 병폐이니, 그러므로 욕심을 벗어난 이에게 베푸는 것은 큰 결실을 맺느니라.

Tiṇadosāni khettāni, icchādosā ayaṁ pajā; Tasmā hi vigaticchesu, dinnaṁ hoti mahapphalaṁ.

법구경 Dhammapada 359

배경

네 번째이자 마지막 되풀이입니다. 앞의 셋이 물듦,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전통적인 세 뿌리를 다뤘다면, 이 게송은 잇차(icchā), 곧 '욕심'을 하나 더 보탭니다. 위가띳체수(vigaticchesu)는 '욕심을 벗어난 이들에게'라는 뜻입니다. 24품은 목마름의 뿌리를 파내라는 337게에서 시작해, 그 뿌리를 실제로 벗어난 이에게 베푸는 일의 결실로 끝을 맺습니다. 잡초를 뽑는 농부의 비유로 네 번 되풀이된 이 짧은 연작은, 벗어남이 자신만의 일로 그치지 않고 그를 향한 베풂까지 결실 있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묵상

바라는 마음 없이 무언가를 나눠 본 적이 있나요? 그 순간과 무언가를 바라며 나눴던 순간을 견주어 보면 무엇이 다르게 느껴지나요?

30 수행자의 길 23구절

감각의 문을 지키는 데서 마음의 고요에 이르기까지 - '수행자'라는 이름값을 묻는 스물세 편

눈 단속이 좋고 귀 단속이 좋으며, 코 단속이 좋고 혀 단속이 좋으니라.

Cakkhunā saṁvaro sādhu, sādhu sotena saṁvaro; Ghānena saṁvaro sādhu, sādhu jivhāya saṁvaro.

법구경 Dhammapada 360

배경

25품은 빅쿠(bhikkhu)를 다루는 품으로, 이 앱에서는 '수행자'로 옮깁니다. 본래 '빌어먹는 이'라는 뜻이지만, 이 품은 그 이름값을 하는 삶이 무엇인지 스물세 편에 걸쳐 짚어 갑니다. 삼와라(saṃvara)는 '단속, 지킴'이라는 뜻으로, 이 게송은 눈·귀·코·혀 넷을 듭니다. 다음 게송에서 몸·말·마음이 마저 더해져 한 벌을 이룹니다. 감각의 문을 지키는 일은 무엇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들어오는지 가려 두기 위해서입니다. 무심코 들인 것이 마음결을 바꾸는 일은 승복을 입은 이만 겪는 일이 아닙니다.

묵상

평소 무엇을 가장 많이 보고 듣나요? 그것이 마음에 남기는 자국을 가만히 들여다본 적이 있나요? 오늘 하루, 문을 열어 둔 채로 흘려보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몸 단속이 좋고 말 단속이 좋으며, 마음 단속이 좋고 모든 면에서 단속함이 좋으니라. 모든 면에서 자신을 다잡은 수행자는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느니라.

Kāyena saṁvaro sādhu, sādhu vācāya saṁvaro; Manasā saṁvaro sādhu, sādhu sabbattha saṁvaro; Sabbattha saṁvuto bhikkhu, sabbadukkhā pamuccati.

법구경 Dhammapada 361

배경

앞 게송의 짝으로, 눈·귀·코·혀에 이어 몸·말·마음까지 더해 한 벌을 채웁니다. 삽바타(sabbattha)는 '모든 면에서'라는 뜻으로, 두 번 되풀이되며 무게를 싣습니다. 여섯 문을 낱낱이 세다가 마지막에 '모든 면에서'로 한데 묶는 짜임입니다. 하나만 지키고 나머지를 놓아두면 그 틈으로 들어옵니다. 결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난다고 했지, 즐거움을 얻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속이 무엇을 쌓는 일이 아니라 무엇이 새어 나가지 않게 막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묵상

몸으로도 말로도 마음으로도 다 단속하며 살기는 쉽지 않아요. 그중 나에게 가장 헐거운 문은 어디인가요?

손을 단속하고 발을 단속하고 말을 단속한 이, 그가 가장 훌륭하게 단속한 이니라. 안으로 기쁨을 누리고 마음을 모으며 홀로 지내어 만족하는 이, 그를 수행자라 부르느니라.

Hatthasaṁyato pādasaṁyato, Vācāsaṁyato saṁyatuttamo; Ajjhattarato samāhito, Eko santusito tamāhu bhikkhuṁ.

법구경 Dhammapada 362

배경

앞 두 게송이 감각과 몸·말·마음을 나누어 말했다면, 여기서는 그것을 한 사람의 모습으로 그립니다. 아잣땃라또(ajjhattarato)는 '안으로 기쁨을 누리는'이라는 뜻으로, 즐거움을 밖에서 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에꼬 산뚜시또(eko santusito)는 '홀로 지내며 만족하는'입니다. 홀로 있음과 만족이 나란히 놓인 것이 눈에 띕니다. 혼자 있어서 쓸쓸한 것이 아니라 혼자 있어도 채워져 있다는 뜻입니다. 무언가를 참는 모습이 아니라 이미 넉넉한 사람의 모습을 그린 게송입니다.

묵상

혼자 있는 시간이 허전하게 느껴지나요, 아니면 그 자체로 괜찮게 느껴지나요? 그 차이가 무엇에서 오는지 생각해 보세요.

입을 단속하는 수행자는 신중하게 말하며 들뜨지 않느니라. 그 말이 뜻과 진리를 밝히니 듣기에 달콤하니라.

Yo mukhasaṁyato bhikkhu, mantabhāṇī anuddhato; Atthaṁ dhammañca dīpeti, madhuraṁ tassa bhāsitaṁ.

법구경 Dhammapada 363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꼬깔리까라는 빅쿠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를 헐뜯고 다녀 다른 경들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입을 단속하지 못한 사람의 본보기이니, 이 게송이 그리는 모습과 정반대에 있는 셈입니다. 만따바니(mantabhāṇī)는 '신중하게, 잘 헤아려 말하는'이라는 뜻이고, 아눗다또(anuddhato)는 '들뜨지 않는'입니다. 뜻을 밝히는 말과 달콤하게 들리는 말이 한 문장에 놓인 것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과 듣기 좋게 말하는 것이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묵상

옳은 말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던진 적이 있나요? 같은 말도 신중히 고르면 다르게 가닿을 수 있어요.

진리를 즐거워하고 사랑하며 진리를 깊이 헤아리는 이, 진리를 늘 마음에 새기는 그 수행자는 바른 진리에서 멀어지지 않느니라.

Dhammārāmo dhammarato, dhammaṁ anuvicintayaṁ; Dhammaṁ anussaraṁ bhikkhu, saddhammā na parihāyati.

법구경 Dhammapada 364

배경

담마라모 담마라또(dhammārāmo dhammarato)는 '진리를 뜰로 삼고 진리를 사랑하는 이'라는 뜻으로, 소리가 나란히 겹치는 말놀이입니다. 아누윗찐따얌(anuvicintayaṃ)은 '되풀이해 깊이 생각하는'입니다. 즐기고 사랑하고 헤아리고 새긴다는 네 동사가 한 사람 안에 겹쳐 놓였습니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좋아하기만 하고 새기지 않으면 스쳐 지나가고, 새기기만 하고 좋아하지 않으면 짐이 됩니다. 무엇을 배우든 이 네 가지가 함께 있어야 오래 남습니다.

묵상

배운 것 가운데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는 것과 스쳐 지나간 것이 있나요? 그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에게 온 것을 얕보지 말고 남의 것을 부러워하며 지내지 말라. 남의 것을 부러워하는 수행자는 마음이 한곳에 모이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느니라.

Salābhaṁ nātimaññeyya, nāññesaṁ pihayaṁ care; Aññesaṁ pihayaṁ bhikkhu, samādhiṁ nādhigacchati.

법구경 Dhammapada 365

배경

365-366 두 게송이 짝을 이룹니다. 나띠만녜야(nātimaññeyya)는 '얕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기 것을 얕보는 마음과 남의 것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사실 한 뿌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 게송이 나란히 놓아 보여 줍니다. 둘 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마디(samādhi), 곧 마음이 한곳에 모이는 경지를 이 게송은 마지막에 겁니다. 남의 것을 자꾸 살피는 마음은 그 자체로 흩어진 마음이라, 따로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부러워하는 그 순간 이미 모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묵상

남과 견주는 마음이 들 때, 그 순간 내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 살펴본 적이 있나요?

적게 얻어도 그것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 수행자, 그는 맑은 삶을 살며 나태하지 않느니라. 그런 이를 신들도 참으로 칭송하느니라.

Appalābhopi ce bhikkhu, salābhaṁ nātimaññati; Taṁ ve devā pasaṁsanti, suddhājīviṁ atanditaṁ.

법구경 Dhammapada 366

배경

앞 게송의 짝으로, 이번에는 적게 가진 이의 자리에서 말합니다. 압빠라보(appalābha)는 '적은 소득'입니다. 앞에서 얕보지 말라고 했던 그 마음을 실제로 지켜 낸 이를 여기서 그립니다. 눈에 띄는 것은 그 보상이 사람이 아니라 신들의 칭송이라는 점입니다. 남에게 인정받으려 애써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도 한결같은 것을 하늘이 알아준다는 그림입니다. 수따지위(suddhājīvī)는 '맑게 살아가는 이'로, 더 가지려 애쓰지 않고 정직하게 사는 삶을 가리킵니다.

묵상

적게 가진 것을 부끄러워한 적이 있나요? 그 안에서도 한결같이 지켜 온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름과 형상 어디에도 집착이란 없고, 없는 것을 두고 슬퍼하지 않는 이, 그를 수행자라 부르느니라.

Sabbaso nāmarūpasmiṁ, yassa natthi mamāyitaṁ; Asatā ca na socati, sa ve “bhikkhū”ti vuccati.

법구경 Dhammapada 367

배경

나마루빠(nāmarūpa)는 '이름과 형상'으로, 사람을 이루는 정신과 물질을 함께 가리키는 말입니다. 마마이땀(mamāyitaṃ)은 '내 것이라 여기는 집착'입니다. 앞 구절이 가짐에 대한 집착을 짚었다면, 뒤 구절은 잃음에 대한 슬픔을 짚습니다. 둘은 한 뿌리에서 나온 두 얼굴입니다. 내 것이라 여기던 것이 없어졌을 때 슬픔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게송이 겨눈 것은 슬픔 자체가 아니라 그 앞에 있던 집착입니다. 슬픔이 일 때 그 뿌리를 되짚어 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묵상

무언가를 잃고 슬펐던 순간, 그것을 얼마나 '내 것'으로 여기고 있었는지 돌아본 적이 있나요?

자애 속에 머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믿는 수행자는, 지어진 것이 가라앉은 그 고요하고 행복한 경지에 이르느니라.

Mettāvihārī yo bhikkhu, pasanno buddhasāsane; Adhigacche padaṁ santaṁ, saṅkhārūpasamaṁ sukhaṁ.

법구경 Dhammapada 368

배경

멧따위하리(mettāvihārī)는 '자애 속에 사는 이'라는 뜻입니다. 자애가 앞에 놓이고 믿음이 뒤따르는 짜임입니다. 상카루빠사망 수캄(saṅkhārūpasamaṃ sukhaṃ)은 '지어진 것이 가라앉은 행복'으로, 이 품 뒤쪽 381게송에도 그대로 다시 나옵니다. 상카라(saṅkhāra)는 '지어진 것', 곧 조건 따라 일어났다 스러지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가라앉는다는 것은 없애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더는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자애로 시작해 고요로 끝나는 흐름이 이 게송의 짜임입니다.

묵상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넉넉했던 날, 그 하루가 유난히 고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나요?

수행자여, 이 배에서 물을 퍼내라. 비워 내면 배가 가벼워지리라. 욕망과 성냄을 끊어 내면 그때 열반에 이르리라.

Siñca bhikkhu imaṁ nāvaṁ, sittā te lahumessati; Chetvā rāgañca dosañca, tato nibbānamehisi.

법구경 Dhammapada 369

배경

이 품에서 몇 안 되는 직접 부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짜(siñca)는 '퍼내라'는 명령형으로, '수행자여'라는 부름과 함께 놓였습니다. 배에 물이 차면 가라앉듯, 마음에 무언가 차오르면 무거워집니다. 라후메싸띠(lahumessati)는 '가벼워지리라'는 뜻으로, 비움과 가벼움을 곧바로 이어 놓았습니다. 무엇을 더 채워서가 아니라 덜어 내어 나아간다는 그림이 이 게송의 핵심입니다. 라가(rāga, 욕망)와 도사(dosa, 성냄)를 끊는 일도 같은 결입니다. 무언가를 이루는 일이 아니라 이미 차 있던 것을 덜어 내는 일입니다.

묵상

요즘 마음에 무겁게 차오른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무엇을 더하지 않고 덜어 내는 쪽으로 가 볼 수 있을까요?

다섯 가지를 끊고 다섯 가지를 버리며 다섯 가지를 더 닦으라. 다섯 가지 속박을 넘어선 수행자는 거센 물을 건넜다 불리느니라.

Pañca chinde pañca jahe, pañca cuttari bhāvaye; Pañca saṅgātigo bhikkhu, “oghatiṇṇo”ti vuccati.

법구경 Dhammapada 370

배경

오가띤노(oghatiṇṇo)는 '거센 물을 건넌 이'라는 뜻으로, 1품 첫머리부터 되풀이되는 강물의 비유입니다. 여기서는 끊을 다섯, 버릴 다섯, 닦을 다섯이 나오는데 무엇인지 이 게송 자체는 밝히지 않습니다. 주석서는 이를 낮은 족쇄 다섯과 높은 족쇄 다섯, 그리고 다섯 가지 능력으로 풀이합니다. 셋을 나란히 놓되 동사를 다르게 쓴 것이 눈에 띕니다. 끊고 버리고 닦는 일은 순서도 성질도 다릅니다. 놓아야 할 것과 길러야 할 것을 한 문장 안에 함께 담은 셈입니다.

묵상

끊어야 할 것과 채워야 할 것을 뒤바꿔 놓고 애쓴 적이 있나요? 그 둘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수행자여, 방심하지 말고 마음을 모으라. 그대 마음이 감각의 즐거움에 빠지게 하지 말라. 방심한 채 뜨거운 쇠구슬을 삼키지 말라. 불타면서 ‘이것이 괴로움이다’ 울부짖지 말라.

Jhāya bhikkhu mā pamādo, Mā te kāmaguṇe ramessu cittaṁ; Mā lohaguḷaṁ gilī pamatto, Mā kandi “dukkhamidan”ti dayhamāno.

법구경 Dhammapada 371

배경

네 줄 모두 '말라'로 끝나는 금지형이라 명령이 겹겹이 쌓입니다. 로하굴랑 길리(lohaguḷaṃ gilī)는 '뜨거운 쇠구슬을 삼키다'라는 뜻으로, 강한 이미지를 씁니다. 방심한 채 즐거워 보이는 것을 삼켰다가 나중에 그것이 몸을 태우는 것을 알고 우는 그림입니다. 삼킬 때는 몰랐다가 불탈 때에야 아는 순서가 이 비유의 무서운 지점입니다. 감각의 즐거움이 처음부터 뜨겁게 보였다면 아무도 삼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음 게송이 이 경고를 이어받아 무엇이 그 뜨거움을 미리 알아채게 하는지를 말합니다.

묵상

삼킬 때는 달콤해 보였는데 나중에야 뜨거웠던 것을 삼켰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지혜 없는 이에게 마음 모음이 없고 마음을 모으지 않는 이에게 지혜가 없느니라. 마음 모음과 지혜를 함께 갖춘 이는 참으로 열반에 가까이 있느니라.

Natthi jhānaṁ apaññassa, paññā natthi ajhāyato; Yamhi jhānañca paññā ca, sa ve nibbānasantike.

법구경 Dhammapada 372

배경

법구경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게송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나(jhāna, 마음 모음)와 빤냐(paññā, 지혜)를 서로가 서로의 조건으로 놓았습니다. 마음을 모으지 못하면 무엇을 보아도 흩어진 채 스쳐 지나가고, 지혜가 없으면 무엇에 마음을 모아야 할지조차 가늠할 수 없습니다. 이 게송에는 '빅쿠'라는 낱말이 없습니다. 앞뒤 게송들이 수행자를 직접 부르거나 가리키는 것과 다릅니다.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말한 것이지, 승복을 입은 이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언가에 몰두하되 방향을 모르거나, 알기는 하되 거기 머물지 못하는 일은 누구나 겪습니다.

묵상

무언가에 깊이 몰입했지만 방향을 몰랐던 적, 혹은 알기는 했지만 몰입하지 못했던 적이 있나요?

수행자가 빈집에 들어가 마음이 고요해지면, 진리를 바르게 통찰하는 그에게 인간을 넘어선 기쁨이 있느니라.

Suññāgāraṁ paviṭṭhassa, santacittassa bhikkhuno; Amānusī rati hoti, sammā dhammaṁ vipassato.

법구경 Dhammapada 373

배경

순냐가랑 빠윗타사(suññāgāraṃ paviṭṭhassa)는 '빈집에 들어간 이에게'라는 뜻입니다. 앞 게송이 감각의 즐거움이 지닌 뜨거움을 경고했다면, 여기서는 그 자리를 벗어나 홀로 있을 때 무엇이 오는지를 말합니다. 아마누시 라띠(amānusī rati)는 '인간을 넘어선 기쁨'으로, 감각으로 얻는 즐거움과 다른 종류의 기쁨을 가리킵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 기쁨이 빈집 자체에서 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진리를 바르게 통찰할 때 옵니다. 조용한 곳에 있어도 마음이 시끄러우면 이 기쁨은 오지 않습니다.

묵상

혼자, 조용한 곳에 있을 때 오히려 마음이 더 시끄러웠던 적이 있나요? 반대로 고요해졌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몸과 마음의 무더기가 일어나고 사라짐을 때마다 통찰하는 이는, 희열과 환희를 얻나니 그것이 죽음 없음을 아는 이의 몫이니라.

Yato yato sammasati, khandhānaṁ udayabbayaṁ; Labhatī pītipāmojjaṁ, amataṁ taṁ vijānataṁ.

법구경 Dhammapada 374

배경

칸다낭 우다얍바양(khandhānaṃ udayabbayaṃ)은 '무더기가 일어나고 사라짐'이라는 뜻입니다. 칸다(khandha, 오온)는 몸과 느낌과 인식과 지어냄과 알아차림, 사람을 이루는 다섯 가지 무더기입니다. 이 게송이 권하는 것은 그것을 다스리는 일이 아니라 지켜보는 일입니다. 삼마사띠(sammasati)는 '살펴보다, 헤아려 보다'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오음을 제어하고 뜻을 물처럼 굴복시키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면 살펴보는 일이 다스리는 일이 됩니다. 빠알리가 겨눈 것은 통제가 아니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그저 지켜보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묵상

무언가를 다스리려 애쓰는 것과 그저 지켜보는 것은 달라요. 최근에 어느 쪽을 해 보았나요?

지혜로운 수행자에게는 이것이 그 시작이니, 감각을 지키고 만족하며 지켜야 할 조목 안에서 단속하는 일이니라.

Tatrāyamādi bhavati, idha paññassa bhikkhuno; Indriyagutti santuṭṭhi, pātimokkhe ca saṁvaro.

법구경 Dhammapada 375

배경

이 품 안에서 유일하게 '시작'을 말하는 게송입니다. 앞서 이 품이 다뤄 온 것들이 여기서 셋으로 간추려집니다. 감각의 지킴, 만족, 빠띠목카(pātimokkha)에서의 단속입니다. 빠띠목카는 승가가 함께 지키기로 한 조목들을 가리킵니다. 눈에 띄는 것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한 점입니다. 372게송이 마음 모음과 지혜를 말했고 373게송이 빈집에서 오는 기쁨을 말했는데, 그 앞에 이 세 가지가 먼저 놓인다는 것입니다. 감각을 지키고 만족하는 일은 승가의 조목이 없어도 누구나 시작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묵상

무언가를 이루기 전에 먼저 다져야 할 것들을 건너뛴 적이 있나요?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시작에 가까운가요, 그 너머인가요?

선하며 맑게 살고 게으르지 않은 이를 벗으로 삼으라. 손님을 맞을 줄 알고 행실이 반듯한 이가 되라. 그리하면 기쁨이 가득해져 마침내 괴로움을 끝내리라.

Mitte bhajassu kalyāṇe, suddhājīve atandite; Paṭisanthāravutyassa, ācārakusalo siyā; Tato pāmojjabahulo, dukkhassantaṁ karissati.

법구경 Dhammapada 376

배경

미떼(mitte)는 '벗들을'이라는 뜻으로, 이 게송은 벗을 사귀는 일에서 시작해 자신의 됨됨이로 옮겨 갑니다. 사귈 벗의 조건을 먼저 말하고, 그다음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말하는 순서입니다. 빠띠산타라부띠(paṭisanthāravutti)는 '손님을 맞이할 줄 아는 성품'입니다. 벗을 가려 사귀는 일과 자신이 좋은 벗이 되는 일이 나란히 놓인 셈입니다. 좋은 벗을 곁에 두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누구를 곁에 두느냐는 승복을 입은 이에게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묵상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고 있나요? 나는 그들에게 어떤 벗인가요?

재스민 꽃이 시든 꽃잎을 스스로 놓아 버리듯, 수행자들이여, 그처럼 욕망과 성냄을 떨쳐 버리라.

Vassikā viya pupphāni, maddavāni pamuñcati; Evaṁ rāgañca dosañca, vippamuñcetha bhikkhavo.

법구경 Dhammapada 377

배경

바씨까(vassikā)는 밤에 피는 재스민을 가리키는 꽃 이름으로, 흔히 밤꽃으로 옮깁니다. 마당와니(maddavāni)는 '시든'이라는 뜻입니다. 이 꽃은 시든 꽃잎을 붙들지 않고 스스로 떨굽니다. 누가 떼어 내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저절로 놓는다는 점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욕망과 성냄을 놓는 일도 이와 같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억지로 뜯어내는 것이 아니라 꽃이 꽃잎을 놓듯 자연스러워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수행자들이여'라는 부름이 이 품에서 유일하게 복수로 나오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묵상

붙들고 있던 마음을 애써 뜯어낸 적과 저절로 놓아진 적, 둘 다 겪어 보았나요?

몸이 고요하고 말이 고요하며 마음도 한결같이 고요한 이, 마음을 굳게 모아 세속의 미끼를 뱉어 버린 수행자를 고요한 이라 부르느니라.

Santakāyo santavāco, santavā susamāhito; Vantalokāmiso bhikkhu, “upasanto”ti vuccati.

법구경 Dhammapada 378

배경

산따까요 산따와쪼(santakāyo santavāco)는 '몸이 고요하고 말이 고요한 이'라는 뜻으로, 몸과 말과 마음 세 가지가 나란히 놓입니다. 361게송에서 단속하라고 했던 그 세 가지가 여기서는 이미 고요해진 모습으로 다시 나옵니다. 완따로까미소(vantalokāmiso)는 '세속의 미끼를 뱉어 버린'이라는 뜻으로, 로까미사(lokāmisa)는 미끼처럼 사람을 낚는 세속의 것들을 가리킵니다. 삼켰다가 다시 뱉어 낸다는 그림이 강렬합니다. 한 번 삼켰던 것을 게워 내는 일이니, 처음부터 몰랐던 사람의 고요함과는 결이 다릅니다.

묵상

한때 붙잡았다가 스스로 놓아 버린 것이 있나요? 그때의 고요함은 어디서 온 것이었나요?

스스로 자신을 다그치고 자기 자신을 낱낱이 살피라. 자신을 지키며 늘 깨어 있는 수행자는 행복하게 살아가리라.

Attanā codayattānaṁ, paṭimaṁsetha attanā; So attagutto satimā, sukhaṁ bhikkhu vihāhisi.

법구경 Dhammapada 379

배경

앗따나 짜다얏따낭(attanā codayattānaṃ)은 '스스로 자신을 일깨우라'는 뜻으로, 두 동사 모두 자신을 향합니다. 남이 일깨워 주기를 기다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빠띠맛세타 앗따나(paṭimaṃsetha attanā)는 '자기 자신을 살피라'로, 앞 구절과 짝을 이룹니다. 다그치는 것과 살피는 것이 함께 있어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다그치기만 하고 살피지 않으면 채찍질만 남고, 살피기만 하고 다그치지 않으면 자책만 남습니다. 앗따굿또 사띠마(attagutto satimā)는 '자신을 지키고 깨어 있는'으로, 380게송에서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라는 말로 이어집니다.

묵상

스스로를 다그치기만 했나요, 아니면 가만히 살펴보기도 했나요? 지금 나에게는 어느 쪽이 더 필요한가요?

자기야말로 자기의 의지처이니 다른 누가 의지처가 되겠느냐. 자기야말로 자기가 가는 길이니 좋은 말을 다루는 상인처럼 자신을 다스릴지니라.

Attā hi attano nātho, ko hi nātho paro siyā; Attā hi attano gati, tasmā saṁyamamattānaṁ; Assaṁ bhadraṁva vāṇijo.

법구경 Dhammapada 380

배경

앗따 히 앗따노 나토(attā hi attano nātho)는 '자기야말로 자기의 의지처다'라는 뜻으로, 12품 160게송의 첫 두 줄과 글자 하나 다르지 않게 같습니다. 그때는 '나 자신'을 품 전체의 주제로 놓고 한 말이었고, 여기서는 수행자의 자리에서 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에 무아(無我)를 끌어와 '헤아리면 내가 없으니 나를 덜어야 한다'로 뒤집었습니다. 자기를 세우라는 말이 자기를 지우라는 말로 바뀐 셈입니다. 빠알리는 자신을 없애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좋은 말을 다루는 상인에 비유해, 자신을 다스리고 이끌어야 할 것으로 그립니다.

묵상

내 삶의 방향을 남에게 맡기고 있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그 고삐를 다시 쥔다면 무엇부터 바꾸고 싶나요?

기쁨이 넘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믿는 수행자는, 지어진 것이 가라앉은 그 고요하고 행복한 경지에 이르느니라.

Pāmojjabahulo bhikkhu, pasanno buddhasāsane; Adhigacche padaṁ santaṁ, saṅkhārūpasamaṁ sukhaṁ.

법구경 Dhammapada 381

배경

368게송과 앞 구절만 바뀐 채 그대로 되풀이됩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왁깔리 장로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부처님의 몸을 바라보는 데 마음을 빼앗겨 가르침을 등한히 하다가, 크게 흔들리는 시간을 지난 뒤에야 '가르침을 보는 이가 나를 본다'는 말씀을 듣고 참된 믿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겉모습에 쏠렸던 기쁨이 가르침을 향한 기쁨으로 옮겨 간 이야기인 셈입니다. 빠못자바훌로(pāmojjabahulo)는 '기쁨이 넘치는'이라는 뜻으로, 억지로 짜낸 기쁨이 아니라 저절로 넘치는 기쁨을 가리킵니다.

묵상

무언가의 겉모습에 마음을 빼앗겨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친 적이 있나요? 그 뒤에 무엇이 달라졌나요?

젊은 수행자라도 부처님 가르침에 마음을 쏟으면,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온 세상을 밝히느니라.

Yo have daharo bhikkhu, yuñjati buddhasāsane; Somaṁ lokaṁ pabhāseti, abbhā muttova candimā.

법구경 Dhammapada 382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입니다. 다하로 빅쿠(daharo bhikkhu)는 '젊은 수행자'로, 나이가 적음을 뜻이 얕음과 같이 두지 않습니다. 주석서는 어린 나이에 출가해 빠르게 깨달음에 이른 사미의 이야기를 이 게송에 이어 전합니다. 나이나 경력이 아니라 가르침에 마음을 쏟는 일 자체가 빛을 낸다는 것입니다. 압바 뭇또와 짠디마(abbhā muttova candimā)는 '구름에서 벗어난 달처럼'이라는 뜻으로, 달은 원래 빛나지만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것뿐이라는 그림입니다. 이 품이 몸의 단속에서 시작해 빛을 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묵상

나이나 경력이 적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낮춰 본 적이 있나요? 지금 마음을 쏟고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31 바라문 41구절

태생이 아니라 행위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마흔한 번 되풀이해 못박는, 법구경의 마지막이자 가장 긴 품

흐름을 끊어라, 힘써 나아가 욕망을 몰아내라, 바라문이여. 지어진 것들이 다함을 알았다면 그대는 지어지지 않은 것을 아는 이니라, 바라문이여.

Chinda sotaṁ parakkamma, kāme panuda brāhmaṇa; Saṅkhārānaṁ khayaṁ ñatvā, akataññūsi brāhmaṇa.

법구경 Dhammapada 383

배경

이 품의 첫 게송으로, 바라문(brāhmaṇa)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바라문은 본래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사제 가문을 뜻하는 말인데, 이 품 전체는 그 말을 쓰는 방식을 통째로 바꾸어 놓습니다. 소땅(sotaṁ)은 '흐름'으로, 감각을 따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마음의 물살을 가리킵니다. 상카라(saṅkhāra, 지어진 것)들이 다함을 안다는 것은 짓고 짓는 그 활동 자체가 멎는 자리를 본다는 뜻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결말을 다르게 맺어, '욕망을 베지 못하면 뜻이 오히려 달아난다'는 경계로 끝맺습니다. 이루어야 할 것을 말하는 대신 이루지 못했을 때의 위험을 말한 것입니다. 팔리 원문에는 그 경계 대신 지어지지 않은 것을 아는 이라는 결론이 놓여 있습니다.

묵상

지금 나를 자꾸 끌고 가는 흐름은 무엇인가요?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과 실제로 끊어 내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되는 거리가 있을까요?

두 가지의 저 언덕에 이른 이, 그가 바라문이니라. 그리 아는 이에게는 모든 속박이 끝에 이르느니라.

Yadā dvayesu dhammesu, pāragū hoti brāhmaṇo; Athassa sabbe saṁyogā, atthaṁ gacchanti jānato.

법구경 Dhammapada 384

배경

드웨수 담메수(dvayesu dhammesu)는 '두 가지 것에서'라는 뜻인데, 그 두 가지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주석에 따라 풀이가 갈립니다. 앞 게송이 지어진 것과 지어지지 않은 것을 말했으니 이어서 읽으면, 이 세상의 성질을 아는 지혜와 그 너머를 아는 지혜, 이 둘을 다 건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빠라구(pāragū)는 '저 언덕에 이른 이'로, 강을 건너 저편에 닿은 사람을 그리는 말입니다. 383게송의 '아는 이'와 짝을 이루어, 안다는 것에서 건넌다는 것으로 그림이 한 걸음 나아갑니다. 뒷줄은 그 결과를 말합니다. 그런 이에게는 모든 속박이 저절로 끝에 이른다고 합니다. 애써 끊는 것이 아니라 다다르고 보니 이미 풀려 있다는 것입니다.

묵상

완전히 알고 나면 저절로 풀리는 것과, 애써 끊어야만 풀리는 것이 있다면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저 언덕도 이 언덕도 둘 다도 그에게는 없나니, 고뇌를 떠나고 얽매임에서 벗어난 이,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assa pāraṁ apāraṁ vā, pārāpāraṁ na vijjati; Vītaddaraṁ visaṁyutt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385

배경

이 게송부터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라는 같은 마무리가 이 품 끝까지 스물다섯 번 넘게 되풀이됩니다. 되풀이 자체가 하는 일이 있습니다. 바라문이라는 이름은 본래 태생을 두고 굳어진 판정이라, 한 번 내려지면 다시 묻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부처님은 그 판정하는 자리에 직접 서서, 같은 틀로 되풀이해 판정을 새로 내립니다. 이번 조건은 저 언덕과 이 언덕 어느 쪽도 없다는 것입니다. 384게송이 건너서 이르는 저 언덕을 말했다면, 여기서는 언덕이라는 구분 자체가 사라진 자리를 말합니다. 다다를 곳도 떠나온 곳도 없으니 더 흔들릴 일이 없습니다. 위땃다랑(vītaddaraṁ)은 '고뇌를 떠난'이라는 뜻입니다.

묵상

저기와 여기를 나누어 늘 어느 한쪽을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나요? 그 구분이 없다면 지금 이 자리는 어떻게 보일까요?

자나에 들어 때 묻지 않고 고요히 앉은 이, 할 일을 마치고 번뇌가 다한 이, 최상의 경지에 이른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Jhāyiṁ virajamāsīnaṁ, katakiccamanāsavaṁ; Uttamatthamanuppatt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386

배경

이 게송은 네 가지 조건을 한 사람 위에 겹쳐 놓습니다. 자나(jhāna, 깊이 잠겨 봄)에 든 것, 때 묻지 않은 것, 할 일을 마친 것, 아사와(āsava, 흘러드는 것)가 다한 것입니다. 앉은 자세를 뜻하는 아시나(āsīna)까지 더하면 몸과 마음이 함께 그려집니다. 밖에서 보면 그저 고요히 앉아 있는 사람이지만, 그 고요 안에 이미 끝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웃따마땅(uttamattha)은 '최상의 뜻, 최상의 목적'으로 흔히 완전한 깨달음을 가리킵니다. 이 품에서 앞으로 되풀이될 조건들이 대개 이렇습니다. 무엇을 더 갖추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다했느냐로 사람을 가늠합니다.

묵상

겉으로 고요해 보이는 것과 안에서 정말 끝난 일이 있는 것, 이 둘은 다르지 않을까요? 지금 나의 고요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요?

낮에는 해가 빛나고 밤에는 달이 빛나며, 갑옷 두른 전사가 빛나고 자나에 든 바라문이 빛나느니라. 그러나 깨달은 이는 밤낮 언제나 그 위광으로 빛나느니라.

Divā tapati ādicco, rattimābhāti candimā; Sannaddho khattiyo tapati, jhāyī tapati brāhmaṇo; Atha sabbamahorattiṁ, buddho tapati tejasā.

법구경 Dhammapada 387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아난다 존자가 어느 바라문의 물음에 답한 일을 전합니다. 무엇이 빛나느냐는 물음에 낮에는 해, 밤에는 달, 전쟁터에서는 갑옷 두른 전사, 수행 중에는 자나에 든 바라문이 빛난다고 답하고, 그 넷을 모두 넘어서는 빛을 마지막에 놓습니다. 부처님의 빛은 시간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의 넷은 저마다 자리와 때가 있어야 빛나지만, 다섯째는 그런 조건이 없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여기서 바라문을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한다는 점입니다. 자나에 든 바라문은 실제로 빛나는 존재입니다. 다만 그 빛에도 낮과 밤의 몫이 있을 뿐, 온전한 빛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묵상

내가 가진 빛에는 어떤 때와 자리가 필요한가요? 그 조건이 사라져도 여전히 빛날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악을 몰아냈다 하여 바라문이라 부르고 평온한 행실로 수행자라 부르나니, 제 안의 더러움을 내쫓기에 그래서 ‘집을 나온 이’라 부르느니라.

Bāhitapāpoti brāhmaṇo, Samacariyā samaṇoti vuccati; Pabbājayamattano malaṁ, Tasmā “pabbajito”ti vuccati.

법구경 Dhammapada 388

배경

이 게송은 낱말 셋을 그 소리가 담고 있는 뿌리로 되짚습니다. 바히따빠뽀(bāhitapāpo, 악을 몰아낸 이)와 브라흐마나(brāhmaṇa)의 소리를 겹치고, 사마짜리야(samacariyā, 평온한 행실)와 사마나(samaṇa)를 겹치고, 빱바자야(pabbājaya, 내쫓다)와 빱바지따(pabbajito, 집을 나온 이)를 겹칩니다. 세 이름 모두 원래는 신분이나 차림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여기서는 그 소리를 실마리 삼아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가리키는 말로 다시 풉니다. 이름이 가리키는 뜻을 그 이름의 소리 안에서 되찾아 오는 방식입니다. 26품 전체가 이런 되찾기의 연속이며, 이 게송은 그 방식을 가장 압축해서 보여 줍니다.

묵상

내가 가진 이름이나 자리는 원래 무엇을 가리키던 말이었을까요? 지금 나는 그 뜻에 얼마나 값하고 있을까요?

바라문을 때리지 말라, 바라문도 노여움을 풀어놓지 말라. 바라문을 때리는 이가 부끄럽고 맞고서 성냄을 풀어놓는 이는 더욱 부끄러우니라.

Na brāhmaṇassa pahareyya, nāssa muñcetha brāhmaṇo; Dhī brāhmaṇassa hantāraṁ, tato dhī yassa muñcati.

법구경 Dhammapada 389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사리뿟따 존자가 걸식하다 느닷없이 얻어맞은 일을 전합니다. 그런데도 존자는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그대로 이어 갔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라문은 신분이 아니라 이미 흘러드는 것이 다한 이, 곧 아라한을 가리킵니다. 게송은 두 방향에서 말합니다. 먼저 그런 이를 때리지 말라고 하고, 이어 맞은 그 이도 노여움을 풀어놓지 말라고 합니다. 디(dhī)는 '부끄럽다, 수치스럽다'는 감탄사입니다. 때린 이가 부끄럽다는 것은 예상할 수 있지만, 게송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맞고서 성냄을 터뜨리는 쪽이 더 부끄럽다고 합니다. 맞은 것은 어쩔 수 없어도 그에 답하는 마음은 자기 몫이라는 것입니다.

묵상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그 일과 그에 대한 나의 반응을 따로 떼어 볼 수 있을까요?

바라문에게 이보다 나은 것은 없나니, 사랑스러운 것들에서 마음을 억누를 때이니라. 해치려는 마음이 물러나는 만큼 그만큼 괴로움도 가라앉느니라.

Na brāhmaṇassetadakiñci seyyo, Yadā nisedho manaso piyehi; Yato yato hiṁsamano nivattati, Tato tato sammatimeva dukkhaṁ.

법구경 Dhammapada 390

배경

389게송이 맞고도 성내지 않는 일을 말했다면, 이 게송은 그 뿌리를 더 파고듭니다. 니세도(nisedho)는 '억누름, 붙잡아 세움'이라는 뜻이고, 삐예히(piyehi)는 '사랑스러운 것들에서'라는 뜻입니다. 흔히 억누른다는 말은 성냄에 붙여 쓰지만, 여기서는 사랑스러운 것에 마음이 끌려가는 쪽에 붙여 씁니다. 애착과 해치려는 마음이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뒷줄은 그 결과를 재는 방식을 보여 줍니다. 힝사마노(hiṁsamano, 해치려는 마음)가 물러나는 만큼 괴로움도 가라앉는다고 합니다. 한 번에 다 없어지는 일이 아니라 물러나는 만큼씩 가라앉는, 정도의 문제로 그린 것입니다.

묵상

사랑하는 마음과 해치려는 마음이 실은 한 뿌리에서 나온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몸으로도 말로도 마음으로도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이 세 가지 자리를 다스린 이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assa kāyena vācāya, manasā natthi dukkaṭaṁ; Saṁvutaṁ tīhi ṭhānehi,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391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마하빠자빠띠 고따미 존자니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부처님을 길러 준 이모이자 첫 비구니로, 몸과 말과 마음 세 자리를 두루 다스린 이의 본보기로 이 말씀이 놓였다고 합니다. 둑까땅(dukkaṭaṁ)은 '잘못 지어진 일, 나쁜 짓'을 뜻합니다. 세 가지를 따로따로 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세 자리(tīhi ṭhānehi) 전체를 하나로 묶어 다스린다고 한 점이 눈에 띕니다. 몸으로는 참아도 말이 새어 나오거나, 말은 삼가도 마음이 들끓는 경우가 흔합니다. 이 게송은 그 셋이 따로 놀지 않는 상태를 조건으로 듭니다.

묵상

몸으로는 참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계속 미워한 적이 있나요? 그럴 때 정말 다스린 것은 어느 자리였을까요?

바르게 깨달은 이가 편 가르침을 누구에게서 배워 알았다면, 불에 바치는 제사를 받들듯 정성을 다해 그 사람을 섬길지니라.

Yamhā dhammaṁ vijāneyya, sammāsambuddhadesitaṁ; Sakkaccaṁ taṁ namasseyya, aggihuttaṁva brāhmaṇo.

법구경 Dhammapada 392

배경

주석서는 사리뿟따 존자가 아라한이 되고도 오래도록 앗사지 존자가 머무는 방향을 향해 예를 올렸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처음 가르침을 일러 준 이를 잊지 않은 것입니다. 이 게송의 짜임을 보면 팔리는 '누구에게서 그 가르침을 배웠다면 바라문이 불의 제사를 받들듯 그 사람을 정성껏 예배하라'고 합니다. 가르쳐 준 사람을 향한 예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에서 사람을 지우고 '마음이 부처가 설한 가르침을 밝게 알면 스스로 귀의하니 물보다 깨끗하다'로 바꾸었습니다. 밖에 있는 스승을 향하던 예가 안의 마음으로 옮겨 간 것입니다. 아기훗땅(aggihuttaṁ)은 바라문이 날마다 불에 공물을 바치던 제사로, 그들에게 가장 정성스러운 의례를 빌려 온 비유입니다.

묵상

지금의 나를 만든 가르침을 준 사람을, 나는 여전히 마음에 두고 있나요?

엉킨 머리로도, 혈통으로도, 태생으로도 바라문이 되지 않느니라. 진실과 이치를 지녀 청정한 이, 그이가 바로 바라문이니라.

Na jaṭāhi na gottena, na jaccā hoti brāhmaṇo; Yamhi saccañca dhammo ca, so sucī so ca brāhmaṇo.

법구경 Dhammapada 393

배경

이 게송이 26품 전체의 못입니다. 자짜(jaccā)는 '태생으로'라는 뜻으로, 당시 바라문은 태어날 때 이미 정해지는 사제 가문이었습니다. 대를 이어 물려받는 신분이지 스스로 얻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부처님은 바로 그 전제를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엉킨 머리도, 물려받은 혈통도, 태어난 가문도 바라문을 만들지 못한다고 합니다. 대신 진실(sacca)과 정의(dhamma)를 지녀 청정한 이, 그 사람이 바라문이라고 합니다. 태생이 아니라 행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입니다. 앞선 아홉 게송이 저마다 다른 조건을 들었지만, 그 모든 조건이 공통으로 겨누는 표적이 바로 이 게송에서 드러납니다. 세습으로 정해지던 이름을, 지금 이 순간의 행실로 다시 정하는 것입니다.

묵상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타고난 자리로 정해지나요, 지금 하고 있는 일로 정해지나요?

어리석은 이여, 엉킨 머리가 네게 무슨 소용이며 가죽 옷이 네게 무슨 소용이냐. 속은 덤불로 우거졌는데 겉만 문지르고 있구나.

Kiṁ te jaṭāhi dummedha, kiṁ te ajinasāṭiyā; Abbhantaraṁ te gahanaṁ, bāhiraṁ parimajjasi.

법구경 Dhammapada 394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꾸민 어느 고행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393게송이 무엇이 바라문을 만들지 않는지 차분히 밝혔다면, 이 게송은 같은 말을 화난 어조로 되풀이합니다. 둠메다(dummedha)는 '어리석은 자여'라는 직접적인 부름입니다. 가하낭(gahanaṁ)은 '덤불, 우거진 수풀'로, 뒤엉켜 헤치고 들어갈 수 없는 상태를 그립니다. 그 덤불이 겉의 머리카락이 아니라 속에 있다는 것이 이 게송의 요점입니다. 아지나사띠야(ajinasāṭiyā, 가죽 옷)도 엉킨 머리와 함께 당시 고행자들이 걸치던 차림입니다. 겉을 문지르는 일은 하루면 되지만 속의 덤불은 문지른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묵상

겉을 다듬는 데 쓰는 시간과 속을 들여다보는 데 쓰는 시간, 요즘 나는 어느 쪽에 더 많이 쓰고 있나요?

누더기를 걸치고 야위어 핏줄이 드러난 이, 홀로 숲에서 자나에 든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Paṁsukūladharaṁ jantuṁ, kisaṁ dhamanisanthataṁ; Ekaṁ vanasmiṁ jhāyant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395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을 끼사고따미 장로니와 잇대어 전합니다. 아이를 잃고 겨자씨를 구하러 온 마을을 헤매던 그 여인이 훗날 누더기를 걸치고 마르도록 애써 정진하는 수행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394게송이 겉만 꾸민 이를 꾸짖었다면, 이 게송은 정반대로 겉조차 초라한 이를 바라문이라 부릅니다. 조건은 같은 누더기지만 방향이 다릅니다. 다마니산타땅(dhamanisanthataṁ)은 '핏줄이 드러날 만큼 야윈'이라는 뜻으로, 몸을 꾸미는 데 마음 쓰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에깡 와나스밍(ekaṁ vanasmiṁ, 홀로 숲에서)도 눈에 띕니다. 누가 봐 주지 않아도 이어 가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묵상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이어 가고 있는 일이 있나요? 그것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을까요?

모태에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하여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지 않느니라. 무언가에 매여 있다면 ‘존자’라는 이름은 얻어도 바라문은 되지 못하나니,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아무것도 취하지 않는 이,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Na cāhaṁ brāhmaṇaṁ brūmi, yonijaṁ mattisambhavaṁ; Bhovādi nāma so hoti, sace hoti sakiñcano; Akiñcanaṁ anādān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396

배경

이 게송은 393게송이 세운 논쟁을 가장 또렷하게 되짚습니다. 팔리가 부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혈통입니다. 요니장 맛띠삼바왕(yonijaṁ mattisambhavaṁ)은 '모태에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이라는 뜻으로, 태생을 정면으로 겨눕니다. 보와디(bhovādī)는 당시 바라문들이 서로를 부르던 '존자여'라는 존칭인데, 그 이름으로 불려도 무언가에 매여 있다면 소용없다고 합니다. 이름과 실제를 다시 한번 가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에서 삭발과 호칭을 부정할 뿐 혈통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깎았다고 사문이 아니고 길하다 일컫는다고 범지가 아니다'라고 하여, 논쟁의 상대가 사라진 것입니다. 마지막 품 전체를 떠받치는 뼈대가 태생이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라는 물음인데, 그 축이 팔리에는 있고 한역에는 없습니다.

묵상

내가 물려받은 것과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을 나눠 본다면, 지금 나를 나답게 하는 쪽은 어디에 더 가까울까요?

모든 속박을 끊어버리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 집착을 넘어서 얽매임 없는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Sabbasaṁyojanaṁ chetvā, yo ve na paritassati; Saṅgātigaṁ visaṁyutt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397

배경

빠릿따사띠(paritassati)는 '떨다, 두려워하다'라는 뜻입니다. 속박을 끊는 일과 두려워하지 않는 일을 나란히 놓은 것이 눈에 띕니다. 무언가에 매여 있으면 그것을 잃을까 늘 조마조마하게 마련인데, 매인 것이 없으면 잃을 것도 없습니다. 상가띠강(saṅgātigaṁ)은 '집착을 건너간 이'로, 385게송의 저 언덕과 이 언덕을 건넌다는 그림과 이어집니다. 이 품에서 속박이라는 말은 여러 얼굴로 되풀이해서 나옵니다. 다음 게송은 그 속박을 마구에 빗대어 더 구체적으로 그립니다.

묵상

잃을까 봐 두려워서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나요? 그 두려움은 무엇에 매여 있다는 신호일까요?

가죽끈과 고삐줄과 사슬, 거기 딸린 것마저 끊고, 빗장까지 들어올려 깨달은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Chetvā naddhiṁ varattañca, sandānaṁ sahanukkamaṁ; Ukkhittapalighaṁ buddh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398

배경

이 게송의 비유는 마구(馬具) 하나를 통째로 끊는 그림입니다. 낫딩(naddhiṁ, 가죽끈)과 와랏땅짜(varattañca, 고삐줄)와 산다낭(sandānaṁ, 사슬)을 차례로 들고, 웃킷따빨리강(ukkhittapalighaṁ, 들어올린 빗장)으로 마무리합니다. 매인 짐승을 하나씩 풀어 마지막에는 우리의 빗장마저 열어젖히는 장면이 한 줄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생사의 강을 건너 구덩이를 나온다'로 바꾸었습니다. 강을 건너고 구덩이를 벗어나는 그림도 나름의 힘이 있지만, 묶인 것을 하나하나 풀어 준다는 팔리의 결은 사라졌습니다. 397게송이 속박이라는 말로 뭉뚱그렸던 것을, 이 게송은 구체적인 물건의 이름으로 하나씩 풀어냅니다.

묵상

나를 묶고 있는 것을 하나씩 이름 붙여 본다면 무엇이 나올까요? 가장 먼저 풀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욕설과 매질과 묶임을 성내지 않고 견뎌내는 이, 인내의 힘을 군대로 삼은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Akkosaṁ vadhabandhañca, aduṭṭho yo titikkhati; Khantībalaṁ balānīk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399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악꼬사까 바라드와자라는 바라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자기 형제가 부처님께 귀의했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 찾아가 온갖 욕설을 퍼부었는데, 부처님은 그 욕을 마치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받지 않고 되돌려 보냈다고 합니다. 손님에게 대접한 음식을 손님이 먹지 않으면 그 음식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고 되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둣토(aduṭṭho)는 '성내지 않고'라는 뜻입니다. 견뎌내는 것과 성내지 않고 견뎌내는 것은 다릅니다. 칸띠발랑 발라니깡(khantībalaṁ balānīkaṁ)은 '인내의 힘을 군대로 삼은'이라는 뜻으로, 참는 일을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갖춘 힘으로 그립니다.

묵상

욕을 듣고도 성내지 않을 수 있었던 때가 있었나요? 그때 그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성내지 않고 서원을 지키며 계행을 갖추어 욕심에 부풀지 않은 이, 스스로 다스려 마지막 몸을 지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Akkodhanaṁ vatavantaṁ, sīlavantaṁ anussadaṁ; Dantaṁ antimasārīr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00

배경

안띠마사리랑(antimasārīraṁ)은 '마지막 몸'이라는 뜻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을 이가 지금 지니고 있는 이 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되풀이해 태어나는 흐름이 이 몸에서 끝난다는 것입니다. 아눗사당(anussadaṁ)은 '부풀지 않은, 부어오르지 않은'이라는 뜻으로, 자만이나 욕심으로 스스로를 부풀리지 않는다는 그림입니다. 앞 게송이 밖에서 오는 욕설을 견디는 힘을 말했다면, 이 게송은 안에서 스스로를 다스리는 쪽으로 눈을 돌립니다. 실라(sīla, 몸에 밴 것)는 애써 지키는 규칙이 아니라 이미 몸에 배어 저절로 나오는 것을 뜻합니다. 서원과 실라와 다스림, 이 셋이 한 사람 안에서 나란히 갖추어진 모습입니다.

묵상

애써 지키고 있는 규칙과 이미 몸에 배어 저절로 나오는 것, 나에게는 어느 쪽이 더 많나요?

물방울이 연잎 위에서 미끄러지듯, 겨자씨가 바늘 끝에서 굴러떨어지듯, 욕망에 물들지 않는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Vāri pokkharapatteva, āraggeriva sāsapo; Yo na limpati kāmesu,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01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을 웁빨라완나 장로니와 잇대어 전합니다. 신통제일로 이름났던 그이가 몸으로 뜻밖의 험한 일을 겪고도 마음은 조금도 물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겪은 일과 물든 마음은 다르다는 것을 그이의 삶으로 보여 준 것입니다. 게송의 비유는 정확합니다. 연잎 위의 물방울과 바늘 끝의 겨자씨는 둘 다 닿아는 있지만 붙지는 않습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를 '뱀이 허물 벗듯'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버리고 떠나는 그림이라 '닿되 묻지 않는다'는 팔리의 결과는 다릅니다. 림빠띠(limpati)는 '물들다, 달라붙다'라는 뜻으로, 겪는 일 자체를 막으라는 말이 아니라 그 일에 마음이 눌어붙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묵상

겪은 일과 그 일에 마음이 물드는 것은 다르지 않을까요? 나에게 물방울처럼 미끄러져 지나간 일과, 여전히 붙어 있는 일은 각각 무엇인가요?

괴로움이 다함을 바로 이 생에서 훤히 아는 이, 짐을 내려놓고 속박에서 벗어난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o dukkhassa pajānāti, idheva khayamattano; Pannabhāraṁ visaṁyutt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02

배경

이데와(idheva)는 '바로 이 자리에서, 이 생에서'라는 뜻입니다. 다음 생이나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안다는 것을 못박습니다. 빤나바랑(pannabhāraṁ)은 '짐을 내려놓은'이라는 뜻입니다. 짐을 진다는 말은 이 책 여러 자리에서 매인 것, 짊어진 것을 가리키는 데 쓰입니다. 여기서는 그 짐을 아예 내려놓은 상태를 말합니다. 괴로움이 다함을 안다는 것과 짐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한 게송 안에서 나란히 놓입니다. 아는 일과 내려놓는 일이 결국 같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위상윳땅(visaṁyuttaṁ, 속박에서 벗어난)은 이 품에서 되풀이해서 나오는 말로, 398게송의 마구를 끊는 그림과도 이어집니다.

묵상

괴로움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지금 짐이 가벼워지나요? 아는 것과 내려놓는 것 사이에는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깊은 지혜를 지니고 현명하며 바른 길과 그릇된 길에 밝은 이, 최상의 경지에 이른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Gambhīrapaññaṁ medhāviṁ, maggāmaggassa kovidaṁ; Uttamatthamanuppatt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03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을 케마 장로니와 잇대어 전하기도 합니다. 한때 자기 아름다움에 매여 있던 그이가 훗날 지혜제일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이른 길을 두고 하는 말이라 전합니다. 막가막가사(maggāmaggassa)는 '길과 길 아닌 것'이라는 뜻으로, 무엇이 실제로 이끄는 길이고 무엇이 그저 길처럼 보이는 것인지를 가려내는 눈을 말합니다. 감비라빤냥(gambhīrapaññaṁ, 깊은 지혜)은 겉만 훑는 앎이 아니라 밑바닥까지 헤아리는 앎입니다. 이 품에서 지혜를 조건으로 든 자리는 뜻밖에 많지 않습니다. 대개 무엇을 끊었는지, 무엇에서 벗어났는지를 물었는데, 여기서는 길을 가려보는 눈 자체를 조건으로 듭니다.

묵상

길처럼 보이지만 실은 길이 아니었던 것을 나중에야 알아챈 적이 있나요?

재가자와도 출가자와도 어느 쪽에도 섞이지 않고, 머무를 곳 없이 떠돌며 욕심이 적은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Asaṁsaṭṭhaṁ gahaṭṭhehi, anāgārehi cūbhayaṁ; Anokasārimappicch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04

배경

아상삿탕(asaṁsaṭṭhaṁ)은 '섞이지 않은'이라는 뜻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 게송이 출가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다고 한 점입니다. 재가자와 어울리는 일을 삼가라는 말은 흔하지만, 출가자 무리와도 섞이지 않는다고 한 것은 다른 결입니다. 아노까사링(anokasāriṁ)은 '머무를 곳 없이 떠도는 이'로, 어느 한 집단에도 기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무리에 속하면 그 무리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무리의 인정이 목표가 되기도 쉽습니다. 압삐창(appicchaṁ, 욕심이 적은)이 그 뒤를 받쳐, 무리에 기대지 않는 대신 필요한 것도 적게 가진다는 그림을 완성합니다.

묵상

어느 무리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새로운 욕심을 만들어 낸 적이 있나요?

뭇 생명들에게, 움직이는 것에도 움직이지 않는 것에도 폭력을 내려놓고, 스스로 죽이지도 죽이게 하지도 않는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Nidhāya daṇḍaṁ bhūtesu, tasesu thāvaresu ca; Yo na hanti na ghāteti,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05

배경

단당(daṇḍaṁ)은 본래 '막대기, 몽둥이'를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폭력 전반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습니다. 따세수 타와레수(tasesu thāvaresu,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는 이 책에서 산 것 전체를 가리킬 때 쓰는 짝말입니다. 놀랄 만큼 넓은 범위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조건이 '해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이지,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구제하거나 베푼다는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나 한띠 나 가떼띠(na hanti na ghāteti)는 '스스로 죽이지도, 남을 시켜 죽이게도 하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손을 더럽히지 않는 것과 남의 손을 빌려 더럽히지 않는 것을 함께 묶습니다. 하지 않는 것만으로 이미 하나의 자격이 된다는 것입니다.

묵상

무언가를 이루지 못해 아쉬울 때, 해치지 않고 지나온 것들은 잘 헤아려 보고 있나요?

적대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적대하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 가운데서도 평온한 이, 집착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집착 없는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Aviruddhaṁ viruddhesu, attadaṇḍesu nibbutaṁ; Sādānesu anādān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06

배경

이 게송은 세 번 같은 짜임을 되풀이합니다. 적대하는 이들 가운데 적대하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 가운데 평온하고, 집착하는 이들 가운데 집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위룻당(aviruddhaṁ)은 '맞서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상대가 맞서 온다고 해서 나도 맞설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팔리는 여기서 갚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가운데서도 물들지 않는다는 머무름의 말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악이 오면 선으로 대한다(惡來善待)'는 구절을 더했는데, 이는 팔리에 없는 말입니다. 머무르는 상태를 말하던 자리에 되갚는 윤리가 새로 들어온 것입니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무엇에 물들지 않느냐를 묻는 이 품의 결과 조금 다른 방향입니다.

묵상

맞서 오는 사람 앞에서, 나도 맞서는 것 말고 다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을까요?

물듦과 성냄과 자만과 위선을, 겨자씨가 바늘 끝에서 떨어지듯 떨쳐낸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assa rāgo ca doso ca, māno makkho ca pātito; Sāsaporiva āragg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07

배경

막코(makkho)는 흔히 '위선'으로 옮기지만, 정확히는 남이 베푼 것이나 남의 좋은 점을 짐짓 못 본 척 깎아내리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자만(māna)과 짝을 이루어 나오는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자만은 자기를 높이는 마음이고 막코는 남을 낮추는 마음이라, 결국 한 저울의 양쪽입니다. 401게송에서 썼던 겨자씨와 바늘 끝의 비유가 여기서 다시 나옵니다. 그때는 욕망을 두고 썼는데 이번에는 물듦과 성냄과 자만과 위선, 넷을 한꺼번에 겨눕니다. 같은 비유를 되풀이하되 대상을 넓혀 가는 이 품의 방식이 여기서도 이어집니다.

묵상

남의 좋은 점을 짐짓 못 본 척 넘긴 적이 있나요? 그때 마음속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거칠지 않고 알아듣기 쉬운 말을 진실하게 내놓는 이, 그 말로 누구에게도 상처 입히지 않는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Akakkasaṁ viññāpaniṁ, giraṁ saccamudīraye; Yāya nābhisaje kañci,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08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을 삘린다왓차 장로와 잇대어 전하기도 합니다. 전생의 버릇으로 거친 말투가 몸에 배어 있었지만 그 말에 남을 해치려는 마음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게송이 드는 조건은 말에 관한 것 하나입니다. 거칠지 않고 알아듣기 쉽고 진실한 말을 하되, 야야 나비사제 깐찌(yāya nābhisaje kañci, 그 말로 누구도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는 것)라는 단서가 핵심입니다. 듣는 사람이 다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단서를 빼고 '팔정도를 살펴 안다'는 다른 조건을 넣었습니다. 말이 남에게 가닿는 자리를 살피던 시선이, 안다는 것 자체로 옮겨 간 것입니다.

묵상

진실을 말했다고 해서 그 말이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나요?

이 세상에서 길든 짧든, 작든 크든, 아름답든 추하든,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도 취하지 않는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odha dīghaṁ va rassaṁ vā, aṇuṁ thūlaṁ subhāsubhaṁ; Loke adinnaṁ nādiyati,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09

배경

이 게송은 크기와 생김새를 짝지어 늘어놓으며 예외를 하나씩 지웁니다. 길든 짧든, 작든 크든, 아름답든 추하든이라는 세 짝이 그렇습니다. 아딘낭(adinnaṁ)은 '주어지지 않은 것'으로, 흔히 다섯 계율 가운데 도둑질하지 않음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 조건이 값어치나 크기와 상관없다고 못박은 점입니다. 작고 하찮아 보이는 것이라 괜찮다거나, 아름답지 않아 아무도 안 챙긴다고 괜찮다는 셈은 통하지 않습니다. 크기를 재는 저울을 아예 치워 버린 것입니다.

묵상

작고 하찮아서 괜찮다고 여기며 슬쩍 취한 것이 있었나요?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바랄 것이 없는 이, 바랄 것 없이 속박에서 벗어난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Āsā yassa na vijjanti, asmiṁ loke paramhi ca; Nirāsāsaṁ visaṁyutt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10

배경

아사(āsā)는 '바람, 갈망'이라는 뜻으로, 갈애(taṇhā)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소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게송이 겨누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만이 아닙니다. 아스밍 로께 빠람히 짜(asmiṁ loke paramhi ca,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라고 하여, 다음 생에 더 나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함께 겨눕니다. 좋은 일을 하고 그 보답으로 좋은 곳에 나기를 바라는 것도 흔한 마음인데, 그마저 바람의 하나로 봅니다. 무언가를 바라는 한 그 바람에 매인다는 것입니다. 니라사상(nirāsāsaṁ, 바랄 것 없이)은 체념이 아니라 더 이상 매달릴 것이 없어진 자리를 가리킵니다.

묵상

지금 내가 품고 있는 바람 가운데, 다음에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얼마나 섞여 있나요?

집착이 없고 모든 것을 알아 의심이 없는 이, 죽음 없는 경지에 뛰어들어 다다른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assālayā na vijjanti, aññāya akathaṅkathī; Amatogadhamanuppatt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11

배경

아까탕까티(akathaṅkathī)는 '의심이 없는 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몰라 흔들리는 상태를 까탕까타(kathaṅkathā)라 하는데, 그 흔들림이 아예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또가당(amatogadhaṁ)은 '죽음 없는 것 속으로 뛰어든'이라는 뜻으로, 강 속으로 뛰어드는 그림을 빌려 옵니다. 385게송에서 저 언덕과 이 언덕을 건넌다고 했던 것과 이어지되, 여기서는 건너는 동작보다 뛰어드는 동작이 두드러집니다. 알라야(ālayā, 집착)와 의심은 서로 다른 문제 같지만, 둘 다 확신이 없어 자꾸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데서 나옵니다. 붙잡을 것이 없어지면 의심할 것도 없어집니다.

묵상

확신이 없어서 자꾸 무언가를 붙잡으려 했던 적이 있나요?

이 세상에서 좋은 일과 나쁜 일, 그 둘에 대한 집착을 함께 뛰어넘어, 슬픔 없고 티끌 없이 맑은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odha puññañca pāpañca, ubho saṅgamupaccagā; Asokaṁ virajaṁ suddh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12

배경

뿐냐(puñña, 좋은 일)와 빠빠(pāpa, 나쁜 일) 둘 다를 뛰어넘으라는 셈법은 이 책에서 여러 차례 되풀이됩니다. 나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만, 좋은 일에 대한 집착(saṅga)마저 뛰어넘으라는 것은 언뜻 이상하게 들립니다. 좋은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쌓아 자기 것으로 여기고 거기 기대는 마음을 넘어서라는 뜻입니다. 아소깡 위라장 숫당(asokaṁ virajaṁ suddhaṁ)은 '슬픔 없고 티끌 없이 맑은'이라는 뜻으로, 좋은 일과 나쁜 일 어느 쪽에도 매이지 않을 때 비로소 오는 맑음을 그립니다. 좋은 일에 매인 마음도 나쁜 일에 매인 마음만큼이나 무겁습니다.

묵상

좋은 일을 해 놓고 그것을 마음에 계속 담아 둔 적이 있나요? 그 무게는 나쁜 일의 무게와 얼마나 다를까요?

달처럼 티 없이 맑고 청명하여 흐림이 없는 이, 즐거움과 존재에 대한 집착을 다한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Candaṁva vimalaṁ suddhaṁ, vippasannamanāvilaṁ; Nandībhavaparikkhīṇ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13

배경

이 게송의 조건은 난디바와빠릭키낭(nandībhavaparikkhīṇaṁ, 즐김과 존재가 다한)입니다. 난디(nandī)는 즐거워하며 반기는 마음이고, 바와(bhava)는 다시 태어나는 존재 자체를 뜻합니다. 존재를 반기고 즐기는 그 마음이 다시 태어남을 부르는 뿌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에 '비방과 헐뜯음이 이미 없어졌다'는 말을 넣었습니다. 존재의 소멸을 말하던 자리에 남과의 관계, 곧 세상의 평판을 다스리는 문제가 들어온 것입니다. 달의 비유는 412게송의 맑음을 이어받으면서 한 걸음 나아갑니다. 티끌만 없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빛까지 낸다는 것입니다.

묵상

지금의 삶을 계속 이어 가고 싶다는 마음과,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이 진창길, 험한 떠돎의 길과 그 어리석음을 뛰어넘어, 건너서 저 언덕에 이르고 자나에 들어 흔들림 없고 의심이 없으며, 붙잡지 않고 고요해진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omaṁ palipathaṁ duggaṁ, saṁsāraṁ mohamaccagā; Tiṇṇo pāraṅgato jhāyī, anejo akathaṅkathī; Anupādāya nibbuto,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14

배경

빨리빠탕 두강(palipathaṁ duggaṁ)은 '진창길, 험한 길'이라는 뜻으로, 윤회(saṁsāra)를 걷기 힘든 길에 빗댄 것입니다.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을 걷는 그림입니다. 이 게송은 이 품에서 조건을 가장 많이 겹쳐 놓은 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건넜고, 저 언덕에 이르렀고, 자나에 들었고, 흔들림 없고, 의심이 없고, 붙잡지 않고 고요해졌다는 여섯 가지가 한 사람 위에 포개집니다. 아네조(anejo)는 '흔들림 없는'이라는 뜻으로, 진창에서도 발이 빠지지 않고 굳건히 선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누빠다야 닙부또(anupādāya nibbuto)는 '붙잡지 않고 고요해진'이라는 뜻으로, 이 품에서 열반의 성질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말입니다.

묵상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진창처럼 느껴질 때, 무엇을 붙잡으려 하고 있나요?

이 세상에서 감각적 욕망을 버리고 집 없이 떠도는 이, 욕망과 존재에 대한 집착을 다한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odha kāme pahantvāna, anāgāro paribbaje; Kāmabhavaparikkhīṇ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15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을 순다라사뭇다 장로와 잇대어 전합니다. 출가한 아들을 다시 데려오려는 어머니가 여인을 보내 유혹했는데, 옷을 벗으려는 그 순간 오히려 마음이 맑아져 그 자리에서 도리어 굳게 물러섰다는 이야기입니다. 버린다는 것이 가장 시험받는 자리에서 나온 말씀인 셈입니다. 아나가로 빠립바제(anāgāro paribbaje)는 '집 없이 떠돈다'는 뜻으로, 한곳에 머무를 살림을 두지 않는다는 그림입니다. 까마바와빠릭키낭(kāmabhavaparikkhīṇaṁ)은 '감각적 욕망의 세계에 다시 태어남이 다한'이라는 뜻으로, 지금 이 욕망만이 아니라 그 욕망이 다시 불러올 삶까지 함께 겨눕니다.

묵상

버렸다고 여겼던 것이 뜻밖의 자리에서 다시 시험대에 오른 적이 있나요?

이 세상에서 갈애를 버리고 집 없이 떠도는 이, 갈애와 존재에 대한 집착을 다한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odha taṇhaṁ pahantvāna, anāgāro paribbaje; Taṇhābhavaparikkhīṇ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16

배경

415게송과 이 게송은 낱말 하나만 바뀐 짝입니다. 까마(kāma, 감각적 욕망)가 있던 자리에 딴하(taṇhā, 목마름)가 들어섰을 뿐 나머지는 그대로입니다. 까마가 눈앞의 대상을 향한 구체적인 끌림이라면, 딴하는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마시고도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 자체를 가리킵니다. 대상 하나를 버리는 일과 목마름이라는 성질 자체를 버리는 일은 다릅니다. 이 품에서 같은 틀에 낱말 하나만 바꿔 넣어 짝을 이루는 게송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그때마다 바뀐 그 한 낱말이 초점입니다. 여기서는 욕망의 대상에서 욕망의 뿌리로 시선이 옮겨 갑니다.

묵상

내가 지금 원하는 것과, 그 원함 자체가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이야기일까요?

인간의 속박을 버리고 천상의 속박마저 뛰어넘은 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Hitvā mānusakaṁ yogaṁ, dibbaṁ yogaṁ upaccagā; Sabbayogavisaṁyutt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17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을 한때 광대였던 이가 출가한 뒤의 이야기와 잇대어 전합니다. 무대에서 몸에 밴 재간이 자꾸 마음을 흔들었지만 끝내 그것마저 넘어섰다고 합니다. 이 게송이 눈여겨볼 것은 인간의 속박(mānusakaṁ yogaṁ)만이 아니라 천상의 속박(dibbaṁ yogaṁ)까지 든다는 점입니다. 좋은 곳에 태어나는 것도 여전히 매임의 하나로 봅니다. 요가(yoga)는 본래 '멍에, 묶는 것'을 뜻하는 말로, 소나 말을 수레에 매다는 도구입니다. 나쁜 것에 매이는 것도 매임이고, 좋은 것에 매이는 것도 매임이라는 것이 이 게송의 요점입니다.

묵상

더 좋은 상태로 가는 것이 목표라고 여겼던 일도, 실은 또 다른 매임일 수 있을까요?

즐거움과 싫증을 버려 서늘히 식고, 집착의 뿌리가 없는 이, 온 세상을 이겨낸 영웅을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Hitvā ratiñca aratiñca, sītibhūtaṁ nirūpadhiṁ; Sabbalokābhibhuṁ vīr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18

배경

417게송과 한 이야기에서 나온 짝입니다. 라띠(rati, 즐거움)와 아라띠(arati, 싫증)를 나란히 버리라고 한 점이 눈에 띕니다. 싫은 것을 버리라는 말은 흔하지만 즐거운 것마저 버리라는 것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즐거움을 얻으려는 마음과 싫증을 피하는 마음이 실은 같은 하나에서 갈라진 두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시띠부땅(sītibhūtaṁ)은 '서늘히 식은'이라는 뜻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식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타오를 것이 없어 서늘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위랑(vīraṁ, 영웅)이라는 말이 여기서 처음 나오는데, 물러나서 얻는 고요가 아니라 온 세상을 이겨 내고 얻는 고요라는 것을 이 한 낱말이 보여 줍니다.

묵상

즐거움을 얻으려는 마음과 싫은 것을 피하는 마음이 실은 한 뿌리라고 느낀 적이 있나요?

살아 있는 것들이 죽고 태어나는 것을 남김없이 아는 이, 집착 없이 바르게 이르러 깨달은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Cutiṁ yo vedi sattānaṁ, upapattiñca sabbaso; Asattaṁ sugataṁ buddh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19

배경

쭈띵(cutiṁ, 죽음)과 우빠빳띵(upapattiṁ, 태어남)을 함께 아는 앎은 흔히 깨달음의 밤에 얻는다고 전하는 세 가지 앎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중생들이 어디서 죽어 어디로 태어나는지를 남김없이 보는 눈입니다. 사밧소(sabbaso, 남김없이)라는 말이 그 범위를 못박습니다. 하나둘의 예외가 있는 앎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삿땅(asattaṁ)은 '집착 없는'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넓게 아는 이라도 그 앎에 다시 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짚어 둡니다. 많이 아는 것과 그 앎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다른 일이라는 점을 이 게송은 함께 짚어 둡니다.

묵상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오히려 붙들고 있지는 않나요?

신들도 간다르바도 인간들도 그 행방을 알지 못하는 이, 번뇌가 다하여 아라한이 된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assa gatiṁ na jānanti, devā gandhabbamānusā; Khīṇāsavaṁ arahant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20

배경

이 게송은 '신들도 간다르바도 사람들도 그의 행방을 모른다'는, 자취 없음을 말하는 문장입니다. 남들이 그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다는 뜻이지 그가 길을 잃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간답바(gandhabba)는 신들의 악사로 알려진 존재로, 신과 인간 사이 여러 층의 존재를 함께 세워 그 누구도 모른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한역 법구경은 주어를 바꾸어 '그가 떨어질 곳을 알지 못한다'로 옮겼습니다. 남이 그를 모른다는 말이, 그 자신에게 갈 곳이 없다는 말로 바뀐 것입니다. 결이 다른 두 문장이지만 공교롭게도 둘 다 통합니다. 그를 어디로 갔다고 가리킬 수 없다는 점이 이 게송의 마지막 호칭과 이어집니다.

묵상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남들이 알아야만 그 길이 맞는 길이 되는 걸까요?

과거에도 미래에도 현재에도 어떤 집착도 없는 이,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아무것도 취하지 않는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assa pure ca pacchā ca, majjhe ca natthi kiñcanaṁ; Akiñcanaṁ anādān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21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을 담마딘나 장로니와 잇대어 전합니다. 재가자였을 때 남편과 헤어져 출가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라한이 되었으며, 훗날 옛 남편이 찾아와 묻는 깊은 물음들에 막힘없이 답했다고 전해지는 이입니다. 뿌레 짜 빳차 짜 맛제 짜(pure ca pacchā ca majjhe ca)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 사이에도'라는 뜻으로, 과거와 미래와 현재 어디에도 걸리는 데가 없다는 것을 셋으로 나누어 못박습니다. 396게송과 이 게송이 똑같이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아무것도 취하지 않는 이'로 끝나는데, 396게송이 태생을 부정하며 이 결론에 이르렀다면 이 게송은 시간을 부정하며 같은 결론에 이릅니다.

묵상

과거의 기억이나 다가올 일에 대한 걱정 없이, 지금 이 순간만 온전히 있어 본 적이 있나요?

황소처럼 뛰어나고 가장 훌륭한 영웅이요, 위대한 구도자로서 승리를 이룬 이, 흔들림 없이 모든 것을 씻어내고 깨달은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Usabhaṁ pavaraṁ vīraṁ, mahesiṁ vijitāvinaṁ; Anejaṁ nhātakaṁ buddh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22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을 앙굴리말라 존자와 잇대어 전합니다. 수백 명을 해치고 손가락을 꿰어 목걸이로 삼았던 그가 부처님을 만나 그 자리에서 걸음을 돌리고 끝내 아라한에 이르렀다는, 이 경전에서 가장 극적인 전환의 이야기입니다. 이 게송은 바라문의 전문 용어를 끌어와 비틉니다. 냐따깡(nhātakaṁ)은 베다 학업을 마치고 정결 의식으로 목욕을 치른 바라문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번뇌를 씻어 낸 이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습니다. 우사방(usabhaṁ, 황소)도 힘센 자를 부르던 옛 칭호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를 '가장 뛰어나고 용맹하다'는 평범한 칭찬으로 옮겨, 남의 말을 빼앗아 다시 쓰는 이 품의 방식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가장 크게 무너졌던 이가 가장 높은 이름을 다시 얻는 자리이니, 이 품의 논지가 가장 극적으로 증명되는 예이기도 합니다.

묵상

돌이킬 수 없어 보이는 자리에서도 걸음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이, 지금 나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전생을 알고 천상과 지옥의 길도 보며, 태어남이 다함에 이르러 뛰어난 지혜를 이룬 성자이니, 모든 것을 남김없이 이룬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Pubbenivāsaṁ yo vedi, saggāpāyañca passati; Atho jātikkhayaṁ patto, abhiññāvosito muni; Sabbavositavosān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23

배경

이 게송이 법구경 전체의 마지막입니다. 조건이 셋으로 늘어서 있습니다. 전생을 아는 것, 천상과 지옥에 이르는 길을 보는 것, 태어남이 다함에 이른 것입니다. 이 셋은 흔히 깨달음의 밤에 차례로 얻는다고 전하는 세 가지 앎과 같은 얼개입니다. 사바워시따워사낭(sabbavositavosānaṁ)은 '모든 것을 남김없이 이룬'이라는 뜻으로, 더 이룰 것이 남지 않은 자리를 가리킵니다. 이 게송을 마지막으로 383게송부터 이어진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는 되풀이가 끝을 맺습니다. 태생으로 정해지던 이름 하나를, 마흔한 편에 걸쳐 행으로 다시 세운 뒤 이 자리에서 그 되풀이 자체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이 뒤로 지금까지 스물여섯 개 품에 실린 게송 수를 낱낱이 헤아려 적은 옛 목록이 이어집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시절, 몇 편이 온전히 전해졌는지를 스스로 세어 지키려던 흔적입니다.

묵상

태생이 아니라 행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마흔한 편을 따라온 지금 나는 나 자신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