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을 끊어라, 힘써 나아가
욕망을 몰아내라, 바라문이여.
지어진 것들이 다함을 알았다면
그대는 지어지지 않은 것을 아는 이니라, 바라문이여.
Chinda sotaṁ parakkamma, kāme panuda brāhmaṇa; Saṅkhārānaṁ khayaṁ ñatvā, akataññūsi brāhmaṇa.
법구경 Dhammapada 383
배경
이 품의 첫 게송으로, 바라문(brāhmaṇa)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바라문은 본래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사제 가문을 뜻하는 말인데, 이 품 전체는 그 말을 쓰는 방식을 통째로 바꾸어 놓습니다. 소땅(sotaṁ)은 '흐름'으로, 감각을 따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마음의 물살을 가리킵니다. 상카라(saṅkhāra, 지어진 것)들이 다함을 안다는 것은 짓고 짓는 그 활동 자체가 멎는 자리를 본다는 뜻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결말을 다르게 맺어, '욕망을 베지 못하면 뜻이 오히려 달아난다'는 경계로 끝맺습니다. 이루어야 할 것을 말하는 대신 이루지 못했을 때의 위험을 말한 것입니다. 팔리 원문에는 그 경계 대신 지어지지 않은 것을 아는 이라는 결론이 놓여 있습니다.
묵상
지금 나를 자꾸 끌고 가는 흐름은 무엇인가요?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과 실제로 끊어 내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되는 거리가 있을까요?
두 가지의 저 언덕에 이른 이,
그가 바라문이니라.
그리 아는 이에게는
모든 속박이 끝에 이르느니라.
Yadā dvayesu dhammesu, pāragū hoti brāhmaṇo; Athassa sabbe saṁyogā, atthaṁ gacchanti jānato.
법구경 Dhammapada 384
배경
드웨수 담메수(dvayesu dhammesu)는 '두 가지 것에서'라는 뜻인데, 그 두 가지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주석에 따라 풀이가 갈립니다. 앞 게송이 지어진 것과 지어지지 않은 것을 말했으니 이어서 읽으면, 이 세상의 성질을 아는 지혜와 그 너머를 아는 지혜, 이 둘을 다 건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빠라구(pāragū)는 '저 언덕에 이른 이'로, 강을 건너 저편에 닿은 사람을 그리는 말입니다. 383게송의 '아는 이'와 짝을 이루어, 안다는 것에서 건넌다는 것으로 그림이 한 걸음 나아갑니다. 뒷줄은 그 결과를 말합니다. 그런 이에게는 모든 속박이 저절로 끝에 이른다고 합니다. 애써 끊는 것이 아니라 다다르고 보니 이미 풀려 있다는 것입니다.
묵상
완전히 알고 나면 저절로 풀리는 것과, 애써 끊어야만 풀리는 것이 있다면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저 언덕도 이 언덕도
둘 다도 그에게는 없나니,
고뇌를 떠나고 얽매임에서 벗어난 이,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assa pāraṁ apāraṁ vā, pārāpāraṁ na vijjati; Vītaddaraṁ visaṁyutt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385
배경
이 게송부터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라는 같은 마무리가 이 품 끝까지 스물다섯 번 넘게 되풀이됩니다. 되풀이 자체가 하는 일이 있습니다. 바라문이라는 이름은 본래 태생을 두고 굳어진 판정이라, 한 번 내려지면 다시 묻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부처님은 그 판정하는 자리에 직접 서서, 같은 틀로 되풀이해 판정을 새로 내립니다. 이번 조건은 저 언덕과 이 언덕 어느 쪽도 없다는 것입니다. 384게송이 건너서 이르는 저 언덕을 말했다면, 여기서는 언덕이라는 구분 자체가 사라진 자리를 말합니다. 다다를 곳도 떠나온 곳도 없으니 더 흔들릴 일이 없습니다. 위땃다랑(vītaddaraṁ)은 '고뇌를 떠난'이라는 뜻입니다.
묵상
저기와 여기를 나누어 늘 어느 한쪽을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나요? 그 구분이 없다면 지금 이 자리는 어떻게 보일까요?
자나에 들어 때 묻지 않고 고요히 앉은 이,
할 일을 마치고 번뇌가 다한 이,
최상의 경지에 이른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Jhāyiṁ virajamāsīnaṁ, katakiccamanāsavaṁ; Uttamatthamanuppatt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386
배경
이 게송은 네 가지 조건을 한 사람 위에 겹쳐 놓습니다. 자나(jhāna, 깊이 잠겨 봄)에 든 것, 때 묻지 않은 것, 할 일을 마친 것, 아사와(āsava, 흘러드는 것)가 다한 것입니다. 앉은 자세를 뜻하는 아시나(āsīna)까지 더하면 몸과 마음이 함께 그려집니다. 밖에서 보면 그저 고요히 앉아 있는 사람이지만, 그 고요 안에 이미 끝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웃따마땅(uttamattha)은 '최상의 뜻, 최상의 목적'으로 흔히 완전한 깨달음을 가리킵니다. 이 품에서 앞으로 되풀이될 조건들이 대개 이렇습니다. 무엇을 더 갖추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다했느냐로 사람을 가늠합니다.
묵상
겉으로 고요해 보이는 것과 안에서 정말 끝난 일이 있는 것, 이 둘은 다르지 않을까요? 지금 나의 고요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요?
낮에는 해가 빛나고
밤에는 달이 빛나며,
갑옷 두른 전사가 빛나고
자나에 든 바라문이 빛나느니라.
그러나 깨달은 이는
밤낮 언제나 그 위광으로 빛나느니라.
Divā tapati ādicco, rattimābhāti candimā; Sannaddho khattiyo tapati, jhāyī tapati brāhmaṇo; Atha sabbamahorattiṁ, buddho tapati tejasā.
법구경 Dhammapada 387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아난다 존자가 어느 바라문의 물음에 답한 일을 전합니다. 무엇이 빛나느냐는 물음에 낮에는 해, 밤에는 달, 전쟁터에서는 갑옷 두른 전사, 수행 중에는 자나에 든 바라문이 빛난다고 답하고, 그 넷을 모두 넘어서는 빛을 마지막에 놓습니다. 부처님의 빛은 시간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의 넷은 저마다 자리와 때가 있어야 빛나지만, 다섯째는 그런 조건이 없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여기서 바라문을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한다는 점입니다. 자나에 든 바라문은 실제로 빛나는 존재입니다. 다만 그 빛에도 낮과 밤의 몫이 있을 뿐, 온전한 빛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묵상
내가 가진 빛에는 어떤 때와 자리가 필요한가요? 그 조건이 사라져도 여전히 빛날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악을 몰아냈다 하여 바라문이라 부르고
평온한 행실로 수행자라 부르나니,
제 안의 더러움을 내쫓기에
그래서 ‘집을 나온 이’라 부르느니라.
Bāhitapāpoti brāhmaṇo, Samacariyā samaṇoti vuccati; Pabbājayamattano malaṁ, Tasmā “pabbajito”ti vuccati.
법구경 Dhammapada 388
배경
이 게송은 낱말 셋을 그 소리가 담고 있는 뿌리로 되짚습니다. 바히따빠뽀(bāhitapāpo, 악을 몰아낸 이)와 브라흐마나(brāhmaṇa)의 소리를 겹치고, 사마짜리야(samacariyā, 평온한 행실)와 사마나(samaṇa)를 겹치고, 빱바자야(pabbājaya, 내쫓다)와 빱바지따(pabbajito, 집을 나온 이)를 겹칩니다. 세 이름 모두 원래는 신분이나 차림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여기서는 그 소리를 실마리 삼아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가리키는 말로 다시 풉니다. 이름이 가리키는 뜻을 그 이름의 소리 안에서 되찾아 오는 방식입니다. 26품 전체가 이런 되찾기의 연속이며, 이 게송은 그 방식을 가장 압축해서 보여 줍니다.
묵상
내가 가진 이름이나 자리는 원래 무엇을 가리키던 말이었을까요? 지금 나는 그 뜻에 얼마나 값하고 있을까요?
바라문을 때리지 말라,
바라문도 노여움을 풀어놓지 말라.
바라문을 때리는 이가 부끄럽고
맞고서 성냄을 풀어놓는 이는 더욱 부끄러우니라.
Na brāhmaṇassa pahareyya, nāssa muñcetha brāhmaṇo; Dhī brāhmaṇassa hantāraṁ, tato dhī yassa muñcati.
법구경 Dhammapada 389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사리뿟따 존자가 걸식하다 느닷없이 얻어맞은 일을 전합니다. 그런데도 존자는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그대로 이어 갔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라문은 신분이 아니라 이미 흘러드는 것이 다한 이, 곧 아라한을 가리킵니다. 게송은 두 방향에서 말합니다. 먼저 그런 이를 때리지 말라고 하고, 이어 맞은 그 이도 노여움을 풀어놓지 말라고 합니다. 디(dhī)는 '부끄럽다, 수치스럽다'는 감탄사입니다. 때린 이가 부끄럽다는 것은 예상할 수 있지만, 게송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맞고서 성냄을 터뜨리는 쪽이 더 부끄럽다고 합니다. 맞은 것은 어쩔 수 없어도 그에 답하는 마음은 자기 몫이라는 것입니다.
묵상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그 일과 그에 대한 나의 반응을 따로 떼어 볼 수 있을까요?
바라문에게 이보다 나은 것은 없나니,
사랑스러운 것들에서 마음을 억누를 때이니라.
해치려는 마음이 물러나는 만큼
그만큼 괴로움도 가라앉느니라.
Na brāhmaṇassetadakiñci seyyo, Yadā nisedho manaso piyehi; Yato yato hiṁsamano nivattati, Tato tato sammatimeva dukkhaṁ.
법구경 Dhammapada 390
배경
389게송이 맞고도 성내지 않는 일을 말했다면, 이 게송은 그 뿌리를 더 파고듭니다. 니세도(nisedho)는 '억누름, 붙잡아 세움'이라는 뜻이고, 삐예히(piyehi)는 '사랑스러운 것들에서'라는 뜻입니다. 흔히 억누른다는 말은 성냄에 붙여 쓰지만, 여기서는 사랑스러운 것에 마음이 끌려가는 쪽에 붙여 씁니다. 애착과 해치려는 마음이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뒷줄은 그 결과를 재는 방식을 보여 줍니다. 힝사마노(hiṁsamano, 해치려는 마음)가 물러나는 만큼 괴로움도 가라앉는다고 합니다. 한 번에 다 없어지는 일이 아니라 물러나는 만큼씩 가라앉는, 정도의 문제로 그린 것입니다.
묵상
사랑하는 마음과 해치려는 마음이 실은 한 뿌리에서 나온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몸으로도 말로도 마음으로도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이 세 가지 자리를 다스린 이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assa kāyena vācāya, manasā natthi dukkaṭaṁ; Saṁvutaṁ tīhi ṭhānehi,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391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마하빠자빠띠 고따미 존자니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부처님을 길러 준 이모이자 첫 비구니로, 몸과 말과 마음 세 자리를 두루 다스린 이의 본보기로 이 말씀이 놓였다고 합니다. 둑까땅(dukkaṭaṁ)은 '잘못 지어진 일, 나쁜 짓'을 뜻합니다. 세 가지를 따로따로 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세 자리(tīhi ṭhānehi) 전체를 하나로 묶어 다스린다고 한 점이 눈에 띕니다. 몸으로는 참아도 말이 새어 나오거나, 말은 삼가도 마음이 들끓는 경우가 흔합니다. 이 게송은 그 셋이 따로 놀지 않는 상태를 조건으로 듭니다.
묵상
몸으로는 참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계속 미워한 적이 있나요? 그럴 때 정말 다스린 것은 어느 자리였을까요?
바르게 깨달은 이가 편 가르침을 누구에게서 배워 알았다면,
불에 바치는 제사를 받들듯 정성을 다해
그 사람을 섬길지니라.
Yamhā dhammaṁ vijāneyya, sammāsambuddhadesitaṁ; Sakkaccaṁ taṁ namasseyya, aggihuttaṁva brāhmaṇo.
법구경 Dhammapada 392
배경
주석서는 사리뿟따 존자가 아라한이 되고도 오래도록 앗사지 존자가 머무는 방향을 향해 예를 올렸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처음 가르침을 일러 준 이를 잊지 않은 것입니다. 이 게송의 짜임을 보면 팔리는 '누구에게서 그 가르침을 배웠다면 바라문이 불의 제사를 받들듯 그 사람을 정성껏 예배하라'고 합니다. 가르쳐 준 사람을 향한 예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에서 사람을 지우고 '마음이 부처가 설한 가르침을 밝게 알면 스스로 귀의하니 물보다 깨끗하다'로 바꾸었습니다. 밖에 있는 스승을 향하던 예가 안의 마음으로 옮겨 간 것입니다. 아기훗땅(aggihuttaṁ)은 바라문이 날마다 불에 공물을 바치던 제사로, 그들에게 가장 정성스러운 의례를 빌려 온 비유입니다.
묵상
지금의 나를 만든 가르침을 준 사람을, 나는 여전히 마음에 두고 있나요?
엉킨 머리로도, 혈통으로도,
태생으로도 바라문이 되지 않느니라.
진실과 이치를 지녀 청정한 이,
그이가 바로 바라문이니라.
Na jaṭāhi na gottena, na jaccā hoti brāhmaṇo; Yamhi saccañca dhammo ca, so sucī so ca brāhmaṇo.
법구경 Dhammapada 393
배경
이 게송이 26품 전체의 못입니다. 자짜(jaccā)는 '태생으로'라는 뜻으로, 당시 바라문은 태어날 때 이미 정해지는 사제 가문이었습니다. 대를 이어 물려받는 신분이지 스스로 얻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부처님은 바로 그 전제를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엉킨 머리도, 물려받은 혈통도, 태어난 가문도 바라문을 만들지 못한다고 합니다. 대신 진실(sacca)과 정의(dhamma)를 지녀 청정한 이, 그 사람이 바라문이라고 합니다. 태생이 아니라 행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입니다. 앞선 아홉 게송이 저마다 다른 조건을 들었지만, 그 모든 조건이 공통으로 겨누는 표적이 바로 이 게송에서 드러납니다. 세습으로 정해지던 이름을, 지금 이 순간의 행실로 다시 정하는 것입니다.
묵상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타고난 자리로 정해지나요, 지금 하고 있는 일로 정해지나요?
어리석은 이여, 엉킨 머리가 네게 무슨 소용이며
가죽 옷이 네게 무슨 소용이냐.
속은 덤불로 우거졌는데
겉만 문지르고 있구나.
Kiṁ te jaṭāhi dummedha, kiṁ te ajinasāṭiyā; Abbhantaraṁ te gahanaṁ, bāhiraṁ parimajjasi.
법구경 Dhammapada 394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꾸민 어느 고행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393게송이 무엇이 바라문을 만들지 않는지 차분히 밝혔다면, 이 게송은 같은 말을 화난 어조로 되풀이합니다. 둠메다(dummedha)는 '어리석은 자여'라는 직접적인 부름입니다. 가하낭(gahanaṁ)은 '덤불, 우거진 수풀'로, 뒤엉켜 헤치고 들어갈 수 없는 상태를 그립니다. 그 덤불이 겉의 머리카락이 아니라 속에 있다는 것이 이 게송의 요점입니다. 아지나사띠야(ajinasāṭiyā, 가죽 옷)도 엉킨 머리와 함께 당시 고행자들이 걸치던 차림입니다. 겉을 문지르는 일은 하루면 되지만 속의 덤불은 문지른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묵상
겉을 다듬는 데 쓰는 시간과 속을 들여다보는 데 쓰는 시간, 요즘 나는 어느 쪽에 더 많이 쓰고 있나요?
누더기를 걸치고 야위어 핏줄이 드러난 이,
홀로 숲에서 자나에 든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Paṁsukūladharaṁ jantuṁ, kisaṁ dhamanisanthataṁ; Ekaṁ vanasmiṁ jhāyant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395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을 끼사고따미 장로니와 잇대어 전합니다. 아이를 잃고 겨자씨를 구하러 온 마을을 헤매던 그 여인이 훗날 누더기를 걸치고 마르도록 애써 정진하는 수행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394게송이 겉만 꾸민 이를 꾸짖었다면, 이 게송은 정반대로 겉조차 초라한 이를 바라문이라 부릅니다. 조건은 같은 누더기지만 방향이 다릅니다. 다마니산타땅(dhamanisanthataṁ)은 '핏줄이 드러날 만큼 야윈'이라는 뜻으로, 몸을 꾸미는 데 마음 쓰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에깡 와나스밍(ekaṁ vanasmiṁ, 홀로 숲에서)도 눈에 띕니다. 누가 봐 주지 않아도 이어 가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묵상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이어 가고 있는 일이 있나요? 그것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을까요?
모태에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하여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지 않느니라.
무언가에 매여 있다면
‘존자’라는 이름은 얻어도 바라문은 되지 못하나니,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아무것도 취하지 않는 이,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Na cāhaṁ brāhmaṇaṁ brūmi, yonijaṁ mattisambhavaṁ; Bhovādi nāma so hoti, sace hoti sakiñcano; Akiñcanaṁ anādān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396
배경
이 게송은 393게송이 세운 논쟁을 가장 또렷하게 되짚습니다. 팔리가 부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혈통입니다. 요니장 맛띠삼바왕(yonijaṁ mattisambhavaṁ)은 '모태에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이라는 뜻으로, 태생을 정면으로 겨눕니다. 보와디(bhovādī)는 당시 바라문들이 서로를 부르던 '존자여'라는 존칭인데, 그 이름으로 불려도 무언가에 매여 있다면 소용없다고 합니다. 이름과 실제를 다시 한번 가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에서 삭발과 호칭을 부정할 뿐 혈통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깎았다고 사문이 아니고 길하다 일컫는다고 범지가 아니다'라고 하여, 논쟁의 상대가 사라진 것입니다. 마지막 품 전체를 떠받치는 뼈대가 태생이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라는 물음인데, 그 축이 팔리에는 있고 한역에는 없습니다.
묵상
내가 물려받은 것과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을 나눠 본다면, 지금 나를 나답게 하는 쪽은 어디에 더 가까울까요?
모든 속박을 끊어버리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
집착을 넘어서 얽매임 없는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Sabbasaṁyojanaṁ chetvā, yo ve na paritassati; Saṅgātigaṁ visaṁyutt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397
배경
빠릿따사띠(paritassati)는 '떨다, 두려워하다'라는 뜻입니다. 속박을 끊는 일과 두려워하지 않는 일을 나란히 놓은 것이 눈에 띕니다. 무언가에 매여 있으면 그것을 잃을까 늘 조마조마하게 마련인데, 매인 것이 없으면 잃을 것도 없습니다. 상가띠강(saṅgātigaṁ)은 '집착을 건너간 이'로, 385게송의 저 언덕과 이 언덕을 건넌다는 그림과 이어집니다. 이 품에서 속박이라는 말은 여러 얼굴로 되풀이해서 나옵니다. 다음 게송은 그 속박을 마구에 빗대어 더 구체적으로 그립니다.
묵상
잃을까 봐 두려워서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나요? 그 두려움은 무엇에 매여 있다는 신호일까요?
가죽끈과 고삐줄과 사슬,
거기 딸린 것마저 끊고,
빗장까지 들어올려 깨달은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Chetvā naddhiṁ varattañca, sandānaṁ sahanukkamaṁ; Ukkhittapalighaṁ buddh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398
배경
이 게송의 비유는 마구(馬具) 하나를 통째로 끊는 그림입니다. 낫딩(naddhiṁ, 가죽끈)과 와랏땅짜(varattañca, 고삐줄)와 산다낭(sandānaṁ, 사슬)을 차례로 들고, 웃킷따빨리강(ukkhittapalighaṁ, 들어올린 빗장)으로 마무리합니다. 매인 짐승을 하나씩 풀어 마지막에는 우리의 빗장마저 열어젖히는 장면이 한 줄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생사의 강을 건너 구덩이를 나온다'로 바꾸었습니다. 강을 건너고 구덩이를 벗어나는 그림도 나름의 힘이 있지만, 묶인 것을 하나하나 풀어 준다는 팔리의 결은 사라졌습니다. 397게송이 속박이라는 말로 뭉뚱그렸던 것을, 이 게송은 구체적인 물건의 이름으로 하나씩 풀어냅니다.
묵상
나를 묶고 있는 것을 하나씩 이름 붙여 본다면 무엇이 나올까요? 가장 먼저 풀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욕설과 매질과 묶임을
성내지 않고 견뎌내는 이,
인내의 힘을 군대로 삼은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Akkosaṁ vadhabandhañca, aduṭṭho yo titikkhati; Khantībalaṁ balānīk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399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악꼬사까 바라드와자라는 바라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자기 형제가 부처님께 귀의했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 찾아가 온갖 욕설을 퍼부었는데, 부처님은 그 욕을 마치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받지 않고 되돌려 보냈다고 합니다. 손님에게 대접한 음식을 손님이 먹지 않으면 그 음식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고 되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둣토(aduṭṭho)는 '성내지 않고'라는 뜻입니다. 견뎌내는 것과 성내지 않고 견뎌내는 것은 다릅니다. 칸띠발랑 발라니깡(khantībalaṁ balānīkaṁ)은 '인내의 힘을 군대로 삼은'이라는 뜻으로, 참는 일을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갖춘 힘으로 그립니다.
묵상
욕을 듣고도 성내지 않을 수 있었던 때가 있었나요? 그때 그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성내지 않고 서원을 지키며
계행을 갖추어 욕심에 부풀지 않은 이,
스스로 다스려 마지막 몸을 지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Akkodhanaṁ vatavantaṁ, sīlavantaṁ anussadaṁ; Dantaṁ antimasārīr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00
배경
안띠마사리랑(antimasārīraṁ)은 '마지막 몸'이라는 뜻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을 이가 지금 지니고 있는 이 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되풀이해 태어나는 흐름이 이 몸에서 끝난다는 것입니다. 아눗사당(anussadaṁ)은 '부풀지 않은, 부어오르지 않은'이라는 뜻으로, 자만이나 욕심으로 스스로를 부풀리지 않는다는 그림입니다. 앞 게송이 밖에서 오는 욕설을 견디는 힘을 말했다면, 이 게송은 안에서 스스로를 다스리는 쪽으로 눈을 돌립니다. 실라(sīla, 몸에 밴 것)는 애써 지키는 규칙이 아니라 이미 몸에 배어 저절로 나오는 것을 뜻합니다. 서원과 실라와 다스림, 이 셋이 한 사람 안에서 나란히 갖추어진 모습입니다.
묵상
애써 지키고 있는 규칙과 이미 몸에 배어 저절로 나오는 것, 나에게는 어느 쪽이 더 많나요?
물방울이 연잎 위에서 미끄러지듯,
겨자씨가 바늘 끝에서 굴러떨어지듯,
욕망에 물들지 않는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Vāri pokkharapatteva, āraggeriva sāsapo; Yo na limpati kāmesu,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01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을 웁빨라완나 장로니와 잇대어 전합니다. 신통제일로 이름났던 그이가 몸으로 뜻밖의 험한 일을 겪고도 마음은 조금도 물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겪은 일과 물든 마음은 다르다는 것을 그이의 삶으로 보여 준 것입니다. 게송의 비유는 정확합니다. 연잎 위의 물방울과 바늘 끝의 겨자씨는 둘 다 닿아는 있지만 붙지는 않습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를 '뱀이 허물 벗듯'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버리고 떠나는 그림이라 '닿되 묻지 않는다'는 팔리의 결과는 다릅니다. 림빠띠(limpati)는 '물들다, 달라붙다'라는 뜻으로, 겪는 일 자체를 막으라는 말이 아니라 그 일에 마음이 눌어붙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묵상
겪은 일과 그 일에 마음이 물드는 것은 다르지 않을까요? 나에게 물방울처럼 미끄러져 지나간 일과, 여전히 붙어 있는 일은 각각 무엇인가요?
괴로움이 다함을
바로 이 생에서 훤히 아는 이,
짐을 내려놓고 속박에서 벗어난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o dukkhassa pajānāti, idheva khayamattano; Pannabhāraṁ visaṁyutt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02
배경
이데와(idheva)는 '바로 이 자리에서, 이 생에서'라는 뜻입니다. 다음 생이나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안다는 것을 못박습니다. 빤나바랑(pannabhāraṁ)은 '짐을 내려놓은'이라는 뜻입니다. 짐을 진다는 말은 이 책 여러 자리에서 매인 것, 짊어진 것을 가리키는 데 쓰입니다. 여기서는 그 짐을 아예 내려놓은 상태를 말합니다. 괴로움이 다함을 안다는 것과 짐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한 게송 안에서 나란히 놓입니다. 아는 일과 내려놓는 일이 결국 같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위상윳땅(visaṁyuttaṁ, 속박에서 벗어난)은 이 품에서 되풀이해서 나오는 말로, 398게송의 마구를 끊는 그림과도 이어집니다.
묵상
괴로움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지금 짐이 가벼워지나요? 아는 것과 내려놓는 것 사이에는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깊은 지혜를 지니고 현명하며
바른 길과 그릇된 길에 밝은 이,
최상의 경지에 이른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Gambhīrapaññaṁ medhāviṁ, maggāmaggassa kovidaṁ; Uttamatthamanuppatt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03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을 케마 장로니와 잇대어 전하기도 합니다. 한때 자기 아름다움에 매여 있던 그이가 훗날 지혜제일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이른 길을 두고 하는 말이라 전합니다. 막가막가사(maggāmaggassa)는 '길과 길 아닌 것'이라는 뜻으로, 무엇이 실제로 이끄는 길이고 무엇이 그저 길처럼 보이는 것인지를 가려내는 눈을 말합니다. 감비라빤냥(gambhīrapaññaṁ, 깊은 지혜)은 겉만 훑는 앎이 아니라 밑바닥까지 헤아리는 앎입니다. 이 품에서 지혜를 조건으로 든 자리는 뜻밖에 많지 않습니다. 대개 무엇을 끊었는지, 무엇에서 벗어났는지를 물었는데, 여기서는 길을 가려보는 눈 자체를 조건으로 듭니다.
묵상
길처럼 보이지만 실은 길이 아니었던 것을 나중에야 알아챈 적이 있나요?
재가자와도 출가자와도
어느 쪽에도 섞이지 않고,
머무를 곳 없이 떠돌며 욕심이 적은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Asaṁsaṭṭhaṁ gahaṭṭhehi, anāgārehi cūbhayaṁ; Anokasārimappicch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04
배경
아상삿탕(asaṁsaṭṭhaṁ)은 '섞이지 않은'이라는 뜻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 게송이 출가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다고 한 점입니다. 재가자와 어울리는 일을 삼가라는 말은 흔하지만, 출가자 무리와도 섞이지 않는다고 한 것은 다른 결입니다. 아노까사링(anokasāriṁ)은 '머무를 곳 없이 떠도는 이'로, 어느 한 집단에도 기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무리에 속하면 그 무리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무리의 인정이 목표가 되기도 쉽습니다. 압삐창(appicchaṁ, 욕심이 적은)이 그 뒤를 받쳐, 무리에 기대지 않는 대신 필요한 것도 적게 가진다는 그림을 완성합니다.
묵상
어느 무리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새로운 욕심을 만들어 낸 적이 있나요?
뭇 생명들에게, 움직이는 것에도
움직이지 않는 것에도 폭력을 내려놓고,
스스로 죽이지도 죽이게 하지도 않는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Nidhāya daṇḍaṁ bhūtesu, tasesu thāvaresu ca; Yo na hanti na ghāteti,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05
배경
단당(daṇḍaṁ)은 본래 '막대기, 몽둥이'를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폭력 전반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습니다. 따세수 타와레수(tasesu thāvaresu,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는 이 책에서 산 것 전체를 가리킬 때 쓰는 짝말입니다. 놀랄 만큼 넓은 범위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조건이 '해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이지,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구제하거나 베푼다는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나 한띠 나 가떼띠(na hanti na ghāteti)는 '스스로 죽이지도, 남을 시켜 죽이게도 하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손을 더럽히지 않는 것과 남의 손을 빌려 더럽히지 않는 것을 함께 묶습니다. 하지 않는 것만으로 이미 하나의 자격이 된다는 것입니다.
묵상
무언가를 이루지 못해 아쉬울 때, 해치지 않고 지나온 것들은 잘 헤아려 보고 있나요?
적대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적대하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 가운데서도 평온한 이,
집착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집착 없는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Aviruddhaṁ viruddhesu, attadaṇḍesu nibbutaṁ; Sādānesu anādān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06
배경
이 게송은 세 번 같은 짜임을 되풀이합니다. 적대하는 이들 가운데 적대하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 가운데 평온하고, 집착하는 이들 가운데 집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위룻당(aviruddhaṁ)은 '맞서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상대가 맞서 온다고 해서 나도 맞설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팔리는 여기서 갚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가운데서도 물들지 않는다는 머무름의 말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악이 오면 선으로 대한다(惡來善待)'는 구절을 더했는데, 이는 팔리에 없는 말입니다. 머무르는 상태를 말하던 자리에 되갚는 윤리가 새로 들어온 것입니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무엇에 물들지 않느냐를 묻는 이 품의 결과 조금 다른 방향입니다.
묵상
맞서 오는 사람 앞에서, 나도 맞서는 것 말고 다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을까요?
물듦과 성냄과
자만과 위선을,
겨자씨가 바늘 끝에서 떨어지듯
떨쳐낸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assa rāgo ca doso ca, māno makkho ca pātito; Sāsaporiva āragg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07
배경
막코(makkho)는 흔히 '위선'으로 옮기지만, 정확히는 남이 베푼 것이나 남의 좋은 점을 짐짓 못 본 척 깎아내리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자만(māna)과 짝을 이루어 나오는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자만은 자기를 높이는 마음이고 막코는 남을 낮추는 마음이라, 결국 한 저울의 양쪽입니다. 401게송에서 썼던 겨자씨와 바늘 끝의 비유가 여기서 다시 나옵니다. 그때는 욕망을 두고 썼는데 이번에는 물듦과 성냄과 자만과 위선, 넷을 한꺼번에 겨눕니다. 같은 비유를 되풀이하되 대상을 넓혀 가는 이 품의 방식이 여기서도 이어집니다.
묵상
남의 좋은 점을 짐짓 못 본 척 넘긴 적이 있나요? 그때 마음속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거칠지 않고 알아듣기 쉬운 말을
진실하게 내놓는 이,
그 말로 누구에게도 상처 입히지 않는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Akakkasaṁ viññāpaniṁ, giraṁ saccamudīraye; Yāya nābhisaje kañci,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08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을 삘린다왓차 장로와 잇대어 전하기도 합니다. 전생의 버릇으로 거친 말투가 몸에 배어 있었지만 그 말에 남을 해치려는 마음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게송이 드는 조건은 말에 관한 것 하나입니다. 거칠지 않고 알아듣기 쉽고 진실한 말을 하되, 야야 나비사제 깐찌(yāya nābhisaje kañci, 그 말로 누구도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는 것)라는 단서가 핵심입니다. 듣는 사람이 다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단서를 빼고 '팔정도를 살펴 안다'는 다른 조건을 넣었습니다. 말이 남에게 가닿는 자리를 살피던 시선이, 안다는 것 자체로 옮겨 간 것입니다.
묵상
진실을 말했다고 해서 그 말이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나요?
이 세상에서 길든 짧든, 작든 크든,
아름답든 추하든,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도 취하지 않는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odha dīghaṁ va rassaṁ vā, aṇuṁ thūlaṁ subhāsubhaṁ; Loke adinnaṁ nādiyati,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09
배경
이 게송은 크기와 생김새를 짝지어 늘어놓으며 예외를 하나씩 지웁니다. 길든 짧든, 작든 크든, 아름답든 추하든이라는 세 짝이 그렇습니다. 아딘낭(adinnaṁ)은 '주어지지 않은 것'으로, 흔히 다섯 계율 가운데 도둑질하지 않음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 조건이 값어치나 크기와 상관없다고 못박은 점입니다. 작고 하찮아 보이는 것이라 괜찮다거나, 아름답지 않아 아무도 안 챙긴다고 괜찮다는 셈은 통하지 않습니다. 크기를 재는 저울을 아예 치워 버린 것입니다.
묵상
작고 하찮아서 괜찮다고 여기며 슬쩍 취한 것이 있었나요?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바랄 것이 없는 이,
바랄 것 없이 속박에서 벗어난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Āsā yassa na vijjanti, asmiṁ loke paramhi ca; Nirāsāsaṁ visaṁyutt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10
배경
아사(āsā)는 '바람, 갈망'이라는 뜻으로, 갈애(taṇhā)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소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게송이 겨누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만이 아닙니다. 아스밍 로께 빠람히 짜(asmiṁ loke paramhi ca,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라고 하여, 다음 생에 더 나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함께 겨눕니다. 좋은 일을 하고 그 보답으로 좋은 곳에 나기를 바라는 것도 흔한 마음인데, 그마저 바람의 하나로 봅니다. 무언가를 바라는 한 그 바람에 매인다는 것입니다. 니라사상(nirāsāsaṁ, 바랄 것 없이)은 체념이 아니라 더 이상 매달릴 것이 없어진 자리를 가리킵니다.
묵상
지금 내가 품고 있는 바람 가운데, 다음에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얼마나 섞여 있나요?
집착이 없고
모든 것을 알아 의심이 없는 이,
죽음 없는 경지에 뛰어들어 다다른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assālayā na vijjanti, aññāya akathaṅkathī; Amatogadhamanuppatt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11
배경
아까탕까티(akathaṅkathī)는 '의심이 없는 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몰라 흔들리는 상태를 까탕까타(kathaṅkathā)라 하는데, 그 흔들림이 아예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또가당(amatogadhaṁ)은 '죽음 없는 것 속으로 뛰어든'이라는 뜻으로, 강 속으로 뛰어드는 그림을 빌려 옵니다. 385게송에서 저 언덕과 이 언덕을 건넌다고 했던 것과 이어지되, 여기서는 건너는 동작보다 뛰어드는 동작이 두드러집니다. 알라야(ālayā, 집착)와 의심은 서로 다른 문제 같지만, 둘 다 확신이 없어 자꾸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데서 나옵니다. 붙잡을 것이 없어지면 의심할 것도 없어집니다.
묵상
확신이 없어서 자꾸 무언가를 붙잡으려 했던 적이 있나요?
이 세상에서 좋은 일과 나쁜 일,
그 둘에 대한 집착을 함께 뛰어넘어,
슬픔 없고 티끌 없이 맑은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odha puññañca pāpañca, ubho saṅgamupaccagā; Asokaṁ virajaṁ suddh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12
배경
뿐냐(puñña, 좋은 일)와 빠빠(pāpa, 나쁜 일) 둘 다를 뛰어넘으라는 셈법은 이 책에서 여러 차례 되풀이됩니다. 나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만, 좋은 일에 대한 집착(saṅga)마저 뛰어넘으라는 것은 언뜻 이상하게 들립니다. 좋은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쌓아 자기 것으로 여기고 거기 기대는 마음을 넘어서라는 뜻입니다. 아소깡 위라장 숫당(asokaṁ virajaṁ suddhaṁ)은 '슬픔 없고 티끌 없이 맑은'이라는 뜻으로, 좋은 일과 나쁜 일 어느 쪽에도 매이지 않을 때 비로소 오는 맑음을 그립니다. 좋은 일에 매인 마음도 나쁜 일에 매인 마음만큼이나 무겁습니다.
묵상
좋은 일을 해 놓고 그것을 마음에 계속 담아 둔 적이 있나요? 그 무게는 나쁜 일의 무게와 얼마나 다를까요?
달처럼 티 없이 맑고
청명하여 흐림이 없는 이,
즐거움과 존재에 대한 집착을 다한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Candaṁva vimalaṁ suddhaṁ, vippasannamanāvilaṁ; Nandībhavaparikkhīṇ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13
배경
이 게송의 조건은 난디바와빠릭키낭(nandībhavaparikkhīṇaṁ, 즐김과 존재가 다한)입니다. 난디(nandī)는 즐거워하며 반기는 마음이고, 바와(bhava)는 다시 태어나는 존재 자체를 뜻합니다. 존재를 반기고 즐기는 그 마음이 다시 태어남을 부르는 뿌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에 '비방과 헐뜯음이 이미 없어졌다'는 말을 넣었습니다. 존재의 소멸을 말하던 자리에 남과의 관계, 곧 세상의 평판을 다스리는 문제가 들어온 것입니다. 달의 비유는 412게송의 맑음을 이어받으면서 한 걸음 나아갑니다. 티끌만 없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빛까지 낸다는 것입니다.
묵상
지금의 삶을 계속 이어 가고 싶다는 마음과,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이 진창길, 험한 떠돎의 길과
그 어리석음을 뛰어넘어,
건너서 저 언덕에 이르고
자나에 들어 흔들림 없고 의심이 없으며,
붙잡지 않고 고요해진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omaṁ palipathaṁ duggaṁ, saṁsāraṁ mohamaccagā; Tiṇṇo pāraṅgato jhāyī, anejo akathaṅkathī; Anupādāya nibbuto,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14
배경
빨리빠탕 두강(palipathaṁ duggaṁ)은 '진창길, 험한 길'이라는 뜻으로, 윤회(saṁsāra)를 걷기 힘든 길에 빗댄 것입니다.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을 걷는 그림입니다. 이 게송은 이 품에서 조건을 가장 많이 겹쳐 놓은 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건넜고, 저 언덕에 이르렀고, 자나에 들었고, 흔들림 없고, 의심이 없고, 붙잡지 않고 고요해졌다는 여섯 가지가 한 사람 위에 포개집니다. 아네조(anejo)는 '흔들림 없는'이라는 뜻으로, 진창에서도 발이 빠지지 않고 굳건히 선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누빠다야 닙부또(anupādāya nibbuto)는 '붙잡지 않고 고요해진'이라는 뜻으로, 이 품에서 열반의 성질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말입니다.
묵상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진창처럼 느껴질 때, 무엇을 붙잡으려 하고 있나요?
이 세상에서 감각적 욕망을 버리고
집 없이 떠도는 이,
욕망과 존재에 대한 집착을 다한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odha kāme pahantvāna, anāgāro paribbaje; Kāmabhavaparikkhīṇ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15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을 순다라사뭇다 장로와 잇대어 전합니다. 출가한 아들을 다시 데려오려는 어머니가 여인을 보내 유혹했는데, 옷을 벗으려는 그 순간 오히려 마음이 맑아져 그 자리에서 도리어 굳게 물러섰다는 이야기입니다. 버린다는 것이 가장 시험받는 자리에서 나온 말씀인 셈입니다. 아나가로 빠립바제(anāgāro paribbaje)는 '집 없이 떠돈다'는 뜻으로, 한곳에 머무를 살림을 두지 않는다는 그림입니다. 까마바와빠릭키낭(kāmabhavaparikkhīṇaṁ)은 '감각적 욕망의 세계에 다시 태어남이 다한'이라는 뜻으로, 지금 이 욕망만이 아니라 그 욕망이 다시 불러올 삶까지 함께 겨눕니다.
묵상
버렸다고 여겼던 것이 뜻밖의 자리에서 다시 시험대에 오른 적이 있나요?
이 세상에서 갈애를 버리고
집 없이 떠도는 이,
갈애와 존재에 대한 집착을 다한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odha taṇhaṁ pahantvāna, anāgāro paribbaje; Taṇhābhavaparikkhīṇ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16
배경
415게송과 이 게송은 낱말 하나만 바뀐 짝입니다. 까마(kāma, 감각적 욕망)가 있던 자리에 딴하(taṇhā, 목마름)가 들어섰을 뿐 나머지는 그대로입니다. 까마가 눈앞의 대상을 향한 구체적인 끌림이라면, 딴하는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마시고도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 자체를 가리킵니다. 대상 하나를 버리는 일과 목마름이라는 성질 자체를 버리는 일은 다릅니다. 이 품에서 같은 틀에 낱말 하나만 바꿔 넣어 짝을 이루는 게송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그때마다 바뀐 그 한 낱말이 초점입니다. 여기서는 욕망의 대상에서 욕망의 뿌리로 시선이 옮겨 갑니다.
묵상
내가 지금 원하는 것과, 그 원함 자체가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이야기일까요?
인간의 속박을 버리고
천상의 속박마저 뛰어넘은 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Hitvā mānusakaṁ yogaṁ, dibbaṁ yogaṁ upaccagā; Sabbayogavisaṁyutt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17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을 한때 광대였던 이가 출가한 뒤의 이야기와 잇대어 전합니다. 무대에서 몸에 밴 재간이 자꾸 마음을 흔들었지만 끝내 그것마저 넘어섰다고 합니다. 이 게송이 눈여겨볼 것은 인간의 속박(mānusakaṁ yogaṁ)만이 아니라 천상의 속박(dibbaṁ yogaṁ)까지 든다는 점입니다. 좋은 곳에 태어나는 것도 여전히 매임의 하나로 봅니다. 요가(yoga)는 본래 '멍에, 묶는 것'을 뜻하는 말로, 소나 말을 수레에 매다는 도구입니다. 나쁜 것에 매이는 것도 매임이고, 좋은 것에 매이는 것도 매임이라는 것이 이 게송의 요점입니다.
묵상
더 좋은 상태로 가는 것이 목표라고 여겼던 일도, 실은 또 다른 매임일 수 있을까요?
즐거움과 싫증을 버려
서늘히 식고, 집착의 뿌리가 없는 이,
온 세상을 이겨낸 영웅을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Hitvā ratiñca aratiñca, sītibhūtaṁ nirūpadhiṁ; Sabbalokābhibhuṁ vīr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18
배경
417게송과 한 이야기에서 나온 짝입니다. 라띠(rati, 즐거움)와 아라띠(arati, 싫증)를 나란히 버리라고 한 점이 눈에 띕니다. 싫은 것을 버리라는 말은 흔하지만 즐거운 것마저 버리라는 것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즐거움을 얻으려는 마음과 싫증을 피하는 마음이 실은 같은 하나에서 갈라진 두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시띠부땅(sītibhūtaṁ)은 '서늘히 식은'이라는 뜻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식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타오를 것이 없어 서늘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위랑(vīraṁ, 영웅)이라는 말이 여기서 처음 나오는데, 물러나서 얻는 고요가 아니라 온 세상을 이겨 내고 얻는 고요라는 것을 이 한 낱말이 보여 줍니다.
묵상
즐거움을 얻으려는 마음과 싫은 것을 피하는 마음이 실은 한 뿌리라고 느낀 적이 있나요?
살아 있는 것들이 죽고 태어나는 것을
남김없이 아는 이,
집착 없이 바르게 이르러 깨달은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Cutiṁ yo vedi sattānaṁ, upapattiñca sabbaso; Asattaṁ sugataṁ buddh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19
배경
쭈띵(cutiṁ, 죽음)과 우빠빳띵(upapattiṁ, 태어남)을 함께 아는 앎은 흔히 깨달음의 밤에 얻는다고 전하는 세 가지 앎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중생들이 어디서 죽어 어디로 태어나는지를 남김없이 보는 눈입니다. 사밧소(sabbaso, 남김없이)라는 말이 그 범위를 못박습니다. 하나둘의 예외가 있는 앎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삿땅(asattaṁ)은 '집착 없는'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넓게 아는 이라도 그 앎에 다시 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짚어 둡니다. 많이 아는 것과 그 앎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다른 일이라는 점을 이 게송은 함께 짚어 둡니다.
묵상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오히려 붙들고 있지는 않나요?
신들도 간다르바도 인간들도
그 행방을 알지 못하는 이,
번뇌가 다하여 아라한이 된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assa gatiṁ na jānanti, devā gandhabbamānusā; Khīṇāsavaṁ arahant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20
배경
이 게송은 '신들도 간다르바도 사람들도 그의 행방을 모른다'는, 자취 없음을 말하는 문장입니다. 남들이 그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다는 뜻이지 그가 길을 잃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간답바(gandhabba)는 신들의 악사로 알려진 존재로, 신과 인간 사이 여러 층의 존재를 함께 세워 그 누구도 모른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한역 법구경은 주어를 바꾸어 '그가 떨어질 곳을 알지 못한다'로 옮겼습니다. 남이 그를 모른다는 말이, 그 자신에게 갈 곳이 없다는 말로 바뀐 것입니다. 결이 다른 두 문장이지만 공교롭게도 둘 다 통합니다. 그를 어디로 갔다고 가리킬 수 없다는 점이 이 게송의 마지막 호칭과 이어집니다.
묵상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남들이 알아야만 그 길이 맞는 길이 되는 걸까요?
과거에도 미래에도 현재에도
어떤 집착도 없는 이,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아무것도 취하지 않는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Yassa pure ca pacchā ca, majjhe ca natthi kiñcanaṁ; Akiñcanaṁ anādān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21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을 담마딘나 장로니와 잇대어 전합니다. 재가자였을 때 남편과 헤어져 출가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라한이 되었으며, 훗날 옛 남편이 찾아와 묻는 깊은 물음들에 막힘없이 답했다고 전해지는 이입니다. 뿌레 짜 빳차 짜 맛제 짜(pure ca pacchā ca majjhe ca)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 사이에도'라는 뜻으로, 과거와 미래와 현재 어디에도 걸리는 데가 없다는 것을 셋으로 나누어 못박습니다. 396게송과 이 게송이 똑같이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아무것도 취하지 않는 이'로 끝나는데, 396게송이 태생을 부정하며 이 결론에 이르렀다면 이 게송은 시간을 부정하며 같은 결론에 이릅니다.
묵상
과거의 기억이나 다가올 일에 대한 걱정 없이, 지금 이 순간만 온전히 있어 본 적이 있나요?
황소처럼 뛰어나고 가장 훌륭한 영웅이요,
위대한 구도자로서 승리를 이룬 이,
흔들림 없이 모든 것을 씻어내고 깨달은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Usabhaṁ pavaraṁ vīraṁ, mahesiṁ vijitāvinaṁ; Anejaṁ nhātakaṁ buddh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22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을 앙굴리말라 존자와 잇대어 전합니다. 수백 명을 해치고 손가락을 꿰어 목걸이로 삼았던 그가 부처님을 만나 그 자리에서 걸음을 돌리고 끝내 아라한에 이르렀다는, 이 경전에서 가장 극적인 전환의 이야기입니다. 이 게송은 바라문의 전문 용어를 끌어와 비틉니다. 냐따깡(nhātakaṁ)은 베다 학업을 마치고 정결 의식으로 목욕을 치른 바라문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번뇌를 씻어 낸 이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습니다. 우사방(usabhaṁ, 황소)도 힘센 자를 부르던 옛 칭호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를 '가장 뛰어나고 용맹하다'는 평범한 칭찬으로 옮겨, 남의 말을 빼앗아 다시 쓰는 이 품의 방식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가장 크게 무너졌던 이가 가장 높은 이름을 다시 얻는 자리이니, 이 품의 논지가 가장 극적으로 증명되는 예이기도 합니다.
묵상
돌이킬 수 없어 보이는 자리에서도 걸음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이, 지금 나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전생을 알고
천상과 지옥의 길도 보며,
태어남이 다함에 이르러
뛰어난 지혜를 이룬 성자이니,
모든 것을 남김없이 이룬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
Pubbenivāsaṁ yo vedi, saggāpāyañca passati; Atho jātikkhayaṁ patto, abhiññāvosito muni; Sabbavositavosānaṁ, tamahaṁ brūmi brāhm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423
배경
이 게송이 법구경 전체의 마지막입니다. 조건이 셋으로 늘어서 있습니다. 전생을 아는 것, 천상과 지옥에 이르는 길을 보는 것, 태어남이 다함에 이른 것입니다. 이 셋은 흔히 깨달음의 밤에 차례로 얻는다고 전하는 세 가지 앎과 같은 얼개입니다. 사바워시따워사낭(sabbavositavosānaṁ)은 '모든 것을 남김없이 이룬'이라는 뜻으로, 더 이룰 것이 남지 않은 자리를 가리킵니다. 이 게송을 마지막으로 383게송부터 이어진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르느니라'는 되풀이가 끝을 맺습니다. 태생으로 정해지던 이름 하나를, 마흔한 편에 걸쳐 행으로 다시 세운 뒤 이 자리에서 그 되풀이 자체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이 뒤로 지금까지 스물여섯 개 품에 실린 게송 수를 낱낱이 헤아려 적은 옛 목록이 이어집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시절, 몇 편이 온전히 전해졌는지를 스스로 세어 지키려던 흔적입니다.
묵상
태생이 아니라 행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마흔한 편을 따라온 지금 나는 나 자신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