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놓지 않음은 죽지 않는 길이요,
마음을 놓음은 죽음의 길이니라.
마음을 놓지 않는 이는 죽지 않고,
마음을 놓은 이는 이미 죽은 것과 같느니라.
Appamādo amatapadaṁ, pamādo maccuno padaṁ; Appamattā na mīyanti, ye pamattā yathā matā.
법구경 Dhammapada 21 배경
이 품 전체를 이끄는 낱말이 압빠마다(appamāda)입니다. 흔히 '방일하지 않음'으로 옮기지만, 본래 술에 취하거나 넋을 놓는다는 뜻의 빠마다(pamāda)에 부정어를 붙인 말이라 '마음을 놓지 않음'에 가깝습니다. 아마따(amata)는 '죽지 않음'이지만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나고 죽음이 되풀이되는 자리에서 벗어난 상태, 곧 열반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입니다. 게송의 힘은 마지막 줄에 있습니다. 마음을 놓고 사는 것을 게으름이 아니라 죽음에 견주었습니다. 숨은 쉬고 있으나 깨어 있지 않은 시간을 이미 죽은 시간으로 셈한 것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계율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마음의 상태를 말하던 것이 지켜야 할 규범의 말이 된 셈입니다.
묵상
오늘 하루 가운데 '깨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 몇 분이나 되나요? 자동으로 흘려보낸 시간 말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면서 보낸 시간 말입니다.
이 다름을 분명히 알아
지혜로운 이들은 부지런함에 머무나니,
부지런함 속에서 기뻐하며
성인들이 거니는 자리에서 즐거워하느니라.
Evaṁ visesato ñatvā, appamādamhi paṇḍitā; Appamāde pamodanti, ariyānaṁ gocare ratā.
법구경 Dhammapada 22 배경
앞 게송에서 두 길을 갈라 보인 뒤, 그 다름을 안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를 잇습니다. 위세사또(visesato)는 '차이를 가려서'라는 뜻입니다.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두 길이 어디로 가는지 갈라 본다는 말입니다. 눈여겨볼 낱말은 빠모단띠(pamodanti), 곧 '기뻐한다'입니다. 깨어 있음이 이를 악물고 버티는 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는 상태로 놓여 있습니다. 고짜라(gocara)는 소가 풀을 뜯는 자리를 뜻하는 말에서 왔습니다. 성인들이 머무는 자리란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마음이 늘 가서 노는 곳을 가리킵니다.
묵상
깨어 있으려는 노력이 즐거운 적이 있었나요, 아니면 늘 버티는 일이었나요? 즐겁지 않다면 방식이 나에게 맞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꾸준히 마음을 모으며
늘 굳세게 나아가는 이들,
그 지혜로운 이들은
얽매임에서 벗어난 더없는 평안,
열반에 이르느니라.
Te jhāyino sātatikā, niccaṁ daḷhaparakkamā; Phusanti dhīrā nibbānaṁ, yogakkhemaṁ anuttaraṁ.
법구경 Dhammapada 23 배경
요각케마(yogakkhema)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안전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요가(yoga)는 소를 수레에 붙들어 매는 멍에를 가리키고, 케마(khema)는 위험이 없는 상태입니다. 열반을 신비한 경지가 아니라 멍에를 벗은 자리로 그린 것입니다. 사따띠까(sātatika)는 '끊이지 않는'입니다. 세게 하는 것이 아니라 끊기지 않는 쪽에 방점이 있습니다. 뿌산띠(phusanti)는 '닿는다, 만진다'는 뜻이라 이르는 과정을 머리로 아는 일이 아니라 손끝에 닿는 일처럼 그립니다. 앞 게송의 즐거움과 이 게송의 굳셈이 나란히 놓인 것이 이 품의 균형입니다.
묵상
무언가를 꾸준히 해 본 경험이 있나요? 그때 힘이 된 것은 강한 의지였나요, 아니면 끊기지 않게 만든 어떤 장치였나요?
부지런하고 알아차리며
행실이 깨끗하고 살펴서 행하며,
스스로를 다잡고 올바르게 살며
마음을 놓지 않는 이에게는
좋은 이름이 자라느니라.
Uṭṭhānavato satīmato, Sucikammassa nisammakārino; Saññatassa dhammajīvino, Appamattassa yasobhivaḍḍhati.
법구경 Dhammapada 24 배경
여섯 가지가 나란히 놓입니다. 부지런함, 알아차림, 깨끗한 행실, 살펴서 함, 스스로 다잡음, 이치에 맞는 삶입니다. 그 결과로 야소(yaso)가 자란다고 합니다. 이 낱말은 명성이나 평판을 뜻하는데, 여기서 오해하기 쉽습니다. 유명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으라는 말이 아니라, 위 여섯 가지를 갖춘 사람에게는 그것이 따라온다는 순서입니다. 애써 얻는 것이 아니라 자라는 것입니다. 니삼마까리(nisammakārī)는 '살펴보고 나서 행하는 이'를 뜻합니다. 하기 전에 한 번 보는 것, 그 짧은 사이가 여섯 가지 가운데 실제로 가장 자주 쓰이는 대목일지 모릅니다.
묵상
결정하기 전에 한 번 멈추는 습관이 있나요? 그 한 번의 멈춤이 지난달에 나를 구해 준 적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세요.
근면과 부지런함으로,
다잡음과 절제로,
지혜로운 이는 섬을 쌓나니,
큰물도 그 섬을 덮지 못하느니라.
Uṭṭhānenappamādena, saṁyamena damena ca; Dīpaṁ kayirātha medhāvī, yaṁ ogho nābhikīrati.
법구경 Dhammapada 25 배경
디빠(dīpa)에는 '섬'과 '등불' 두 뜻이 있어 번역이 갈리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이 게송은 뒤에 '큰물이 덮지 못하는'이라는 말이 붙으므로 섬으로 읽는 것이 맞습니다. 한역 법구경은 등불로 읽어 어두운 못과 짝지었고, 그 결과 큰물의 그림이 사라졌습니다. 섬은 물을 막지 않습니다. 물이 차올라도 잠기지 않을 만큼 높을 뿐입니다. 그리고 섬은 하루에 쌓이지 않습니다. 까이라타(kayirātha)는 '만들어 두어야 한다'는 뜻으로, 물이 밀려오기 전에 해 두는 일임을 가리킵니다.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미리 쌓아 두라는 말입니다.
묵상
지금 마음이 비교적 평온하다면, 오히려 지금이 섬을 쌓을 때인지도 모릅니다. 큰물이 왔을 때 나를 버티게 해 줄 것 하나를 지금 시작한다면 무엇일까요?
어리석고 지혜가 모자란 이들은
마음을 놓은 채 살아가지만,
지혜로운 이는 부지런함을
가장 귀한 재물처럼 지키느니라.
Pamādamanuyuñjanti, bālā dummedhino janā; Appamādañca medhāvī, dhanaṁ seṭṭhaṁva rakkhati.
법구경 Dhammapada 26 배경
아누윤잔띠(anuyuñjanti)는 '거기에 몰두한다, 매달린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놓는 일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열심히 매달리는 상태로 그려졌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시간을 놓치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가만히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것에 열심이어서 놓칩니다. 뒷줄의 비유는 재물입니다. 재물은 벌기도 어렵지만 지키는 데 더 마음이 갑니다. 락카띠(rakkhati)가 '지킨다'인 것은 그래서입니다. 깨어 있음은 한 번 얻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지켜 내야 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묵상
무엇을 지키는 데 가장 마음을 쓰고 있나요? 통장이나 물건을 지키는 만큼 하루의 정신을 지키고 있는지 견주어 보면 어떨까요?
마음 놓는 일에 매달리지 말고
쾌락에 빠져 가까이하지 말지니라.
깨어서 마음을 모으는 이는
크나큰 즐거움을 얻느니라.
Mā pamādamanuyuñjetha, mā kāmaratisanthavaṁ; Appamatto hi jhāyanto, pappoti vipulaṁ sukhaṁ.
법구경 Dhammapada 27 배경
산타와(santhava)는 '가까이 사귐, 친해짐'을 뜻합니다. 쾌락을 한 번 맛보는 일이 아니라 그것과 친해지는 일을 문제 삼았습니다. 낯설던 것이 익숙해지고 익숙한 것이 당연해지는 과정이 여기서 걸립니다. 그런데 이 게송이 즐거움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뒷줄에서 위뿔랑 수캉(vipulaṁ sukhaṁ), 곧 '크나큰 즐거움'을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즐거움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것과 바꾸라는 셈법입니다. 무엇을 참으라는 말보다 무엇을 얻는지를 함께 말하는 것이 이 품의 방식입니다.
묵상
지금 익숙해진 즐거움 가운데, 처음에는 낯설었던 것이 있나요? 그것과 얼마나 친해졌는지 한번 헤아려 보면 어떨까요?
지혜로운 이가 부지런함으로
마음 놓음을 떨쳐 낼 때,
지혜의 높은 자리에 올라
슬픔 없는 이가 되어
슬픔에 잠긴 이들을 바라보나니,
산 위에 선 사람이
땅 위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듯 하느니라.
Pamādaṁ appamādena, yadā nudati paṇḍito; Paññāpāsādamāruyha, asoko sokiniṁ pajaṁ; Pabbataṭṭhova bhūmaṭṭhe, dhīro bāle avekkhati.
법구경 Dhammapada 28 배경
산 위에서 내려다본다는 비유가 자칫 내려다보는 마음으로 읽힐 수 있어 짚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아웩카띠(avekkhati)는 업신여긴다는 뜻이 아니라 '내려다본다, 살펴본다'는 뜻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높이가 아니라 보이는 범위입니다. 땅에 있으면 눈앞의 길만 보이지만 산에 오르면 길 전체가 보입니다. 슬픔 한가운데 있을 때는 그것이 전부로 보이는데, 한 걸음 물러나면 그 슬픔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가 보인다는 말입니다. 빤냐빠사다(paññāpāsāda)는 '지혜라는 높은 누각'입니다. 남보다 높은 자리가 아니라 시야가 트인 자리로 읽는 편이 맞습니다.
묵상
지난날 크게 흔들렸던 일이 지금은 어떻게 보이나요? 그때는 전부처럼 보이던 것이 지금은 한 부분으로 보인다면, 지금 겪는 일도 언젠가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마음 놓은 이들 가운데 깨어 있고
잠든 이들 가운데 홀로 눈 뜬 이는,
느린 말을 뒤로하고 달리는
빠른 말처럼 나아가느니라.
Appamatto pamattesu, suttesu bahujāgaro; Abalassaṁva sīghasso, hitvā yāti sumedhaso.
법구경 Dhammapada 29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함께 출가한 두 벗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한 사람은 마음을 놓았고 한 사람은 놓지 않았습니다. 게송이 그리는 그림은 경주가 아닙니다. 빠른 말은 느린 말을 이기려고 달리지 않습니다. 그저 제 걸음으로 갈 뿐인데 사이가 벌어집니다. 히뜨와 야띠(hitvā yāti)는 '두고 간다'입니다. 여기서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 게송을 남들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읽으면 비교가 되고, 비교는 다시 마음을 놓게 만듭니다. 잠든 이들을 깨우라는 말도 아니고 그들보다 낫다는 말도 아닙니다. 남들이 어떻든 제 걸음을 잃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읽는 편이 이 품의 흐름에 맞습니다.
묵상
주위가 모두 느슨할 때 혼자 다잡기가 어렵나요? 그럴 때 나를 붙잡아 주는 것은 남의 눈일까요, 아니면 내가 정해 둔 무엇일까요?
부지런함으로 마가와는
신들 가운데 으뜸이 되었나니,
부지런함은 늘 칭찬받고
마음 놓음은 늘 나무람을 받느니라.
Appamādena maghavā, devānaṁ seṭṭhataṁ gato; Appamādaṁ pasaṁsanti, pamādo garahito sadā.
법구경 Dhammapada 30 배경
마가와(maghavā)는 인도 신화에서 신들의 우두머리를 부르는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경전은 그가 본래 사람이었고, 마을에서 길을 닦고 쉼터를 짓는 일을 꾸준히 해서 그 자리에 이르렀다고 전합니다. 이 게송이 신화를 끌어온 뜻은 분명합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 까닭을 특별한 능력이나 태생이 아니라 깨어 있음 하나로 돌린 것입니다. 앞의 여러 게송이 수행하는 이를 그렸다면 여기서는 마을에서 궂은일을 하던 사람이 나옵니다. 깨어 있음이 어떤 자리에서든 통하는 일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묵상
대단한 일이 아니라 사소한 일을 꾸준히 해 본 적이 있나요? 그 꾸준함이 나중에 어디로 이어졌는지 돌아보면 어떨까요?
부지런함을 기뻐하는 수행자,
마음 놓음에서 두려움을 보는 이는,
크고 작은 얽매임을
불이 번지듯 태우며 나아가느니라.
Appamādarato bhikkhu, pamāde bhayadassi vā; Saṁyojanaṁ aṇuṁ thūlaṁ, ḍahaṁ aggīva gacchati.
법구경 Dhammapada 31 배경
바야닷시(bhayadassī)는 '두려움을 보는 이'입니다. 마음 놓는 일을 편안함이 아니라 위험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살얼음 위를 걸을 때 우리는 저절로 깨어 있게 됩니다. 억지로 다잡는 것이 아니라 어디가 위험한지 보이기 때문입니다. 상요자나(saṁyojana)는 사람을 붙들어 매는 끈을 뜻합니다. 여기서 크고 작은 것을 함께 든 점이 중요합니다. 큰 것만 끊으려 하면 작은 것이 남고, 작은 것이 남으면 다시 큰 것으로 자랍니다. 불이 번지는 비유는 하나씩 끄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자리마다 함께 타는 그림입니다.
묵상
끊어야 할 큰 것 하나만 붙잡고 있지는 않나요? 오히려 사소해서 눈감아 온 작은 습관이 더 오래 붙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부지런함을 기뻐하는 수행자,
마음 놓음에서 두려움을 보는 이는,
물러설 수 없나니
이미 열반에 가까이 있느니라.
Appamādarato bhikkhu, pamāde bhayadassi vā; Abhabbo parihānāya, nibbānasseva santike.
법구경 Dhammapada 32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입니다. 앞 게송과 첫 두 줄이 똑같고 뒤만 바뀝니다. 아밥보 빠리하나야(abhabbo parihānāya)는 '물러설 수 없다'는 뜻입니다. 뒷걸음질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럴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산띠께(santike)는 '가까이'입니다. 이르렀다고 하지 않고 가까이 있다고 한 것이 이 품의 마무리로 적절합니다. 열반이 저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다다른 것도 아니며, 깨어 있는 그 자리가 곧 가까운 자리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열두 편에 걸쳐 되풀이된 한 낱말이 여기서 끝을 맺습니다.
묵상
돌아가고 싶지 않은 자리가 있나요? 다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 때, 그 마음이 다짐보다 힘이 셀 때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