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고르고 따고 엮는 일에 견준 열여섯 편 - 가려내는 눈에 관하여

누가 이 땅을 꿰뚫어 볼 것인가, 저승과 신들의 세계까지 함께. 누가 잘 설해진 가르침을 꽃을 고르는 이처럼 가려낼 것인가.

Ko imaṁ pathaviṁ vicessati, Yamalokañca imaṁ sadevakaṁ; Ko dhammapadaṁ sudesitaṁ, Kusalo pupphamiva pacessati.

법구경 Dhammapada 44

배경

이 품의 이름이 꽃인 까닭이 첫 게송에 나옵니다. 꽃을 따는 사람은 아무 꽃이나 뽑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좋은지 알고, 어디를 잘라야 하는지 알며, 상하지 않게 다룹니다. 가르침을 대하는 태도를 그 일에 견준 것입니다. 위쩻사띠(vicessati)는 '살펴 꿰뚫어 안다'는 뜻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대목을 '지옥을 버리고 천상을 취한다'로 옮겼는데, 그러면 아는 일이 고르는 일로 바뀝니다. 빠알리는 이 땅과 저승과 하늘을 모두 하나의 앎의 대상으로 놓았습니다. 좋은 데를 고르는 이야기가 아니라 전체를 꿰뚫어 보는 이야기입니다.

묵상

좋은 말을 많이 듣지만 정작 내게 필요한 것을 골라내기는 어렵지 않나요? 오늘 들은 것 가운데 하나만 남긴다면 무엇을 고르시겠어요?

배우는 이가 이 땅을 꿰뚫어 보나니, 저승과 신들의 세계까지 함께. 배우는 이가 잘 설해진 가르침을 꽃을 고르는 이처럼 가려내느니라.

Sekho pathaviṁ vicessati, Yamalokañca imaṁ sadevakaṁ; Sekho dhammapadaṁ sudesitaṁ, Kusalo pupphamiva pacessati.

법구경 Dhammapada 45

배경

앞 게송이 물음이고 이 게송이 답입니다. 답으로 나온 낱말이 세코(sekha), 곧 '아직 배우는 중인 사람'입니다. 다 배운 이가 아니라 배우는 중인 이가 답으로 놓인 점이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이 낱말은 경전에서 깨달음의 길에 들어섰으나 아직 끝에 이르지 않은 이를 가리킵니다. 다 알아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자리에 선 사람이 이미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두 게송을 나란히 놓으면 이 품의 방식이 드러납니다. 크게 묻고 작게 답합니다. 답이 대단하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이 답의 핵심입니다.

묵상

아직 잘 모른다는 생각에 시작을 미루고 있는 것이 있나요? 배우는 중인 사람이 이미 볼 수 있다면,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을지 모릅니다.

이 몸이 물거품 같은 줄 알고 아지랑이 같은 것임을 깨달아, 사람을 붙드는 힘이 피워 낸 헛된 꽃을 잘라 내면, 죽음의 왕이 보지 못하는 곳으로 가느니라.

Pheṇūpamaṁ kāyamimaṁ viditvā, Marīcidhammaṁ abhisambudhāno; Chetvāna mārassa papupphakāni, Adassanaṁ maccurājassa gacche.

법구경 Dhammapada 46

배경

꽃이라는 이 품의 주제가 여기서 뒤집힙니다. 빠뿝파까(papupphaka)는 마라가 피워 놓은 꽃입니다. 곱게 보이지만 사람을 그 자리에 붙들어 두려고 피운 것입니다. 앞 게송에서 꽃은 골라야 할 좋은 것이었는데 여기서는 잘라 내야 할 것으로 나옵니다. 같은 그림을 뒤집어 쓰는 것이 법구경의 방식입니다. 페누빠마(pheṇūpama)는 물거품에 견준 말이고 마리찌(marīci)는 아지랑이입니다. 둘 다 멀리서는 있어 보이는데 다가가면 잡히지 않습니다. 몸을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 애쓰지 말라는 말로 읽힙니다.

묵상

손에 잡힐 듯해서 오래 얻으려 애썼는데 막상 닿으니 아무것도 없던 경험이 있나요? 그때 얻으려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꽃을 따 모으는 데만 마음을 빼앗긴 사람을, 큰물이 잠든 마을을 쓸어 가듯 죽음이 데려가느니라.

Pupphāni heva pacinantaṁ, byāsattamanasaṁ naraṁ; Suttaṁ gāmaṁ mahoghova, maccu ādāya gacchati.

법구경 Dhammapada 47

배경

그림 두 개가 겹칩니다. 꽃을 따느라 고개를 숙인 사람과, 잠든 마을입니다. 둘 다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 같습니다. 위험한 일을 하다가 당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그러모으다가 당한다는 데 이 게송의 서늘함이 있습니다. 브야삿따마나상(byāsattamanasaṁ)은 '마음이 거기 딱 붙어 버린'이라는 뜻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몸이 병들어 꽃처럼 시든다'로 바꾸었는데, 그러면 사람의 몰두를 짚던 말이 몸의 덧없음을 말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빠알리가 겨눈 것은 몸이 아니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자세입니다.

묵상

요즘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모으는 것이 있나요? 그것을 모으는 동안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은 무엇일까요?

꽃을 따 모으는 데만 마음을 빼앗기고, 감각적 욕망에 물리지 못한 이를 죽음이 제 뜻대로 하느니라.

Pupphāni heva pacinantaṁ, byāsattamanasaṁ naraṁ; Atittaññeva kāmesu, antako kurute vasaṁ.

법구경 Dhammapada 48

배경

앞 게송과 첫 두 줄이 같고 뒤가 바뀝니다. 여기 더해진 낱말이 아띳땅(atittaṁ), 곧 '아직 물리지 않은'입니다. 채우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중에 끝난다는 말입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즐거움을 다 누리고 나면 그만두겠다는 계획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물리는 지점이 오지 않으니 계획한 끝도 오지 않습니다. 안따까(antaka)는 '끝을 내는 자'로 죽음을 부르는 말입니다. 한역 법구경에는 이 죽음이 없고 대신 그릇되게 얻은 재물이 들어와 다른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묵상

이것만 채우면 됐다고 여긴 것이 있었나요? 그것을 채운 뒤에 마음은 정말 멈췄나요, 아니면 다음 것이 생겼나요?

벌이 꽃의 빛깔과 향기를 다치지 않고 꿀만 거두어 떠나가듯, 성자는 마을에서 그렇게 다니느니라.

Yathāpi bhamaro pupphaṁ, vaṇṇagandhamaheṭhayaṁ; Paleti rasamādāya, evaṁ gāme munī care.

법구경 Dhammapada 49

배경

탁발하는 수행자의 모습을 그린 게송이지만, 남에게 무언가를 받아 사는 모든 관계에 읽힙니다. 아헤타양(aheṭhayaṁ)은 '해치지 않고'입니다. 벌은 꽃에서 꿀을 가져가지만 꽃은 그대로 남습니다. 오히려 벌이 다녀간 덕에 열매가 맺힙니다. 받되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앞의 두 게송이 그러모으다 휩쓸리는 사람을 그렸으니, 여기서는 가져가되 남기는 방식을 보여 주는 셈입니다. 얼마나 가져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가져가느냐를 말하고 있습니다.

묵상

내가 무언가를 얻고 지나간 자리에 상함이 남은 적은 없었나요? 같은 것을 얻으면서 상하게 하지 않는 방법이 있었을까요?

남의 잘못을 들추지 말고 남이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을 캐지 말지니라. 다만 자기가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을 살필지니라.

Na paresaṁ vilomāni, na paresaṁ katākataṁ; Attanova avekkheyya, katāni akatāni ca.

법구경 Dhammapada 50

배경

빌로마(viloma)는 결이 거슬린 자리, 곧 남의 흠을 뜻합니다. 이 게송이 남의 잘못을 못 본 척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눈여겨볼 것은 뒷줄에서 자기를 살필 때도 '한 일과 하지 않은 일' 두 가지를 다 든다는 점입니다. 한 잘못만이 아니라 하지 않은 것까지 봅니다. 남에게 들이대던 잣대를 거두라는 것이 아니라 그 잣대를 자기 쪽으로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쪽으로 돌리면 남에게 쓸 때보다 볼 것이 훨씬 많아집니다. 남의 흠을 세는 일에 시간이 남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묵상

오늘 누군가의 잘못을 몇 번 떠올렸나요? 같은 시간에 내가 하지 않은 일은 몇 가지나 떠올렸는지 견주어 보면 어떨까요?

빛깔은 곱지만 향기가 없는 꽃처럼, 잘 말해진 말도 행하지 않는 이에게는 열매가 없느니라.

Yathāpi ruciraṁ pupphaṁ, vaṇṇavantaṁ agandhakaṁ; Evaṁ subhāsitā vācā, aphalā hoti akubbato.

법구경 Dhammapada 51

배경

수바시따(subhāsita)는 '잘 말해진 것'으로, 훌륭한 말이나 좋은 글귀를 가리킵니다. 그것이 나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빛깔이 곱다고 인정하고 시작합니다. 다만 향기가 없다고 합니다. 향기는 멀리 퍼지고 남습니다. 빛깔은 보는 동안만 있습니다. 아꿉바또(akubbato)는 '행하지 않는 이에게는'이라는 뜻으로, 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받는 사람 쪽에 문제를 둡니다. 같은 문장이 어떤 사람에게는 열매를 맺고 어떤 사람에게는 맺지 않습니다. 이 품의 다음 게송이 그 짝을 보여 줍니다.

묵상

마음에 새기겠다고 저장해 둔 글귀가 몇 개나 있나요? 그 가운데 실제로 몸을 움직이게 한 것은 몇 개였는지 세어 보면 어떨까요?

빛깔도 곱고 향기도 지닌 꽃처럼, 잘 말해진 말은 행하는 이에게 열매를 맺느니라.

Yathāpi ruciraṁ pupphaṁ, Vaṇṇavantaṁ sagandhakaṁ; Evaṁ subhāsitā vācā, Saphalā hoti kubbato.

법구경 Dhammapada 52

배경

앞 게송의 짝으로, 아간다까(agandhaka, 향기 없는)가 사간다까(sagandhaka, 향기 있는)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이 짝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말과 행동의 관계입니다. 좋은 말이 향기를 갖는 것은 말 자체가 달라져서가 아니라 그 말대로 사는 사람이 있어서입니다. 그러니 향기는 말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납니다. 이 품의 뒤쪽에서 향기 이야기가 다시 나오는데, 거기서는 됨됨이의 향기가 바람을 거슬러 간다고 합니다. 여기서 씨앗이 뿌려진 셈입니다. 한 사람이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을 볼 때 말이 비로소 힘을 얻습니다.

묵상

말보다 사는 모습으로 나를 움직인 사람이 있나요? 그 사람의 어떤 점이 말보다 오래 남았는지 떠올려 보세요.

꽃 더미에서 많은 꽃다발을 엮어 내듯, 태어나 죽어 갈 사람은 좋은 일을 많이 지어야 하느니라.

Yathāpi puppharāsimhā, kayirā mālāguṇe bahū; Evaṁ jātena maccena, kattabbaṁ kusalaṁ bahuṁ.

법구경 Dhammapada 53

배경

자떼나 맛쩨나(jātena maccena)는 '태어난 자, 곧 죽을 자로서'라는 뜻입니다. 좋은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놓입니다. 나중에 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덕을 쌓으면 태어나는 곳이 좋아진다'로 바꾸었는데, 그러면 덧없음이 이유이던 자리에 다음 생의 셈이 들어섭니다. 빠알리의 셈은 다릅니다. 꽃은 두면 시듭니다. 그러니 있을 때 엮습니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미루지 않을 이유가 됩니다.

묵상

언젠가 하려고 미뤄 둔 좋은 일이 있나요? 그 언젠가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면, 오늘 그중 가장 작은 것 하나를 해 볼 수 있을까요?

꽃의 향기는 바람을 거스르지 못하나니, 백단향도 따가라도 재스민도 그러하니라. 그러나 참된 사람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나니, 사방으로 퍼지느니라.

Na pupphagandho paṭivātameti, Na candanaṁ tagaramallikā vā; Satañca gandho paṭivātameti, Sabbā disā sappuriso pavāyati.

법구경 Dhammapada 54

배경

주석서는 이 게송이 아난다 존자의 물음에서 나왔다고 전합니다. 바람을 거슬러 가는 향기가 있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빠띠와따(paṭivāta)는 '바람을 거슬러'입니다. 아무리 귀한 향도 물리 법칙을 거스르지 못하는데, 사람의 됨됨이에서 나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대비입니다. 여기서 향기가 뜻하는 것은 평판과 조금 다릅니다. 평판은 누군가 전해야 퍼지지만, 이 게송이 말하는 것은 전하지 않아도 퍼지는 무엇입니다. 자기가 알리려 애쓰지 않는데도 알려지는 것, 그것을 향기라 부른 것입니다.

묵상

누군가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게 된 계기가 그 사람이 알리려 한 것이었나요, 아니면 저절로 알게 된 것이었나요?

백단향과 따가라, 연꽃과 재스민의 향기 가운데, 몸에 밴 됨됨이의 향기가 가장 뛰어나니라.

Candanaṁ tagaraṁ vāpi, uppalaṁ atha vassikī; Etesaṁ gandhajātānaṁ, sīlagandho anuttaro.

법구경 Dhammapada 55

배경

실라간다(sīlagandha)는 '실라의 향기'입니다. 실라(sīla)는 흔히 계율로 옮기지만 본래 몸에 밴 됨됨이에 가깝습니다. 규칙을 지키는 것과 그렇게 하는 것이 익어 자연스러워진 것은 다릅니다. 지키는 사람에게서는 애쓰는 기색이 나고 익은 사람에게서는 향기가 납니다. 이 게송이 네 가지 이름난 향을 일부러 나열한 뒤에 그것과 견준 것은, 됨됨이가 그 자리에 놓일 만한 실체라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값진 물건과 나란히 놓는 방식으로 그 값을 말한 셈입니다.

묵상

애써 지키는 일과 저절로 하게 되는 일 가운데 나에게는 어느 쪽이 더 많나요? 하나가 저절로 되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떠올려 보세요.

따가라와 백단향의 향기는 오히려 옅으니라. 됨됨이를 지닌 이의 향기는 신들의 세계에까지 불어 가느니라.

Appamatto ayaṁ gandho, yāyaṁ tagaracandanī; Yo ca sīlavataṁ gandho, vāti devesu uttamo.

법구경 Dhammapada 56

배경

앞 게송이 견주었다면 여기서는 격차를 말합니다. 압빠맛또(appamatto)는 여기서 '적은, 옅은'이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이 품에서 향기 이야기가 세 편이나 이어지는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향기는 본인이 맡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에서 나는 냄새를 자기는 잘 모릅니다. 됨됨이도 그렇습니다. 스스로 어떤 향을 내고 있는지는 자기가 가장 늦게 압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검소하게 살던 한 장로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가 애써 알리지 않았는데도 널리 알려졌다는 대목이 이 게송과 이어집니다.

묵상

다른 사람이 나에게서 느끼는 것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스스로 모르는 그 향기를 짐작할 방법이 하나쯤 있을까요?

됨됨이를 온전히 갖추고 부지런함 속에 살며, 바르게 알아 풀려난 이들에게는 사람을 붙드는 힘이 그 길을 찾지 못하느니라.

Tesaṁ sampannasīlānaṁ, appamādavihārinaṁ; Sammadaññāvimuttānaṁ, māro maggaṁ na vindati.

법구경 Dhammapada 57

배경

마로 막강 나 윈다띠(māro maggaṁ na vindati)는 '마라가 그 길을 찾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싸워서 이긴다고 하지 않고 아예 찾지 못한다고 한 점이 눈에 띕니다. 앞 품에서 지혜를 무기로 싸우라고 했던 것과 견주면 결이 다릅니다. 싸울 일 자체가 없어진 상태입니다. 세 가지가 나란히 놓입니다. 됨됨이가 갖추어졌고, 깨어 있음 속에 살며, 바르게 알아 풀려났습니다. 이 셋이 갖추어지면 붙들 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문을 잠그는 것이 아니라 들어올 틈이 없어지는 쪽에 가깝습니다.

묵상

유혹을 이겨 내려고 애쓰는 것과 애초에 흔들리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지금 나에게는 어느 쪽이 더 필요할까요?

큰길가에 버려진 쓰레기 더미에서도 맑은 향기를 지닌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듯, 쓰레기처럼 여겨지는 이들, 눈먼 채 살아가는 이들 가운데서도 깨달은 이의 제자는 지혜로 환히 빛나느니라.

Yathā saṅkāradhānasmiṁ, ujjhitasmiṁ mahāpathe; Padumaṁ tattha jāyetha, sucigandhaṁ manoramaṁ. Evaṁ saṅkārabhūtesu, andhabhūte puthujjane; Atirocati paññāya, sammāsambuddhasāvako.

법구경 Dhammapada 58-59

배경

두 게송이 한 문장으로 이어져 있어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앞이 비유이고 뒤가 그 뜻입니다. 상까라다나(saṅkāradhāna)는 마을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자리입니다. 연꽃이 맑은 물에서 피는 것이 아니라 그런 데서 핀다는 점이 이 비유의 전부입니다. 이 게송을 읽을 때 조심할 대목이 있습니다. 남을 쓰레기로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원문은 '쓰레기처럼 여겨지는'이라고 하여 그렇게 보이는 상태를 말할 뿐입니다. 그리고 연꽃도 원래 그 자리에서 났습니다. 다른 데서 옮겨 온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있는 자리가 어떻든 거기서 피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묵상

지금 있는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나요? 옮겨야만 달라진다고 여겼던 것 가운데, 실은 여기서도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