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사람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못 보는 것 - 어리석음의 정체

잠 못 드는 이에게 밤은 길고 지친 이에게 길은 머니라. 바른 가르침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에게는 떠도는 길이 기니라.

Dīghā jāgarato ratti, dīghaṁ santassa yojanaṁ; Dīgho bālāna saṁsāro, saddhammaṁ avijānataṁ.

법구경 Dhammapada 60

배경

'길다'는 말이 세 번 되풀이됩니다. 밤이 길고, 길이 멀고, 떠도는 삶이 깁니다. 앞의 둘은 누구나 겪어 본 일입니다. 잠 못 드는 밤은 실제보다 훨씬 길게 느껴지고, 지쳐서 걷는 길은 같은 거리인데도 끝이 없습니다. 시간과 거리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겪는 사람의 상태가 다른 것입니다. 세 번째 줄이 앞의 둘을 딛고 옵니다. 상사라(saṁsāra)는 '되풀이하며 흘러감'을 뜻하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상태에 따라 길이가 달라집니다. 이 게송이 어리석음을 다루는 품의 첫머리에 놓인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어리석음은 아는 것이 적은 상태가 아니라 같은 길을 길게 겪는 상태입니다.

묵상

유난히 길게 느껴진 밤이 있었나요? 그날 실제로 흐른 시간과 내가 겪은 시간의 차이는 어디서 왔을까요?

길을 가다가 자기보다 낫거나 같은 이를 만나지 못하거든, 홀로 가는 길을 굳세게 갈지니라. 어리석은 이와는 벗함이 없느니라.

Carañce nādhigaccheyya, Seyyaṁ sadisamattano; Ekacariyaṁ daḷhaṁ kayirā, Natthi bāle sahāyatā.

법구경 Dhammapada 61

배경

사하야따(sahāyatā)는 '함께 감'을 뜻합니다. 벗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같이 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방향이 다른 사람과는 나란히 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게송이 자칫 남을 가려 사귀라는 오만한 말로 읽힐 수 있어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원문의 기준은 사람됨의 등급이 아니라 같은 방향인지 여부입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은 이'까지 포함한 점이 중요합니다. 더 나은 사람만 찾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게송의 무게는 뒤가 아니라 앞에 있습니다. 만나지 못하거든, 이라는 조건입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간다는 것이지 일부러 혼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묵상

혼자 가는 것이 외로워 방향이 다른 사람과 함께 걷고 있지는 않나요? 그 동행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지 한번 보면 어떨까요?

‘아들도 내 것이요 재물도 내 것이라’ 하며 어리석은 이는 애를 태우느니라. 제 몸조차 제 것이 아니거늘 어찌 아들이며 어찌 재물이겠느냐.

Puttā matthi dhanaṁ matthi, iti bālo vihaññati; Attā hi attano natthi, kuto puttā kuto dhanaṁ.

법구경 Dhammapada 62

배경

위한냐띠(vihaññati)는 '애를 태운다, 시달린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가진 것이 없어서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가졌다고 여기기 때문에 시달린다는 순서입니다. 내 것이라고 여기는 순간 잃을 것이 생깁니다. 뒷줄은 논리가 단단합니다. 자기 몸도 뜻대로 되지 않아 늙고 병드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인 자식과 바깥의 재물이 어떻게 내 것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게송이 자식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과 내 것으로 여기는 것은 다릅니다. 후자에서 애태움이 나옵니다.

묵상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 가운데 정말로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라도 있나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어리석은 이가 제 어리석음을 안다면 그만큼은 지혜로운 이니라. 어리석으면서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이라 불리느니라.

Yo bālo maññati bālyaṁ, paṇḍito vāpi tena so; Bālo ca paṇḍitamānī, sa ve “bālo”ti vuccati.

법구경 Dhammapada 63

배경

이 품에서 어리석음이 무엇인지 가장 또렷하게 밝힌 게송입니다. 어리석음은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입니다. 빤디따마니(paṇḍitamānī)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이'를 뜻합니다. 마나(māna)는 재는 것, 곧 자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앞줄의 셈이 재미있습니다. 제 어리석음을 아는 것만으로 그만큼은 지혜롭다고 인정합니다. 전부가 아니라 그만큼입니다. 인정에 인색하지 않으면서 부풀리지도 않습니다. 이 게송의 무서운 점은 읽는 사람이 스스로를 어느 쪽에 놓든 위험하다는 데 있습니다.

묵상

최근에 '내가 틀렸구나' 하고 인정한 일이 있나요? 그런 일이 좀처럼 없다면, 정말 틀리지 않은 것일까요?

어리석은 이가 평생을 두고 지혜로운 이를 가까이 모신다 해도, 국자가 국 맛을 모르듯 가르침을 알지 못하느니라.

Yāvajīvampi ce bālo, paṇḍitaṁ payirupāsati; Na so dhammaṁ vijānāti, dabbī sūparasaṁ yathā.

법구경 Dhammapada 64

배경

국자는 국 속에 온종일 잠겨 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 국과 오래 닿아 있는데도 맛을 모릅니다. 닿아 있는 시간이 아는 것과 상관없다는 그림입니다. 빠이루빠사띠(payirupāsati)는 '가까이 앉아 섬긴다'는 뜻으로, 스승 곁에 머무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이 게송이 겨눈 것은 게으름이 아닙니다. 평생을 곁에 있었다고 했으니 성실하기까지 합니다. 다만 받아들이는 자리가 없으면 아무리 오래 닿아 있어도 스며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음 게송이 그 짝으로 혀를 내놓습니다.

묵상

좋은 강의나 책 곁에 오래 머물렀는데 남은 것이 적었던 적이 있나요? 그때 나는 국자였을까요, 혀였을까요?

슬기로운 이가 잠깐이라도 지혜로운 이를 가까이 모시면, 혀가 국 맛을 알아채듯 가르침을 곧바로 아느니라.

Muhuttamapi ce viññū, paṇḍitaṁ payirupāsati; Khippaṁ dhammaṁ vijānāti, jivhā sūparasaṁ yathā.

법구경 Dhammapada 65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국자와 혀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국자는 단단하고 혀는 부드럽습니다. 국자는 국을 옮기고 혀는 국을 받아들입니다. 무훗땅(muhutta)은 아주 짧은 동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평생과 잠깐을 맞세워 놓고, 시간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성질이 갈랐다고 말합니다. 윈뉴(viññū)는 '알아듣는 이'라는 뜻입니다. 이미 다 아는 사람이 아니라 알아들을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두 게송을 함께 읽으면 배움에서 중요한 것이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느냐가 아니라 어떤 상태로 앉아 있었느냐임이 드러납니다.

묵상

짧은 한마디가 오래 남은 적이 있나요? 그때 나는 어떤 상태였는지, 그 상태를 다시 만들 수 있을지 떠올려 보세요.

어리석고 지혜가 모자란 이들은 스스로를 적으로 삼아 살아가나니, 나쁜 일을 저지르고 그 열매를 쓰디쓰게 받느니라.

Caranti bālā dummedhā, amitteneva attanā; Karontā pāpakaṁ kammaṁ, yaṁ hoti kaṭukapphalaṁ.

법구경 Dhammapada 66

배경

아밋떼네와 앗따나(amitteneva attanā)는 '자기 자신을 적으로 삼아'라는 뜻입니다. 이 한마디가 이 게송의 전부입니다. 밖에 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의 적이라는 것입니다. 한역 법구경에는 이 구절이 없고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무지의 이야기가 되면서 자기가 자기를 해친다는 그림이 사라진 셈입니다. 앞의 3품에서 잘못 겨누어진 마음이 적보다 더한 해를 입힌다고 했던 것과 이어집니다.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이 남을 해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게송의 셈으로는 가장 먼저 해를 입는 쪽이 자신입니다.

묵상

지금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일 가운데,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낸 몫은 얼마나 될까요?

하고 나서 뉘우치게 되는 일, 그 일은 잘한 일이 아니니라. 눈물 젖은 얼굴로 울면서 그 갚음을 받게 되느니라.

Na taṁ kammaṁ kataṁ sādhu, yaṁ katvā anutappati; Yassa assumukho rodaṁ, vipākaṁ paṭisevati.

법구경 Dhammapada 67

배경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가르는 기준이 여기서는 규칙이 아니라 뒷맛입니다. 아누땁빠띠(anutappati)는 '뒤에 가서 타들어 간다'는 뜻으로, 앞 품에서 본 낱말과 같은 뿌리입니다. 이 기준이 실용적인 까닭은 미리 써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기 전에 이 일을 하고 나서 뉘우칠지 물어보면 대개 답이 나옵니다. 그리고 답을 알면서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까지가 이 게송이 겨눈 자리입니다. 몰라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한다는 것, 그것이 이 품이 말하는 어리석음의 모습입니다.

묵상

하기 전에 '이걸 하고 나면 후회할까' 하고 물어본 적이 있나요? 그 물음에 답이 나왔는데도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하고 나서 뉘우치지 않는 일, 그 일은 잘한 일이니라.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갚음을 받게 되느니라.

Tañca kammaṁ kataṁ sādhu, yaṁ katvā nānutappati; Yassa patīto sumano, vipākaṁ paṭisevati.

법구경 Dhammapada 68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꽃을 팔던 사람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왕에게 바칠 꽃을 부처님께 올리기로 마음먹고 손해를 각오했는데, 뒤에 기뻐했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갚음을 받는 시점이 아니라 받는 마음입니다. 같은 결과라도 뉘우치며 받는 것과 기뻐하며 받는 것은 다릅니다. 빠띠또 수마노(patīto sumano)는 '흡족하고 기쁜'입니다. 좋은 일을 하라는 권고가 아니라, 잘한 일은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다시 좋다는 관찰에 가깝습니다.

묵상

떠올릴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 하나 있나요? 그런 일을 하나 더 만든다면 무엇을 하시겠어요?

나쁜 일이 익기 전까지 어리석은 이는 그것을 꿀처럼 여기나니, 나쁜 일이 익으면 그때 괴로움을 겪느니라.

Madhuṁvā maññati bālo, yāva pāpaṁ na paccati; Yadā ca paccati pāpaṁ, atha dukkhaṁ nigacchati.

법구경 Dhammapada 69

배경

빳짜띠(paccati)는 '익는다, 삶아진다'는 뜻입니다. 열매가 익는 데 시간이 걸리듯 결과가 나타나는 데도 시간이 걸립니다. 그 시차 때문에 원인과 결과가 이어져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달다는 사실과 나중에 쓰다는 사실이 동시에 보이지 않으니, 달 때는 달기만 합니다. 이 게송이 그리는 어리석음은 판단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맛만 보는 것입니다. 앞 게송에서 뉘우칠 일인지 미리 물어보라고 한 것이 바로 이 시차를 건너뛰는 방법입니다. 익은 뒤의 맛을 지금 맛보는 셈입니다.

묵상

지금 달게 느껴지는 것이 나중에 어떤 맛이 될지 상상해 본 적 있나요? 그 상상이 실제로 손을 멈추게 한 적이 있었나요?

어리석은 이가 달마다 풀잎 끝에 얹힐 만큼만 먹는다 해도, 가르침을 헤아려 아는 이들의 열여섯 몫 가운데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Māse māse kusaggena, bālo bhuñjeyya bhojanaṁ; Na so saṅkhātadhammānaṁ, kalaṁ agghati soḷasiṁ.

법구경 Dhammapada 70

배경

꾸삭게나(kusaggena)는 '쿠사풀 끝만큼'이라는 뜻으로, 극단적인 굶주림 수행을 가리킵니다. 부처님 자신이 깨닫기 전 여섯 해 동안 그런 고행을 했고 그것으로는 얻은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게송은 그 경험 위에 서 있습니다. 몸을 괴롭히는 일이 아무리 지독해도 알아보는 일 하나를 대신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상카따담마(saṅkhātadhamma)는 '가르침을 헤아려 안 이'를 뜻합니다. 열여섯 분의 일이라는 표현은 당시 흔히 쓰던 비교 방식으로, 견줄 수 없다는 말의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묵상

힘들게 하는 것이 곧 잘하는 것이라고 여긴 적이 있나요? 애쓴 만큼이 아니라 방향이 결과를 정할 때가 있습니다.

나쁘게 지은 일은 갓 짠 우유가 엉기듯 곧바로 굳어지지 않나니, 재에 덮인 불씨처럼 어리석은 이를 따라다니며 속으로 태우느니라.

Na hi pāpaṁ kataṁ kammaṁ, Sajjukhīraṁva muccati; Ḍahantaṁ bālamanveti, Bhasmacchannova pāvako.

법구경 Dhammapada 71

배경

비유가 둘 겹칩니다. 하나는 우유입니다. 갓 짠 우유는 바로 엉기지 않고 시간이 지나야 굳습니다. 다른 하나는 재에 덮인 불씨입니다. 겉으로는 꺼진 것처럼 보이지만 속에서 계속 타고 있습니다. 두 비유 모두 시간차를 말합니다. 다핫땅(ḍahantaṁ)은 '태우면서'라는 뜻으로, 결과가 나타나기 전에도 이미 안에서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앞 게송이 나중에 익는다고 했다면 여기서는 그 사이에도 조용히 타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무 일 없어 보이는 기간이 아무 일 없는 기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묵상

지나갔다고 여긴 일이 어느 날 문득 되살아난 적이 있나요? 그동안 그것은 사라진 것이었을까요, 재 밑에 있었던 것일까요?

어리석은 이에게 생기는 앎과 이름은 오직 해로움이 될 뿐이니, 그의 밝은 몫을 부수고 머리를 쪼개느니라.

Yāvadeva anatthāya, ñattaṁ bālassa jāyati; Hanti bālassa sukkaṁsaṁ, muddhamassa vipātayaṁ.

법구경 Dhammapada 72

배경

냐따(ñatta)는 아는 것과 알려지는 것을 함께 뜻하는 말입니다. 지식과 명성이 한 낱말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 게송의 서늘함은 배움 자체를 해로운 것으로 놓았다는 데 있습니다. 다만 조건이 붙습니다. 어리석은 이에게 생길 때입니다. 앞 게송에서 어리석음이 자기를 못 보는 상태라고 했으니, 자기를 못 보는 사람이 아는 것이 많아지면 그것이 자기를 재는 자로 쓰인다는 말이 됩니다. 숙깡사(sukkaṁsa)는 '흰 몫', 곧 그 사람에게 있던 좋은 부분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에 탐욕을 넣어 흔한 경계의 말로 바꾸었습니다.

묵상

아는 것이 늘면서 남을 재는 일도 함께 늘지는 않았나요? 배움이 나를 부드럽게 했는지 딱딱하게 했는지 돌아보면 어떨까요?

있지도 않은 것을 갖춘 양 여겨지기를 바라고 수행자들 사이에서 앞자리를 바라며, 머무는 곳에서는 권세를, 남의 집에서는 대접을 바라느니라. ‘이 일은 내가 했다고 여겨 다오, 무슨 일이든 내 뜻을 따라 다오’ 하나니, 이렇게 어리석은 이의 생각 속에서 욕심과 자만이 자라느니라.

Asantaṁ bhāvanamiccheyya, Purekkhārañca bhikkhusu; Āvāsesu ca issariyaṁ, Pūjaṁ parakulesu ca. Mameva kata maññantu, gihī pabbajitā ubho; Mamevātivasā assu, kiccākiccesu kismici; Iti bālassa saṅkappo, icchā māno ca vaḍḍhati.

법구경 Dhammapada 73-74

배경

두 게송이 한 문장으로 이어져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앞에서 바라는 것 네 가지를 늘어놓고, 뒤에서 그 속마음을 그대로 옮겨 적었습니다. 아산땅(asantaṁ)은 '있지도 않은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양 여겨 주기를 바라는 데서 시작합니다. 뒤로 갈수록 요구가 커집니다. 앞자리에서 권세로, 권세에서 무슨 일이든 내 뜻대로로 옮겨 갑니다. 마지막 줄이 이 흐름을 한마디로 맺습니다. 이렇게 욕심과 자만이 자란다는 것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것이 수행하는 이들 사이의 일로 그려졌다는 점입니다. 세상을 떠난 자리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묵상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어디까지 커져 있나요? 처음에는 알아봐 주기를 바랐는데 지금은 따라 주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면 어떨까요?

이익으로 가는 길과 열반으로 가는 길은 서로 다르니라. 깨달은 이의 제자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 떠받들어지기를 기뻐하지 말고 홀로 있음을 길러야 하느니라.

Aññā hi lābhūpanisā, aññā nibbānagāminī; Evametaṁ abhiññāya, bhikkhu buddhassa sāvako; Sakkāraṁ nābhinandeyya, vivekamanubrūhaye.

법구경 Dhammapada 75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입니다. 안냐 히 안냐(aññā hi aññā), 곧 '다르다 다르다'를 두 번 되풀이해 두 길이 겹치지 않음을 못박습니다. 좋은 일을 하면 이익도 따라오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는데, 게송은 그것을 부정하는 대신 방향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이익을 얻는 데 매달리다 보면 열반 쪽으로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위웨까(viveka)는 '홀로 있음, 떨어져 있음'입니다. 사람을 피하라는 말이라기보다 떠받들어지는 자리에서 물러나 있는 것에 가깝습니다. 앞의 73게송과 74게송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어떻게 자라는지 보여 주었으니, 그 반대편을 마지막에 놓은 셈입니다.

묵상

잘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나요? 그 좋아짐이 나를 어느 쪽으로 이끄는지 한 번쯤 지켜볼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