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사람

쓴소리를 보물처럼 여기는 사람 - 흔들리지 않는 이의 조건

숨은 보물을 알려 주는 이처럼 허물을 짚어 주는 이를 만나거든, 꾸짖어 주는 그 지혜로운 이를 가까이할지니라. 그런 이를 가까이하면 나아질 뿐 나빠지지 않느니라.

Nidhīnaṁva pavattāraṁ, yaṁ passe vajjadassinaṁ; Niggayhavādiṁ medhāviṁ, tādisaṁ paṇḍitaṁ bhaje; Tādisaṁ bhajamānassa, seyyo hoti na pāpiyo.

법구경 Dhammapada 76

배경

니디낭와(nidhīnaṁva)는 '숨겨진 보물처럼'입니다. 땅에 묻힌 보물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는 사람을 우리는 고마워합니다. 허물을 짚어 주는 사람을 그와 같이 여기라는 것입니다. 닉가이하와딘(niggayhavādin)은 '눌러 말하는 이', 곧 꾸짖는 이를 뜻합니다.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게송이 실용적인 까닭은 마지막 줄에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라는 권고가 아니라 손익을 말합니다. 그런 이를 가까이하면 나아진다는 것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에서 사람이 사라지고 '두려워하여 범하지 말라'는 자기 단속의 말만 남았습니다. 쓴소리하는 벗을 얻는 법을 말하던 게송이 혼자 조심하라는 말이 된 셈입니다.

묵상

나에게 쓴소리를 해 주는 사람이 몇이나 있나요? 그 사람을 멀리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는지 돌아보면 어떨까요?

가르치고 타이르며 옳지 않은 일을 막아 주는 이는, 좋은 사람에게는 사랑받고 그렇지 않은 이에게는 미움을 받느니라.

Ovadeyyānusāseyya, asabbhā ca nivāraye; Satañhi so piyo hoti, asataṁ hoti appiyo.

법구경 Dhammapada 77

배경

앞 게송이 쓴소리를 듣는 쪽이었다면 여기서는 하는 쪽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숨기지 않습니다. 미움을 받는다고 못박습니다. 니와라예(nivāraye)는 '막는다'는 뜻으로, 말리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이 게송의 정직함은 결과를 두 갈래로 나눈 데 있습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에게는 사랑받고 그렇지 않은 이에게는 미움을 받습니다. 그러니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는 잘못했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다만 누가 미워하는지를 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묵상

옳은 말을 하고 미움을 산 적이 있나요? 그때 나를 미워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떠올려 보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질지도 모릅니다.

나쁜 벗을 사귀지 말고 못난 사람과 어울리지 말지니라. 좋은 벗을 사귀고 훌륭한 사람과 어울릴지니라.

Na bhaje pāpake mitte, na bhaje purisādhame; Bhajetha mitte kalyāṇe, bhajetha purisuttame.

법구경 Dhammapada 78

배경

깔랴나밋따(kalyāṇamitta)는 경전 전체에서 매우 무겁게 쓰이는 말입니다. 다른 경에서 아난다 존자가 좋은 벗을 갖는 것이 수행의 절반쯤 된다고 하자, 부처님이 절반이 아니라 전부라고 고쳐 주신 대목이 있습니다. 이 게송이 사람을 등급으로 나누는 말처럼 읽힐 수 있어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바제(bhaje)는 '가까이 지낸다, 곁에 둔다'는 뜻으로, 누구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누구 곁에 오래 머무느냐를 말합니다. 우리는 곁에 있는 사람을 닮아 갑니다. 그것이 이 게송의 근거입니다.

묵상

요즘 가장 오래 함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내가 그 사람을 닮아 가고 있다면 어느 쪽으로 닮아 가고 있을까요?

가르침을 기뻐하는 이는 맑고 개운한 마음으로 편안히 잠들고, 성인이 설한 가르침 안에서 지혜로운 이는 늘 즐거워하느니라.

Dhammapīti sukhaṁ seti, vippasannena cetasā; Ariyappavedite dhamme, sadā ramati paṇḍito.

법구경 Dhammapada 79

배경

담마삐띠(dhammapīti)는 '가르침을 마시는 이' 또는 '가르침에서 오는 기쁨'으로 읽힙니다. 삐띠(pīti)에 마신다는 뜻과 기쁨이라는 뜻이 겹쳐 있어 생긴 겹말입니다. 이 게송이 말하는 결과가 흥미롭습니다. 깨달음이나 신통이 아니라 잠입니다. 위빠산네나 쩨따사(vippasannena cetasā)는 '맑게 가라앉은 마음으로'라는 뜻으로, 흙탕물이 가라앉아 맑아진 상태를 가리키는 말에서 왔습니다. 낮에 무엇을 했는지가 밤에 드러납니다. 잠자리가 편한지 아닌지는 스스로에게 거짓말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묵상

요즘 잠자리에 누웠을 때 마음이 어떤가요? 가라앉나요, 아니면 그때부터 떠오르기 시작하나요?

물길 내는 이는 물을 이끌고 화살 만드는 이는 화살대를 곧게 하며, 목수는 나무를 다듬나니, 지혜로운 이는 자기를 다스리느니라.

Udakañhi nayanti nettikā, Usukārā namayanti tejanaṁ; Dāruṁ namayanti tacchakā, Attānaṁ damayanti paṇḍitā.

법구경 Dhammapada 80

배경

세 가지 일이 나란히 놓이고 네 번째에 자기를 다스리는 일이 옵니다. 앞의 셋은 모두 손기술입니다. 배워야 하고, 도구가 있고, 시간이 들고, 하다 보면 늡니다. 자기를 다스리는 일을 그 줄에 세운 것입니다. 타고난 성품의 문제가 아니라 익히는 기술로 본 셈입니다. 나마얀띠(namayanti)는 '휘어 바로잡는다'는 뜻입니다. 물길을 내는 사람도 물을 없애지 않고 방향만 바꿉니다. 화살대도 부러뜨리지 않고 폅니다. 다마얀띠(damayanti)의 다스림도 그와 같아서, 없애는 일이 아니라 방향을 주는 일입니다.

묵상

손에 익은 기술이 하나 있나요? 그것이 익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떠올려 보면, 자기를 다루는 일에 걸릴 시간도 짐작이 될까요?

단단한 바위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 지혜로운 이는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느니라.

Selo yathā ekaghano, vātena na samīrati; Evaṁ nindāpasaṁsāsu, na samiñjanti paṇḍitā.

법구경 Dhammapada 81

배경

에까가나(ekaghana)는 '한 덩어리로 된, 틈이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여러 조각을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통으로 된 바위입니다. 쌓아 올린 것은 바람에 무너지지만 통으로 된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비난과 칭찬을 한 짝으로 묶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대개 비난에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고 칭찬은 마음껏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게송은 둘을 함께 놓습니다. 칭찬에 들뜨는 사람은 비난에도 무너집니다. 같은 자리에서 오는 흔들림이기 때문입니다.

묵상

칭찬을 들으면 마음이 부풀어 오르나요? 그 부풀어 오름의 크기만큼 비난에도 꺼질 수 있다면, 어느 쪽을 먼저 다루어야 할까요?

깊고 맑아 흐려지지 않은 호수와 같이, 지혜로운 이는 가르침을 듣고 고요해지느니라.

Yathāpi rahado gambhīro, vippasanno anāvilo; Evaṁ dhammāni sutvāna, vippasīdanti paṇḍitā.

법구경 Dhammapada 82

배경

앞 게송이 바위였다면 여기서는 호수입니다. 바위는 흔들리지 않는 굳셈이고 호수는 흐려지지 않는 맑음입니다. 두 비유가 짝을 이룹니다. 감비라(gambhīra)는 '깊은'입니다. 얕은 물은 조금만 휘저어도 바닥이 일어나 흐려지지만 깊은 물은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일을 겪어도 어떤 사람은 오래 흐려 있고 어떤 사람은 금세 가라앉는데, 그 차이를 깊이로 본 것입니다. 위빠시단띠(vippasīdanti)는 '맑아진다'는 뜻으로, 79게송의 잠자리 이야기에 나온 낱말과 같은 뿌리입니다.

묵상

한 번 흐려진 마음이 가라앉기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그 시간이 짧아지는 것이 깊어지는 표시일지도 모릅니다.

참된 이는 어디서나 내려놓고 바라는 것을 얻으려 말을 꾸미지 않느니라. 즐거움이 닿든 괴로움이 닿든 지혜로운 이는 들뜨거나 가라앉음을 드러내지 않느니라.

Sabbattha ve sappurisā cajanti, Na kāmakāmā lapayanti santo; Sukhena phuṭṭhā atha vā dukhena, Na uccāvacaṁ paṇḍitā dassayanti.

법구경 Dhammapada 83

배경

라빠얀띠(lapayanti)는 '늘어놓아 말한다'는 뜻으로,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말을 꾸미는 일을 가리킵니다. 웃짜와짱(uccāvacaṁ)은 '높고 낮음'입니다. 기쁠 때 확 올라가고 힘들 때 확 내려가는 그 진폭을 말합니다. 이 게송이 감정을 숨기라고 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어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원문은 느끼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이 닿는다고 인정하고 시작합니다. 다만 그 진폭이 밖으로 튀어 다른 사람과 자기 판단을 흔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는 것과 진폭이 줄어드는 것은 다릅니다.

묵상

기쁠 때와 힘들 때 나의 진폭은 얼마나 큰가요? 그 폭이 큰 만큼 회복에도 시간이 걸리지는 않던가요?

자기를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자식이나 재물이나 나라를 바라지 않고, 옳지 못한 길로 제 잘됨을 바라지 않는 이, 그가 됨됨이를 갖추고 지혜로우며 올바르게 사는 이니라.

Na attahetu na parassa hetu, Na puttamicche na dhanaṁ na raṭṭhaṁ; Na iccheyya adhammena samiddhimattano, Sa sīlavā paññavā dhammiko siyā.

법구경 Dhammapada 84

배경

이 게송의 급소는 '남을 위해서도'라는 대목입니다. 자기 욕심을 위해 옳지 못한 길을 가는 것은 누구나 잘못이라 압니다. 그런데 가족을 위해서라면, 조직을 위해서라면 하는 순간 기준이 흔들립니다. 이 게송은 그 예외를 미리 막아 둡니다. 아담메나(adhammena)는 '이치에 맞지 않은 방식으로'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바라느냐가 아니라 어떤 길로 가느냐를 봅니다. 자식과 재물과 나라를 나란히 든 것은 당시 사람이 바랄 만한 것을 크기 순으로 늘어놓은 것으로, 어느 크기에서도 같다는 뜻입니다.

묵상

가족을 위해서라면 조금 어긋나도 된다고 여긴 적이 있나요? 그 선을 넘을 때 누구를 위해서라고 말했는지 떠올려 보세요.

사람들 가운데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이는 드무니라. 나머지 사람들은 이쪽 물가만 오르내리느니라.

Appakā te manussesu, ye janā pāragāmino; Athāyaṁ itarā pajā, tīramevānudhāvati.

법구경 Dhammapada 85

배경

띠라메와누다와띠(tīramevānudhāvati)는 '물가를 따라 달리기만 한다'는 뜻입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달립니다. 다만 물가를 따라 달릴 뿐 건너지 않습니다. 이 대목이 이 비유의 급소입니다. 게으름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방향 없는 분주함을 짚은 것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건너려는 사람은 반드시 달린다'로 옮겼는데, 그러면 달린다는 말이 나무람에서 격려로 뒤집힙니다. 빠알리에서 달리는 것은 건너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묵상

요즘 바쁘게 지내고 있나요? 그 바쁨이 어딘가로 건너가는 중인가요, 아니면 같은 물가를 오르내리는 중인가요?

바르게 설해진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 사는 이들은, 건너기 어려운 죽음의 자리를 넘어 저 언덕에 이르느니라.

Ye ca kho sammadakkhāte, dhamme dhammānuvattino; Te janā pāramessanti, maccudheyyaṁ suduttaraṁ.

법구경 Dhammapada 86

배경

앞 게송의 짝으로, 드문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밝힙니다. 담마누왓띤(dhammānuvattin)은 '가르침을 따라 도는 이'라는 뜻입니다. 아는 이가 아니라 따라 사는 이입니다. 1품 마지막에서 많이 외우는 것과 따라 사는 것을 갈랐던 대목이 여기서 다시 나옵니다. 마쭈데이야(maccudheyya)는 '죽음이 다스리는 자리'입니다. 수둣따라(suduttara)는 '건너기 지극히 어려운'입니다. 어렵다는 것을 숨기지 않으면서 건널 수 있다고 말합니다. 드물다는 앞 게송과 건널 수 있다는 이 게송이 함께 놓여야 이 짝의 뜻이 온전해집니다.

묵상

어렵다는 말과 할 수 있다는 말 가운데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어느 쪽인가요? 둘 다 사실일 때 우리는 대개 앞엣것만 듣습니다.

지혜로운 이는 어두운 것을 버리고 밝은 것을 길러야 하나니, 집을 떠나 머물 데 없는 곳으로 나아가 홀로 있음을 누리기 어려운 그 자리에서, 오히려 즐거움을 찾고 쾌락을 버려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마음의 더러움에서 자기를 씻어야 하느니라.

Kaṇhaṁ dhammaṁ vippahāya, Sukkaṁ bhāvetha paṇḍito; Okā anokamāgamma, Viveke yattha dūramaṁ. Tatrābhiratimiccheyya, hitvā kāme akiñcano; Pariyodapeyya attānaṁ, cittaklesehi paṇḍito.

법구경 Dhammapada 87-88

배경

두 게송이 한 문장으로 이어져 함께 읽어야 합니다. 오까 아노깡(okā anokaṁ)은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라는 뜻으로, 출가를 가리키는 오래된 표현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그 자리를 즐거움이 있는 곳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두라망(dūramaṁ)은 '즐기기 어려운'이라는 뜻입니다. 홀로 있는 자리가 원래 견디기 어렵다고 먼저 인정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 그 어려운 자리에서 즐거움을 찾으라고 합니다. 빠리요다뻬이야(pariyodapeyya)는 옷을 빨듯 씻어 낸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더러움이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빨아야 하는 것으로 놓여 있습니다.

묵상

혼자 있는 시간이 견디기 어렵나요? 그 어려움을 없애려 하기보다 그 안에서 지낼 만한 것을 하나 찾는다면 무엇일까요?

깨달음의 갈래마다 마음을 바르게 길러, 붙잡음을 놓아 버리고 움켜쥐지 않음을 기뻐하는 이들은, 번뇌가 다하여 빛나나니 이 세상에서 이미 불이 꺼진 이들이니라.

Yesaṁ sambodhiyaṅgesu, sammā cittaṁ subhāvitaṁ; Ādānapaṭinissagge, anupādāya ye ratā; Khīṇāsavā jutimanto, te loke parinibbutā.

법구경 Dhammapada 89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입니다. 마지막 줄의 로께 빠리닙부따(loke parinibbutā)가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완전히 꺼졌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불이 꺼졌다는 말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세상을 건넜다'로 옮겼는데, 그러면 안에서 꺼지는 그림이 밖으로 벗어나는 그림이 됩니다. 열반이 죽은 뒤에 가는 어딘가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 빠알리의 그림입니다. 아사와(āsava)는 '흘러드는 것'으로, 안으로 스며들어 사람을 물들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다한 상태를 빛난다고 표현했습니다.

묵상

무언가를 놓았을 때 오히려 가벼워진 경험이 있나요? 그 가벼움이 잠깐이 아니라 계속된다면 어떤 삶이 될지 그려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