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놓아버린 사람

다 내려놓은 이는 어떤 모습인가 - 자취를 남기지 않는 사람들

길을 다 간 이, 슬픔이 없는 이,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모든 얽매임을 놓아 버린 이에게는 타는 열기가 없느니라.

Gataddhino visokassa, vippamuttassa sabbadhi; Sabbaganthappahīnassa, pariḷāho na vijjati.

법구경 Dhammapada 90 아라한의 품 (Arahantavag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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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땃디노(gataddhino)는 '길을 다 간 이'입니다. 먼 길을 걸어 마침내 도착한 사람의 그림입니다. 빠릴라호(pariḷāha)는 '타오르는 열'을 뜻하는데, 몸의 열과 마음의 애탐을 함께 가리킵니다. 오래 걸은 사람의 몸에 남는 열기를 떠올리면 이 비유가 살아납니다. 다 도착했는데도 몸이 계속 달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게송은 그런 열기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간타(gantha)는 '묶어 놓은 매듭'입니다. 이 품이 그리는 사람은 무언가를 이룬 사람이라기보다 풀어 버린 사람에 가깝습니다. 더한 것이 아니라 덜어 낸 자리에 이 고요가 있습니다.

묵상

다 끝났는데도 마음이 계속 달아 있던 적이 있나요? 그 열기는 무엇 때문에 남아 있었을까요?

깨어 있는 이들은 힘써 나아가며 머무는 자리에 마음을 두지 않나니, 백조가 연못을 버리고 떠나듯 집이란 집을 모두 두고 가느니라.

Uyyuñjanti satīmanto, na nikete ramanti te; Haṁsāva pallalaṁ hitvā, okamokaṁ jahanti te.

법구경 Dhammapada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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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는 연못을 미워해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저 때가 되면 날아갑니다. 미련도 원망도 없이 떠나는 그 방식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니께따(niketa)는 '거처, 자리'입니다. 실제 집만이 아니라 마음이 눌러앉은 자리를 함께 가리킵니다. 오까모깡(okamokaṁ)은 '집이란 집을'로, 같은 낱말을 겹쳐 어느 하나가 아니라 모두를 뜻합니다. 이 게송이 집을 버리라는 말로만 읽히면 좁아집니다. 우리가 눌러앉는 자리는 건물만이 아니라 역할, 관계, 익숙한 방식까지입니다. 떠날 때가 되었는데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게송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묵상

떠날 때가 지났는데 아직 머물러 있는 자리가 있나요? 그것을 붙드는 것은 애정일까요, 익숙함일까요?

쌓아 둔 것이 없고 먹는 일을 있는 그대로 아는 이, 비어 있음과 모습 없음으로 풀려난 곳이 그가 노니는 자리이니, 그 자취는 하늘을 나는 새의 길처럼 찾아내기 어려우니라.

Yesaṁ sannicayo natthi, ye pariññātabhojanā; Suññato animitto ca, vimokkho yesaṁ gocaro; Ākāseva sakuntānaṁ, gati tesaṁ durannayā.

법구경 Dhammapada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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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니짜야(sannicaya)는 '쌓아 둠'으로, 물건만이 아니라 공덕을 쌓아 두는 것까지 포함해 읽습니다. 빠린냐따보자나(pariññātabhojana)는 '먹는 일을 두루 안 이'입니다. 왜 먹는지, 얼마나 먹어야 하는지를 안다는 뜻으로, 매일 하는 가장 흔한 일에서 앎이 드러난다는 그림입니다. 마지막 비유가 이 품의 결을 잘 보여 줍니다. 새가 지나간 하늘에는 길이 남지 않습니다. 발자국이 없으니 뒤쫓을 수 없습니다. 남기려 하지 않는 삶을 그렇게 그린 것입니다. 두란나야(durannaya)는 '뒤따라가기 어려운'이라는 뜻입니다.

묵상

나는 무엇을 쌓아 두고 있나요? 물건 말고, 언젠가 쓰려고 모아 둔 마음의 것들까지 헤아려 보면 어떨까요?

번뇌가 다하여 먹는 일에도 기대지 않는 이, 비어 있음과 모습 없음으로 풀려난 곳이 그가 노니는 자리이니, 그 발자취는 하늘을 나는 새의 길처럼 찾아내기 어려우니라.

Yassāsavā parikkhīṇā, āhāre ca anissito; Suññato animitto ca, vimokkho yassa gocaro; Ākāseva sakuntānaṁ, padaṁ tassa durannayaṁ.

법구경 Dhammapada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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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게송과 거의 같고 앞머리만 바뀝니다. 아사와(āsava)는 '흘러드는 것'으로, 안으로 스며들어 사람을 물들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아닛시또(anissito)는 '기대지 않는'입니다. 먹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먹는 일에 마음을 걸어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두 게송이 나란히 놓여 같은 말을 두 번 하는 것이 이 품의 방식입니다. 1품에서 본 짝 구조가 여기서도 쓰였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뒤집는 짝이 아니라 겹쳐 놓는 짝입니다. 같은 자리를 두 각도에서 보여 주어 그 자리가 어떤 곳인지 더 또렷해집니다.

묵상

무언가에 기대지 않고도 지낼 수 있을까요? 기대는 것 하나를 잠시 내려놓아 본다면 무엇부터 해 볼 수 있을까요?

마부에게 잘 길든 말처럼 감각이 고요해진 이, 자만을 버리고 번뇌가 없는 이, 그런 이를 신들도 부러워하느니라.

Yassindriyāni samathaṅgatāni, Assā yathā sārathinā sudantā; Pahīnamānassa anāsavassa, Devāpi tassa pihayanti tādino.

법구경 Dhammapada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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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든 말의 비유가 다시 나옵니다. 3품에서 마음을 길들이는 이야기를 했는데 여기서는 감각입니다. 길든 말은 힘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힘이 제대로 쓰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마지막 줄입니다. 신들도 부러워한다고 했습니다. 인도 사람들이 우러르던 신들을 부러워하는 쪽에 놓은 것입니다. 신들은 오래 살고 즐거움을 누리지만 자만을 버리지도 흘러드는 것을 끊지도 못했다는 뜻이 됩니다.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놓았느냐로 값을 매기는 셈법이 여기서 뚜렷합니다.

묵상

부러운 사람이 있나요? 그 사람이 가진 것이 부러운가요, 아니면 그 사람이 놓아 버린 것이 부러운가요?

그런 이는 땅처럼 거스르지 않고 성문 기둥처럼 굳건하며, 진흙 없는 맑은 못과 같으니 다시 떠돌 일이 없느니라.

Pathavisamo no virujjhati, Indakhilupamo tādi subbato; Rahadova apetakaddamo, Saṁsārā na bhavanti tādino.

법구경 Dhammapada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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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타위사모(pathavisamo)는 '땅과 같은'입니다. 땅은 무엇을 쏟아부어도 거스르지 않습니다. 깨끗한 것을 부으면 받고 더러운 것을 부어도 받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무기력과 다릅니다. 다음 비유가 그것을 못박습니다. 인다킬라(indakhīla)는 성문 앞에 깊이 박아 둔 돌기둥으로, 밀어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받아들이되 흔들리지 않는다는 두 성질이 나란히 놓인 것입니다. 세 번째 비유인 진흙 없는 못은 6품의 호수와 이어집니다. 흐려질 진흙 자체가 바닥에 없으니 휘저어도 흐려지지 않습니다.

묵상

받아 주는 것과 휘둘리는 것은 다릅니다. 나는 받아 주고 있나요, 아니면 휘둘리고 있나요?

마음이 고요하고 말과 행동도 고요하나니, 바르게 알아 풀려난 이는 그렇게 가라앉아 고요하니라.

Santaṁ tassa manaṁ hoti, santā vācā ca kamma ca; Sammadaññāvimuttassa, upasantassa tādino.

법구경 Dhammapada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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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따(santa)라는 낱말이 세 번 되풀이됩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말이 고요하고, 행동이 고요합니다. 셋의 순서가 중요합니다. 마음이 먼저 나옵니다. 1품 첫 게송에서 마음이 앞선다고 한 것과 이어집니다. 말과 행동만 조용한 사람은 참고 있는 것이고, 마음이 고요한 사람에게서는 말과 행동이 저절로 고요해집니다. 우빠산따(upasanta)는 '가라앉아 고요한'입니다. 억눌러 조용한 것이 아니라 저절로 가라앉은 상태입니다. 이 품에서 되풀이되는 따디(tādin)는 '그런 이, 한결같은 이'로, 어떤 일을 겪어도 달라지지 않는 사람을 부르는 말입니다.

묵상

조용히 있는 것과 고요한 것은 다릅니다. 지금 나의 조용함은 참는 쪽인가요, 가라앉은 쪽인가요?

남의 말에 기대지 않고 지어지지 않은 것을 아는 이, 이어진 것을 끊고 다시 날 자리를 부수며 바라는 마음을 게워 낸 이, 그가 참으로 가장 높은 사람이니라.

Assaddho akataññū ca, sandhicchedo ca yo naro; Hatāvakāso vantāso, sa ve uttamaporiso.

법구경 Dhammapada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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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에서 가장 짓궂은 게송입니다. 낱말을 그대로 읽으면 욕이 됩니다. 믿음이 없고, 은혜를 모르고, 인연을 끊고, 기회를 잃고, 바랄 것이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를 가장 높은 사람이라 합니다. 낱말마다 두 뜻이 겹쳐 있기 때문입니다. 아까딴뉴(akataññū)는 '은혜를 모르는'이면서 동시에 '지어지지 않은 것을 아는' 이라는 뜻이 됩니다. 지어지지 않은 것이란 열반을 가리킵니다. 앗삿도(assaddha)도 '믿음 없는'이면서 '남에게 들어서 믿을 필요가 없는', 곧 스스로 확인한 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 비틀림 자체가 이 게송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를 평이하게 풀어 옮겨 역설이 사라졌습니다.

묵상

겉보기와 속뜻이 정반대인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요? 남들이 붙인 이름과 그 사람의 실제가 어긋났던 경우 말입니다.

마을이든 숲이든, 낮은 땅이든 높은 땅이든, 온전히 놓아버린 이가 머무는 곳, 그곳이 곧 아름다운 땅이니라.

Gāme vā yadi vāraññe, Ninne vā yadi vā thale; Yattha arahanto viharanti, Taṁ bhūmirāmaṇeyyakaṁ.

법구경 Dhammapada 98 아라한의 품 (Arahantavag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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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를 네 가지로 나열한 뒤 모두 상관없다고 합니다. 마을과 숲은 사람이 많은 곳과 없는 곳이고, 낮은 땅과 높은 땅은 지형입니다. 어디든 상관없다는 말이 이 게송의 앞머리입니다. 그리고 뒤에서 장소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입니다. 라마네이야까(rāmaṇeyyaka)는 '기쁨을 주는, 마음이 놓이는'이라는 뜻입니다. 이 게송이 앞의 여러 게송과 이어지는 대목이 있습니다. 90게송에서 열기가 없다 했고 96게송에서 고요하다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자리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묵상

누군가 있으면 그 자리가 편안해지는 사람을 알고 있나요? 그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아니면 무엇을 하지 않고 있었나요?

사람들이 즐거워하지 않는 숲도 아름다우니라. 물듦을 벗은 이들은 그곳에서 즐거워하나니, 감각의 즐거움을 찾지 않는 까닭이니라.

Ramaṇīyāni araññāni, yattha na ramatī jano; Vītarāgā ramissanti, na te kāmagavesino.

법구경 Dhammapada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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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의 마지막 게송이자 앞 게송의 짝입니다. 앞에서 사람이 곳을 아름답게 한다고 했으니, 여기서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곳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두 게송을 합치면 아름다움이 장소에 있지 않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위따라가(vītarāga)는 '물듦을 벗은'이라는 뜻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들이 숲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즐거워한다고 한 점입니다. 라밋산띠(ramissanti)는 즐거워한다는 말입니다. 참는 것이 아닙니다. 더 얻으려 애쓸 것이 없어지면 심심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길 수 있게 된다는, 뒤집힌 셈법입니다.

묵상

아무 자극도 없는 곳에서 편안했던 적이 있나요? 심심함과 고요함을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