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마디 말

천 마디보다 한 마디, 백 년보다 하루 - 양과 질을 맞세운 열여섯 편

천 마디 말을 늘어놓아도 뜻이 없다면, 듣고 마음이 가라앉는 뜻 있는 한 마디만 못하니라.

Sahassamapi ce vācā, anatthapadasaṁhitā; Ekaṁ atthapadaṁ seyyo, yaṁ sutvā upasammati.

법구경 Dhammapada 100

배경

이 품은 천이라는 숫자로 시작해 백 년으로 끝납니다. 많음과 적음을 계속 맞세우는 것이 방식입니다. 여기서 기준으로 놓인 것은 우빠삼마띠(upasammati), 곧 '듣고 나서 가라앉는다'입니다. 좋은 말인지 아닌지를 화려함이나 옳음이 아니라 들은 사람의 상태로 판정합니다. 듣고 마음이 가라앉았다면 뜻 있는 말이고, 아무리 많이 들어도 가라앉지 않으면 뜻이 없는 말입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사형 집행인으로 오래 일하다 만년에 가르침을 들은 사람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평생 들은 말보다 한마디가 그를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묵상

듣고 나서 마음이 가라앉았던 말이 있나요? 그 말은 길었나요, 짧았나요?

천 구절의 시를 읊어도 뜻이 없다면, 듣고 마음이 가라앉는 뜻 있는 한 구절만 못하니라.

Sahassamapi ce gāthā, anatthapadasaṁhitā; Ekaṁ gāthāpadaṁ seyyo, yaṁ sutvā upasammati.

법구경 Dhammapada 101

배경

앞 게송에서 말이 시로 바뀌었을 뿐 틀은 같습니다. 이렇게 같은 문장을 낱말만 바꿔 세 번 되풀이하는 것이 이 품의 앞머리입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바히야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부처님을 만나 가르침을 청했는데, 부처님은 탁발 중이라 때가 아니라며 두 번 물리치셨습니다. 세 번째 청에 하신 말씀은 아주 짧았습니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는 것만 있게 하라는 정도의 몇 마디였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깨달았고 곧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게송이 왜 길이를 문제 삼지 않는지가 그 이야기에 들어 있습니다.

묵상

많이 읽고 많이 들었는데 남은 것이 없다고 느낀 적 있나요? 그 가운데 딱 한 구절만 남긴다면 무엇을 고르시겠어요?

뜻 없는 시를 백 구절 읊는 것보다, 듣고 마음이 가라앉는 진리의 한 구절이 나으니라.

Yo ca gāthā sataṁ bhāse, anatthapadasaṁhitā; Ekaṁ dhammapadaṁ seyyo, yaṁ sutvā upasammati.

법구경 Dhammapada 102

배경

여기 나오는 담마빠다(dhammapada)가 이 책의 이름입니다. 빠다(pada)는 '발자국, 구절, 길'을 함께 뜻하는 말이라, 담마빠다는 '진리의 구절'이자 '진리로 가는 발자국'으로 읽힙니다. 책 이름이 본문 안에 이렇게 들어 있는 셈입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꾼달라께시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여러 학파를 돌며 논쟁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사리뿟따 존자와의 만남에서 한 구절에 무너졌다고 합니다. 많이 아는 사람이 한 구절에 바뀌었다는 점이 앞의 두 게송과 이어집니다.

묵상

지식으로 무장한 채 살다가 한마디에 흔들려 본 적이 있나요? 그 흔들림이 나쁜 일이었나요, 아니면 시작이었나요?

싸움터에서 천 명을 천 번 이긴다 해도, 자기 하나를 이기는 이가 참으로 싸움에서 으뜸이니라.

Yo sahassaṁ sahassena, saṅgāme mānuse jine; Ekañca jeyyamattānaṁ, sa ve saṅgāmajuttamo.

법구경 Dhammapada 103

배경

이 품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게송입니다. 셈이 극단적입니다. 천 명을 천 번 이기면 백만 번의 승리인데, 그것보다 자기 하나가 낫다고 합니다. 여기서 자기를 이긴다는 말이 자기를 미워하거나 억누르는 뜻으로 읽히기 쉬워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다음 게송에 나오는 앗따단따(attadanta)는 '자기를 길들인'이라는 뜻으로, 6품에서 본 말 길들이기와 같은 낱말입니다. 꺾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갈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밖의 싸움은 이겨도 다음 싸움이 오지만 이 싸움은 다릅니다. 다음 게송이 그 다름을 말합니다.

묵상

이기고 싶은 상대가 있나요? 그 사람을 이긴 뒤에도 남을 것이 무엇인지 미리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자기를 이기는 것이 다른 모든 사람을 이기는 것보다 나으니, 늘 스스로를 다스리고 삼가며 사는 사람, 그런 이가 얻은 승리는 신도 하늘의 악사도, 사람을 붙드는 힘도 창조의 신마저도 되돌리지 못하느니라.

Attā have jitaṁ seyyo, yā cāyaṁ itarā pajā; Attadantassa posassa, niccaṁ saññatacārino. Neva devo na gandhabbo, na māro saha brahmunā; Jitaṁ apajitaṁ kayirā, tathārūpassa jantuno.

법구경 Dhammapada 104-105

배경

두 게송이 한 문장으로 이어져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앞 게송의 셈을 이어받아 그 승리가 왜 다른지 말합니다. 밖에서 얻은 승리는 되돌려질 수 있습니다. 이긴 상대가 다시 일어서고, 얻은 것을 빼앗기며, 명예는 뒤집힙니다. 그런데 자기를 이긴 것은 누구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아빠지땅 까이라(apajitaṁ kayirā)는 '이긴 것을 지지 않은 것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럴 수 있는 존재를 넷이나 늘어놓고 모두 못한다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가장 힘세다고 여긴 것들을 다 부른 셈입니다.

묵상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을 하나 가지고 있나요? 지금 애쓰고 있는 것 가운데 되돌려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갈라 보면 어떨까요?

다달이 천금을 들여 백 년 동안 제사를 지낸다 해도, 스스로를 닦은 이를 잠깐이라도 공경하는 것, 그 공경이 백 년의 제사보다 나으니라.

Māse māse sahassena, yo yajetha sataṁ samaṁ; Ekañca bhāvitattānaṁ, muhuttamapi pūjaye; Sāyeva pūjanā seyyo, yañce vassasataṁ hutaṁ.

법구경 Dhammapada 106

배경

바위땃따(bhāvitatta)는 '자기를 길러 낸 이'입니다. 제사와 견주어 놓은 것이 사람입니다. 이 대비가 당시로서는 파격이었습니다. 제사는 정해진 절차를 지키면 되지만 사람을 알아보는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스스로를 닦은 이인지 알아보려면 보는 쪽에도 눈이 있어야 합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가르침을 생각함'으로 바꾸었고 다음 게송에서는 교단에 대한 공양으로 옮겼습니다. 공경의 대상이 사람에서 가르침과 조직으로 옮겨 간 셈입니다. 빠알리가 가리킨 것은 눈앞의 한 사람입니다.

묵상

주위에 스스로를 잘 닦아 온 사람이 있나요? 그 사람을 알아보고 있나요, 아니면 지나치고 있나요?

백 년 동안 숲에서 불을 섬긴다 해도, 스스로를 닦은 이를 잠깐이라도 공경하는 것, 그 공경이 백 년의 제사보다 나으니라.

Yo ca vassasataṁ jantu, aggiṁ paricare vane; Ekañca bhāvitattānaṁ, muhuttamapi pūjaye; Sāyeva pūjanā seyyo, yañce vassasataṁ hutaṁ.

법구경 Dhammapada 107

배경

앞 게송의 짝으로, 이번에는 불을 섬기는 일과 견줍니다. 당시 인도에서 불을 모시는 일은 가장 오래되고 존중받던 종교 행위였습니다. 백 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생을 통째로 바치는 일입니다. 그것을 잠깐의 공경과 견주었습니다. 이 게송이 제사 자체를 헐뜯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무엇에 마음을 쓰느냐를 묻습니다. 오래 하는 일과 바르게 향한 일 가운데 어느 쪽이 값진가를 묻는 이 품의 물음이 여기서도 되풀이됩니다.

묵상

오래 해 왔다는 이유로 계속하고 있는 일이 있나요? 그 일이 지금도 처음의 뜻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면 어떨까요?

이 세상에서 바치는 제물이 무엇이든, 복을 바라며 한 해 내내 제사를 지내도, 그 모두가 네 몫 가운데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나니, 올곧은 이에게 절하는 것이 그보다 나으니라.

Yaṁ kiñci yiṭṭhaṁ va hutaṁ va loke, Saṁvaccharaṁ yajetha puññapekkho; Sabbampi taṁ na catubhāgameti, Abhivādanā ujjugatesu seyyo.

법구경 Dhammapada 108

배경

뿐냐뻭코(puññapekkha)는 '복을 바라보며'라는 뜻입니다. 이 낱말이 이 게송의 급소입니다. 무엇을 바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바라고 바치느냐를 짚은 것입니다. 복을 얻으려고 하는 행위는 거래에 가깝습니다. 웃주가따(ujjugata)는 '곧게 간 이', 곧 삶이 굽지 않은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 이에게 절하는 일에는 거래가 없습니다. 받을 것을 계산하지 않고 그저 알아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네 몫 가운데 하나라는 표현은 당시 흔히 쓰던 비교 방식으로, 견줄 것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묵상

무언가 좋은 일을 할 때 돌아올 것을 헤아리고 있지는 않나요?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아도 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늘 웃어른을 공경하며 절하기를 몸에 익힌 이에게는, 네 가지가 자라나니 목숨과 얼굴빛과 즐거움과 힘이니라.

Abhivādanasīlissa, niccaṁ vuḍḍhāpacāyino; Cattāro dhammā vaḍḍhanti, āyu vaṇṇo sukhaṁ balaṁ.

법구경 Dhammapada 109

배경

네 가지가 아주 구체적입니다. 목숨과 얼굴빛과 즐거움과 힘입니다. 깨달음이나 공덕 같은 말이 아니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 게송을 미신처럼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남을 낮춰 보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과 공경할 줄 아는 사람의 몸 상태가 다르다는 관찰로 읽으면 자연스럽습니다. 늘 겨루고 재는 사람은 몸이 긴장합니다. 아비와다나실리(abhivādanasīlin)는 '절하는 것이 몸에 밴 이'입니다. 한 번의 행동이 아니라 성질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묵상

누군가를 진심으로 높이 여겨 본 적이 언제인가요? 그럴 때와 늘 겨룰 때, 몸의 느낌이 다르지 않던가요?

됨됨이 없이 마음이 흩어진 채 백 년을 사는 것보다, 됨됨이를 갖추고 마음을 모으는 이의 하루가 나으니라.

Yo ca vassasataṁ jīve, dussīlo asamāhito; Ekāhaṁ jīvitaṁ seyyo, sīlavantassa jhāyino.

법구경 Dhammapada 110

배경

여기서부터 여섯 편이 같은 틀로 이어집니다. 백 년과 하루를 맞세우고, 무엇이 있고 없느냐로 갈라놓습니다. 자나(jhāna)는 마음이 한곳에 깊이 잠긴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흔히 선정으로 옮깁니다. 아사마히또(asamāhito)는 그 반대로 '모이지 않은, 흩어진'입니다. 이 연작이 무서운 것은 시간을 값으로 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래 살았다는 사실 자체는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만 남습니다. 그리고 이 셈이 뒤집어 보면 희망이기도 합니다. 늦게 시작해도 하루가 백 년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묵상

지금 시작하기에 늦었다고 여기는 것이 있나요? 하루가 백 년을 이길 수 있다면 그 하루를 언제로 잡으시겠어요?

지혜 없이 마음이 흩어진 채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지혜를 갖추고 마음을 모으는 이의 하루가 나으니라.

Yo ca vassasataṁ jīve, duppañño asamāhito; Ekāhaṁ jīvitaṁ seyyo, paññavantassa jhāyino.

법구경 Dhammapada 111

배경

앞 게송에서 됨됨이가 지혜로 바뀌었습니다. 이 연작이 낱말을 하나씩 갈아 끼우며 나아가는 방식은 1품의 짝 구조와 닮았습니다. 여기서 빤냐(paññā)는 지식과 다릅니다.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아 아는 힘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게송에서 지혜는 늘 마음 모음과 짝을 이룹니다. 흩어진 마음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는 힘과 모으는 힘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 이 연작 전체에 깔린 생각입니다.

묵상

많이 아는 것과 제대로 보는 것 가운데, 요즘 나에게 부족한 쪽은 어느 쪽일까요?

게으르고 정진이 약한 채 백 년을 사는 것보다, 굳세게 정진하는 이의 하루가 나으니라.

Yo ca vassasataṁ jīve, kusīto hīnavīriyo; Ekāhaṁ jīvitaṁ seyyo, vīriyamārabhato daḷhaṁ.

법구경 Dhammapada 112

배경

위리야(vīriya)는 '힘, 애씀'을 뜻하는데 본래 영웅을 가리키는 말과 뿌리가 같습니다. 애쓰는 일을 용기의 일로 본 셈입니다. 아랍바또(ārabhato)는 '시작한'이라는 뜻이라, 굳세게 시작한 이라고도 읽힙니다. 하루가 백 년을 이긴다는 이 연작의 셈에서 이 게송이 특히 실용적인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시작하는 데는 하루면 됩니다. 오래 미뤄 온 사람에게도 오늘 하루는 있습니다. 게으름을 나무라는 말로만 읽으면 무겁지만, 오늘 하루로 충분하다는 말로 읽으면 가벼워집니다.

묵상

오래 미뤄 온 일이 있나요? 오늘 그것의 가장 작은 첫 걸음 하나만 한다면 무엇일까요?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지 못한 채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는 이의 하루가 나으니라.

Yo ca vassasataṁ jīve, apassaṁ udayabbayaṁ; Ekāhaṁ jīvitaṁ seyyo, passato udayabbayaṁ.

법구경 Dhammapada 113

배경

우다얍바야(udayabbaya)는 '일어남과 사라짐'입니다. 모든 것이 생겨났다가 없어지는 그 움직임을 가리킵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빠따짜라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남편과 두 아이와 부모를 한꺼번에 잃고 정신을 놓았다가, 부처님을 만나 이 가르침을 듣고 회복했다고 합니다. 그 배경을 알고 읽으면 이 게송이 냉정한 관찰이 아니라 무너진 사람에게 건넨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느냐는 물음에 답하는 대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원래 그렇다는 자리를 보여 준 것입니다.

묵상

잃어버린 것을 떠올릴 때 마음이 어떤가요? 그것이 왔던 것이기에 갔다는 사실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나요, 아니면 아직 아닌가요?

죽음 없는 자리를 보지 못한 채 백 년을 사는 것보다, 그 자리를 보는 이의 하루가 나으니라.

Yo ca vassasataṁ jīve, apassaṁ amataṁ padaṁ; Ekāhaṁ jīvitaṁ seyyo, passato amataṁ padaṁ.

법구경 Dhammapada 114

배경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끼사고따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아이를 잃고 미쳐 아이를 안은 채 약을 구하러 다니던 여인에게, 부처님은 사람이 죽은 적 없는 집에서 겨자씨를 얻어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집은 없었습니다. 집집마다 죽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얻은 것은 약이 아니라 자기 슬픔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앎이었습니다. 아마따빠다(amataṁ padaṁ)는 '죽음 없는 자리'로 열반을 가리킵니다. 죽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더 이상 그 자리를 흔들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묵상

내 슬픔이 나만의 것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나요?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지 헤아려 본 적 있나요?

가장 높은 가르침을 보지 못한 채 백 년을 사는 것보다, 그 가르침을 보는 이의 하루가 나으니라.

Yo ca vassasataṁ jīve, apassaṁ dhammamuttamaṁ; Ekāhaṁ jīvitaṁ seyyo, passato dhammamuttamaṁ.

법구경 Dhammapada 115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입니다. 여섯 편으로 이어진 연작이 여기서 끝납니다. 됨됨이, 지혜, 힘씀, 일어나고 사라짐을 봄, 죽음 없는 자리를 봄, 그리고 가장 높은 가르침을 봄으로 이어졌습니다. 뒤로 갈수록 보는 일 쪽으로 옮겨 갑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자식이 많았던 한 나이 든 여성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식들에게 재산을 다 나눠 주고 버림받은 뒤 늦게 출가했다고 합니다. 늦게 시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연작의 배경에 거듭 나오는 것이 우연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백 년보다 하루라는 셈은 늦은 사람을 위한 셈입니다.

묵상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나요? 앞으로 남은 하루하루가 지나온 백 년보다 나을 수 있다면, 오늘부터 무엇을 다르게 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