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누구나 매를 두려워한다 - 나를 자로 삼아 남을 재는 법

모두가 매를 두려워하고 모두가 죽음을 두려워하나니, 자기를 자로 삼아 죽이지도 말고 죽이게 하지도 말지니라.

Sabbe tasanti daṇḍassa, sabbe bhāyanti maccuno; Attānaṁ upamaṁ katvā, na haneyya na ghātaye.

법구경 Dhammapada 129

배경

앗따낭 우빠망 까뜨와(attānaṁ upamaṁ katvā)는 '자기를 견줌으로 삼아'라는 뜻입니다. 남을 재는 자를 밖에서 가져오지 않고 자기에게서 꺼냅니다. 나는 매를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니 남도 그러하리라는 것입니다. 이 방식이 실용적인 까닭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아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규칙을 외울 필요도, 상대를 조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자기가 무엇을 싫어하는지만 알면 됩니다. 뒷줄에 죽이는 것과 죽이게 하는 것을 나란히 든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시키는 것도 같은 일로 셈합니다.

묵상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을 오늘 누군가에게 하지는 않았나요? 그 판단에 필요한 것은 나 자신뿐입니다.

모두가 매를 두려워하고 모두에게 목숨은 사랑스러우니, 자기를 자로 삼아 죽이지도 말고 죽이게 하지도 말지니라.

Sabbe tasanti daṇḍassa, sabbesaṁ jīvitaṁ piyaṁ; Attānaṁ upamaṁ katvā, na haneyya na ghātaye.

법구경 Dhammapada 130

배경

앞 게송의 짝인데 한 낱말이 바뀌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한다'가 '목숨이 사랑스럽다'로 옮겨 갔습니다.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앞 게송이 피하고 싶은 것을 근거로 삼았다면 여기서는 아끼는 것을 근거로 삼습니다. 지위야(jīvitaṁ piyaṁ)는 '목숨이 사랑스럽다'는 뜻입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에게 해당합니다. 두 게송을 나란히 놓으면 같은 결론에 이르는 두 갈래 길이 보입니다. 무서운 것을 떠올려도 되고 아끼는 것을 떠올려도 됩니다.

묵상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을 떠올려 보세요. 다른 이에게도 그만큼 아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나요?

즐거움을 바라는 존재들을 매로 해치면서 제 즐거움을 구하는 이는, 죽은 뒤에 즐거움을 얻지 못하느니라.

Sukhakāmāni bhūtāni, yo daṇḍena vihiṁsati; Attano sukhamesāno, pecca so na labhate sukhaṁ.

법구경 Dhammapada 131

배경

이 게송의 짜임이 정교합니다. 해침을 당하는 쪽도 즐거움을 바라고, 해치는 쪽도 즐거움을 구합니다. 같은 것을 바라면서 한쪽이 다른 쪽을 밟는 구도입니다. 수카까마니(sukhakāmāni)는 '즐거움을 바라는'이라는 뜻으로, 존재들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벌레든 사람이든 즐거움을 바란다는 점에서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의 즐거움을 밟고 얻는 즐거움은 셈이 맞지 않습니다. 앞의 두 게송이 방법을 알려 주었다면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를 말합니다.

묵상

내 편의를 위해 누군가가 불편해지는 구조 안에 있지는 않나요? 그 사람도 나와 같은 것을 바라고 있다면 어떨까요?

즐거움을 바라는 존재들을 매로 해치지 않으면서 제 즐거움을 구하는 이는, 죽은 뒤에 즐거움을 얻느니라.

Sukhakāmāni bhūtāni, yo daṇḍena na hiṁsati; Attano sukhamesāno, pecca so labhate sukhaṁ.

법구경 Dhammapada 132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 게송이 제 즐거움을 구하는 일 자체를 나무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앗따노 수카메사노(attano sukhamesāno), 곧 '제 즐거움을 구하면서'가 두 게송에 똑같이 들어 있습니다. 문제는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길에 남을 두느냐입니다. 자기 행복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남을 밟지 않고도 구할 수 있다는 말로 읽힙니다. 두 게송을 나란히 놓으면 선택지가 둘로 좁혀집니다. 남을 밟고 구하거나 밟지 않고 구하거나입니다.

묵상

내가 잘되는 길이 누군가를 밟지 않는 길이기도 할까요? 둘 다 되는 길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누구에게도 거친 말을 하지 말지니, 들은 이가 되받아 말하리라. 다투는 말은 괴로우니 되돌아온 매가 너에게 닿으리라.

Māvoca pharusaṁ kañci, vuttā paṭivadeyyu taṁ; Dukkhā hi sārambhakathā, paṭidaṇḍā phuseyyu taṁ.

법구경 Dhammapada 133

배경

이 품의 이름인 단다(daṇḍa)는 몽둥이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말이 그 자리에 놓입니다. 빠띠단다(paṭidaṇḍa)는 '되돌아오는 매'입니다. 말이 몽둥이처럼 오간다는 그림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폭력을 몸의 일로만 여기는데 이 게송은 말을 그 안에 넣습니다. 사람바까타(sārambhakathā)는 '다투는 말, 되받아치는 말'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근거가 도덕이 아니라 예측이라는 점입니다. 하지 말라는 이유가 나쁜 일이라서가 아니라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묵상

거친 말을 던진 뒤에 무엇이 돌아왔나요? 그 대화가 어떻게 끝났는지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깨진 징처럼 스스로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그대는 이미 열반에 이른 것이니 그대에게 다툼이 없느니라.

Sace neresi attānaṁ, kaṁso upahato yathā; Esa pattosi nibbānaṁ, sārambho te na vijjati.

법구경 Dhammapada 134

배경

비유가 뜻밖입니다. 깨진 징은 두들겨도 울리지 않습니다. 온전한 징은 치는 대로 소리를 내지만 금이 간 징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개 깨진 것은 못 쓰는 것인데 여기서는 그것을 좋은 자리에 놓았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그에 맞춰 울리지 않는 상태를 그린 것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같은 악기로 정반대를 말합니다. 종과 경쇠를 두드리듯 좋은 소리를 내라고 합니다. 소리를 내지 말라는 말이 소리를 잘 내라는 말로 뒤집힌 셈입니다. 빠알리가 말하는 것은 반응하지 않는 자유입니다.

묵상

누가 건드리면 곧바로 소리가 나나요? 울리지 않고 지나가 본 적이 있다면, 그때 무엇이 달랐나요?

목동이 막대기로 소를 몰아 풀밭으로 가듯, 늙음과 죽음이 살아 있는 것들의 목숨을 몰아가느니라.

Yathā daṇḍena gopālo, gāvo pājeti gocaraṁ; Evaṁ jarā ca maccu ca, āyuṁ pājenti pāṇinaṁ.

법구경 Dhammapada 135

배경

이 품의 몽둥이가 여기서 다른 손에 들립니다. 사람이 남을 때리는 몽둥이가 아니라 늙음과 죽음이 우리를 모는 몽둥이입니다. 빠제띠(pājeti)는 '몰아간다'는 뜻입니다. 소는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뒤에서 미는 힘에 따라 갈 뿐입니다. 그 그림이 서늘합니다. 앞 게송들에서 우리가 남을 몰아붙이는 이야기를 했는데, 정작 우리 자신도 몰리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남을 때릴 겨를이 있느냐는 물음으로도 읽힙니다. 이 품에서 이 게송이 놓인 자리가 그런 뜻을 만듭니다.

묵상

시간에 쫓기고 있다는 느낌이 드나요? 그 뒤에서 미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쯤 돌아본 적이 있나요?

어리석은 이는 나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나니, 제가 지은 일로 말미암아 불에 데인 듯 괴로워하느니라.

Atha pāpāni kammāni, karaṁ bālo na bujjhati; Sehi kammehi dummedho, aggidaḍḍhova tappati.

법구경 Dhammapada 136

배경

나 붓자띠(na bujjhati)는 '깨닫지 못한다,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나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나쁜 일인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5품에서 어리석음을 자기를 못 보는 상태라고 했던 것이 여기서도 이어집니다. 뒷줄이 이 게송의 무게를 만듭니다. 모르면서 했지만 결과는 옵니다. 몰랐다는 것이 면제가 되지 않습니다. 앗기닷도와(aggidaḍḍhova)는 '불에 덴 것처럼'입니다. 불에 손을 대면 몰랐어도 뎁니다. 그리고 그때에야 알게 됩니다.

묵상

몰라서 누군가를 힘들게 한 적이 있나요?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나요?

매를 들 까닭 없는 이들, 해를 끼치지 않은 이들을 해치는 사람은 열 가지 가운데 하나에 곧 이르게 되느니라. 모진 아픔이나 잃음, 몸이 부서짐, 무거운 병이나 마음이 어지러워짐, 권력에서 오는 재앙이나 끔찍한 헐뜯음, 가까운 이를 잃음, 재물이 무너짐, 또는 집이 불길에 타는 일이니, 몸이 무너진 뒤에는 어리석은 그가 괴로운 곳에 나느니라.

Yo daṇḍena adaṇḍesu, appaduṭṭhesu dussati; Dasannamaññataraṁ ṭhānaṁ, khippameva nigacchati. Vedanaṁ pharusaṁ jāniṁ, sarīrassa va bhedanaṁ; Garukaṁ vāpi ābādhaṁ, cittakkhepaṁ va pāpuṇe. Rājato vā upasaggaṁ, Abbhakkhānaṁ va dāruṇaṁ; Parikkhayaṁ va ñātīnaṁ, Bhogānaṁ va pabhaṅguraṁ. Atha vāssa agārāni, aggi ḍahati pāvako; Kāyassa bhedā duppañño, nirayaṁ sopapajjati.

법구경 Dhammapada 137-140

배경

네 게송이 하나의 목록으로 이어져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앞에서 열 가지가 있다고 하고 뒤에서 그것을 하나씩 셉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목갈라나 존자가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일을 전합니다. 눈여겨볼 것은 목록의 성격입니다. 벌을 내리는 존재가 나오지 않고 그저 일어나는 일들이 나열됩니다. 아픔, 잃음, 병, 마음이 어지러워짐, 재앙, 헐뜯음, 이별, 재산 잃음, 불. 모두 살면서 실제로 겪는 일들입니다. 아단데수(adaṇḍesu)는 '매를 들 까닭이 없는 이들'로, 아무 잘못 없는 상대를 가리킵니다.

묵상

아무 잘못 없는 사람에게 화를 낸 적이 있나요? 그 화가 원래 향해야 했던 곳은 어디였을까요?

벌거벗고 지내는 것도, 머리를 엉클어뜨리는 것도, 진흙을 바르는 것도, 굶는 것도, 맨바닥에 눕는 것도, 먼지와 때를 뒤집어쓰는 것도, 쭈그려 앉아 애쓰는 것도, 의심을 건너지 못한 사람을 깨끗하게 하지는 못하느니라.

Na naggacariyā na jaṭā na paṅkā, Nānāsakā thaṇḍilasāyikā vā; Rajojallaṁ ukkuṭikappadhānaṁ, Sodhenti maccaṁ avitiṇṇakaṅkhaṁ.

법구경 Dhammapada 141

배경

일곱 가지 고행이 줄줄이 나옵니다. 당시 인도에서 실제로 행해지던 것들입니다. 부처님 자신이 깨닫기 전 여섯 해 동안 그 길을 걸었고 얻은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게송은 밖에서 하는 비판이 아니라 겪어 본 사람의 말입니다. 아위띤나깡캉(avitiṇṇakaṅkha)은 '의심을 건너지 못한'이라는 뜻입니다. 몸을 아무리 괴롭혀도 마음의 의심은 그대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고행을 조롱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것들이 어렵지 않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어려움이 깨끗함을 만들지는 않는다고 말할 뿐입니다.

묵상

힘든 일을 해내면 나아질 것이라 여긴 적이 있나요? 힘듦과 나아짐이 늘 붙어 다니지는 않는다는 것을 겪어 본 적 있나요?

치장을 했더라도 고르게 살아가는 이라면, 고요하고 스스로를 다스리며 한결같이 맑게 사는 이라면, 모든 존재에게 매를 내려놓은 이라면, 그가 바라문이요 애쓰는 이요 수행자이니라.

Alaṅkato cepi samaṁ careyya, Santo danto niyato brahmacārī; Sabbesu bhūtesu nidhāya daṇḍaṁ, So brāhmaṇo so samaṇo sa bhikkhu.

법구경 Dhammapada 142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앞에서 헐벗은 고행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지 못한다고 했으니, 여기서는 반대로 치장한 사람도 그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알랑까또(alaṅkata)는 '꾸민, 장식한'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화려한 차림의 대신이 왕 앞에서 가르침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겉모습으로 판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두 게송의 주제입니다. 마지막 줄에서 바라문과 애쓰는 이와 수행자를 나란히 부른 것도 그렇습니다. 태생이나 차림이 아니라 매를 내려놓았느냐로 가릅니다.

묵상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한 적이 있나요? 반대로 나 자신을 겉모습으로 증명하려 한 적은 없었나요?

부끄러움으로 스스로를 다스리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느냐. 좋은 말이 채찍을 보고 스스로 깨어나듯 하는 이가.

Hirīnisedho puriso, koci lokasmi vijjati; Yo niddaṁ apabodheti, asso bhadro kasāmiva.

법구경 Dhammapada 143

배경

히리(hirī)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남이 볼까 두려운 것과 다릅니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스스로 낯이 뜨거운 마음입니다. 게송은 그런 사람이 얼마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드물다는 말입니다. 좋은 말은 채찍이 몸에 닿기 전에 그림자만 보고도 달립니다. 맞아야 움직이는 말과 다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크게 당하고 나서야 바뀌는 사람이 있고, 낌새만으로 스스로 고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게송이 그리는 것은 뒤엣사람입니다. 다음 게송이 그 채찍의 비유를 이어받습니다.

묵상

크게 아파야만 바뀌었던 적이 있나요? 그전에 있었던 작은 신호들을 지금 돌아보면 무엇이 보이나요?

채찍을 본 좋은 말처럼 부지런하고 다급한 이가 될지니라. 믿음과 됨됨이와 정진으로, 마음을 모음과 가르침을 가려냄으로, 앎과 행함을 갖추고 깨어 있어 이 작지 않은 괴로움을 벗어나게 되리라.

Asso yathā bhadro kasāniviṭṭho, Ātāpino saṁvegino bhavātha; Saddhāya sīlena ca vīriyena ca, Samādhinā dhammavinicchayena ca; Sampannavijjācaraṇā patissatā, Jahissatha dukkhamidaṁ anappakaṁ.

법구경 Dhammapada 144

배경

앞 게송의 채찍 비유를 이어받아 여섯 가지를 나열합니다. 믿음, 됨됨이, 힘씀, 마음 모음, 가려냄, 그리고 앎과 행함입니다. 상웨기노(saṁvegino)는 '다급함을 느끼는'이라는 뜻으로, 이 낱말이 중요합니다. 상웨가(saṁvega)는 무언가를 보고 가슴이 철렁하는 것, 그래서 더는 미룰 수 없다고 느끼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두려움과는 다릅니다. 두려움은 얼어붙게 하지만 이것은 움직이게 합니다. 마지막 줄의 아납빠깡(anappakaṁ)은 '적지 않은'입니다. 괴로움의 크기를 축소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한 뒤에 벗어난다고 말합니다.

묵상

미루던 일을 갑자기 시작하게 만든 순간이 있었나요? 그때 가슴이 철렁했던 그 느낌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려 보세요.

물길 내는 이는 물을 이끌고 화살 만드는 이는 화살대를 곧게 하며, 목수는 나무를 다듬나니, 스스로를 닦는 이는 자기를 다스리느니라.

Udakañhi nayanti nettikā, Usukārā namayanti tejanaṁ; Dāruṁ namayanti tacchakā, Attānaṁ damayanti subbatā.

법구경 Dhammapada 145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입니다. 6품 80게송과 거의 같은데 마지막 낱말만 다릅니다. 거기서는 '지혜로운 이들'이었고 여기서는 숩바따(subbatā), 곧 '잘 다잡고 사는 이들'입니다. 같은 비유를 두 품에서 되풀이하며 주어를 바꾼 셈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마지막을 '몸을 다룬다'로 옮겼는데, 그러면 다스릴 대상이 자기에서 몸으로 좁아집니다. 폭력을 다룬 이 품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뜻깊습니다. 남을 때리지 않는 데서 시작해 자기를 다루는 데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손댈 곳은 결국 자기라는 것입니다.

묵상

다루기 어려운 것을 다루어 본 경험이 있나요? 물이나 나무처럼 자기 자신도 부러뜨리지 않고 방향만 바꿀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