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

기댈 곳은 결국 자기 자신 - 다스리기 가장 어려운 것에 관하여

자기를 아낄 줄 안다면 자기를 잘 지킬지니라. 지혜로운 이는 밤의 세 때 가운데 한 때만이라도 깨어 있어야 하느니라.

Attānañce piyaṁ jaññā, rakkheyya naṁ surakkhitaṁ; Tiṇṇaṁ aññataraṁ yāmaṁ, paṭijaggeyya paṇḍito.

법구경 Dhammapada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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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품은 자기를 아낀다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아끼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낀다면 그에 걸맞게 대하라고 합니다. 야마(yāma)는 밤을 셋으로 나눈 시간 단위입니다. 저녁, 한밤, 새벽입니다. 셋 다 깨어 있으라고 하지 않고 하나만이라도 하라고 한 점이 눈에 띕니다. 요구를 낮춰 잡은 것입니다. 빠띳작게이야(paṭijaggeyya)는 '깨어 지킨다, 돌본다'는 뜻으로, 병자를 간호할 때도 쓰는 말입니다. 자기를 지키는 일을 돌보는 일로 그린 셈입니다.

묵상

자신을 아낀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가장 함부로 대하고 있지는 않나요? 오늘 나를 돌보는 일 하나를 한다면 무엇일까요?

먼저 자기를 마땅한 자리에 세우고, 그런 뒤에 남을 가르칠지니라. 지혜로운 이는 그리하여 더럽혀지지 않느니라.

Attānameva paṭhamaṁ, patirūpe nivesaye; Athaññamanusāseyya, na kilisseyya paṇḍito.

법구경 Dhammapada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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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타망(paṭhamaṁ)은 '먼저'입니다. 순서를 못박은 게송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남을 가르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순서만 정해 줍니다. 뒷줄의 나 낄릿세이야(na kilisseyya)는 '더럽혀지지 않는다'는 뜻인데, 무엇에 더럽혀진다는 것일까요. 자기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남에게 말하는 자리에 서면 그 자리 자체가 사람을 물들입니다. 말과 삶이 어긋난 채 오래 말하다 보면 어긋남에 무뎌집니다. 그 무뎌짐을 더럽혀짐이라 부른 것으로 읽힙니다.

묵상

남에게 해 준 조언 가운데 나 스스로는 지키지 않는 것이 있나요? 그것을 먼저 해 보면 조언이 달라질까요?

남을 가르치는 그대로 자기에게도 행할지니라. 스스로 잘 다스려진 이라야 남을 다스릴 수 있나니, 자기야말로 다스리기 가장 어려우니라.

Attānañce tathā kayirā, yathāññamanusāsati; Sudanto vata dametha, attā hi kira duddamo.

법구경 Dhammapada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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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게송을 한 걸음 더 밀고 갑니다. 순서만이 아니라 같은 기준을 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두 개의 자를 씁니다. 남에게는 엄한 자를, 자기에게는 느슨한 자를 댑니다. 둡다모(duddama)는 '길들이기 어려운'이라는 뜻으로, 6품과 10품에서 나온 말 길들이기와 같은 뿌리입니다. 마지막 줄에 끼라(kira)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렇다고들 한다'는 뜻의 가벼운 말입니다. 단정하지 않고 슬쩍 흘리듯 말한 이 어조가 오히려 실감납니다. 해 본 사람은 다 안다는 투입니다.

묵상

남에게 대는 자와 나에게 대는 자가 같은가요? 어느 쪽이 더 엄한지 솔직하게 재 보면 어떨까요?

자기야말로 자기의 의지처이니 다른 누가 의지처가 되겠느냐. 잘 다스려진 자기로써만 얻기 어려운 그 의지처를 얻느니라.

Attā hi attano nātho, ko hi nātho paro siyā; Attanā hi sudantena, nāthaṁ labhati dullabhaṁ.

법구경 Dhammapada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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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나토(nātho)는 '지켜 주는 이, 기댈 곳'입니다. 밖에서 기댈 곳을 찾지 말라는 말인데, 여기서 오해하기 쉬운 대목이 있습니다. 혼자 다 해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뒷줄이 조건을 답니다. 잘 다스려진 자기라야 의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스려지지 않은 자기는 오히려 가장 위험한 것이라고 3품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명제를 지우고 남을 이롭게 함과 소원 성취로 바꾸었습니다. 밖에서 찾지 말라는 말이 밖으로 향하는 말이 된 셈입니다.

묵상

누군가 나를 구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나요? 그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무엇을 놓치게 될까요?

자기가 지은 나쁜 일은 자기에게서 나고 자기에게서 생겨나, 금강석이 무른 돌을 부수듯 어리석은 이를 짓이기느니라.

Attanā hi kataṁ pāpaṁ, Attajaṁ attasambhavaṁ; Abhimatthati dummedhaṁ, Vajiraṁvasmamayaṁ maṇiṁ.

법구경 Dhammapada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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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따장 앗따삼바왕(attajaṁ attasambhavaṁ)은 '자기에게서 나고 자기에게서 생긴'이라는 뜻입니다. 같은 말을 두 번 겹쳐 출처를 못박습니다. 비유가 매섭습니다. 금강석은 가장 단단한 돌이라 다른 보석을 갈고 부수는 데 씁니다. 그런데 그 금강석도 원래 땅에서 나온 것입니다. 나쁜 일이 나를 부수는 도구가 되는데 그 도구를 내가 만들었다는 그림입니다. 이 품에서 자기를 다루는 이야기가 계속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기댈 곳도 나이고 나를 부수는 것도 나입니다.

묵상

지금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 가운데 내가 만든 몫이 있나요? 그 몫만이라도 내가 손댈 수 있지 않을까요?

덩굴이 살라 나무를 뒤덮듯 무너진 행실이 사람을 뒤덮으면, 원수가 그에게 바라는 바로 그 일을 스스로 자기에게 하느니라.

Yassa accantadussilyaṁ, māluvā sālamivotthataṁ; Karoti so tathattānaṁ, yathā naṁ icchatī diso.

법구경 Dhammapada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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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루와(māluvā) 덩굴은 큰 나무를 타고 올라가 결국 그 나무를 죽입니다. 처음에는 가느다란 줄기 하나입니다. 나무는 그것을 막을 수 있었을 때 막지 않았고,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뒤덮여 있습니다. 이 게송의 매듭은 마지막 줄입니다. 원수가 바라는 바로 그것을 스스로 자기에게 한다는 것입니다. 남이 해칠 필요가 없다는 뒤틀린 그림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덩굴 비유만 남기고 이 대목을 평범한 서술로 눌러 버렸습니다. 이 게송의 힘이 사라진 셈입니다.

묵상

누군가 나를 무너뜨리려 한다면 무엇을 하게 만들까요? 지금 내가 그 일을 스스로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면 어떨까요?

좋지 않은 일, 자기에게 해로운 일은 하기 쉬우나, 이롭고 좋은 일은 하기가 가장 어려우니라.

Sukarāni asādhūni, attano ahitāni ca; Yaṁ ve hitañca sādhuñca, taṁ ve paramadukkaraṁ.

법구경 Dhammapada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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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정직한 게송입니다. 수까라(sukara)는 '하기 쉬운'이고 둑까라(dukkara)는 '하기 어려운'입니다. 이 게송이 위로가 되는 까닭은 어렵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이 잘 안 되는 것이 내 의지가 약해서만은 아닙니다. 원래 어렵습니다. 빠라마둑까라(paramadukkara)는 '가장 어려운'으로, 강조를 더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시작하는 것과 모르고 시작하는 것은 다릅니다. 모르고 시작하면 몇 번 실패한 뒤 자기를 탓하며 그만둡니다.

묵상

좋은 습관을 들이려다 실패한 적이 있나요? 그것이 원래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면 몇 번 더 시도했을까요?

온전히 놓아버린 이들과 성인들, 올바르게 사는 이들의 가르침을 그릇된 생각에 기대어 헐뜯는 어리석은 이는, 제 죽음을 부르려 열매 맺는 대나무처럼 되느니라.

Yo sāsanaṁ arahataṁ, ariyānaṁ dhammajīvinaṁ; Paṭikkosati dummedho, diṭṭhiṁ nissāya pāpikaṁ; Phalāni kaṭṭhakasseva, attaghātāya phallati.

법구경 Dhammapada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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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는 평생 꽃을 피우지 않다가 딱 한 번 열매를 맺고 죽습니다. 열매를 맺는 일이 곧 제 끝입니다. 이 비유가 겨눈 것은 자멸의 구조입니다. 남이 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맺은 것 때문에 끝난다는 것입니다. 앞 게송의 덩굴과 이어지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딧팅 닛사야(diṭṭhiṁ nissāya)는 '견해에 기대어'라는 뜻입니다. 이 게송이 겨눈 것은 감정적인 반발이 아니라 그럴듯한 논리에 기대어 하는 헐뜯음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를 흔한 인과응보로 바꾸어 자멸의 구조가 사라졌습니다.

묵상

확신을 가지고 누군가를 깎아내린 적이 있나요? 그 확신이 어디에 기대고 있었는지 지금 보면 어떤가요?

자기가 지은 나쁜 일로 자기가 더러워지고, 자기가 짓지 않음으로써 자기가 깨끗해지느니라. 깨끗함과 더러움은 저마다의 것이니 누구도 남을 대신해 깨끗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Attanā hi kataṁ pāpaṁ, attanā saṅkilissati; Attanā akataṁ pāpaṁ, attanāva visujjhati; Suddhī asuddhi paccattaṁ, nāñño aññaṁ visodhaye.

법구경 Dhammapada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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빳짯땅(paccattaṁ)은 '각자에게 속한, 저마다의'라는 뜻입니다. 이 게송이 부정하는 것은 대신 씻어 주는 일입니다. 당시 인도에는 강물에 몸을 담그면 죄가 씻긴다는 믿음이 널리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다른 경에서 그렇다면 물고기가 가장 먼저 깨끗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게송이 무겁게 느껴진다면 그 무거움이 정확합니다. 아무도 대신해 주지 않는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같은 말이 뒤집으면 힘이 되기도 합니다. 아무도 나를 더럽힐 수 없다는 뜻도 되기 때문입니다.

묵상

누가 대신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일이 있나요? 그 일이 정말 대신 될 수 있는 종류인지 한번 가려 보면 어떨까요?

남의 이로움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 때문에 자기의 참된 이로움을 저버리지 말지니라. 자기에게 참으로 이로운 것을 알아 그 이로움에 힘쓸지니라.

Attadatthaṁ paratthena, bahunāpi na hāpaye; Attadatthamabhiññāya, sadatthapasuto siyā.

법구경 Dhammapada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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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의 마지막 게송이자 오해받기 가장 쉬운 게송입니다. 남을 돕지 말라는 말처럼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앗따닷타(attadattha)는 '자기의 참된 이로움'으로, 경전에서 이 말은 거의 언제나 깨달음을 가리킵니다. 이익을 챙기라는 말이 아니라 자기가 가야 할 길을 남을 돕는다는 이유로 미루지 말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남을 돌보느라 자기 것을 놓치는 일은 흔합니다. 그러다 지치면 결국 남도 돕지 못합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로 바꾸어 정반대에 가깝게 만들었습니다. 단호해서 오해받은 말이 부드럽게 다듬어진 셈입니다.

묵상

남을 챙기느라 미뤄 둔 나의 일이 있나요? 그것을 계속 미루면 결국 남도 챙기지 못하게 되지는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