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행실을 따르지 말고
마음을 놓은 채 살지 말지니라.
그릇된 생각을 따르지 말고
세상을 늘리는 이가 되지 말지니라.
Hīnaṁ dhammaṁ na seveyya, pamādena na saṁvase; Micchādiṭṭhiṁ na seveyya, na siyā lokavaḍḍhano.
법구경 Dhammapada 167 배경
마지막 줄의 로까왓다노(lokavaḍḍhano)가 이 게송의 열쇠입니다. '세상을 늘리는 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늘린다는 말이 낯선데, 옛 주석은 이것을 나고 죽음을 되풀이하게 만드는 일로 풉니다. 붙들 것을 늘리면 매일 것이 늘고, 매일 것이 늘면 되풀이가 길어진다는 셈입니다. 앞의 세 줄이 하지 말 것을 늘어놓고 마지막 줄이 그것들을 한마디로 묶습니다. 낮은 행실도, 마음 놓음도, 그릇된 생각도 결국 세상을 늘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품의 이름이 세상인 까닭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묵상
요즘 늘어난 것이 무엇인가요? 물건이든 관계든 걱정이든, 늘어난 만큼 매인 것도 늘지 않았나요?
일어나라, 마음을 놓지 말지니라.
가르침을 바르게 행할지니라.
가르침대로 사는 이는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편안히 잠드느니라.
Uttiṭṭhe nappamajjeyya, dhammaṁ sucaritaṁ care; Dhammacārī sukhaṁ seti, asmiṁ loke paramhi ca.
법구경 Dhammapada 168 배경
웃띳테(uttiṭṭhe)는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부처님이 고향에 돌아가 탁발하시던 일을 전합니다. 왕이 된 아버지가 왕자 출신이 밥을 빌러 다닌다며 부끄러워하자, 부처님이 이것이 우리 집안의 길이라 하시며 이 게송을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어나라는 말은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던 일을 하라는 뜻이 됩니다. 결과로 놓인 것이 다시 잠자리입니다. 6품에서도 그랬듯 낮에 무엇을 했는지가 밤에 드러납니다.
묵상
남의 눈이 신경 쓰여 미루고 있는 일이 있나요? 그 일이 부끄러운 일인지 아니면 남이 보기에 그럴 뿐인지 가려 보면 어떨까요?
가르침을 바르게 행하고 그릇되게 행하지 말지니라.
가르침대로 사는 이는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편안히 잠드느니라.
Dhammaṁ care sucaritaṁ, na naṁ duccaritaṁ care; Dhammacārī sukhaṁ seti, asmiṁ loke paramhi ca.
법구경 Dhammapada 169 배경
앞 게송의 짝으로 뒷줄이 똑같습니다. 앞머리만 바뀌어 일어나라는 말이 바르게 행하라는 말로 옮겨 갔습니다. 담마짜리(dhammacārī)는 '이치에 맞게 사는 이'입니다. 이 낱말이 두 게송에 되풀이되면서 무게가 실립니다. 눈여겨볼 것은 결과로 내건 것이 소박하다는 점입니다. 편안한 잠입니다. 큰 상이나 신통이 아닙니다. 이 소박함이 오히려 실감납니다.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는 밤에 누웠을 때 몸이 먼저 압니다.
묵상
오늘 하루를 마치고 누웠을 때 마음이 편안할 만한 일을 하나 했나요? 아직이라면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물거품을 보듯,
아지랑이를 보듯
세상을 바라보라.
그렇게 보는 이를
죽음의 왕도 보지 못하느니라.
Yathā pubbuḷakaṁ passe, yathā passe marīcikaṁ; Evaṁ lokaṁ avekkhantaṁ, maccurājā na passati.
법구경 Dhammapada 170 배경
이 게송의 무게는 마지막 줄에 있습니다. 세상을 물거품처럼 보는 것이 허무하다는 결론으로 가지 않고, 죽음의 왕이 그를 보지 못한다는 결과로 갑니다. 죽음이 붙잡을 자리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결론을 지우고 어찌 이를 즐기랴는 반문으로 끝맺었습니다. 그러면 결과를 말하던 게송이 한탄이 됩니다. 뿝불라까(pubbuḷaka)는 물 위에 잠깐 뜨는 거품이고 마리찌까(marīcika)는 아지랑이입니다. 둘 다 없는 것이 아니라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없다고 보라는 것과 잡히지 않는 줄 알고 보라는 것은 다릅니다.
묵상
잡으려 애쓰다 놓친 것이 있나요? 애초에 잡히지 않는 것이었다면, 그 애씀은 어디로 향할 수 있었을까요?
오라, 이 세상을 보라.
곱게 꾸민 왕의 수레와 같으니,
어리석은 이들은 거기에 빠져 허우적대나
아는 이들에게는 걸림이 없느니라.
Etha passathimaṁ lokaṁ, cittaṁ rājarathūpamaṁ; Yattha bālā visīdanti, natthi saṅgo vijānataṁ.
법구경 Dhammapada 171 배경
11품에서 왕의 수레는 낡아 가는 것의 본보기였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을 홀리는 것의 본보기로 나옵니다. 같은 물건을 두 각도에서 쓴 셈입니다. 위시단띠(visīdanti)는 '가라앉는다, 빠진다'는 뜻으로, 진창에 발이 빠지는 그림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아는 이들도 그 수레를 본다는 점입니다. 보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라, 보라고 먼저 말합니다. 보되 빠지지 않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세상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걸리지 않는 쪽을 이 품은 말하고 있습니다.
묵상
화려한 것을 볼 때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나요? 보는 것과 빠지는 것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요?
예전에 마음을 놓았더라도
뒤에 마음을 놓지 않는 이는,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이 세상을 밝히느니라.
Yo ca pubbe pamajjitvā, pacchā so nappamajjati; Somaṁ lokaṁ pabhāseti, abbhā muttova candimā.
법구경 Dhammapada 172 배경
이 게송과 다음 게송은 이 품에서 가장 따뜻한 자리입니다. 지난날이 어땠든 지금부터가 중요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구름을 벗어난 달이라는 비유가 정확합니다. 달은 구름에 가려 있는 동안에도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밝기가 줄어든 것도 아닙니다. 다만 가려져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구름이 걷히면 곧바로 밝습니다. 새로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밝던 것이 드러납니다. 사람도 그렇다는 말로 읽힙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가려져 있던 것이 드러납니다.
묵상
지난날 때문에 이미 늦었다고 여기고 있지는 않나요? 구름이 걷히는 데 필요한 시간은 생각보다 짧을지도 모릅니다.
지은 나쁜 일을
선함으로 덮는 이는,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이 세상을 밝히느니라.
Yassa pāpaṁ kataṁ kammaṁ, kusalena pidhīyati; Somaṁ lokaṁ pabhāseti, abbhā muttova candimā.
법구경 Dhammapada 173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앙굴리말라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그 손가락을 꿰어 목에 걸고 다녔습니다. 부처님을 만나 뒤바뀌었고 뒤에 온전히 놓아버린 이가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배경에 두고 읽으면 이 게송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지은 일이 없어졌다고 하지 않습니다. 삐디야띠(pidhīyati)는 '덮는다'는 뜻입니다. 지운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죽인 사람들이 살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뒤에 무엇을 하느냐가 남아 있었을 뿐입니다.
묵상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한 적이 있나요? 그것을 지울 수는 없어도 그 위에 무엇을 놓을지는 아직 정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은 눈이 멀어
밝히 보는 이가 드무니라.
그물을 벗어난 새처럼
좋은 곳으로 가는 이는 적으니라.
Andhabhūto ayaṁ loko, tanukettha vipassati; Sakuṇo jālamuttova, appo saggāya gacchati.
법구경 Dhammapada 174 배경
안다부또(andhabhūta)는 '눈먼 상태가 된'이라는 뜻입니다. 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보면서도 못 보는 상태입니다. 위빳사띠(vipassati)는 '꿰뚫어 본다'는 뜻으로, 이 낱말에서 위빠사나라는 수행 이름이 나왔습니다. 그물에 걸린 새의 비유가 이 품의 다른 게송들과 이어집니다. 새는 그물을 보지 못해서 걸립니다. 걸리고 나서야 그물이 있었음을 압니다. 6품에서 이쪽 기슭만 오가는 사람들을 말했던 것과 같은 셈입니다. 드물다고 하지만 없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묵상
보면서도 못 보고 지나친 것이 있을까요?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것 하나를 다시 들여다본다면 무엇을 고르시겠어요?
기러기는 해의 길을 따라 날고
신통을 지닌 이는 하늘을 가나니,
지혜로운 이들은
사람을 붙드는 힘과 그 무리를 이기고
이 세상을 벗어나느니라.
Haṁsādiccapathe yanti, ākāse yanti iddhiyā; Nīyanti dhīrā lokamhā, jetvā māraṁ savāhiniṁ.
법구경 Dhammapada 175 배경
세 가지 나아감이 나란히 놓입니다. 기러기는 하늘길을 따라가고, 신통을 지닌 이는 허공을 날고, 지혜로운 이는 세상을 벗어납니다. 앞의 둘은 눈에 보이는 이동이고 셋째만 다릅니다. 사와히닝(savāhiniṁ)은 '군대와 함께'라는 뜻으로, 마라가 거느린 무리를 가리킵니다. 다른 경에서 그 무리의 이름이 나오는데 욕망, 싫증, 배고픔, 목마름, 나른함, 두려움, 의심 같은 것들입니다. 밖에서 쳐들어오는 군대가 아니라 안에서 올라오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이 싸움터도 안에 있습니다.
묵상
요즘 자주 올라오는 것이 무엇인가요? 나른함인가요, 의심인가요, 아니면 두려움인가요?
진실 하나를 저버리고
거짓을 말하며,
다음 생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
저지르지 못할 나쁜 일은 없느니라.
Ekaṁ dhammaṁ atītassa, musāvādissa jantuno; Vitiṇṇaparalokassa, natthi pāpaṁ akāriyaṁ.
법구경 Dhammapada 176 배경
에깡 담망(ekaṁ dhammaṁ)은 '한 가지'입니다. 그 한 가지가 무엇인지 뒤에서 밝히는데 거짓말입니다. 왜 거짓말 하나를 그렇게 크게 놓았을까요. 거짓말은 다른 모든 잘못을 덮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하고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면 걸릴 것이 없어집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부처님을 무고한 여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위띤나빠랄로깟사(vitiṇṇaparalokassa)는 '다음 생을 던져 버린'이라는 뜻입니다. 나중을 셈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금 못 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묵상
작은 거짓말 하나가 다른 것들을 덮어 준 적이 있나요? 그 덮개가 사라지면 무엇이 드러날까요?
인색한 이들은 하늘에 이르지 못하고
어리석은 이들은 베풂을 기리지 않으나,
지혜로운 이는 베풂을 기뻐하나니
그로 말미암아
저 세상에서 즐거우니라.
Na ve kadariyā devalokaṁ vajanti, Bālā have nappasaṁsanti dānaṁ; Dhīro ca dānaṁ anumodamāno, Teneva so hoti sukhī parattha.
법구경 Dhammapada 177 배경
아누모다마노(anumodamāno)는 '함께 기뻐하는'이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베푸는 것만이 아니라 남이 베푸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가진 것이 적어 베풀 것이 없는 사람도 이것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까다리야(kadariya)는 '인색한'인데, 재물이 없는 것과 다릅니다. 있어도 내놓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그 반대편에 놓인 것이 남의 베풂에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니, 이 게송이 겨눈 것은 물건의 양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입니다.
묵상
남이 잘하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한 적이 언제인가요? 그때 마음이 무거웠나요, 가벼웠나요?
온 땅을 홀로 다스리는 것보다,
하늘에 나는 것보다,
온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보다,
수다원의 자리가
더 나으니라.
Pathabyā ekarajjena, saggassa gamanena vā; Sabbalokādhipaccena, sotāpattiphalaṁ varaṁ.
법구경 Dhammapada 178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입니다. 소따빳띠(sotāpatti)는 '흐름에 들어감'으로, 깨달음의 첫 단계인 수다원을 가리킵니다. 흐름이란 열반으로 흘러가는 물줄기를 뜻합니다. 한번 그 흐름에 들면 되돌아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게송이 견주는 것들이 대단합니다. 온 땅의 왕이 되는 것, 하늘에 나는 것, 온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바랄 수 있는 최대치를 늘어놓고 그보다 낫다고 합니다. 눈여겨볼 것은 깨달음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첫 단계와 견주었다는 점입니다. 첫걸음이 그 모든 것보다 낫다는 말입니다.
묵상
이루고 싶은 가장 큰 것이 무엇인가요? 그것을 다 이룬 뒤에도 남을 물음이 있다면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