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은 이

자취를 남기지 않는 이 - 무엇에 기댈 것인가를 묻는 열여덟 편

한번 이긴 것이 되돌려지지 않고 이 세상 누구도 그 승리에 닿지 못하나니, 끝없는 자리에 노닐며 자취조차 남기지 않는 그 깨달은 이를, 그대는 어떤 길로 이끌려 하느냐.

Yassa jitaṁ nāvajīyati, Jitaṁ yassa noyāti koci loke; Taṁ buddhamanantagocaraṁ, Apadaṁ kena padena nessatha.

법구경 Dhammapada 179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마라의 딸들이 부처님을 유혹하려 했던 일을 전합니다. 그러니 이 게송은 유혹하려는 쪽을 향한 반문입니다. 아빠당(apadaṁ)은 '발자국이 없는'이라는 뜻이고 빠데나(padena)는 '발자국으로, 길로'입니다. 자취가 없는 이를 어떤 자취로 뒤쫓겠느냐는 말놀이입니다. 7품에서 하늘을 나는 새의 길을 말했던 것과 같은 그림입니다. 유혹이 통하려면 붙들 데가 있어야 하는데 붙들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반문을 남을 이끈다는 긍정 서술로 바꾸어, 이끌 수 없다는 말이 이끈다는 말이 되었습니다.

묵상

누군가 나를 흔들려 할 때 붙잡히는 손잡이가 무엇인가요? 그 손잡이를 하나 줄인다면 무엇을 놓아야 할까요?

그물처럼 얽고 들러붙는 목마름이 없어 어디로도 끌려가지 않는 이, 끝없는 자리에 노닐며 자취조차 남기지 않는 그 깨달은 이를, 그대는 어떤 길로 이끌려 하느냐.

Yassa jālinī visattikā, Taṇhā natthi kuhiñci netave; Taṁ buddhamanantagocaraṁ, Apadaṁ kena padena nessatha.

법구경 Dhammapada 180

배경

앞 게송의 짝으로 뒤 두 줄이 똑같습니다. 앞머리가 승리에서 목마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잘리니(jālinī)는 '그물을 가진'이고 위삿띠까(visattikā)는 '들러붙는'입니다. 목마름을 그물과 끈끈이로 그린 것입니다. 그물은 걸리게 하고 끈끈이는 놓지 못하게 합니다. 네따웨(netave)는 '이끌려 가게'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디론가 끌려가는 것은 누가 끌어서가 아니라 안에 잡아당기는 것이 있어서라는 셈입니다. 목마름이 없으면 끌 손잡이가 없습니다.

묵상

요즘 나를 자꾸 어딘가로 끌고 가는 것이 있나요? 그 힘은 밖에서 오나요, 안에서 오나요?

깊이 잠겨 보기에 힘쓰는 지혜로운 이들은 벗어남과 고요함을 기뻐하나니, 바르게 깨달아 늘 깨어 있는 그들을 신들조차 부러워하느니라.

Ye jhānapasutā dhīrā, nekkhammūpasame ratā; Devāpi tesaṁ pihayanti, sambuddhānaṁ satīmataṁ.

법구경 Dhammapada 181

배경

넥캄마(nekkhamma)는 '벗어남, 내려놓음'입니다. 흔히 출가로 옮기지만 본래는 감각의 즐거움에서 벗어난 상태를 가리킵니다. 눈여겨볼 것은 벗어남과 고요함을 즐긴다고 한 점입니다. 참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7품에서도 신들이 부러워한다는 표현이 나왔는데, 그 셈법이 여기서도 같습니다. 신들은 즐거움을 가졌지만 벗어남은 갖지 못했습니다. 가진 것으로 값을 매기면 신들이 위인데, 놓은 것으로 값을 매기면 순서가 뒤집힙니다.

묵상

무언가를 내려놓고 나서 오히려 편해진 적이 있나요? 그때 그 편안함은 참는 데서 온 것이었나요, 놓은 데서 온 것이었나요?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죽어야 할 몸으로 살아가기 힘겨우며, 참된 가르침을 듣기 어렵고 깨달은 이가 세상에 나기도 어려우니라.

Kiccho manussapaṭilābho, kicchaṁ maccāna jīvitaṁ; Kicchaṁ saddhammassavanaṁ, kiccho buddhānamuppādo.

법구경 Dhammapada 182

배경

낏초(kiccho)라는 낱말이 네 번 되풀이됩니다. '어렵다, 힘겹다'는 뜻입니다. 네 가지가 다 어렵다고 하는데, 이 게송의 뜻은 절망이 아니라 값입니다. 어려운 일이 지금 다 갖추어져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고, 살아 있고, 가르침을 들을 수 있고, 그 가르침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네 가지가 동시에 맞아떨어지는 일이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게송은 지금이 드문 때라는 말이 됩니다. 무엇을 미루기에는 어렵게 얻은 조건이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묵상

지금 내가 가진 조건 가운데 당연하게 여겨 온 것이 있나요? 그것이 드문 일이라면 오늘 무엇을 하시겠어요?

나쁜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좋은 것을 갖추며, 제 마음을 맑히는 것, 이것이 깨달은 이들의 가르침이니라.

Sabbapāpassa akaraṇaṁ, kusalassa upasampadā; Sacittapariyodapanaṁ, etaṁ buddhāna sāsanaṁ.

법구경 Dhammapada 183 부처 품 (Buddhavagga)

배경

옛부터 깨달은 이들이 공통으로 전한 가르침으로 꼽혀 온 게송입니다. 세 마디가 전부입니다.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좋은 것을 갖추고, 마음을 맑힙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마음을 맑히는 일이 맨 뒤에 옵니다. 앞의 두 가지가 되지 않은 채로 마음만 다스리려 하면 잘 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빠리요다빠나(pariyodapana)는 옷을 빨아 희게 하듯 씻어 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6품에서 나온 낱말과 같습니다. 이 짧은 세 줄에 불교 전체가 들어 있다고들 말합니다.

묵상

이 세 가지 가운데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어느 것인가요? 순서를 건너뛰고 마지막부터 하려 하고 있지는 않나요?

참고 견딤이 가장 높은 닦음이요 열반이 가장 높다고 깨달은 이들은 말하느니라. 남을 해치는 이는 출가한 이가 아니며 남을 괴롭히면서 애쓰는 이가 되지는 못하느니라.

Khantī paramaṁ tapo titikkhā, Nibbānaṁ paramaṁ vadanti buddhā; Na hi pabbajito parūpaghātī, Na samaṇo hoti paraṁ viheṭhayanto.

법구경 Dhammapada 184

배경

따뽀(tapo)는 몸을 태우듯 하는 고행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 수행자들이 가장 높이 치던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이 게송은 그 자리에 칸띠(khantī), 곧 참고 견딤을 놓습니다. 굶고 태우는 것보다 견디는 것이 높다는 것입니다. 뒷줄이 그 뜻을 못박습니다. 아무리 고행을 해도 남을 해치면 수행자가 아닙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 게송이 수행의 척도를 자기 몸이 아니라 남을 대하는 태도에 둔 점입니다. 얼마나 힘들게 하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힘들게 하지 않느냐입니다.

묵상

무언가를 열심히 하느라 주위 사람을 힘들게 한 적이 있나요? 그 열심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돌아보면 어떨까요?

헐뜯지 않고 해치지 않으며 지켜야 할 조목 안에서 스스로를 다잡고, 먹는 데 알맞음을 알고 한적한 자리에 머물며, 마음을 가다듬는 데 힘쓰는 것, 이것이 깨달은 이들의 가르침이니라.

Anūpavādo anūpaghāto, Pātimokkhe ca saṁvaro; Mattaññutā ca bhattasmiṁ, Pantañca sayanāsanaṁ; Adhicitte ca āyogo, Etaṁ buddhāna sāsanaṁ.

법구경 Dhammapada 185

배경

183게송과 같은 맺음말로 끝납니다. 앞에서 세 마디로 요약했던 것을 여기서 다섯 가지로 풀어 놓은 셈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첫머리에 놓인 두 가지입니다. 헐뜯지 않는 것과 해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을 가다듬는 일보다 앞에 놓았습니다. 맛딴뉴따(mattaññutā)는 '알맞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 낱말이 먹는 일에 쓰인 것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1품에서도 먹는 일이 수행 이야기에 나란히 놓였습니다. 매일 하는 일에서 절제가 드러난다는 시선이 되풀이됩니다.

묵상

다섯 가지 가운데 가장 지키기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이 어려운 까닭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돈이 비처럼 쏟아진다 해도 욕망에는 물릴 때가 없느니라. 욕망이란 단맛은 적고 괴로움은 크다는 것을 지혜로운 이는 그렇게 아느니라.

Na kahāpaṇavassena, titti kāmesu vijjati; Appassādā dukhā kāmā, iti viññāya paṇḍito.

법구경 Dhammapada 186

배경

까하빠나(kahāpaṇa)는 당시 쓰던 돈의 이름입니다. 돈이 비처럼 쏟아지는 그림은 바랄 수 있는 최대치를 그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띳띠(titti), 곧 물림은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압빳사다(appassāda)는 '단맛이 적은'입니다. 없다고 하지 않고 적다고 한 점이 정확합니다. 즐거움이 아예 없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실제로 달기는 답니다. 다만 그 단맛에 견주어 뒤따르는 괴로움이 크다는 셈입니다. 부정이 아니라 저울질입니다.

묵상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을 때 그 기쁨은 얼마나 갔나요? 그리고 그다음에 무엇이 왔나요?

그러기에 바르게 깨달은 이의 제자는 하늘의 즐거움에서도 기쁨을 찾지 않나니, 목마름이 다함을 기뻐하는 이가 되느니라.

Api dibbesu kāmesu, ratiṁ so nādhigacchati; Taṇhakkhayarato hoti, sammāsambuddhasāvako.

법구경 Dhammapada 187

배경

앞 게송의 결론입니다. 땅의 즐거움만이 아니라 하늘의 즐거움까지 든 것은 정도의 문제가 아님을 못박기 위해서입니다. 더 좋은 즐거움을 찾으면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딴학카야라또(taṇhakkhayarato)는 '목마름이 다함을 기뻐하는'이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이 중요합니다. 즐거움을 포기하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 즐거움을 찾은 상태입니다. 목마름이 줄어드는 그 자체가 기쁨이 된다는 말입니다. 갈증이 심할수록 물 한 모금이 달지만, 갈증이 가시는 것은 다른 종류의 편안함입니다.

묵상

무언가를 갖고 싶은 마음이 옅어졌을 때 아쉬웠나요, 아니면 홀가분했나요?

두려움에 쫓긴 사람들은 산으로 숲으로 의지할 곳을 찾아가고, 동산으로 나무로 탑으로 찾아가느니라. 그러나 그것은 평안한 의지처가 아니요 가장 나은 의지처도 아니니, 그런 것에 의지해서는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느니라.

Bahuṁ ve saraṇaṁ yanti, pabbatāni vanāni ca; Ārāmarukkhacetyāni, manussā bhayatajjitā. Netaṁ kho saraṇaṁ khemaṁ, netaṁ saraṇamuttamaṁ; Netaṁ saraṇamāgamma, sabbadukkhā pamuccati.

법구경 Dhammapada 188-189

배경

두 게송이 한 문장으로 이어져 함께 읽어야 합니다. 바야땃지따(bhayatajjita)는 '두려움에 쫓긴'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무언가에 의지하려 드는 까닭을 두려움으로 짚었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그 마음을 나무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두려운 것이 잘못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렇게 찾아간 곳이 안전한 곳이 아니라고 말할 뿐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나무 신과 사당과 제사로 바꾸었는데, 그러면 장소를 말하던 것이 우상 숭배를 나무라는 말이 됩니다. 빠알리가 든 것은 산과 숲과 나무 같은 장소들입니다.

묵상

두려울 때 어디로 가나요? 그곳이 정말 나를 안전하게 해 주는지 한 번쯤 물어본 적 있나요?

깨달은 이와 그 가르침과 그 무리를 의지처로 삼는다면, 바른 지혜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보게 되나니, 괴로움과 괴로움이 일어나는 까닭과 괴로움을 넘어섬과, 괴로움을 가라앉히는 여덟 갈래 길이니라. 이것이 평안한 의지처요 가장 나은 의지처이니, 이것에 의지하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느니라.

Yo ca buddhañca dhammañca, saṅghañca saraṇaṁ gato; Cattāri ariyasaccāni, sammappaññāya passati. Dukkhaṁ dukkhasamuppādaṁ, dukkhassa ca atikkamaṁ; Ariyaṁ caṭṭhaṅgikaṁ maggaṁ, dukkhūpasamagāminaṁ. Etaṁ kho saraṇaṁ khemaṁ, etaṁ saraṇamuttamaṁ; Etaṁ saraṇamāgamma, sabbadukkhā pamuccati.

법구경 Dhammapada 190-192

배경

세 게송이 한 흐름이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앞의 두 게송에서 안전하지 않은 의지처를 말했으니 여기서 안전한 의지처를 내놓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뜻밖입니다. 깨달은 이와 가르침과 그 무리에 의지한다고 해 놓고, 곧바로 네 가지 진리를 본다고 잇습니다. 기대는 일이 아니라 보는 일로 이어진 것입니다. 사라낭 가또(saraṇaṁ gato)는 '의지처로 삼아 간다'는 뜻인데, 여기서 의지는 숨는 것이 아니라 그 길로 들어서는 것에 가깝습니다. 두려워서 찾아가 숨는 곳이 아니라 두려움의 뿌리를 보게 하는 곳입니다.

묵상

기대는 것과 배우는 것은 다릅니다. 지금 내가 기대고 있는 것은 나를 숨겨 주나요, 아니면 보게 해 주나요?

뛰어난 사람은 드물어 아무 데서나 나지 않나니, 그런 지혜로운 이가 나는 곳은 즐거움 속에 번성하느니라.

Dullabho purisājañño, na so sabbattha jāyati; Yattha so jāyati dhīro, taṁ kulaṁ sukhamedhati.

법구경 Dhammapada 193

배경

뿌리사잔뇨(purisājañña)는 좋은 혈통의 말을 가리키는 말에서 왔습니다. 뛰어난 사람을 명마에 견준 셈입니다. 이 게송이 태생을 말하는 것으로 읽히기 쉬운데, 26품 전체가 태생이 아니라 행이 사람을 만든다고 말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읽기 어렵습니다. 꿀라(kula)는 집안이자 터전입니다. 한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가 그 자리 전체를 바꾼다는 말로 읽는 편이 이 품의 흐름에 맞습니다. 7품에서 온전히 놓아버린 이가 머무는 곳이 아름다운 땅이라 했던 것과 이어집니다.

묵상

한 사람이 있어서 분위기가 달라진 자리를 겪어 본 적 있나요? 그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깨달은 이가 세상에 나는 것도 즐거움이요 참된 가르침을 펴는 것도 즐거움이며, 무리가 화합하는 것도 즐거움이요 화합한 이들이 함께 힘씀도 즐거움이니라.

Sukho buddhānamuppādo, sukhā saddhammadesanā; Sukhā saṅghassa sāmaggī, samaggānaṁ tapo sukho.

법구경 Dhammapada 194

배경

수코(sukho)라는 낱말이 네 번 되풀이됩니다.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이 품에서 앞서 즐거움을 조심하라고 여러 번 말했는데, 여기서는 즐거움을 네 번이나 부릅니다. 어떤 즐거움이냐가 다릅니다. 앞에서 경계한 것은 감각의 즐거움이고 여기 나오는 것은 함께 있음에서 오는 즐거움입니다. 사맛기(sāmaggī)는 '화합'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화합 자체를 즐거움으로 놓고, 그다음에 화합한 이들이 함께 힘쓰는 것을 또 하나의 즐거움으로 놓은 점입니다. 사이좋게 지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함께 나아가는 것까지 갑니다.

묵상

함께 무언가를 해 본 경험이 있나요? 그때의 즐거움이 혼자 이룬 것과 어떻게 달랐나요?

공경받아 마땅한 이를 공경하는 이가 있나니, 깨달은 이든 그 제자든 부풀린 생각을 넘어서고 슬픔과 탄식을 건너간 이, 고요에 이르러 어디에도 두려움이 없는 그런 이를 공경하는 사람이 쌓는 좋음은, 누구도 이만큼이라고 헤아리지 못하느니라.

Pūjārahe pūjayato, buddhe yadi va sāvake; Papañcasamatikkante, tiṇṇasokapariddave. Te tādise pūjayato, nibbute akutobhaye; Na sakkā puññaṁ saṅkhātuṁ, imettamapi kenaci.

법구경 Dhammapada 195-196

배경

품의 마지막이자 두 게송이 한 문장입니다. 빠빤짜(papañca)는 '부풀림'으로, 하나의 일에서 생각이 가지를 쳐 끝없이 뻗어 나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넘어섰다고 했습니다. 아꾸또바야(akutobhaya)는 '어느 쪽에서도 두려움이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앞의 188게송에서 사람들이 두려움에 쫓겨 의지처를 찾는다고 했는데, 여기서 두려움이 없는 이가 나옵니다. 품이 두려움에서 시작해 두려움 없음으로 끝나는 셈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깨달은 이만이 아니라 그 제자도 함께 든 점입니다.

묵상

두려움이 없어 보이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요? 그 사람에게서 무엇을 배우고 싶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