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갈래를 알아 괴로움을 끝내다

선악과 두 뿌리를 아는 성스러운 제자가 세 잠재 성향과 무명을 버려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벗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처럼 선하지 않은 것과 그 뿌리, 선한 것과 그 뿌리를 알면, 탐욕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반감의 잠재 성향을 물리치며 ‘나는 있다’는 견해와 자만의 잠재 성향을 뿌리 뽑습니다. 무명을 버리고 참된 앎을 일으켜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성스러운 제자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Yato kho, āvuso, ariyasāvako evaṁ akusalaṁ pajānāti, evaṁ akusalamūlaṁ pajānāti, evaṁ kusalaṁ pajānāti, evaṁ kusalamūlaṁ pajānāti, so sabbaso rāgānusayaṁ pahāya, paṭighānusayaṁ paṭivinodetvā, ‘asmī’ti diṭṭhimānānusayaṁ samūhanitvā, avijjaṁ pahāya vijjaṁ uppādetvā, diṭṭheva dhamme dukkhassantakaro hoti—ettāvatāpi kho, āvuso, ariyasāvako sammādiṭṭhi hoti, ujugatāssa diṭṭhi, dhamme aveccappasādena samannāgato, āgato imaṁ saddhamman”ti.

맛지마 니까야 MN 9 바른 견해경 (Sammādiṭṭhisutta)

배경

첫 묶음의 정의들을 안다는 조건은 구체적인 버림과 결과로 이어집니다. 탐욕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림, 반감의 잠재 성향을 물리침, “‘나는 있다’는 견해와 자만”의 잠재 성향을 뿌리 뽑음이 서로 다른 세 동작입니다. 이어 무명을 버리고 참된 앎을 일으키는 대칭과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낸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마지막에는 바른 견해의 네 겹 기준이 다시 확인됩니다. 단순히 목록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뿌리와 결과를 실제로 아는 데까지 바른 견해의 뜻이 이어집니다.

묵상

탐욕을 버림·반감을 물리침·“나는 있다”는 견해와 자만을 뿌리 뽑음이 다른 동사로 놓인 점이 보이나요? 자신의 성취를 판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세 표현 가운데 의미가 가장 분명하거나 가장 낯선 하나만 골라 느껴 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