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처럼 자양분과 그 일어남·소멸·소멸로 이끄는 길을 알면, 탐욕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반감의 잠재 성향을 물리치며 ‘나는 있다’는 견해와 자만의 잠재 성향을 뿌리 뽑습니다. 무명을 버리고 참된 앎을 일으켜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성스러운 제자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Yato kho, āvuso, ariyasāvako evaṁ āhāraṁ pajānāti, evaṁ āhārasamudayaṁ pajānāti, evaṁ āhāranirodhaṁ pajānāti, evaṁ āhāranirodhagāminiṁ paṭipadaṁ pajānāti, so sabbaso rāgānusayaṁ pahāya, paṭighānusayaṁ paṭivinodetvā, ‘asmī’ti diṭṭhimānānusayaṁ samūhanitvā, avijjaṁ pahāya vijjaṁ uppādetvā, diṭṭheva dhamme dukkhassantakaro hoti—ettāvatāpi kho, āvuso, ariyasāvako sammādiṭṭhi hoti, ujugatāssa diṭṭhi, dhamme aveccappasādena samannāgato, āgato imaṁ saddhamman”ti.
맛지마 니까야 MN 9 바른 견해경 (Sammādiṭṭhisutta)배경
자양분 묶음도 정의만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아는 조건과 해방의 결과를 연결합니다. 대상·일어남·소멸·길을 모두 아는 성스러운 제자는 탐욕의 잠재 성향을 버리고, 반감의 잠재 성향을 물리치며, “‘나는 있다’는 견해와 자만”의 잠재 성향을 뿌리 뽑습니다. 무명과 참된 앎의 반대 방향, 바로 이 삶에서 괴로움의 끝, 바른 견해의 네 기준도 첫 결론과 같은 순서로 온전히 반복됩니다. 반복은 각 주제를 아는 일이 같은 해방의 방향으로 수렴함을 보여 줍니다.
묵상
먹는 것과 접촉과 의도와 의식을 한 묶음으로 안다는 말이 괴로움의 끝과 연결되는 흐름에서 어느 부분이 가장 천천히 읽히나요? 자신의 앎을 시험할 필요는 없어요. 네 측면 가운데 지금 구별되는 하나만 확인해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