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것

사랑하는 만큼 두려워지는 까닭 - 슬픔이 어디서 오는지를 짚은 열두 편

해야 할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고 하지 않아도 될 일에 마음을 쏟으며, 뜻을 버리고 좋아하는 것만 붙잡으면, 뒷날 스스로 애쓴 이를 부러워하게 되느니라.

Ayoge yuñjamattānaṁ, yogasmiñca ayojayaṁ; Atthaṁ hitvā piyaggāhī, pihetattānuyoginaṁ.

법구경 Dhammapada 209

배경

이 게송의 매듭은 마지막 낱말 삐헤따(piheta), 곧 '부러워한다'입니다. 지금 편한 쪽을 고른 대가가 뒷날의 부러움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벌을 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중에 부러워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 셈이 실감납니다. 우리는 대개 벌을 받아서가 아니라 남을 보며 뒤늦게 아쉬워합니다. 삐약가히(piyaggāhī)는 '좋아하는 것만 붙잡는 이'입니다. 이 품의 이름인 삐야(piya)가 여기서 처음 나옵니다.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는 삶의 결말을 먼저 보여 준 뒤에 품이 시작되는 셈입니다.

묵상

지금 마음이 가는 일과 해야 할 일이 다르지 않나요? 다르다면 몇 년 뒤에 무엇을 부러워하게 될지 상상해 보세요.

사랑하는 것과도 미워하는 것과도 너무 가까이 얽히지 말지니, 사랑하는 것을 보지 못함도 괴로움이요 미워하는 것을 보는 것도 괴로움이니라.

Mā piyehi samāgañchi, appiyehi kudācanaṁ; Piyānaṁ adassanaṁ dukkhaṁ, appiyānañca dassanaṁ.

법구경 Dhammapada 210

배경

이 게송이 사랑하지 말라는 말로 읽히기 쉬워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사마간치(samāgañchi)는 '너무 얽혀 붙는다'는 뜻으로, 만남 자체가 아니라 떨어질 수 없게 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게송은 미워하는 것도 같은 자리에 놓습니다. 미워하는 데 마음을 쏟는 것도 얽히는 일입니다. 두 줄이 나란히 놓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랑과 미움은 반대말처럼 보이지만, 마음이 거기 붙들린다는 점에서는 같은 일입니다. 사랑을 끊으라는 말이 아니라 마음이 매이는 구조를 보라는 말로 읽는 편이 이 품의 흐름에 맞습니다.

묵상

요즘 가장 많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나요? 그것이 좋아서든 미워서든, 그 사람이 내 하루의 얼마를 차지하고 있나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것을 따로 만들지 말지니,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은 괴로우니라. 좋아함도 싫어함도 없는 이에게는 얽어매는 것이 없느니라.

Tasmā piyaṁ na kayirātha, piyāpāyo hi pāpako; Ganthā tesaṁ na vijjanti, yesaṁ natthi piyāppiyaṁ.

법구경 Dhammapada 211

배경

앞 게송의 결론입니다. 이 게송은 법구경에서 가장 오해받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으면 부처님이 다른 곳에서 하신 말씀과 어긋납니다. 부처님은 모든 존재를 향한 자애를 거듭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부정하는 것은 삐야압삐야(piyāppiya), 곧 좋아함과 싫어함으로 갈라 세우는 마음입니다. 어떤 것은 내 것이라 붙들고 어떤 것은 밀어내는 그 나눔입니다. 자애는 모두에게 고르게 향하지만 애착은 하나를 골라 붙듭니다. 간타(gantha)는 매듭입니다. 매듭은 고르게 향하는 마음에는 생기지 않습니다.

묵상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과 붙들려는 마음을 나눌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이 나에게서 멀어질 때 무엇이 남을지 그려 보면 어떨까요?

사랑하는 것에서 슬픔이 생기고 사랑하는 것에서 두려움이 생기나니, 사랑하는 것에서 벗어난 이에게는 슬픔이 없거늘 어찌 두려움이 있겠느냐.

Piyato jāyatī soko, piyato jāyatī bhayaṁ; Piyato vippamuttassa, natthi soko kuto bhayaṁ.

법구경 Dhammapada 212

배경

여기서부터 다섯 편이 같은 틀로 이어지며 낱말만 바뀝니다. 사랑, 애정, 즐김, 욕망, 목마름 순입니다. 뒤로 갈수록 붙드는 힘이 강해집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아들을 잃고 미쳐 다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슬픔에 빠진 사람 앞에서 하신 것입니다. 슬퍼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슬픔이 어디서 오는지 알려 주신 것입니다. 슬픔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있어서 옵니다. 그것을 아는 것과 슬픔을 참는 것은 다릅니다.

묵상

누군가를 잃고 슬펐던 적이 있나요? 그 슬픔의 크기가 곧 그 사랑의 크기였다는 것을 지금은 알 수 있을까요?

애정에서 슬픔이 생기고 애정에서 두려움이 생기나니, 애정에서 벗어난 이에게는 슬픔이 없거늘 어찌 두려움이 있겠느냐.

Pemato jāyatī soko, pemato jāyatī bhayaṁ; Pemato vippamuttassa, natthi soko kuto bhayaṁ.

법구경 Dhammapada 213

배경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위사카라는 여성이 손녀를 잃고 울며 찾아온 일을 전합니다. 부처님이 사왓티에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물으시고, 그만큼의 손자를 갖고 싶으냐 물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하자, 그만큼 사람이 죽으니 그만큼 울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뻬마(pema)는 따뜻한 정을 뜻하는 말로, 앞 게송의 삐야보다 부드러운 낱말입니다. 이 이야기의 결이 중요합니다. 부처님은 위사카에게 울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우는지를 스스로 보게 하셨습니다.

묵상

슬픔을 그만두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마음이 드나요? 그만두라는 말보다 왜 슬픈지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즐김에서 슬픔이 생기고 즐김에서 두려움이 생기나니, 즐김에서 벗어난 이에게는 슬픔이 없거늘 어찌 두려움이 있겠느냐.

Ratiyā jāyatī soko, ratiyā jāyatī bhayaṁ; Ratiyā vippamuttassa, natthi soko kuto bhayaṁ.

법구경 Dhammapada 214

배경

라띠(rati)는 '즐김, 재미'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일이나 상태에서 오는 즐거움을 가리킵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나들이하던 귀족 청년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날 그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고 합니다. 즐거운 자리에서 다툼이 나는 일이 흔한데, 그 까닭이 이 게송에 있습니다. 즐거움이 커질수록 그것을 지키려는 마음이 생기고, 지키려는 마음에서 다툼이 납니다. 즐기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즐김이 어떻게 두려움으로 바뀌는지를 보라는 말입니다.

묵상

좋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이것이 끝날까 봐 불안했던 적이 있나요? 그 불안은 즐거움의 어느 자리에서 왔을까요?

욕망에서 슬픔이 생기고 욕망에서 두려움이 생기나니, 욕망에서 벗어난 이에게는 슬픔이 없거늘 어찌 두려움이 있겠느냐.

Kāmato jāyatī soko, kāmato jāyatī bhayaṁ; Kāmato vippamuttassa, natthi soko kuto bhayaṁ.

법구경 Dhammapada 215

배경

까마(kāma)는 감각의 즐거움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앞의 셋보다 붙드는 힘이 셉니다. 이 연작이 낱말을 바꿔 가며 되풀이하는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슬픔과 두려움의 뿌리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이름은 달라도 구조는 같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붙들면 잃을까 두렵고, 잃으면 슬픕니다. 위빠뭇따(vippamutta)는 '온전히 풀려난'이라는 뜻입니다. 억지로 끊는 것이 아니라 매듭이 풀린 상태입니다. 매듭은 잘라도 되고 풀어도 되는데, 이 낱말은 풀리는 쪽을 가리킵니다.

묵상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나요? 그것을 못 얻을까 두려운 마음이 함께 있다면, 둘은 같은 뿌리일지도 모릅니다.

목마름에서 슬픔이 생기고 목마름에서 두려움이 생기나니, 목마름에서 벗어난 이에게는 슬픔이 없거늘 어찌 두려움이 있겠느냐.

Taṇhāya jāyatī soko, taṇhāya jāyatī bhayaṁ; Taṇhāya vippamuttassa, natthi soko kuto bhayaṁ.

법구경 Dhammapada 216

배경

연작의 마지막입니다. 딴하(taṇhā)는 '목마름'으로, 이 책에서 괴로움의 뿌리로 거듭 지목되는 낱말입니다. 24품 전체가 이 낱말에 바쳐져 있습니다. 다섯 편을 차례로 읽으면 사랑에서 시작해 목마름으로 끝나는 흐름이 보입니다. 가장 부드러운 정에서 가장 마르지 않는 갈증까지 이어진 셈입니다. 그리고 다섯 편 모두 뒷줄이 똑같습니다. 벗어난 이에게는 슬픔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되풀이가 이 품의 방식입니다. 뿌리가 여럿이어도 벗어나는 자리는 하나입니다.

묵상

다섯 가지 가운데 지금 나를 가장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름을 붙여 보는 것만으로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됨됨이와 바른 봄을 갖추고 이치에 서서 진실을 아는 이, 제 할 일을 하는 그 사람을 사람들이 사랑하느니라.

Sīladassanasampannaṁ, dhammaṭṭhaṁ saccavedinaṁ; Attano kamma kubbānaṁ, taṁ jano kurute piyaṁ.

법구경 Dhammapada 217

배경

이 품에서 방향이 바뀌는 자리입니다. 앞에서 사랑이 슬픔의 뿌리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사랑받는 사람이 나옵니다. 삐양 꾸루떼(piyaṁ kurute)는 '사랑스럽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그가 사랑받으려고 한 일이 하나도 없다는 점입니다. 됨됨이를 갖추고, 바르게 보고, 원칙에 서고,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원문의 마지막 구절은 '제가 할 일을 하는'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얻으려 할 때가 아니라 제 할 일을 할 때 따라온다는 순서입니다.

묵상

사랑받으려고 애쓰고 있지는 않나요? 그 애씀 대신 제 할 일을 하는 데 시간을 쓴다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형언할 수 없는 것을 향한 열망이 마음에 사무치고, 감각의 즐거움에 매이지 않은 이를 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이라 부르느니라.

Chandajāto anakkhāte, Manasā ca phuṭo siyā; Kāmesu ca appaṭibaddhacitto, Uddhaṁsototi vuccati.

법구경 Dhammapada 218

배경

아낙카떼(anakkhāte)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것'으로, 열반을 가리킵니다. 웃당소또(uddhaṁsoto)는 '위로 흐르는 이'입니다. 물은 아래로 흐르는데 이 사람은 위로 흐른다고 했습니다. 자연스러운 방향의 반대로 간다는 그림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첫 낱말 찬다(chanda)입니다. 이 낱말은 욕망이라는 뜻도 되지만 여기서는 좋은 쪽으로 쓰였습니다. 바라는 마음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바라느냐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이 품이 사랑과 애착을 다루다가 여기서 다른 종류의 끌림을 내놓은 셈입니다.

묵상

설명하기 어렵지만 끌리는 무언가가 있나요? 그 끌림이 나를 어느 방향으로 데려가고 있나요?

오래 떠나 있던 사람이 멀리서 무사히 돌아오면, 친족과 벗들이 그의 돌아옴을 반기듯, 좋은 일을 한 이가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에 이르면, 그가 지은 좋은 일들이 반가운 이를 맞이하는 가족처럼 그를 맞이하느니라.

Cirappavāsiṁ purisaṁ, dūrato sotthimāgataṁ; Ñātimittā suhajjā ca, abhinandanti āgataṁ. Tatheva katapuññampi, asmā lokā paraṁ gataṁ; Puññāni paṭigaṇhanti, piyaṁ ñātīva āgataṁ.

법구경 Dhammapada 219-220

배경

두 게송이 한 문장으로 이어져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앞이 비유이고 뒤가 그 뜻입니다. 이 품이 사랑에서 오는 슬픔을 길게 다룬 뒤 마지막에 이 그림을 놓은 것이 뜻깊습니다. 앞에서는 헤어짐이 괴로움이라 했는데, 여기서는 마중 나오는 이들이 나옵니다. 빠띠간한띠(paṭigaṇhanti)는 '맞이한다, 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언젠가 헤어지지만 지은 일은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 슬픔을 다룬 품의 끝에 놓기에 알맞은 위로입니다.

묵상

먼 길을 돌아왔을 때 누군가 기다려 준 적이 있나요? 그 마음을 떠올리며, 오늘 내가 남길 수 있는 좋은 일 하나는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