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습니다, 벗이여.” 비구들은 … 다시 물었습니다. “벗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바른 견해를 지니는 또 다른 방법도 …” “있습니다, 벗들이여. 벗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존재와 그 일어남·소멸·소멸로 이끄는 길을 알면, 벗들이여, 이만큼으로도 그는 바른 견해를 지니고 견해가 곧으며,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여 참된 가르침에 이릅니다.”
“Sādhāvuso”ti kho …pe… apucchuṁ—siyā panāvuso …pe… “siyā, āvuso. Yato kho, āvuso, ariyasāvako bhavañca pajānāti, bhavasamudayañca pajānāti, bhavanirodhañca pajānāti, bhavanirodhagāminiṁ paṭipadañca pajānāti—ettāvatāpi kho, āvuso, ariyasāvako sammādiṭṭhi hoti, ujugatāssa diṭṭhi, dhamme aveccappasādena samannāgato, āgato imaṁ saddhammaṁ.
맛지마 니까야 MN 9 바른 견해경 (Sammādiṭṭhisutta)배경
태어남의 결론 뒤 비구들은 바른 견해를 설명하는 또 다른 길을 묻고, 사리뿟따는 존재를 네 측면으로 아는 일이라고 답합니다. 질문에 놓인 두 공식 생략표 …pe…는 비구들의 기쁨과 동의, 그리고 바른 견해에 관한 네 기준을 앞의 온전한 문답과 같은 범위로 줄입니다. 답의 “있습니다”와 이어지는 선언은 생략하지 않았으며 모든 호격도 보존했습니다. 다음 설명은 존재를 감각적 욕망·물질·비물질의 세 영역에 따라 나누고, 집착을 그 일어남과 소멸의 조건으로 밝힙니다.
묵상
존재를 막연한 하나로 두지 않고 세 범주와 집착이라는 조건 아래 묻는 방식이 어떻게 들리나요? 세 범주를 자신의 경험에 맞춰 판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집착이 일어날 때 존재도 일어난다는 문장만 잠시 남겨 두어도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