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냄

치솟는 것을 멈추는 마부 - 비난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까지

성냄을 버리고 교만을 놓으며 모든 얽매임을 넘어설지니라. 이름과 모양에 매이지 않고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이에게는 괴로움이 따라붙지 않느니라.

Kodhaṁ jahe vippajaheyya mānaṁ, Saṁyojanaṁ sabbamatikkameyya; Taṁ nāmarūpasmimasajjamānaṁ, Akiñcanaṁ nānupatanti dukkhā.

법구경 Dhammapada 221

배경

성냄과 교만이 나란히 놓였습니다. 둘은 짝을 이룹니다. 화가 나는 자리를 들여다보면 대개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나(māna)는 재는 마음이고, 재는 마음이 있어야 억울함이 생깁니다. 나마루빠(nāmarūpa)는 '이름과 모양'으로,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것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름에 매인다는 것은 남이 나를 어떻게 부르느냐에 매인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그 매임이 없으면 화낼 자리도 줄어듭니다. 이 품의 첫머리에 이 게송이 놓인 까닭입니다.

묵상

화가 났던 순간을 떠올려 보세요. 그 밑에 '내가 이런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닌데'라는 마음이 있지 않았나요?

치솟는 성냄을 달아나는 수레 멈추듯 막는 이, 나는 그를 참된 마부라 부르나니, 남들은 고삐만 쥐고 있을 뿐이니라.

Yo ve uppatitaṁ kodhaṁ, rathaṁ bhantaṁva vāraye; Tamahaṁ sārathiṁ brūmi, rasmiggāho itaro jano.

법구경 Dhammapada 222

배경

비유가 정확합니다. 잘 가는 수레를 모는 것은 누구나 합니다. 마부의 실력은 수레가 달아날 때 드러납니다. 반땅(bhanta)은 '날뛰는, 통제를 잃은'이라는 뜻입니다. 라스믹가호(rasmiggāha)는 '고삐를 쥔 자'로, 마부처럼 보이지만 실은 잡고만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겉모습은 같은데 위기에서 갈립니다. 웁빠띠땅(uppatita)은 '치솟은'입니다. 화가 나지 않게 하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치솟은 것을 어떻게 하느냐를 말합니다. 화는 납니다. 그다음이 문제입니다.

묵상

화가 치솟았을 때 그것을 멈춰 본 적이 있나요? 그때 무엇이 도움이 되었는지 떠올려 두면 다음에 쓸 수 있습니다.

성내지 않음으로 성냄을 이기고 선함으로 악함을 이기며, 베풂으로 인색함을 이기고 진실로 거짓을 이길지니라.

Akkodhena jine kodhaṁ, asādhuṁ sādhunā jine; Jine kadariyaṁ dānena, saccenālikavādinaṁ.

법구경 Dhammapada 223

배경

네 쌍이 나란히 놓입니다. 짜임을 보면 모두 같은 방식입니다. 상대와 같은 것으로 맞서지 않습니다. 성냄에 성냄으로 맞서면 커지고, 거짓에 거짓으로 맞서면 둘 다 거짓이 됩니다. 이긴다는 말을 썼지만 이기는 방법이 상대를 꺾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내놓는 것입니다. 5품에서 원한은 원한으로 풀리지 않는다고 했던 셈법이 여기서 넷으로 늘어난 셈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지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기라고 합니다. 다만 다른 것으로 이기라고 합니다.

묵상

누군가 나에게 거칠게 굴 때 같은 방식으로 되갚고 싶어지나요? 다른 것을 내놓는다면 무엇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진실을 말하고 성내지 말며, 청하거든 적더라도 줄지니라. 이 세 가지로 신들의 곁에 이르느니라.

Saccaṁ bhaṇe na kujjheyya, dajjā appampi yācito; Etehi tīhi ṭhānehi, gacche devāna santike.

법구경 Dhammapada 224

배경

세 가지가 소박합니다. 거짓말하지 않기, 화내지 않기, 청하면 조금이라도 주기입니다. 대단한 수행이 아니라 하루에도 여러 번 마주치는 일들입니다. 압빰삐(appampi)는 '적더라도'라는 뜻입니다. 많이 주라고 하지 않고 적어도 주라고 한 점이 이 게송을 실천 가능하게 만듭니다. 내놓을 것이 적다는 이유로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셋으로 신들의 곁에 이른다고 했으니, 값진 것을 얻는 데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묵상

이 셋 가운데 오늘 지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셋 다 어렵다면 하나만 골라도 됩니다.

해치지 않는 지혜로운 이들, 늘 몸을 다스리는 이들은, 흔들리지 않는 자리로 나아가나니 그곳에 이르면 다시 슬퍼하지 않느니라.

Ahiṁsakā ye munayo, niccaṁ kāyena saṁvutā; Te yanti accutaṁ ṭhānaṁ, yattha gantvā na socare.

법구경 Dhammapada 225

배경

앗쭈땅 타낭(accutaṁ ṭhānaṁ)은 '무너지지 않는 자리'로, 열반을 가리킵니다. 한역 법구경의 한 판본은 이를 살렸지만 다른 판본은 하늘에 난다고 옮겼습니다. 다시 태어남을 끝내는 자리가 다시 태어나는 좋은 곳으로 바뀐 셈입니다. 아힘사까(ahiṁsaka)는 '해치지 않는 이'입니다. 이 낱말은 뒷날 인도에서 큰 뜻을 갖게 되는데, 부처님 당시에도 이미 수행의 근본으로 놓였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해치지 않음과 몸을 다스림이 나란히 놓인 점입니다. 마음만이 아니라 몸의 습관까지 함께 갑니다.

묵상

누구를 해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할까요? 말일까요, 손일까요, 아니면 무심함일까요?

늘 깨어 있어 밤낮으로 익히며, 열반을 향해 마음을 둔 이들은 번뇌가 사라지느니라.

Sadā jāgaramānānaṁ, ahorattānusikkhinaṁ; Nibbānaṁ adhimuttānaṁ, atthaṁ gacchanti āsavā.

법구경 Dhammapada 226

배경

아호랏따누식키(ahorattānusikkhin)는 '밤낮으로 익히는 이'입니다. 아누식카(anusikkhā)는 배워 익힌다는 뜻으로, 한 번의 결심이 아니라 되풀이해 몸에 붙이는 일을 가리킵니다. 아디뭇따(adhimutta)는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어진'이라는 뜻입니다. 억지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기우는 상태입니다. 앗탕 갓찬띠(atthaṁ gacchanti)는 '사라진다'는 뜻인데, 본래 해가 지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흘러드는 것들이 싸워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가 지듯 저문다는 그림입니다.

묵상

마음이 저절로 기우는 쪽이 어디인가요? 그 방향을 억지로 바꾸는 대신 조금씩 옮길 수 있다면 어디로 옮기시겠어요?

아뚤라여, 이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고 오늘만의 일이 아니니라. 잠자코 있는 이도 헐뜯고 말이 많은 이도 헐뜯으며 알맞게 말하는 이마저 헐뜯나니, 이 세상에 헐뜯기지 않는 사람은 없느니라.

Porāṇametaṁ atula, netaṁ ajjatanāmiva; Nindanti tuṇhimāsīnaṁ, nindanti bahubhāṇinaṁ; Mitabhāṇimpi nindanti, natthi loke anindito.

법구경 Dhammapada 227

배경

아뚤라는 사람 이름입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그는 여러 스승을 찾아다녔는데 어디서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말이 없다고 불평하고, 말이 많다고 불평하고, 알맞게 말해도 불평했습니다. 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게송의 위로는 뜻밖의 자리에서 옵니다. 헐뜯기지 않는 방법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런 방법이 없다고 말해 줍니다. 무엇을 해도 누군가는 흠을 잡습니다. 그러니 흠잡히지 않으려는 노력 자체가 헛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오히려 편해집니다.

묵상

남에게 흠잡히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나요? 어떻게 해도 누군가는 말한다면, 그 애씀을 어디에 쓰시겠어요?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며 지금도 없느니라. 오로지 헐뜯기기만 하는 사람도, 오로지 칭찬만 받는 사람도.

Na cāhu na ca bhavissati, na cetarahi vijjati; Ekantaṁ nindito poso, ekantaṁ vā pasaṁsito.

법구경 Dhammapada 228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앞에서 헐뜯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했으니, 여기서는 그 반대편도 없다고 합니다. 오로지 칭찬만 받는 사람도 없습니다. 에깐땅(ekantaṁ)은 '전적으로, 오로지'입니다. 이 게송이 주는 위로가 양쪽입니다. 헐뜯김에 무너질 것도 없고 칭찬에 들뜰 것도 없습니다. 두 게송을 함께 읽으면 남의 평가라는 것이 원래 갈리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를 헐뜯고 기리는 동기 분석으로 바꾸었는데, 그러면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이야기가 되어 결이 달라집니다.

묵상

나를 좋게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동시에 있나요? 둘 다 있다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요?

지혜로운 이들이 날마다 살펴보고 칭찬하는 사람이 있나니, 흠 없이 사는 슬기로운 이, 됨됨이와 지혜를 함께 갖춘 이니라. 잠부 강의 금으로 만든 장신구 같은 그를 누가 헐뜯을 수 있겠느냐. 신들도 그를 기리고 하늘의 신마저 그를 기리느니라.

Yañce viññū pasaṁsanti, anuvicca suve suve; Acchiddavuttiṁ medhāviṁ, paññāsīlasamāhitaṁ. Nikkhaṁ jambonadasseva, ko taṁ ninditumarahati; Devāpi naṁ pasaṁsanti, brahmunāpi pasaṁsito.

법구경 Dhammapada 229-230

배경

두 게송이 한 문장으로 이어져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앞의 두 게송에서 남의 평가가 갈린다고 했는데, 여기서 하나의 예외를 놓습니다. 다만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아누윗짜 수웨 수웨(anuvicca suve suve)는 '날마다 살펴보고서'입니다. 한 번 보고 하는 칭찬이 아니라 오래 지켜본 뒤의 평가입니다. 그리고 칭찬하는 쪽도 윈뉴(viññū), 곧 알아볼 줄 아는 이여야 합니다. 잠부 강의 금은 당시 가장 좋은 금을 가리키던 말입니다. 두들겨 보아도 흠이 없는 물건이라는 그림입니다.

묵상

오래 지켜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요? 잠깐 본 사람의 평가와 그 평가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무겁게 느껴지나요?

몸이 들끓는 것을 지키고 몸을 잘 다스릴지니라. 몸으로 짓는 나쁜 행실을 버리고 몸으로 바르게 행할지니라.

Kāyappakopaṁ rakkheyya, kāyena saṁvuto siyā; Kāyaduccaritaṁ hitvā, kāyena sucaritaṁ care.

법구경 Dhammapada 231

배경

여기서부터 셋이 몸과 말과 마음을 차례로 다룹니다. 빠꼬빠(pakopa)는 '들끓어 튀어 오름'이라는 뜻입니다. 성냄만이 아니라 안에서 솟구치는 것 일반을 가리킵니다. 한역 법구경은 세 게송 모두에 성냄을 막기 위해서라는 말을 붙여 성냄 하나로 묶었는데, 빠알리는 더 넓습니다. 몸이 먼저 나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어려울 때 몸부터 손대는 것이 실용적이기 때문입니다. 주먹을 쥐지 않는 것, 자리를 뜨는 것 같은 일입니다.

묵상

화가 났을 때 몸이 먼저 반응하나요? 그 반응 하나만 바꿔도 다음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말이 들끓는 것을 지키고 말을 잘 다스릴지니라. 말로 짓는 나쁜 행실을 버리고 말로 바르게 행할지니라.

Vacīpakopaṁ rakkheyya, vācāya saṁvuto siyā; Vacīduccaritaṁ hitvā, vācāya sucaritaṁ care.

법구경 Dhammapada 232

배경

몸 다음이 말입니다. 세 가지 가운데 말이 가운데 놓인 것이 짜임새 있습니다. 몸의 폭력은 눈에 띄지만 말의 폭력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자주 일어납니다. 10품에서 거친 말이 되돌아온다고 했던 대목과 이어집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 세 게송이 모두 두 단계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나쁜 것을 버리고, 그다음에 바른 것을 행합니다. 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무엇을 하라고 이어 갑니다. 침묵이 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묵상

말을 참는 것과 좋은 말을 하는 것은 다릅니다. 오늘 참기만 하고 건네지 않은 말이 있나요?

마음이 들끓는 것을 지키고 마음을 잘 다스릴지니라. 마음으로 짓는 나쁜 행실을 버리고 마음으로 바르게 행할지니라.

Manopakopaṁ rakkheyya, manasā saṁvuto siyā; Manoduccaritaṁ hitvā, manasā sucaritaṁ care.

법구경 Dhammapada 233

배경

셋 가운데 마지막이자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몸과 말은 남이 보지만 마음은 자기만 압니다. 그래서 놓치기 쉽습니다. 그런데 1품 첫 게송에서 마음이 앞선다고 했으니, 순서로 보면 여기가 시작점입니다. 세 게송을 몸에서 마음 쪽으로 배열한 것은 실천의 순서이고, 실제로 일이 일어나는 순서는 그 반대입니다. 마음에서 시작해 말과 몸으로 나옵니다. 손대기 쉬운 데서 시작해 근원으로 들어가는 배열입니다.

묵상

겉으로는 아무 일 없었는데 마음속에서 여러 번 되뇐 말이 있나요? 그것도 이미 한 번은 한 셈일까요?

지혜로운 이들은 몸으로 다스려지고 말로도 다스려지며, 마음으로도 다스려지나니 그들이야말로 온전히 다스려진 이들이니라.

Kāyena saṁvutā dhīrā, atho vācāya saṁvutā; Manasā saṁvutā dhīrā, te ve suparisaṁvutā.

법구경 Dhammapada 234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이자 앞 세 게송의 매듭입니다. 수빠리상우따(suparisaṁvutā)는 '두루 잘 다스려진'이라는 뜻입니다. 셋 가운데 하나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몸은 얌전한데 말이 험한 사람, 말은 부드러운데 속으로 미워하는 사람이 여기서 걸립니다. 이 품이 성냄에서 시작해 여기서 끝나는 흐름이 자연스럽습니다. 화를 다루는 일이 결국 몸과 말과 마음 전체를 다루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화만 참는 것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묵상

몸과 말과 마음 가운데 나에게 가장 자주 새는 곳은 어디인가요? 그곳 하나부터 손대 본다면 무엇을 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