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이제 시든 잎과 같고
죽음의 사자들이 곁에 와 있느니라.
떠나는 길목에 서 있으나
지닐 노자조차 없구나.
그러니 스스로 섬을 만들지니라.
서둘러 힘써 지혜로운 이가 될지니라.
때를 씻어 흠이 없으면
성인들의 자리에 이르리라.
Paṇḍupalāsova dānisi, Yamapurisāpi ca te upaṭṭhitā; Uyyogamukhe ca tiṭṭhasi, Pātheyyampi ca te na vijjati. So karohi dīpamattano, Khippaṁ vāyama paṇḍito bhava; Niddhantamalo anaṅgaṇo, Dibbaṁ ariyabhūmiṁ upehisi.
법구경 Dhammapada 235-236 배경
두 게송이 한 흐름이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앞이 지금 자리를 보여 주고 뒤가 할 일을 말합니다. 빤두빨라사(paṇḍupalāsa)는 누렇게 시들어 곧 떨어질 잎입니다. 빠테이야(pātheyya)는 길 떠날 때 지니는 양식으로, 여기서는 죽음 뒤에 지니고 갈 것을 가리킵니다. 그림이 매섭습니다. 이미 문턱에 섰는데 챙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 게송만 읽으면 절망으로 끝납니다. 뒤 게송이 곧바로 붙습니다. 그러니 지금 만들라고 합니다. 디빠(dīpa)는 2품에서 본 것처럼 섬입니다. 늦었다고 하지 않고 서두르라고 합니다.
묵상
지금 챙겨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가져갈 수 없는 것 말고, 정말 남을 것은 무엇일까요?
그대는 이미 나이 들어
죽음의 곁으로 가고 있느니라.
가는 길에 머물 데도 없고
지닐 노자조차 없구나.
그러니 스스로 섬을 만들지니라.
서둘러 힘써 지혜로운 이가 될지니라.
때를 씻어 흠이 없으면
다시 태어나 늙는 일이 없으리라.
Upanītavayo ca dānisi, Sampayātosi yamassa santikaṁ; Vāso te natthi antarā, Pātheyyampi ca te na vijjati. So karohi dīpamattano, Khippaṁ vāyama paṇḍito bhava; Niddhantamalo anaṅgaṇo, Na punaṁ jātijaraṁ upehisi.
법구경 Dhammapada 237-238 배경
앞의 두 게송과 같은 틀이 되풀이됩니다. 다른 것은 마지막 줄입니다. 앞에서는 성인들의 자리에 이른다고 했고 여기서는 다시 태어나 늙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여행 비유가 이어집니다. 와소(vāso)는 '머물 곳'으로, 나그네가 밤에 묵을 자리입니다. 가는 길에 쉴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는 그림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앞에 악한 길에 떨어진다는 인과를 세워 놓아, 채비 없는 여행이 벌에 대한 경고가 되었습니다. 빠알리에는 벌이 없습니다. 준비 없이 떠나는 사람의 처지만 있습니다.
묵상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무엇을 챙기시나요? 인생이라는 길에서 챙겨야 할 것을 하나만 꼽는다면 무엇일까요?
지혜로운 이는 차츰차츰
조금씩 그때그때,
대장장이가 은에서 티를 걷어 내듯
제 때를 씻어 내느니라.
Anupubbena medhāvī, thokaṁ thokaṁ khaṇe khaṇe; Kammāro rajatasseva, niddhame malamattano.
법구경 Dhammapada 239 배경
카네 카네(khaṇe khaṇe)는 '순간순간'입니다. 아누뿝베나(anupubbena)는 '차례차례, 점차로'입니다. 한 번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 세 번 거듭됩니다. 대장장이가 은을 다루는 일이 실제로 그렇습니다. 불에 달구고 두들기고 식히기를 되풀이하면 티가 조금씩 떠오릅니다. 한 번에 다 빼낼 수 없습니다. 이 게송이 위로가 되는 까닭은 완벽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 씻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9품에서 물방울이 물독을 채운다고 했던 셈과 같은데, 여기서는 쌓는 쪽이 아니라 걷어 내는 쪽입니다.
묵상
한 번에 고치려다 지쳐 그만둔 일이 있나요? 오늘 조금만 걷어 낸다면 무엇을 고르시겠어요?
쇠에서 난 녹이
바로 그 쇠를 먹어 치우듯,
제가 지은 일들이
제 삶을 함부로 쓴 이를
나쁜 곳으로 이끄느니라.
Ayasāva malaṁ samuṭṭhitaṁ, Tatuṭṭhāya tameva khādati; Evaṁ atidhonacārinaṁ, Sāni kammāni nayanti duggatiṁ.
법구경 Dhammapada 240 배경
이 품의 이름인 말라(mala)가 여기서 녹으로 나타납니다. 녹은 밖에서 붙는 것이 아니라 쇠 자신에게서 납니다. 그리고 그 쇠를 먹습니다. 카다띠(khādati)는 '먹어 치운다'는 뜻입니다. 12품에서 금강석이 어리석은 이를 짓이긴다고 했던 것과 같은 셈법인데, 여기서는 더 조용합니다. 금강석은 한 번에 부수지만 녹은 천천히 갉습니다. 앗티도나짜리(atidhonacārī)는 삶에 필요한 것들을 함부로 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옷과 밥과 잠자리와 약을 헤아림 없이 쓰는 태도입니다.
묵상
천천히 나를 갉아 온 것이 있나요? 큰 사건이 아니라 오래된 습관 쪽에서 찾아보면 어떨까요?
외운 것의 때는 익히지 않음이요
집안의 때는 돌보지 않음이며,
몸매의 때는 게으름이요
지키는 이의 때는 마음 놓음이니라.
Asajjhāyamalā mantā, anuṭṭhānamalā gharā; Malaṁ vaṇṇassa kosajjaṁ, pamādo rakkhato malaṁ.
법구경 Dhammapada 241 배경
네 가지가 나란히 놓입니다. 짜임이 재미있습니다. 각각의 때가 그것을 망치는 방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외운 것은 되풀이하지 않으면 사라지고, 집은 돌보지 않으면 무너지고, 몸은 움직이지 않으면 흐트러지고, 지키는 사람은 방심하면 뚫립니다. 아산자야(asajjhāya)는 '소리 내어 되풀이하지 않음'입니다. 당시에는 경전을 외워 전했으므로 되풀이하지 않으면 정말로 사라졌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여기 나오는 때가 모두 하지 않음이라는 점입니다. 나쁜 일을 해서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서 생깁니다.
묵상
돌보지 않아 녹슬고 있는 것이 있나요? 관계일 수도, 몸일 수도, 오래 배운 무언가일 수도 있습니다.
여인의 때는 그릇된 행실이요
베푸는 이의 때는 인색함이니,
나쁜 일들은 이 세상에서도
다음 세상에서도 때가 되느니라.
Malitthiyā duccaritaṁ, maccheraṁ dadato malaṁ; Malā ve pāpakā dhammā, asmiṁ loke paramhi ca.
법구경 Dhammapada 242 배경
첫 구절은 오늘의 눈으로 읽으면 불편합니다. 왜 여인만 따로 들었는지 묻게 됩니다. 앞 게송에서 외운 것, 집안, 몸매, 지키는 이를 든 목록이 여기 이어지는 것이라 여러 대상을 늘어놓는 흐름 안에 있기는 하나, 그것으로 다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이천오백 년 전 사회에서 쓰인 말이라는 사실을 함께 놓고 읽는 편이 정직합니다. 한역 법구경에는 이 구절이 없고 다른 말로 바뀌어 있어, 한국에서 읽히는 번역에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뒷줄은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나쁜 일은 누구에게나 때라고 합니다.
묵상
오래된 글을 읽을 때 불편한 대목을 만나면 어떻게 하시나요? 덮어 두는 것과 그대로 보고 판단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나을까요?
그러나 그 모든 때보다 더한 때가 있으니
무명이야말로 가장 큰 때이니라.
이 때를 버리고
때 없는 이가 될지니라.
Tato malā malataraṁ, avijjā paramaṁ malaṁ; Etaṁ malaṁ pahantvāna, nimmalā hotha bhikkhavo.
법구경 Dhammapada 243 배경
앞의 여러 게송이 이런저런 때를 늘어놓은 뒤 여기서 뿌리를 짚습니다. 아윗자(avijjā)는 '무명'으로, 모른다는 뜻입니다. 다만 지식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때들은 이것에서 나옵니다. 무엇이 나를 해치는지 모르니 하고, 무엇이 도움이 되는지 모르니 하지 않습니다. 앞의 목록이 증상이라면 여기가 원인인 셈입니다. 그러니 하나하나 고치는 것보다 보는 눈을 여는 쪽이 근본입니다. 이 게송이 이 품의 한가운데 놓인 것이 그 때문입니다.
묵상
고쳐야 할 것을 하나씩 붙잡고 있나요? 그것들이 다 한 곳에서 나온다면, 그 한 곳은 어디일까요?
부끄러움을 모르고
까마귀처럼 뻔뻔하며,
들이대고 우쭐하며
더러움에 물든 이는
살아가기가 쉬우니라.
부끄러움을 알고
늘 맑음을 찾으며,
달라붙지 않고 우쭐하지 않으며
깨끗하게 살아가는
보는 눈을 지닌 이는
살아가기가 어려우니라.
Sujīvaṁ ahirikena, kākasūrena dhaṁsinā; Pakkhandinā pagabbhena, saṅkiliṭṭhena jīvitaṁ. Hirīmatā ca dujjīvaṁ, niccaṁ sucigavesinā; Alīnenāppagabbhena, suddhājīvena passatā.
법구경 Dhammapada 244-245 배경
두 게송이 짝을 이루어 함께 읽어야 합니다. 이 짝의 정직함이 놀랍습니다. 뻔뻔하게 사는 쪽이 쉽다고 인정합니다. 수지왕(sujīvaṁ)은 '살기 쉬운'이고 둣지왕(dujjīvaṁ)은 '살기 어려운'입니다. 좋은 길이 쉽다고 하지 않습니다. 까까수라(kākasūra)는 '까마귀처럼 용감한'이라는 뜻으로, 남의 것을 아무렇지 않게 채 가는 뻔뻔함을 가리킵니다. 이 짝을 읽으면 왜 바르게 사는 일이 힘든지 알게 됩니다. 원래 힘든 쪽입니다. 힘들다고 해서 잘못 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묵상
바르게 하려니 손해 보는 것 같은 순간이 있었나요? 그 길이 원래 어려운 쪽이라는 걸 알면 조금 견딜 만할까요?
목숨을 죽이고 거짓을 말하며,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남의 배우자를 범하며,
술과 독한 것에 빠지는 사람은,
바로 이 세상에서
제 뿌리를 스스로 파내느니라.
사람이여, 이렇게 알지니라.
나쁜 일들은 다잡지 못한 데서 오나니,
탐냄과 그릇됨이 그대를
오래도록 괴로움에 몰아넣게 하지 말지니라.
Yo pāṇamatipāteti, musāvādañca bhāsati; Loke adinnamādiyati, paradārañca gacchati. Surāmerayapānañca, yo naro anuyuñjati; Idheva meso lokasmiṁ, mūlaṁ khaṇati attano. Evaṁ bho purisa jānāhi, pāpadhammā asaññatā; Mā taṁ lobho adhammo ca, ciraṁ dukkhāya randhayuṁ.
법구경 Dhammapada 246-248 배경
세 게송이 한 문장으로 이어져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앞의 둘이 다섯 가지를 늘어놓고 셋째가 맺습니다. 여기 나오는 다섯은 재가자가 지키는 다섯 계율의 반대입니다. 죽이지 않기, 주지 않은 것을 갖지 않기, 그릇된 관계를 맺지 않기, 거짓말하지 않기, 취하게 하는 것을 삼가기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그 결과를 그린 방식입니다. 물라(mūla)는 뿌리입니다. 벌을 받는다고 하지 않고 제 뿌리를 스스로 판다고 합니다. 나무가 제 뿌리를 파면 서 있을 수 없습니다. 남이 베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너지는 그림입니다.
묵상
다섯 가지 가운데 지금 나에게 가장 흔들리는 것이 있나요? 그것이 무엇을 파내고 있는지 보이나요?
사람은 믿는 만큼,
마음이 가는 만큼 베푸느니라.
그런데 남이 받는 밥과 마실 것에
언짢아하는 이는,
낮에도 밤에도
마음이 한곳에 모이지 않느니라.
그 마음이 끊어져
뿌리째 뽑힌 이는,
낮에도 밤에도
마음이 한곳에 모이느니라.
Dadāti ve yathāsaddhaṁ, yathāpasādanaṁ jano; Tattha yo ca maṅku bhavati, paresaṁ pānabhojane; Na so divā vā rattiṁ vā, samādhimadhigacchati. Yassa cetaṁ samucchinnaṁ, mūlaghaccaṁ samūhataṁ; Sa ve divā vā rattiṁ vā, samādhimadhigacchati.
법구경 Dhammapada 249-250 배경
두 게송이 짝을 이룹니다. 망꾸(maṅku)는 '언짢아하는, 뾰로통한'이라는 뜻입니다. 남이 더 좋은 것을 받는 것을 보고 속이 틀리는 마음입니다. 이 게송이 날카로운 까닭은 그 마음이 얼마나 작은지 짚으면서도 결과를 크게 놓기 때문입니다. 그 작은 시샘 하나로 밤낮 마음이 모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를 명예를 바라는 보시로 바꾸었는데, 그러면 시샘하는 사람이 아니라 뽐내는 사람의 이야기가 됩니다. 빠알리가 겨눈 것은 남이 받는 것을 못 견디는 마음입니다.
묵상
남이 더 좋은 것을 받을 때 속이 틀린 적이 있나요? 그 작은 마음이 하루를 얼마나 갉아먹었는지 헤아려 보면 어떨까요?
물듦과 같은 불이 없고
성냄과 같은 움켜쥠이 없으며,
어리석음과 같은 그물이 없고
목마름과 같은 강이 없느니라.
Natthi rāgasamo aggi, natthi dosasamo gaho; Natthi mohasamaṁ jālaṁ, natthi taṇhāsamā nadī.
법구경 Dhammapada 251 배경
네 가지에 각각 다른 비유가 붙었습니다. 물듦은 불이고, 성냄은 움켜쥠이며, 어리석음은 그물이고, 목마름은 강입니다. 비유가 정확합니다. 불은 태우고, 움켜쥔 손은 펴지지 않으며, 그물은 걸리고 나서야 알게 되고, 강은 끝없이 흐릅니다. 15품의 202게송과 앞 두 구가 같은데 뒤가 다릅니다. 거기서는 다섯 무더기와 고요를 들었고 여기서는 어리석음과 목마름을 들었습니다. 같은 틀을 다르게 채우는 것이 이 책의 방식입니다.
묵상
불, 움켜쥠, 그물, 강 가운데 지금 나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 무엇인가요?
남의 허물은 보기 쉬우나
제 허물은 보기 어려우니,
남의 허물은 겨를 까부르듯 흩날리면서
제 허물은 감추나니,
노름꾼이 나쁜 패를
숨기는 것과 같으니라.
Sudassaṁ vajjamaññesaṁ, attano pana duddasaṁ; Paresaṁ hi so vajjāni, opunāti yathā bhusaṁ; Attano pana chādeti, kaliṁva kitavā saṭho.
법구경 Dhammapada 252 배경
비유 두 개가 대비를 이룹니다. 겨를 까부르는 일은 바람에 날려 훤히 드러내는 일입니다. 노름꾼이 나쁜 패를 감추는 일은 그 반대입니다. 같은 사람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한다는 것이 이 게송의 그림입니다. 남의 것은 드러내고 내 것은 감춥니다. 눈여겨볼 것은 감추는 쪽에 노름꾼을 쓴 점입니다. 노름꾼이 패를 감추는 것은 이기려고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허물을 감추는 일도 이기려는 마음에서 나온다는 뜻이 됩니다. 4품 50게송에서 남의 잘못을 들추지 말라고 했던 대목과 이어집니다.
묵상
오늘 남의 허물을 몇 번 이야기했나요? 같은 시간에 내 허물은 몇 번 들여다보았나요?
늘 남의 허물을 살피고
흠잡을 생각을 지닌 이는,
번뇌만 늘어나
그것이 다하는 자리에서
멀어지느니라.
Paravajjānupassissa, niccaṁ ujjhānasaññino; Āsavā tassa vaḍḍhanti, ārā so āsavakkhayā.
법구경 Dhammapada 253 배경
앞 게송에서 남의 허물을 잘 본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 결과를 말합니다. 웃자나산닌(ujjhānasaññin)은 '흠잡을 생각을 품은'이라는 뜻입니다. 아사와(āsava)는 안으로 흘러들어 사람을 물들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남의 허물을 볼수록 내 안의 것이 늘어난다는 셈이 뜻밖입니다. 남을 판정하는 동안 스스로는 손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판정하는 눈이 익숙해지면 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아라(ārā)는 '멀리'입니다.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멀어진다고 못박습니다.
묵상
누군가를 자주 판정하고 있지는 않나요? 그 판정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을까요?
허공에는 발자국이 없고
이 길 밖에는 참된 수행자가 없느니라.
사람들은 부풀린 생각을 즐기나
여래에게는 부풀림이 없느니라.
Ākāseva padaṁ natthi, samaṇo natthi bāhire; Papañcābhiratā pajā, nippapañcā tathāgatā.
법구경 Dhammapada 254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부처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받은 이의 물음을 전합니다. 여러 스승 가운데 누가 참되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이 게송의 둘째 줄은 단호합니다. 다른 경에서 부처님은 여덟 갈래 길이 있는 곳에 참된 수행자가 있다고 풀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길을 가리킨 것입니다. 빠빤짜(papañca)는 '부풀림'으로, 하나의 일에서 생각이 끝없이 가지 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한역 법구경은 주어를 뒤집어 옮겨 이 단언이 흐려졌습니다.
묵상
작은 일 하나에서 생각이 끝없이 뻗어 나간 적이 있나요? 그 생각들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요, 만들어 낸 것인가요?
허공에는 발자국이 없고
이 길 밖에는 참된 수행자가 없느니라.
지어진 것은 영원하지 않으며
깨달은 이들에게는 흔들림이 없느니라.
Ākāseva padaṁ natthi, samaṇo natthi bāhire; Saṅkhārā sassatā natthi, natthi buddhānamiñjitaṁ.
법구경 Dhammapada 255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이자 앞 게송의 짝입니다. 앞 두 줄이 똑같고 뒤가 바뀝니다. 상카라 삿사따 낫티(saṅkhārā sassatā natthi)는 '지어진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뜻으로, 이 책 전체에 흐르는 생각을 한 줄로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흔들림이 없다고 합니다. 두 줄이 나란히 놓인 것이 뜻깊습니다. 모든 것이 변하는데 흔들리지 않는 이가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을 붙잡아서가 아니라 변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때를 다룬 이 품이 여기서 끝나는 것도 어울립니다. 흔들림이 없으면 일어날 먼지도 없습니다.
묵상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 불안한가요, 아니면 마음이 놓이나요? 지금 힘든 것도 변할 것이라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