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성급하게 몰아 처리한다고
이치에 선 사람이 되지 않느니라.
이로움과 해로움 둘 다를
가려낼 줄 알아야
지혜로운 이니라.
Na tena hoti dhammaṭṭho, yenatthaṁ sāhasā naye; Yo ca atthaṁ anatthañca, ubho niccheyya paṇḍito.
법구경 Dhammapada 256 배경
담맛토(dhammaṭṭha)는 '법 위에 서 있는 이'라는 뜻으로, 이 품의 이름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재판을 맡은 관리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판정하는 자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사하사(sāhasa)는 '성급함, 우격다짐'입니다. 재판에서 성급함이 왜 문제일까요. 한쪽 말만 듣고 결론이 서기 때문입니다. 뒷줄이 그 짝을 이룹니다. 둘 다 가려내라고 합니다. 우보(ubho)는 '양쪽'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를 이익을 다투지 않는다로 바꾸어, 성급함을 짚던 말이 무욕을 권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묵상
누군가를 판단할 때 한쪽 이야기만 듣고 결론을 낸 적이 있나요? 다른 쪽을 마저 들었다면 달라졌을까요?
성급하지 않게 이치에 따라
고르게 남을 이끄는 이,
이치를 지키는 그 지혜로운 이를 이치에 선 사람이라 부르느니라.
Asāhasena dhammena, samena nayatī pare; Dhammassa gutto medhāvī, “dhammaṭṭho”ti pavuccati.
법구경 Dhammapada 257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앞에서 아닌 것을 말했으니 여기서 맞는 것을 말합니다. 이 품 전체가 이 방식으로 짜여 있습니다. 사메나(samena)는 '고르게, 치우침 없이'라는 뜻입니다. 담맛사 굿또(dhammassa gutto)는 '법의 지킴이'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법을 쓰는 이가 아니라 지키는 이라고 한 점입니다. 법을 도구로 쓰는 사람과 법을 지키는 사람은 다릅니다. 앞의 사람은 법을 자기 뜻대로 구부리고 뒤의 사람은 자기를 법에 맞춥니다.
묵상
규칙을 지키는 쪽과 규칙을 이용하는 쪽 가운데, 나는 어느 쪽에 가까울까요?
말을 많이 한다고
지혜로운 이가 되지 않느니라.
평온하고 원한 없으며
두려움 없는 이를
지혜로운 이라 부르느니라.
Na tena paṇḍito hoti, yāvatā bahu bhāsati; Khemī averī abhayo, “paṇḍito”ti pavuccati.
법구경 Dhammapada 258 배경
지혜의 표시로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평온함, 원한 없음, 두려움 없음입니다. 셋 다 아는 것과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입니다. 지식을 재는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케미(khemī)는 '안전한, 위험이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아는 것이 많아지면 대개 말이 늘고 논쟁이 늘고 지킬 것이 늘어납니다. 그런데 이 게송이 재는 것은 그 반대편입니다. 아는 것이 그 사람을 얼마나 편안하게 만들었느냐입니다. 배움의 결과를 마음의 상태로 재는 셈입니다.
묵상
많이 알게 되면서 마음이 편해졌나요, 아니면 지킬 것이 늘었나요?
말을 많이 한다고
가르침을 지닌 이가 되지 않느니라.
적게 듣더라도
가르침을 몸으로 보고,
가르침을 소홀히 하지 않는 이가 가르침을 지닌 이니라.
Na tāvatā dhammadharo, yāvatā bahu bhāsati; Yo ca appampi sutvāna, dhammaṁ kāyena passati; Sa ve dhammadharo hoti, yo dhammaṁ nappamajjati.
법구경 Dhammapada 259 배경
담마다라(dhammadhara)는 '가르침을 지닌 이'로, 당시에는 경전을 외워 전하는 사람을 가리켰습니다. 글이 없던 시절이라 사람이 곧 책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많이 외우는 것으로는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까예나 빳사띠(kāyena passati)는 '몸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눈으로도 머리로도 아니고 몸입니다. 겪어서 안다는 말입니다. 1품 마지막에서 남의 소를 세는 목동을 말했던 대목이 여기서 다시 나옵니다. 그때는 실천을 말했고 여기서는 몸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묵상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겪어 아는 것이 갈렸던 일이 있나요?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이었나요?
머리가 세었다고
어른이 되지 않느니라.
나이만 익은 이는
헛되이 늙었다 불리느니라.
Na tena thero so hoti, yenassa palitaṁ siro; Paripakko vayo tassa, “moghajiṇṇo”ti vuccati.
법구경 Dhammapada 260 배경
테라(thera)는 '나이 든 이, 어른'을 뜻하며 승가에서는 오래 수행한 이를 부르는 말입니다. 모가진노(moghajiṇṇa)는 '헛되이 늙은'이라는 뜻으로, 꽤 매서운 말입니다. 11품에서 배움이 적은 사람이 부림 소처럼 늙는다고 했던 것과 이어집니다. 시간은 저절로 흐르지만 그 시간이 무엇을 남기는지는 저절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빠리빡꼬 와요(paripakko vayo)는 '나이가 익었다'는 뜻인데, 익었다는 말이 열매에 쓰이는 말이라 더 아프게 들립니다. 익은 것은 나이뿐이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묵상
나이가 든다는 것이 저절로 무언가를 준다고 여겼나요? 지난 십 년 동안 나이 말고 무엇이 익었을까요?
진실과 이치가 있고 해치지 않음과 다스림과 삼감이 있는 이,
때를 벗은 그 지혜로운 이를
어른이라 부르느니라.
Yamhi saccañca dhammo ca, ahiṁsā saṁyamo damo; Sa ve vantamalo dhīro, “thero” iti pavuccati.
법구경 Dhammapada 261 배경
앞 게송의 짝으로, 어른의 조건 다섯 가지를 듭니다. 진실, 정의, 해치지 않음, 삼감, 다스림입니다. 나이가 없습니다. 젊어도 이것들을 갖추면 어른이라는 뜻이 됩니다. 다른 경에서 부처님은 나이 어린 이가 나이 많은 이에게 가르침을 편 일을 여러 번 인정하셨습니다. 완따말로(vantamalo)는 '때를 게워 낸'이라는 뜻으로, 앞 품의 이름과 이어집니다. 어른됨을 자리나 시간이 아니라 무엇을 덜어 냈느냐로 잰 셈입니다.
묵상
내가 어른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무엇을 갖추고 있나요? 나이 말고 다른 이유가 떠오르나요?
말솜씨만으로,
고운 얼굴만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나니,
시샘하고 인색하고
속임이 있는 이라면 더욱 그러하니라.
Na vākkaraṇamattena, vaṇṇapokkharatāya vā; Sādhurūpo naro hoti, issukī maccharī saṭho.
법구경 Dhammapada 262 배경
왁까라나(vākkaraṇa)는 '말을 다루는 솜씨'이고 완나뽁카라따(vaṇṇapokkharatā)는 '연꽃 같은 살빛', 곧 아름다운 겉모습입니다. 사두루빠(sādhurūpa)는 '훌륭해 보이는 모습'이라는 뜻이라, 이 게송은 보이는 것과 실제를 맞세우고 있습니다. 뒤에 든 셋이 구체적입니다. 시샘, 인색, 속임입니다. 모두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것들입니다. 말이 매끄럽고 인상이 좋으면 이 셋이 오래 가려집니다. 그래서 이 게송이 필요합니다.
묵상
겉으로 보기 좋은 사람에게 속은 적이 있나요? 반대로 나도 그렇게 보이려 애쓰고 있지는 않나요?
그것이 끊어지고
뿌리째 뽑힌 이,
허물을 벗은 그 지혜로운 이를
훌륭한 사람이라 부르느니라.
Yassa cetaṁ samucchinnaṁ, mūlaghaccaṁ samūhataṁ; Sa vantadoso medhāvī, “sādhurūpo”ti vuccati.
법구경 Dhammapada 263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물라갓짜(mūlaghacca)는 '뿌리째 끊긴'이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이 이 책에서 여러 번 나오는데, 늘 같은 것을 말합니다. 잎을 따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샘이나 인색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과 그 마음이 없는 것은 다릅니다. 앞의 것은 참는 것이고 뒤의 것은 뽑힌 것입니다. 참는 것은 힘이 빠지면 드러나고 뽑힌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완따도소(vantadosa)는 '허물을 게워 낸'입니다.
묵상
참고 있는 것과 없어진 것을 구별할 수 있나요? 힘들 때 다시 올라오는 것이 있다면 아직 참는 쪽일지도 모릅니다.
머리를 깎았다고
애쓰는 이가 되지 않나니,
지킬 것을 지키지 않고 거짓을 말하며
바람과 탐냄에 빠진 이가
어찌 애쓰는 이가 되겠느냐.
Na muṇḍakena samaṇo, abbato alikaṁ bhaṇaṁ; Icchālobhasamāpanno, samaṇo kiṁ bhavissati.
법구경 Dhammapada 264 배경
문다까(muṇḍaka)는 '까까머리'입니다. 출가의 표시로 머리를 깎는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겉모습이 그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는 이 품의 주제가 여기서 가장 직접적으로 나옵니다. 10품 141게송에서 벌거벗음과 진흙과 굶주림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지 못한다고 했던 것과 이어집니다. 그때는 고행이었고 여기서는 차림입니다. 압바또(abbata)는 '지킬 것을 지키지 않는'이라는 뜻입니다. 겉모습을 갖추기는 하루면 되지만 지키는 일은 매일입니다.
묵상
어떤 자리에 어울리는 겉모습을 갖추는 데 애쓴 적이 있나요? 그 안을 채우는 데는 얼마나 썼나요?
크고 작은 나쁜 일을
남김없이 가라앉힌 이,
나쁜 일을 가라앉혔기에
애쓰는 이라 부르느니라.
Yo ca sameti pāpāni, aṇuṁthūlāni sabbaso; Samitattā hi pāpānaṁ, “samaṇo”ti pavuccati.
법구경 Dhammapada 265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이 게송은 말놀이로 되어 있습니다. 사메띠(sameti, 가라앉히다)와 사마나(samaṇa, 애쓰는 이)의 소리가 겹칩니다. 가라앉혔기에 사마나라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름의 뿌리를 그 사람이 하는 일에서 찾은 셈입니다. 아눙 툴라니(aṇuṁ thūlāni)는 '작은 것과 큰 것'입니다. 2품 31게송에서도 크고 작은 얽매임을 함께 들었습니다. 큰 것만 다루면 작은 것이 남고, 작은 것이 남으면 다시 자랍니다.
묵상
큰 잘못은 조심하면서 작은 것은 넘어가고 있지는 않나요? 그 작은 것이 어디까지 자랄 수 있을까요?
남에게 빌어먹는다고
수행자가 되지 않느니라.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 지녀야 수행자이지
빌어먹는 것만으로는 아니니라.
Na tena bhikkhu so hoti, yāvatā bhikkhate pare; Vissaṁ dhammaṁ samādāya, bhikkhu hoti na tāvatā.
법구경 Dhammapada 266 배경
빅쿠(bhikkhu)는 본래 '빌어먹는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게송도 말놀이입니다. 빌어먹는다고 빌어먹는 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 셈입니다. 이름이 가리키는 겉모습과 그 이름에 값하는 실제를 갈라 놓았습니다. 이 품에 이런 말놀이가 거듭 나오는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이름은 붙이기 쉽습니다. 어른, 훌륭한 사람, 애쓰는 이, 수행자 같은 이름들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에 값하는 일은 붙이는 일과 전혀 다릅니다.
묵상
내가 가진 이름표 가운데 그 이름에 값하고 있는 것이 있나요? 값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모두 떨쳐 버리고
맑게 살아가며,
잘 헤아려 세상을 살아가는 이를
수행자라 부르느니라.
Yodha puññañca pāpañca, bāhetvā brahmacariyavā; Saṅkhāya loke carati, sa ve “bhikkhū”ti vuccati.
법구경 Dhammapada 267 배경
앞 게송의 짝입니다. 여기서도 좋은 일과 나쁜 일을 함께 떨친다고 합니다. 3품 39게송과 6품에서도 나온 셈법입니다. 좋은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쌓아 자기 것으로 삼지 말라는 뜻입니다. 상카야(saṅkhāya)는 '헤아려서, 잘 재어 보고'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등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헤아리며 그 안을 걸어간다는 그림입니다. 이 품에서 반복해 온 물음이 여기서도 이어집니다.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묵상
좋은 일을 하고 나서 그것을 마음에 쌓아 둔 적이 있나요? 쌓아 두는 것과 그냥 하고 지나가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어리석고 모르는 이가
입을 다물었다고
성자가 되지 않느니라.
저울을 들어 재듯 가늠하여
좋은 것을 골라 쥐는 지혜로운 이,
나쁜 일을 피하기에 그가 성자이니
그래서 그를 성자라 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두루 헤아리기에
성자라 불리느니라.
Na monena munī hoti, mūḷharūpo aviddasu; Yo ca tulaṁva paggayha, varamādāya paṇḍito. Pāpāni parivajjeti, sa munī tena so muni; Yo munāti ubho loke, “muni” tena pavuccati.
법구경 Dhammapada 268-269 배경
두 게송이 한 문장으로 이어져 함께 읽어야 합니다. 모나(mona)는 침묵이고 무니(muni)는 성자인데, 두 낱말의 뿌리가 같습니다. 그래서 침묵한다고 성자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말놀이가 됩니다. 뒤에 나오는 무나띠(munāti)는 '헤아려 안다'는 뜻으로, 성자라는 이름의 다른 뿌리를 짚은 것입니다. 침묵이 아니라 헤아림이 성자를 만든다는 셈입니다. 저울 비유가 정확합니다. 저울은 무겁다 가볍다 말하지 않고 그저 잽니다. 말없이 하는 일이지만 침묵과는 다릅니다.
묵상
말을 아끼는 것과 헤아리는 것은 다릅니다. 나의 침묵은 재고 있는 침묵인가요, 그냥 비어 있는 침묵인가요?
산 것을 해친다면
고귀한 이가 되지 않느니라.
모든 산 것을 해치지 않아야
고귀한 이라 부르느니라.
Na tena ariyo hoti, yena pāṇāni hiṁsati; Ahiṁsā sabbapāṇānaṁ, “ariyo”ti pavuccati.
법구경 Dhammapada 270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어부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의 이름이 고귀하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름과 실제가 어긋난 예로 든 것입니다. 아리야(ariya)는 본래 혈통을 가리키던 말인데, 부처님은 그것을 행실을 가리키는 말로 바꾸어 쓰셨습니다. 26품이 그 뒤집기에 온전히 바쳐져 있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조건이 하지 않음이라는 점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천하를 두루 건진다는 적극적인 구제를 조건으로 삼았는데, 빠알리는 해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합니다.
묵상
좋은 일을 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드나요? 해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하나를 하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지켜야 할 것과 의례만으로도,
많이 배운 것만으로도,
마음을 모으는 힘을 얻은 것만으로도,
홀로 떨어져 지내는 것만으로도
‘나는 보통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벗어남의 즐거움을 얻었다’ 하며
번뇌가 다하지 않았는데
안심에 머물러서는 안 되느니라.
Na sīlabbatamattena, bāhusaccena vā pana; Atha vā samādhilābhena, vivittasayanena vā. Phusāmi nekkhammasukhaṁ, aputhujjanasevitaṁ; Bhikkhu vissāsamāpādi, appatto āsavakkhayaṁ.
법구경 Dhammapada 271-272 배경
품의 마지막이자 두 게송이 한 문장입니다. 앞에서 네 가지를 들었는데 모두 좋은 것들입니다. 계율을 지키고, 많이 배우고, 마음을 모으고, 홀로 지내는 일입니다. 이 품에서 지금까지 아니라고 한 것들은 겉모습이었는데, 여기서는 진짜 수행을 들고도 아니라고 합니다. 위사사(vissāsa)는 '마음 놓음, 안심'입니다. 이만하면 되었다고 여기는 그 자리를 짚은 것입니다. 3품 40게송에서 이긴 자리에 눌러앉지 말라고 했던 대목과 이어집니다. 잘하고 있을 때가 가장 위험한 자리라는 것입니다.
묵상
이만하면 되었다고 여긴 순간이 있었나요?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