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가운데 여덟 갈래 길이 으뜸이요
진리 가운데 네 마디가 으뜸이며,
가르침 가운데 물듦이 스러짐이 으뜸이요
두 발 가진 것 가운데
눈 밝은 이가 으뜸이니라.
Maggānaṭṭhaṅgiko seṭṭho, saccānaṁ caturo padā; Virāgo seṭṭho dhammānaṁ, dvipadānañca cakkhumā.
법구경 Dhammapada 273 배경
네 가지 으뜸을 늘어놓았습니다. 여덟 갈래 길은 바른 봄에서 바른 마음 모음까지 이어지는 길이고, 네 마디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위라가(virāga)는 '물듦이 스러짐'으로, 색이 바래듯 애착이 옅어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마지막 짝꾸마(cakkhumā)는 '눈을 가진 이'로, 깨달은 이를 부르는 말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뒤 두 구를 크게 바꾸었습니다. 물듦이 스러짐을 성적 절제로 좁혔고, 눈 밝은 이를 등불을 보시하면 눈을 얻는다는 이야기로 옮겼습니다. 이 품의 첫머리에 놓인 게송이라 무엇이 길인지를 먼저 못박은 셈입니다.
묵상
여러 길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고르시겠어요? 빠른 길일까요, 끝까지 가는 길일까요?
이것이 길이니
보는 눈이 맑아지는 데는 다른 길이 없느니라.
그대들은 이 길을 걸을지니,
사람을 붙드는 힘의 속임에서
벗어나게 되리라.
이 길을 걸으면
괴로움의 끝에 이르리니,
화살 뽑는 길을 알고서
내가 이 길을 일러 주었노라.
애쓰는 일은 그대들의 몫이요
여래는 길을 가리킬 뿐이니,
이 길을 걸어 마음을 모으는 이는
그 묶임에서 풀려나느니라.
Eseva maggo natthañño, Dassanassa visuddhiyā; Etañhi tumhe paṭipajjatha, Mārassetaṁ pamohanaṁ. Etañhi tumhe paṭipannā, dukkhassantaṁ karissatha; Akkhāto vo mayā maggo, aññāya sallakantanaṁ. Tumhehi kiccamātappaṁ, akkhātāro tathāgatā; Paṭipannā pamokkhanti, jhāyino mārabandhanā.
법구경 Dhammapada 274-276 배경
세 게송이 한 흐름이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이 품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 마지막 줄에 있습니다. 악카따로 따타가따(akkhātāro tathāgatā), 곧 '여래는 길을 가리키는 이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구해 주는 이가 아니라 가리키는 이라고 스스로를 한정한 것입니다. 애쓰는 몫은 듣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살라깐따나(sallakantana)는 '화살을 뽑아냄'입니다. 다른 경에서 부처님은 독화살에 맞은 사람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누가 쏘았는지 따지기 전에 화살을 뽑아야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한역 법구경은 내가 바른 길을 열었다는 선언을 앞세워 무게가 옮겨 갔습니다.
묵상
누가 나를 대신해 걸어 줄 수 없다는 말이 부담스럽나요, 아니면 힘이 되나요? 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일 수 있습니다.
‘지어진 모든 것은 덧없다’고
지혜로 볼 때,
괴로움에서 싫어져 떠나나니
이것이 맑아지는 길이니라.
“Sabbe saṅkhārā aniccā”ti, yadā paññāya passati; Atha nibbindati dukkhe, esa maggo visuddhiyā.
법구경 Dhammapada 277 배경
여기서부터 세 편이 세 가지 도장이라 불리는 것을 하나씩 다룹니다. 덧없음, 괴로움, 나라 할 것 없음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빤냐야 빳사띠(paññāya passati), 곧 '지혜로 본다'는 표현입니다. 듣거나 믿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일입니다. 꽃이 진다는 것을 아는 것은 지식이고, 지금 피어 있는 꽃에서 이미 짐을 보는 것이 이 봄입니다. 닙빈다띠(nibbindati)는 '싫어져 돌아선다'는 뜻인데, 미워한다는 말이 아니라 환상에서 깨어난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붙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손을 펴는 일입니다.
묵상
지금 곁에 있는 것이 언젠가 없어진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그것이 더 소중해지나요, 아니면 덜 소중해지나요?
‘지어진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지혜로 볼 때,
괴로움에서 싫어져 떠나나니
이것이 맑아지는 길이니라.
“Sabbe saṅkhārā dukkhā”ti, yadā paññāya passati; Atha nibbindati dukkhe, esa maggo visuddhiyā.
법구경 Dhammapada 278 배경
앞 게송에서 덧없음이 괴로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둑카(dukkha)는 아픔이 아닙니다. 수레바퀴 축이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상태를 가리키던 말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만족스러움, 어긋남에 가깝습니다. 가장 즐거운 순간조차 그것이 지나간다는 점에서 이미 어긋나 있습니다. 앞 게송과 이 게송을 나란히 놓으면 순서가 보입니다. 덧없기 때문에 어긋납니다. 붙들 수 없는 것을 붙들려 하니 삐걱거립니다.
묵상
가장 좋았던 순간에도 어딘가 아쉬움이 있었나요? 그 아쉬움은 무엇이 부족해서였을까요?
‘모든 것에 나라 할 것이 없다’고
지혜로 볼 때,
괴로움에서 싫어져 떠나나니
이것이 맑아지는 길이니라.
“Sabbe dhammā anattā”ti, yadā paññāya passati; Atha nibbindati dukkhe, esa maggo visuddhiyā.
법구경 Dhammapada 279 배경
세 편의 마지막입니다. 앞의 둘에서는 상카라(지어진 것)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담마(모든 것)로 낱말이 바뀝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지어진 것에는 조건에 기대어 생긴 것만 들어가지만, 담마에는 열반까지 들어갑니다. 그러니 나라 할 것 없음은 예외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아낫따(anattā)는 '나라 할 것이 없음'입니다. 내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변하지 않고 홀로 서 있는 알맹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세 편을 차례로 읽으면 하나의 흐름이 됩니다. 덧없고, 그래서 어긋나며, 붙잡을 알맹이가 없습니다.
묵상
십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가운데 그대로인 것이 있나요? 그대로가 아니라면 무엇을 나라고 부르고 있는 걸까요?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나지 않고
젊고 힘이 있으면서 게으름에 빠지며,
마음먹은 것이 주저앉아
굼뜬 이는,
지혜로 길을 찾지 못하느니라.
Uṭṭhānakālamhi anuṭṭhahāno, Yuvā balī ālasiyaṁ upeto; Saṁsannasaṅkappamano kusīto, Paññāya maggaṁ alaso na vindati.
법구경 Dhammapada 280 배경
웃타나깔람히(uṭṭhānakālamhi)는 '일어날 때에'라는 뜻입니다.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젊고 힘이 있다고 못박은 점입니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산나상깝빠(saṁsannasaṅkappa)는 '가라앉아 버린 결심'을 뜻합니다. 결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었는데 주저앉은 상태입니다. 이 그림이 실감납니다. 우리는 대개 마음먹지 못해서가 아니라 마음먹은 것이 가라앉아서 못 합니다. 이 품이 길을 말하는 품이라 여기서 걷지 않는 사람을 짚은 셈입니다.
묵상
마음먹었다가 가라앉은 일이 있나요? 그것을 다시 세우는 데 필요한 것은 새로운 결심일까요, 아니면 아주 작은 첫걸음일까요?
말을 지키고
마음을 잘 다스리며,
몸으로도 나쁜 짓을 하지 않아
이 세 갈래 행위의 길을 맑게 하여,
성인들이 일러 준 길을
이룰지니라.
Vācānurakkhī manasā susaṁvuto, Kāyena ca nākusalaṁ kayirā; Ete tayo kammapathe visodhaye, Ārādhaye maggamisippaveditaṁ.
법구경 Dhammapada 281 배경
원문의 '행위의 길'이라는 말은 말과 마음과 몸 세 갈래를 가리킵니다. 17품에서 몸과 말과 마음을 차례로 다룬 대목과 같은 짜임인데, 여기서는 순서가 다릅니다. 말이 먼저 나옵니다. 말을 지키는 일이 가장 자주 마주치는 자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게송이 이 품에 있는 까닭은 길을 걷는 방법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앞 게송이 걷지 않는 사람을 그렸으니 여기서는 걷는 방법을 놓았습니다. 특별한 수행이 아니라 말과 마음과 몸을 맑게 하는 일입니다.
묵상
말과 마음과 몸 가운데 오늘 가장 흐려진 것은 무엇인가요? 하나만 맑게 한다면 어디부터 손대시겠어요?
힘써 닦으면 너른 지혜가 생기고
닦지 않으면 지혜가 스러지나니,
자라남과 스러짐
이 두 갈래를 알고서,
지혜가 자라는 쪽으로
자기를 세울지니라.
Yogā ve jāyatī bhūri, ayogā bhūrisaṅkhayo; Etaṁ dvedhāpathaṁ ñatvā, bhavāya vibhavāya ca; Tathāttānaṁ niveseyya, yathā bhūri pavaḍḍhati.
법구경 Dhammapada 282 배경
부리(bhūri)는 '너른 땅'을 뜻하는 말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지혜를 가리킬 때도 넓게 트인 앎이라는 결이 있습니다. 요가(yoga)는 여기서 '매어 붙임, 힘써 닦음'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지혜가 가만두면 스러진다고 한 점입니다. 한 번 얻으면 남는 것이 아니라 물처럼 마릅니다. 18품 241게송에서 외운 것의 때가 되풀이하지 않음이라고 했던 것과 이어집니다. 마지막 줄은 실용적입니다. 두 길을 알았으면 자라는 쪽에 자기를 놓으라고 합니다. 애쓰라는 말보다 자리를 옮기라는 말에 가깝습니다.
묵상
나를 자라게 하는 자리와 스러지게 하는 자리가 각각 어디인가요? 오늘은 어느 쪽에 더 오래 있었나요?
숲을 베어 내라, 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
숲에서 두려움이 생기느니라.
숲과 덤불을 함께 베어
숲 없는 이가 될지니라.
남자가 여인에게 두는 덤불이
털끝만큼이라도 베이지 않는 한,
젖 먹는 송아지가 어미에게 매여 있듯
그만큼 마음이 매여 있느니라.
Vanaṁ chindatha mā rukkhaṁ, vanato jāyate bhayaṁ; Chetvā vanañca vanathañca, nibbanā hotha bhikkhavo. Yāva hi vanatho na chijjati, Aṇumattopi narassa nārisu; Paṭibaddhamanova tāva so, Vaccho khīrapakova mātari.
법구경 Dhammapada 283-284 배경
두 게송이 이어져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앞 게송은 말놀이입니다. 와나(vana)는 숲이면서 욕망을 뜻하는 말과 소리가 겹칩니다. 그래서 숲을 베라는 말이 곧 욕망을 베라는 말이 됩니다. 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 숲이라고 한 것은 하나씩 손대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뒤 게송이 그 숲이 무엇인지 밝힙니다. 다만 여기서 대상을 남자와 여인으로 좁혀 놓았는데, 이는 출가한 남성 수행자를 앞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자리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오늘 읽을 때는 누구든 놓지 못하는 것으로 넓혀 읽는 편이 뜻에 맞습니다.
묵상
털끝만큼 남겨 둔 것이 있나요? 다 정리한 줄 알았는데 아주 조금 남겨 둔 그것이 무엇인지 떠올려 보세요.
가을 연꽃을 손으로 뽑아내듯
제 애착을 잘라 낼지니라.
고요로 가는 길만을 닦을지니,
깨달은 이가 일러 주신
열반의 길이니라.
Ucchinda sinehamattano, Kumudaṁ sāradikaṁva pāṇinā; Santimaggameva brūhaya, Nibbānaṁ sugatena desitaṁ.
법구경 Dhammapada 285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금세공을 하던 이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다루던 사람에게 아름다운 것을 뽑는 비유를 쓰신 셈입니다. 시네하(sineha)는 '기름기, 끈끈함'을 뜻하는 말에서 왔습니다. 애착이 어디에 들러붙는 성질을 지녔음을 그 낱말이 보여 줍니다. 눈여겨볼 것은 잘라 내라고만 하지 않고 곧바로 닦으라고 한 점입니다. 브루하야(brūhaya)는 '길러 내라'입니다. 비우는 일과 채우는 일이 나란히 놓였습니다. 무언가를 놓기만 하면 그 자리가 비어 다른 것이 들어옵니다.
묵상
무언가를 끊기만 하고 그 자리를 비워 둔 적이 있나요? 그 빈자리에 무엇이 들어왔나요?
‘여기서 우기를 나고
여기서 겨울과 여름을 나리라’ 하며
어리석은 이는 그렇게 헤아리면서도
닥쳐올 일은 알지 못하느니라.
Idha vassaṁ vasissāmi, idha hemantagimhisu; Iti bālo vicinteti, antarāyaṁ na bujjhati.
법구경 Dhammapada 286 배경
인도의 한 해는 우기와 겨울과 여름 셋으로 나뉩니다. 그러니 이 게송은 한 해 계획을 세우는 사람을 그린 것입니다.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안따라야(antarāya)는 '사이에 끼어드는 것, 가로막는 일'이라는 뜻으로, 계획 사이에 무엇이 끼어들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장사 준비를 마치고 떠나려던 상인이 그 전에 세상을 떠난 일을 전합니다. 이 게송이 겨눈 것은 계획이 아니라 계획이 그대로 되리라는 믿음입니다.
묵상
내년 계획을 세우고 있나요? 그 계획이 어긋날 수 있다는 것을 셈에 넣어 두었나요?
자식과 재물에 빠져
마음을 빼앗긴 사람을,
잠든 마을을 큰물이 쓸어 가듯
죽음이 데려가느니라.
Taṁ puttapasusammattaṁ, byāsattamanasaṁ naraṁ; Suttaṁ gāmaṁ mahoghova, maccu ādāya gacchati.
법구경 Dhammapada 287 배경
4품 47게송과 같은 비유가 다시 나옵니다. 거기서는 꽃을 따 모으는 사람이었고 여기서는 자식과 가축에 빠진 사람입니다. 빠수(pasu)는 가축으로, 당시에는 재산을 뜻했습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끼사고따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아이를 잃고 약을 구하러 다니던 그 여인입니다. 그 배경을 알고 읽으면 이 게송이 나무람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영원하리라 여기는 그 잠듦을 짚은 것입니다.
묵상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사랑하는 일과, 잃지 않으리라 여기며 사랑하는 일은 어떻게 다를까요?
자식도 아버지도 친척도
막아 주지 못하나니,
죽음에 붙들린 이에게는
피붙이 가운데도
기댈 데가 없느니라.
이 이치를 알고서
지혜로운 이는 됨됨이를 지키며,
열반으로 가는 길을
서둘러 닦을지니라.
Na santi puttā tāṇāya, na pitā nāpi bandhavā; Antakenādhipannassa, natthi ñātīsu tāṇatā. Etamatthavasaṁ ñatvā, paṇḍito sīlasaṁvuto; Nibbānagamanaṁ maggaṁ, khippameva visodhaye.
법구경 Dhammapada 288-289 배경
품의 마지막이자 두 게송이 한 흐름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빠따짜라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남편과 두 아이와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여인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가족이 소용없다는 냉정한 선언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은 사람 앞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따나(tāṇa)는 '막아 주는 것, 피난처'입니다. 가족이 사랑스럽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는 막아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무엇을 하라고 잇습니다. 이 품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어울립니다. 막아 줄 것이 없으니 길을 걸으라는 말입니다.
묵상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언제 알게 되었나요? 그 앎이 나를 외롭게 했나요, 아니면 일어서게 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