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말이 순수해도 계속 나아가다

양심과 신중함, 몸과 말의 순수함을 누적해 말한 뒤에도 목적을 다 이루었다고 만족하지 말라고 같은 경계를 되풀이합니다.

수행자들이여, 그대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양심과 신중함을 갖추었고, 몸과 말로 하는 행위가 순수하다. 이만하면 충분하고 할 일을 다했다. 수행자의 목적에 이르렀고 더 할 일은 없다.’ 그대들은 그만큼으로 만족할지도 모릅니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알립니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분명히 밝힙니다. ‘수행자의 목적을 찾는 그대들이여, 아직 더 할 일이 있는 동안 그 목적을 잃지 마십시오.’

Siyā kho pana, bhikkhave, tumhākaṁ evamassa: ‘hirottappenamha samannāgatā, parisuddho no kāyasamācāro, parisuddho vacīsamācāro; alamettāvatā katamettāvatā, anuppatto no sāmaññattho, natthi no kiñci uttariṁ karaṇīyan’ti tāvatakeneva tuṭṭhiṁ āpajjeyyātha. Ārocayāmi vo, bhikkhave, paṭivedayāmi vo, bhikkhave: ‘mā vo sāmaññatthikānaṁ sataṁ sāmaññattho parihāyi, sati uttariṁ karaṇīye’.

맛지마 니까야 MN 39 앗사뿌라 긴 경 (Mahāassapurasutta)

배경

이번 만족 문장은 앞의 양심·신중함과 몸의 순수함에 말의 순수함을 더해 세 단계의 성취를 셉니다. 나머지 네 판단과 두 번의 호격, 알림과 분명히 밝힘, 더 할 일이 있다는 조건은 바뀌지 않습니다. 같은 말이 다시 나오는 까닭은 이미 닦은 기초 위에 다음 실천을 더한다는 누적 구조를 보이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늘어나는 목록은 성취를 무효로 만들지 않으면서 범위를 확장합니다. 몸만 바르고 말이 흐려질 수 있는 틈을 닫고, 이어 마음의 행위까지 살피게 하는 전환입니다.

묵상

몸과 말이라는 두 영역을 함께 돌아볼 때 한쪽은 비교적 분명하고 다른 쪽은 잘 보이지 않을 수 있나요? 모두 잘해야 한다고 채점하기보다, 행동과 말 사이에서 방향이 달랐던 한 순간이 있는지만 살펴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