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행복을 버려서
큰 행복을 볼 수 있다면,
지혜로운 이는 그 큰 행복을
똑똑히 보며
작은 행복을 버리느니라.
Mattāsukhapariccāgā, passe ce vipulaṁ sukhaṁ; Caje mattāsukhaṁ dhīro, sampassaṁ vipulaṁ sukhaṁ.
법구경 Dhammapada 290 배경
맛따수카(mattāsukha)는 '작은 만큼의 행복'이라는 뜻이고, 위뿔라수카(vipulasukha)는 그와 맞선 '넉넉한 행복'입니다. 이 게송은 15품에서 다룬 행복의 문제를 다시 엽니다. 다만 거기서는 행복의 종류를 갈랐고 여기서는 행복의 크기를 견줍니다. 지금 손에 쥔 작은 행복을 놓아야 큰 행복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두 행복을 나란히 놓고 저울질하라는 말이 아니라, 작은 쪽을 붙든 손을 먼저 펴야 큰 쪽이 눈에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21품은 이렇게 하나의 흐름으로 묶이지 않는 낱개의 가르침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이 품의 이름 '여러 가지'가 뜻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묵상
지금 붙들고 있는 작은 행복이, 어쩌면 더 큰 무언가를 보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잠깐 손을 펴 보면 무엇이 보일까요?
남의 괴로움을 딛고서
제 행복을 바라는 이는
원한과 얽히고 얽혀
그 원한에서 벗어나지 못하느니라.
Paradukkhūpadhānena, attano sukhamicchati; Verasaṁsaggasaṁsaṭṭho, verā so na parimuccati.
법구경 Dhammapada 291 배경
웨라(vera)는 '원한'입니다. 웨라상가상삿토(verasaṁsaggasaṁsaṭṭho)는 그 원한과 '얽히고 얽혀 있음'을 가리킵니다. 원한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서로 주고받으며 이어진다는 그림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닭의 알을 먹던 한 여인이 여러 생에 걸쳐 상대를 바꾸어 가며 원한을 주고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내 행복을 위해 남에게 고통을 지우면 그 자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상대도 되갚을 마음을 품게 되고, 그 마음이 다시 나에게 돌아옵니다. 그래서 이 게송은 원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벗어나는 길을 따로 말하지 않은 것은, 애초에 그 얽힘을 만들지 않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묵상
누군가를 딛고 서야 내가 편해지는 자리가 있다면, 그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다른 방식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요?
해야 할 일을 내던지고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오히려 한다면,
거만하고 흐트러진 그런 이는
번뇌가 늘어나느니라.
Yañhi kiccaṁ apaviddhaṁ, akiccaṁ pana karīyati; Unnaḷānaṁ pamattānaṁ, tesaṁ vaḍḍhanti āsavā.
법구경 Dhammapada 292 배경
이 게송과 다음 게송은 짝을 이룹니다. 여기서는 그르친 경우를, 다음에서는 바로 선 경우를 말합니다. 운날라(unnaḷa)는 '거만한'이라는 뜻으로, 속이 빈 줄기처럼 허세만 찬 상태를 가리킵니다. 해야 할 일을 내던지고 하지 않아도 될 일에 매달리는 사람의 속을 짚은 낱말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아사와(āsava, 흘러드는 것)가 늘어난다고 합니다. 아사와는 겉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새어 나오는 오염을 가리키는 말로, 이 책 여러 자리에서 되풀이해 나옵니다. 무엇을 하느냐 못지않게 무엇을 미루고 있느냐가 그 사람 안에서 무엇이 자라는지를 정한다는 것입니다.
묵상
해야 할 일을 미뤄 두고 다른 일에 매달린 요즘이 있나요? 그 미룸이 마음 안에서 무엇을 자라게 하고 있을지 궁금해지네요.
몸을 향한 알아차림이
늘 잘 세워진 이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가까이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꾸준히 행하나니,
알아차리고 또렷이 아는 이에게는
번뇌가 사라지느니라.
Yesañca susamāraddhā, niccaṁ kāyagatā sati; Akiccaṁ te na sevanti, kicce sātaccakārino; Satānaṁ sampajānānaṁ, atthaṁ gacchanti āsavā.
법구경 Dhammapada 293 배경
앞 게송의 짝으로, 여기서는 반대의 경우를 말합니다. 카야가따 사띠(kāyagatā sati)는 '몸을 향한 마음챙김'으로, 뒤에 나오는 299게송에서도 그대로 다시 나옵니다. 몸에 마음을 붙들어 두는 것이 흐트러짐을 막는 첫 자리라는 뜻입니다. 사따낭 삼빠자나낭(satānaṁ sampajānānaṁ)은 '마음챙기고 또렷이 아는 이들에게는'이라는 뜻인데, 앞 게송의 흐트러진 이들과 정확히 맞섭니다. 앞에서는 아사와가 늘어난다고 했고 여기서는 아사와가 사라진다고 합니다. 늘고 주는 것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무엇에 마음을 붙들어 두었느냐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묵상
무엇을 아느냐보다 무엇에 마음을 붙들어 두었느냐를 물어본 적 있나요? 오늘 하루, 내 마음은 주로 어디에 가 있었나요?
어머니를 죽이고 아버지를 죽이고
두 무사 계급의 왕을 죽이고,
나라를 그 신하와 함께 멸하고도
바라문은 근심 없이 나아가느니라.
Mātaraṁ pitaraṁ hantvā, rājāno dve ca khattiye; Raṭṭhaṁ sānucaraṁ hantvā, anīgho yāti brāhmaṇo.
법구경 Dhammapada 294 배경
이 게송은 법구경에서 가장 거친 말로 되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살인과 정복을 두둔하는 말이 되는데, 그렇게 읽는 전통은 없습니다. 다음 게송이 그 까닭을 보여 줍니다. 거기서는 '호랑이 같은 다섯째'를 죽인다고 하는데, 이것은 문자 그대로 읽을 수가 없습니다. 두 게송이 같은 틀의 짝이므로 앞의 것도 같은 층위에서 읽어야 합니다. 옛 주석은 하나씩 짚어 놓았습니다. 어머니는 다시 태어나게 하는 목마름이고, 아버지는 '나'라고 여기는 자만이며, 두 왕은 한쪽으로 치우친 두 가지 견해이고, 나라와 그 신하는 감각이 닿는 자리와 거기 들러붙은 즐김입니다. 그러니 이 게송이 말하는 것은 안에서 끊어야 할 것들의 목록입니다. 한역 법구경이 이 자리를 한 겹 눅여 옮기고 아버지를 아예 지운 것도 이 표현이 그만큼 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라문은 신분이 아니라 안이 온전히 씻긴 사람을 가리킵니다.
묵상
가장 끊기 어려운 것에 이름을 붙인다면 무엇이 될까요? 목마름일까요, 나라는 자만일까요, 아니면 오래 붙들어 온 어떤 생각일까요?
어머니를 죽이고 아버지를 죽이고
학식 있는 왕 둘을 죽이고,
호랑이 같은 다섯째를 죽이고도
바라문은 근심 없이 나아가느니라.
Mātaraṁ pitaraṁ hantvā, rājāno dve ca sotthiye; Veyagghapañcamaṁ hantvā, anīgho yāti brāhmaṇo.
법구경 Dhammapada 295 배경
앞 게송과 같은 틀에 다른 낱말을 넣은 짝입니다. 이번에는 두 왕 대신 '학식 있는 이 둘'을 죽이고, 다섯째로 호랑이를 죽인다고 합니다. 웨약가빤짜망(veyagghapañcamaṁ)은 '호랑이 같은 다섯째'라는 뜻으로, 앞 게송의 신하 딸린 나라 대신 들어온 자리입니다. 주석 전통에서는 이 다섯째 자리를 다섯 장애에 빗대어 읽어 왔습니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다섯 가지가 호랑이처럼 사나운 것으로 그려진 셈입니다. 같은 형식을 두 번 거듭 쓰는 것은 이 품 곳곳에서 보이는 방식으로, 하나의 충격이 우연이 아니라 자리 잡은 가르침임을 확인시킵니다.
묵상
다섯 번째로 든 것이 나에게는 무엇에 가까울까요? 가장 사납게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부터 하나씩 짚어 볼 수 있을까요?
고타마의 제자들은
늘 온전히 깨어 있나니,
그들에게는 낮에도 밤에도
늘 부처님을 향한 알아차림이 있느니라.
Suppabuddhaṁ pabujjhanti, sadā gotamasāvakā; Yesaṁ divā ca ratto ca, niccaṁ buddhagatā sati.
법구경 Dhammapada 296 배경
수빠붓당(suppabuddhaṁ)은 '온전히 깨어난'이라는 뜻으로, 앞서 여러 자리에서 쓰인 '깨어 있음'과 같은 자리를 다른 낱말로 짚은 것입니다. 이 게송부터 301게송까지 여섯 편은 같은 틀에 마지막 한 낱말만 바꾸어 거듭됩니다. 고타마사와까(gotamasāvakā, 고타마의 제자들)라는 표현도 눈에 띕니다. 법구경은 대개 부처님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데, 여기서는 직접 이름을 불러 그 제자 됨을 또렷이 합니다. 첫 자리에 놓인 것은 부처님을 향한 마음챙김입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정해진 시간에만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바탕에 늘 놓아 둔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묵상
낮에도 밤에도 마음 한구석에 늘 놓아 두는 것이 있나요? 그것이 지금 나를 어디로 이끌고 있을까요?
고타마의 제자들은
늘 온전히 깨어 있나니,
그들에게는 낮에도 밤에도
늘 가르침을 향한 알아차림이 있느니라.
Suppabuddhaṁ pabujjhanti, sadā gotamasāvakā; Yesaṁ divā ca ratto ca, niccaṁ dhammagatā sati.
법구경 Dhammapada 297 배경
앞 게송과 같은 틀에서 마지막 낱말만 담마가따 사띠(dhammagatā sati, 가르침을 향한 마음챙김)로 바뀌었습니다. 14품에서 깨달은 이와 가르침과 무리를 의지처로 삼는다고 했던 자리와 이어지는 대목입니다. 다만 거기서는 의지처로 삼아 네 가지 진리를 본다는 데까지 나아갔고, 여기서는 그 대상을 낮이나 밤이나 놓지 않는 마음가짐 자체를 말합니다. 의지하는 것과 마음에 늘 두는 것은 다른 결의 일입니다. 가르침을 배우는 것과 가르침을 늘 마음에 놓아 두는 것 사이에도 그런 결의 차이가 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묵상
배운 가르침을 마음에 늘 놓아 두는 것과, 필요할 때만 꺼내 쓰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나는 어느 쪽에 가까운가요?
고타마의 제자들은
늘 온전히 깨어 있나니,
그들에게는 낮에도 밤에도
늘 승가를 향한 알아차림이 있느니라.
Suppabuddhaṁ pabujjhanti, sadā gotamasāvakā; Yesaṁ divā ca ratto ca, niccaṁ saṅghagatā sati.
법구경 Dhammapada 298 배경
세 번째로는 상가가따 사띠(saṅghagatā sati, 승가를 향한 마음챙김)가 놓였습니다. 승가는 낱낱의 수행자가 아니라 그들이 이룬 무리 전체를 가리킵니다. 앞의 두 게송이 깨달은 이와 그 가르침이라는, 한 사람과 한 가르침을 향했다면 여기서는 그것을 함께 살아가는 여럿을 향합니다. 홀로 애쓰는 일과 무리 안에서 애쓰는 일이 함께 마음에 놓여 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305게송이 이 품의 끝에서 홀로 지내는 즐거움을 노래하는 것과 견주어 보면, 이 품이 혼자 있음과 함께 있음을 어느 한쪽으로 몰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묵상
혼자 애쓰는 시간과 함께 애쓰는 이들을 마음에 두는 시간, 요즘 어느 쪽이 더 많은가요? 둘 사이에 균형이 있나요?
고타마의 제자들은
늘 온전히 깨어 있나니,
그들에게는 낮에도 밤에도
늘 몸을 향한 알아차림이 있느니라.
Suppabuddhaṁ pabujjhanti, sadā gotamasāvakā; Yesaṁ divā ca ratto ca, niccaṁ kāyagatā sati.
법구경 Dhammapada 299 배경
네 번째는 293게송에서 이미 나온 카야가따 사띠(kāyagatā sati, 몸을 향한 마음챙김)입니다. 그때는 그것이 잘 세워진 이에게 아사와가 사라진다고 했고, 여기서는 그것을 낮과 밤 가리지 않고 지니는 고타마의 제자들을 말합니다. 몸은 이 여섯 게송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 밖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대상입니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무리를 향하던 마음챙김이 여기서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옵니다. 밖을 향한 마음과 안을 향한 마음이 번갈아 놓이며, 어느 하나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묵상
밖으로 향하던 마음이 다시 몸으로 돌아오는 순간을 느껴 본 적 있나요? 지금 이 순간, 내 몸은 어떤 상태인가요?
고타마의 제자들은
늘 온전히 깨어 있나니,
그들에게는 낮에도 밤에도
남을 해치지 않음을 즐기는 마음이 있느니라.
Suppabuddhaṁ pabujjhanti, sadā gotamasāvakā; Yesaṁ divā ca ratto ca, ahiṁsāya rato mano.
법구경 Dhammapada 300 배경
다섯 번째는 앞의 넷과 결이 다릅니다. 앞의 넷이 무엇을 마음에 두느냐를 말했다면 여기서는 무엇을 즐기느냐를 말합니다. 아힝사(ahiṁsā)는 '해치지 않음'으로, 10품 전체가 이 낱말 하나를 두고 펼쳐졌던 것을 기억한다면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그 품에서는 막대기를 든 손과 매 맞는 목숨을 자리에 놓고 물었고, 여기서는 그 결론만 짧게 되짚습니다. 라또 마노(rato mano)는 '즐기는 마음'이라는 뜻인데, 참는 마음이 아니라 즐기는 마음이라 한 것이 눈에 띕니다. 해치지 않는 일이 억누름이 아니라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묵상
해치지 않는 일이 참는 일이 아니라 즐기는 일이 될 수 있을까요? 그 차이를 나는 실제로 느껴 본 적이 있나요?
고타마의 제자들은
늘 온전히 깨어 있나니,
그들에게는 낮에도 밤에도
닦음을 즐기는 마음이 있느니라.
Suppabuddhaṁ pabujjhanti, sadā gotamasāvakā; Yesaṁ divā ca ratto ca, bhāvanāya rato mano.
법구경 Dhammapada 301 배경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은 바와나야 라또 마노(bhāvanāya rato mano), '닦음을 즐기는 마음'입니다. 앞의 다섯이 저마다 다른 대상을 향한 마음챙김이었다면 이것은 그 마음챙김을 닦아 나가는 일 자체를 즐긴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게송은 앞의 다섯을 마무리 짓는 자리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향하든 마음챙김은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거듭 닦아야 하는 일이라는 뜻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여섯 게송을 나란히 놓고 보면, 밖으로는 부처님과 가르침과 무리를, 안으로는 몸과 해치지 않음과 닦음 자체를 고르게 마음에 두라는 그림이 완성됩니다.
묵상
닦아 나가는 과정 자체를 즐긴 적이 있나요, 아니면 늘 결과만 바라보았나요? 오늘 그 과정에서 무엇을 즐길 수 있을까요?
출가하기도 어렵고 그 삶을 즐기기도 어려우며,
살림살이도 살아가기 괴로우니라.
맞지 않는 이와 함께 사는 것도 괴롭고
괴로움에 쫓기며 길 떠도는 것도 괴로우니,
그러므로 길 떠도는 자가 되지 말고
괴로움에 쫓기는 자가 되지 말지니라.
Duppabbajjaṁ durabhiramaṁ, Durāvāsā gharā dukhā; Dukkhosamānasaṁvāso, Dukkhānupatitaddhagū; Tasmā na caddhagū siyā, Na ca dukkhānupatito siyā.
법구경 Dhammapada 302 배경
두빱바장(duppabbajjaṁ)은 '출가하기 어려움'이고 두라와사(durāvāsā)는 '살아가기 어려운 살림살이'입니다. 두 낱말을 나란히 놓아 어느 쪽에도 쉬운 길이 없다고 말합니다. 팔리의 끝은 '그러니 길 떠도는 자가 되지 말고 괴로움에 쫓기는 자가 되지 말라'는 권고로 맺습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어려움 가운데 존재보다 더한 것이 없다'는 교리적 단정으로 바꾸었습니다. 무엇을 하라던 말이 무엇이 어떻다는 말로 바뀐 셈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숲에서 홀로 지내기를 힘겨워하던 왓지 출신 수행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어느 쪽에도 쉬운 자리가 없다면, 남은 것은 그 어려움을 마주하는 태도뿐일지 모릅니다.
묵상
이쪽도 저쪽도 쉽지 않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나요? 그럴 때 나는 무엇을 붙들고 그 어려움을 마주해 왔나요?
믿음이 있고 됨됨이를 갖춘 이는
명예와 재물을 두루 갖추나니,
어느 곳을 가더라도
바로 그곳에서 존경받느니라.
Saddho sīlena sampanno, yasobhogasamappito; Yaṁ yaṁ padesaṁ bhajati, tattha tattheva pūjito.
법구경 Dhammapada 303 배경
삿도(saddho)는 '믿음이 있는'이고 실라(sīla)는 몸에 밴 됨됨이입니다. 두 가지에 명예와 재물까지 더해 네 가지를 나란히 놓았습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주인공으로 재가 신자 찟따 장자를 전합니다. 그는 여러 경에서 가르침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뛰어난 재가자로 이름났던 인물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를 가든 존경받는다는 것은 그저 좋은 평판을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야소보가사맙비또(yasobhogasamappito)는 '명예와 재물을 두루 갖춘'이라는 뜻인데, 이 게송은 그것을 목표로 내걸지 않습니다. 믿음과 됨됨이가 먼저 놓이고 명예와 재물은 그 뒤에 따라오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묵상
명예와 재물을 얻는 데 먼저 힘썼을 때와, 믿음과 됨됨이를 먼저 갖추었을 때는 어떻게 달랐나요? 그 차이를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참된 이는 멀리서도
히말라야 산처럼 환히 드러나고,
참되지 못한 이는
밤에 쏘아진 화살처럼 보이지 않느니라.
Dūre santo pakāsenti, himavantova pabbato; Asantettha na dissanti, rattiṁ khittā yathā sarā.
법구경 Dhammapada 304 배경
산또(santo)는 '참된 이들'이고 아산따(asanta)는 그 반대입니다. 히말라야 산과 밤에 쏘아진 화살이라는 두 비유가 정확히 맞섭니다. 산은 멀리서도 드러나고 화살은 가까이 있어도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아나타삔디까 장자의 딸 쭐라수받다가 시집간 집안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됨됨이를 드러내 보인 이야기를 전합니다. 참됨은 스스로 나서서 알리지 않아도 드러난다는 것이 이 게송의 요지입니다. 19품에서 다룬 겉모습과 실제의 문제가 여기서는 시간과 거리의 문제로 다시 놓입니다. 가까이 오래 두고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참됨이라는 것입니다.
묵상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것이 있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나에게도 그런 것이 있을까요?
홀로 앉고 홀로 누우며
게으르지 않게 살아가고,
홀로 자신을 다스리며
숲속에서 즐거이 지낼지니라.
Ekāsanaṁ ekaseyyaṁ, eko caramatandito; Eko damayamattānaṁ, vanante ramito siyā.
법구경 Dhammapada 305 배경
에까사낭 에까세이양(ekāsanaṁ ekaseyyaṁ)은 '홀로 앉고 홀로 누움'이라는 뜻으로, 에까(eka, 홀로)가 네 줄에 걸쳐 거듭 나옵니다. 이 되풀이 자체가 게송의 뜻을 이미 보여 줍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홀로 지내기를 즐겨 하던 한 장로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다마야맛따낭(damayamattānaṁ)은 '자신을 다스리며'라는 뜻인데, 12품에서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라고 했던 것과 이어집니다. 이 품의 마지막 자리에 홀로 있음이 놓인 것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298게송에서는 승가, 곧 함께 있음을 향한 마음챙김을 말했는데, 품의 끝에서는 홀로 있음의 즐거움으로 맺습니다. 둘 사이에 우열을 매기지 않고 나란히 놓아 둔 셈입니다.
묵상
함께 있음과 홀로 있음, 지금 나에게 더 필요한 쪽은 어느 쪽일까요? 둘 중 하나를 억지로 고를 필요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