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운 곳

괴로운 곳은 누가 내리는 벌이 아니라 스스로 지은 일과 삐뚤어진 견해가 만들어 내는 자리다

거짓을 말하는 이는 괴로운 곳에 떨어지고 해 놓고도 하지 않았다 말하는 이도 다르지 않게 떨어지느니라. 천한 행위를 지은 이 사람들은 죽은 뒤 저 세상에서 똑같아지느니라.

Abhūtavādī nirayaṁ upeti, Yo vāpi katvā na karomi cāha; Ubhopi te pecca samā bhavanti, Nihīnakammā manujā parattha.

법구경 Dhammapada 306

배경

이 품의 이름이기도 한 니라야(niraya)는 흔히 지옥으로 옮기지만, 본디 '즐거움이 없는 곳'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이 게송은 거짓말의 두 얼굴을 나란히 놓습니다.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꾸미는 것과, 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잡아떼는 것입니다. 방향은 반대이지만 사실을 뒤집는다는 점에서 같다고 말합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경쟁하던 무리가 한 여성 유행자를 내세워 부처님을 헛소문으로 모함하려다 그 속임수가 끝내 드러난 일을 전합니다. 여기서 괴로운 곳은 누군가 내리는 벌이 아니라, 거짓을 쌓아 온 자리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결과로 그려집니다.

묵상

들킬 일 없다고 여기며 슬쩍 넘긴 거짓말이 있나요? 작게 시작한 거짓이 시간이 지나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워진 적은 없었는지, 오늘 한 번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가사를 두른 이가 많다 해도 그 가운데 나쁜 성품으로 스스로를 다잡지 못하는 이들이 있느니라. 그 악한 이들은 악한 행위로 말미암아 괴로운 곳에 태어나느니라.

Kāsāvakaṇṭhā bahavo, pāpadhammā asaññatā; Pāpā pāpehi kammehi, nirayaṁ te upapajjare.

법구경 Dhammapada 307

배경

가사(kāsāva)는 물들인 천으로, 이 무렵 수행자임을 나타내는 겉옷이었습니다. 이 게송은 그 옷을 걸쳤다는 사실과 그 옷에 걸맞게 사는 일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옷은 누구나 두를 수 있지만 스스로를 다잡는 일은 옷이 대신해 주지 않습니다. 다음 게송도 같은 자리를 다른 각도에서 짚습니다. 겉모습을 지녔다고 해서 그 자리에 맞는 삶까지 저절로 따라오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게송이 겨눈 것은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라, 자리와 삶이 어긋날 때 생기는 결과입니다. 괴로운 곳에 태어난다는 말도 옷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다잡지 못한 채 쌓인 행위가 낳는 결과를 가리킵니다.

묵상

겉모습은 갖췄는데 마음은 따라가지 못한다고 느낀 순간이 있나요? 그 틈을 억지로 메우기보다, 오늘 하나만 정직하게 손봐 본다면 무엇을 고르시겠어요?

몸에 밴 것이 무너져 절제를 잃은 이가 나라가 주는 밥을 받아먹는 것보다, 불꽃처럼 뜨겁게 달군 쇠구슬을 삼키는 것이 차라리 나으니라.

Seyyo ayoguḷo bhutto, tatto aggisikhūpamo; Yañce bhuñjeyya dussīlo, raṭṭhapiṇḍamasaññato.

법구경 Dhammapada 308

배경

실라(sīla)는 흔히 계율로 옮기지만 본래 몸에 밴 됨됨이에 가깝습니다. 이 게송은 그것이 무너진 채 시주 받은 밥을 먹는 일을, 뜨거운 쇠구슬을 삼키는 일에 견줍니다. 몸에 상처 하나로 끝나는 일과, 절제 없이 받은 밥이 남기는 결과를 나란히 놓은 것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흉년에 굶주리던 한 무리의 수행자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서로를 높여 주며 실제보다 나은 경지에 이른 것처럼 보여 밥을 얻어낸 일을 전합니다. 받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받을 자격을 스스로 꾸며 낸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 일은 훗날 계율의 한 조항으로 남았습니다.

묵상

받을 자격이 없는 걸 알면서 받아 본 적이 있나요? 그 순간 편했던 마음이 나중에 어떤 무게로 돌아왔는지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방심하여 남의 배우자를 범하는 이는 네 가지 처지에 빠지느니라. 좋은 일을 잃음이 첫째요 편히 잠들지 못함이 둘째며, 비난받음이 셋째요 괴로운 곳에 떨어짐이 넷째이니라.

Cattāri ṭhānāni naro pamatto, Āpajjati paradārūpasevī; Apuññalābhaṁ na nikāmaseyyaṁ, Nindaṁ tatīyaṁ nirayaṁ catutthaṁ.

법구경 Dhammapada 309

배경

이 게송은 남의 배우자를 범하는 일이 낳는 결과를 넷으로 나누어 짚습니다. 아뿐냐라바(apuññalābha)는 '좋은 일을 잃음'으로, 다른 세 가지보다 앞에 놓인 것이 눈에 띕니다. 잠 못 이룸과 비난과 괴로운 곳보다 먼저, 이미 쌓아 온 좋은 것이 새어 나간다는 뜻입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케마카라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 여러 차례 남의 아내를 범하고도 집안의 힘으로 오래 벌을 피했던 일을 전합니다. 이 게송이 겨눈 것은 처벌을 받는지 아닌지가 아니라, 그 행위가 그 사람 안에서 무엇을 갉아 가는지입니다. 다음 게송이 그 대가를 이어서 그립니다.

묵상

눈에 보이는 벌보다 먼저 새어 나가는 것이 있다는 말이 낯설게 들리나요? 지금 내 안에서 조용히 줄어들고 있는 것은 무엇일지 헤아려 보면 어떨까요?

좋은 일을 잃고 갈 곳도 나쁘며 두려워하는 남자와 여자가 나누는 즐거움도 잠깐일 뿐이니라. 왕은 또한 무거운 벌을 내리나니 그러므로 사람은 남의 배우자를 가까이하지 말지니라.

Apuññalābho ca gatī ca pāpikā, Bhītassa bhītāya ratī ca thokikā; Rājā ca daṇḍaṁ garukaṁ paṇeti, Tasmā naro paradāraṁ na seve.

법구경 Dhammapada 310

배경

앞 게송이 넷으로 나눈 결과를 이 게송이 다시 훑으며 하나를 더 보탭니다. 토키까(thokikā)는 '잠깐뿐인'이라는 뜻으로, 두려움 속에서 훔친 즐거움이 얼마나 짧은지를 짚습니다. 오래 두려워하며 얻은 것이 잠깐이라면 셈이 맞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뒷줄에는 왕이 내리는 무거운 벌이 나오는데, 이는 그 사회가 실제로 두었던 형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앞 게송의 괴로운 곳이 스스로 지어 가는 결과를 그렸다면, 여기서는 사람 사이의 법과 셈까지 함께 놓입니다. 안으로도 밖으로도 감당할 것이 크다는 말입니다.

묵상

짧은 즐거움과 오래가는 대가를 저울질해 본 적이 있나요? 그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었는지, 지금은 어떻게 보이나요?

쿠사 풀을 잘못 움켜쥐면 바로 손을 베이듯이, 애쓰는 이의 삶을 잘못 다루면 괴로운 곳으로 끌려가느니라.

Kuso yathā duggahito, hatthamevānukantati; Sāmaññaṁ dupparāmaṭṭhaṁ, nirayāyupakaḍḍhati.

법구경 Dhammapada 311

배경

쿠사 풀은 잎 가장자리가 날카로워 잡는 방향을 잘못 잡으면 바로 손을 베는 풀입니다. 이 게송은 그 풀을 사마나(samaṇa, 애쓰는 이)의 삶에 견줍니다. 사마냐(sāmañña)는 그 삶의 방식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 비유가 벌을 그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쿠사 풀은 누가 벌하지 않아도 잘못 쥐면 손을 벱니다. 마찬가지로 애써 나선 삶도 잘못 다루면 그 자체로 힘든 자리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 두 게송이 '잘못 다룸'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이어서 풀어냅니다.

묵상

방향을 잘못 잡아 오히려 나를 다치게 한 노력이 있었나요? 애쓰는 마음 자체보다 그 쥐는 방식을 살펴보면 어떨까요?

무엇이든 느슨한 행위이거나 더럽혀진 다짐이 있다면, 그 미심쩍은 청정한 삶은 큰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

Yaṁ kiñci sithilaṁ kammaṁ, saṅkiliṭṭhañca yaṁ vataṁ; Saṅkassaraṁ brahmacariyaṁ, na taṁ hoti mahapphalaṁ.

법구경 Dhammapada 312

배경

앞 게송이 잘못 다루면 괴로운 곳으로 끌려간다고 했는데, 이 게송은 그 '잘못 다룸'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짚습니다. 시틸라(sithila)는 '느슨한, 헐거운'이라는 뜻입니다. 크게 어긋난 행위가 아니라 그저 헐거워진 행위와 더럽혀진 다짐을 말합니다. 상깟사라(saṅkassara)는 '미심쩍은, 의심스러운'이라는 뜻으로 청정한 삶을 꾸미는데, 아예 그른 삶이 아니라 스스로도 미덥지 않은 삶을 가리킵니다. 큰 잘못을 저질러야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다짐이 조금씩 헐거워지는 것만으로도 열매가 부실해진다는 말입니다. 다음 게송은 이와 반대로 굳게 힘쓰는 쪽을 그립니다.

묵상

굳게 다짐했다가 어느새 느슨해진 일이 있나요? 그 헐거워짐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돌아보면 무엇이 보이나요?

할 일이라면 굳게 힘써 나아갈지니라. 느슨한 떠돌이 수행자는 오히려 먼지를 더 흩뿌릴 뿐이니라.

Kayirā ce kayirāthenaṁ, daḷhamenaṁ parakkame; Sithilo hi paribbājo, bhiyyo ākirate rajaṁ.

법구경 Dhammapada 313

배경

앞 게송이 헐거워진 다짐을 말했다면, 이 게송은 그 반대편에서 답을 내놓습니다. 할 일이면 굳게 힘써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뒷줄의 그림입니다. 라자(rajaṃ, 먼지)를 느슨한 떠돌이 수행자가 오히려 더 흩뿌린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 그 자리에 머무를 것 같지만, 어중간하게 나선 걸음은 오히려 먼지를 더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가만히 있는 것과 굳게 나아가는 것 사이에서, 이도 저도 아닌 걸음이 가장 어수선하다는 말입니다. 이 품 앞머리의 무거운 그림들과 달리, 여기서는 벌이 아니라 헛수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묵상

어중간하게 걸치고 있어 오히려 더 헤매는 일이 있나요? 아예 놓거나 제대로 붙잡거나, 둘 중 어느 쪽이 더 홀가분할까요?

나쁜 짓은 하지 않는 것이 나으니, 저지르고 나면 뒤에 애태우게 되느니라. 좋은 일을 한 뒤에는 뉘우치지 않으니 한 일 가운데는 좋은 일을 함이 나으니라.

Akataṁ dukkaṭaṁ seyyo, pacchā tappati dukkaṭaṁ; Katañca sukataṁ seyyo, yaṁ katvā nānutappati.

법구경 Dhammapada 314

배경

이 게송은 좋고 나쁨을 뒤에서부터 재는 방법을 보여 줍니다. 땁빠띠(tappati)는 '애태우다, 속을 태우다'라는 뜻이고, 난누땁빠띠(nānutappati)는 그 반대로 '뉘우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저지르는 순간의 기준이 아니라 나중에 돌아볼 때의 마음을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 게송이 다정한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지금 무엇이 옳은지 헷갈릴 때도, 그 일을 한 뒤 마음이 어떨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자신을 괴롭힐 일이라면 하지 않는 편이 낫고, 해도 뉘우치지 않을 일이라면 그것이 좋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책을 부추기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를 살피는 실마리 하나를 건네는 말씀입니다.

묵상

돌아봤을 때 마음이 무거워질 일과 가벼워질 일을 구별해 본 적 있나요? 지금 망설이는 일이 있다면, 나중의 내 마음에 슬쩍 물어보면 어떨까요?

변경의 성이 안팎으로 지켜지듯이 이와 같이 자신을 지킬지니라. 그대들의 기회를 놓치지 말지니라. 기회를 놓친 이들은 괴로운 곳에 떨어져 슬퍼하느니라.

Nagaraṁ yathā paccantaṁ, guttaṁ santarabāhiraṁ; Evaṁ gopetha attānaṁ, khaṇo vo mā upaccagā; Khaṇātītā hi socanti, nirayamhi samappitā.

법구경 Dhammapada 315

배경

변경의 성은 나라의 끝, 적이 넘볼 수 있는 자리에 세운 성을 가리킵니다. 그런 성은 안쪽 문단속과 바깥쪽 경계를 함께 갖춥니다. 이 게송은 그 이중의 지킴을 자기 자신에게 그대로 옮겨 놓습니다. 카노(khaṇo)는 '기회, 그 순간'이라는 뜻으로, 이 책에서 몇 차례 되풀이해 쓰는 말입니다. 지금 마음을 챙길 수 있는 그 순간이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을 여러 수행자에게 함께 내리신 가르침으로 전합니다. 마지막 줄의 슬픔은 심판받아서가 아니라, 지나간 기회를 스스로 돌아볼 때 이는 슬픔에 더 가깝습니다.

묵상

마음을 챙길 수 있었는데 흘려보낸 순간이 떠오르나요? 다음에 비슷한 순간이 오면 어떻게 다르게 잡아 보고 싶나요?

부끄러워할 것이 아닌 일에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워할 일에는 부끄러워하지 않느니라. 삐뚤어진 견해를 지닌 살아 있는 것들은 나쁜 길로 가느니라.

Alajjitāye lajjanti, lajjitāye na lajjare; Micchādiṭṭhisamādānā, sattā gacchanti duggatiṁ.

법구경 Dhammapada 316

배경

알라지따예(alajjitāye)와 라지따예(lajjitāye)는 한 글자 차이지만 뜻은 정반대입니다. 부끄러워할 것이 아닌 것과 부끄러워할 것, 이 둘의 자리를 헷갈리는 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이 게송의 인연담 제목은 니간타(nigaṇṭha)를 가리키는데, 이는 자이나 고행자들을 이르던 말입니다. 무엇을 부끄럽게 여기고 무엇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지는 사람마다, 전통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게송이 짚는 것은 그 기준 자체가 삐뚤어져 있을 때 생기는 문제입니다. 자잘한 일에는 낯을 붉히면서 정작 중요한 일에는 태연한 경우, 부끄러움이라는 감정 자체보다 그 감정이 향하는 자리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묵상

작은 실수엔 낯이 뜨거워지면서 정작 중요한 일엔 태연했던 적이 있나요? 부끄러움이 향하는 자리를 한번 점검해 보면 어떨까요?

두려울 것 없는 데서 두려움을 보고 두려운 데서는 두려움 없다고 보느니라. 삐뚤어진 견해를 지닌 살아 있는 것들은 나쁜 길로 가느니라.

Abhaye bhayadassino, bhaye cābhayadassino; Micchādiṭṭhisamādānā, sattā gacchanti duggatiṁ.

법구경 Dhammapada 317

배경

앞 게송과 뒷줄이 똑같습니다. 세 게송이 한 틀을 되풀이하며 부끄러움, 두려움, 허물이라는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같은 문제를 비춥니다. 이 게송이 다루는 것은 두려움의 자리입니다. 두려울 것 없는 곳에서 지레 겁을 먹고, 정작 두려워해야 할 곳에서는 태연한 경우입니다. 아바야(abhaya)는 '두려움 없음'을, 바야(bhaya)는 '두려움'을 뜻합니다. 이 둘이 뒤바뀌면 정작 힘을 쏟아야 할 자리와 애먼 자리를 헷갈리게 됩니다. 사소한 것에 마음을 다 쓰고 정말 중요한 자리에서는 무심해지는 셈입니다. 삐뚤어진 견해라는 말은 여기서 대단한 사상이 아니라, 이렇게 자리를 잘못 재는 것을 가리킵니다.

묵상

별일 아닌 것에 지레 겁먹고, 정작 중요한 일 앞에서는 태연했던 적이 있나요? 그 두려움이 정말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는지 돌아보면 어떨까요?

허물없는 데서 허물이라 여기고 허물 있는 데서는 허물없다고 보느니라. 삐뚤어진 견해를 지닌 살아 있는 것들은 나쁜 길로 가느니라.

Avajje vajjamatino, vajje cāvajjadassino; Micchādiṭṭhisamādānā, sattā gacchanti duggatiṁ.

법구경 Dhammapada 318

배경

세 게송의 마지막 자리로, 이번에는 왓자(vajja, 허물)를 다룹니다. 허물없는 일을 허물로 여기고, 정작 허물 있는 일은 허물없다고 보는 경우입니다. 이 게송의 인연담 제목은 다른 스승을 따르던 한 재가자를 가리킵니다. 무엇을 허물이라 배웠는지에 따라 판단의 잣대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허물, 이 세 게송이 짚은 세 자리는 모두 마음이 무언가를 놓고 판을 잘못 읽는 자리입니다. 벌을 그리는 말이 아니라, 판단의 눈금 자체가 어긋나 있으면 아무리 애써도 엉뚱한 곳에 힘을 쓰게 된다는 말입니다.

묵상

내가 배운 대로 허물이라 여긴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적 있나요? 그 잣대를 어디서 물려받았는지 한번 짚어 보면 어떨까요?

허물을 허물로 알고 허물없음을 허물없음으로 아느니라. 바른 견해를 지닌 살아 있는 것들은 좋은 길로 가느니라.

Vajjañca vajjato ñatvā, avajjañca avajjato; Sammādiṭṭhisamādānā, sattā gacchanti suggatiṁ.

법구경 Dhammapada 319

배경

앞의 세 게송이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허물의 자리를 잘못 짚는 경우를 늘어놓았다면, 이 게송이 그 답을 내놓습니다. 삼마딧티(sammādiṭṭhi, 바른 견해)는 미차딧티(micchādiṭṭhi, 삐뚤어진 견해)와 짝을 이루는 말로,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뜻합니다. 특별히 대단한 지혜가 아니라, 허물을 허물로, 허물없음을 허물없음으로 그저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이 품은 내내 괴로운 곳과 나쁜 길을 이야기해 왔지만, 마지막 게송은 좋은 길로 끝을 맺습니다. 앞선 게송들이 그린 결과는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보는 눈을 바로잡으면 방향이 바뀔 수 있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묵상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이 생각보다 단순하게 느껴지나요, 아니면 여전히 어렵게 느껴지나요? 오늘 하나만 제대로 보고 넘어간다면 무엇이었으면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