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름

그칠 줄 모르는 목마름이 어떻게 자라나고 어떻게 뿌리 뽑히는지를 다룬, 법구경에서 두 번째로 긴 스물여섯 편

마음을 놓고 사는 사람에게는 목마름이 덩굴처럼 자라나나니, 숲에서 열매를 찾아 헤매는 원숭이처럼 이리저리 내닫느니라.

Manujassa pamattacārino, Taṇhā vaḍḍhati māluvā viya; So plavatī hurā huraṁ, Phalamicchaṁva vanasmi vānaro.

법구경 Dhammapada 334

배경

이 품의 첫 게송입니다. 빠맛따짜리노(pamattacārino)는 '마음을 놓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특정한 행동이 아니라 깨어 있지 않은 상태 자체를 가리킵니다. 목마름이 자라나는 자리가 방일함이라는 것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마음을 음행에 놓아둔다'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면 문제의 원인이 방일함 전체에서 한 가지 행위로 좁아집니다. 21게에서 압빠마다(appamāda), 곧 '깨어 있음'을 계율이라는 낱말로 좁혀 옮긴 것과 같은 방식의 축소가 여기서도 일어난 셈입니다. 원숭이가 열매를 찾아 이 나무 저 나무로 내닫는 그림은, 목마름이 사람을 한자리에 머물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24품은 이 그림에서 시작해 뿌리를 파내는 자리까지 나아갑니다.

묵상

지금 마음이 놓여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요? 열매를 찾아 이리저리 내닫는 원숭이처럼, 무언가를 얻으려고 바쁘게 옮겨 다니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세요.

사람을 사로잡는 이 사악한 목마름, 세상을 옭아매는 이 얽어맴에 붙들리면, 비 맞아 자란 비라나 풀처럼 슬픔이 그에게서 자라나느니라.

Yaṁ esā sahate jammī, taṇhā loke visattikā; Sokā tassa pavaḍḍhanti, abhivaṭṭhaṁva bīraṇaṁ.

법구경 Dhammapada 335

배경

335게와 336게는 한 짝입니다. 이 게송은 목마름에 사로잡힌 경우를, 다음 게송은 그것을 이겨낸 경우를 말합니다. 얌미(jammī)는 '사악한, 천박한'이라는 뜻이며, 위삿띠까(visattikā)는 '얽어매는 것'입니다. 비 맞아 자란 비라나(bīraṇa) 풀은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로, 목마름에 붙들린 이에게서 슬픔이 걷잡을 수 없이 자란다는 그림입니다. 다음 게송에서는 같은 비라나 풀의 뿌리를 파내는 장면이 다시 나옵니다. 이 게송이 슬픔이 자라나는 쪽을 보여 준다면, 337게는 그 뿌리를 파내라고 말합니다. 짧은 두 줄 안에 붙들림의 무게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묵상

요즘 나를 사로잡고 있는 목마름이 있나요? 비 맞은 풀처럼 슬픔이 자라나고 있다면, 그 뿌리가 무엇인지부터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떨까요?

세상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 사악한 목마름, 그것을 이겨낸 이에게는, 연잎에서 구르는 물방울처럼 슬픔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느니라.

Yo cetaṁ sahate jammiṁ, taṇhaṁ loke duraccayaṁ; Sokā tamhā papatanti, udabinduva pokkharā.

법구경 Dhammapada 336

배경

이 게송은 335게와 짝을 이루며 뒤집습니다. 앞 게송이 목마름에 사로잡힌 경우였다면, 이 게송은 그것을 이겨낸 경우입니다. 사하떼(sahate)는 두 게송에서 같은 동사이지만, 335게에서는 목마름이 사람을 사로잡는 쪽이고 이 게송에서는 사람이 목마름을 이겨내는 쪽입니다. 이겨낸 이에게서는 슬픔이 연잎의 물방울처럼 굴러 떨어집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구도를 다르게 옮겼습니다. 못 이긴 경우로 바꾸고 물의 그림도 뒤집어, 굴러떨어지는 물방울이 못에 차오르는 물이 되었습니다. 335게와 짝을 이루던 반전이 한역에서는 사라진 셈입니다. 팔리는 분명히 이겨낸 이의 자유를 말합니다.

묵상

무언가를 완전히 이겨낸다는 것이 가능할까 싶을 때가 있나요? 슬픔이 연잎의 물방울처럼 굴러떨어지는 순간이 잠깐이라도 있었다면, 그때를 떠올려 보세요.

여기 모인 그대들 모두에게 복이 있기를 바라며 이르노니, 비라나 풀에서 뿌리를 찾듯 목마름의 뿌리를 파내라. 급류가 갈대를 꺾듯 마라가 그대들을 거듭거듭 꺾지 못하게 하라.

Taṁ vo vadāmi bhaddaṁ vo, yāvantettha samāgatā; Taṇhāya mūlaṁ khaṇatha, usīratthova bīraṇaṁ; Mā vo naḷaṁva sotova, māro bhañji punappunaṁ.

법구경 Dhammapada 337

배경

이 게송에는 이 품에서 드물게 청중을 향한 말이 나옵니다. '여기 모인 그대들'이라는 부름과 '복이 있기를'이라는 축원입니다. 우시랏토(usīrattho)는 '뿌리를 찾는 사람'으로, 비라나 풀에서 향기 나는 뿌리를 캐내듯 목마름의 뿌리를 파내라고 합니다. 앞 두 게송에서 비라나 풀이 슬픔이 자라나는 자리로 쓰였다면, 여기서는 같은 풀에서 뿌리를 찾는 손길로 쓰입니다. 마지막 두 줄은 급류가 갈대를 꺾듯 마라가 거듭거듭 사람을 꺾지 못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마라는 이 책에서 사람을 붙들어 두려는 힘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뿌리를 파내는 일과 마라에게 꺾이지 않는 일이 한 게송 안에서 이어집니다.

묵상

파내야 할 뿌리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루고 있는 일이 있나요? 급류에 꺾이는 갈대 대신 뿌리째 뽑는 쪽을 오늘 하루만이라도 골라 보면 어떨까요?

뿌리가 다치지 않고 굳건하면 나무는 베어져도 다시 움트나니, 이처럼 목마름의 뿌리 깊은 성향이 뽑히지 않으면, 이 괴로움은 거듭거듭 생겨나느니라.

Yathāpi mūle anupaddave daḷhe, Chinnopi rukkho punareva rūhati; Evampi taṇhānusaye anūhate, Nibbattatī dukkhamidaṁ punappunaṁ.

법구경 Dhammapada 338

배경

타하아누사예(taṇhānusaye)는 '목마름의 뿌리 깊은 성향'입니다. 아누사야(anusaya)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 아니라 마음 깊이 잠재해 있다가 조건이 갖추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성향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나무는 베어 내도 뿌리가 상하지 않으면 다시 움틉니다. 이 게송은 그 그림을 그대로 목마름에 옮겨 씁니다. 겉으로 드러난 갈망을 억누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뿌리 깊은 성향 자체가 뽑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선 337게가 뿌리를 파내라고 명령했다면, 이 게송은 왜 그래야 하는지를 나무의 비유로 보여 줍니다. 뿌리가 남으면 괴로움은 거듭거듭 돌아옵니다.

묵상

겉으로는 정리한 듯 보이지만 마음 깊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있나요? 나무처럼 다시 움트기 전에,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한번 찾아보면 어떨까요?

즐거움으로 흘러가는 서른여섯 흐름이 거세게 있는 그릇된 견해를 지닌 이는, 물듦에 기댄 생각의 물결에 휩쓸려 가느니라.

Yassa chattiṁsati sotā, manāpasavanā bhusā; Mahāvahanti duddiṭṭhiṁ, saṅkappā rāganissitā.

법구경 Dhammapada 339

배경

찻띠사띠 소따(chattiṃsati sotā), 곧 '서른여섯 흐름'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구체적인 헤아림은 다른 경전과 주석에 따로 있지만, 이 숫자가 말하려는 것은 분명합니다. 목마름이 한 갈래가 아니라 감각의 문마다 여러 갈래로 뻗어 있다는 것입니다. 두딧티(duddiṭṭhiṃ)는 '그릇된 견해를 지닌 이'이고, 상깝빠(saṅkappā)는 '생각'입니다. 즐거움으로 흘러가는 흐름이 거세면 그 사람은 물듦에 기운 생각의 물결에 휩쓸려 갑니다. 목마름이 견해까지 흔든다는 것이 이 게송의 무게입니다. 단순한 갈망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보는 눈까지 바꾸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묵상

지금 나를 어느 쪽으로 실어 가는 생각의 흐름이 있나요? 그 흐름이 향하는 곳이 정말 옳다고 믿는 방향인지 잠시 멈춰서 살펴보면 어떨까요?

모든 곳에서 흐름이 흐르고 덩굴은 돋아나 서 있나니, 그 돋아난 덩굴을 보거든 지혜로 그 뿌리를 잘라내라.

Savanti sabbadhi sotā, latā uppajja tiṭṭhati; Tañca disvā lataṁ jātaṁ, mūlaṁ paññāya chindatha.

법구경 Dhammapada 340

배경

파냐야 친다타(paññāya chindatha), '지혜로 잘라내라'는 이 게송의 마지막 두 낱말이 앞의 게송들과 다른 지점을 짚습니다. 337게는 손으로 뿌리를 파내라 했고, 338게는 뿌리가 남으면 다시 움튼다고 했습니다. 이 게송은 무엇으로 잘라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힘이나 의지가 아니라 지혜입니다. 라따(latā)는 '덩굴'로, 334게에서 목마름이 자라나는 모습으로 이미 나온 그림입니다. 흐름이 모든 곳에서 흐르고 덩굴이 계속 돋아난다는 첫 두 줄은, 목마름이 한 번의 손질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뒤에 오는 도구가 지혜여야 하는 것입니다.

묵상

억지로 참거나 누르는 대신, 가만히 보고 이해해서 풀린 경험을 해 본 적 있나요? 힘이 아니라 알아차림으로 풀리는 매듭도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보세요.

애착으로 젖은 흐름과 기쁨이 사람에게 생겨나나니, 즐거움에 붙어 행복을 찾는 그들도 결국 태어남과 늙음에 이르고 마느니라.

Saritāni sinehitāni ca, Somanassāni bhavanti jantuno; Te sātasitā sukhesino, Te ve jātijarūpagā narā.

법구경 Dhammapada 341

배경

사리따니(saritāni)는 '흐름들'이고 시네히따니(sinehitāni)는 '애착으로 젖은'이라는 뜻입니다. 앞 게송들의 물의 그림이 여기서는 기쁨과 애착으로 이어집니다. 사따시따 수케시노(sātasitā sukhesino)는 '즐거움에 붙어 행복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이 게송의 마지막 구절인 자띠자루빠가 나라(jātijarūpagā narā), 곧 '태어남과 늙음에 이르는 사람들'이 무겁습니다. 행복을 찾는 일 자체가 나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즐거움에 매달려 행복을 찾는 한 태어남과 늙음을 거듭 겪는다고 말합니다. 즐거움과 그 대가가 한 게송 안에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묵상

행복을 찾는 일과 그 대가를 함께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즐거움 자체를 탓하지 않으면서도, 그 뒤에 무엇이 따라오는지 살펴보면 어떨까요?

목마름에 이끌린 존재들은 덫에 걸려 궁지에 몰린 토끼처럼 허둥대나니, 묶임에 붙들린 이들은 오래도록 거듭거듭 괴로움을 겪느니라.

Tasiṇāya purakkhatā pajā, Parisappanti sasova bandhito; Saṁyojanasaṅgasattakā, Dukkhamupenti punappunaṁ cirāya.

법구경 Dhammapada 342

배경

342게와 343게는 첫 두 줄이 그대로 되풀이되는 짝입니다. 사소 반디또(saso bandhito), 곧 '덫에 걸려 궁지에 몰린 토끼'라는 비유가 두 게송에서 똑같이 쓰입니다. 목마름에 이끌린 존재들이 자유로이 움직이는 듯 보여도 실은 궁지에 몰려 허둥댄다는 그림입니다. 상요자나상가삿따까(saṃyojanasaṅgasattā)는 '묶임에 붙들린 이들'입니다. 이 게송은 그렇게 붙들린 이들이 오래도록 거듭거듭 괴로움을 겪는다는 결론으로 끝납니다. 같은 비유로 시작한 다음 게송은 다른 결론, 곧 목마름을 몰아내라는 권유로 끝납니다.

묵상

덫에 걸린 줄도 모르고 허둥대고 있는 자리가 내게도 있을까요? 오래도록 되풀이해 온 괴로움이 있다면, 그 덫이 무엇인지부터 이름 붙여 보세요.

목마름에 이끌린 존재들은 덫에 걸려 궁지에 몰린 토끼처럼 허둥대나니, 그러므로 수행자여, 스스로 벗어나기를 바란다면 목마름을 몰아내라.

Tasiṇāya purakkhatā pajā, Parisappanti sasova bandhito; Tasmā tasiṇaṁ vinodaye, Ākaṅkhanta virāgamattano.

법구경 Dhammapada 343

배경

앞 게송과 첫 두 줄이 같지만 이 게송은 직접 부르는 말로 끝납니다. 빅쿠(bhikkhu)라는 낱말이 그대로 나오는, 이 품에서 드문 자리입니다. 법구경은 게송집이라 호격이 많지 않은데, 여기서는 원문에 실제로 '수행자여'라는 부름이 있습니다. 위노다야(vinodaya)는 '몰아내라'는 명령형입니다. 앞 게송이 붙들린 이들의 처지를 그렸다면, 이 게송은 같은 그림을 보여 준 뒤 곧바로 해야 할 일을 말합니다. 해탈을 바란다면, 곧 아깡키 위라가맛따노(ākaṅkhī virāgamattano)한다면 목마름을 몰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림에서 권유로 넘어가는 자리입니다.

묵상

벗어나고 싶다고 진심으로 바란 적이 있나요? 그 바람이 있다면, 오늘 하루 몰아낼 수 있는 아주 작은 목마름 하나만 골라 보면 어떨까요?

얽매임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마음이 쏠려 도로 그리로 달려가는 이가 있나니, 풀려났다가 다시 묶임으로 달려가는 그 사람을 와서 보라.

Yo nibbanatho vanādhimutto, Vanamutto vanameva dhāvati; Taṁ puggalametha passatha, Mutto bandhanameva dhāvati.

법구경 Dhammapada 344

배경

인연담 제목은 방황하던 수행자 이야기입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수행자의 옷을 벗었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되풀이하던 이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원문은 와나(vana, 숲)와 와나타(vanatha, 덤불)를 겹쳐 쓰는 말놀이입니다. 숲에서 벗어난 자가 다시 숲으로 달려간다는 것인데, 숲이 곧 욕망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해서 한 낱말이 두 겹으로 읽힙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에 원숭이와 감옥이라는 새로운 비유를 넣었습니다. 원숭이가 나무를 떠났다가 돌아오듯, 사람도 옥을 나왔다가 다시 든다는 것입니다. 알아듣기는 쉬워졌지만 팔리의 겹말은 한역에 남지 않았습니다.

묵상

풀려났다가도 자꾸 같은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것이 있나요? 그것을 탓하기보다, 왜 그리로 다시 발이 향하는지 물어보면 어떨까요?

지혜로운 이들은 그것을 굳센 묶임이라 하지 않느니라, 쇠로 되었든 나무로 되었든 밥바자 풀로 되었든. 보석과 귀걸이에 깊이 물들어 집착하는 마음과 자식과 아내를 향해 애틋해하는 마음이 있느니라.

Na taṁ daḷhaṁ bandhanamāhu dhīrā, Yadāyasaṁ dārujapabbajañca; Sārattarattā maṇikuṇḍalesu, Puttesu dāresu ca yā apekkhā.

법구경 Dhammapada 345

배경

인연담 제목은 감옥 이야기입니다. 수행자들이 마을의 감옥을 보고 저것이야말로 굳센 묶임이라고 말하자, 부처님이 이 게송으로 답하셨다고 전해집니다. 아야삼(āyasaṃ)은 '쇠로 된', 다루자(dārujaṃ)는 '나무로 된'이라는 뜻으로, 감옥을 이루는 재료들입니다. 지혜로운 이들은 이런 것들을 진짜 굳센 묶임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대신 보석과 귀걸이에 물든 집착, 자식과 아내를 향한 애틋함을 가리킵니다. 눈에 보이는 쇠사슬보다 마음이 만든 애착이 더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다음 게송이 이 대비를 이어받아 결론을 냅니다.

묵상

눈에 보이는 사슬보다 마음이 만든 애착이 더 단단하게 느껴진 적 있나요? 무엇이 나를 정말로 붙들고 있는지 한번 짚어 보면 어떨까요?

지혜로운 이들은 이것을 굳센 묶임이라 말하나니, 끌어내리면서도 느슨해 보여 풀어내기 어려운 것이니라. 지혜로운 이들은 이것마저 끊어내고 유행을 떠나나니, 감각적 즐거움을 미련 없이 버리고서 그리하느니라.

Etaṁ daḷhaṁ bandhanamāhu dhīrā, Ohārinaṁ sithilaṁ duppamuñcaṁ; Etampi chetvāna paribbajanti, Anapekkhino kāmasukhaṁ pahāya.

법구경 Dhammapada 346

배경

앞 게송에서 열거한 애착, 곧 보석과 귀걸이와 자식과 아내를 향한 마음을 이 게송이 '이것'으로 받아 결론짓습니다. 오하리남(ohārinaṃ)은 '끌어내리는'이고 시틸람(sithilaṃ)은 '느슨해 보이는'입니다. 쇠사슬은 눈에 보이고 단단해 보이지만, 이 묶임은 느슨해 보여서 오히려 풀어내기 어렵다는 것이 이 게송의 요점입니다. 지혜로운 이들은 이것마저 끊어내고 감각적 즐거움을 미련 없이 버린 뒤 집을 떠난다고 말합니다. 파립바잔띠(paribbajanti)는 '유행을 떠난다'는 뜻으로, 정처 없이 떠도는 수행자의 삶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묵상

느슨해 보여서 오히려 알아차리기 어려운 묶임이 내게도 있을까요? 겉으로 자유로워 보이는 자리를 한번 더 들여다보면 무엇이 보일까요?

끌림에 물든 이들은 그 흐름을 따라가나니, 거미가 스스로 지은 그물에 걸리듯 하니라. 지혜로운 이들은 이것마저 끊어내고 떠나가나니, 미련 없이 모든 괴로움을 버리고서 그리하느니라.

Ye rāgarattānupatanti sotaṁ, Sayaṅkataṁ makkaṭakova jālaṁ; Etampi chetvāna vajanti dhīrā, Anapekkhino sabbadukkhaṁ pahāya.

법구경 Dhammapada 347

배경

인연담 제목은 케마 장로니 이야기입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아름다움에 자신 있던 왕비가 부처님을 만나기 꺼리다가 늙어 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무상함을 깨달아 수행자가 된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 게송의 비유는 거미입니다. 마까따꼬 자람(makkaṭako jālaṃ), 곧 '거미가 스스로 지은 그물'에 걸리듯, 끌림에 물든 이들은 자신이 만든 흐름에 스스로 빠져든다는 것입니다. 남이 친 그물이 아니라 스스로 지은 그물이라는 점이 매섭습니다. 지혜로운 이들은 이것마저 끊어내고 모든 괴로움을 버린 채 떠나갑니다.

묵상

스스로 지은 그물에 걸려 본 적 있나요? 남 탓을 하기 전에, 그 그물을 누가 지었는지 가만히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조금 달라질 수 있어요.

과거를 놓아라, 미래를 놓아라, 현재를 놓아라, 존재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이여. 모든 것에서 풀려난 마음은 다시는 태어남과 늙음을 겪지 않으리라.

Muñca pure muñca pacchato, Majjhe muñca bhavassa pāragū; Sabbattha vimuttamānaso, Na punaṁ jātijaraṁ upehisi.

법구경 Dhammapada 348

배경

인연담 제목은 웃가세나 이야기입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곡예를 하던 이가 높은 장대 꼭대기에서 이 게송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문짜(muñca)는 '놓아라'는 명령형으로 세 번 되풀이됩니다. 과거, 미래, 현재를 차례로 놓으라는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 균형을 잡던 그 순간처럼, 어느 한쪽에도 무게를 싣지 않아야 한다는 그림이 겹쳐집니다. 빠라구(pāragū)는 '저 언덕으로 건너간 이'입니다. 모든 것에서 풀려난 마음은 다시는 태어남과 늙음을 겪지 않는다는 말로 게송이 끝납니다.

묵상

과거나 미래, 혹은 지금 이 순간에 너무 무게를 싣고 있지는 않나요? 균형을 잡듯 잠시 세 가지를 고르게 놓아 보는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요?

생각에 시달리고 물듦이 짙어 대상을 아름답게만 보는 사람에게는, 목마름이 더욱더 자라나나니 그것이 굳센 묶임을 만드느니라.

Vitakkamathitassa jantuno, Tibbarāgassa subhānupassino; Bhiyyo taṇhā pavaḍḍhati, Esa kho daḷhaṁ karoti bandhanaṁ.

법구경 Dhammapada 349

배경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활 솜씨가 뛰어났던 이가 아내에게 마음을 온통 빼앗겨 결국 화를 입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위딱까마티땃사(vitakkamathitassa)는 '생각에 시달리는'이라는 뜻이고, 수바누빳시노(subhānupassino)는 '대상을 아름답게만 보는'이라는 뜻입니다. 생각이 온통 한 가지에 쏠려 있을수록 목마름은 더욱더 자라난다는 것이 이 게송의 요점입니다. 마지막 줄은 그렇게 자란 목마름이 굳센 묶임을 만든다고 말합니다. 다음 게송은 정반대의 사람, 곧 생각을 가라앉히는 이를 보여 주며 이 게송과 짝을 이룹니다.

묵상

한 가지 생각에 마음이 온통 쏠려 있던 적이 있나요? 그 쏠림이 어디로 자라날 수 있는지 미리 헤아려 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때가 있어요.

생각을 가라앉히기를 즐거워하며 늘 깨어서 부정한 것을 살피는 이가 있나니, 그는 목마름을 끝내고 마라의 묶임을 끊으리라.

Vitakkūpasame ca yo rato, Asubhaṁ bhāvayate sadā sato; Esa kho byanti kāhiti, Esa checchati mārabandhanaṁ.

법구경 Dhammapada 350

배경

앞 게송과 짝을 이룹니다. 위딱꾸빠세(vitakkūpasame)는 '생각을 가라앉힘'으로, 앞 게송의 생각에 시달리는 사람과 정반대의 자리에 있습니다. 이 게송의 사람은 늘 사또(sato), 곧 '깨어서' 아수밤(asubhaṃ), '부정한 것'을 살핍니다. 몸의 아름다움에 붙들리는 대신 그 몸이 실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보는 수행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는 목마름을 끝내고 마라의 묶임을 끊는다고 게송은 말합니다. 앞 게송이 묶임이 만들어지는 자리를 보여 주었다면, 이 게송은 그것이 풀리는 자리를 보여 줍니다.

묵상

생각을 가라앉히는 나만의 방법이 있나요? 없다면, 오늘 잠깐이라도 겉모습 너머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요?

완성에 이른 이는 두려움이 없고 목마름을 벗어나 흠이 없나니, 존재의 화살을 뽑아냈으니 이 몸이 마지막이니라.

Niṭṭhaṅgato asantāsī, vītataṇho anaṅgaṇo; Acchindi bhavasallāni, antimoyaṁ samussayo.

법구경 Dhammapada 351

배경

닛탕가또(niṭṭhaṅgato)는 '완성에 이른 이'라는 뜻입니다. 이 게송은 앞선 여러 게송이 그려 온 과정, 곧 목마름의 뿌리를 파내고 묶임을 끊는 일이 끝난 자리를 보여 줍니다. 아산따시(asantāsī)는 '두려움이 없는', 아낭가노(anaṅgaṇo)는 '흠이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바와살라니(bhavasallāni), 곧 '존재의 화살'이라는 표현이 눈에 띕니다.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힘을 몸에 박힌 화살로 그린 것입니다. 그 화살을 뽑아냈으므로 이 몸이 마지막이라고 게송은 말합니다. 앞선 게송들의 여정이 이 한 줄로 마무리되는 셈입니다.

묵상

화살이 뽑혀 나간 것처럼 홀가분했던 순간이 있었나요? 그 감각을 기억해 두면, 다시 흔들릴 때 돌아갈 자리가 되어 줄 수 있어요.

목마름을 벗어나고 집착이 없으며 말과 그 뜻에 통달한 이, 글자들의 짜임과 앞뒤를 아는 이, 그는 마지막 몸을 지닌 큰 지혜의 위대한 사람이라 불리느니라.

Vītataṇho anādāno, Niruttipadakovido; Akkharānaṁ sannipātaṁ, Jaññā pubbāparāni ca; Sa ve “antimasārīro, Mahāpañño mahāpuriso”ti vuccati.

법구경 Dhammapada 352

배경

이 게송에는 뜻밖의 조건이 들어 있습니다. 니룻띠빠다꼬위도(niruttipadakovido), 곧 '말과 그 쓰임에 밝아 글자들의 짜임과 앞뒤를 아는 이'라는 구절입니다. 언어를 다루는 능력을 '큰 지혜의 사람'이 갖출 조건으로 꼽은 드문 대목입니다. 한역 법구경에는 이 구절이 통째로 없습니다. 한역은 '도를 다해 옥의 얽매임을 없애고 가장자리 행을 건넜다'는 쪽으로 옮겨, 언어에 밝다는 조건 대신 수행의 성취만을 남겼습니다. 팔리가 말과 뜻을 아는 능력을 나란히 세운 것은, 깨달음이 침묵 속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듯합니다.

묵상

말과 마음이 함께 밝아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 본 적 있나요? 침묵만이 아니라 말로도 지혜가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보세요.

나는 모든 것을 이기고 모든 것을 아는 이, 모든 현상에 물들지 않았느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목마름이 다함에 풀려났나니, 스스로 깨달았으니 누구를 스승이라 이르랴.

Sabbābhibhū sabbavidūhamasmi, Sabbesu dhammesu anūpalitto; Sabbañjaho taṇhakkhaye vimutto, Sayaṁ abhiññāya kamuddiseyyaṁ.

법구경 Dhammapada 353

배경

인연담 제목은 우빠까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처음 길에서 만난 사람이 우빠까라는 아지비까 수행자였습니다. 그가 스승이 누구냐고 묻자 부처님이 이 게송으로 답하셨다고 전해집니다. 삽바비부 삽바위두하마스미(sabbābhibhū sabbavidūhamasmi), 곧 '나는 모든 것을 이기고 모든 것을 아는 이'로 시작하는 1인칭 선언입니다. 마지막 구절, '스스로 깨달았으니 누구를 스승이라 이르랴'는 반문이 이 게송의 무게입니다. 한역은 이를 '만약 ~하면 ~이다'라는 일반 명제로 바꾸어, 말하는 이도 반문도 사라졌습니다. 팔리는 분명히 누군가 자신에 대해 직접 한 말입니다.

묵상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 답을 찾아야 했던 순간이 있었나요? 그때 느낀 것이 무엇이었는지 잠시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모든 보시 가운데 가르침을 베푸는 보시가 으뜸이요, 모든 맛 가운데 가르침의 맛이 으뜸이며, 모든 즐거움 가운데 가르침의 즐거움이 으뜸이니, 목마름이 다함이 모든 괴로움을 이기느니라.

Sabbadānaṁ dhammadānaṁ jināti, Sabbarasaṁ dhammaraso jināti; Sabbaratiṁ dhammarati jināti, Taṇhakkhayo sabbadukkhaṁ jināti.

법구경 Dhammapada 354

배경

인연담 제목은 삭까의 물음 이야기입니다. 신들의 왕 삭까가 무엇이 가장 훌륭한 보시인지 물었고, 이 게송이 그 답으로 전해집니다. 법구경에서 따로도 널리 인용되는 유명한 게송입니다. 담마다낭(dhammadānaṃ), 곧 '가르침을 베푸는 보시'가 모든 보시 가운데 으뜸이라 하고, 이어 맛과 즐거움에서도 가르침이 으뜸이라 합니다. 지나띠(jināti), '이긴다, 으뜸이다'는 동사가 네 줄 모두에서 되풀이됩니다. 마지막 줄은 목마름이 다함이 모든 괴로움을 이긴다고 하여, 이 품 전체의 결론과도 같은 자리에 놓입니다.

묵상

지금까지 받은 것 가운데 가장 오래 남은 것은 무엇이었나요? 물건이 아니라 한마디 말이었다면, 그 이유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재물은 어리석은 이를 해치나 피안을 구하는 이는 그렇지 않느니라. 재물에 대한 목마름으로 어리석은 이는 남을 해치듯 자기를 해치느니라.

Hananti bhogā dummedhaṁ, no ca pāragavesino; Bhogataṇhāya dummedho, hanti aññeva attanaṁ.

법구경 Dhammapada 355

배경

인연담 제목은 자식 없는 장자 이야기입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큰 재산을 남기고 자식 없이 죽은 장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재물을 쌓아 두기만 하고 자신도 남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항아띠(hananti)는 '해친다'는 동사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마지막 줄입니다. 어리석은 이는 '남을 해치듯' 자기를 해친다고 합니다. 남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남을 해치는 것에 견줄 만큼 자기 자신을 해친다는 것입니다. 재물에 대한 목마름이 향하는 곳은 결국 그것을 붙든 사람 자신입니다.

묵상

재물이나 무언가를 붙들다가 정작 나 자신을 힘들게 한 적이 있나요? 남이 아니라 나를 향한 그 상처를 알아차리는 것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잡초가 밭의 병폐이듯 물듦은 이 존재들의 병폐이니, 그러므로 물듦을 벗어난 이에게 베푸는 것은 큰 결실을 맺느니라.

Tiṇadosāni khettāni, rāgadosā ayaṁ pajā; Tasmā hi vītarāgesu, dinnaṁ hoti mahapphalaṁ.

법구경 Dhammapada 356

배경

인연담 제목은 앙꾸라 이야기입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배경으로, 오랫동안 크게 베풀었던 이가 뒷날 작은 보시 하나가 자신의 큰 보시보다 더 큰 결실을 맺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팔리의 비유는 '잡초가 밭을 망치듯 물듦이 사람을 망친다'는 것입니다. 밭은 사람이고 잡초는 물듦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를 뒤집어 '애욕이 밭이고 음·노·치가 씨'라고 옮겼습니다. 망가지는 쪽과 망가뜨리는 쪽이 뒤바뀐 것입니다. 356게부터 359게까지 같은 틀이 물듦, 성냄, 어리석음, 욕심으로 낱말만 바뀌며 네 번 되풀이됩니다.

묵상

누구에게 무엇을 베푸는지가 정말 다르게 다가온 적이 있나요? 많이 주는 것과 잘 주는 것의 차이를 한번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잡초가 밭의 병폐이듯 성냄은 이 존재들의 병폐이니, 그러므로 성냄을 벗어난 이에게 베푸는 것은 큰 결실을 맺느니라.

Tiṇadosāni khettāni, dosadosā ayaṁ pajā; Tasmā hi vītadosesu, dinnaṁ hoti mahapphalaṁ.

법구경 Dhammapada 357

배경

356게의 틀을 그대로 이어받아 낱말만 바뀝니다. 도사(dosa)는 '성냄'입니다. 잡초가 밭의 병폐이듯 성냄은 존재들의 병폐라고 합니다. 앞 게송이 물듦을 벗어난 이에게 베푸는 것을 말했다면, 이 게송은 성냄을 벗어난 이에게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위따도세수(vītadosesu)는 '성냄을 벗어난 이들에게'라는 뜻입니다. 네 게송이 이렇게 같은 틀로 되풀이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받는 이가 어떤 물듦에서도 벗어나 있을수록 베푸는 일의 결실이 커진다는 것을 하나씩 짚어 확인시키는 방식입니다.

묵상

화가 난 상태에서 받은 것과 편안한 마음에서 받은 것이 다르게 느껴진 적이 있나요? 주는 사람의 마음이 무엇을 함께 건네는지 생각해 보세요.

잡초가 밭의 병폐이듯 어리석음은 이 존재들의 병폐이니, 그러므로 어리석음을 벗어난 이에게 베푸는 것은 큰 결실을 맺느니라.

Tiṇadosāni khettāni, mohadosā ayaṁ pajā; Tasmā hi vītamohesu, dinnaṁ hoti mahapphalaṁ.

법구경 Dhammapada 358

배경

같은 틀이 세 번째로 되풀이됩니다. 모하(moha)는 '어리석음'입니다. 잡초가 밭의 병폐이듯 어리석음은 존재들의 병폐라고 합니다. 물듦, 성냄에 이어 어리석음이 다루어지면서, 이 책에서 괴로움의 세 뿌리로 자주 꼽히는 세 가지가 차례로 다 나온 셈입니다. 위따모헤수(vītamohesu)는 '어리석음을 벗어난 이들에게'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게송인 359게는 이 셋에 하나를 더 보태며 이 짧은 연작을 마무리합니다.

묵상

잘 모르는 채로 무언가를 주고받은 적이 있나요? 알고 하는 일과 모르고 하는 일의 결실이 어떻게 다를지 가만히 헤아려 보면 어떨까요?

잡초가 밭의 병폐이듯 욕심은 이 존재들의 병폐이니, 그러므로 욕심을 벗어난 이에게 베푸는 것은 큰 결실을 맺느니라.

Tiṇadosāni khettāni, icchādosā ayaṁ pajā; Tasmā hi vigaticchesu, dinnaṁ hoti mahapphalaṁ.

법구경 Dhammapada 359

배경

네 번째이자 마지막 되풀이입니다. 앞의 셋이 물듦,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전통적인 세 뿌리를 다뤘다면, 이 게송은 잇차(icchā), 곧 '욕심'을 하나 더 보탭니다. 위가띳체수(vigaticchesu)는 '욕심을 벗어난 이들에게'라는 뜻입니다. 24품은 목마름의 뿌리를 파내라는 337게에서 시작해, 그 뿌리를 실제로 벗어난 이에게 베푸는 일의 결실로 끝을 맺습니다. 잡초를 뽑는 농부의 비유로 네 번 되풀이된 이 짧은 연작은, 벗어남이 자신만의 일로 그치지 않고 그를 향한 베풂까지 결실 있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묵상

바라는 마음 없이 무언가를 나눠 본 적이 있나요? 그 순간과 무언가를 바라며 나눴던 순간을 견주어 보면 무엇이 다르게 느껴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