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단속이 좋고
귀 단속이 좋으며,
코 단속이 좋고
혀 단속이 좋으니라.
Cakkhunā saṁvaro sādhu, sādhu sotena saṁvaro; Ghānena saṁvaro sādhu, sādhu jivhāya saṁvaro.
법구경 Dhammapada 360 배경
25품은 빅쿠(bhikkhu)를 다루는 품으로, 이 앱에서는 '수행자'로 옮깁니다. 본래 '빌어먹는 이'라는 뜻이지만, 이 품은 그 이름값을 하는 삶이 무엇인지 스물세 편에 걸쳐 짚어 갑니다. 삼와라(saṃvara)는 '단속, 지킴'이라는 뜻으로, 이 게송은 눈·귀·코·혀 넷을 듭니다. 다음 게송에서 몸·말·마음이 마저 더해져 한 벌을 이룹니다. 감각의 문을 지키는 일은 무엇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들어오는지 가려 두기 위해서입니다. 무심코 들인 것이 마음결을 바꾸는 일은 승복을 입은 이만 겪는 일이 아닙니다.
묵상
평소 무엇을 가장 많이 보고 듣나요? 그것이 마음에 남기는 자국을 가만히 들여다본 적이 있나요? 오늘 하루, 문을 열어 둔 채로 흘려보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몸 단속이 좋고
말 단속이 좋으며,
마음 단속이 좋고
모든 면에서 단속함이 좋으니라.
모든 면에서 자신을 다잡은 수행자는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느니라.
Kāyena saṁvaro sādhu, sādhu vācāya saṁvaro; Manasā saṁvaro sādhu, sādhu sabbattha saṁvaro; Sabbattha saṁvuto bhikkhu, sabbadukkhā pamuccati.
법구경 Dhammapada 361 배경
앞 게송의 짝으로, 눈·귀·코·혀에 이어 몸·말·마음까지 더해 한 벌을 채웁니다. 삽바타(sabbattha)는 '모든 면에서'라는 뜻으로, 두 번 되풀이되며 무게를 싣습니다. 여섯 문을 낱낱이 세다가 마지막에 '모든 면에서'로 한데 묶는 짜임입니다. 하나만 지키고 나머지를 놓아두면 그 틈으로 들어옵니다. 결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난다고 했지, 즐거움을 얻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속이 무엇을 쌓는 일이 아니라 무엇이 새어 나가지 않게 막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묵상
몸으로도 말로도 마음으로도 다 단속하며 살기는 쉽지 않아요. 그중 나에게 가장 헐거운 문은 어디인가요?
손을 단속하고 발을 단속하고
말을 단속한 이,
그가 가장 훌륭하게 단속한 이니라.
안으로 기쁨을 누리고 마음을 모으며
홀로 지내어 만족하는 이,
그를 수행자라 부르느니라.
Hatthasaṁyato pādasaṁyato, Vācāsaṁyato saṁyatuttamo; Ajjhattarato samāhito, Eko santusito tamāhu bhikkhuṁ.
법구경 Dhammapada 362 배경
앞 두 게송이 감각과 몸·말·마음을 나누어 말했다면, 여기서는 그것을 한 사람의 모습으로 그립니다. 아잣땃라또(ajjhattarato)는 '안으로 기쁨을 누리는'이라는 뜻으로, 즐거움을 밖에서 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에꼬 산뚜시또(eko santusito)는 '홀로 지내며 만족하는'입니다. 홀로 있음과 만족이 나란히 놓인 것이 눈에 띕니다. 혼자 있어서 쓸쓸한 것이 아니라 혼자 있어도 채워져 있다는 뜻입니다. 무언가를 참는 모습이 아니라 이미 넉넉한 사람의 모습을 그린 게송입니다.
묵상
혼자 있는 시간이 허전하게 느껴지나요, 아니면 그 자체로 괜찮게 느껴지나요? 그 차이가 무엇에서 오는지 생각해 보세요.
입을 단속하는 수행자는
신중하게 말하며 들뜨지 않느니라.
그 말이 뜻과 진리를 밝히니
듣기에 달콤하니라.
Yo mukhasaṁyato bhikkhu, mantabhāṇī anuddhato; Atthaṁ dhammañca dīpeti, madhuraṁ tassa bhāsitaṁ.
법구경 Dhammapada 363 배경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꼬깔리까라는 빅쿠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를 헐뜯고 다녀 다른 경들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입을 단속하지 못한 사람의 본보기이니, 이 게송이 그리는 모습과 정반대에 있는 셈입니다. 만따바니(mantabhāṇī)는 '신중하게, 잘 헤아려 말하는'이라는 뜻이고, 아눗다또(anuddhato)는 '들뜨지 않는'입니다. 뜻을 밝히는 말과 달콤하게 들리는 말이 한 문장에 놓인 것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과 듣기 좋게 말하는 것이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묵상
옳은 말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던진 적이 있나요? 같은 말도 신중히 고르면 다르게 가닿을 수 있어요.
진리를 즐거워하고 사랑하며
진리를 깊이 헤아리는 이,
진리를 늘 마음에 새기는 그 수행자는
바른 진리에서 멀어지지 않느니라.
Dhammārāmo dhammarato, dhammaṁ anuvicintayaṁ; Dhammaṁ anussaraṁ bhikkhu, saddhammā na parihāyati.
법구경 Dhammapada 364 배경
담마라모 담마라또(dhammārāmo dhammarato)는 '진리를 뜰로 삼고 진리를 사랑하는 이'라는 뜻으로, 소리가 나란히 겹치는 말놀이입니다. 아누윗찐따얌(anuvicintayaṃ)은 '되풀이해 깊이 생각하는'입니다. 즐기고 사랑하고 헤아리고 새긴다는 네 동사가 한 사람 안에 겹쳐 놓였습니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좋아하기만 하고 새기지 않으면 스쳐 지나가고, 새기기만 하고 좋아하지 않으면 짐이 됩니다. 무엇을 배우든 이 네 가지가 함께 있어야 오래 남습니다.
묵상
배운 것 가운데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는 것과 스쳐 지나간 것이 있나요? 그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에게 온 것을 얕보지 말고
남의 것을 부러워하며 지내지 말라.
남의 것을 부러워하는 수행자는
마음이 한곳에 모이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느니라.
Salābhaṁ nātimaññeyya, nāññesaṁ pihayaṁ care; Aññesaṁ pihayaṁ bhikkhu, samādhiṁ nādhigacchati.
법구경 Dhammapada 365 배경
365-366 두 게송이 짝을 이룹니다. 나띠만녜야(nātimaññeyya)는 '얕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기 것을 얕보는 마음과 남의 것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사실 한 뿌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 게송이 나란히 놓아 보여 줍니다. 둘 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마디(samādhi), 곧 마음이 한곳에 모이는 경지를 이 게송은 마지막에 겁니다. 남의 것을 자꾸 살피는 마음은 그 자체로 흩어진 마음이라, 따로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부러워하는 그 순간 이미 모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묵상
남과 견주는 마음이 들 때, 그 순간 내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 살펴본 적이 있나요?
적게 얻어도 그것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 수행자,
그는 맑은 삶을 살며 나태하지 않느니라.
그런 이를 신들도
참으로 칭송하느니라.
Appalābhopi ce bhikkhu, salābhaṁ nātimaññati; Taṁ ve devā pasaṁsanti, suddhājīviṁ atanditaṁ.
법구경 Dhammapada 366 배경
앞 게송의 짝으로, 이번에는 적게 가진 이의 자리에서 말합니다. 압빠라보(appalābha)는 '적은 소득'입니다. 앞에서 얕보지 말라고 했던 그 마음을 실제로 지켜 낸 이를 여기서 그립니다. 눈에 띄는 것은 그 보상이 사람이 아니라 신들의 칭송이라는 점입니다. 남에게 인정받으려 애써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도 한결같은 것을 하늘이 알아준다는 그림입니다. 수따지위(suddhājīvī)는 '맑게 살아가는 이'로, 더 가지려 애쓰지 않고 정직하게 사는 삶을 가리킵니다.
묵상
적게 가진 것을 부끄러워한 적이 있나요? 그 안에서도 한결같이 지켜 온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름과 형상 어디에도
집착이란 없고,
없는 것을 두고 슬퍼하지 않는 이,
그를 수행자라 부르느니라.
Sabbaso nāmarūpasmiṁ, yassa natthi mamāyitaṁ; Asatā ca na socati, sa ve “bhikkhū”ti vuccati.
법구경 Dhammapada 367 배경
나마루빠(nāmarūpa)는 '이름과 형상'으로, 사람을 이루는 정신과 물질을 함께 가리키는 말입니다. 마마이땀(mamāyitaṃ)은 '내 것이라 여기는 집착'입니다. 앞 구절이 가짐에 대한 집착을 짚었다면, 뒤 구절은 잃음에 대한 슬픔을 짚습니다. 둘은 한 뿌리에서 나온 두 얼굴입니다. 내 것이라 여기던 것이 없어졌을 때 슬픔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게송이 겨눈 것은 슬픔 자체가 아니라 그 앞에 있던 집착입니다. 슬픔이 일 때 그 뿌리를 되짚어 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묵상
무언가를 잃고 슬펐던 순간, 그것을 얼마나 '내 것'으로 여기고 있었는지 돌아본 적이 있나요?
자애 속에 머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믿는 수행자는,
지어진 것이 가라앉은
그 고요하고 행복한 경지에 이르느니라.
Mettāvihārī yo bhikkhu, pasanno buddhasāsane; Adhigacche padaṁ santaṁ, saṅkhārūpasamaṁ sukhaṁ.
법구경 Dhammapada 368 배경
멧따위하리(mettāvihārī)는 '자애 속에 사는 이'라는 뜻입니다. 자애가 앞에 놓이고 믿음이 뒤따르는 짜임입니다. 상카루빠사망 수캄(saṅkhārūpasamaṃ sukhaṃ)은 '지어진 것이 가라앉은 행복'으로, 이 품 뒤쪽 381게송에도 그대로 다시 나옵니다. 상카라(saṅkhāra)는 '지어진 것', 곧 조건 따라 일어났다 스러지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가라앉는다는 것은 없애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더는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자애로 시작해 고요로 끝나는 흐름이 이 게송의 짜임입니다.
묵상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넉넉했던 날, 그 하루가 유난히 고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나요?
수행자여, 이 배에서 물을 퍼내라.
비워 내면 배가 가벼워지리라.
욕망과 성냄을 끊어 내면
그때 열반에 이르리라.
Siñca bhikkhu imaṁ nāvaṁ, sittā te lahumessati; Chetvā rāgañca dosañca, tato nibbānamehisi.
법구경 Dhammapada 369 배경
이 품에서 몇 안 되는 직접 부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짜(siñca)는 '퍼내라'는 명령형으로, '수행자여'라는 부름과 함께 놓였습니다. 배에 물이 차면 가라앉듯, 마음에 무언가 차오르면 무거워집니다. 라후메싸띠(lahumessati)는 '가벼워지리라'는 뜻으로, 비움과 가벼움을 곧바로 이어 놓았습니다. 무엇을 더 채워서가 아니라 덜어 내어 나아간다는 그림이 이 게송의 핵심입니다. 라가(rāga, 욕망)와 도사(dosa, 성냄)를 끊는 일도 같은 결입니다. 무언가를 이루는 일이 아니라 이미 차 있던 것을 덜어 내는 일입니다.
묵상
요즘 마음에 무겁게 차오른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무엇을 더하지 않고 덜어 내는 쪽으로 가 볼 수 있을까요?
다섯 가지를 끊고 다섯 가지를 버리며
다섯 가지를 더 닦으라.
다섯 가지 속박을 넘어선 수행자는
거센 물을 건넜다 불리느니라.
Pañca chinde pañca jahe, pañca cuttari bhāvaye; Pañca saṅgātigo bhikkhu, “oghatiṇṇo”ti vuccati.
법구경 Dhammapada 370 배경
오가띤노(oghatiṇṇo)는 '거센 물을 건넌 이'라는 뜻으로, 1품 첫머리부터 되풀이되는 강물의 비유입니다. 여기서는 끊을 다섯, 버릴 다섯, 닦을 다섯이 나오는데 무엇인지 이 게송 자체는 밝히지 않습니다. 주석서는 이를 낮은 족쇄 다섯과 높은 족쇄 다섯, 그리고 다섯 가지 능력으로 풀이합니다. 셋을 나란히 놓되 동사를 다르게 쓴 것이 눈에 띕니다. 끊고 버리고 닦는 일은 순서도 성질도 다릅니다. 놓아야 할 것과 길러야 할 것을 한 문장 안에 함께 담은 셈입니다.
묵상
끊어야 할 것과 채워야 할 것을 뒤바꿔 놓고 애쓴 적이 있나요? 그 둘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수행자여, 방심하지 말고 마음을 모으라.
그대 마음이 감각의 즐거움에 빠지게 하지 말라.
방심한 채 뜨거운 쇠구슬을 삼키지 말라.
불타면서 ‘이것이 괴로움이다’ 울부짖지 말라.
Jhāya bhikkhu mā pamādo, Mā te kāmaguṇe ramessu cittaṁ; Mā lohaguḷaṁ gilī pamatto, Mā kandi “dukkhamidan”ti dayhamāno.
법구경 Dhammapada 371 배경
네 줄 모두 '말라'로 끝나는 금지형이라 명령이 겹겹이 쌓입니다. 로하굴랑 길리(lohaguḷaṃ gilī)는 '뜨거운 쇠구슬을 삼키다'라는 뜻으로, 강한 이미지를 씁니다. 방심한 채 즐거워 보이는 것을 삼켰다가 나중에 그것이 몸을 태우는 것을 알고 우는 그림입니다. 삼킬 때는 몰랐다가 불탈 때에야 아는 순서가 이 비유의 무서운 지점입니다. 감각의 즐거움이 처음부터 뜨겁게 보였다면 아무도 삼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음 게송이 이 경고를 이어받아 무엇이 그 뜨거움을 미리 알아채게 하는지를 말합니다.
묵상
삼킬 때는 달콤해 보였는데 나중에야 뜨거웠던 것을 삼켰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지혜 없는 이에게 마음 모음이 없고
마음을 모으지 않는 이에게 지혜가 없느니라.
마음 모음과 지혜를 함께 갖춘 이는
참으로 열반에 가까이 있느니라.
Natthi jhānaṁ apaññassa, paññā natthi ajhāyato; Yamhi jhānañca paññā ca, sa ve nibbānasantike.
법구경 Dhammapada 372 배경
법구경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게송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나(jhāna, 마음 모음)와 빤냐(paññā, 지혜)를 서로가 서로의 조건으로 놓았습니다. 마음을 모으지 못하면 무엇을 보아도 흩어진 채 스쳐 지나가고, 지혜가 없으면 무엇에 마음을 모아야 할지조차 가늠할 수 없습니다. 이 게송에는 '빅쿠'라는 낱말이 없습니다. 앞뒤 게송들이 수행자를 직접 부르거나 가리키는 것과 다릅니다.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말한 것이지, 승복을 입은 이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언가에 몰두하되 방향을 모르거나, 알기는 하되 거기 머물지 못하는 일은 누구나 겪습니다.
묵상
무언가에 깊이 몰입했지만 방향을 몰랐던 적, 혹은 알기는 했지만 몰입하지 못했던 적이 있나요?
수행자가 빈집에 들어가
마음이 고요해지면,
진리를 바르게 통찰하는 그에게
인간을 넘어선 기쁨이 있느니라.
Suññāgāraṁ paviṭṭhassa, santacittassa bhikkhuno; Amānusī rati hoti, sammā dhammaṁ vipassato.
법구경 Dhammapada 373 배경
순냐가랑 빠윗타사(suññāgāraṃ paviṭṭhassa)는 '빈집에 들어간 이에게'라는 뜻입니다. 앞 게송이 감각의 즐거움이 지닌 뜨거움을 경고했다면, 여기서는 그 자리를 벗어나 홀로 있을 때 무엇이 오는지를 말합니다. 아마누시 라띠(amānusī rati)는 '인간을 넘어선 기쁨'으로, 감각으로 얻는 즐거움과 다른 종류의 기쁨을 가리킵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 기쁨이 빈집 자체에서 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진리를 바르게 통찰할 때 옵니다. 조용한 곳에 있어도 마음이 시끄러우면 이 기쁨은 오지 않습니다.
묵상
혼자, 조용한 곳에 있을 때 오히려 마음이 더 시끄러웠던 적이 있나요? 반대로 고요해졌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몸과 마음의 무더기가 일어나고 사라짐을
때마다 통찰하는 이는,
희열과 환희를 얻나니
그것이 죽음 없음을 아는 이의 몫이니라.
Yato yato sammasati, khandhānaṁ udayabbayaṁ; Labhatī pītipāmojjaṁ, amataṁ taṁ vijānataṁ.
법구경 Dhammapada 374 배경
칸다낭 우다얍바양(khandhānaṃ udayabbayaṃ)은 '무더기가 일어나고 사라짐'이라는 뜻입니다. 칸다(khandha, 오온)는 몸과 느낌과 인식과 지어냄과 알아차림, 사람을 이루는 다섯 가지 무더기입니다. 이 게송이 권하는 것은 그것을 다스리는 일이 아니라 지켜보는 일입니다. 삼마사띠(sammasati)는 '살펴보다, 헤아려 보다'입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를 '오음을 제어하고 뜻을 물처럼 굴복시키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면 살펴보는 일이 다스리는 일이 됩니다. 빠알리가 겨눈 것은 통제가 아니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그저 지켜보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묵상
무언가를 다스리려 애쓰는 것과 그저 지켜보는 것은 달라요. 최근에 어느 쪽을 해 보았나요?
지혜로운 수행자에게는
이것이 그 시작이니,
감각을 지키고 만족하며
지켜야 할 조목 안에서 단속하는 일이니라.
Tatrāyamādi bhavati, idha paññassa bhikkhuno; Indriyagutti santuṭṭhi, pātimokkhe ca saṁvaro.
법구경 Dhammapada 375 배경
이 품 안에서 유일하게 '시작'을 말하는 게송입니다. 앞서 이 품이 다뤄 온 것들이 여기서 셋으로 간추려집니다. 감각의 지킴, 만족, 빠띠목카(pātimokkha)에서의 단속입니다. 빠띠목카는 승가가 함께 지키기로 한 조목들을 가리킵니다. 눈에 띄는 것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한 점입니다. 372게송이 마음 모음과 지혜를 말했고 373게송이 빈집에서 오는 기쁨을 말했는데, 그 앞에 이 세 가지가 먼저 놓인다는 것입니다. 감각을 지키고 만족하는 일은 승가의 조목이 없어도 누구나 시작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묵상
무언가를 이루기 전에 먼저 다져야 할 것들을 건너뛴 적이 있나요?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시작에 가까운가요, 그 너머인가요?
선하며 맑게 살고 게으르지 않은 이를
벗으로 삼으라.
손님을 맞을 줄 알고
행실이 반듯한 이가 되라.
그리하면 기쁨이 가득해져
마침내 괴로움을 끝내리라.
Mitte bhajassu kalyāṇe, suddhājīve atandite; Paṭisanthāravutyassa, ācārakusalo siyā; Tato pāmojjabahulo, dukkhassantaṁ karissati.
법구경 Dhammapada 376 배경
미떼(mitte)는 '벗들을'이라는 뜻으로, 이 게송은 벗을 사귀는 일에서 시작해 자신의 됨됨이로 옮겨 갑니다. 사귈 벗의 조건을 먼저 말하고, 그다음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말하는 순서입니다. 빠띠산타라부띠(paṭisanthāravutti)는 '손님을 맞이할 줄 아는 성품'입니다. 벗을 가려 사귀는 일과 자신이 좋은 벗이 되는 일이 나란히 놓인 셈입니다. 좋은 벗을 곁에 두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누구를 곁에 두느냐는 승복을 입은 이에게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묵상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고 있나요? 나는 그들에게 어떤 벗인가요?
재스민 꽃이 시든 꽃잎을
스스로 놓아 버리듯,
수행자들이여, 그처럼
욕망과 성냄을 떨쳐 버리라.
Vassikā viya pupphāni, maddavāni pamuñcati; Evaṁ rāgañca dosañca, vippamuñcetha bhikkhavo.
법구경 Dhammapada 377 배경
바씨까(vassikā)는 밤에 피는 재스민을 가리키는 꽃 이름으로, 흔히 밤꽃으로 옮깁니다. 마당와니(maddavāni)는 '시든'이라는 뜻입니다. 이 꽃은 시든 꽃잎을 붙들지 않고 스스로 떨굽니다. 누가 떼어 내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저절로 놓는다는 점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욕망과 성냄을 놓는 일도 이와 같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억지로 뜯어내는 것이 아니라 꽃이 꽃잎을 놓듯 자연스러워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수행자들이여'라는 부름이 이 품에서 유일하게 복수로 나오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묵상
붙들고 있던 마음을 애써 뜯어낸 적과 저절로 놓아진 적, 둘 다 겪어 보았나요?
몸이 고요하고 말이 고요하며
마음도 한결같이 고요한 이,
마음을 굳게 모아 세속의 미끼를
뱉어 버린 수행자를
고요한 이라 부르느니라.
Santakāyo santavāco, santavā susamāhito; Vantalokāmiso bhikkhu, “upasanto”ti vuccati.
법구경 Dhammapada 378 배경
산따까요 산따와쪼(santakāyo santavāco)는 '몸이 고요하고 말이 고요한 이'라는 뜻으로, 몸과 말과 마음 세 가지가 나란히 놓입니다. 361게송에서 단속하라고 했던 그 세 가지가 여기서는 이미 고요해진 모습으로 다시 나옵니다. 완따로까미소(vantalokāmiso)는 '세속의 미끼를 뱉어 버린'이라는 뜻으로, 로까미사(lokāmisa)는 미끼처럼 사람을 낚는 세속의 것들을 가리킵니다. 삼켰다가 다시 뱉어 낸다는 그림이 강렬합니다. 한 번 삼켰던 것을 게워 내는 일이니, 처음부터 몰랐던 사람의 고요함과는 결이 다릅니다.
묵상
한때 붙잡았다가 스스로 놓아 버린 것이 있나요? 그때의 고요함은 어디서 온 것이었나요?
스스로 자신을 다그치고
자기 자신을 낱낱이 살피라.
자신을 지키며 늘 깨어 있는 수행자는
행복하게 살아가리라.
Attanā codayattānaṁ, paṭimaṁsetha attanā; So attagutto satimā, sukhaṁ bhikkhu vihāhisi.
법구경 Dhammapada 379 배경
앗따나 짜다얏따낭(attanā codayattānaṃ)은 '스스로 자신을 일깨우라'는 뜻으로, 두 동사 모두 자신을 향합니다. 남이 일깨워 주기를 기다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빠띠맛세타 앗따나(paṭimaṃsetha attanā)는 '자기 자신을 살피라'로, 앞 구절과 짝을 이룹니다. 다그치는 것과 살피는 것이 함께 있어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다그치기만 하고 살피지 않으면 채찍질만 남고, 살피기만 하고 다그치지 않으면 자책만 남습니다. 앗따굿또 사띠마(attagutto satimā)는 '자신을 지키고 깨어 있는'으로, 380게송에서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라는 말로 이어집니다.
묵상
스스로를 다그치기만 했나요, 아니면 가만히 살펴보기도 했나요? 지금 나에게는 어느 쪽이 더 필요한가요?
자기야말로 자기의 의지처이니
다른 누가 의지처가 되겠느냐.
자기야말로 자기가 가는 길이니
좋은 말을 다루는 상인처럼 자신을 다스릴지니라.
Attā hi attano nātho, ko hi nātho paro siyā; Attā hi attano gati, tasmā saṁyamamattānaṁ; Assaṁ bhadraṁva vāṇijo.
법구경 Dhammapada 380 배경
앗따 히 앗따노 나토(attā hi attano nātho)는 '자기야말로 자기의 의지처다'라는 뜻으로, 12품 160게송의 첫 두 줄과 글자 하나 다르지 않게 같습니다. 그때는 '나 자신'을 품 전체의 주제로 놓고 한 말이었고, 여기서는 수행자의 자리에서 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한역 법구경은 이 자리에 무아(無我)를 끌어와 '헤아리면 내가 없으니 나를 덜어야 한다'로 뒤집었습니다. 자기를 세우라는 말이 자기를 지우라는 말로 바뀐 셈입니다. 빠알리는 자신을 없애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좋은 말을 다루는 상인에 비유해, 자신을 다스리고 이끌어야 할 것으로 그립니다.
묵상
내 삶의 방향을 남에게 맡기고 있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그 고삐를 다시 쥔다면 무엇부터 바꾸고 싶나요?
기쁨이 넘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믿는 수행자는,
지어진 것이 가라앉은
그 고요하고 행복한 경지에 이르느니라.
Pāmojjabahulo bhikkhu, pasanno buddhasāsane; Adhigacche padaṁ santaṁ, saṅkhārūpasamaṁ sukhaṁ.
법구경 Dhammapada 381 배경
368게송과 앞 구절만 바뀐 채 그대로 되풀이됩니다. 주석서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 왁깔리 장로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부처님의 몸을 바라보는 데 마음을 빼앗겨 가르침을 등한히 하다가, 크게 흔들리는 시간을 지난 뒤에야 '가르침을 보는 이가 나를 본다'는 말씀을 듣고 참된 믿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겉모습에 쏠렸던 기쁨이 가르침을 향한 기쁨으로 옮겨 간 이야기인 셈입니다. 빠못자바훌로(pāmojjabahulo)는 '기쁨이 넘치는'이라는 뜻으로, 억지로 짜낸 기쁨이 아니라 저절로 넘치는 기쁨을 가리킵니다.
묵상
무언가의 겉모습에 마음을 빼앗겨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친 적이 있나요? 그 뒤에 무엇이 달라졌나요?
젊은 수행자라도
부처님 가르침에 마음을 쏟으면,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온 세상을 밝히느니라.
Yo have daharo bhikkhu, yuñjati buddhasāsane; Somaṁ lokaṁ pabhāseti, abbhā muttova candimā.
법구경 Dhammapada 382 배경
품의 마지막 게송입니다. 다하로 빅쿠(daharo bhikkhu)는 '젊은 수행자'로, 나이가 적음을 뜻이 얕음과 같이 두지 않습니다. 주석서는 어린 나이에 출가해 빠르게 깨달음에 이른 사미의 이야기를 이 게송에 이어 전합니다. 나이나 경력이 아니라 가르침에 마음을 쏟는 일 자체가 빛을 낸다는 것입니다. 압바 뭇또와 짠디마(abbhā muttova candimā)는 '구름에서 벗어난 달처럼'이라는 뜻으로, 달은 원래 빛나지만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것뿐이라는 그림입니다. 이 품이 몸의 단속에서 시작해 빛을 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묵상
나이나 경력이 적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낮춰 본 적이 있나요? 지금 마음을 쏟고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