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수행자가 이렇게 실천합니다.
‘그것은 없을 수도 있고 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없을 것이며 내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있는 것, 생겨난 것을 나는 버린다.’
이렇게 그는 평정을 얻습니다.
그 수행자는 완전한 열반에 듭니까, 들지 못합니까?”
“아난다여, 어떤 수행자는 들고 어떤 수행자는 들지 못하느니라.”
“세존이시여, 그 까닭과 조건은 무엇입니까?”
Evaṁ vutte, āyasmā ānando bhagavantaṁ etadavoca: “idha, bhante, bhikkhu evaṁ paṭipanno hoti: ‘no cassa, no ca me siyā; na bhavissati, na me bhavissati; yadatthi yaṁ, bhūtaṁ—taṁ pajahāmī’ti. Evaṁ upekkhaṁ paṭilabhati. Parinibbāyeyya nu kho so, bhante, bhikkhu na vā parinibbāyeyyā”ti? “Apetthekacco, ānanda, bhikkhu parinibbāyeyya, apetthekacco bhikkhu na parinibbāyeyyā”ti. “Ko nu kho, bhante, hetu ko paccayo yenapetthekacco bhikkhu parinibbāyeyya, apetthekacco bhikkhu na parinibbāyeyyā”ti?
맛지마 니까야 MN 106 흔들림 없음에 알맞은 경 (Āneñjasappāyasutta) 배경
아난다는 존재와 소유를 놓는 성찰로 평온을 얻은 두 수행자가 왜 서로 다른 결과에 이르는지 묻습니다. 같은 문장을 되새기고 같은 평온을 얻어도 한 사람은 완전한 열반에 들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할 수 있습니다. 차이는 수행 방법의 겉모양이나 평온의 깊이에 있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답은 얻어진 평온을 다시 기뻐하고 환영하며 붙드는지, 아니면 그 평온에도 의식이 기대지 않게 하는지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줍니다.
묵상
무언가를 놓아 평온해진 뒤 그 평온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새로 붙잡은 적이 있나요? 같은 놓아 버림의 성찰을 해도 한 사람은 열반에 들고 다른 사람은 들지 못한다는 문답에 비추어, 내 마음의 다음 반응은 무엇인가요?
“아난다여, 어떤 수행자는 이렇게 실천하느니라.
‘그것은 없을 수도 있고 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없을 것이며 내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있는 것, 생겨난 것을 나는 버린다.’
이렇게 평정을 얻은 그는
그 평정을 기뻐하고 환영하며 붙들고 머무느니라.
그러면 그의 의식은 그 평정에 기대고
그것을 집착의 대상으로 삼느니라.
아난다여, 집착이 남은 수행자는
완전한 열반에 들지 못하느니라.”
“Idhānanda, bhikkhu evaṁ paṭipanno hoti: ‘no cassa, no ca me siyā; na bhavissati, na me bhavissati; yadatthi, yaṁ bhūtaṁ—taṁ pajahāmī’ti. Evaṁ upekkhaṁ paṭilabhati. So taṁ upekkhaṁ abhinandati, abhivadati, ajjhosāya tiṭṭhati. Tassa taṁ upekkhaṁ abhinandato abhivadato ajjhosāya tiṭṭhato tannissitaṁ hoti viññāṇaṁ tadupādānaṁ. Saupādāno, ānanda, bhikkhu na parinibbāyatī”ti.
맛지마 니까야 MN 106 흔들림 없음에 알맞은 경 (Āneñjasappāyasutta) 배경
놓아 버림으로 생긴 평온도 기뻐하고 환영하며 굳게 붙들면 새로운 집착의 대상이 됩니다. 의식은 그 상태를 지지대로 삼고, 다시 얻고 유지해야 할 것으로 연료를 공급합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보다 훨씬 미세하고 고상해 보이지만 구조는 같습니다. 부처님은 무엇을 붙잡는지가 아니라 붙잡는 행위 자체가 완전한 열반을 가로막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평온은 해방의 문이 될 수 있지만 소유물이 되는 순간 또 하나의 머무를 곳이 됩니다.
묵상
평온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이나 특별한 명상 경험을 잃을까 두려워한 적이 있나요? 평온을 기뻐하고 환영한 뒤 붙들어 의식의 거처로 만드는 순간을 알아차린다면, 그 상태가 다시 와야 한다는 요구를 어디에서 놓을 수 있을까요?
아난다 존자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그 수행자는 무엇을 붙잡는 것입니까?”
“아난다여, 인식도 아니고 비인식도 아닌 영역이니라.”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그는
붙잡을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을 붙잡는 셈입니다.”
“그렇다, 아난다여.
붙잡을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인식도 아니고 비인식도 아닌 영역이니라.”
“Kahaṁ pana so, bhante, bhikkhu upādiyamāno upādiyatī”ti?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ṁ, ānandā”ti. “Upādānaseṭṭhaṁ kira so, bhante, bhikkhu upādiyamāno upādiyatī”ti? “Upādānaseṭṭhañhi so, ānanda, bhikkhu upādiyamāno upādiyati. Upādānaseṭṭhañhetaṁ, ānanda, yadidaṁ—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ṁ.
맛지마 니까야 MN 106 흔들림 없음에 알맞은 경 (Āneñjasappāyasutta) 배경
아난다는 그 미세한 집착의 대상을 정확히 확인합니다. 그것은 인식도 아니고 비인식도 아닌 가장 높은 명상 영역입니다. 부처님도 이를 붙잡을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집착도 집착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 문답은 낮고 거친 대상만 버리면 된다는 생각을 끊습니다. 수행의 정점에 가까운 평온도 의식이 기대는 대상으로 삼는 한 완전한 자유는 아닙니다.
묵상
붙잡을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뛰어난 명상 경지라면 집착해도 괜찮다고 여기나요? 인식도 비인식도 아닌 평온조차 그것 없이는 안 된다는 의식의 거처가 될 수 있음을 보면, 높고 좋은 대상에 매인 마음을 어떻게 알아차릴까요?
“아난다여, 다른 수행자도 이렇게 실천하느니라.
‘그것은 없을 수도 있고 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없을 것이며 내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있는 것, 생겨난 것을 나는 버린다.’
이렇게 평정을 얻은 그는
그 평정을 기뻐하지도 환영하지도 않으며
붙들고 머물지도 않느니라.
그러면 그의 의식은 그 평정에 기대지 않고
그것을 집착의 대상으로 삼지 않느니라.
아난다여, 집착이 없는 수행자는
완전한 열반에 드느니라.”
Idhānanda, bhikkhu evaṁ paṭipanno hoti: ‘no cassa, no ca me siyā; na bhavissati, na me bhavissati; yadatthi, yaṁ bhūtaṁ—taṁ pajahāmī’ti. Evaṁ upekkhaṁ paṭilabhati. So taṁ upekkhaṁ nābhinandati, nābhivadati, na ajjhosāya tiṭṭhati. Tassa taṁ upekkhaṁ anabhinandato anabhivadato anajjhosāya tiṭṭhato na tannissitaṁ hoti viññāṇaṁ na tadupādānaṁ. Anupādāno, ānanda, bhikkhu parinibbāyatī”ti.
맛지마 니까야 MN 106 흔들림 없음에 알맞은 경 (Āneñjasappāyasutta) 배경
두 번째 수행자는 같은 성찰과 같은 평온을 얻지만 반응이 다릅니다. 평온을 싫어하거나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뻐하며 내 것으로 환영하고 붙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식이 그 상태에 기대지 않고 집착의 연료도 생기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집착이 없는 이가 완전한 열반에 든다고 결론 내리십니다. 자유를 가르는 것은 경험의 높이가 아니라 어떤 경험에도 의식의 거처와 소유권을 만들지 않는 태도입니다.
묵상
좋은 경험을 싫어하거나 밀어내지 않으면서도 내 것으로 환영하고 붙들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고 느끼나요? 평온에 의식의 거처를 만들지 않고 집착의 연료를 보태지 않는다면, 지금의 고요와 어떤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