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야 장로니의 게송

몸이 부서질 성질을 관찰해 갈애의 소멸에 이른 일을 노래합니다.

아바야여, 이 몸은 부서지기 쉬운데 범부들은 거기에 집착합니다. 나는 분명히 알고 알아차리며 이 몸을 내려놓겠습니다.

“Abhaye bhiduro kāyo, yattha satā puthujjanā; Nikkhipissāmimaṁ dehaṁ, sampajānā satīmatī.

쿳다까 니까야 Thig 2.9 아바야 장로니의 게송 (Abhayātherīgāthā)

배경

아바야의 첫 게송은 죽음에 맡겨진 몸의 부서짐을 보라고 권하고, 그 몸에 대한 집착을 알아차리는 일로 다음 성취 선언을 준비합니다. 몸의 취약함과 범부의 집착을 대조한 다음,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을 갖추어 몸을 놓겠다는 화자의 선택을 밝힙니다. 몸을 성급히 버리라는 권유가 아니라, 죽을 성질을 외면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깨어 있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분명히 알고 알아차리며”입니다.

묵상

“이 몸은 부서지게 마련”이라는 말이 두려움으로만 들리나요, 붙잡는 힘을 덜어 주는 말로도 들리나요? 몸이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오늘 더 돌보고 싶은 한 부분을 찾을 수 있을까요? 죽음의 표현이 버겁다면 지금 살아 있는 감각 하나에만 주의를 돌려도 좋아요.

수많은 괴로운 성질을 겪었지만 방일하지 않기를 기뻐했기에 나는 갈애의 소멸에 이르렀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루었습니다.

Bahūhi dukkhadhammehi, appamādaratāya me; Taṇhakkhayo anuppatto, kataṁ buddhassa sāsanan”ti.

쿳다까 니까야 Thig 2.9 아바야 장로니의 게송 (Abhayātherīgāthā)

배경

마지막 게송은 수많은 괴로운 성질을 방일하지 않음으로 건넌 결과, 갈애의 소멸과 부처님의 가르침 완수에 이르렀다고 닫습니다. 많은 괴로움을 겪었다는 양보와 방일하지 않음을 기뻐한 원인을 놓고, 갈애 소멸과 가르침 완수라는 결과를 잇습니다. 괴로움 자체가 사람을 깨닫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가운데 놓지 않은 주의와 꾸준함이 해방의 조건이었다는 고백입니다.

묵상

괴로움을 겪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방일하지 않기를 기뻐했기에” 길이 열렸다는 순서는 어떻게 다가오나요? 힘든 상황에서도 놓치지 않았던 작은 주의나 돌봄이 있다면 무엇이었는지 돌아볼까요?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고 느껴지는 날에는 견딘 사실 하나만 인정해도 충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