웁비리 장로니의 게송

딸을 잃은 슬픔의 화살이 뽑히고 세 가지 보배에 귀의한 일을 노래합니다.

“아, 내 딸 지와여” 하며 그대는 숲에서 우는구나. 웁비리여, 자신에게 돌아오라. 이 화장터에서 불태워진 팔만 사천 명이 모두 지와라는 같은 이름을 가졌으니, 그대는 그 가운데 누구를 슬퍼하는가?

“Amma jīvāti vanamhi kandasi, Attānaṁ adhigaccha ubbiri; Cullāsītisahassāni, Sabbā jīvasanāmikā; Etamhāḷāhane daḍḍhā, Tāsaṁ kamanusocasi”.

쿳다까 니까야 Thig 3.5 웁비리 장로니의 게송 (Ubbiritherīgāthā)

배경

웁비리의 첫 게송은 숲에서 딸 지와의 이름을 부르며 우는 어머니에게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한 뒤, 같은 이름의 팔만 사천 명 가운데 누구를 슬퍼하는지 묻습니다. 숲에서 딸의 이름을 부르며 우는 웁비리에게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한 뒤, 같은 이름으로 불린 이를 정확히 팔만 사천 명 들어 누구를 슬퍼하는지 묻습니다. 한 사람의 상실을 작게 만들려는 셈이 아니라, 슬픔에 완전히 붙들린 시야를 넓혀 다음 게송에서 가슴의 화살이 뽑히는 전환을 여는 질문입니다.

묵상

팔만 사천 명 모두가 “지와”라는 이름이었다는 말은 지금의 상실을 작게 만드나요,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열어 주나요? 두 반응 가운데 어느 것도 정답으로 고르지 말고 마음이 실제로 움직이는 쪽을 느껴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이 차갑게 들린다면 그대로 거리를 두어도 괜찮아요.

참으로 당신은 내게서 화살을 뽑아 주셨습니다. 보기 어려운 채 가슴에 박혀 있던 화살을. 슬픔에 사로잡힌 내게서 딸을 잃은 슬픔을 몰아내 주셨습니다.

“Abbahī vata me sallaṁ, duddasaṁ hadayassitaṁ; Yaṁ me sokaparetāya, dhītusokaṁ byapānudi.

쿳다까 니까야 Thig 3.5 웁비리 장로니의 게송 (Ubbiritherīgāthā)

배경

둘째 게송은 앞의 질문을 들은 웁비리가 가슴 깊이 박혀 보이지 않던 화살이 뽑혔다고 응답하며, 슬픔이 지배하던 상태의 전환을 직접 증언합니다. 가슴에 박혀 있으나 보기 어려운 화살과 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같은 대상으로 연결하고, 그것이 뽑혔다고 응답합니다. 상실을 없었던 일로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라, 마음을 꿰뚫고 지배하던 슬픔의 화살에서 벗어난 전환을 표현합니다.

묵상

“보기 어려운 채 가슴에 박힌 화살”이라는 비유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슬픔을 어떻게 보여 주나요? 내 마음을 찌르지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아픔이 있다면, 그 존재만 안전하게 인정할 수 있을까요? 혼자 다루기 어렵다면 믿을 만한 사람이나 전문 도움을 찾는 선택도 열어 두세요.

오늘 나는 화살이 뽑혔고 갈망이 없으며 완전히 꺼졌습니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 그 성자께 귀의합니다.

Sājja abbūḷhasallāhaṁ, Nicchātā parinibbutā; Buddhaṁ dhammañca saṅghañca, Upemi saraṇaṁ munin”ti.

쿳다까 니까야 Thig 3.5 웁비리 장로니의 게송 (Ubbiritherīgāthā)

배경

마지막 게송은 오늘 화살이 뽑혔다는 현재의 선언, 갈망 없음과 완전한 평온, 부처·가르침·승가에 대한 귀의를 차례로 놓아 웁비리의 노래를 마칩니다. 오늘 화살이 뽑힌 결과를 갈망 없음과 열반으로 밝히고, 부처·가르침·승가의 세 귀의처를 차례로 선언합니다. 슬픔에서 벗어난 체험이 개인적 안도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이끈 깨달음과 길과 공동체에 대한 귀의로 완결됩니다.

묵상

웁비리가 “오늘” 화살이 뽑혔다고 말하는 순간에는 이전의 긴 슬픔과 지금의 변화가 함께 있습니다. 완전히 괜찮아졌다는 판단 대신, 오늘 조금 달라진 한 감각이나 숨 쉴 틈이 있는지 살펴볼 수 있나요? 없다면 없는 그대로 두고 회복을 재촉하지 않아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