밧다 까삘라니 장로니의 게송

과거의 삶을 기억하고 세 가지 앎으로 해방된 두 수행자를 함께 기립니다.

부처님의 아들이며 상속자인 깟사빠는 마음을 훌륭히 삼매에 들게 했습니다. 그는 전생의 삶을 알고 천상과 비참한 곳을 봅니다.

“Putto buddhassa dāyādo, kassapo susamāhito; Pubbenivāsaṁ yovedi, saggāpāyañca passati.

쿳다까 니까야 Thig 4.1 밧다 까삘라니 장로니의 게송 (Bhaddākāpilānītherīgāthā)

배경

노래는 깟사빠를 가르침의 상속자로 먼저 세우고 전생과 여러 삶의 행로를 아는 두 앎을 든 뒤, 다음 게송에서 태어남의 소멸을 셋째 앎으로 보탭니다. 깟사빠를 부처님의 아들이자 상속자라고 밝힌 뒤, 전생을 아는 앎과 천상·비참한 곳을 보는 앎을 차례로 듭니다. 가르침의 상속은 혈통이 아니라 마음을 모으고 삶과 죽음의 여러 행로를 직접 아는 지혜로 성립합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부처님의 아들이며 상속자인 깟사빠”입니다.

묵상

“부처님의 아들이며 상속자인 깟사빠”라는 표현에서 상속이 혈통 아닌 삼매와 앎으로 드러나는 대조를 어떻게 느끼나요? 내게 물려받았다고 여긴 것과 실제로 길러 온 것을 가볍게 구별해 보거나, 오늘은 판단 없이 그 차이만 남겨 둘 수 있을까요?

또한 그는 태어남의 소멸에 이르렀고 높은 앎을 완성한 성자입니다. 이 세 가지 앎으로 말미암아 그는 세 가지 앎을 갖춘 참된 바라문입니다.

Atho jātikkhayaṁ patto, abhiññāvosito muni; Etāhi tīhi vijjāhi, tevijjo hoti brāhmaṇo.

쿳다까 니까야 Thig 4.1 밧다 까삘라니 장로니의 게송 (Bhaddākāpilānītherīgāthā)

배경

앞 게송의 전생을 아는 앎과 천상의 눈에 태어남을 끝내는 앎이 더해져 셋이 되고, 이어지는 게송은 같은 세 앎을 밧다에게 그대로 옮깁니다. 앞의 두 앎에 태어남의 소멸을 더해 정확히 세 가지를 이루고, 그 셋을 갖춘 이를 참된 바라문이라 부릅니다. 바라문이라는 이름을 혈통이 아니라 재생의 원인을 끝내는 세 가지 해방의 앎으로 새롭게 규정합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이 세 가지 앎으로 말미암아”입니다.

묵상

앞의 둘에 소멸의 앎을 더해 “세 가지 앎”이 완성되는 셈법에서, 무엇을 많이 아는 일과 반복을 끝낼 만큼 아는 일은 어떻게 달라 보이나요? 답을 성취 여부로 만들지 말고, 지금은 셋 가운데 마음에 닿는 한 갈래만 골라도 괜찮을까요?

바로 그와 같이 까삘라의 딸 밧다도 세 가지 앎을 갖추어 죽음을 벗어났습니다. 마라와 그 군대를 이기고 마지막 몸을 지니고 있습니다.

Tatheva bhaddā kāpilānī, tevijjā maccuhāyinī; Dhāreti antimaṁ dehaṁ, jetvā māraṁ savāhiniṁ.

쿳다까 니까야 Thig 4.1 밧다 까삘라니 장로니의 게송 (Bhaddākāpilānītherīgāthā)

배경

깟사빠에게 붙인 세 가지 앎을 “바로 그와 같이” 밧다에게도 돌려준 뒤, 마지막 게송은 두 사람이 함께 출가한 까닭과 공동의 결실을 복수형으로 밝힙니다. 깟사빠와 똑같이 밧다에게도 세 가지 앎을 귀속하고, 마라의 군대를 이긴 결과를 마지막 몸으로 밝힙니다. 해방의 앎과 죽음의 극복은 성별과 무관하며, 다시 태어남을 잇지 않는 마지막 삶으로 드러납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바로 그와 같이 까삘라의 딸 밧다도”입니다.

묵상

“바로 그와 같이 까삘라의 딸 밧다도”라는 한마디가 두 수행자의 해방을 나란히 놓는 장면에서 어떤 평등을 보여 주나요? 누군가와 자신을 우열 없이 병렬로 놓아 보거나, 비교가 불편하면 이 대칭을 그저 문장 안에 두어도 될까요?

세상의 위험을 보고 우리 둘은 출가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번뇌가 다하고 길들여졌으며, 서늘해지고 완전히 꺼졌습니다.”

Disvā ādīnavaṁ loke, ubho pabbajitā mayaṁ; Tyamha khīṇāsavā dantā, sītibhūtamha nibbutā”ti.

쿳다까 니까야 Thig 4.1 밧다 까삘라니 장로니의 게송 (Bhaddākāpilānītherīgāthā)

배경

앞에서 밧다와 깟사빠의 성취를 각각 확인한 흐름이 여기서 “우리 둘”의 선택으로 합쳐지며, 세상의 위험을 본 출가에서 서늘한 해방까지 노래를 닫습니다. 위험을 본 까닭에 두 사람이 함께 출가했고, 두 사람 모두 번뇌가 다해 길들고 서늘해졌다고 복수형으로 선언합니다. 함께 길을 떠난 두 수행자가 각자 번뇌를 끝내어 같은 해방의 결실에 이르렀음을 보여 줍니다.

묵상

“우리 둘은 출가했습니다”와 “우리는 번뇌가 다했습니다” 사이에서 함께 떠나는 일과 각자 길들여지는 일은 어떻게 이어지나요? 곁의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방향 하나를 떠올리거나, 혼자 걷는 편이 안전하다면 그 선택을 존중해도 괜찮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