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유녀 위말라 장로니의 게송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유혹하던 삶과 해방된 현재를 대조합니다.

나는 용모와 몸매와 아름다움과 명성에 취했고, 젊음을 믿고 거만해져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겼습니다.

“Mattā vaṇṇena rūpena, sobhaggena yasena ca; Yobbanena cupatthaddhā, aññāsamatimaññihaṁ.

쿳다까 니까야 Thig 5.2 전직 유녀 위말라 장로니의 게송 (Vimalātherīgāthā)

배경

위말라는 용모·몸매·아름다움·명성에 취해 타인을 낮추던 과거부터 고백하고, 다음 게송에서는 그 우월감이 사람을 붙잡는 덫의 이미지로 바뀝니다. 취한 대상을 용모·몸매·아름다움·명성으로 열거하고, 젊음에서 생긴 거만이 타인을 업신여기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몸과 평판을 자기 우월성의 근거로 붙들 때 비교와 멸시가 자라나는 과정을 스스로 돌아봅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젊음을 믿고 거만해져”입니다.

묵상

“젊음을 믿고 거만해져” 다른 이를 업신여겼다는 고백에서, 칭찬받는 조건이 어느 순간 비교의 자로 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자신을 탓하기보다 그 자가 작동하는 순간만 알아차리거나, 오늘은 이 질문과 거리를 두어도 될까요?

어리석은 이들이 칭송하던 이 몸을 곱고 화려하게 꾸민 뒤, 사냥꾼이 덫을 놓듯 나는 유곽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Vibhūsetvā imaṁ kāyaṁ, sucittaṁ bālalāpanaṁ; Aṭṭhāsiṁ vesidvāramhi, luddo pāsamivoḍḍi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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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앞에서 말한 아름다움의 자만이 화려하게 꾸민 몸과 유곽 문 앞의 “사냥꾼의 덫”으로 형상화되고, 뒤에서는 장신구·노출·속임수·비웃음으로 그 방식이 더 세밀해집니다. 몸을 꾸미고 유곽 문에 선 행동을, 사냥꾼이 덫을 놓는 일에 직접 견주어 사람을 끌어들이려는 목적을 밝힙니다. 남의 욕망과 자신의 생계를 얽어 매던 과거의 방식을 미화하지 않고, 붙잡는 구조로 정직하게 봅니다.

묵상

유곽 문 앞에서 “사냥꾼이 덫을 놓듯” 섰다는 거친 비유를 읽으며, 관심을 끄는 표현과 누군가를 붙잡으려는 의도 사이 경계는 어디쯤 보이나요? 개인 경험을 꺼내기 싫다면 비유의 덫만 바라보거나 바로 넘겨도 괜찮을까요?

장신구를 드러내고 감추어진 곳도 많이 내보이며, 갖가지 속임수를 부려 많은 사람을 큰 소리로 비웃었습니다.

Piḷandhanaṁ vidaṁsentī, guyhaṁ pakāsikaṁ bahuṁ; Akāsiṁ vividhaṁ māyaṁ, ujjagghantī bahuṁ jana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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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덫의 비유 뒤에 장신구와 감춘 몸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비웃던 행동이 이어지며, 다음 게송의 삭발·겹옷·나무 아래 고요와 선명한 전후 대조를 준비합니다. 장신구와 감추어진 몸을 드러낸 행동, 갖가지 속임수, 많은 이를 비웃은 행동을 차례로 나열합니다. 매력과 조롱을 함께 써서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던 방식을 숨김없이 인식하는 고백입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갖가지 속임수를 부려”입니다.

묵상

“갖가지 속임수”와 “큰 소리로 비웃음”이 함께 놓인 장면에서, 나를 돋보이게 하려는 마음이 타인을 작게 만드는 순간을 알아볼 수 있나요? 기억을 억지로 찾지 말고 오늘의 말 한마디만 돌아보거나, 불편하면 답하지 않아도 될까요?

그러나 오늘 나는 탁발을 다녀왔고, 머리를 깎고 겹옷을 걸친 채 나무 아래 앉아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경지를 얻었습니다.

Sājja piṇḍaṁ caritvāna, muṇḍā saṅghāṭipārutā; Nisinnā rukkhamūlamhi, avitakkassa lābhin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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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앞의 장신구와 유곽 문을 “그러나 오늘”로 꺾어 탁발·삭발·겹옷·나무 아래 앉음으로 바꾸고, 마지막은 인간과 천상의 모든 멍에가 끊어진 범위로 넓어집니다. 과거의 치장과 대조되게 오늘의 탁발·삭발·가사를 들고, 나무 아래 앉아 사유가 없는 경지를 얻었다고 합니다. 시선을 끌기 위해 꾸미던 삶에서 물러나 단순한 차림과 고요한 집중 속에서 다른 자유를 발견합니다.

묵상

화려한 치장 대신 머리를 깎고 겹옷을 입어 나무 아래 앉은 대비에서, 시선을 모으는 일과 생각이 잦아드는 일 중 지금 몸이 원하는 쪽은 무엇인가요? 어느 쪽도 고르기 어렵다면 잠시 주변의 한 색만 보고 지나가도 괜찮을까요?

천상의 것이든 인간의 것이든 모든 멍에는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모든 번뇌를 소진하여 나는 서늘해지고 완전히 꺼졌습니다.”

Sabbe yogā samucchinnā, ye dibbā ye ca mānusā; Khepetvā āsave sabbe, sītibhūtāmhi nibbutā”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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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나무 아래서 얻은 고요가 마지막에는 인간적 멍에뿐 아니라 천상의 멍에까지 끊는 해방으로 확장되어, 과거에 타인의 시선을 붙잡던 노래를 완전한 놓임으로 닫습니다. 멍에를 천상과 인간의 두 범주로 모두 포괄하고, 모든 번뇌가 소진되었기 때문에 서늘해지고 꺼졌다고 말합니다. 더 세련된 즐거움으로 옮겨 간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 방식에도 매이지 않는 완전한 해방을 선언합니다.

묵상

“천상의 것이든 인간의 것이든”이라는 양쪽 포괄은 더 고상해 보이는 즐거움도 멍에가 될 수 있다고 말해요. 지금 붙든 것 가운데 평범한 것과 이상적인 것을 하나씩 떠올려 보거나, 놓을 준비가 없다면 그 무게만 인정해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