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다리난다 장로니의 게송

몸의 덧없고 깨끗하지 않은 성질을 관찰해 자만을 버리라고 이릅니다.

이것이 그러하듯 저것도 그러하고, 저것이 그러하듯 이것도 그러합니다. 악취를 풍기며 썩어 가는 것을 어리석은 이들은 기뻐합니다.

Yathā idaṁ tathā etaṁ, yathā etaṁ tathā idaṁ; Duggandhaṁ pūtikaṁ vāti, bālānaṁ abhinanditaṁ.

쿳다까 니까야 Thig 5.4 순다리난다 장로니의 게송 (Sundarīnandātherīgāthā)

배경

이 노래의 첫 권고는 앞서 아비루빠난다에게 온전히 전한 몸 관찰과 같은 말이라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그 권고를 받은 이 게송은 자기 몸과 남의 몸이 부패의 성질에서 다르지 않다고 양방향으로 확인합니다. 이것과 저것의 성질이 서로 같다는 문장을 두 방향으로 반복하고, 악취와 부패에도 어리석은 이가 기뻐한다고 합니다. 자기 몸과 남의 몸을 달리 미화하지 않고 모두 같은 쇠퇴의 성질을 지닌 것으로 보게 합니다. 앞의 한 게송은 이 문헌에서 앞서 온전히 실은 같은 게송을 그대로 되풀이합니다. 여기서는 같은 문장을 거듭 적지 않았으므로, 앞의 온전한 게송과 이어 읽으십시오.

묵상

“이것이 그러하듯 저것도 그러하고”라는 왕복 문장은 내 몸과 남의 몸을 특별 취급하지 않게 해요. 혐오나 평가로 기울지 않으면서 둘 다 변하는 몸이라는 한 사실만 볼 수 있나요? 불편하면 몸 관찰을 멈추고 중립적인 소리로 주의를 옮겨도 될까요?

이와 같이 그것을 살피며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그 뒤 내 지혜로 꿰뚫어 나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Evametaṁ avekkhantī, rattindivamatanditā; Tato sakāya paññāya, abhinibbijjha dakkhisaṁ”.

쿳다까 니까야 Thig 5.4 순다리난다 장로니의 게송 (Sundarīnandātherīgāthā)

배경

앞의 이것과 저것을 같은 성질로 보는 관찰을 밤낮으로 지속한 결과 자기 지혜로 분명히 보았다고 말하며, 다음에는 그 통찰이 몸의 안과 밖 전체로 넓어집니다. 앞의 관찰법을 밤과 낮 내내 게으르지 않게 지속했고, 그 결과 자기 지혜로 꿰뚫어 보았다고 말합니다. 빌려 온 판단이 아니라 꾸준히 관찰하여 몸의 성질을 자신의 지혜로 직접 확인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묵상

“내 지혜로 꿰뚫어” 보았다는 말은 남의 판단을 빌리는 것과 직접 확인하는 일을 가릅니다. 오늘 반복해서 보아야 조금 분명해지는 몸의 변화가 있나요? 답을 만들지 말고 한 번 관찰하거나, 몸을 보는 일이 힘들면 다른 변화 한 가지를 택해도 될까요?

내가 방일하지 않고 이치에 맞게 살펴보자, 이 몸의 안과 밖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었습니다.

“Tassā me appamattāya, vicinantiyā yoniso; Yathābhūtaṁ ayaṁ kāyo, diṭṭho santarabāhiro.

쿳다까 니까야 Thig 5.4 순다리난다 장로니의 게송 (Sundarīnandātherīgāthā)

배경

밤낮의 지속 끝에 얻은 분명한 봄이 여기서 몸의 안과 밖을 함께 보는 방식으로 구체화되고, 마지막 게송은 그 사실적 관찰이 탐착의 소멸과 고요로 이어졌다고 밝힙니다. 방일하지 않음과 이치에 맞는 탐구를 조건으로 삼아, 몸을 안팎 모두 있는 그대로 보았다는 결과를 밝힙니다. 몸의 일부만 골라 보지 않고 내면과 외형을 함께 관찰할 때 왜곡 없는 이해가 자랍니다.

묵상

“이 몸의 안과 밖”을 함께 본다는 말에서 겉모습과 내부 감각 중 평소 덜 듣는 쪽은 어느 쪽인가요? 한쪽을 우선해 조용히 느껴 보거나, 몸에 주의를 두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면 방 안의 안쪽과 바깥 풍경을 살펴도 괜찮을까요?

그때 나는 몸에 싫증이 났고 내면에서도 탐착이 사라졌습니다. 방일하지 않고 모든 매임에서 벗어나, 나는 고요해지고 완전히 꺼졌습니다.”

Atha nibbindahaṁ kāye, ajjhattañca virajjahaṁ; Appamattā visaṁyuttā, upasantāmhi nibbutā”ti.

쿳다까 니까야 Thig 5.4 순다리난다 장로니의 게송 (Sundarīnandātherīgāthā)

배경

안팎을 있는 그대로 본 뒤 몸에 대한 염오와 내면의 탐착 소멸이 함께 일어나며, 방일하지 않은 관찰로 시작한 노래를 모든 매임에서 벗어난 고요로 맺습니다. 몸에 대한 염오에서 내면의 탐착이 사라지고, 방일하지 않은 수행과 매임 없음이 고요와 열반으로 이어집니다. 몸의 실상을 보는 지혜가 집착을 약화해, 억눌림이 아니라 서늘하고 고요한 해방으로 완성됩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내면에서도 탐착이 사라졌습니다”입니다.

묵상

“내면에서도 탐착이 사라졌다”는 결과를 당장 따라야 할 기준으로 삼지 않고, 붙듦이 아주 조금 느슨해지는 순간만 알아볼 수 있나요? 그런 순간이 없다면 없다고 두고 몸을 돌보는 편을 택하거나, 이 질문을 다음으로 미뤄도 괜찮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