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둣따라 장로니의 게송

여러 의례와 고행을 떠돌다 바른 길에서 세 가지 앎을 얻은 일을 노래합니다.

예전에 나는 불과 달과 해와 여러 신에게 예배했습니다. 강의 나루터로 가서는 물속에 몸을 담갔습니다.

“Aggiṁ candañca sūriyañca, devatā ca namassihaṁ; Nadītitthāni gantvāna, udakaṁ oruhāmihaṁ.

쿳다까 니까야 Thig 5.5 난둣따라 장로니의 게송 (Nanduttarātherīgāthā)

배경

난둣따라는 불·달·해·여러 신에게 예배하고 강물에 몸을 담갔던 바깥 의례부터 회고하며, 다음에는 반쪽 삭발·맨땅 잠·야간 금식이라는 고행 목록을 보탭니다. 예배한 대상을 불·달·해·신들로 열거하고, 정화를 바라며 강 나루터에서 물에 들어간 행동을 덧붙입니다. 바깥 대상에 절하고 물로 씻는 데서 해방을 찾았던 이전의 수행 방식을 돌아봅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불과 달과 해와”입니다.

묵상

불과 달과 해에 절한 뒤 강물에 몸을 담그는 장면에서, 마음의 평화를 바깥 절차가 대신해 주길 바랐던 경험이 있나요? 그 바람을 어리석다고 몰지 말고 무엇을 기대했는지만 살피거나, 개인 기억 없이 세 빛의 이미지만 떠올려도 될까요?

수많은 서원을 받아 지키며 머리의 절반을 밀었습니다. 맨땅에 잠자리를 마련했고 밤에는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Bahūvatasamādānā, aḍḍhaṁ sīsassa olikhiṁ; Chamāya seyyaṁ kappemi, rattiṁ bhattaṁ na bhuñjahaṁ.

쿳다까 니까야 Thig 5.5 난둣따라 장로니의 게송 (Nanduttarātherīgāthā)

배경

앞의 예배와 입수에 이어 반쪽만 민 머리·맨땅의 잠자리·밤 금식이 열거되고, 뒤에서는 정반대로 장신구와 향유로 몸을 섬겼다는 모순이 드러납니다. 많은 서원, 반쪽 삭발, 맨땅의 잠자리, 야간 금식이라는 네 가지 고행을 차례로 열거합니다. 눈에 띄는 형식과 몸을 괴롭히는 규칙을 많이 지키는 것만으로는 마음의 매임이 풀리지 않음을 대비시킵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머리의 절반을 밀었습니다”입니다.

묵상

머리의 절반만 밀고 맨땅에서 자면서 밤에는 먹지 않은 네 고행을 보며, 눈에 보이는 엄격함이 마음의 방향을 보장하는지 어떻게 느끼나요? 내 규칙 하나를 느슨하게 점검하거나, 지금 필요하다면 규칙보다 휴식과 식사를 먼저 골라도 괜찮을까요?

한편으로는 장신구와 치장을 즐기고 목욕과 향유 바르기에도 빠져, 감각적 욕망에 시달리면서 이 몸을 정성껏 섬겼습니다.

Vibhūsāmaṇḍanaratā, nhāpanucchādanehi ca; Upakāsiṁ imaṁ kāyaṁ, kāmarāgena aṭṭitā.

쿳다까 니까야 Thig 5.5 난둣따라 장로니의 게송 (Nanduttarātherīgāthā)

배경

몸을 괴롭힌 고행 다음에 장신구·목욕·향유로 같은 몸을 정성껏 섬긴 일이 놓여 두 극단을 드러내고, 다음 게송은 몸을 있는 그대로 보는 제삼의 방향으로 전환합니다. 고행과 달리 치장·목욕·향유도 즐겼으며, 감각적 욕망에 괴로워하면서 몸을 섬겼다는 모순을 밝힙니다. 몸을 괴롭히는 일과 꾸미는 일이 겉으로 반대여도, 몸에 대한 집착을 중심으로 삼으면 같은 매임이 될 수 있습니다.

묵상

고행과 치장이 반대처럼 보이지만 둘 다 “이 몸”을 중심에 놓았다는 대비가 보여요. 나를 벌주는 돌봄과 과하게 꾸미는 돌봄 사이에서 몸에 실제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모르겠다면 물 한 잔이나 편한 자세처럼 작은 선택만 해도 될까요?

그러다 믿음을 얻은 뒤 집을 떠나 출가했습니다. 몸을 있는 그대로 보자 감각적 욕망은 뿌리째 뽑혔습니다.

Tato saddhaṁ labhitvāna, pabbajiṁ anagāriyaṁ; Disvā kāyaṁ yathābhūtaṁ, kāmarāgo samūhato.

쿳다까 니까야 Thig 5.5 난둣따라 장로니의 게송 (Nanduttarātherīgāthā)

배경

괴롭힘과 치장 사이를 오가던 흐름이 믿음·출가·사실대로 보는 관찰로 바뀌고, 마지막 게송은 욕망의 뿌리가 뽑힌 결과를 재생과 갈망의 단절로 넓힙니다. 믿음을 얻어 출가한 뒤 몸을 있는 그대로 본 것이 원인이 되어, 감각적 욕망이 완전히 제거되었다고 합니다. 몸을 벌하거나 숭배하는 두 극단을 떠나 그 성질을 바로 보는 지혜가 욕망의 뿌리를 끊습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몸을 있는 그대로 보자”입니다.

묵상

“몸을 있는 그대로 보자” 욕망이 뿌리째 뽑혔다는 인과에서,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이 칭찬도 비난도 덜어 내는 시선으로 느껴지나요? 거울 대신 한 감각을 중립적으로 말해 보거나, 오늘은 몸을 관찰하지 않는 쪽을 택해도 괜찮을까요?

모든 다시 태어남은 완전히 끊어졌고 바람과 갈망도 모두 끊어졌습니다. 모든 멍에에서 벗어나 나는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Sabbe bhavā samucchinnā, icchā ca patthanāpi ca; Sabbayogavisaṁyuttā, santiṁ pāpuṇi cetaso”ti.

쿳다까 니까야 Thig 5.5 난둣따라 장로니의 게송 (Nanduttarātherīgāthā)

배경

몸의 참모습을 본 뒤 감각적 욕망이 뿌리째 뽑힌 데 이어, 마지막은 다시 태어남·바람·갈망·모든 멍에가 차례로 끊어져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닫습니다. 모든 존재의 재생뿐 아니라 바람과 갈망까지 끊었다고 한 뒤, 모든 멍에에서 풀려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맺습니다. 바깥 의례가 주지 못한 평화가 존재를 계속 바라며 붙드는 마음 자체를 놓을 때 실현됩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바람과 갈망도 모두 끊어졌습니다”입니다.

묵상

“바람과 갈망도 모두 끊어졌다”는 큰 결말 앞에서, 오늘 잠깐 내려놓을 수 있는 기대 하나와 아직 품고 싶은 소망 하나를 구별할 수 있나요? 둘 다 그대로 두어도 되고, 구별 자체가 버거우면 마음의 평화라는 마지막 말만 쉬듯 읽어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