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슬머리 밧다 장로니의 게송

논쟁을 찾아 떠돌던 이가 바른 가르침을 만나 해방된 일을 노래합니다.

예전에 나는 머리카락을 뽑고 진흙을 묻힌 채 옷 한 벌만 입고 떠돌았습니다. 허물 없는 데서 허물을 찾고 허물 있는 데서는 허물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Lūnakesī paṅkadharī, ekasāṭī pure cariṁ; Avajje vajjamatinī, vajje cāvajjadassinī.

쿳다까 니까야 Thig 5.9 곱슬머리 밧다 장로니의 게송 (Bhaddākuṇḍalakesātherīgāthā)

배경

밧다는 머리를 뽑고 진흙을 바른 외형의 고행과 허물 판단을 거꾸로 한 내적 오류를 함께 고백하고, 다음에는 독수리봉에서 부처님과 승가를 보는 장면으로 전환합니다. 머리 뽑기·진흙·한 벌 옷의 고행을 들고, 허물 없음과 허물을 서로 뒤바꾸어 보았다는 두 오류를 대칭으로 말합니다. 가혹한 외형을 바른 수행이라 믿으면서 실제 해로운 것을 놓친, 뒤집힌 판단을 스스로 인정합니다.

묵상

“허물 없는 데서 허물을 찾고” 정작 허물에서는 없다고 본 대칭이 날카로워요. 요즘 과하게 탓하는 일과 지나치게 눈감는 일을 하나씩 구별해 볼 수 있나요? 확신이 없다면 판단을 보류하는 선택도 충분할까요?

낮에 머물던 곳을 나와 독수리봉 산에 이르렀을 때, 티끌 없는 부처님께서 수행자 승가를 거느리고 앞장서 계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Divāvihārā nikkhamma, gijjhakūṭamhi pabbate; Addasaṁ virajaṁ buddhaṁ, bhikkhusaṅghapurakkhataṁ.

쿳다까 니까야 Thig 5.9 곱슬머리 밧다 장로니의 게송 (Bhaddākuṇḍalakesātherīgāthā)

배경

뒤바뀐 판단으로 떠돌던 삶이 독수리봉에서 수행자 승가를 이끄는 부처님을 마주하는 장면으로 꺾이고, 이어 무릎을 꿇어 합장한 밧다에게 짧은 부름이 건네집니다. 낮의 머묾에서 나와 독수리봉에 간 뒤, 수행자 승가의 선두에 있는 부처님을 보았다고 장소와 장면을 밝힙니다. 그릇된 수행을 떠돌던 삶에 깨끗한 스승과 수행 공동체를 만나는 전환이 일어납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수행자 승가를 거느리고”입니다.

묵상

“수행자 승가를 거느리고 앞장선” 모습을 멀리서 본 순간, 혼자 논쟁하던 길과 함께 걷는 길의 차이가 어떻게 보이나요? 지금 믿고 따라갈 기준 하나를 생각하거나, 아직 누구도 따르고 싶지 않다면 거리를 지켜도 괜찮을까요?

나는 무릎을 꿇어 절하고 부처님 앞에서 두 손을 모았습니다. “오라, 밧다여.” 하고 나에게 말씀하셨으니, 그것이 곧 나의 구족계였습니다.

Nihacca jāṇuṁ vanditvā, sammukhā añjaliṁ akaṁ; ‘Ehi bhadde’ti maṁ avaca, sā me āsūpasampadā.

쿳다까 니까야 Thig 5.9 곱슬머리 밧다 장로니의 게송 (Bhaddākuṇḍalakesātherīgāthā)

배경

독수리봉에서 절하고 두 손을 모은 행동에 “오라, 밧다여”라는 한마디가 답이 되어 곧 구족계가 되고, 다음 게송은 그 뒤 쉰 해 동안 다섯 지역을 다닌 삶을 회고합니다. 무릎을 꿇고 절하고 합장한 뒤, 부처님의 짧은 부름이 곧 구족계가 되었다고 직접 발화를 보존합니다. 진실한 귀의가 형식의 과시를 떠나 바른 공동체에 들어가는 새로운 삶으로 이어집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오라, 밧다여”입니다.

묵상

긴 의식 대신 “오라, 밧다여”라는 짧은 부름이 새로운 삶의 문이 된 장면에서, 내게 환대처럼 들렸던 간결한 말이 있나요? 없다면 지금 스스로에게 부담 없는 한마디를 건네 보거나, 침묵을 환대로 택해도 될까요?

“나는 앙가와 마가다, 왓지와 까시와 꼬살라를 두루 다녔습니다. 쉰 해 동안 빚 없이 여러 나라의 탁발 음식을 먹었습니다.”

Ciṇṇā aṅgā ca magadhā, vajjī kāsī ca kosalā; Anaṇā paṇṇāsa vassāni, raṭṭhapiṇḍaṁ abhuñjahaṁ.

쿳다까 니까야 Thig 5.9 곱슬머리 밧다 장로니의 게송 (Bhaddākuṇḍalakesātherīgāthā)

배경

짧은 부름으로 출가한 뒤 앙가·마가다·왓지·까시·꼬살라를 쉰 해 동안 다니며 빚 없이 음식을 받았다고 말하고, 마지막은 그 밧다에게 가사를 보시한 재가자를 찬탄합니다. 다닌 곳을 앙가·마가다·왓지·까시·꼬살라의 다섯 지역으로 열거하고, 정확히 쉰 해 동안 빚 없이 먹었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 받은 공양을 집착이나 허물 없이 받아 수행의 결실로 보답했다는 당당한 선언입니다.

묵상

다섯 지역을 “쉰 해 동안 빚 없이” 다니며 탁발했다는 말에서, 받음과 빚짐을 구별하는 관계는 무엇으로 가능해 보이나요? 오늘 받은 것 하나에 고마움을 느끼되 갚아야 한다는 압박은 내려놓거나, 받기 어려우면 그 마음부터 인정해도 될까요?

“아, 그는 참으로 많은 공덕을 지었습니다! 그 재가 신자는 참으로 지혜롭습니다. 모든 매듭에서 풀려난 밧다에게 가사를 보시하였기 때문입니다.”

Puññaṁ vata pasavi bahuṁ, Sappañño vatāyaṁ upāsako; Yo bhaddāya cīvaraṁ adāsi, Vippamuttāya sabbaganthehī”ti.

쿳다까 니까야 Thig 5.9 곱슬머리 밧다 장로니의 게송 (Bhaddākuṇḍalakesātherīgāthā)

배경

쉰 해의 빚 없는 탁발을 말한 뒤 화자가 바뀌어, 모든 매듭에서 풀린 밧다에게 가사를 준 재가자의 공덕과 지혜를 그 이유까지 밝혀 찬탄하며 끝납니다. 재가 신자를 공덕 많고 지혜롭다고 두 번 찬탄하며, 그 이유를 모든 매듭에서 풀려난 밧다에게 가사를 준 데 둡니다. 보시의 가치는 물건의 크기보다 받는 이의 청정한 삶을 알아보고 기꺼이 돕는 지혜와 연결됩니다.

묵상

“모든 매듭에서 풀려난 밧다에게” 가사를 준 일이 지혜로운 보시로 찬탄받아요. 무엇을 주느냐뿐 아니라 누구의 어떤 길을 돕는가를 살펴볼 수 있나요? 당장 줄 것이 없다면 누군가의 방향을 방해하지 않는 선택도 괜찮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