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따짜라의 제자 오백 장로니의 게송

자식을 잃은 슬픔에서 네 가지 진리를 알고 해방에 이른 일을 노래합니다.

“그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갔는지, 그 길을 그대는 알지 못합니다.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그 존재를 두고 ‘내 아들’이라 하며 웁니다.

“Yassa maggaṁ na jānāsi, āgatassa gatassa vā; Taṁ kuto cāgataṁ sattaṁ, ‘mama putto’ti rodasi.

쿳다까 니까야 Thig 6.1 빠따짜라의 제자 오백 장로니의 게송 (Pañcasatamattātherīgāthā)

배경

자식을 잃은 어머니에게 건네는 여섯 게송 가운데 첫째로, 온 곳과 간 곳을 모른다는 사실과 “내 아들”이라 붙들며 우는 일을 맞놓고 다음의 조건문을 엽니다. 온 곳과 간 곳을 둘 다 알지 못한다는 부정을 거듭하고, 그런데도 그 존재를 내 아들이라 붙들며 운다고 합니다. 사랑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존재의 오고 감을 붙들 수 없다는 사실을 슬픔 한가운데 놓아 봅니다.

묵상

“그 길을 그대는 알지 못합니다”라는 말은 상실의 슬픔을 꾸짖기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범위를 가리켜요. 알지 못함을 당장 설명으로 메우지 않고 잠시 둘 수 있나요? 사별을 떠올리는 일이 버거우면 이 노래를 덮고 안전한 사람 곁으로 가도 될까요?

하지만 그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갔는지, 그 길을 참으로 안다면 그를 두고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들의 성질이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Maggañca khossa jānāsi, āgatassa gatassa vā; Na naṁ samanusocesi, evaṁdhammā hi pāṇino.

쿳다까 니까야 Thig 6.1 빠따짜라의 제자 오백 장로니의 게송 (Pañcasatamattātherīgāthā)

배경

앞에서 오고 간 길을 모른 채 운다고 한 데 반대로, 그 길을 안다면 생명의 성질을 이해해 슬퍼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을 세우고 다음에는 청함 없는 도착과 떠남을 풉니다. 앞의 무지와 반대로 오고 가는 길을 안다는 조건을 세우고, 생명의 성질이 그러하기에 슬퍼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죽음을 예외적 파탄으로만 보지 않고 모든 생명이 따르는 조건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묵상

“살아 있는 것들의 성질이 이와 같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지금의 슬픔을 없애야 한다는 요구로 들리지는 않나요? 가르침과 실제 감정 사이 거리를 인정하거나, 감정이 크다면 이해하려 애쓰지 않고 돌봄을 먼저 선택해도 괜찮을까요?

청하지 않았는데 여기 왔고 허락받지 않고 여기서 떠났습니다. 어딘가에서 와서 며칠 머물렀다가 여기서 한 길로 떠나 그곳에서는 또 다른 길로 갑니다.

Ayācito tatāgacchi, nānuññāto ito gato; Kutoci nūna āgantvā, vasitvā katipāhakaṁ; Itopi aññena gato, tatopaññena gacchati.

쿳다까 니까야 Thig 6.1 빠따짜라의 제자 오백 장로니의 게송 (Pañcasatamattātherīgāthā)

배경

길을 안다는 추상적 조건을 청하지 않은 도착·허락 없는 떠남·며칠의 머묾·서로 다른 길이라는 이동의 이미지로 풀고, 뒤에서는 온 방식처럼 갔다는 대칭으로 통곡을 되묻습니다. 청함 없이 오고 허락 없이 떠난다는 대칭 뒤, 머문 것은 며칠뿐이며 여기와 그곳에서 서로 다른 길로 간다고 합니다. 함께 머문 시간을 내 뜻으로 시작하거나 끝낼 수 없음을 보아, 관계를 영원히 붙드는 마음을 느슨하게 합니다.

묵상

“청하지 않았는데 여기 왔고 허락받지 않고 떠났다”는 대칭 앞에서, 관계의 시작과 끝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나요? 답을 서두르지 말고 함께 머문 한 순간만 기억하거나, 기억이 아프면 지금 여기의 감각으로 돌아와도 될까요?

인간의 모습을 지닌 채 세상을 떠난 그는 윤회하며 계속 길을 갈 것입니다. 온 것처럼 그렇게 갔으니, 거기에 무슨 통곡이 필요하겠습니까?”

Peto manussarūpena, saṁsaranto gamissati; Yathāgato tathā gato, kā tattha paridevanā”.

쿳다까 니까야 Thig 6.1 빠따짜라의 제자 오백 장로니의 게송 (Pañcasatamattātherīgāthā)

배경

청함 없이 왔다가 떠나는 존재의 길을 인간 모습과 윤회의 언어로 정리하며 통곡의 필요를 묻고, 다음 게송에서는 이 말이 어머니 가슴의 보이지 않는 화살을 뽑은 것으로 응답됩니다. 인간 모습으로 떠난 존재가 윤회해 간다고 밝히고, 온 방식처럼 갔다는 대칭으로 통곡의 까닭을 되묻습니다. 사별의 아픔을 꾸짖기보다 오고 감의 보편성을 보게 하여, 붙잡을 수 없는 흐름을 받아들일 여지를 엽니다.

묵상

“온 것처럼 그렇게 갔다”는 문장이 상실을 단순화한다고 느껴진다면 그 불편함도 존중할 수 있나요? 통곡할 필요를 남이 정하게 두지 말고 울기·쉬기·읽기를 멈추기 가운데 지금 안전한 선택을 고를 수 있을까요?

“아, 스승님은 내 가슴에 박혀 좀처럼 보이지 않던 화살을 뽑아 주셨습니다. 슬픔에 사로잡힌 내게서 아들을 잃은 슬픔을 걷어 주셨습니다.

“Abbahī vata me sallaṁ, duddasaṁ hadayassitaṁ; Yā me sokaparetāya, puttasokaṁ byapānudi.

쿳다까 니까야 Thig 6.1 빠따짜라의 제자 오백 장로니의 게송 (Pañcasatamattātherīgāthā)

배경

앞의 가르침을 들은 어머니가 화자로 나서 가슴 깊이 박혀 보이지 않던 화살이 뽑혔다고 말하고, 마지막에는 그 결과를 오늘의 평온과 세 보배 귀의로 넓힙니다. 보이지 않게 심장에 박힌 화살을 뽑았다는 비유와, 자신을 덮었던 아들 잃은 슬픔이 사라졌다는 결과를 잇습니다. 상실 자체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이 박혀 계속 찌르던 집착의 고통이 지혜로 덜어진 변화를 말합니다.

묵상

“내 가슴에 박혀 좀처럼 보이지 않던 화살”이라는 비유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슬픔도 실제 상처처럼 존중받아야 한다고 느끼나요? 내 상처를 이름 붙여도 좋고, 말하고 싶지 않다면 보호한 채 이 비유만 지나가도 될까요?

오늘 나는 화살이 뽑혀 갈망이 없고 완전히 평온해졌습니다. 성자인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합니다.”

Sājja abbūḷhasallāhaṁ, Nicchātā parinibbutā; Buddhaṁ dhammañca saṅghañca, Upemi saraṇaṁ muniṁ”.

쿳다까 니까야 Thig 6.1 빠따짜라의 제자 오백 장로니의 게송 (Pañcasatamattātherīgāthā)

배경

가슴의 화살이 뽑힌 체험을 “오늘”의 갈망 없음과 평온으로 확인하고 부처님·가르침·승가 세 곳에 귀의하면서, 아들을 잃은 울음에서 시작한 문답을 닫습니다. 오늘 화살이 뽑힌 결과를 갈망 없음과 완전한 평온으로 밝히고, 부처·가르침·승가 세 곳에 귀의한다고 합니다. 슬픔에서 벗어난 경험이 자신을 도운 지혜와 그 길을 잇는 공동체에 대한 신뢰로 이어집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입니다.

묵상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라는 세 귀의처는 혼자 견디지 않는 방향을 보여 줘요. 지금 의지할 사람·말·공동체 중 하나가 있나요? 종교적 귀의가 낯설다면 믿을 수 있는 관계 하나를 확인하거나, 아무것도 고르지 않아도 괜찮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