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마 장로니의 게송

아름다움의 유혹과 덧없음을 놓고 마라와 주고받은 문답입니다.

“그대는 젊고 아름다우며 나 역시 젊은 청년입니다. 케마여, 오십시오. 다섯 악기로 이루어진 음악을 들으며 우리 함께 즐깁시다.”

“Daharā tvaṁ rūpavatī, ahampi daharo yuvā; Pañcaṅgikena turiyena, ehi kheme ramāmase”.

쿳다까 니까야 Thig 6.3 케마 장로니의 게송 (Khemātherīgāthā)

배경

문답은 마라가 자신과 케마의 젊음을 내세워 다섯 악기의 음악을 함께 즐기자고 권하는 말로 열리고, 다음 표시 대목에서 케마는 몸의 부패와 갈애 소멸로 답합니다. 상대와 자신이 모두 젊다는 점을 내세우고, 케마를 직접 불러 다섯 악기의 음악과 쾌락을 함께 누리자고 유혹합니다. 젊음과 아름다움, 음악을 근거로 감각적 즐거움에 끌어들이는 목소리가 먼저 제시됩니다.

묵상

젊음과 “다섯 악기로 이루어진 음악”을 한데 묶은 유혹에서, 즐거운 분위기가 선택을 재촉하는 순간을 알아볼 수 있나요?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하기 전 몸의 반응을 확인하고, 판단하고 싶지 않으면 대답을 미뤄도 될까요?

“썩어 가고 병들고 쉽게 부서지는 이 몸이 나는 지긋지긋하고 부끄럽습니다. 감각적 욕망을 향한 갈애는 뿌리째 뽑혔습니다.

“Iminā pūtikāyena, āturena pabhaṅgunā; Aṭṭiyāmi harāyāmi, kāmataṇhā samūhatā.

쿳다까 니까야 Thig 6.3 케마 장로니의 게송 (Khemātherīgāthā)

배경

케마는 젊음의 유혹에 몸의 부패·질병·붕괴와 뿌리 뽑힌 갈애로 답합니다. 바로 뒤의 칼·창과 형틀 게송은 앞서 셀라의 노래에서 온전히 들은 같은 응답이므로, 여기서는 이 거절에서 마라의 패배 선언으로 곧장 이어집니다. 몸을 부패·질병·붕괴의 세 성질로 보고 염증과 부끄러움을 느끼며, 감각적 갈애가 완전히 제거됐다고 응답합니다. 유혹이 기대는 몸의 아름다움을 무상한 실제 성질로 보아, 감각적 욕망이 더는 힘을 얻지 못합니다. 뒤의 한 게송은 이 문헌에서 앞서 온전히 실은 같은 게송을 그대로 되풀이합니다. 여기서는 같은 문장을 거듭 적지 않았으므로, 앞의 온전한 게송과 이어 읽으십시오.

묵상

“썩어 가고 병들고 쉽게 부서지는” 세 성질을 외모 혐오가 아니라 변하는 몸의 사실로 볼 수 있나요? 몸을 평가하는 생각이 커진다면 관찰을 멈추고 편안함을 돌보거나, 세 말 가운데 덜 거친 하나만 남겨도 될까요?

즐김은 모든 면에서 무너졌고 어둠의 덩어리는 산산이 깨졌습니다. 악한 자여, 이렇게 아십시오. 죽음을 가져오는 자여, 그대는 패배했습니다.”

Sabbattha vihatā nandī, tamokhandho padālito; Evaṁ jānāhi pāpima, nihato tvamasi antaka.

쿳다까 니까야 Thig 6.3 케마 장로니의 게송 (Khemātherīgāth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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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마가 욕망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데 이어 모든 즐김과 어둠의 붕괴를 밝히고 마라의 패배를 선언하며, 다음에는 화자가 과거 별과 제사의 불을 섬긴 일을 회고합니다. 모든 즐김의 소멸과 무명의 파괴를 밝힌 뒤, 악한 자이자 죽음을 가져오는 자를 두 번 불러 패배를 선언합니다. 욕망과 무지가 사라진 마음에는 마라가 붙잡을 자리가 없으며,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자유가 드러납니다.

묵상

“죽음을 가져오는 자여, 그대는 패배했습니다”라는 직접 호명은 유혹과 자신을 분리해요. 내 마음을 흔드는 생각 하나를 나 자체가 아닌 지나가는 목소리로 불러 볼 수 있나요? 맞서기 힘들다면 이름 붙이지 않고 거리를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할까요?

“별들에게 예배하고 숲에서 제사의 불을 섬기면서도 사물의 참된 모습을 알지 못한 어리석은 나는 그것을 청정이라 여겼습니다.

Nakkhattāni namassantā, aggiṁ paricaraṁ vane; Yathābhuccamajānantā, bālā suddhimamaññatha.

쿳다까 니까야 Thig 6.3 케마 장로니의 게송 (Khemātherīgāth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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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와의 문답이 끝난 뒤 케마는 별에 절하고 숲의 제사 불을 섬기면서 그것을 청정이라 오해한 과거를 돌아보며, 마지막에는 예배의 대상을 깨달은 분으로 바꿉니다. 별 숭배와 숲의 불 섬김을 들고, 참모습을 몰랐기 때문에 그 의례를 청정이라고 잘못 여겼다고 합니다. 바깥 대상과 의례에 의지하던 믿음이 실제 앎을 대신할 수 없었음을 돌아봅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참된 모습을 알지 못한”입니다.

묵상

별과 숲의 불을 섬기며 “참된 모습을 알지 못한” 채 청정이라 여겼다는 고백에서, 아름다운 형식과 실제 이해를 어떻게 구별할까요? 익숙한 의식 하나의 뜻을 다시 묻거나, 그 의식이 위안이 된다면 유지해도 될까요?

그러나 이제 나는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완전히 깨달으신 분께 예배합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모든 괴로움에서 풀려났습니다.”

Ahañca kho namassantī, sambuddhaṁ purisuttamaṁ; Pamuttā sabbadukkhehi, satthusāsanakārikā”ti.

쿳다까 니까야 Thig 6.3 케마 장로니의 게송 (Khemātherīgāthā)

배경

별과 제사의 불을 청정으로 여겼던 과거에 맞서 이제는 완전히 깨달은 분께 예배하고 그 가르침을 실천해 모든 괴로움에서 풀렸다고, 예배의 전환으로 노래를 닫습니다. 예전의 별과 불 대신 완전히 깨달은 분께 예배한다고 대조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행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고 합니다. 청정의 기준을 의례에서 괴로움을 실제로 끝내는 지혜와 실천으로 옮깁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모든 괴로움에서 풀려났습니다”입니다.

묵상

“모든 괴로움에서 풀려났다”는 결과보다 그 앞의 예배 대상 변화와 실제 실천에 눈을 두면 무엇이 보이나요? 존중하는 가치가 행동과 맞닿는 한 지점을 살피거나, 아직 방향이 없다면 찾지 않은 채 머물러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