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빠자빠띠 고따미 장로니의 게송

부처님과 낳고 길러 준 이들을 기리며 마지막 몸의 해방을 선언합니다.

“영웅이신 부처님, 그대께 예경합니다. 모든 존재 가운데 가장 높으신 분이여, 그대는 나를 괴로움에서 풀어 주셨고 수많은 다른 사람도 풀어 주셨습니다.”

“Buddha vīra namo tyatthu, sabbasattānamuttama; Yo maṁ dukkhā pamocesi, aññañca bahukaṁ janaṁ.

쿳다까 니까야 Thig 6.6 마하빠자빠띠 고따미 장로니의 게송 (Mahāpajāpatigotamītherīgāthā)

배경

고따미는 부처님을 영웅이자 모든 존재의 으뜸으로 부르고 자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괴로움에서 풀어 준 일을 찬탄하며, 다음에는 그 해방을 네 진리의 구조로 풉니다. 부처님을 영웅과 모든 존재의 으뜸이라는 두 호칭으로 부르고, 자신과 많은 다른 이를 괴로움에서 해방했다고 찬탄합니다. 개인의 해방을 넘어 수많은 존재에게 길을 연 스승의 보편적인 이로움에 감사를 표합니다.

묵상

“나”와 “수많은 다른 사람”을 함께 풀어 주었다는 찬탄에서, 개인의 도움과 공동의 이익이 겹치는 모습을 보나요? 나만 편해지는 길과 주변도 덜 괴로운 길을 비교해 보거나, 지금은 자신의 안전을 먼저 택해도 될까요?

모든 괴로움을 완전히 알았고 그 원인인 갈애는 말라 버렸습니다. 여덟 요소의 길을 닦았으며 소멸을 내가 직접 만났습니다.

Sabbadukkhaṁ pariññātaṁ, Hetutaṇhā visositā; Bhāvito aṭṭhaṅgiko maggo, Nirodho phusito may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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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앞의 괴로움 해방을 괴로움의 앎·원인인 갈애의 마름·여덟 요소 길의 계발·소멸의 직접 만남이라는 네 관계로 분해하고, 다음에는 무지 속 여러 가족 역할을 회고합니다. 괴로움을 알고, 원인인 갈애를 말리고, 여덟 요소의 길을 닦고, 소멸을 만나는 네 진리의 관계를 순서대로 말합니다. 괴로움의 이해에서 원인의 버림과 길의 계발을 거쳐 소멸의 실현까지 수행이 완결됩니다.

묵상

괴로움, “그 원인인 갈애”, 여덟 요소의 길, 소멸이 순서 있게 놓여 있어요. 지금 경험을 원인과 반응으로 나눠 볼 수 있나요? 원인을 자신 탓으로 돌리지 말고 조건 하나만 보거나, 분석보다 위로가 필요하면 그쪽을 골라도 될까요?

예전에 나는 어머니였고 아들이었으며, 아버지였고 형제였으며 할머니이기도 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알지 못해 쉴 곳 없이 윤회했습니다.

Mātā putto pitā bhātā, ayyakā ca pure ahuṁ; Yathābhuccamajānantī, saṁsariṁhaṁ anibbisa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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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네 진리를 직접 만난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가 어머니·아들·아버지·형제·할머니였던 다섯 역할을 열거하고, 참모습을 몰라 윤회했다고 한 뒤 다음에는 마지막 몸을 선언합니다. 과거의 역할을 어머니·아들·아버지·형제·할머니의 다섯 가지로 열거하고, 무지 때문에 끝없이 윤회했다고 합니다. 성별과 관계의 역할을 바꾸어 거듭 살아도 참모습을 모르면 안정된 피난처를 찾지 못함을 돌아봅니다.

묵상

어머니이자 아들이고 아버지·형제·할머니였다는 다섯 역할을 보며, 한 존재를 한 관계로만 고정하기 어렵다는 느낌이 드나요? 지금 맡은 역할 하나를 잠시 내려놓아 보거나, 그 역할이 버팀목이라면 그대로 지켜도 될까요?

나는 참으로 그 세존을 뵈었고 이 몸은 마지막 몸입니다. 태어남을 거듭하던 윤회는 다했으니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습니다.

Diṭṭho hi me so bhagavā, antimoyaṁ samussayo; Vikkhīṇo jātisaṁsāro, natthi dāni punabbha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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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수많은 관계 역할로 쉼 없이 윤회한 회고가 세존을 뵌 현재와 마지막 몸·재생 없음의 선언으로 멈추고, 다음 게송은 화합하며 정진하는 제자들의 모습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세존을 뵌 사실과 마지막 몸이라는 선언을 잇고, 태어남의 윤회가 소진되었기에 재생이 없다고 결론짓습니다. 스승을 참되게 본다는 것은 그 가르침을 깨달아 다시 존재를 잇는 조건을 끝냈다는 뜻으로 드러납니다.

묵상

“이 몸은 마지막 몸입니다”라는 선언을 죽음을 재촉하는 말이 아니라 재생의 원인이 끝났다는 문맥으로 읽을 수 있나요? 삶의 끝을 상상하기 불편하면 이 구절을 건너뛰고, 지금 이어 갈 한 돌봄만 선택해도 될까요?

힘을 일으키고 뜻을 굳게 세워 늘 단단히 정진하며, 화합하는 제자들을 보십시오. 이것이 부처님들께 드리는 예경입니다.

Āraddhavīriye pahitatte, Niccaṁ daḷhaparakkame; Samagge sāvake passe, Esā buddhāna vandan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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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자신의 마지막 몸을 밝힌 뒤 힘·굳은 뜻·지속적 정진·화합을 갖춘 제자들을 보라고 청하며 그것을 부처님께 드리는 예경으로 정의하고, 마지막에는 부처님을 낳은 마야를 기립니다. 제자들의 힘찬 노력·굳은 뜻·늘 단단한 정진·화합을 열거하고, 바로 그 모습이 부처들께 올리는 예경이라고 합니다. 말과 의례만이 아니라 함께 부지런히 길을 닦는 공동체의 삶이 스승을 가장 깊이 존중하는 방식입니다.

묵상

“화합하는 제자들”의 힘찬 정진 자체가 예경이라는 말에서, 존경이 말이나 의식보다 함께 잘 살아가는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나요? 오늘 협력할 한 행동을 택하거나, 무리 속이 힘들면 갈등을 만들지 않고 쉬어도 될까요?

“참으로 마야께서는 많은 이의 이익을 위해 고따마를 낳으셨습니다. 그분은 질병과 죽음에 찔린 이들에게서 괴로움의 덩어리를 걷어 내셨습니다.”

Bahūnaṁ vata atthāya, Māyā janayi gotamaṁ; Byādhimaraṇatunnānaṁ, Dukkhakkhandhaṁ byapānudī”ti.

쿳다까 니까야 Thig 6.6 마하빠자빠띠 고따미 장로니의 게송 (Mahāpajāpatigotamītherīgāthā)

배경

화합하는 제자들의 수행을 예경이라 한 뒤, 고따미는 마야가 많은 이의 이익을 위해 고따마를 낳았다고 기리고 그가 병과 죽음에 찔린 이들의 괴로움을 걷었다며 노래를 닫습니다. 마야가 많은 이의 이익을 위해 고따마를 낳았다고 하고, 고따마가 병과 죽음에 찔린 이들의 괴로움을 없앴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탄생이 괴로움의 길을 밝히는 가르침으로 이어져 수많은 존재에게 이익이 되었음을 찬탄합니다.

묵상

“질병과 죽음에 찔린 이들”에게서 괴로움을 걷어 냈다는 이미지는 상처 입은 사람 곁의 도움을 떠올리게 해요. 누군가의 고통을 없애려 하기보다 덜 무겁게 할 한 일이 있나요? 여력이 없으면 자신의 상처를 먼저 돌봐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