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힘쓰십시오.
그렇게 하면 뒤에 뉘우치지 않습니다.
어서 두 발을 씻고
한쪽에 가서 앉으십시오.
Ghaṭetha buddhasāsane, yaṁ katvā nānutappati; Khippaṁ pādāni dhovitvā, ekamantaṁ nisīdatha.
쿳다까 니까야 Thig 7.1 둘째 웃따라 장로니의 게송 (Uttarātherīgāthā) 배경
첫 게송은 앞서 서른 장로니의 노래에서 온전히 들은 절굿공이와 곡식 찧는 장면과 같습니다. 그 생활 노동을 이어 받은 이 대목에서 빠따짜라는 여러 제자에게 발을 씻고 앉아 가르침에 힘쓰라고 방향을 돌립니다. 여럿에게 가르침에 힘쓰라고 권하고, 후회가 없다는 결과 뒤에 발을 씻고 한쪽에 앉는 행동을 순서대로 명합니다. 좋은 뜻만 품는 데 머물지 않고 몸을 정돈해 지금 바로 고요히 앉는 것이 수행의 시작입니다. 앞의 한 게송은 이 문헌에서 앞서 온전히 실은 같은 게송을 그대로 되풀이합니다. 여기서는 같은 문장을 거듭 적지 않았으므로, 앞의 온전한 게송과 이어 읽으십시오.
묵상
“그대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힘쓰십시오” 뒤에 곧 두 발을 씻으라는 행동이 붙어요. 추상적인 다짐보다 시작을 돕는 구체적 준비는 내게 무엇인가요? 발 씻기나 자리 정돈을 골라도 좋고, 준비할 힘이 없으면 쉬는 것을 시작으로 삼아도 될까요?
“마음을 굳게 세워
하나로 모으고 훌륭히 안정시키십시오.
조건 지어진 것들을 자아가 아니라
낯선 것으로 살펴보십시오.”
Cittaṁ upaṭṭhapetvāna, ekaggaṁ susamāhitaṁ; Paccavekkhatha saṅkhāre, parato no ca attato”.
쿳다까 니까야 Thig 7.1 둘째 웃따라 장로니의 게송 (Uttarātherīgāthā) 배경
발을 씻고 한쪽에 앉으라는 준비 뒤 마음을 굳게 세워 하나로 모으게 하고, 조건 지어진 것을 자아가 아니라 낯선 것으로 보라는 관찰법을 건넨 다음 제자의 실행으로 넘어갑니다. 먼저 마음을 한곳에 안정시키고, 그 바탕에서 조건 지어진 것들을 자아가 아니라 낯선 것으로 보라고 대조합니다. 집중된 마음으로 몸과 느낌과 생각을 내 것이라 움켜쥐지 않을 때 해방을 여는 통찰이 자랍니다.
묵상
조건 지어진 것을 “자아가 아니라 낯선 것”으로 보라는 말이 감정과 나 사이 작은 여백을 만들 수 있을까요? 지금 떠오른 생각 하나에 ‘내 것’ 대신 ‘온 것’이라고 말해 보거나, 낯설게 보는 방식이 불편하면 평소 표현을 지켜도 될까요?
“나는 빠따짜라의 말과
그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두 발을 씻은 뒤
한쪽에 가서 앉았습니다.”
“Tassāhaṁ vacanaṁ sutvā, paṭācārānusāsaniṁ; Pāde pakkhālayitvāna, ekamante upāvisiṁ.
쿳다까 니까야 Thig 7.1 둘째 웃따라 장로니의 게송 (Uttarātherīgāthā) 배경
빠따짜라의 권고가 끝나고 제자가 화자로 나서 그 말을 들은 뒤 실제로 두 발을 씻고 한쪽에 앉았다고 응답하며, 다음부터 밤의 첫째·가운데·마지막 시각의 결실을 보고합니다. 빠따짜라의 말을 들은 뒤 그가 시킨 그대로 발을 씻고 한쪽에 앉았다고, 권고와 실행을 정확히 대응시킵니다. 스승의 구체적인 가르침을 미루지 않고 몸의 행동으로 옮기며 수행을 시작합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빠따짜라의 말과”입니다.
묵상
“빠따짜라의 말”을 들은 제자가 발 씻기와 앉기를 그대로 해 본 장면에서, 믿을 수 있는 조언을 몸으로 옮긴 경험이 있나요? 한 단계만 시험해 본 뒤 계속할지 정하거나, 내 상황과 맞지 않으면 정중히 거절해도 될까요?
밤의 첫째 시각에는
전생의 삶들을 기억했습니다.
밤의 가운데 시각에는
천상의 눈을 맑혔습니다.
Rattiyā purime yāme, pubbajātimanussariṁ; Rattiyā majjhime yāme, dibbacakkhuṁ visodhayiṁ.
쿳다까 니까야 Thig 7.1 둘째 웃따라 장로니의 게송 (Uttarātherīgāthā) 배경
앉은 제자의 밤을 첫째 시각의 전생 기억과 가운데 시각의 천상의 눈으로 나누고, 다음 게송은 마지막 시각의 어둠 파괴와 세 가지 앎을 갖춘 기상을 이어 줍니다. 밤의 첫째와 가운데라는 두 시각을 나누어, 각각 전생 기억과 천상의 눈의 정화에 정확히 대응시킵니다. 한밤의 집중된 수행이 과거의 삶과 존재들의 오고 감을 보는 두 앎으로 차례로 깊어집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밤의 가운데 시각에는”입니다.
묵상
“밤의 가운데 시각”까지 두 앎이 차례로 익는 흐름은 중간이 아직 끝이 아님을 보여 줘요. 과정 한가운데 있는 일을 성급히 실패라 부르지 않을 수 있나요? 다음 결과를 기다리거나, 피곤하다면 중간에서 멈춰도 괜찮을까요?
밤의 마지막 시각에는
어둠의 덩어리를 산산이 깨뜨렸습니다.
세 가지 앎을 갖춘 이로 일어났으니,
스승님의 가르침을 이루었습니다.
Rattiyā pacchime yāme, tamokhandhaṁ padālayiṁ; Tevijjā atha vuṭṭhāsiṁ, katā te anusāsanī.
쿳다까 니까야 Thig 7.1 둘째 웃따라 장로니의 게송 (Uttarātherīgāthā) 배경
첫째와 가운데 시각의 두 앎에 마지막 시각의 어둠 파괴가 더해져 정확히 세 가지 앎이 되고, 이어지는 마지막 게송에서 제자는 스승을 삭까에 비유해 앞세우겠다고 말합니다. 마지막 시각에 무명을 깨뜨린 뒤 정확히 세 가지 앎을 갖추어 일어났고, 스승의 지시를 완수했다고 합니다. 배운 대로 밤을 온전히 닦은 수행이 무지를 끝내고 가르침의 목적을 직접 성취합니다.
묵상
“세 가지 앎을 갖춘 이로 일어났다”는 밤의 끝을 읽을 때, 잠들기 전과 깨어난 뒤 달라진 작은 이해가 떠오르나요? 특별한 통찰이 없어도 몸의 상태 한 가지만 확인하거나, 오늘 아침을 평가하지 않고 시작해도 될까요?
“삼십삼천 신들이 전투에서 패하지 않는
삭까를 앞세우듯,
나도 스승님을 앞세워 살겠습니다.
나는 세 가지 앎을 갖추고 번뇌가 없습니다.”
Sakkaṁva devā tidasā, saṅgāme aparājitaṁ; Purakkhatvā vihassāmi, tevijjāmhi anāsavā”.
쿳다까 니까야 Thig 7.1 둘째 웃따라 장로니의 게송 (Uttarātherīgāthā) 배경
세 시각의 결실을 얻은 제자가 삼십삼천 신들이 불패의 삭까를 앞세우는 장면에 빗대 빠따짜라를 앞세우겠다고 하고, 세 앎과 번뇌 없음으로 일곱 게송의 응답을 닫습니다. 삼십삼천 신들이 불패의 삭까를 앞세우는 데 빗대 스승을 높이며, 자신의 세 앎과 번뇌 없음을 선언합니다. 스스로 결실을 이룬 뒤에도 길을 가르친 스승을 잊지 않는 감사와 존경을 표현합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삼십삼천 신들이”입니다.
묵상
삼십삼천 신들과 삭까의 비유로 스승을 앞세우면서도 제자는 자신의 세 앎을 직접 말해요. 감사와 자기 책임을 함께 세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도움받은 몫만 인정하거나, 혼자 해낸 몫만 먼저 인정해도 괜찮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