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빠짤라 장로니의 게송

천상 세계를 권하는 마라에게 그 세계의 덧없음과 해방으로 답합니다.

“알아차리고 눈 밝으며 감각 기능을 잘 닦은 그 비구니는, 못된 이들이 가까이하지 않는 평화로운 경지를 꿰뚫었습니다.”

“Satimatī cakkhumatī, bhikkhunī bhāvitindriyā; Paṭivijjhi padaṁ santaṁ, akāpurisasevitaṁ”.

쿳다까 니까야 Thig 7.3 우빠짤라 장로니의 게송 (Upacālātherīgāthā)

배경

우빠짤라의 문답은 알아차림·밝은 눈·닦인 감각 기능을 갖춘 비구니가 못된 이들이 닿지 못하는 평화를 꿰뚫었다는 서술로 시작하고, 뒤이어 마라가 태어남과 쾌락을 권합니다. 알아차림·밝은 시야·닦인 감각 기능을 갖춘 비구니가, 못된 사람이 가까이하지 않는 평화의 경지를 통찰했다고 합니다. 마음을 흐리는 습관을 따르지 않고 감각을 잘 지킬 때 범속한 욕망이 닿지 못하는 평화를 압니다.

묵상

“못된 이들이 가까이하지 않는 평화로운 경지”라는 보호된 공간의 이미지에서, 내게 필요한 경계는 벽·거리·사람 중 무엇인가요? 안전을 위해 하나를 택하거나, 경계를 정할 수 없다면 잠시 대화를 끝내는 것도 가능할까요?

“그대는 어찌하여 태어남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태어나면 감각적 욕망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감각적 욕망들을 마음껏 누리십시오. 뒤에 후회하는 이가 되지 마십시오.”

“Kiṁ nu jātiṁ na rocesi, jāto kāmāni bhuñjati; Bhuñjāhi kāmaratiyo, māhu pacchānutāpinī”.

쿳다까 니까야 Thig 7.3 우빠짤라 장로니의 게송 (Upacālātherīgāthā)

배경

평화에 머문 우빠짤라에게 마라는 태어나야 감각적 욕망을 누린다며 지금 즐겨 뒤에 후회하지 말라고 유혹하고, 다음 게송에서 그녀는 태어남에 따르는 죽음과 폭력을 열거합니다. 태어남을 싫어하는 이유를 묻고, 태어나야 욕망을 누린다는 인과를 내세워 지금 즐기고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고 유혹합니다. 마라는 재생에 따르는 괴로움은 감추고 당장의 쾌락만 내세워 다시 태어남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합니다.

묵상

“뒤에 후회하지 마십시오”라며 지금 쾌락을 재촉하는 말은 선택할 시간을 줄이는 방식처럼 보여요. 서둘러 결정하게 하는 제안 앞에서 잠깐 멈출 수 있나요? 즐거움을 거부하지 않더라도 대답을 늦추는 권리를 지켜도 될까요?

“태어난 이에게는 죽음이 닥치며 손과 발이 잘리는 일도 닥칩니다. 살해와 결박과 온갖 괴로움을 겪으니, 태어난 이는 괴로움에 이릅니다.”

“Jātassa maraṇaṁ hoti, hatthapādāna chedanaṁ; Vadhabandhapariklesaṁ, jāto dukkhaṁ nigacchati.

쿳다까 니까야 Thig 7.3 우빠짤라 장로니의 게송 (Upacālātherīgāth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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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가 약속한 감각적 즐거움에 우빠짤라는 죽음·손발 절단·살해·결박·온갖 고통을 맞세워 태어난 존재의 위험을 밝히고, 다음에는 태어남을 넘어서는 부처님의 길을 제시합니다. 태어남 뒤의 죽음·손발 절단·살해·결박·고통을 빠짐없이 열거하고, 태어난 이는 괴로움을 겪는다고 결론짓습니다. 쾌락만 골라 보여 주는 유혹에 맞서 태어남이 노출시키는 폭력과 상실의 가능성 전체를 봅니다.

묵상

손과 발이 잘리고 살해와 결박을 겪는 거친 목록은 읽지 않고 넘어가도 괜찮아요. 이 장면을 계속 본다면 쾌락만 내세운 제안이 감춘 비용이 무엇인지 멀리서 살펴볼까요? 불안이 올라오면 화면을 닫고 현재의 안전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사꺄 가문에 태어난 패배를 모르는 완전히 깨달으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태어남을 넘어서는 가르침을 나에게 일러 주셨습니다.

Atthi sakyakule jāto, sambuddho aparājito; So me dhammamadesesi, jātiyā samatikkamaṁ.

쿳다까 니까야 Thig 7.3 우빠짤라 장로니의 게송 (Upacālātherīgāthā)

배경

태어남의 폭력에 맞서 사꺄 가문의 부처님이 태어남을 넘어서는 길을 가르쳤다고 답합니다. 뒤의 네 진리·세 가지 앎·마라 패배 세 게송은 바로 앞 짤라의 답에서 온전히 들은 같은 말이므로, 여기서는 이 가르침이 그 결론까지 품습니다. 태어난 존재의 괴로움과 대조해 사꺄 가문의 불패인 부처를 들고, 그가 재생을 초월하는 가르침을 폈다고 합니다. 쾌락이 더 나은 재생을 약속하는 길과 달리, 가르침은 태어남의 반복 자체를 끝내는 방향을 엽니다. 뒤의 3게송은 이 문헌에서 앞서 온전히 실은 같은 게송을 그대로 되풀이합니다. 여기서는 같은 문장을 거듭 적지 않았으므로, 앞의 온전한 게송과 이어 읽으십시오.

묵상

“태어남을 넘어서는” 가르침을 현실의 삶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반복되는 괴로움의 원인을 끝내는 길로 읽을 수 있나요? 지금 끊고 싶은 반복 하나만 알아보거나, 삶과 죽음의 말이 무거우면 이 질문을 접어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