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행을 갖추고
감각 기능을 잘 지키는 비구니는
더 보탤 것 없이 감미롭고 생기를 주는
평화로운 경지를 실현합니다.”
“Bhikkhunī sīlasampannā, indriyesu susaṁvutā; Adhigacche padaṁ santaṁ, asecanakamojavaṁ”.
쿳다까 니까야 Thig 8.1 시수빠짤라 장로니의 게송 (Sīsūpacālātherīgāthā) 배경
시수빠짤라의 노래는 계행과 감각 기능의 보호가 더 보탤 것 없이 감미롭고 생기 있는 평화로 이어진다고 열고, 다음에는 마라가 다섯 하늘을 차례로 권합니다. 계행의 완성과 감각 기능의 절제를 조건으로 두고, 감미롭고 생기를 주는 평화의 경지를 얻는다고 합니다. 감각을 억압하는 메마른 삶이 아니라 잘 지킨 마음에서 어떤 자극보다 깊고 온전한 평안이 드러납니다.
묵상
“감미롭고 생기를 주는 평화”라는 맛의 비유는 고요가 무기력과 다를 수 있음을 보여 줘요. 쉬고 난 뒤 오히려 생기가 돌아온 경험이 있나요? 없다면 억지로 고요해지려 하지 말고 지금 필요한 자극을 적당히 택해도 될까요?
“삼십삼천과 야마천의 신들,
도솔천의 신들, 창조를 즐기는 화락천의 신들,
남이 창조한 것을 지배하는 타화자재천의 신들이 있습니다.
그대가 전에 살았던 그런 곳에
마음을 두십시오.”
“Tāvatiṁsā ca yāmā ca, tusitā cāpi devatā; Nimmānaratino devā, ye devā vasavattino; Tattha cittaṁ paṇīdhehi, yattha te vusitaṁ pure”.
쿳다까 니까야 Thig 8.1 시수빠짤라 장로니의 게송 (Sīsūpacālātherīgāthā) 배경
평화를 실현한 비구니에게 마라는 삼십삼천·야마천·도솔천·화락천·타화자재천의 다섯 하늘을 열거하며 전에 살던 그곳에 마음을 두라고 유혹하고, 뒤에서 같은 목록이 반박을 위해 반복됩니다. 삼십삼천·야마천·도솔천·화락천·타화자재천의 다섯 하늘을 열거하고, 전에 살던 그곳에 마음을 두라고 유혹합니다. 마라는 거친 쾌락 대신 더 높은 천상의 삶과 과거의 익숙함을 미끼로 존재에 대한 갈망을 되살리려 합니다.
묵상
다섯 하늘 가운데 “남이 창조한 것을 지배하는 타화자재천”까지 점점 화려해지는 제안을 보며, 과거에 좋았던 곳으로 돌아가라는 유혹을 느끼나요? 추억을 존중하되 돌아가지 않거나, 잠시 기억 속에 머물렀다가 현재로 와도 될까요?
“삼십삼천과 야마천의 신들,
도솔천의 신들, 창조를 즐기는 화락천의 신들,
남이 창조한 것을 지배하는
타화자재천의 신들은…”
“Tāvatiṁsā ca yāmā ca, tusitā cāpi devatā; Nimmānaratino devā, ye devā vasavattino.
쿳다까 니까야 Thig 8.1 시수빠짤라 장로니의 게송 (Sīsūpacālātherīgāthā) 배경
시수빠짤라는 마라가 든 삼십삼천부터 타화자재천까지 다섯 하늘을 하나도 빼지 않고 되받아, 다음 게송에서 그 신들조차 개별 존재를 넘지 못하고 생사를 돈다고 반박합니다. 마라가 든 것과 똑같은 다섯 하늘을 한 곳도 빼지 않고 되풀이하여, 그들의 한계를 다음 말에서 밝힐 준비를 합니다. 매혹적인 이름만으로 천상의 존재를 이상화하지 않고 그곳의 삶도 조건 지어졌는지 살핍니다.
묵상
상대가 든 “삼십삼천과 야마천”부터 다섯 하늘을 정확히 되풀이하는 태도에서, 말을 제대로 들은 뒤 반박하는 힘이 보이나요? 동의하지 않는 말도 먼저 요약해 보거나, 대화가 안전하지 않다면 반박 없이 떠나도 될까요?
때마다, 삶에서 또 다른 삶으로 옮겨 가며
개별 존재를 앞세웁니다.
그들은 그 개별 존재를 넘어서지 못한 채
태어남과 죽음 속을 윤회합니다.
Kālaṁ kālaṁ bhavābhavaṁ, sakkāyasmiṁ purakkhatā; Avītivattā sakkāyaṁ, jātimaraṇasārino.
쿳다까 니까야 Thig 8.1 시수빠짤라 장로니의 게송 (Sīsūpacālātherīgāthā) 배경
다섯 하늘의 신들도 삶에서 삶으로 옮기며 개별 존재를 앞세워 태어남과 죽음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계를 밝히고, 다음에는 시야를 온 세상이 타고 흔들리는 모습으로 넓힙니다. 그 신들도 삶에서 삶으로 옮기며 자기 존재를 앞세우고, 그것을 넘지 못해 생사를 윤회한다고 부정과 결과를 잇습니다. 아무리 미세하고 즐거운 하늘이라도 자아와 존재를 붙드는 한 태어남과 죽음의 범위 안에 있습니다.
묵상
높은 하늘의 존재들도 “태어남과 죽음 속을 윤회한다”는 말은 지위가 근본 안전을 주지 못함을 보여 줘요. 더 높은 자리와 덜 흔들리는 삶 중 무엇을 원하는지 살피거나, 지금은 현실적인 안정을 우선해도 될까요?
온 세상이 불붙었고,
온 세상이 환히 타오릅니다.
온 세상이 활활 불타며,
온 세상이 뒤흔들립니다.
Sabbo ādīpito loko, sabbo loko padīpito; Sabbo pajjalito loko, sabbo loko pakampito.
쿳다까 니까야 Thig 8.1 시수빠짤라 장로니의 게송 (Sīsūpacālātherīgāthā) 배경
하늘들의 불안정을 온 세상으로 확장해 “온 세상”을 네 번 주어로 세우고 불붙음·타오름·활활 탐·뒤흔들림을 겹친 뒤, 다음에는 흔들리지 않는 가르침과 대비합니다. 온 세상이라는 주어를 네 번 반복해 불붙음·타오름·활활 탐·흔들림의 네 상태를 차례로 강조합니다. 감각계뿐 아니라 모든 조건 지어진 세계가 갈애의 열기와 변화에서 안전하지 않음을 봅니다. 이때 흐름을 가르는 말은 “온 세상이”입니다.
묵상
“온 세상이” 네 번 되풀이되며 불타고 흔들리는 장면이 압도적으로 느껴질 수 있어요. 지금 실제로 안전한 한 구석을 찾아 시야를 좁혀 볼까요? 세상 전체를 책임지지 않고 오늘 닿는 작은 범위만 돌봐도 괜찮을까요?
부처님은 흔들리지 않고 견줄 수 없으며
평범한 사람들이 가까이하지 못하는 가르침을 일러 주셨습니다.
바로 그 경지에서
내 마음은 기쁨을 누립니다.
Akampiyaṁ atuliyaṁ, aputhujjanasevitaṁ; Buddho dhammamadesesi, tattha me nirato mano.
쿳다까 니까야 Thig 8.1 시수빠짤라 장로니의 게송 (Sīsūpacālātherīgāthā) 배경
불타고 흔들리는 온 세상에 맞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흔들림 없고 견줄 수 없는 경지로 제시하며 마음이 그곳을 기뻐한다고 합니다. 뒤의 세 앎과 마라 패배 두 게송은 짤라의 답에서 온전히 들은 같은 결말이라 그 기쁨에 이어 읽습니다. 가르침을 흔들림 없음·비교 불가·범부가 가까이하지 않음으로 설명하고, 자신의 마음은 그곳을 즐긴다고 대조합니다. 흔들리는 여러 존재 세계를 버리고 조건에 휘둘리지 않는 열반을 마음의 참된 기쁨으로 삼습니다. 뒤의 2게송은 이 문헌에서 앞서 온전히 실은 같은 게송을 그대로 되풀이합니다. 여기서는 같은 문장을 거듭 적지 않았으므로, 앞의 온전한 게송과 이어 읽으십시오.
묵상
“흔들리지 않고 견줄 수 없는” 경지와 온 세상의 흔들림이 맞서 있어요. 바깥 상황을 멈출 수 없을 때 내 안이나 관계에서 지킬 한 기준이 있나요? 기준이 떠오르지 않으면 흔들리는 몸을 지지대에 기대게 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요?